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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특보] 슬프지 않은 자본, 출구만 찾는 정부,대안을 찾는 우리

  • 분류
    The FocuS
  • 등록일
    2014/07/31 19:11
  • 수정일
    2014/07/31 19:14
  • 글쓴이
    사노신
  • 응답 RSS



* 지난 5월 17일에 발행한 사노신 특보로 <focus> 7월호에 다시 실은 글입니다.


도대체 정부가 하는 일이 무엇인가

세월호 참사를 계기로 많은 사람들이 이 사회가 근본적으로 어떻게 바뀌어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 그리고 이 질문은 곧장 우리에게 어떤 국가가 필요한지를 묻고 있다. 복지는커녕 적어도 안전하게 살 수 있는 조건조차 마련하지 않고 있다면 이 정부는 무엇 때문에 존재하는 것인가.

박근혜 정권에게 질문을 해본들 납득할만한 답을 들을 수 없다. 언딘의 독점적인 구조작업을 보장하기 위해 구조를 내팽개친 해경이 “구조나 수색에선 정부보다 민간 실력이 낫다”는 어이없는 대답을 내놓는다.


생명도 계산의 대상인 기업

그렇다면 정부 스스로 정부보다 낫다고 하는 기업들은 정신을 차리고 삶과 생명을 존중하는 사회를 만들어 갈까. 조선일보는 “안전은 남는 장사”라고 기업에게 조언하며 그 가능성을 긍정하고 있다. 이윤이 최우선인 시장논리에 비춰보아도 기업이 안전을 챙기는 것이 낫다고 하는 것이다. 중앙일보는 “항공사가 툭하고 사고 내면 누가 그 비행기를 타겠”냐는 복거일 인터뷰를 실었다. 기업이 지금보다 더 자유롭게 이윤을 위해 노력하면 안전은 따라올 수밖에 없으니 정부기구를 만들거나 규제를 강화하지 말라는 것이다. 기업의 이윤추구 그 자체가 대안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삼성전자가 반도체공장에서의 수많은 백혈병 환자 발생과 불산 유출로 인한 하청노동자의 사망을 숨기고 부정하는 태도로 버텨온 것도 결국 이윤 때문이었음을 말하지 않는다. 현대중공업에서 하청노동자가 일하다 쓰러져 결국 사망하게 된 과정에서 구급차마저 부르지 않은 이유도 이윤 때문이었음을 말하지 않는다. 이미 수년전부터 해상운송 과적의 위험성을 정부에 알렸으나 위험할 것 없다는 답만 늘어놓은 정부의 태도가 어떤 참담한 결과를 가져왔는지 말하지 않는다. 자본에게 인간의 생명은 이윤에 영향을 미치는 요소일 뿐이다. 말 그대로 ‘목숨값’이다.


‘국가개조’라는 출구

박근혜 정권이 정신을 차리고 이러한 기업들의 탐욕을 견제할리도 없다. 그동안 기업이 거리낌 없이 이윤을 추구할 수 있도록 규제를 완화해야 한다고 했던 정책들도 철회하지 않을 것이다. 정부가 제시하는 ‘국가개조’는 오히려 정국의 주도권을 쥐려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박근혜와 중앙일보는 세월호 참사의 주요 원인으로 ‘관피아’를 지목해왔다. 진짜 관피아는 박근혜의 낙하산을 타고 공공기관과 유관기관 곳곳에 자리 잡고 박근혜의 명령을 강압적으로 추진하며 이권을 챙기는 자들이다. 하지만 박근혜는 이 세력을 제거하지는 않을 것이다. KBS와 MBC가 보여주듯이 이들은 권력의 중요한 기초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정부는 한편으로 국가기강을 문제 삼으며 법과 질서를 강조하면서 권위주의적 통치를 강화할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공공기관의 부패와 비효율성을 강조하며 민영화를 비롯한 시장질서 도입을 지속할 것이다.

하지만 이 대안 아닌 대안은 아전인수라 할 수 있다. 세월호 참사에서 드러난 문제는 정부가 안전에 관한 재정을 거의 배정하지 않은데다가 안전업무를 민간업체에 외주화한 점이었다. 그리고 안전한 삶을 원하는 사회의 요구 위에 정부가 군림하고 정보를 통제하며 진실을 가리려 한 것이었다. 지배세력은 이런 아전인수를 통해 위기에서 빠져나가려 하고 있다.


권력에 맞서 협력을 만들어간 사람들

세월호 참사를 마주하고도 자신들의 권력만을 생각하는 자본과 정부에 더 이상 이 사회를 제대로 운영하라고 요구할 수 없다.

후안무치한 정부와 자본과는 달리 이 사회가 진정 새롭게 탈바꿈되어야한다는 생각을 몸소 보여준 사람들은 수많은 ‘민간인’들이다. 사고 당시 구호시스템이 전혀 작동하지 않는 가운데 자신의 몸을 던져 승객들을 구조한 사람들, 슬픔에 잠긴 사람들을 위로하기 위해 진도와 안산에 모여든 사람들, 어떻게든 구조에 도움이 되겠다고 자기 능력을 발휘하려는 사람들, 해직을 무릅쓰고 정권 퇴진을 요구한 교사들, 그리고 어떻게든 이 사회를 바꿔야 한다고 거리에 나선 사람들이 있다. 이 사람들 스스로의 협력을 통해 사회 운영에 대한 것들을 결정하고 집행할 수 있어야 한다.


자본과 정부를 넘어서기 위한 우리의 권력

그러나 우리가 이를 위해 한 걸음 내딛자마자 마주하는 벽은 끈끈하게 하나 된 자본과 정부다.

그동안 이 벽을 넘기 위한 많은 싸움들이 있어왔다. 안전업무를 포함하여 모든 것을 민영화하는 철도공사에 맞서 철도노동자들이 파업을 했으나 박근혜 정권은 폭력으로 일관했다. 삼성반도체 백혈병 발병의 책임을 묻고 재발을 방지하기 위한 투쟁이 수년째 이어졌지만 정부는 삼성을 비호하기에 바빴다. 전주버스와 삼화고속 등 많은 버스노동자들이 회사의 법 위반 강제를 거부하고 안전운행수칙을 준수하는 투쟁을 벌였다. 삼성 등 대기업들의 돈벌이를 위해 건강을 위협하는 의료민영화 반대 투쟁이 오래도록 진행되고 있다. 전 지구적 차원에서 안전과 생태를 위협하는 핵발전소 건설을 저지하고 에너지 정책을 전환하기 위한 노력이 밀양을 비롯한 곳곳에서 계속되고 있다. 사회 전반을 불안정하게 만드는 비정규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투쟁도 10여 년간 계속되고 있다. 곳곳에서 벌어지는 이런 싸움들에 힘을 실어야 한다.

더 나아가 사회적 자원을 삶과 생명을 보호하기 위한 곳에 우선적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그 집행권한을 찾아와야 한다. 사회기반 시설의 안전 유지와 감독의 권한을 빼앗아야 한다. 작업장에서 ‘안전 문제를 제기하면 해고하겠다’는 자본의 협박에 맞서 노동과정을 노동자들이 통제할 수 있어야 한다. 이렇게 곳곳에서 자본과 정부가 군림하며 휘두르는 권력을 무너트려야 한다.


정치권에 위탁하지 말고 우리의 정치를

문제해결을 누군가에게 위탁할 때 만족할만한 결과는 나오지 않을 것이다. 지방선거에서 새누리당 후보를 떨어트리는 것으로는, 특검이나 국정조사를 통해 권력을 쥔 자들끼리 질문하고 답하게 하는 진상조사로는, 어떤 특별법에 대책 수립을 맡겨버리는 것으로는, 여야합의로 위기를 수습하는 것으로는 이런 참사가 다시 발생하는 것을 막을 수 없다. 이들이 하는 것은 정치가 아니라 권력 나눠먹기다. 지금 필요한 것은 정치를 위탁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직접 정치에 나서는 것이다.

 

소외된 죽음, 소외된 노동

세월호 희생자는 두 종류로 구분된다. 단원고 학생과 단원고 학생이 아닌 사람들.

단원고 학생들의 죽음이 전면적으로 부각되면서 세월호에 타고 있던 다른 희생자들의 죽음은 외면되고 잊혀진다. 그러나 세월호 참사의 희생자 중에는 30대, 40대, 심지어 다섯 살의 희생자도 있었고, 한국인뿐만 아니라 이주민도 있었다. 합동분향소에도 들어가지 못한 이들의 죽음은 제대로 된 보상은 고사하고 충분한 장례비조차 받지 못한 채 소외되고 밀려나고 있다.

한편으로는 세월호 참사가 소외시킨 노동자들이 있다. 세월호 참사로 사망한 아르바이트 노동자들은 장례비도 지급받지 못했으며, 직장보험, 공제조합 등 어디로부터 지원을 받지 못했다. 심지어 이들은 ‘선원’으로 분류되어 참사의 가해자인양 따가운 시선에 시달렸다.

구조된 화물노동자들도 있다. 인천에서 제주로 가는 화물을 싣고 이동 중이던 이들은 목숨은 건졌지만 차와 화물을 잃어버려 생계가 막막해졌다. 더욱이 특수고용노동자이기 때문에 이들의 입은 피해는 고스란히 본인들의 몫으로 남겨진다.

목숨이 희생되지 않았다는 이유, 비정규직이라는 이유로 평등한 추모에서 밀려나는 이들을 잊지 말아야 한다.■


보호의 대상이 아닌 적극적인 주체

촛불집회나 분향소에서는 ‘미안해 아이들아’, ‘지켜주지 못해 미안해’가 가장 많이 외쳐진다. 또한 희생자들을 추모하면서 청소년을 “채 못 피어보지도 못하고 떨어진 꽃”에 비유하거나 “어른으로서 우리 아이들에게 너무 미안하다”는 식으로 말하는 경우도 많다. 이런 표현의 배경에는 청소년을 미성숙한 존재로 규정하고, 이들을 보호하고 지켜줘야 할 대상으로 보는 시각이 담겨있다.

세월호의 희생자를 기억하고 추모하는 것, 더 나아가 분노하고 함께 저항하는 것은 특정인을 배제하지 않으며 동등한 관계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그러나 청소년을 보호하고 지킬 대상으로 보는 것은 청소년을 적극적인 주체로 만들기 보다는 이들을 어른의 뒤편에 멀뚱히 서 있으면 되는 수동적인 위치로 한정짓게 한다. 그러나 청소년들은 보호받아야 할 대상도 아닐뿐더러 보호받을 것을 요구하고 있지도 않다. 오히려 청소년들은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5월 3일 청계광장에서 400여 명의 청소년들이 촛불을 들었고, 9일 안산에서는 3,000명의 청소년이 행진을 한 바 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적극적인 주체로 일어선 청소년들의 흐름에 함께 하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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