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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적인 삶

 

집단은 개인과 개인이 만들어내는 온갖 불협화음들의 집합소다.

사회는 그 집단으로 꽉 들어찬 물리적 공간이다.

 

그런데 우리는 자주 이 단순한 사실을 잊어버리고는

'사회'에게 순결과 유의미라는 단단하고 고결한 메타포를 덧씌운다.

그래서 고유한 '개인'은 그 의미에 기댄채

마치 그것이 지구의 탄생과 동시에 시작된 의무라도 되는양 붙들고 마냥 힘들어한다.

 

아, 이 안타까운 상황은

결국 우리 스스로 파놓은 구덩이에 지나지 않는다는 진실은

그래서 선반 위 손닿지 않는 곳에 존재하고 마는 것이다.

 

책 속에는 남자 주인공의 일상적 고민이 들어있다.

비록, 평범하지 않은(세상 그 어디에도 '평범한' 사람은 존재하지 않겠지마는) 재주와 별다른 어려움없이 중산층으로 편입해왔던 행로 위에서 펼쳐지는 고민들이겠으나

그 누가, 사랑과 욕망, 정체성과 늙어가는 것에 대한 보편적 고민에 초연하겠는가!

어떠한 존재도 비껴갈 수 없는 평범한 고민들을 이 책은 간결하고 딱 부러지는 문장으로 보여준다. 잘된 번역이라는 생각과 기자 출신 작가라는 점도 한몫했을거라는 추측;;

 

주인공은 끊임없이 고민하고 머뭇거린다.

그러다 달리는 기관차가 제 속도를 이기지 못해 계속 질주할 수 밖에 없는 상황에 이르더라도 그는 당황하지 않는다.

그럴땐 눈을 번쩍 떠 꿈 속을 빠져 나오면 간단하므로.

그렇게 삶은 단순하고 개인은 영원하다.

 

그는 자신을 이해시키려 또 타인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려고도 하지 않는데

아마도 '사회'와 '집단'이라는 마법의 주술은  선반 위 진실에 손이 닿는 순간 풀리게 된다는 사실을 이미 눈치챘을 것임에 분명하다.

 

대신 그는 프랑스 50년대 말 드골의 시대로부터 현재 시라크의 시대까지, 일어났던 그리고 일어나고 있는 다방면의 사건들과 정치, 문화적 가쉽들에 손을 뻗어 자기 이야기에 은근슬쩍 녹여낸다.

한국식으로 하자면, 80년대 전원일기와 유전무죄무전유죄 사건을 거쳐, 90년대 연세대사태, 거기에 서태지와 아이들의 등장, 2000년 들어서의 노무현탄핵사태가 주인공의 심경속에 끼어들고 묘사되는 식인거다.

 

하지만 이야기는 고작 이게 다이다.

한 남자가 있었고, 그는 질풍노도의 유년시절을 거쳐 가정을 이루었으며 그러다 나이가 들어 아이들도 곁을 떠나고 그래서 외로웠고 새로운 여자를 만나기도 한다.

 

그리고 이어지는 남루한 일상..

그러나 주인공 가족의 잇단 죽음과 병고로 인해 집합소의 인생이 정녕 이렇게 끝장나고 마는 것인가..... 한다면, 큰 오산이다.

그는 다시 낮이면 정원사의 일상에서 관목들과 정체성을 찾아가는 끝없는 대화를 나눌 것이며

상투적 이해관계가 맞는 로르를 만나 어두컴컴한 사진작업실에서 섹스를 할 것이다.

그리고 밤이 되면 정신병원에서 눈뜬채 잠든 마리를 찾아갈 것이다.

 

해피엔딩은 끝나지만

그의 이야기는 현재 진행형이다.

 

책 속 표현을 한 대목만 인용하자.

그는 거기 있고 우리는 여기에 있다.

그리고 그와 우리는 그 거리를 존중해주면 된다.

 

주제는 간명하다.

이야기는 계속된다.

 

c'est tout mais c'est pe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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