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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월호][경제]자본은 대형투자은행을 원한다_ 메가뱅크 해프닝이 보여주는 남한자본의 금융정책

  • 분류
    경제
  • 등록일
    2011/06/24 17:02
  • 수정일
    2011/06/24 17:29
  • 글쓴이
    사노신
  • 응답 RSS

지난 14일 금융위원회는 국회 정무위원회 업무보고에서 “산은지주가 우리금융 입찰에 바람직하지 않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로써 지난달 17일 우리금융그룹 민영화 계획 발표 이후 한 달 동안 벌어진 메가뱅크 논란이 끝을 맺었다. 여론의 반대를 무릅쓰고 MB맨 강만수를 위해 관련 법령 개정까지 시도하며 우리금융그룹을 산은금융지주에 넘기려던 정부의 시도는 이렇게 한바탕 해프닝으로 끝났다.

 

정말 모두 메가뱅크에 반대하는가

 

지난 3월 김석동 금융위원장은 이명박의 최측근인 강만수를 삼고초려까지 해가며 산은금융지주 회장으로 모셔 왔다. 이명박 정부 초대 기획재정부 장관을 지낸 강만수는 대표적인 메가뱅크론자로 2008년에 우리은행과 산업은행, 기업은행을 합병하는 계획을 내기도 했다. 그런 그가 산은금융지주 회장이 되자마자 이번에는 우리금융그룹 인수에 욕심을 냈다.
강만수의 메가뱅크 만들기 시도에 노조와 학계는 물론 언론과 정치권까지 반대의 목소리를 높였다. 2008년 세계 금융위기로 금융기관 대형화가 가지는 위험성이 드러났는데 메가뱅크를 추진하는 것은 잘못이라는 것이다. 보수 언론에서도 비판적인 기사를 연일 내보냈다. 민주당은 금융 당국이 함부로 금융지주회사법 시행령을 개정하지 못하도록 해당 시행령을 법률로 격상하는 개정안을 6월 국회에 상정하겠다고 예고했다. 여당인 한나라당에서도 이에 동조하는 목소리가 나올 만큼 강만수의 메가뱅크론은 지지를 받지 못했다.
이런 비판 속에서도 강만수는 꿋꿋이 자신의 지론을 펼쳤다. 외국계 자본의 지분 비율이 높은 다른 금융지주회사에 우리금융그룹을 넘겨줘서는 안 된다며 토종은행론을 들고 나오기도 하고 통일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거대 국책은행이 있어야 한다는 논리까지 내세웠다. 이런 강만수에 대해 정권이 바뀌면 가장 먼저 감옥에 갈 사람이라는 말까지 나올 정도였다.
강만수의 메가뱅크론을 모두들 반대하고 있는 것 같지만, 사실 금융기관 대형화를 통해 경쟁력을 키워야 한다는 논리 자체에 반대하는 사람은 드물다. 자본의 입장에서도 금융 산업을 키우기 위해 대형화가 필요하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는다.
단지 이를 통해 관치 금융적 관행이 되살아나고 기업에 대한 정부의 통제가 강화될 것이 두려워하고 있는 것뿐이다. 남한에서 금융 산업을 키우려는 시도는 예전부터 진행해온 일이다.

 

금융 자유화와 개방

 

△노무현 정부는 남한 자본시장 발달을 촉진
하기 위해 금융허브전략을 세우고 서울과 부
산에 국제금융센터를 짓고 해외자본을 유치
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사진은 여의도에 만들
어질 서울국제금융센터 조감도.

1980년대까지만 해도 남한에서 금융의 역할은 제조업 성장을 돕는 보조적인 것이었다. 사적 자본의 축적이 부족한 상황에서 각 기업은 필요한 자금을 은행 대출을 통해 해결했다. 사실상 국유화되어 있던 금융기관들은 정부가 정한 전략 사업부문에 대규모 자금을 공급했다. 이런 특혜 속에서 재벌이라 불리는 대기업 집단이 탄생할 수 있었다.
금융 산업을 기업에 자금 지원을 하는 곳 정도로 인식했기 때문에 기업을 살리기 위해 금융권을 희생하는 일도 많았다. 예를 들어 1965년 금리자유화 조치 이후 중소기업의 자금사정이 악화되며 부도 위기가 오자 박정희 정부는 1972년 8월, 사채 동결이라는 극단적인 방식을 사용했다. 또 제대로 된 심사 없이 기업 대출을 방만하게 했기 때문에 각 금융기관들은 부실 채권을 차곡차곡 쌓아놓고 있었다.
이 때문에 남한에서는 독립적인 금융자본이 성장하지 못했고, 관치금융 관행으로 인한 정부 관료와 기업 관료 간의 유착과 부패가 항상 심각한 문제로 대두되었다. 노태우 정부 시절 은행에 대한 민영화 작업에 들어가긴 했지만, 정부는 여전히 은행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했고 관치금융의 폐해는 근절되지 않았다.
1980년대 들어 미국과 영국을 중심으로 새로운 금융 흐름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자금 조달 방식에서 주식이나 채권 등 자본시장의 역할이 더 중요해지고 기업간 인수합병이 활발하게 일어나는 등 투자은행의 비중이 커진 것이다. 남한 역시 이런 영미식 금융시스템을 따라 하기 시작했다. 세계화를 모토로 내건 김영삼 정부는 금융 규제 완화와 개방 정책을 펼쳤다. 금융산업을 단지 제조업 성장을 보조하는 자금 중개 기관이 아닌 독자적인 이윤 창출의 공간으로 인식하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김영삼 정부의 금융 자유화 정책은 금융기관들에 단기성 외채가 늘어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런 상황에서 1997년 한보, 기아 등 대기업 부도가 잇따르자 부실을 견디지 못하고 금융회사들이 우르르 무너져 내리는 결과를 초래했다.

 

금융산업을 새로운 성장 동력으로?

 

외환 위기로 남한에는 대규모 구조조정 바람이 불었다. 막대한 부실 채권을 안고 몰락했던 금융기관들은 퇴출되거나 통폐합되었다. 정부는 공적자금을 투여하여 은행들을 일시적으로 다시 국유화하고 강도 높은 구조조정을 시행했다.
금융기관 통폐합을 통해 부실을 희석시키고 금융기관들의 경쟁력을 키우는 것이 김대중 정부의 정책이었다. 두 차례에 걸친 구조조정으로 금융기관들의 수는 대폭 줄어들었다. 김대중 정부는 금융시장 개방에도 적극적이었다. 정부는 국유화된 금융부분을 산업자본에게 넘기는 것이 아니라 해외자본을 끌어 들이는 방식을 채택했다.
공적자금 투입으로 국유화된 제일은행, 서울은행은 구조조정 계획을 세우는 단계에서 이미 해외 매각이 결정되었다. 다른 금융기관들에서 외국계 자본이 차지하는 지분 비율 역시 꾸준히 늘었다.
2000년대 들어서는 금융지주회사를 통한 겸업화가 추진되었다. 하나의 지주회사가 은행, 증권, 보험 등 다양한 업종의 금융회사를 거느릴 수 있게 만든 것이다. 이를 통해 은행업에 비해 자본 집중이 부족한 증권, 보험업계의 대형화를 꾀하려 했다. 그러나 금융지주회사들의 중심은 여전히 상업은행이었고 증권업 대형화는 뜻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예금과 대출금리 차이에서 오는 마진을 주된 수익으로 삼는 은행업만으로는 금융산업을 발달시키는 것에 한계가 있었다. 금융기관이 다양한 방식으로 수익을 창출하는 영미식 시스템으로 발전시키려면 자본시장을 활성화하고 남한의 증권사들을 미국식 투자은행과 같은 형태로 만들 필요가 있었다.
이 과제는 노무현 정부 들어 본격적으로 추진되었다. 2003년 12월 금융허브 전략 발표를 시작으로 노무현 정부는 금융 산업을 새로운 성장 동력으로 만들기 위한 일련의 정책을 추진한다. 자본시장통합법 제정을 통해 은행, 보험업을 제외한 모든 금융 업무를 하나로 통합해 미국식 투자은행이 만들어질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다. 또한 자본시장의 발달을 위해 파생상품 등 고위험 고수익 상품 개발을 장려했다.

 

정권은 바뀌어도 관료는 그대로

 

△ 금융계를 장악한 MB맨들. 김석동과 강만수가 합심해 우리금융그룹을 산은금융지주에 넘기려 하자 다른 측근들은 강만수를 위해 한발 물러서는 모습을 보였다. 왼쪽부터 강만수 산은금융지주 회장, 김석동 금융위원장, 이팔성 우리금융회장, 어윤대 KB금융그룹 회장, 김승유 하나금융그룹 회장.

 

1997년 대통령 선거를 통해 자유주의자들이 정권을 손에 넣었지만, 경제 관료들은 바뀌지 않았다. 이는 노무현 정부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노무현 정부는 모피아라 불리는 재무부 출신 경제 관료들의 수장격인 이헌재를 경제 부총리로 삼았다. 그 외에도 김대중, 노무현 정부 시절 경제 정책을 주도하던 관료들이 이명박 정부에서도 중용된 사례는 무수히 많다.
외환위기 당시 재정경제원 금융정책실장이었던 윤증현은 노무현 정부 때 금융감독위원장으로 있으면서 각종 금융 규제 완화를 주도했고 이명박 정부에서는 기획재정부 장관 자리에까지 올랐다. 현 금융위원장인 김석동 역시 외환위기 당시 재정경제원 외화자금 과장으로 있었으며 노무현 정부에서 재정경제부 1차관을 했던 인물이다. 현 지식경제부 장관인 최중경 역시 노무현 정부에서 재정경제부 국제금융국장으로 있으면서 고환율 정책을 추진했던 인물이다.
이처럼 지난 20년 동안 남한의 금융 정책은 규제 완화와 금융기관 대형화, 겸업화라는 기조 아래 큰 변화 없이 추진되었다. 강만수의 메가뱅크는 그 연장선일 뿐이다. 2008년 세계 금융위기로 금융기관 대형화와 겸업화 허용이 가지는 위험성이 여실히 드러났는데도 관료 집단은 여전히 관성적으로 정책을 추진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 문제가 경제 관료들만의 문제는 아니다. 자본 역시 금융 산업이 영미식으로 재편되기를 바라고 있다. 강만수에 대한 비판이 쏟아지는 것은 그가 추진하는 메가뱅크가 관치금융으로 되돌아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기업 대출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우리은행과 산업은행을 합쳐 거대한 국책 은행을 만들게 되면 자연스레 기업에 대한 정부의 통제가 강화된다. 또한 이는 우리금융지주와 산업은행, 기업은행을 민영화하겠다는 기존 정부의 정책과도 모순된다.

자본이 원하는 것은 투자은행의 탄생

 

남한에서 은행의 대형화는 이미 될 만큼 됐다. 이미 남한의 대형은행들은 업무 영역이나 지점들이 겹치는 곳이 많기 때문에 합병을 한다고 해도 몸집만 더 커질 뿐 아무런 시너지 효과가 없다. 때문에 부르주아 연구기관들은 남한 은행이 국내 시장에 안주하지 말고 해외 시장에 적극적으로 진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 다양한 수익 모델을 개발할 필요를 제기한다.
예금 수납과 대출을 주된 업무로 하는 상업은행은 자본시장을 기반으로 하는 투자은행에 비해 사업의 범위가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또한 상업은행은 투자에 있어서 상대적으로 보수적이다. 남한에서 금융 산업을 키워 이윤을 뽑아내려면 자본시장을 활성화하고 파생상품처럼 위험하지만 높은 수익을 내는 금융 상품을 만들어야 한다. 또 이런 상품에 과감히 투자할 수 있는 투자은행을 만들 필요가 있다.
하지만 남한에서 투자은행과 비슷한 업무를 하고 있는 증권사들의 경우 아직까지는 규모가 작아 미국 투자은행과 같은 업무를 감당할 수가 없다. 상위 5개 증권사들의 자기자본 규모는 미국 투자은행의 1/30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증권사들이 위험 상품에도 과감하게 투자할 수 있을 정도로 자본 규모가 커져야만 자본시장 활성화도 가능하다. 정부의 규제 완화로 고위험 고수익 상품이 대거 시장에 쏟아져 나와도 이를 사는 사람이 없으면 자본시장이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다. 누군가 위험을 떠안으며 불쏘시개 역할을 해야 하는데 해외에서는 투자은행이 그 역할을 맡는다.
증권사 대형화가 이루어지지 않는 상황에서 남한 증권사들은 비슷한 업무 영역에서 저가 출혈 경쟁을 벌이고 있다. M&A와 같은 수익성 높은 사업은 해외 투자은행이 독차지하고 있는 실정이다. 증권사에 대한 규제 완화와 헤지펀드 허용 등을 통해 증권사 대형화를 유도해야 한다는 것이 부르주아 연구기관들의 주장이다.
한마디로 말해 자본에게 지금 절실한 것은 은행 대형화가 아니라 증권사 대형화이다. 그런데 남한 증권사들은 대부분 대기업 집단의 계열사로 있기 때문에 증권사 간 인수합병을 통한 대형화는 불가능하다. 산은금융지주와 우리금융그룹 민영화가 예정대로 진행된다면 자회사인 대우증권과 우리투자증권 매각을 통해 대형 증권사가 만들어질 수 있다. 그런데 강만수가 두 금융지주회사를 하나로 합치겠다고 했으니 자본이 좋아할 리가 없다.

 

금융 대형화는 새로운 위기를 준비한다

 

남한에서 제조업을 통한 경제 성장은 한계에 다다랐다. 남한 수출대기업이 우위를 보이고 있는 산업에서 중국, 인도 등 신흥국이 매섭게 추격하고 있다. 언젠가는 이들과의 경쟁에서 밀릴 것이 예상되고 있다. 또 지나친 수출 의존도로 인해 대외적인 위기에 취약할 수밖에 없는 남한 경제의 고질적인 병폐를 해결하기 위해서라도 산업 구조에 변화를 꾀해야 한다.
경기가 침체 국면에 접어들 때마다 경기 부양의 버팀목으로 활용했던 부동산 시장 역시 더 성장할 가능성이 없다. 부동산 거품이 이미 상당한 수준에 이르렀고 가계부실도 심각한 상황이기에 부동산 가격 상승은 불가능하다. 베이비붐 세대의 은퇴로 부동산 수요도 전보다 줄어들 전망이다. 장기적으로 부동산 가격은 점진적으로 하락할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경제 관료들과 자본은 금융 산업을 새로운 성장 동력으로 생각하고 있다. 금융 산업을 키우려면 자본시장을 활발하게 만들기 위해 규제를 완화하고 금융부문의 문을 활짝 열어 해외 자본을 대거 끌어들여야 한다. 이 일을 강만수가 원하는 바대로 대형 국책은행을 만들어 관료들이 주도하거나 국가 소유의 금융기관 민영화를 통해 민간 자본이 주도권을 쥐느냐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문제는 금융 혁신이니 금융 자유화니 하는 치장을 씌워 금융 산업에 대한 규제를 풀어버리면 얼마 지나지 않아 금융위기가 터지는 일이 빈번했다는 것이다. 초반에는 금융에 대한 투자가 늘면서 경기가 좋아지고 이윤이 늘어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으나 시간이 지나면 이 모든 것이 거품에 불과했다는 것이 드러난다. 이 거품이 무너지면서 위기가 오고 다시 금융 규제 완화로 거품을 만드는 반복적인 순환이 계속될 것이다.
80년대 레이건 정부의 규제 완화 조치는 저축대부조합 부도라는 위기를 불러왔다.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까지 참여해 최신의 금융 기법을 도입했던 LTCM이라는 헤지펀드는 결국 1000억 달러라는 손실을 기록하며 생을 마감했다. 2008년 세계 금융위기 역시 글래스-스티걸 법1) 폐지로 겸업화와 대형화에 대한 규제가 풀리면서 일어났다.
세계 금융위기가 터진지 5년도 채 지나지 않았다. 위기가 올 때마다 그 피해는 노동자와 서민들에게 고스란히 돌아간다는 것은 여전히 생생한 경험으로 남아있다.
 

 

 

각주

1) 글래스스티걸법 [ Glass-Steagal Act ]
미국에서 1933년에 제정된 상업은행에 관한 법률로서 제안의원의 명칭을 따라 글래스 스티걸법이라고 불리고 있다. 서로 다른 금융업종간에 상호진출을 금했던 것이 요지이다. 1929년의 주가폭락과 그에 이은 경제대공황의 배경 가운데 하나로 상업은행의 방만한 경영과 이에 대한 규제장치가 없었다는 점이 지적됨으로써 이에 대한 근본적인 개혁이 이루어졌다. 주요 내용은 지점망의 재조정, 연방예금보험제도의 창설, 예금금리의 상한설정, 연방준비제도의 강화, 투자은행업무로부터의 완전분리 등 이었는데, 그 결과 기업이 발행하는 유가증권 인수업무는 투자은행에만 한정되고 상업은행에 대해서는 일체 금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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