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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cus] 노동조합 투쟁에 대한 엇갈리는 평가, 혹은 침묵에 대해

  • 분류
    The FocuS
  • 등록일
    2014/04/03 11:09
  • 수정일
    2014/04/03 11:09
  • 글쓴이
    사노신
  • 응답 RSS



노동조합 투쟁의 과정과 마무리에 대한 평가는 정치적 입장과 자신이 처한 위치에 따라 다를 수 있다. 중요한 것은 투쟁을 함께한 사람들 사이에서 평가에 대해 활발하게 논의하는 것이다. 하지만 최근 노동조합 투쟁에 대한 논의들은 중요한 사안임에도 몇몇의 활동가들 사이의 논의로 묻혀버리는 경우가 많다. 아는 사람만 아는 내막은 공개적으로 작성되는 글의 몇 문장에서 행간을 읽어내야 하는 것이 되어버리곤 한다.

이렇게 잘 드러나지 않은 평가 중에는 집행부에 대한 비판적 평가도 포함되어 있다. 그런 점에서 평가를 자제하자는 입장은 노동자 민주주의에 대한 특정한 태도와 맞물려 있다. 이는 최근 철도파업을 비롯한 몇몇 노동조합 투쟁에서 나타났다.
 

엇갈리는 평가

역대 최장기인 23일간의 철도노조 파업이 마무리된 작년 12월 30일, 운동진영에서의 반응은 크게 둘로 갈렸다. 한편에는 철도노조 지도부의 합의과정과 그 내용에 대해 비판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국회 철도산업발전소위원회의 구성이라는 합의는 사실상 무의미하다는 점, 징계를 비롯한 후폭풍에 대해 아무런 보장이 없다는 점, 보수정당들과의 합의이기에 투쟁의 방향이 왜곡됐다는 점, 일부 철도노조 임원을 제외하고는 조합원을 비롯하여 연대한 수많은 시민들도 합의에 이르는 논의과정을 전혀 몰랐다는 점, 조합원의 의견 수렴과정 없이 집행부가 일방적으로 파업철회를 선언했다는 점 등이 지적됐다.

다른 한편에는 당위적이고 도덕적인 것에 불과한 비판을 자제하자는 견해가 있었다. 그 어떤 현실적인 돌파구가 없는 상황에서 달리 선택할 길이 없었다는 점, 오히려 이러한 평가가 다시 시작될 투쟁을 앞두고 조합원들의 의지를 고양시키는 데 방해가 된다는 점 등을 제기했다.

23일간의 철도노조 파업이 진행되는 동안 누가 생각해도 집행부는 막막했을 것이다. 물론 국민적 지지는 그 어느 때보다 분명했다. 파업 또한 조합원 이탈이 크지 않은 수준에서 지속되었다. 그러나 박근혜 정부는 그 어떤 타협의 여지를 주지 않았다. 집행부로서는 파업의 힘이 꺾이기 전에 일단락지어야 한다는 생각을 현실화할 수 없는 상황이다. 그런 와중에 새누리당의 김무성이 계기를 열어준 것이다. ‘필공’ 파업으로 확대하지 않을 것이라면 이 기회를 통해서라도 마무리를 지어야 하는 상황이었다.
 

민주노조의 민주주의

그렇다면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기에 합리적인 판단을 한 집행부를 비판하면 안 되는 것인가?

위원장은 노동조합의 대표로서 합의의 체결권자다. 따라서 자본가들은 노조 위원장이 노동자투쟁과 거리를 두고 자신들과의 ‘대화’를 통해 합의서에 도장 찍기를 바란다. 그러나 민주노조 운동의 역사는 총회민주주의와 뗄 수 없는 관계를 가지고 있기도 하다. 위원장이 합의를 했더라도 조합원 총투표에서 통과가 되지 못한다면 자본과 정권이 뭐라고 말하건 상관없이 합의안을 폐기하고 새로운 집행부를 세우는 것이 민주노조 운동의 원칙이었다.

여전히 위원장이 사측과 ‘잠정합의’를 하고 조합원 총투표를 통해 최종 합의를 이루어내는 과정이 노동조합의 일반적인 과정으로 남아있는 것 또한 이러한 역사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노조 위원장의 법적인 체결권과 노동조합 민주주의 사이에서의 갈등은 노동조합 투쟁을 둘러싼 평가의 차이를 불러오는 주요한 원인이라 할 수 있다.

이 문제는 지금까지 수많은 노동조합 투쟁에서 지속적으로 등장했다. 특히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하더라도 ‘노동조합 관료주의’는 아주 중요하게 제기되는 문제였다. 조합원들의 투쟁이 뻗어나가는 상황에서 노동조합 집행부의 일방적인 결정(직권조인)으로 그 기세가 꺾이고 투쟁의 전선이 급격히 후퇴하는 상황은 적지 않았다.

대표적으로 1998년 민주노총의 정리해고와 근로자파견제 직권조인에 대한 투쟁이 있다. 1996~7년의 총파업 투쟁 이후 1998년 민주노총이 노사정협의체에 들어가 정리해고제와 근로자파견제 도입에 합의하는 직권조인을 했을 때 대의원들은 현장의 분노에 따라 그 집행부를 끌어내리고 그 결정을 무효로 만들었다. 그러나 새로 꾸려진 총파업 투쟁 비대위마저도 “노사가 공멸할 것이라는 국민의 우려와 걱정을 받아들여 파업을 철회”했다. 이러한 과정에서 민주노총 내 ‘현장파’가 현장의 전투적 투쟁을 기반으로 관료주의와 의회주의를 극복하기 위해 전국현장조직대표자회의로 결집하기도 했다.

그러나 대규모 사업장 정규직 노동조합 차원의 전면적 투쟁은 2002년 발전파업을 마지막으로 등장하지 않았다. 이제 관료주의의 문제는 주로 정규직 노동조합 중심 노동운동의 내부가 아닌 사내하청, 비정규직 사업장, 장기투쟁사업장과의 관계 속에서 제기되기 시작했다. 노동조합 집행부 혹은 상급단체가 자신의 권한으로 ‘관리가 안 되는’ 비정규직/장기투쟁을 회피하거나 가로막는 양상이 두드러졌다.

류기혁 열사투쟁에 대한 현대차 정규직 노동조합의 회피, 현대중공업 박일수 열사투쟁 중단 종용, 기아차 비정규직 투쟁에 대한 통제를 위한 정규직 노동조합과의 1사1조직 강제, 위로금에 투쟁을 정리한 금속노조의 하이닉스 투쟁 직권조인, 원칙을 유지하며 투쟁하는 재능지부와 한국보건복지정보개발원분회 조합원에 대한 상급단체의 탄압 등 그 사례는 무수히 많다. 이런 흐름 속에서 과거 ‘현장파’로 분류되던 현장조직들 또한 조합주의와 관료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별반 다르지 않은 태도를 보여 구분의 의미가 없어졌다.
 

사라진 문제제기

이런 점에서 이번 철도파업은 한동안 뜸하게 언급되던 문제를 다시금 생각하게 하는 투쟁이다. 그만큼 대규모 정규직 노동조합이 오랜만에 보여준 강력한 투쟁이었기에 비판적 평가를 자제하는 분위기도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철도노조 집행부의 결정은 문제가 많았다. 합의과정에 대해 전혀 공개되지 않았으므로 결정 이전에 토론을 할 수 없었다. 파업 철회는 토론도 이루어지지 않은 상황에서 지침으로 내려졌다. 이는 직권조인과 별 차이가 없는 것이다.

철도노동자와 민주노총 조합원, 그리고 철도파업을 지지하는 많은 사람들이 모인 12월 19일 집회에서 임원과 명망가들, 심지어 민주당 인사에게 발언 기회를 주었을지언정 조합원을 비롯한 여타 참가자들에게는 아무런 기회도 주어지지 않았다. 이것이 지금의 노동조합 민주주의를 보여주는 단적인 모습이 아닐까. 파업을 결의하고 앞으로 투쟁에 대해 논의하기 위해 공권력의 침탈이 있더라도 조합원 총회를 열어야 하는 것이 원칙이던 모습은 찾아보기 힘들다. 투쟁과정을 집단적 논의와 결정의 장으로 만들어가려는 문제의식을 찾아보기 힘들다.

따라서 노동조합 집행부가 어쩔 수 없는 판단을 했다는 주장은 이 문제에 대한 적절한 답변이 될 수 없다. 과정이야 어쨌든 결과적으로 합리적인 판단이라는 주장은 조합원들을 투쟁의 주체로 생각하지 않는 것이기도 하다.

노동조합 위원장에게 조합원들과의 대화 없이 투쟁의 방향을 정하고 합의를 체결할 수 있는 제도적 권한이 있다는 것은 변하지 않은 현실이다. 그리고 역사적으로 이 권한은 투쟁을 확대해나가자는 경향에 맞서 투쟁을 ‘조절’하는 기능을 한 경우가 상당히 많았다. ‘노동조합 집행부의 판단은 노동조합의 상태와 조합원의 정서를 합리적으로 반영한 것’이라는 생각은 노동조합 운동이 빠지기 쉬운 조합주의와 관료주의에 맞닿아있다는 점에서 위험하다.
 

확대되어야할 노동자 민주주의

최근의 노동조합 투쟁에서 드러나는 민주주의의 문제는 단지 노동조합 내부로 국한되지 않는다. 물론 노동조합 투쟁은 과거에도 항상 단사 차원의 문제를 뛰어넘는 의미를 지녔다. 그러나 지금 상당수의 투쟁사업장은 연대하는 많은 사람들이 함께 투쟁을 이끌어나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번 철도파업처럼 노동조합 외부에서의 연대와 지지의 수준이 높은 경우도 마찬가지다. 철도노조가 여론의 압도적지지 속에 파업투쟁을 지속할 수 있었던 점이나, 민주노총이 자체적으로 파업의 힘을 갖추지 못하는 상황에서 ‘국민’총파업을 계획하는 것에서 보듯이 투쟁의 힘 중 상당부분은 민주노총 외부에 있었다. 여론의 지지가 상당한 것을 넘어 다양한 실천적 연대가 이뤄졌다. 이런 경우 어떠한 소통도 없이 누군가의 독단적인 결정으로 투쟁이 마무리 되는 것에 의아해할 사람들은 단지 조합원들만이 아니다. 투쟁이 노동조합 질서를 뛰어넘어 이루어지고 있다면 민주주의 또한 그만큼 확대되어야 한다.

이는 과거의 ‘국민과 함께하는 노동운동’과는 전혀 다른 문제의식이다. 민주노총이 의회정당을 만들어 의회에 들어가고 나아가 집권하는 것이 노동자 정치의 방향이라며 현장에서의 노동자투쟁은 가로막는 것이 ‘국민과 함께하는 노동운동’이 있었다. 그 이후 파업을 비롯한 많은 노동자투쟁을 관료적으로 중단하거나 가로막은 이유로 ‘선거’, ‘국민’, ‘여론’이 제시되었다.

표를 위해 투쟁하지 말자는 주장은 노골적으로 제기됐다. 그러나 이번에는 반대로 노동조합 외부에서 지지와 연대가 광범위하게 조직되었으나, 그 지지와 연대를 적극적으로 조직하고 소통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은 건 민주노총과 철도노조였다. 그들은 소통의 대상으로 조합원도 연대세력도 아닌 자본가 정당의 우두머리를 택했다. 이는 민주노총 ‘정치’가 계속해서 민주당에 종속된 결과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노동자 민주주의에 대한 문제제기는 ‘단지’ 철도노조가 더 전투적으로 싸울 수 있었는데 집행부가 이를 가로막아서 망쳤다는 것이 아니다. 설령 투쟁의 힘이 아무리 떨어지고 노동조합이 궁지에 몰려도 노동자 민주주의의 원칙을 지키고 확장하려는 가운데 정리하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의 차이를 구분하지 않을 수는 없는 것이다.

물론 노동자 민주주의의 문제는 집행부만 잘 하면 되는 문제가 아니다. 관료주의와 조합주의의 벽을 넘어서는 힘으로서 노동자 민주주의를 조합원을 비롯하여 함께 투쟁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지속적으로 만들어가야 한다. 그리고 이 힘이야말로 조합주의와 관료주의에 대한 가장 적극적인 비판이다.

김사자 (saja-kim@jin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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