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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정치인의 자격

  • 분류
    정치
  • 등록일
    2014/07/31 13:21
  • 수정일
    2014/07/31 13:27
  • 글쓴이
    사노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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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월 25일에 발행한 <focus>에 실린 기사입니다.



조희연이 압도적으로 우월한 지지율을 확보하고 있던 고승덕을 제치고 교육감에 당선되는 과정에서 가장 영향을 미친 건 ‘가족’이었다. 조희연의 둘째 아들은 ‘현실적인 어머니의 반대를 무릅쓰고 대의와 소신을 위해 출마를 결심한 올곧은 아버지’라는 꽤나 통속적인 이야기로 호소했다. 크게 감동적이지는 않았고 지지율에 큰 영향을 줄 것 같지는 않다. 오히려 이 글이 빛을 본 건 고승덕의 딸이 공개한 이야기 때문이었다.
 

“고작 11살밖에 되지 않았던 저는 아빠 없이 사는 것에 익숙해져야 했습니다. 매년 아버지의 날은 그냥 넘어가야 했지요. 사람들이 아버지는 어디 있느냐 또는 뭘 하시느냐고 물을 때마다 기분이 상했고, 결국 모른다고 대답하기 시작했습니다. 아버지가 제게 말해준 적이 한 번도 없었으니까요. 전화와 인터넷이 있었지만, 고승덕 씨는 결코 저와 동생에게 전화해서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안부를 물은 적이 없었습니다. 우리가 생일을 맞았을 때 전화를 해달라거나 선물을 사달라고 하는 건 제가 상상할 수 있는 범위 밖에 있었습니다. 그는 자기 자식들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물론 경제적인 것을 포함하여 저희의 교육에 대해 어떤 지원도 해주지 않았습니다.”

 

혈육인 자신을 제대로 돌보지 않았기에 교육감으로서 자격이 없다는 딸의 호소는 다 된 밥에 코 빠트리는 격이었다. 그렇다보니 또 다른 보수후보인 문용린의 공작이라는 등의 논란이 불거졌다. 하지만 우리가 고승덕에 대한 문제제기가 공작의 결과인지를 밝힐 건 없다고 본다. 고승덕은 정말로 미안해하고 있을까에 대해서도 궁금하지 않다. 개인사에 대한 단편적인 이야기들로 이 문제를 따지는 건 지배자들의 공방에 휘말리는 것 이상이 아닐 것이다. 게다가 그 과정에서 ‘가장으로서의 책임’ 같은 덕목만이 강조될 것이기에 긍정적이지도 않다.
 

한 집안의 가장이 가족부터 잘 이끌어 나가야지 더 큰 가족인 국가도 이끌어 나갈 수 있는 것 아니냐는 이야기들은 제도정치에 가부장제가 조금도 가리지 않은 민낯으로 존재하고 있다는 걸 보여준다. 그런 점에서 선거에서 가족 얘기가 나오는 건 한국 정치가 후진적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고들 말한다. 많은 부분 그렇다. 박원순의 부인이 선거운동을 하지 않는 것은 공격당할 빌미가 된다. 대통령이 되기 전부터 박근혜의 숨겨진 자녀가 분명히 어딘가에 있을 것이라고 믿으며 공격할 때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다. 남편이 정치를 하면 부인은 내조를 해야 하는 거고, 결혼도 안 한 여자가 애가 있으면 정치를 할 자격이 없는 것이다. 이 문제에서는 여야와 보수 진보가 따로 없다.

 

그렇다면 가족 이야기가 정치적인 문제로 제기되면 부정적일 수밖에 없는 걸까. 가족 이야기가로 제기될 수 있는 건 ‘가장으로서의 책임’이나 ‘일부종사’ 같은 것뿐일까. 가족을 정치적인 문제로 제기할 때 비로소 제대로 알 수 있는 문제들이 있다. 예를 들면 자기 인생에 걸림돌이 되니까 ‘친자’임을 부정하여 그 자녀들이 기본적인 사회보장도 받지 못하게 내버려두는 '코피노'들의 아버지가 그렇다. 예를 들어 서유럽과 북미에서 돌봄을 담당하는 이주노동자들이 늘어나면서 자신이 떠나온 가족에서 요구되는 돌봄노동의 공백이 그렇다.
 

우리는 이런 문제들을 순전히 개인의 선택의 영역으로 생각할 수 없다. 자신이 돌봄을 받아야 하거나 자신이 돌봐야 하는 관계는 자의적으로 선택할 수 없다. 그 관계는 그 사회가 얼마나 공적으로 이를 짊어지려 하는지에 따라서도 다르고 개인이 얽혀있는 가족관계에 따라서도 다르다. 복지제도를 통한 사회적 부담이 약할수록 돌봄의 책임은 전적으로 가족에게 부여되고, 이를 지탱하는 돌봄노동은 대부분 여성들이 담당하게 된다.부유한 국가의 소득이 안정된 가구는 이주여성을 고용하여 그 역할을 대신하게 할 수 있다. 그리고 이주여성이 떠나간 자리에서 가족에게 요구되는 돌봄노동은 다른 여성에 의해 채워지거나 공백으로 남게 된다. 이는 돌봄의 책임에 대한 자기 삶의 선택의 여지도 성별에 따라, 계급에 따라, 국가 간의 위계질서에 따라 다를 수밖에 없다는 점을 보여준다. 언뜻 같아 보이는 선택이라 할지라도 실제 그 사람이 처한 환경에 따라 그 의미는 확연히 다르다.

 

이러한 돌봄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개인적 선택에 대해서 어떤 판단을 하고 있는지 생각해보자. 우리는 필리핀에 있는 자녀에 대한 책임을 방기하는 남성에 대해 ‘가장의 책임’이라는 이데올로기를 거부하여 가부장제에 균열을 내고 있다고 말하지 않는다. 또한 우리는 가족 생계비를 벌기 위해 서유럽과 북미로 이주한 여성들이 자신에게 지워진 짐을 던지고 적극적으로 자유를 찾아나가고 있다고 말하지 않는다. 이런 모습은 오히려 돌봄의 책임을 다 하고 싶어도 다 할 수 없게끔 강제당하는 사람들이 있고, 그 책임을 충분히 질 수 있음에도 자기 자신의 이익을 위해 내팽개치는 사람들이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 선택은 순전히 개인적이지 않다. 오히려 가부장제가 어떤 관계 속에 지탱되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세계화된 자본주의에서 돌봄에 관하여 이루어지는 선택은 타인이 건드려서는 안 되는 사적 영역이 아니다. 돌봄을 둘러싼 누군가의 선택이 보여주는 사회적 관계가 있다. 이 사회적 관계는 공사 이분법으로 파악되지 않는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돌봄의 문제를 개인의 윤리 문제로 남겨두는 것이 아니라 그 문제가 드러내는 사회적 관계를 파악하고 정치적인 것으로 제기하는 것이다.
 

김사자 saja-kim@jin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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