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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비주류들의 행복한 만남은 가능할까?

  • 분류
    문화
  • 등록일
    2015/02/17 12:59
  • 수정일
    2015/02/17 13:02
  • 글쓴이
    사노신
  • 응답 RSS

두리반 투쟁에 연대한 자립음악가들의 이야기 <파티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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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12월 홍대 근처에 있던 칼국수 가게 두리반이 철거 위기에 몰린다. 주인 부부는 두리반을 점거해 농성에 들어가고, 주변의 젊은 음악가들과 학생, 작가들이 이곳에 몰려들어 연대한다. 인근 지역의 재개발 소식에 남의 일이 아니라는 생각으로 농성장에 발걸음을 한 동네 주민이자 다큐멘터리 감독 정용택은 이후 2년 가까이 이 투쟁과정을 카메라에 기록하게 된다.


특히 공연할 곳을 찾기 어려워 했던 젊은 음악가들에 의해 농성장은 공연장으로 바뀐다. 그들은 2010년 5월 1일 노동절을 맞아 두리반에서 51개의 밴드가 공연하는 <뉴타운컬쳐파티 51+>를 기획한다. 이 공연은 목표치를 훨씬 넘어 60여개 밴드가 참여하고 2500명이 넘는 관객들이 몰려들어 성황을 이뤘다. 531일의 농성기간 동안 50회가 넘는 공연과 두 번의 '뉴타운컬쳐파티 51+'이 개최되었다.


영화 제목인 <파티 51>, 그리고 원제였던 <51+>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사실 이 영화는 두리반 투쟁 자체보다는 이 투쟁에 참여한 “자립” 음악가들의 삶이 이 투쟁을 거치면서 어떻게 변화했는가에 포커스에 맞춰져 있다.

 

사회적 연대 운동의 상징

 

하지만 이 영화의 근저에 흐르는 것은 무엇보다 두리반이 계기가 되었던 새로운 운동과 문화의 기운이다. 아마도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인 동시에 가장 큰 웃음을 불러온 장면은 최저임금 집회에 공연을 간 자립음악가들의 음악에 대한 민주노총 조합원들의 당혹스러운 반응일 것이다. 추측컨대 감독이 이 장면을 통해 보여주고자 싶은 것은 화석화된 낡은 운동과 새로운 운동의 충돌인 것 같다.


실제로 두리반 투쟁은 2008년 촛불투쟁 이후 사회적 연대 운동이 확산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 사건이다. 그동안 한국에서 사회운동의 중심은 민주노총으로 대표되는 조직노동운동이라고 생각되었다. 그러나 이 운동은 2000년대 들어 대사업장 정규직의 이익집단화되면서 사회변혁의 주력으로서 성격을 상실했다. 예컨대 2006년 비정규직 개악반대 총파업에서 민주노총 사업장의 참여율은 바닥을 쳤다.


이러한 시기에 2008년 촛불투쟁이 일어났다. 촛불투쟁은 87년 이후 조직노동운동이 거의 아무 역할을 하지 못한 최초의 대규모 대중운동이었다. 물론 그 이전에도 미군 장갑차 여중생 살해 사건, 노무현 탄핵 반대 투쟁 등이 있었지만 모두 2008년의 촛불 투쟁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이 투쟁은 조직에 의한 동원보다 자발적인 개인들의 집합적인 운동으로 등장했고, 이는 SNS를 통한 투쟁사업장 연대를 거쳐 2011년 희망버스 운동으로 이어졌다. 두리반은 촛불 투쟁과 희망버스 운동의 사이에서 가교 역할을 한 투쟁이었다. 지금 수도권에서 연대운동을 하는 젊은 세대는 대부분 촛불과 두리반과 희망버스를 자기 운동사의 주요한 경험으로 기억하고 있다.


영화에 나와 있다시피 두리반 투쟁은 어떤 기적의 순간을 보여준다. 이 투쟁은 전통적인 철거투쟁과 아주 다른 양상을 보였다. 전철연 같은 세입자 단체와 당사자 뿐아니라 주인 부부 중 소설가인 유채림 씨가 소속된 작가회의의 작가들, 젊은 음악가들과 학생들이 단순히 힘을 보태는 연대단위의 역할을 넘어 함께 투쟁하는 주체로 등장했다. 그리고 1년 반의 투쟁 끝에 거둔 보기 드문 승리는 젊은 연대자들에게 승리의 기쁨을 맛보게 했다.

 

밀실과 광장의 행복한 결합의 순간

 

80년대에서 90년대의 청년 문화의 주류는 운동권 문화였다. 그러나 90년대 중반 이후 운동권 문화의 헤게모니는 몰락하고 개인주의 문화가 번성하기 시작했다. 이 무렵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이나 왕가위의 영화는 이러한 변화를 보여주는 이정표적인 현상이었다.


최인훈 식으로 말하자면 80년대가 광장만 있고 밀실은 없던 시대라면 90년대는 밀실만 있고 광장은 없는 시대였다고 할 수 있겠다. 광장만의 세상은 개인들에게 억압적으로 느껴질 수밖에 없었고, 80년대의 시대정신이 끝나자 세상은 급격한 탈주의 시대로 변했다. 개인의 실현, 개인의 저항이 그렇게 중시된 적은 없었다.


개인의 발견은 80년대 운동문화를 지배했던 "결의", "헌신", "희생"과 같은 가치에 묻혀 있던 많은 문제들을 드러냈지만 그것이 동시에 신자유주의의 이데올로기에 부합하는 것이었다는 사실 역시도 부정하긴 어렵다. 90년대 문화논리를 선도한 것이 상품논리와 성공신화라는 것 역시 이를 보여준다.


많은 사람들이 개인을 실현하기 위해 영화나 음악 등 문화운동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80년대 운동권 문화의 주역이던 386세대는 2000년대 들어 문화시장에서 스스로 주류로 변모했다. 이속에서 독립영화나 인디음악도 주류 제도권으로 들어가기 위해 거쳐가는 징검다리로 인식되는 경향이 강해졌다. 2000년대 들어 신자유주의에 대한 개별적 저항으로 기존의 독립영화, 인디 음악과 다른 일종의 아방가르드 예술이 미약하게나마 나타나기 시작했지만 이런 아방가르드적인 예술 운동은 나날이 대자본에 잠식되어 가는 문화시장에서 틈새시장으로도 존속하기 어려웠다.


촛불 투쟁은 80년대 이후의 세대들에게 개인의 저항이 집단적 연대로 이어질 수 있음을 보여준 최초의 자기 경험이었다. 촛불 시위는 한편에서 경찰과 대치해있으면서도 다른 편에서는 영화를 보고 노래를 부르고 공연을 하는 투쟁과 문화가 결합한 기이한 축제의 공간을 보여주었다. 이런 기운이 처음으로 운동 문화 속으로 융합된 계기가 바로 두리반이다. 요즘 집회에서 일반화된 음악회, 시낭송, 촛불미사 등 흔히 문화시위라고 불리는 많은 것들이 두리반으로부터 자리잡게 된 것들이다.


<파티 51>의 주인공들인 일군의 아방가르드 음악가들은 이 투쟁에 대한 연대 속에서 스스로의 정체성을 인디를 넘어서는 자립으로 정체화한다. 이 영화를 보다보면 그 독립과 다른 "자립"이란 연대의 경험 속에 형성되는 개념으로 보인다. 고립된 섬처럼 개인으로 존재하던 음악가들이 연대 속에서 새로운 정체성을 찾는 것은 매우 상징적인 일이다. 어떻게 보면 이 영화는 80년대와 90년대를 넘어 광장과 밀실의 어떠한 종합, 아방가르드 예술과 현실 투쟁의 결합이란 보기드문 황홀한 순간을 포착하는 것처럼 보인다.

 

너무 늦게 도착한 영화

 

안타까운 것은 이 영화가 너무나 늦게 도착했다는 것이다. 두리반이니 희망버스가 상징하던 사회적 연대의 기적은 이제 빛이 바래고 있다. 촛불과 두리반과 희망버스가 있었지만 정권은 박근혜에게 넘어갔다. 세월호 투쟁이 있었지만 사회는 변하지 않고 있다. 박근혜의 지지율은 바닥이지만 여전히 세상은 천지개벽없이 돌아간다.

 

지난 몇 년 간 우리가 충분히 경험했듯이 압도적인 공권력 앞에 사회적 연대의 마법같은 힘도 더 이상 효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모습은 사실 이 영화 속에서도 드러난다. 두리반의 승리 이후 연대했던 음악가들은 두리반처럼 강제철거에 직면한 명동의 카페 마리로 옮겨간다. 그러나 작가회의의 힘이건 무엇이건 간에 커다란 탄압없이 행복한 공연장이 될 수 있었던 두리반에 비해 마리에서 음악가들을 기다리고 있던 덧은 자본과 국가의 냉혹한 폭력이었다. 마리는 제 2의 두리반이 될 수 없었다. 두리반의 기적은 반복될 수 없는 "예외상태"였던 것이다.

 

이는 사회적 연대운동이 처한 현실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국가와 자본의 폭력이라라는 바깥의 장벽 뿐아니라 기존 운동질서의 관성이라는 내부의 벽이 사회적 연대 운동을 압박하고 있다. 예컨대 2008년 촛불투쟁과 사회적 연대의 기운을 대중적으로 받아안은 진보신당-노동당은 이제 존폐의 위기에 서있다. 촛불세대들은 제도 정치 질서로 들어가려고 혈안이 된 기성 운동권 선수들의 끝없는 재편 놀음에 지치고 알면 알수록 깨게 되는 낡은 노동운동의 현실에 실망했다. 그렇다고 그 두꺼운 관성의 벽을 깨고 독립적인 세력으로 등장하는데도 실패했다.

 

이제 사회적 연대운동의 성과는 촛불세대의 것이라기 보다 그 투쟁을 계기로 오랫동안 운동을 떠나있다 돌아온 386세대의 것이 되고 있는 듯하다. 그것도 아예 의미가 없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그것이 운동의 미래를 담보하지는 못한다. 밤섬해적단이 그토록 통쾌하게 까대는 옛 세대의 한계는 돌아온 형님, 오빠들도 예외가 아니기 때문이다.

 

비주류들의 행복한 연대로

 

다시 인상적인 장면으로 돌아가 보자. 이 영화를 처음 보았을 때부터 개인적으로 그 장면은 약간 핀트가 어긋나는 장면이라고 느꼈다. 왜냐하면 최저임금 집회에 참석한 노동자들은 민주노총 주류 노동자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 집회에 참석한 저임금 노동자들은 기존의 조직노동운동의 주변부에 얇고 불안정하게 조직되어 있는 새로운 노동자들이다. 오히려 이 장면은 낡은 운동과 새로운 운동의 충돌이라기 보다는 만나야하는 두 개의 비주류 운동이 아직 서로 만나지 못하고 있는 모습으로 읽혀져야 할 것 같다.


2012년 미국의 아큐파이 투쟁 때에도 비슷한 풍경이 벌어졌다. 주로 유색인종으로 이루어진, 최저임금 집회에 참여한 노동자들과 비슷한 직종에 일하는 저임금 노동자들은 월스트리트 주코티 공원을 점거하고 있는 젊은 청년들을 무심하게 남의 일처럼 바라보며 아침 출근길을 서둘렀다. 아마도 그들 대부분은 저런 건 배부른 WASP들이나 하는 일이라고 생각했으리라.

 

 

비주류들의 행복한 만남은 가능할까? 아니, 이런 질문은 잘못됐다. 그들은 만나야 한다. 이미 늦게 도착한 이 영화가 미래의 전망을 보여주는 것이 되려면.

 

 

 

 

 

 

 



이정인 wjddls72@jin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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