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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386세대를 위한 변명

  • 분류
    문화
  • 등록일
    2014/04/03 10:43
  • 수정일
    2014/04/03 10:55
  • 글쓴이
    사노신
  • 응답 RSS



디즈니의 <겨울왕국>의 등장으로 기세가 꺾였지만 작년 말부터 올해 초까지 거세게 몰아친 <변호인>의 열풍은 이 영화를 한국에서 사상 열 번째 천만 관람 영화로 만들었다. 이는 아마도 <변호인>이 이미 한국사회에서 주류 기성세대가 된 386세대가 갖고 있는 어떤 집단적 무의식과 공명하는 바가 컸기 때문에 나타난 결과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386세대의 자화상

386세대라는 단어는 잘 알려진 바대로 30대, 80년대 학번, 60년대 생을 가리키기 위해 90년대 등장한 신조어다. 그래서 이 세대가 4·50대가 된 지금은 486이라는 말을 쓰기도 한다. 특정 세대에 특정 명칭을 부여해서 어떤 동질성을 강조하는 것은 그 이전에도 그 이후에도 있었지만, 유독 386세대라는 말이 지금까지 살아남고 있는 것은 이 세대가 가진 모종의 동질성이 유달리 강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일 수 있다.

우리가 흔히 80년대, 혹은 80년대 정서라고 부르는 것은 꼭 80년대라는 시기와 정확히 일치하지는 않는다. 영국의 역사가 에릭 홉스봄은 1789년 프랑스혁명에서 1919년 1차 세계대전의 종결까지를 장기 19세기라고 불렀다. 나는 이와 유사하게 한국의 80년대도 79년 박정희의 죽음에서 92년 대선까지를 장기 80년대라고 부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50년대 후반에서 70년대 초반에 태어나 그 시기에 대학을 다닌 79학번부터 92학번 정도까지를 386세대에 속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들도 더 자세히 보면 대중적인 학생회 시대가 시작된 84, 85년을 기점으로 다시 나눠 질 것이다.)

대략 베이비붐 세대와 세대적으로 겹치는 이들은 6·70년대 고도성장 속에서 전 세대에 비해 상대적으로 높은 경제적 혜택을 받으며 성장했고 많은 수가 대학에 진학했으나 억압적 정권 하에서 대학생활을 보내며 캠퍼스의 낭만보다는 이념화된 민주화 운동과 대중적 학생운동을 경험한 세대이다. 또 이들은 90년 소련의 몰락과 92년 대선 이후 대중운동의 갑작스러운 몰락을 경험한 이른바 후일담 소설의 주인공들이고, 갑작스러운 세상의 변화에 기만당했다는 집단적인 피해의식을 느꼈으며, 그 속에서 뒤늦게 개인의 “실존”을 발견하고 썰물처럼 운동에서 빠져나간 세대이기도 하다.

90년대 이후 사회적으로 점진적인 민주화가 진행되면서 이 세대는 제도권 정치로 뛰어든 소수를 제외하면 민주화 세대라는 타이틀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탈정치적인 경향을 보였다. 한편으로는 과거 급진주의의 잔영 탓에 (혁명적이지 않은) 현실의 야당이나 진보정당들에 냉소적이면서도 IMF 이후 한국의 사회적 질서가 급속히 재편되던 시기에 주식과 부동산 붐을 타고 자산을 늘리는 재미에 빠지거나 아니면 더욱 각박해진 사회에서 생존투쟁에 바빠 사회운동에 대한 관심은 낮은 편이었다.

노무현의 집권은 이 세대에 있어 하나의 상징적인 사건이었는데, 그것은 이들에게 사회 지도세력으로 등장했음을 알리는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작 노무현 집권 시기에 이들은 노무현에게 등을 돌렸다. 그 이유는 주로 “무능”이었는데, 그 무능이 자신들의 안정과 자산을 제대로 지켜주지 못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명박의 지지율이 무섭게 치솟던 2007년 대선 전야에 나는 이 세대의 사람들로부터 “이 정도 왔으면 한 번 바뀌는 것도 괜찮지 않냐”, “이제 한국에서도 보수와 진보가 번갈아 정권을 쥐는 선진국적인 모습을 보여줘야지” 같은 말을 심심찮게 들었다.

그런데 이명박이 집권하여 불과 몇 달 사이에 보여준 모습은 이들로 하여금 일종의 정치적 각성을 불러일으켜 불과 몇 달도 안 돼 촛불투쟁을 통해 다시 거리로 뛰쳐나오게 만들었다. 그리고 노무현의 죽음은 이 세대가 마침내 과거의 그림자가 낳은 가식적인 급진성과 냉소주의를 버리고 본래의 계급적 위치에 맞는 자유주의적 성향을 뚜렷이 드러내는 계기가 되었다. 영화평론가 허문영은 <변호인>에 대한 글(“그를 전설의 서사로 추어올리지 마라!” - <씨네21> 942호)에서 <변호인> 열풍을 “그처럼 착한 사람을 우리가 자살로 내몰았다”라는 죄의식에 의한 것이라고 풀이하는데, 나는 오히려 극중 송우석 변호사에 대한 자기 동일시의 감정이 더 크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돈밖에 모르던 속물에서 세상의 불의에 대한 정의감으로 거리로 나오는, “이러면 안 되는 거잖아요”라고 외치며 자식들에게 이런 세상을 보여주고 싶지 않다고 말하는 송변의 모습에는 확실히 촛불 이후 거리로 나오기 시작한 386세대들과 묘하게 닮은 점이 있다.

80년대를 불러내는 비겁한 변명

물론 누구든 밀실에서 광장으로, 거리의 투쟁으로 뛰쳐나오는 것은 당연히 환영하고 고무해야 할 일이다. 그러나 문제는 이 세대의 의식이 여전히 80년대에 머물러 있으면서 동시에 그 시대에 대한 기억을 왜곡하고 있다는 것이다.

부림 사건의 피의자들이 빨갱이가 아니며 송변은 오로지 정의의 이름으로 이들을 변호하는 것이라는 이 영화 전반의 태도가 전형적으로 그런 예이다. 영화 속에서 임시완이 분한 대학생은 고문 경찰관이 너의 사상이 뭐냐고 묻자 “실존주의요?”라고 대답하는 순진한 대학교 1학생으로 등장한다. 헌데 이게 과연 진짜 사실의 전부였을까. 80년대 학생운동의 특징은 이념화와 급진화였고 이는 낭만적 자유주의에 기댄 70년대 학생운동과 근본적으로 다른 점이었다. 학생운동사에서 그 출발점은 80년 학림(전민학련) 사건이었다. 부림 사건 자체도 부산에서 일어난 학림 사건이라는 뜻에서 붙여진 것이었으며 사건의 발단 자체가 전민학련/전민노련 사건의 주모자로 알려진 이태복과 연관성 때문이었다.

공안기관이 명확한 증거 없이 사건을 만들어내기 위해 행한 조작과 고문은 당연히 부당한 일이다. 하지만 부림 사건이 영화에서 묘사되듯이 순진하고 비정치적인 독서모임은 결코 아니었다. 일단 피의자들의 연령대부터 영화에서 묘사되는 것과 달랐다. (대부분 졸업생들과 직장인들이었다.) 그리고 그 시대에 폭력혁명을 부르짖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었나? 부림 사건에 대한 <변호인>의 접근 방식, 재현방식은 과거에 대한 매우 부정직한 재현이다. 나는 이런 태도가 단순히 극적 장치가 아니라 과거 자신들이 가졌던 급진주의와 단절하고 회피하려는 현재의 386세대들이 가진 자유주의적 집단의식의 현주소라고 생각한다.

386세대들은 90년대 들어 집단적으로 거대한 사상전환과 의식적 변화의 시기를 거쳤다. 내가 여기서 이를 “전환”이나 “변화”라고 지칭하는 것은 변절이라고 하기에는 그 규모가 너무 컸기 때문이다. 비교적 짧은 기간에 한 세대가 통째로 급진적인 사상에 푹 담가졌다가 빠져나왔다. 변호사 노무현 역시 그러한 과정을 겪은 사람들 중 하나였을 것이다. 그러나 <변호인> 속의 송우석은 처음부터 끝까지 그냥 정의로운 사람일 뿐이다. 영화 속에서 송우석이 오래 전에 떼먹은 얼마 안 되는 돈을 갚기 위해 다시 국밥집을 찾는 대목은 그의 타고난 정의감을 보여줌으로써 후반부의 변신의 근거를 제시하기 위한 설정인데, 반면 그가 이 재판 과정에서 어떤 사상적, 의식적인 변화를 일으키는지는 완전히 생략되어 있다. (허문영의 글은 영화 <변호인>이 의도적으로 기각하고 있는 사상의 문제에 대해 흥미롭게 지적하고 있다.)

사실 한국에서 90년대 후반 이후 영화 산업의 부흥 자체가 이 집단적 전향 과정의 산물일 수 있다. 가라타니 고진은 근대일본 문학의 탄생이 메이지 유신 이후 자유민권 운동의 패배 속에서 형성되었다고 지적했다. 정치가 패배한 곳에서 미학적 영역으로 도피가 일어났다는 것이다. 한국의 90년대 영화 붐과 영화 산업의 부흥 역시 이와 비슷한 현상으로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파업전야>를 사실상 감독했다고 알려진 창작집단 ‘장산곶매’의 장윤현은 97년 한국 영화 산업 부흥의 출발점으로 꼽히는 상업영화 <접속>을 감독했다. 패배한 운동에서 자신을 실현시킬 수 없었던 많은 운동권 출신 젊은이들이 영화계로 들어갔고 이들이 90년대 말과 2000년대 한국영화의 새로운 물결을 일으키는 인적 자원이 되었다. <파업전야>가 제작된 1990년과 <접속>이 나온 97년 사이 세대 전체가 일으킨 의식의 변화는 그 두 영화의 정서적 차이와 엇비슷한 것이었다.

최근 들어 <응답하라> 시리즈나 <건축학개론> 등 2000년대 이후의 살벌한 신자유주의 시대와 다른 탈정치적이고 평화로운 시대로 90년대를 향수하는 영화나 드라마가 나오고 있지만, 최근까지 한국 영화에서 90년대를 다룬 작품은 드물었다. 너무 가까운 과거라서 그럴 수도 있지만, 아마도 이 세대에 있어 그 시기는 굳이 별로 돌아보기 싫은 사춘기 같은 때였을 수 있을 듯하다.

지금 386세대는 영화계에서 문화적 권력의 위치에 있다. 그 때문인지 2000년대 말부터 한국의 상업영화는 간간히 80년대를 다루었으며, 특히 지난 정권 시기에 이러저러한 장애들에도 불구하고 80년대 혹은 80년대의 기억을 소환하는 영화들이 제법 많이 등장했다. 이 영화들이 80년대를 불러오는 방식에는 하나의 전형성이 있다. 그것은 고문과 같은 80년대의 폭력성과 비정상성에 대한 부각이다. 그 시대가 갖고 있던 이념성 뿐 아니라 그 세대가 내면화했던, 적어도 90년대 초의 영화와 소설들에서 자주 지적되곤 하던 그들 내부의 폭력적, 억압적, 권위주의적인 성향들은 이제 까맣게 망각되고 386세대는 정의감에 넘친 순결한 세대로 영화 속에서 재현되고 있다.

이명박근혜 정권의 권위주의적 행태와 민주주의의 후퇴는 박정희의 유신체제나 전두환 정권 같은 억압적 체제와 결코 동일한 것이 아니지만 이런 식의 태도들은 그 때나 지금이나 똑같다고 이야기하며 다른 문제들을 가리는 효과를 낳는다.

386세대들에게는 고문과 폭력이 횡행하던 시대를 투쟁으로 뚫고 나왔다는 자긍심이 있는 것 같다. 한때의 혁명가 지망생에서 자유주의자·진보주의자로 변신한 이후에도 과거의 화려한 무용담을 늘어놓거나 학생운동 시절을 잘 나갔던 영광의 시대로 기억하는 사람들은 무척 많다. 결국 <변호인>과 같은 영화들은 ‘다시 그 시대로 돌아갈지 모른다, 우리를 따르라’는 그들의 선민의식을 자극한다. 이런 태도는 현실의 변화와 차이들을 지우고 (민주 대 반민주라는) 낡은 전선과 (노무현이라는) 낡은 상징으로 돌아갈 것을 끊임없이 요구하고 있다.

반성 없는 퇴행적 서사

<변호인>은 87년 6월에 정지한다. 그런데 과연 이 87년의 승리는 무엇을 갖고 왔던가? 여기서 <변호인>은 아무 대답하지 않는다.

송변의 후일담은 온 국민이 다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는 87년 이후 제도권 정당에 투신하여 국회의원이 되고, 청문회로 전국구 스타가 된다. 김대중 정권 하에서 장관이 되고, 결국 대통령이 된다. 그리고 자살한다. 그리고 우리는 비규직노동자들의 눈물을 닦아준다고 해놓고 그 뒤통수를 후려치던 노통을, 한미FTA 체결을 강행하며 신자유주의를 설파하던 노통을 아직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그럼에도 <변호인>의 태도는 이 모든 것이 지금 와서 그렇게 중요한 일이 아니니 잊어버리라고 말하는 듯하다.

<변호인>이 기대고 있는 영화적 전통은 프랭크 카프라의 <스미스 씨 워싱턴에 가다 (1939)> 같은 고전 헐리우드 영화의 인민주의적인 영웅담이다. 이런 인민주의 영웅담은 많은 문제가 있지만 결국에는 자유와 민주주의, 정의가 승리한다는 미국식 민주주의 체제의 우월성을 역설한다. <변호인> 역시 87년이 만들어낸 이른바 “정상적인”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승리를 말하고 있으며, 군사정권의 비정상성을 문제 삼을 뿐 이 체제 자체에 대한 반성적·비판적 의식을 만들어내지 않는다.

많은 사람들이 말하듯이 <변호인>은 매우 잘 만든 상업영화이다. 자신에게 부여되는 위대한 과제를 회피하던 주인공이 결국 자신의 운명을 깨닫고 숨겨진 자질을 발휘하여 세상을 구원한다는 이야기는 오래됐지만 여전히 매력적인 이야기이다. 이런 전형적인 영웅서사를 통해 <변호인>은 관객의 동일시를 이끌어내고 그것을 현실로 믿고 싶은 욕망에 부응한다. 그리고 이 영화는 종국에 가서 자막을 통해 아예 스스로 “실화”, 현실이라고 선언함으로써 이러한 환상을 완성한다. 이것은 퇴행이다.

이정인 (wjddls72@jin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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