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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청와대 만민공동회를 묻는다

  • 분류
    The FocuS
  • 등록일
    2014/07/31 19:19
  • 수정일
    2014/07/31 19:26
  • 글쓴이
    사노신
  • 응답 RSS
사진 출처 : Newsis

 

6월 10일 청와대 만인대회 일정이 있고 나서 며칠 후, 청와대 만민공동회를 기획하고 제안한 활동가 중 한명인 오진호 동지를 만나 세월호 참사에 대한 운동 전반과 만민공동회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바쁜 일정 중에 시간을 쪼개어 인터뷰에 응해준 오진호 동지에게 다시 한 번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 [사노신]



세월호 참사의 책임을 묻고 사회를 바꿔야 한다고 외치는 운동이 여러 차원에서 계속되고 있지만 분위기가 고양되는 시기는 지나간 것 같다. 그 운동의 한 축이었던 만민공동회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다. 어떤 취지에서 만민공동회를 제안하게 되었는가?
 

4월 16일에 사고가 났고 4월 28일 즘에 시민사회단체들의 모임이 있었다. 시민단체부터 사회주의 조직까지 굉장히 폭넓게 모이는 자리였다. 여기서 대책기구를 꾸리는 논의가 되었지만 분노를 모아가는 흐름으로 제안되는 것 같지 않았다. 추모와 애도는 있으나 운동적 흐름으로, 광장에서의 싸움으로 만들어지지 않는 것 같았다. 다른 흐름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사람들이 있었다. 이에 <청와대 만민공동회>를 제안했다.
 

이를 각 개인의 공동제안으로 성사되는 만민공동회로 기획한 이유는 무엇인가? 

특정 단체를 중심으로 제안하지 않았던 것은 무엇보다 분노하는 사람들이 경계 없이 모일 수 있는 그릇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개개인의 제안을 통해서 힘 있게 싸우는 공간을 만들어보자는 것이었다. 제안자들을 모아내는 방식의 핵심적 문제의식은 분노를 모아내는 것이었다. 그 그릇이 어떤 방식이어야겠냐는 점에서 모인 사람들이 토론을 통해서 기조를 결정하고 투쟁의 방식을 결정하는 대중총회 방식이 적절하다고 봤다. 특정 조직을 중심으로 하는 방식이 아니었기 때문에 공동의 결정과 공동의 투쟁을 만들어내야 했다. 그래도 어느 정도 지향하는 바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서 제안을 받은 사람들이 ‘청와대에 분노를 표하는 공간이겠구나.’라고 생각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지금까지의 경과는 어떤가.
 

4월 29일 밤부터 제안서가 돌기 시작해서 5월 6일 밤까지 제안자를 모았다. 그 때 1,200명이 모였다.(5월 18일 기준 총 제안자는 1,901명이다.) 첫 청와대 만민공동회를 정부종합청사 앞에서 8일에 열었다. 집회신고를 청와대 인근 3군데에 냈는데 모두 불허되어 정부종합청사에서 하게 됐다. 이 날 세월호 참사에 대해 못 다한 이야기, 앞으로의 투쟁방향, 당일 투쟁 계획에 대해 논의했다. 

아르바이트라 불리는 노동자, 이주민들도 함께 사고를 당했다는 것을 잊지 말자는 이야기, 모든 문제를 박근혜 퇴진으로 귀결시키지 말자는 이야기, 지금 당장 청와대로 가자는 이야기 등 많은 논의가 이루어졌다. 그 날 청와대로 행진했고 마침 실종자 및 생존자의 가족들이 KBS와 청와대에 항의하기 위해 서울로 오면서 함께 1박 2일 청운동 사무소 앞을 지키게 되었다. 두 번째 만민공동회는 5월 18일이었는데, 역시나 열 군데의 집회신고가 모두 불허되어 청계광장에서 진행하고 광화문 앞으로 이동해 기자회견을 진행했다.

 

처음 두 차례까지는 취지대로 열렸지만 이 이후에는 양상이 달라졌던 것 같다. 점차 세월호 참사 전반에 대한 논의보다는 투쟁 전술 중심으로 이동하는 흐름이었다.
 

만민공동회에 온 사람들이 가진 생각이 굉장히 다양했다. 횃불시민연대 등 대선 결과에 대한 비판적 입장을 가진 사람들, 개별적으로 참여한 투쟁하는 노동자들, 데모당, 시민사회단체에서 개인적으로 참가한 사람들 등등. 이들이 함께 5월 8일 만민공동회에서 박근혜 퇴진 기조를 결정했기 때문에 다음 단계는 투쟁을 벌여나가는 것이 되어야 했다. 그렇다면 이를 위한 논의가 필요한 건데, 예를 들어 박근혜를 고발하자는 등의 아이디어가 나왔는데 이를 만민공동회에서 추진하기란 쉽지 않은 것이었다. 소송의 내용이나 방향 등 구체적인 건 정해지지 않았던 건데, 이걸 가지고 만민공동회를 다시 여는 것도 적절하지 않다고 판단되었다. 그러면서 전술 중심으로 사고된 것이 중반 넘어서는 있었다. 특히 18일 지나면서 그랬다. 그 이후에는 민주노총이 투쟁 계획을 내면서 함께 하는 양상이 됐다. 

5월 30일에 만민공동회를 열었는데 결정사항은 4개 분임조로 나눠 기자 회견을 진행하자, 5월 31일 집회참가자들에게 KT 앞에서 모이자고 얘기하고 함께 싸우자는 것이었다. 그리고 5월 31일에 모여서 6월 10일 만인대회 제안하자고 결정했다. 6.10 만인대회 역시 시민들 이름을 받아서 61곳에 집회 신고를 했는데 모두 불허됐다. 당일 사전행사로 ‘가만히 있으라’ 침묵행진, 기도회, 만민공동회가 잡혔지만 만민공동회는 경찰의 원천봉쇄로 진행하지 못했다. 결국 삼청동사무소 앞에서 그렇게 투쟁하게 되었다. 특히 이날 투쟁을 주도한 대학생 동지들이 뻔한 집회의 뻔한 싸움이 아니어야 한다는 의지를 보여준 점은 높이 평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첫 만민공동회에서 다뤘던 내용은 세월호 참사 전반에 대한 문제의식과 이후 투쟁방향에 대한 것, 그리고 단기적인 투쟁계획에 대한 논의로 나뉘었던 것 같다. 만민공동회가 이후 전술 중심으로 움직이게 되었다는 건 단기적인 투쟁전술 이외에 만민공동회라는 형식으로 이끌고 가기엔 어렵다는 걸 보여준 것 같기도 하다.
 

박근혜 퇴진을 위한 대책본부를 만들자는 의견까지 나왔었다. 하지만 만민공동회에서 책임질 수 있는가에 대해 대부분이 부정적으로 생각했다. 의욕만가지고 할 수 없는 문제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박근혜에게 정치적 책임을 지라는 것을 요구하는 것과 퇴진운동만을 위한 기구를 만드는 것은 다르다고 생각했다. 박근혜 퇴진을 함께 외치고 있어도 의미하는 바는 모두 달랐다고 본다. 어디까지 같이 할 수 있을까를 조율하는 과정이 있었다. 만민공동회가 어디까지 할 수 있을까를 생각한다면 사람들을 계속해서 모으는 것 정도가 아니었을까.

 

사진 출처 : 노동과 세계


만민공동회뿐만 아니라 다른 운동적 흐름도 존재했으나 각자 따로 이루어진 측면이 있어 어려운 점도 있을 것 같다.
 

세월호 국면에서 운동단체들의 대응은 전반적으로 산만했다고 생각한다. 만민공동회는 산만한 일부분이 아니라 전체 운동을 끌어가는 한 축으로 역할하고 싶었던 건데, 18일 이후에는 혼란스러운 그룹 중에 하나가 된 것 같다. 예상한 것과는 꽤 다른 힘들이 모였다고 생각한다. 참여를 예상했던 조직들이 자기 사업을 추진하면서 모이지 않게 됐다. 조직된 운동과 거리가 있는 사람들이나 자기가 속한 조직과 상관없이 개인적으로 실천적 흐름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모였다. 여러 조직들이 하는 사업 중에 하나로 여겨지지 않고 폭넓게 광장에 모일 수 있도록 노력했지만 한계가 있었다. 물론 준비를 더 꼼꼼히 했다면 더 많은 쟁점들이 운동으로 나올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결국 박근혜 퇴진이라는 죽은 단어에 많이 쏠린 측면이 있다. 정치적 책임을 묻는 첫 정치집회를 연 곳이자 청와대로 가는 실천적 투쟁체로 여겨진 것 같다.


광장으로 많은 사람들을 모으는 것뿐만 아니라 다양한 문제의식을 운동적 흐름으로 직접 만들어가는 고민은 오히려 국민대책위가 적극적으로 했어야 한 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 이전부터 진행되어오던 대규모 집회의 양상을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다보니 청와대로 가느냐 마느냐가 정치의 급진성을 분별하는 지점인 듯이 여겨지는 기이한 구도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그런 구분선이 생긴 건 만민공동회가 작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전술적인 고민이 있었다. 수백 명이 모이는 규모인 건데, 예를 들어 광화문 사거리를 점거하는 방식이 적절하지도 않은 것 아닌가. 어떤 싸움을 만들 수 있을 것이냐. 정부가 이 사태의 책임을 지라는 의미에서 청와대로 가는 투쟁을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항상 그런 건 아니었다. 종로에서 점거하기도 하고 상황은 다양했다


그런 흐름 속에 세월호 참사가 점차 대다수에게는 ‘기억해야할 것’으로 여겨진 반면, 일부에게는 보장되지 않는 집회시위와 표현의 자유에 초점이 맞춰지게 된 것 같다. 하지만 여전히 세월호 참사를 일으킨 구조적 원인은 굳건하고 여기에 균열을 낼 어떤 운동방향이 구체적으로 제출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이는 운동진영의 대응 전반에 대한 평가에 해당하는 문제이기도 하다.
 

만민공동회가 만드는 흐름을 두고 운동단위는 신중하게 움직여야 하는 것 아니냐, 무겁게 움직여야 하는 것 아니냐, 대중의 눈높이를 맞춰서 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말하는 경우가 많았다. 운동단체들은 자신들이 뭔가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했던 경향이 강했다. 이런 고민이 전반적으로 유족들의 반응을 따라다니는 흐름으로 나아갔던 것 같다. 나는 오히려 세월호 참사를 마주하며 무엇을 바꿔야 하는지 어떻게 싸워야할지를 고민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점점 운동단체나 운동의 힘이 노회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거대한 조직으로 움직이다 되다보니 고민하고 논의하고 결정하는데 기민하게 움직이지 못하고 둔해졌다. 확실히 움직이는 양상을 보면 개인들과 단체들은 운동을 어쨌든 2000년대 후반 이후에 만들어진 흐름과는 다르다. 가만히 있으라, 데모당, 횃불시민 등의 단위들이 움직이는 방식과 기존의 시민사회단체나 민주노총을 중심으로 한 노동단체의 대응이 사뭇 달랐다. 누가 역동적으로 싸움을 만들었는지에 대해서는 확실히 갈린 것 같다. 이건 단지 나이나 기획력의 문제가 아니라고 본다. 달리지는 흐름에 대해 주목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후 만민공동회 활동방향은 어떨 것 같나.
 

외줄을 걷는 느낌으로 시작했다. 제안이 황금연휴에 이루어져 누구도 이게 제대로 될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이름 있는 단체가 제안한 것도 아니고 제안서가 있는 것도 아니고. 그런데 막 몰려들었다. 제안을 받는 것 자체가 운동적 힘을 지닌 때였다. 이 힘을 어떻게 더 확대해나갈 것인가를 고민했어야 한다. 지역별 만민공동회를 진행한다거나... 어쨌든 실질적으로 참가자들이 사이에 차이가 많은 상황에서 한계가 있지만, 다른 운동으로 어떻게 확대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서도 고민해야 한다. 

다만 만민공동회와 만인대회를 하면서 남긴 성과는 청와대 앞에서는 집회를 할 수 없다는 것을 확인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연행자만 300명이고 구속자가 5명이다. 집회시위의 자유, 표현의 자유 측면에서 더 흐름을 만들어갈 여지가 있다. 이에 대해서는 논의 중에 있다. 그리고 거리에서의 싸움을 계속 만들기 위한 시도가 필요하다. 세월호 싸움에 대한 실천적 흐름이 계속 있다는 것을 보여줘야 할 것 같다. 구속되어있는 이들에 대한 법적 대응도 중요한 문제다. 밖에서 계속 싸울 필요가 있다. 불씨를 계속 만들어가야한다.


만민공동회가 다시 열릴 계획이 있나.

분노로 모였기 때문에 점점 분노가 빠지면 박근혜 퇴진만 남는다. ‘기승전박’으로 흘러갈 가능성이 있다. 이 힘을 다른 방향으로 전환해야 하는 지에 대한 고민이 있다. 다만 백화점식 사안 나열이 아니라, 새로운 힘이 형성되는 방향이 되어야 할 것 같다.


김사자 saja-kim@jin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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