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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cus] 그것은 민주주의가 아니다

  • 분류
    The FocuS
  • 등록일
    2014/04/03 11:02
  • 수정일
    2014/04/03 11:04
  • 글쓴이
    사노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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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피노자는 <신학정치론> 서문에서 자유로운 나라에서는 “행동만이 고발되어야 하고, 말은 처벌되지 않는다”고 썼다. 당시로서 극히 혁명적인 생각인 것 같지만 이것은 스피노자가 한 말이 아니다. 놀랍게도 고대로마의 역사가 타키투스의 <연대기>에 나오는 말이다.

타키투스가 이 말을 한 것은 로마의 2대 황제 티베리우스가 존엄훼손법(maiestas)을 부활시킨 것을 비판하기 위해서였다. 그에 따르면 제정 이전에 존재하던 존엄훼손법은 본래 모반, 폭동을 비롯하여 로마 시민의 존엄을 손상시켰다고 판단되는 행위 일반에 대한 법률이었으며 행동만이 고발되었을 뿐 말에 대해서는 처벌하지 않았다고 한다. (타키투스, <연대기> 1부 72) 하지만 티베리우스는 이 법을 부활시키면서 황제와 그 일가에 대한 비판에 무차별적으로 적용시키기 시작했다. 이 존엄훼손법은 이후 유럽 법에서 역모죄를 다루는 모든 법률의 시초가 되었다.

따라서 우리는 행동을 문제 삼을 뿐 말을 문제 삼지는 않는다는 것이 굳이 현대 민주주의를 논할 필요 없이 제정 이전의 고대 로마에서도 상식으로 통용되던 원리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진보당 이석기 의원이 내란음모죄 및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1심에서 12년 형을 선고받았다. 내란음모죄라는 것은 결국 로마의 존엄훼손법을 이어 받은 서구의 반역법(treason law)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이 판결은 전근대 사회에서 역모죄가 흔히 그랬듯이 한 개인에게 12년 형이라는 중형을 내린 것치고 근거가 매우 박약하다. 유일한 증거로 제출된 녹취록에 대한 국정원의 날조가 재판의 주요 쟁점으로 떠올랐지만 보다 심각하게 생각해봐야 할 지점은 이 법 자체가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자기부정과 퇴행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부활하는 역모죄

서구 국가들에서 반역법의 전통은 제정로마시대 존엄훼손법의 후손이며 군주제의 유산이다. 이는 아직 군주제가 남아있는 나라들에서 이 법이 주로 국왕과 왕족의 신변에 대한 위협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명백히 드러난다. 사실 이 법은 우리가 흔히 조선시대 사극에서 보게 되는 역모죄와 별 다를 바가 없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전제 왕권이 존재하는 나라에서 역모죄는 반대세력을 탄압하는 가장 강력한 무기였다. 누구든 역모죄로 잡혀간다는 것은 혐의만으로 일족의 멸문을 각오해야 했으며, 대부분의 경우 이에 대한 수사와 재판은 별 근거 없는 고변으로부터 시작되어 관련인사들을 무차별적으로 잡아들인 다음 고문으로 쥐어짠 자백을 통해 죄를 입증했다. 그러므로 모의 혐의 자체가 죄가 되는 역모죄는 이른바 근대 민주주의의 기본원리라고 할 수 있는 정치·사상의 자유, 증거주의, 무죄추정의 원리 등과 근본적으로 충돌한다.

따라서 근대 부르주아 혁명 이후 서구국가들에서 본래적 의미에서 반역법은 사문화되었으며 현대에 와서는 대개 전쟁 시 적국에 대한 부역행위를 다루는 것으로 축소되었다. 따라서 20세기에 이 법이 적용된 사례들은 대부분 전시 부역행위나 간첩 행위에 제한되었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21세기 들어 호환·마마처럼 이미 사멸된 반역법이 부활하고 있다. 이는 비단 한국만의 일이 아니다.

미국에서도 9.11 사태 이후 테러와의 전쟁, 아프가니스탄·이라크전쟁이 잇따라 선포되며 반역법이 다시 부각되고 있는 듯하다. 2001년에는 취재를 위해 핵발전소 사진을 찍던 기자가 전시에 국가 기간시설 사진을 찍는 것은 반역법 위반이라는 이유로 구금을 당한 일이 화제가 된 적이 있었고, 근래에는 위키리크스에 군사기밀을 적용한 브래들리 매닝이나 미국 국가안보국의 민간인 감시 행위를 폭로한 에드워드 스노우든에 대해 반역죄를 적용해야 한다는 여론이 있었다.
 

정치·사상의 자유와 반란의 권리

내란음모죄 같은 반역법의 부활은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자기 부정이다. 부르주아 민주주의야말로 그 시작부터 정부에 대한 반란의 권리를 국민의 권리로 인정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정치·사상의 자유가 내면의 자유, 양심의 자유이기 때문에 이석기와 진보당 사건에 적용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들은 사회 안전을 위협하는 사상을 용인하면 안 된다고 말한다. 물론 스피노자 같은 인물이 자유로운 국가를 꿈꾼 것은 중세의 억압적인 잔재들 속에서 양심의 자유, 종교의 자유를 얻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이러한 내면의 자유, 양심의 자유를 쟁취하기 위해 수백 년간 전쟁과 반란과 혁명의 시대를 거치며 피를 흘려야 했다.

스피노자와 동시대인이자 근대 부르주아 정치사상에 절대적 영향을 끼친 존 로크는 이미 피통치자들에게 반란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홉스와 마찬가지로 국왕의 권력은 피통치자들이 계약에 의해 위임한 것으로 보았으나, 절대왕정을 옹호한 홉스와 달리 국왕에 의해 그 계약이 파기될 때 피통치자들에게는 국왕을 몰아낼 권리가 있다고 주장했다. 로크는 선출된 대표들이 방해를 받아 의회를 열지 못할 때, 외세가 국민에 대한 권력을 부여받을 때, 선거제도나 절차가 국민의 동의 없이 바뀔 때, 법치가 유지되지 않을 때, 정부가 국민들에게서 권리를 빼앗으려고 할 때 피통치자들은 반란을 일으킬 정당한 권리를 가진다고 했다. 그리고 실제로 부르주아들은 결국 국왕에 대해 반란자가 되어야 했으며, 반란권의 인정은 따라서 근대 부르주아 정치사상에 태생적으로 깊이 각인돼 있는 것이었다.

그래서 근대 부르주아 혁명이 가장 멀리 관철되었으며 아직까지 가장 원초적인 형태로 남아 있는 미국 헌법에서는 수정헌법 2조를 통해 여전히 인민이 무장할 권리를 보장하고 있다. (물론 오늘날에는 형식만 남아 우파 민병대와 보수적인 총기보유법의 근거가 되어 자유주의자와 좌파의 골칫덩이가 되어 있는 것이 현실이지만.) 대혁명 이후에 1793년 산악파가 제출하고 국민공회가 채택한 프랑스 헌법에서도 정치·사상의 자유와 함께 “억압에 대한 저항은 사람의 다른 여러 권리의 귀결(33조)”이며 “정부가 인민의 권리를 침해할 때, 반란은 인민과 인민의 각 부분에게 가장 신성한 권리이자 가장 불가결한 의무(35조)”라며 국민들의 저항과 반란의 권리를 당연한 것으로 인정했다.

반란의 권리가 인정된다고 한다면, 반란을 일으키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모의하고 선동해야 한다. 그럼 정치·사상의 자유는 어떻게 되어야 할 것인가? 절대적으로 보장되는 것이 원칙이다. 예컨대 미국의 수정헌법은 제 1조에서 “의회는 표현의 자유, 출판의 자유를 제한하는 어떤 법률도 제정할 수 없다”고 못 박고 바로 그 다음 조항에서 “무기를 소장하고 휴대하는 인민의 권리를 침해할 수 없다”고 명시하고 있다. 이는 당시 사람들에게 이 두 권리가 서로 밀접하게 연관돼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졌음을 보여준다. 따라서 근대 인민혁명에 의해 쟁취된 정치·사상의 자유란 단지 양심의 자유, 내면의 자유로 한정될 수 없는 것이다.

반란이 대중의 동의를 받지 못해 실패할 경우 처벌을 면하기 어렵겠지만 (그리고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의 대상이 아니라고 한국의 어느 공안 검사가 말하지 않았던가) 단지 모의하고 선동한 것만으로 처벌 받는다면 이는 결국 전제정치로 돌아가는 것일 수밖에 없다.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한계와 퇴행

근대 초기 부르주아 정치 사상가들이 꿈꾼 세계는 기본적으로 부르주아들의 과두제 국가였다. 오늘날 이른바 자유민주주의의 사상적 기초를 형성했다는 많은 정치사상가들 중 스피노자를 제외하고 민주정이라는 말을 주요하게 언급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아마 스피노자조차도 저잣거리의 갑남갑녀들이 정치에 참여하는 국가를 상상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예컨대 로크는 <통치론 two treatises of government>에서 민주주의라는 말을 거의 쓰지 않았다. (‘democracy'라는 단어는 이 책에서 딱 세 번 나온다.) 로크가 겨냥한 것은 어디까지나 국왕의 자의적 권력을 제어하는 것이었다. 그 결과 그는 법률과 절차를 중시하는 것으로 나아갔다. 하지만 부르주아는 자신들의 힘만으로 왕과 귀족의 권력에 맞설 수 없었기 때문에 결국 보편적인 인권에 호소하여 하층민들의 분노를 업고 권력을 장악했다. 이 과정에서 고대 아테네 이래 천 년 넘게 잊혀졌던 민주주의라는 개념이 다시 대중적인 용어로 부활했다.

그러나 일단 지배계급이 되고 나자 부르주아 역시 군중에 대한 공포에 시달릴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이들은 자신들의 무기가 된 민주주의의 기본 권리들을 끊임없이 제한하고 과두제로 되돌아가려는 경향을 보였다. 국왕의 전제를 견제하는 무기로 사용되던 법과 절차는 차츰 대중의 지배를 통제하는 기제로 변화했으며, 선거권은 재산을 가진 남성에 한정되었고 여성과 프롤레타리아트는 애초부터 시민이 아니었다. 노동계급과 여성들은 스스로의 투쟁을 통해 근대 부르주아 혁명이 일어 난지 한 세기가 지난 19세기 말과 20세기 초가 돼서야 점진적으로 선거권을 쟁취했다.

19세기 후반 부르주아들이 가장 두려워 한 것은 막 본격화 되고 있던 노동운동과 혁명사상의 결합이었다. 비스마르크는 1878년에 사회주의자 탄압법을 제정하여 십 년 간 사회주의자들의 활동을 불법으로 묶어 두었으나 사회민주당과 노동운동의 성장을 막을 수 없었다. 1차 대전과 러시아혁명 이후 유럽 대부분의 국가들에서 보통선거제가 일반화된 뒤, 부르주아는 몰락하는 소부르주아의 분노와 광기의 표현인 파시즘에 의존해서 사회주의와 노동운동을 억압했다. 그러나 파시즘이 결국 2차 대전이라는 엄청난 참화를 일으키고 자멸하자 오히려 파시즘의 부활을 핑계로 정치·사상의 자유의 제한을 제도화시키려는 시도가 나타났다.

2차 대전 이후 미국과 서유럽 국가들에서는 “투쟁적 민주주의”라는 개념이 등장했다. 이는 이른바 “자유민주주의”를 절대적인 체제로 만들어 그 외에 다른 체제들을 배척하는 것이었다. 파시즘은 핑계에 불과하다는 것은 곧 명확해졌다. 1940년에 도입된 스미스 법은 폭력으로 정부를 전복하는 것을 가르치거나 옹호하는 행위, 그것을 위해 사람들을 조직하는 행위, 그리고 그것을 모의하는 행위를 모두 불법으로 규정했으며 곧바로 미국 국내의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탄압에 이용되었다. 이는 수정헌법 1조를 명백히 위배하는 것이었으나 지배계급은 공산주의에 대한 과장된 공포를 조장하여 연방대법원을 통해 스미스법을 합헌으로 판결했다.

1990년대 들어 소련이 몰락하자 더 이상 동구권에 대한 공포를 가지고 국민의 자유를 억압하고 반정부 세력을 탄압하는 일이 어려워졌다. 냉전 체제가 종식되고 역사가 종말했다는 부르주아들의 찬가에도 불구하고 90년대 이후 세계화와 신자유주의의 공세에 대해 “반세계화 운동”이라는 새로운 형태의 국제적 반정부 투쟁이 등장했다. 99년 시애틀 투쟁 이후 반세계화 투쟁은 2001년 7월 이탈리아에서 경찰의 총격으로 사망자가 발생하는 등 점점 심각해졌고, 이에 대해 미국 정부와 서유럽 국가들은 2001년 9·11테러를 계기로 민주적 권리들에 대한 대대적인 공격에 나섰다. 21세기에 전근대적인 역모죄, 즉 반역법이 부활하고 있는 것은 바로 소련과 동구권 붕괴 이후 반정부 운동을 억압할 수 있는 새로운 제도적 도구의 필요성 때문이다.
 

그것은 민주주의가 아니다

9·11 이후 미국정부는 테러의 위협을 통해 공안기관을 강화하고, 항상적인 전시상황을 조성해 공안정국을 조성했으며, 자유와 인권을 제약하는 “애국자법” 같은 새로운 악법들을 대거 도입했다.

한국에서도 비슷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북한이 더 이상 현실적인 위협이 되지 못하는 상황에서 국가보안법의 약발이 떨어진지는 이미 오래다. 이 때문에 사노련과 해방연대에 대한 재판에서 검찰은 국가변란선전선동목적 단체라는 새로운 조어를 만들어냈지만 처벌의 수준은 가벼웠다. 그러나 내란음모죄의 부활은 북한과 연계가 없으면서도 자본주의 체제의 타도와 사회주의 혁명과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를 주장하는 반정부 세력을 탄압하는 더욱 강력한 무기가 될 것이다.

최근의 국제적 대중투쟁에서 민주주의가 이슈로 부각되는 상황은 세계적인 민주주의의 후퇴라는 배경이 깔려 있다. 그러나 민주주의 후퇴에 맞선 투쟁에 있어 한국의 자유주의자들과 일부 운동진영은 자유 “내란음모”를 내세운 이석기 의원과 진보당에 대한 공격에 쉽사리 부화뇌동하는 모습을 보였다.

진보당 사태는 그들이 내세우는 “합리적 진보”의 실체가 무엇인지 명확히 보여주었다. “헌법 밖 진보는 용납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민주주의는 지금 같은 광범위한 민주주의 후퇴의 시기에 고대 로마에서 통용되던 원리조차 방어하지 못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것은 민주주의가 아니다.

이태영 (picollo@jin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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