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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간 칼럼] 어용(御用)의 역습

* 7월 25일에 발행한 <focus>에 실린 기사입니다.


본래 어용(御用)이란 왕이 쓰는 물건을 이르던 말이다. 이것이 지금은 국어사전에 정의된 대로 “자신의 이익을 위해 정부나 그 밖의 권력 기관에 영합하여 자주성 없이 행동함을 낮잡아 이르는 말”이라는 뜻으로 흔히 쓰이고 있다.

우리는 보통 이 단어를 어용학자, 어용노조 같은 형태로 쓰는데, 그러니 현대적 의미로는 정부나 자본이 그들의 이해를 위해 사용하는 자주성 없는 자들을 어용이라고 부른다. 원래 어용노조라고 하면 보통 한국노총을 의미했다. 해방이후 사회주의자들이 장악한 전평(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에 맞서 우익인사들이 조직한 대한노총은 1960년 한국노총으로 이름을 바꾼 이후 80년대까지 군사독재 동안 그 외의 모든 독립적인 노조가 불법화된 상황에서 오직 정부와 자본의 이해를 대변하는 가짜노조로 존재했기 때문이다.

한국의 민주노조운동은 근본적으로 어용노조인 한국노총에 맞서며 등장했다. 한국노총을 개혁할 것인가, 아니면 새로운 민주노조운동을 건설할 것인가는 민주노조운동 초기 주요한 논쟁지점의 하나였다. 대다수 전투적 노동자들은 한국노총은 타도의 대상이지 활용의 대상이 아님을 명확히 했고, 자주적이고 계급적이며 민주적인 새로운 노조운동을 건설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2000년대 초까지만 해도 민주노총의 주요 미조직 사업장 목록에는 한국노총 사업장이 명시되어 있었다.

마지못해 끌려 들어온 한국노총 개혁론자들은 민주노조운동 내부의 노사협조주의의 기원이 되었다. 사실 노사협조주의와 어용은 분명 차이가 있는 개념이다. 한국 노동운동에서 어용은 사측의 사주를 받아 그들의 입장을 노골적으로 대변하는 세력을 가리키고 노사협조주의는 투쟁을 회피하고 실리적인 이익을 따지는 세력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갈수록 어용과 노사협조주의의 구별은 그 의미를 잃어가고 있다. 더 심각한 문제는 민주노총의 일부 상급단체들조차 이제 노사협조주의를 넘어 점차 어용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

정부도 자본도 아닌 민주노총 회계감사직에 있는 사람의 고발 때문에 조합비 횡령혐의로 강종숙 전(前) 학습지노조 위원장의 체포영장이 집행되었다. 작년 초부터 계속된 재능교육지부 분열로 벌어진 참사다. 겉으로 보기엔 한 개인의 일그러진 공명심이 낳은 독단적인 행위에 의한 사건으로 보이지만 전후사를 잘 따져보면 개인의 돌출행위만으로 볼 수 없다는 정황이 드러난다. 고소 → 징계발의 → 체포영장 집행 → 단체협약 조인 → 제명으로 이어지는 각본처럼 착착 진행된 과정을 볼 때, 과연 우연일까 하는 의구심이 들 수밖에 없다.

작년 8월 26일 사측과 합의 이후 이른바 현(現) 재능교육지부 집행부는 투쟁하는 조합원들의 집회를 방해하기 위해 사전에 집회신고를 내는 등 사실상 사측을 대리해서 행동해 왔다. 그리고 처음부터 이 모든 사태의 배후에는 상급단체인 서비스연맹이 있었다. 이런 일은 재능지부만의 일이 아니다. 스타케미칼, 보건복지정보개발원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졌다. 모두 사측의 회유에 넘어간 다수의 조합원들이 지도부를 엎고 사측을 대신해서 방해가 되는 투쟁하는 노동자들을 적극적으로 공격하고 나섰다.

조용히 투쟁을 접는 것을 넘어 다수를 이용해 집행부를 장악하고 투쟁하는 조합원들에게 징계·제명요구를 하는 적반하장의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서비스연맹은 학습지노조를 통해 투쟁하는 3인의 조합원을 제명했다. 스타케미칼의 경우도 금속노조 구미지부가 어용 집행부의 요구를 받아들여 투쟁하는 노동자들을 제명했다. 보건복지정보개발원분회의 상급단체인 서울일반노조도 투쟁하는 동지들에 대한 징계 안을 올린 바 있다.

이런 행위를 방지하기 위해 노력하고 투쟁하는 조합원들을 보호해야 할 상급단체들은 묵인과 방조를 넘어 심지어 공모와 배후 조종을 하는 경우가 발생하고 있는 것이다. 트로츠키는 노동조합 관료와 개량주의 세력에 대한 자본의 요구는 가면 갈수록 심해져서 결국은 “노동자들이 보는 앞에서 나를 위한 정치경찰이 되어라”고 요구한다고 경고했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들이 바로 그런 현상이다. 정부와 자본은 노사협조주의자에게 노골적인 어용이 될 것을 요구하고 있고, 이른바 민주노총의 상급단체들이 어용적인 작태를 보이고 있다.

그럼에도 이 사태에 대해 민주노총을 비롯한 대다수의 민주노조운동 진영은 어정쩡하게 방관하고 있다. 어용에 맞선 투쟁이 민주노조운동의 근원이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7월 25일 사회주의노동자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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