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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거대한 체스판’과 북한의 변화

  • 분류
    정치
  • 등록일
    2015/02/09 16:46
  • 수정일
    2015/02/09 16:50
  • 글쓴이
    사노신
  • 응답 RSS


이탈리아의 정치이론가 그람시는 그의 저작 <옥중수고>에서 “위기는 바로 오래된 것은 죽어가고 있으나 새로운 것은 아직 탄생하지 못한 시기이다. 이러한 공백기에 대단히 다양한 병적 증상들이 나타난다”고 말했다. 2014년 한 해 동안 국제 정세의 난맥상은 그람시의 지적을 떠올리게 한다. 옛 질서와 새 질서가 한데 뒤엉킨 지금의 세계질서는 1991년 소련의 붕괴 이후 미국이 홀로 막강한 힘을 자랑했던 ‘포스트 냉전체제’가 해체되고 있음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미국 역시 미국이 혼자서 영구히 패권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을 모르진 않는다. 미국의 대표적인 외교안보 전략가 브레진스키는 그래서 일찌감치 미국의 역할을 향후 20~30년에 걸쳐 서서히 다른 국가들에 배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 대상은 바로 서유럽과 일본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자본주의적 발전에 대한 ‘우정의 댓가’로 이들이 기존의 무임승차적 자세에서 벗어나 미국 중심의 세계 자본주의 질서의 유지에 필요한 비용을 적극 분담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여기에는 몇 가지 중요한 전제조건이 뒤따랐다. 첫째는 러시아․중국․이란을 중심으로 반미동맹이 등장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고, 둘째는 일본이 절대로 재무장의 길로 들어서면 안 된다는 것이었다. 만약 그럴 경우 미국의 유라시아 전략은 파탄 나게 될 것이라 경고했다. 그러나 현실은 브레진스키가 우려한대로 진행되고 있다. 21세기에 들어서자 미국의 위상은 이라크 전쟁의 거듭된 실패와 2008년 금융위기의 여파로 점차 하향곡선을 그리고 있다. 반면 러시아와 중국의 공조체제는 갈수록 더 견고해지고 있으며, 장기집권 체제를 구축한 아베정권의 질주도 예사롭지 않은 상황이다.

전세계를 무대로 한 ‘그레이트 게임’은 한반도를 비롯한 동아시아 역내 질서에도 그대로 투영되고 있다. 이 와중에 단연 눈에 띄는 건 북한의 거침없는 대외 행보이다. 지난해 북한은 특유의 외교적 유연성을 발휘하며 자신의 존재감을 다시 한 번 각인시켰다. 그 핵심은 지정학적 전략이었다. 동아시아의 어떤 국가도 평양을 거치지 않고서는 동아시아에서 외교를 펼칠 수 없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급속도로 가까워진 북러 관계를 시작으로 그 충격파는 세계질서의 새로운 전환기와 맞물려 현재 동아시아 일대에서 거대한 지각변동을 예고하고 있다. 

 

북한이 마지막으로 꺼내든 ‘러시아 카드’


처음부터 북한이 러시아에 집중한 것은 아니었다. 지난해 여름까지만 해도 북한은 북일 협상에 나름 기대를 걸고 있었다. 작년 5월29일 전격 발표된 북한과 일본 간의 ‘스톡홀름 합의’는 겉으로는 북한의 일본인 납치문제 재조사를 다루고 있지만 실상은 일본을 통한 북미접촉이 핵심이었다. 협상 초반의 분위기도 나쁘지 않았다. 실제로 그해 8월 중순 북한은 미국과 2년여 만에 평양에서 비밀접촉을 가졌다. 하지만 이때부터 이상기류가 감지되기 시작했다. 미국의 태도 변화에 북일 협상도 곧 지지부진해졌다.

북한은 포기하지 않고 미국을 향해 다시 문을 두드렸다. 9월 들어 케네스 배 등 북한에 억류 중인 미국인 3명의 CNN 방송 인터뷰를 내보냈고(북한 억류 미국인 3명은 결국 10월과 11월에 걸쳐 석방되었다), 급기야 강석주와 이수용을 각각 유럽과 뉴욕으로 보내 미국과 막후접촉을 시도했다. 강석주는 1994년 제1차 북핵 위기를 봉합시킨 ‘제네바 합의’ 때 미국과 직접 상대했던 현 북한 외교의 실세이며, 이수용은 유엔 총회에 15년 만에 참석한 북한 외무상이었다. 북한은 중량감 있는 외교 인사들을 급파하며 어떻게 해서든지 반전을 노렸지만 되돌아온 건 미국의 냉대뿐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 미국 오바마 정권은 11월 중간선거를 앞두고 러시아 및 중동 문제로 코너에 몰려 있었다. 우크라이나 사태로 촉발된 러시아와의 갈등은 악화일로를 걸었고, 이라크 및 시리아의 상당 지역을 실질적으로 장악한 이슬람국가(IS)의 등장은 사실상 제3차 이라크 전쟁을 촉발시키며 미국의 중동전략을 전면 재수정토록 강제했다. 가뜩이나 국내 여론으로부터 외교적 무능을 질타당하는 위기상황에서 오바마 정권은 북한 문제만큼은 기존대로 압박정책을 유지하는 것이 더 유리하다고 판단했다.

결국 북한 입장에서 최후의 선택지는 러시아뿐이었다. 미국을 직접 공략하는 것이 끝내 무위에 그치고 일본과의 관계개선도 한계에 부딪친 상황에서 한국이나 중국도 대안이 될 수는 없었다. 특히 중국과의 관계는 2013년 제3차 핵실험 이후 역대 최악이었다. 북한은 곧바로 러시아를 향한 플랜 B를 가동시켰다. 뉴욕에서 별 성과가 없었던 이수용을 서둘러 러시아로 보냈고, 그 다음에는 최룡해를 특사 자격으로 보내 푸틴을 만나 양국 정상회담 개최까지 의제에 올리는 등 북러관계를 급진전시켰다.

북한과 러시아의 관계개선이 급박하게 전개되긴 했지만 전혀 예상치 못한 깜짝 사건은 아니었다. 사실 러시아는 지난해 상반기부터 꾸준히 북한에 손을 내밀고 있었다. 북한의 부채 90%(약100억 달러) 탕감 조치를 시작으로 러시아는 그동안 중국이 독점하다시피 한 북한의 광물자원 개발에도 참여의사를 밝혔다. 당시 북일협상을 통한 북미접촉의 향방을 장담할 수 없는 상황에서 북한이 러시아의 접근을 마다할 이유는 없었다. 오히려 러시아를 한반도 깊숙이 끌어들임으로써 북한은 자신의 전략적 가치를 한껏 더 높였을 뿐 아니라 결과적으로는 그토록 바라던 경제회생의 종자돈까지 기대할 수 있게 되었다. 


경제회생이 절실했던 김정은의 고군분투


지난해 12월17일 김정일 사망 3주기 이후 북한은 본격적인 김정은 시대로 접어들었다. 일부 보수층의 종교적 신념에 가까운 북한붕괴론에도 불구하고 김정은 체제는 지난 3년을 거치면서 확고한 통치 권력을 구축한 것으로 보인다. 지난 십 수 년 간 비상체제로 군림해온 ‘선군정치’에 종지부를 찍고, 당 우위의 국가체제로 복귀하는 ‘선당정치’로 체제질서를 안정적으로 재편한 것은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또한 장성택 처형 때는 북한 내부에서 별다른 동요가 없었다는 점에서 주민 뿐 아니라 핵심권력층까지 효과적으로 통제하고 있음이 재차 확인되었다.

하지만 김정은 체제는 출범과 동시에 막중한 과제도 짊어져야 했다. 그것은 경제회생을 통한 인민생활의 향상이었다. 북한은 김일성 출생 100주년을 맞는 2012년을 강성대국의 원년이라고 주민들에게 대대적으로 선전해왔으나 2011년 12월 김정일의 갑작스런 사망으로 이 약속을 잠시 유예할 수 있었다. 그러나 언제까지나 미룰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북한이 수령 유일 지도체제를 고집하고 있고, 고도로 통제된 폐쇄적 사회라고 하더라도 결국은 경제회생이야말로 체제존속과 직결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김정은은 권좌에 오르자마자 경제발전에 올인하는 모습을 보였다. 선당정치로 당의 제도적 통치 기능이 강화되면서 그동안 당·정·군 등으로 비효율적으로 분산된 경제 부문들을 당 내각 주도의 경제로 일원화하는 작업부터 시작했다. 가장 핵심이라 할 군 경제에 속한 각종 이권 뿐 아니라 장성택 숙청을 계기로 당 행정부 일각에서 특권으로 쥐고 있던 기업소들도 당 내각에 편입시켰다. 이러한 사전 정지작업을 통해 김정은은 북한의 국민경제에 대한 통제권을 확립해가는 동시에 국민경제에 활력을 불어넣기 위해 집권 3년 동안 대단히 빠른 속도로 경제개혁 조치들을 잇달아 내놓았다.
 

특히 지난해 발표된 5.30 조치를 놓고 진징이 베이징대 교수는 “가히 북한의 질적 변화를 예고하는 강령성 문헌”(2014년 10월20일자 <한겨레> 칼럼)이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정책의 집행 결과 현재 북한 사회에서는 생산권, 분배권에 이어 무역권까지 원래 국가 몫이던 권력이 하방되어 공장과 기업의 독자적인 자주경영권이 자리 잡았기 때문이다. 김정은의 적극적인 경제회생 노력은 집권 이후 3년 연속 경제성장률이 1% 가량 플러스 성장세를 유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어느 정도 성공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러나 북한이 시장의 기능을 대폭 수용하는 방향으로 경제조치를 취한 것은 김정일 집권시절에도 이미 있었다. 그때도 지금처럼 박봉주 내각총리가 경제전반을 이끌었다. 2002년 7.1 조치가 대표적이다. 밖으로는 소련의 붕괴와 안으로는 고난의 행군에 직면하여 기존의 국가 주도 자본주의 경제시스템은 치명타를 입은 반면, 이른바 장마당의 활성화로 북한 사회 전반에 시장지향적인 경제관념이 널리 확산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와 같은 경제개혁 조치의 등장은 불가피한 것이기도 했다. 문제는 그때나 지금이나 경제개혁을 성공으로 이끌 자본의 부족이다. 외부 지원이 없다면 지금처럼 당장의 ‘먹는 문제’는 해결할 수 있어도 그 이상은 기대하기 어려운 게 현실이다.

이런 점에서 지난해 11월 최룡해의 방러를 계기로 북한과 러시아 간에 이뤄진 합의내용이 주목을 받고 있다. <시사인>에 따르면 이번 합의에서 양국은 시베리아 철도와 북한 철도의 연결을 시작으로 시베리아 가스관 연결 사업까지 추진하기로 했다. 시베리아 개발에 필요한 산업인력도 북한의 노동인력으로 충당할 예정이다. 하나 같이 천문학적 자금이 소요되는 거대 프로젝트다. 북한으로서는 드디어 막대한 산업자금, 즉 종자돈을 마련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된 셈이다. 물론 러시아가 북한을 지렛대 삼아 극동지역에서 추진하려는 야심찬 계획은 다가올 세계질서의 새로운 재편과 긴밀하게 연동된 것이었다. 


“세계질서의 일극 지배는 실패로 끝났다.”


지난해 5월22일 국제경제포럼이 개최된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발표한 푸틴의 선언이다. 러시아판 ‘다보스포럼’이라는 이 자리에서 푸틴은 시종일관 자신감이 넘치는 모습을 보였다. 미국 중심의 국제질서에 맞선 푸틴의 도전은 지난해 우크라이나 사태로 막이 올랐다. 러시아는 미국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크림반도를 합병했고, 이는 소련의 해체 이후 이 지역에서 처음으로 국경선의 변화를 가져왔다. 굳건해 보였던 ‘포스트 냉전체제’의 질서는 러시아의 완력 과시로 더 이상 먹히지 않게 되었다. 현재 러시아 국경 상공에는 핵전략 폭격기가 재배치되었고, 서방과는 일촉즉발의 군사적 대치 상황이 계속되고 있다.

유라시아 서쪽에서 러시아가 여전한 군사강국으로서 미국과 갈등을 빚고 있다면, 유라시아 동쪽에서는 중국이 경제대국으로서 자신의 힘을 숨기지 않고 있다. 그 분기점은 작년 11월 중국에서 열린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에서였다. 이때 중국은 4조 달러에 이르는 거대한 외환보유고를 밑천 삼아 ‘육상 실크로드 경제벨트’와 ‘21세기 해상 실크로드’의 청사진을 제시했다. 역사적으로 화려했던 당나라 시절의 영광을 재현하겠다는 포부를 밝힌 것이자 이제는 중국이 국제규범의 ‘규칙 제정자’로서 그 위치가 격상되었음을 선포한 것이었다. 동시에 앞으로 아시아 일대에서 미국의 영향력을 최소화하겠다는 중국의 의지가 반영된 것이기도 했다.

유라시아 대륙에서 미국 주도의 세계질서에 대한 러시아와 중국의 반발은 자연스레 양국관계를 굳건하게 만들고 있다. 냉전 시절에도 보기 힘들었던 광경이 오늘날 눈앞에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과거 소련과 중국은 스탈린 사후 서로 반목하는 불편한 관계였다. 심지어 중국은 1979년 미국과 수교하며 소련 봉쇄에 나선 미국에 힘을 실어주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은 러시아와 중국이 손을 잡고 미국에 맞서는 형국이다. 지난해 격화된 우크라이나 사태는 중러 관계를 더욱 가속화시켰다. 산유국 러시아와 공업국 중국의 경제협력은 시너지 효과를 내고 있고, 양국 군사협력은 올해 지중해와 태평양에서 합동 해상훈련을 계획할 정도로 진척되고 있다.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미국은 러시아부터 제압하겠다고 벼르고 있다. 유럽연합과 함께 러시아에 대한 경제제재 조치에 착수한 데 이어 러시아의 핵전력 증강을 빌미로 약 1조 달러에 달하는 핵무기 현대화 작업 계획까지 발표했다. 2009년 ‘핵무기 없는 세계’를 주장하며 노벨 평화상을 선불로 받았던 오바마의 역주행이 시작된 것이다. 이에 반해 중국에 대해선 직접 대립각을 세우기보다는 현재 막바지 단계에 와 있는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타결을 서두르며 우회적인 압박을 시도하고 있다. 당장은 중국봉쇄의 기회로 삼고 나중에 중국이 협정 가입을 희망할 경우에는 미국식 경제체제를 밀어붙여 중국의 체질 변화를 강제하겠다는 심산이다.

해를 넘겨 연일 하락하고 있는 국제유가에도 다분히 미국의 입김이 반영되어 있다는 평가다. 이번 국제유가 급락사태는 명목상 미국의 셰일에너지 고사를 겨냥한 중동 주요 산유국들의 원유 공급과잉으로 촉발되었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미국은 사태를 수수방관할 뿐이다. 저유가 피해의 직격탄을 루블화 폭락 등 러시아가 고스란히 맞고 있기 때문이다. 경제논리만 갖고서는 사태추이를 설명하기 어려운 이유다. 그러나 국제적인 수요위축에 따른 디플레이션의 공포가 엄습해오는 상황에서 언제까지 치킨게임이 계속될지는 미지수다. 만일 러시아 경제가 파국으로 치닫게 된다면 세계 경제에 미칠 후폭풍으로 미국의 전략적 환경은 악화될 수밖에 없다. 저유가를 통해 중국이 국제사회에서 상대적으로 반사이익을 얻는 것 역시 미국이 보기에 달갑지만은 않은 상황이다. 

 

급변하는 세계질서와 북한의 지정학적 요충지론


당장 미국의 칼끝이 러시아를 향하고 있는 가운데 러시아에게 석유 및 천연가스의 안정적인 수송로 확보는 사활을 건 국가적 과제로 대두되고 있다. 러시아가 크림반도 합병을 밀어붙인 것도 실은 우크라이나가 친서방으로 기울어 우크라이나를 경유하는 에너지 수송 루트가 불안정해지자 흑해를 통한 새로운 수송 루트를 확보하기 위해서였다. 최근 푸틴이 터키를 방문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 하지만 러시아가 더 눈독을 들이는 것은 시베리아 및 북극 일대의 에너지 자원이다. 러시아의 미래가 북극 개발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문제는 판매처인데 성장잠재력이 큰 아시아태평양 지역이 그 대안으로 떠오르고 있다.

때문에 ‘아시아로의 귀환’은 정작 러시아의 몫이 되고 있다. 미국이 우크라이나 사태와 중동 문제로 발목이 잡힌 사이에 러시아는 전략적 이해를 위해 거침없이 동진을 선택했다. 이때 그 핵심 고리가 바로 북한이다. 시베리아와 북극의 에너지를 동아시아 일대로 안전하게 수송하기 위해서는 그 길목에 위치한 북한과의 협력이 필수적인 까닭이다. 이로 인해 북한의 지정학적 가치는 새롭게 재평가되었고, 러시아는 한반도에서 다시 화려하게 부활했다. 하지만 러시아의 등장이 미칠 파장은 이제부터가 시작이다.

그 단초는 지난해 12월 전격적으로 이루어진 미국과 쿠바의 관계정상화 선언에 있다. 미국이 53년 만에 쿠바와 적대관계를 청산한 것은 단순히 오바마의 ‘업적 남기기’ 차원이 아니었다. 백악관 스스로 인정했듯이 “미국의 봉쇄 정책은 중남미 지역과 전세계의 파트너 국가들로부터 미국이 고립되는 결과”를 초래했기 때문이다. 쿠바는 미국의 봉쇄정책으로 붕괴되기는커녕 반미화되는 중남미 지역에서 영향력을 확대해왔다. 결정적으로 차이나머니를 앞세운 중국의 등장은 이 지역에서 독보적이었던 미국의 지위를 위태롭게 만들었다. 최근 국제유가 하락으로 고통 받는 베네수엘라 등 중남미 산유국에게 중국은 새로운 대안이 되고 있다.

북한 진출에 속도를 내는 러시아의 존재는 중남미 지역을 파고든 중국에 비견된다. 이 말은 지난 수십 년 동안 대북 봉쇄정책을 견지해온 미국의 위상이 흔들리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른 국가도 아니고 러시아를 미국이 물리적으로 막기란 어렵다. 뿐만 아니라 한반도는 특성상 그 주변 안보환경이 쿠바와는 전혀 다르다. 북러 관계의 급진전은 중국과 일본에게 새로운 대외변수로 작용하고 있다. 단적으로 러시아는 에너지 수송로 확보를 명분으로 극동함대의 전력을 강화하며 북한과 군사협력까지 추진하고 있는데, 이는 일본의 지정학적 이해와 정면으로 충돌하는 것이다. 대북 영향력 감소를 우려하는 중국도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다.

전통적으로 북한은 지정학적 열세를 우세로 전환시켜 주변 강대국들을 쥐락펴락하고 있다고 자부해왔다. 고래 싸움에 새우등 터지는 게 아니라 새우 싸움에 고래가 뒤집힌다는 논리다. 냉전이 한창일 때도 소련과 중국을 상대로 시계추 외교를 감행했던 북한이다. 그런데 최근 러시아의 귀환은 기존의 동아시아 역내 질서를 뿌리째 뒤흔들고 있다. 그래서인지 미국의 대북정책 수정이 머지않았다는 주장에 점차 힘이 실리고 있다. 지난해 말부터는 워싱턴 정가에서 북한과의 대화 타진 쪽으로 기류가 바뀌고 있다는 소식도 들려온다. 중남미 지역처럼 동아시아에서도 미국의 고립이 현실화될 수 있기 때문이다. 


미국의 선택 : 북한은 ‘제2의 쿠바’가 될 수 있다


소련의 붕괴에도 불구하고 한반도에서 냉전적 대결구도는 맹위를 떨쳐왔다. 소련의 빈자리는 북한의 핵개발로 채워졌고, 미국은 북핵을 문제 삼아 주일미군과 주한미군의 주둔 근거를 마련하며 동아시아에서 정치군사적 개입을 계속할 수 있었다. 이 때문인지 미국의 북핵문제 해결방안도 줄곧 북한의 비핵화가 아니라 핵의 비확산으로 쏠려 있었다. 북핵문제가 2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지지부진했던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반면, 북한은 시간이 흐를수록 핵능력을 고도화했다. 지난 1월6일에 발표된 한국의 ‘2014 국방백서’에 따르면 북한의 핵무기 소형화․경량화 기술은 세 차례에 걸친 핵실험으로 상당 수준에 이른 것으로 공식 확인되기도 했다.

이처럼 북한의 향상된 핵 기술과 러시아의 북한 진출은 지난날의 냉전질서 속에 기댄 미국의 동아시아 전략에 균열을 내고 있다. 여기에 일본 자민당의 선거 압승은 미국의 셈법을 더 복잡하게 하고 있다. 일본의 보통국가화를 넘어 내심 핵무장까지 노리고 있는 아베정권이 러시아의 남하로 인해 독자적으로 북일 관계 개선에 나설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한국은 이미 소리 소문 없이 지난해 12월 러시아 석탄을 북한의 나진항을 거쳐 포항으로 수입하며 북한과 러시아의 ‘나진-하산 프로젝트’에 합류했다. 친미국가들조차 미국의 대북 가이드라인을 지키지 않게 된다면 동아시아에서 절대강자로 군림해온 미국의 위상은 급속히 약화될 수밖에 없다.

동아시아에 대한 미국의 전략적 목표는 분명하다. 한국과 일본을 통제하고 중국과 러시아를 견제하는 것이다. 오히려 북핵 그 자체는 문제가 아닐 수 있다. 때마침 북한은 2013년 3월 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경제발전과 핵무력의 병진노선’(이하 병진노선)을 결정한 이래 핵을 통해 국방비를 줄여 남는 재원을 경제에 돌리고 있다. 병진노선과 함께 추진되고 있는 경제개혁 조치들은 그것이 잠정조처로 끝나지 않을 것이며 북한이 사실상 개혁개방 실험단계에 들어섰다는 것을 보여준다. 최근 북한이 한미연합훈련을 중단하면 핵실험을 임시 중단하겠다고 내놓은 제안도 위협용 엄포보다는 경제회생을 위한 유리한 대외환경의 조성측면이 더 크다.

이런 상황에서 만일 러시아·중국의 반미동맹이 더 강화된다면 미국은 북한의 변화와 맞물려 새로운 선택을 할 수도 있다. 쿠바처럼 한순간에 북한을 끌어안는 것이다. 이럴 경우 북한은 쿠바와 달리 핵보유로 인해 더 많은 진통을 겪을 것으로 예상된다. 하지만 ‘친미국가 북한’은 미국으로서는 꽃놀이패가 될 수 있는 만큼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유혹이다. 그것은 현재 동아시아에서 가시화되고 있는 미국의 고립을 타개할 수 있는 반전카드이자 러시아와 중국을 일대 혼란에 빠뜨릴 수 있는 반격카드가 될 수 있다. 또한 북핵을 이유로 독자적인 핵무장론을 굽히지 않는 한국과 일본의 우익세력들을 일거에 제압할 수 있는 회심의 일격이 될 수도 있다.

오바마의 개인적 업적 쌓기도 무시 못 할 요인이다. 비록 쿠바와의 관계정상화는 정황상 불가피했다고 하더라도 이를 계기로 오바마 정권은 핵협상을 고리로 하여 이란과의 관계개선에 더 공을 들이고 있다. 이참에 향후 북한마저 북미수교에 이르는 양자협상을 급진전시킨다면 오바마는 냉전 잔재를 청산한 대통령으로 기록될 수 있다. 그러나 당장 일정에 올려놓고 추진할 수는 없는 만큼 일단 대북 강경메시지를 통해 기선제압에 나서고 있다. 영화 <인터뷰> 논란이 불거지자 미국은 신속하게 추가 대북제재에 나섰다. 올해 들어 남북대화 흐름이 수면 위로 떠오르자 이를 조기에 차단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였다. 지금 현 단계에서는 남북관계 개선이 러시아 및 중국과 관계 문제로까지 직결될 수 있는 중대 사안이기 때문이다. 


위험한 세계와 위험한 한반도


미국의 이러한 태도는 되레 북한을 자극하여 제4차 핵실험을 유도하려는 것 아니냐는 의구심마저 들게 하고 있다. 미국에게 북한의 친미화 카드가 매력적이긴 하지만 현 상황에서 곧바로 써먹기는 어려움이 있는 만큼 판을 아예 뒤집는 ‘게임 체인지’를 노린다는 해석이다. 북한이 제4차 핵실험을 강행한다면 한동안 북한은 다시 고립을 피할 수 없게 되고 작년 하반기부터 가속화된 북러 관계의 동력도 상당 부분 잃을 수밖에 없다. 현 정세를 원점으로 되돌릴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북한도 핵실험 카드를 쉽게 꺼내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자칫하다간 미국의 페이스에 말릴 수 있고, 무엇보다도 급한 건 미국이지 북한이 아니다.

문제는 한반도를 둘러싼 대외여건이 여전히 불안정할 가능성이 높다는 점이다. 북러 관계의 급물살을 시작으로 동아시아 질서의 지각변동이 예상되는 가운데 어떠한 방향으로 귀결되든 결국은 세계질서의 새로운 주도권을 둘러싼 대립과 경쟁으로부터 강한 규정을 받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동아시아 일대의 모든 국가들은 핵을 이미 보유하고 있거나 핵무장 의지를 포기하지 않고 있으며 전세계에서 가장 첨예한 군비경쟁을 펼치고 있다. 장기적인 경기둔화 속에서 자국민의 불만을 민족주의에 대한 호소로 돌파하려는 경향도 갈수록 짙어지고 있다는 점은 이러한 우려를 더 크게 하고 있다. 급변하는 세계질서 속에서 한반도 상황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김성렬 tjdfuf@jin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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