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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0월호][여성]여성노동자 단체활동의 현주소-지역 여성노동운동 단체의 활동 경험을 중심으로

  • 분류
    여성
  • 등록일
    2011/10/07 14:12
  • 수정일
    2011/10/07 18:32
  • 글쓴이
    사노신
  • 응답 RSS

 

이 글은 사노신 독자회원이 여성단체 활동을 하면서 느꼈던 여러가지 문제의식을 담아 보내주신 글이다. 기고글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다. (편집자주)

 

‘개인의 역사가 곧 운동의 역사’라고 생각해오던 차에 나의 정체성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었다.1) 국제적인 노동자 운동이 필요하다며 짧게나마 헌신했던 이주노동자 운동단체의 활동가, 나름 운동하면서 느꼈던 가부장성에 치를 떠는 20대 후반의 기혼여성, 나를 설명할 사회적 지위들은 생각보다 많지 않았다. ‘활동가’라는 타이틀을 지운다면 말이다. 아무리 자본주의 사회를 변혁하는 운동을 하더라도 생존하기 위해서는 내 노동력을 팔아야 한다. 내가 갖고 있는 성적(젠더/섹슈얼리티) 정체성, 그것이 놓인 위치와 조건들을 생각해봤을 때 ‘가부장제’나 ‘여성억압’이라는 말들이 멀리 있지 않았다. ‘여성노동자’라는 정체성은 자연스럽게 내게 주어져 있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일상 속에서 여성노동자들과 호흡하고 싶었다. 하여 그간 하던 단체 활동을 중단하고, 지난 1년간 지역 생협(생활협동조합) 사무실에서 조합원 상담 일을 한 후 5개월은 모 여성노동자 단체에서 활동하였다.
생협에서는 전형적인 콜센터 노동을 했다. 상대방이 하는 모든 말들을 다 받아들이면서 자기 감정을 관리해야 하는 노동을 하루 8~10시간씩 쉼 없이 했다. 정신과 육체적 에너지 모두를 쏟아 붓는 만만치 않은 일이었다. 동료들 간에는 노동 조건에 대한 불만들이 터져 나오기 일쑤였다. 대부분 관리자의 통제에 대한 것이었는데 “콜센터 일인데 갓 대학 나온 젊은 친구가 버틸 수 있는 일인가?”라는 통념들을 내게 질문하기도 했고, 감정노동의 괴로움과 고질적인 저임금 문제를 꼬집으며 “어떤 회사에서는 감정 노동에 대한 수당까지 준다던데 운동단체라는 생협은 왜 그게 없느냐? 왜 우리는 몸을 쓰는 일도 아닌데 일이 이토록 힘든가?”라는 이야기들을 나누기도 했다. 여성노동의 핵심적 이슈 중 하나인 감정 노동의 실체가 무엇인지 부족하나마 깨달을 수 있었다. 그리고 노동의 성격과 내용, 노동하는 주체와 조건, 적절한 보상, 자발적 결사체 - 노동조합 - 의 조직 등 노동자라면 흔히 생각하게 되는 주제들을 여성 동료들과 논의할 기회들이 많았던 것은 좋은 경험이기도 했다.
여성 노동자들과 일을 해보면서 감정노동의 영역 같은 여성노동의 특수한 성격을 이해하며 대안을 제시할 수 있는 운동들이 절실히 필요하다는 것을 느꼈다. 어떻게 이 운동을 펼쳐나갈 수 있을까, 현재 여성노동자 운동을 하고 있는 단체라면 가능하지 않을까, 답답했던 차에 수도권 지역에 있는 모 여성노동자 단체에 들어갔다.

 

전투적, 비타협적 운동에서 출발한 여성노동운동

 

사용자 삽입 이미지60년대 이후 남한 사회의 자본주의를 지탱해오던 것은 봉제나 전자 같은 여성노동자들의 노동이 집약된 산업이었다. 산업 양태가 변화한 현재 여성노동자들은 공공, 서비스 산업에서 비정규직으로 근로하거나 돌봄, 가사 노동 등 소위 ‘비시장’영역의 노동에 많은 수가 종사하고 있다. 여성노동자들은 자신의 노동조건을 개선하거나 전반적인 노동자 권리를 위해 적극적으로 투쟁해왔다. 과거 제조업 중심의 선도적인 투쟁의 모습들이 그러했고 현재의 이랜드나 기륭, 청소노동자 투쟁 등의 모습에서도 투쟁의 역사는 이어지고 있다. 여성노동자 단체에 오면서 가부장제와 자본주의 사이의 긴장 관계를 건드릴 수 있는 사업을 할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자본가들과 가부장적 남성들에 맞서 싸우는 여성노동자를 조직하자’는 것, 너무 거창한 기대인가.
막상 단체에 들어가 했던 활동들은 ‘거창함’보다는 내가 가졌던 기대 자체가 ‘말도 안 된다’는 것을 입증시켜주었다. 이미 이 주제는 내가 들어간 여성노동자 단체에서는 꺼낼 수조차 없는 것이었다. 단체에서 펼쳤던 여성노동운동의 주된 의제는 젠더중심의 차별에 대한 이슈도 아니었다. ‘경력단절 여성의 재고용’, ‘일·가정 양립’ 등 여성노동운동의 의제라고 보기에 애매한 것들이었다. 여성단체들은 정부와 파트너쉽을 맺기 위해 이 의제를 선택하고 자신의 목소리를 애써 이 주제에 불어넣으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첫 번째로 깨진 환상, 노동조합에 대한 무시

 

처음 단체에 들어가 활동을 시작하면서 들었던 이야기는 가히 충격적이었다. 몇 해 전 빈곤층 가구들이 밀집해 있는 지역의 보육시설에서 노동조합이 설립되었는데 잡음이 많았다고 했다. 이야기인즉 지역 내 유일한 국공립 보육시설에 수요가 몰려들자, 한정된 인원에 열악한 노동 환경 속에서 일하던 보육교사들은 노동조합을 필요로 했다.
헌데 보육시설 노조의 설립과 추진 과정에 제동을 거는 세력이 바로 지역 여성단체들이었다. 아이들에 대한 보살핌 노동은 희생이나 헌신처럼 포장되는 경우가 많고 교사들 역시 그런 마음가짐으로 내면화되어 있어 노동자로서의 단결권을 주장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고 한다. 당시에는 어렵게 조직된 노동조합인 만큼 사용주 측과의 마찰도 불가피했다.
그런데 명색이 여성운동을 한다는 지역의 여성단체들은 저소득층들이 아이 맡길 곳이 없다는 그럴듯한 이유로 보육 노동자들에게 양보를 요구했다. 보육 노동자들의 요구가 과도한 것이라는 성명을 내고, 파업을 깨며, 보육노동자들의 노동조합을 무시했다. 여기에 내가 들어가 있던 여성노동자 단체 역시 큰 몫을 했다. 보육교사들은 양질의 보육을 위해서 자신들의 열악한 노동조건이 반드시 개선되어야 함을 주장했지만 학부모나 여성단체들은 이를 철저히 묵과했고 결국 노동조합은 해체되었다.
물론 보육 자체가 완벽하게 사회화되기 이전에는 개별 부모들이 겪는 양육에 대한 고충은 엄청나다. 이러한 보육의 문제는 통념상 여성만의 영역으로 남겨지는데 보육이 왜 여성의 일인가에 대한 문제제기조차 여기서는 등장할 여유가 없다. 누구의 희생으로 어떻게 그 관계가 유지되든 상관없이 이성애 중심 가족제도는 이 대립구도에 전제된 철옹성 같은 담론이었기 때문이다. 여성단체들은 이 문제를 보육원에 보내는 엄마와 여성 보육교사 사이의 대립으로 만들었다. 보육 노동자들이 어떤 노동을 하는가보다 자신의 아이를 마음 놓고 맡길 곳이 없는 가족들을 우선적으로 걱정하는 여성단체들의 수준은 암담했다. 나는 여기서 보다 원론적인 질문을 되새겨야 했다.
여성노동자들이 누려야 할 ‘권리’란 무엇인가? 대체 ‘어떤’ 여성노동자들의 권리를 보호해야 하는가? 보다 나은 조건에서 일하기를 원하는 여성들과 그것조차 '사치'라고 말하는 여성들, 이 사이의 ‘분열’은 대체 어디에서 온 것인가. 활동들을 해나가면서 이 물음에 대한 답을 찾아보기로 했지만 더욱 수렁으로 빠져들었다.

 

경력단절 여성지원? 방과 후 학습지도사 양성사업

 

경력단절 여성의 재취업은 보통 노동부 산하 고용지원센터 같은 재취업센터에서 관할한다. 헌데 지금은 노동부가 그런 일조차 하기 싫어서 시민단체나 여성단체들에게 예산을 넘겨주어 사업을 수행하고 있다. 내가 있던 단체에서는 경력단절 여성들을 위한 방과 후 학습지도사 양성 교육을 진행했다.
경력단절이라는 말 자체에는 심각한 문제가 있다. 여기서의 ‘경력’은 임노동자로서의 경력일 뿐이지 가내에서 가사, 양육, 온갖 돌봄과 감정 노동을 끊임없이 수행하는 여성들의 경력은 배제된다. 무급 봉사로 취급되는 여성들의 재생산 노동은 경력으로 인정되지 않으며, 여성들은 사회에서 경력이 없는 무능한 사람으로 규정되기 때문에 ‘경력단절’이라는 슬로건 자체는 임노동 생산 중심의 사회 구조가 만들어낸 허구적인 개념일 뿐이다.
아이들의 방과 후 학습을 지도하는 것은 양육의 연장선에 있으므로 전형적인 돌봄 노동의 범주에 속한다. 현 방과 후 학습지도사들은 정교사들에 비해 훨씬 낮은 임금과 처우를 받지만 노동 자체가 연속적이지 않아서 가내 노동을 하는 기혼 여성들에게는 맞춤 직장으로 떠오르고 있다.
이쯤 되면 방과 후 지도사들의 노동 권리에 대한 쟁점들을 기본적으로 다루면서, 여성인권이나 여성노동 쟁점에 대한 이야기들을 제기해주는 게 상식적이다. 하지만 실제 사업을 해보니 그렇게까지 다룰 여력이 없었다. 방과 후 지도사의 노동권보다는 수학, 과학, 국어 등 실무적으로 배워야 할 것들을 가르치기에도 시간이 빠듯했다. 여기에 참여한 여성들 대부분은 ‘공부가 매우 힘들다’는 이야기를 했는데, 성별로 편중된 돌봄 노동의 문제는 차치하고서라도 여성들이 일하기 위해 아이들에게 또 공부를 가르치라는 것은 끊임없는 피교육 노동으로 고통 받는 아이들을 전제하지 않은 사악한 아이디어이기도 하다. 차라리 커피 수요가 많은 요즘, 바리스타를 교육하는 것이 더 낫지 않겠는가.
이러한 재취업 양성과정을 여성단체에서 시행하는 것은 자녀 교육에 관심이 많은 엄마들을 타겟으로 적당히 구미 당기는 사업을 시행하면서 물적 기반을 만드는 전략이다. 단체들은 재정 불안 때문에 이러한 프로젝트를 받아 회의비나 강사료 등의 비용을 높게 책정해 송금해주고 다시 돌려받는 형태로 사업을 진행한다. 후원조직만으로 생존이 어려운 단체에서는 이런 사업이 효율적인 운영 방법이다. 다른 지역 여성노동자 단체에서도 정부 프로젝트 사업들을 펼치면서 재정적, 대중적 기반을 쌓고 있다. 이에 대해 문제제기하는 사람들에게는 “운동은 대중들이 정말 원하는 주제로 만나야 한다는 것이다. 언제까지 ‘차별’ 이야기하며 운동만 할 수 있겠는가?”라는 대답이 날아온다.
대중화, 실질적으로 여성들이 필요로 하는 사업, 그 속에서 녹여내야 하는 우리의 정치, 고민은 확장되어야 하나 양날의 칼을 다 쥐고 갈 수는 없는 것이다. 기층 여성들이 실질적으로 원하는 사업이 무엇인지를 함부로 예단한 것은 아닌지, 문화센터 트렌드에 맞춰 대중화를 꾀한 것은 아닌지, 돈에 연연해 단체가 지향해야 할 가치관과 정체성을 너무 놓치고 가는 것은 아닌지, 이 사업을 수긍하기 위해서는 답하기 어려운 질문들을 통과해야 했다. 하지만 도통 긍정할 수 없었다. 그랬기에 주체적으로 사업을 해나갈 수도 없었다.

 

가사노동자 파견기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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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있던 단체 사업 중 유명한 것이 가정관리사 협회 사업이었다. 가사노동에 대한 시장화는 더욱 가속화될 것이다. 다만 이것이 여성노동단체들에 의해 별다른 문제제기 없이 진행되고 있다는 것은 문제가 있다. 우리가 했던 가사노동자 파견사업은 말 그대로 수수료를 받지 않는 착한 파견기업의 역할을 했다. 가정관리사협회는 고령의 여성노동자들을 가정관리사로 조직하여 노동력 파견과 더불어 가정관리사의 노동자성을 요구하는 투쟁을 벌이고 있다. 현재는 일회성 캠페인으로 권리 선언 운동을 진행하는 수준에 그치고 있지만 고령의 여성노동자들이 캠페인을 하고 여성노동이나 다른 사회적, 정치적 사안에 관심을 갖게 되는 조직화의 흐름은 반길만한 일이다. 그러나 가사노동을 포함한 돌봄노동을 나이든 여성들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직업처럼 고정화하는 이데올로기에서는 탈피하지 못하고 있다. 아울러 가정관리사를 고용하지 못하는 빈곤층 가구에서 가사노동 등의 각종 돌봄노동을 여전히 여성들이 담당하는 현실은 변화하지 않았다. 가사노동 파견 사업이 인기를 끌면 단가를 낮추어 경쟁을 하게 될 테고 싼 값에 가사노동을 하려는 여성들이 더더욱 극렬한 착취관계에 놓일 수도 있다. 나는 이 사업이 ‘전 여성들의 가사노동자’화를 도모하게 되는 결과로 이어질까 두렵다.
성별로 편중된 가사노동에 대해서 포착하고, 이에 대한 재평가나 사회적 가치화 등을 통해 결국 가사노동이 성별로 균질하게 이뤄질 수 있도록 요구하는 흐름을 만들어나가는 것이 필요하다. 아울러 빈곤층의 여성들이 이중삼중의 가사노동을 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가사노동의 완벽한 사회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다른 물적 토대와 사회적 기반, 사상이 필요할 것이다. 이것은 여전히 풀어야 할 숙제이기도 하다.

 

여성친화기업과 여성친화도시

 

소위 ‘젠더 레짐’이라 하여 각 지방정부에서 밀고 있는 정책 중의 하나가 ‘여성친화**’이다. 여성 고용이 많은 기업을 여성친화기업이라 선정하는 것은 발상 자체가 틀렸다. 이는 굳이 많은 설명을 요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들이 말하는 여성친화는 임노동 시장에 많은 여성들이 진출하면 ‘여성친화’적인 것이다. 임노동 구조 속에서 어떤 착취관계를 맺는지, 여성들이 남성들에 비해 어떤 차별을 받는지, 어떤 가부장적/관료적 체계 속에서 일을 하게 되는지 등의 문제는 전혀 고려되지 않는다. 내가 있던 단체의 다른 지역 단체들에서는 지역 정부와 손잡고 여성친화도시나 여성친화기업을 선정해 상을 주는 프로젝트를 타진하고 있었다.
박근혜나 전여옥 같은 이가 여성정치인이라 하여 여성들을 위한 정치를 잘 할 것이라는 기대를 하겠는가? 마찬가지로 성별로 위계화 되어 있는 노동 구조 속에서 관리자는 남성이고, 관리자의 통제를 받는 노동자 다수가 여성이라면, ‘그래도 여성들이 많으므로 여성친화기업’이라 불러도 된다는 말인가?
아무리 주류 여성계라 하더라도 박근혜나 전여옥, 나경원 같은 이들에게 어떤 기대를 건다고 한다면 말 다한 것이다. 하물며 내가 있던 여성노동자 단체는 주류여성계에 끼지도 못하는 수준인데 실제 여성들과 친한지 따져보지도 않으면서 ‘여성친화’ 들이대는 것은 그저 무식의 발로로 밖에는 안 읽힌다. 말하기에도 민망한 ‘여성친화’ 선전으로 기업이나 정부에 굽실거리면서 구색맞추기식 사업을 하는 것이다. 여성단체들은 ‘공적 가부장제’를 몸소 실천하는 기관이 되고 있다.
이래서 보다 ‘여성주의적이고 계급적’인 관점이 여성노동운동에도 필요한 것이다. 나는 정부와 국가, 혹은 자본가에 대한 태도의 문제에서부터 출발하는 기나긴 논쟁 과정이 여성노동운동에 꼭 필요하다고 본다. 여성 단체 스스로 기생하고 있는 권력 역시 자본가적/가부장적인 권력임을 인지하는 과정이 필요한 것이다.

 

일·가정 양립의 허구

 

현재 여성노동운동 단체의 활동은 주되게 ‘모성보호’에 치중해있다. 이는 노동력의 원활한 수급을 원하는 자본가들의 입장에서는 환영할 만한 일이다. 여성단체들은 각종 ‘저출산’ 토론회에 참여하고 있다. 정부는 그들이 고심하고 있는 ‘저출산’ 문제를 여성 단체들이 해결해줄 것이라 기대하고 있다.
임신, 출산, 양육으로 이어지는 여성들의 생애 주기를 고려하는 정책은 물론 필요하다. 출산휴가를 늘리고, 남성들이 육아휴직을 동등하게 쓸 수 있도록 강제한 조치는 환영할만하다. 하지만 본질적으로 임신, 출산, 육아와 각종 가사노동이 가부장제를 유지하기 위한 여성 본연의 노동이라는 점으로 강제되는 것에는 침묵한다. 여성들은 그러한 과정들 속에서 가부장적 가치관을 내면화하고 실천해야 한다.
일·가정 양립은 가정 내에 일어나는 모든 노동을 여성이 해야 한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 여성들은 노동력 수급을 위한 인간생산노동의 주체이면서 동시에 그 노동에 대한 제반 권한을 행사할 수가 없다. 아이를 생산하면서 남성 가문을 잇고 사회에 노동력을 제공해주는 이성애 중심의 가족 관계는 여성에게는 또 다른 착취 관계이다.
현 사회에서 여성의 인간생산노동은 단순히 생산 행위 자체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양육, 돌봄, 무한한 가사노동으로 이어진다. 가족관계는 이러한 여성의 무급 노동에 기대어 유지되어 왔다. 이 구조 속에서 정부가 ‘일·가정’ 양립 정책을 추진한다기에, 몇몇 여성주의자들이 문제 제기를 하였다. 내가 있던 단체에서는 ‘일·가정 양립’을 ‘일·생활 균형’이라 바꾸었다. 하지만 그릇만 바꾼다고 해서 훌륭한 요리가 나오는 것은 아니었다.
왜 가정의 일을 여성이 담당해야 하는가라는 중대한 물음에 소위 여성학자라 불리는 사람들은 여러 근시안적인 대책들을 내놓았다. 물론 성별분업을 해체할 수 없다면, 가부장적인 가족 구조가 바뀌지 않는다면, 아무런 대책 없이 당하는 것보다 이 사이의 긴장을 조금 줄일 수 있는 개선책들은 필요할 것이다. 다만 이 개선책들이 근거해야 하는 내용, 여기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 설정 자체가 너무도 쉽게 간과되고 있었다. 아무리 여성단체들이 이에 대해 비판적 관점을 유지한다 하더라도 일·가정 양립은 어머니와 노동자로서의 여성, 이 이중역할을 제도화하는 정책이다. 게다가 현장의 여성단체들은 이름만 교묘하게 바꾸어 이 정책의 수행자가 되고 있다. 여성의 권리보다 여성의 가사 노예화를 추동하며 ‘수퍼우먼화’를 도모하는 정부 정책의 하수인으로서 여성단체들은 스스로의 존립 근거 자체에 반하는 활동들을 벌이고 있는 것이다.

 

관료주의화, 관변단체화

 

내가 있던 단체는 조금 더 특별했던 것 같다. 기본적으로 단체를 운영하는 방식 자체가 로비 정치였다. 새마을 부녀회 등 여성단체협의회 행사들을 쫓아다니며 대표가 얼굴을 알리면서 단체를 홍보하고, 지역을 빛낸 여성상 같은 것을 받기 위해 도나 시의 관계자를 만나고 다니는 게 대표의 주된 일이었다. 비단 일부의 문제만은 아니라고 본다. 고여 있는 물은 썩기 마련이듯 여성단체도 예외 없이 관변단체가 되어 가고 있다.
몇 십년간 단체 대표를 맡던 사람들은 이미 지독한 관료성에 찌들어있다. 그들은 그간 운동 사회에 있으면서 남성들에게 받았던 상처들을 후배 활동가들에게 호소하며 숨통을 죄고 있다. 이것은 거의 질식할만한 수준으로 지역여성운동이 발전하지 못하는, 나아가 새롭고 젊은 층의 활동가들이 조직되지 못하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국가와 자본의 권력에 기생하는 것, 상명하달의 운영 방식, 비판과 토론을 압제하는 문화 등 여성 단체 내에서도 이러한 관료주의가 잠식해 있다. 개인적 생각이지만 노동조합의 관료화를 비판하던 이데올로그들은 여성단체의 관료성에는 함부로 날을 세우지 못하는 것 같다. 여성단체들의 관료성은 더 잘 은폐된다. 노동조합이 형제애라면 여성단체는 자매애로 똘똘 뭉쳐 있다. ‘언니’라는 말 속에 숨겨진 권력, 가족주의에 기대어 차이의 정치를 인정하지 않는 것, 남성들과 동등해지기 위해 밖에서는 분투하고 안으로는 억압을 강화하는 운영 방식. 내가 있던 단체에서 쟁점에 대한 논의는 가부장적 방식으로 재단되기 일쑤였으며, 대표 등의 나이든 활동가들이 장장하게 헤게모니를 쥐고 있어 반기를 드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이제는 여성단체들 속에서 부당함을 느껴온 활동가들이 결집해야 한다.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라는 구호 속에 등장한 여성운동단체들이 ‘남성과의 평등’이라는 미명 하에 일상 속 권력 관계를 어떻게 은폐하고 있는가를 어렵더라도 말해야 한다.

 

‘국가페미니즘’의 실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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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페미니즘이나 페모크라시 같은 용어들이 등장할 때면, 나는 그러한 규정은 좀 과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페미니즘과 국가라는 말 자체는 어울리지 않는 것이라 규정했기 때문에 여성운동이 제도화되는 것에 대해서도 특별히 민감하게 보지 않았던 것 같다.
하지만 현재 여성단체들이 국가 기구들과 맺고 있는 관계, 이것이 사회에 미치는 실질적인 영향력 등을 살펴봤을 때 국가페미니즘이라는 규정은 결코 과도하지 않다. 2007년, 여연은 출범 이후 20년간 여성운동을 비롯한 사회변혁운동에 새로운 변화가 필요함을 역설하고 정부와의 대립적 관계도 청산하고 참여로 노선을 바꾼다고 천명했다.
남한 뿐 아니라 국제기구가 주도하는 여성관련 정책은 정부가 일방적으로 추진하기보다 관련 여성단체나 조직과 연계하여 추진되었다. 여성단체들은 여성부의 정책 수립에 적극적으로 개입했고 성폭력/가정폭력 상담 활동을 하는 여성 단체들은 정부의 예산을 받아 상담활동을 하고 있다. 앞서 언급한 바 있듯 여성노동단체도 프로젝트 사업을 받거나 노동 상담에 대한 활동들 역시 정부 예산을 받아 하고 있다. 하여 내가 노동 상담을 맡아 활동할 때에도 내가 운동을 하고 있다는 생각보다는 정부 기관의 지도, 감독을 받는 인턴사원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나는 공적 가부장제로서 국가는 남성의 이익에 부응하는 정치적 상부구조로서 여성에 대한 억압을 유지한다2)는 견해에 적극 동의하며, 김대중-노무현 등 소위 ‘개혁정권’이라 불리는 시기 속에서 여성부가 등장하게 된 배경 역시 다르게 보면 공적 가부장제가 공식적으로 관철되는 과정이기도 했다는 지점을 보고자 한다. 국가페미니즘이 페미니즘을 비판하기 위한 도구적 용어이기도 하지만 관료사회로 진출한 몇몇 페미니스트들이 스스로 규정한 언어이기도 하다는 것은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국가페미니즘을 긍정하는 입장에서는 국가페미니즘이 “여성의 권익 보호를 위해 국가의 폭력성은 순치시키고 보호기능은 확대하는 것으로서 서로 이해관계가 다른 집단들 사이의 갈등을 ‘젠더’ 관점에서 중재하고 보호하여 국가가 복지국가로서의 역할을 수행하도록 독려하는 일”3)로 이해된다. 그러나 여성의 권익 보호를 위해 국가의 폭력성은 순치되었는가? 보호기능은 확대되고 있는가?
권리를 주장해야 하는 여성들, 보호가 요구되는 여성들, 범죄의 피해자나 희생양이 되어야 하는 여성들, 반대로 기업이나 국가에 의해 여전히 폭력을 당하는 여성들, 이른바 국가페미니즘을 주장한 이들은 여성들의 범주를 제각각 갈라놓고, 정작 그녀들이 어떠한 조건과 맥락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지를 살피지 않는다. 순치된 폭력성 속에서 숱한 여성노동자들은 절규했고, 성매매 여성들을 보호한다면서 그 여성들을 불법적 존재로 만들고 생존의 방식으로 선택했던 직업 자체를 푼돈 몇 십만원에 앗아가 버렸다. 결국 국가와 자본, 남성지배자들의 영향력 속에 페미니즘은 은폐된다. 여성들을 분열 획책하면서 갈등을 조장하고 이를 통해 이득을 보는 세력은 따로 있기 때문에 페미니즘 자체가 실현될 수 없는 것이다.

 

완전한 해체가 필요하다

 

사회변혁의 운동이 제도화되는 맥락에서 그 맥락을 여전히 따를 것인가, 다른 한편으로 운동의 제도화를 비판하며 새롭게 저항적인 진보를 만들어가는 맥락을 따를 것인가, 아니면 이 모두의 가부장적 특성들을 비판하고 그야말로 해방을 이루기 위해 완전히 다른 판을 그릴 것인가. 나는 여성 단체들이 설정하고 있는 문제 자체를 근본적으로 다시 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거의 이십여년간 활동해온 것 자체가 이 수준이면 운동 자체에 대하여 비판의 목소리를 높일 때가 된 것이다.
나는 이 여성운동이 근거하고 있는 개념, 의제, 활동 방향과 방식 등 모든 것들의 기반 자체를 해체하고 다시 세워야 한다고 생각한다. 경력단절, 여성친화, 일·가정 양립 등 현재 여성노동운동이 토대로 하고 있는 개념 자체가 허구이거나 성차별, 착취의 문제를 은폐하는 것이다. 더불어 국가 자체가 성, 계급 중립적이라는 편견 자체를 버려야 한다. 가부장제를 재생산하는 가족, 국가 질서 자체를 흔들지 않고 정부가 하는 일을 대신해준다면 여성 운동은 ‘운동’의 의미를 잃어버린다. 그렇기에 사회적 역학 관계에 대한 세심한 분석과 태도 정립이 필요하다. 소멸 시효를 다했다는 위기감을 갖고 새로운 운동으로 변태하지 않으면 안 된다.

 

여성노동자 운동의 정체성을 되찾기 위해

 

희망버스 이야기를 안 할 수가 없겠다. 대중들은 하루아침에 일터에서 쫓겨난 중공업 노동자들의 절규와 이것이 자본가들의 방만한 경영 때문에 생긴 일이라는 것을 김진숙의 고공농성을 통해 알게 되었다. 한 명의 여성노동자가 다수의 남성노동자들이 당하고 있는 문제들을 대변하며 이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연대를 조직하고 있는 것이다. 남성 중심의 임금노동자들이 집단적인 물리력으로 자본의 힘에 대항하는 것이 전통적인 노동운동의 방식이었다면 한진중공업 사태는 현재 벌어지고 있는 운동의 양태가 달라지고 있음을 시사한다. 더 이상 공장에서 일하는 남성노동자들의 힘이 노동운동의 추진력을 형성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맥락은 다르지만 여기 또 다른 투쟁이 있다. 여성가족부 앞에서 관리자에게 성희롱을 당하고, 문제제기하자 해고당한 비정규직 여성노동자의 농성이 그것이다. 이 투쟁은 여러 쟁점들을 내포하고 있다. 성희롱을 한 가해자가 징계위원회를 열어 피해자에게 ‘풍기 문란’의 죄목으로 징계를 내린다. 이에 대해 문제제기하자 피해자는 해고되고 가해자는 고용 승계되어 일하고 있다. 피해자가 일하던 업체는 폐업되어 누구에게도 법적 책임을 물을 수 없는 상황까지 이르렀고, 결국 공장 앞에서 1인 시위를 하다 쫓겨나 현대차 본사 앞을 압박하기 위해 상경하였다. 현대차는 용역을 고용해 집회 신고를 막았고 피해자와 대리인은 끝내 여성가족부 앞으로 오게 된다. 여성가족부는 용역을 동원해 이 농성을 깡그리 짓밟았다.
어떻게 이런 말도 안 되는 상황이 연출될 수 있었던 걸까. 성매매 로비 정치가 만연한 공간에서 남성들의 성희롱은 시답잖은 것이다. 가해자는 재미로 성희롱을 했고, 가만히 있을 줄 알았는데 문제제기 하자 업체 사장에게 살려달라고 줄을 섰을 것이고, 업체 사장은 현대차 본사에게 시끄러운 문제 하나 덮자고 로비하며 줄을 섰을 것이다. 이러한 가부장적 관행은 조직적으로 구조화되어 노동 현장을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있던 여성노동자 단체는 여성가족부의 지침에 따라 성희롱 예방 교육은 나가는데, 현재 일어난 사태조차 방관하는 그들을 보고 있노라면 한심하기 짝이 없다. 보통 성희롱이 발생하면 노동부 등 기관에서 합의를 종용하거나 중재의 역할을 한다. 가해자에 대한 제재 조치도 행정적으로 이뤄질 뿐이지 형사처벌을 강제 하지는 못한다. 성희롱은 문화적인 문제이기에 개도의 대상이지 척결할 대상은 아니라는 담론, 남성 중심의 계급 역관계가 철저하게 관철되고 있는 공장 내 구조, 결국 여성가족부나 여성노동단체의 개도 활동으로는 이 썩어빠진 공장 내 구조에 조금의 균열도 내지 못하고 있다.
자본가들의 착취에 대항하여, 남성들의 폭력 - 소외, 배제, 희롱 등 - 에 대항하여 싸우고자 하는 여성들은 널려 있다. 이는 현장의 규모나 직급을 막론하고 일어난다. 고로 여성노동자 단체에서 해야 할 활동의 주된 의제는 여성가족부와 단절하고 이들을 결집시켜 내는 것이다. 다양한 여성들이 가부장적 관행과 폐해에 맞서 이 뿌리 깊은 성차별 구조에 파열구를 낼 수 있는 운동, 이미 시작되고 있는 이 운동을 적극 지원하고 조직하는 것에서 여성노동자 단체는 다시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야 한다.

 

 

1) 이 글은 여성노동자 운동 단체에서의 활동 경험을 중심으로 풀어 쓴 짧은 소회에 불과하다. 필자는 여성노동운동 전반에 대해 진단할 실력도 안 되고 그만한 노력도 투여하지 않았다. 미천하게 겪은 개인적 경험들을 정리해서라도 꼭 밝히고 싶었던 것은 현 여성노동자 운동 단체들의 정책과 운동 경향에 간과해서는 안 될 심각한 문제들이 나타나고 있어서이다.
2) 드루드 달럽, ‘개념의 혼돈-현실의 혼돈:가부장제 국가에 대한 이론적 고찰’(1989)
3) 임옥희, ‘국가페미니즘화와 개혁의 딜레마’, 당대비평 27 가을호(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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