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현대중공업사내하청지회 김백선 사무장 인터뷰 (2) : 2014년 하청노조 임단협을 평가한다

[노동] 2014년 하청노조 임단협 과정을 평가한다

 

 

제에 이어 현중하청노조 김백선 사무장의 인터뷰를 게재한다. 이번 연재분에서는 작년 하청노조 임단협 과정에 대한 평가와 의의가 주로 담겨 있다. [편집자]



● 2014년 하청노조 임단협 진행 과정에 대해 간략하게 평가해 본다면


길지만 주요한 투쟁을 순서대로 되짚어 보겠다.    


박일수 열사 10주기 현장추모제, 노보를 배포하며 통제선을 넘다!


박일수 열사 10주기 추모 사업은 핵심적으로 두 가지였다. 먼저 박일수 열사는 하청노동자들만의 열사가 아니었다. 박일수 열사 투쟁이 가지고 있었던 성격, 정규직 노조가 어용노조로 제명됐었다. 원,하청 공동투쟁을 통해서 진정으로 열사정신을 계승하는 것이어야 했다.

그 다음 현장에서 노보를 배포해보자고 했다. 하청노조의 노동삼권을 투쟁으로 쟁취하기 위해 시도해보자 제안했다. 


새로 당선된 민주파 집행부와 박일수 열사 추모사업을 공동으로 진행 했다. 집회 때 정병모 위원장이 ‘무릎 꿇고 사죄한다’란 말을 했었다. 그 시기에 그런 발언을 한다는 자체가 정규직 노조도, 우리 하청노조도 성과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똑같은 추모사에 ‘협력사 처우개선’ 이란 단어가 나온다. 여전히 대공장 정규직 민주파가 하청노동자들에 대해 가지고 있는 인식이 그대로 굳어져 있었다.


현장에서의 노동3권 쟁취 투쟁 문제는 하청노조 내부에서도 이견이 있었다. “위험하다” 하지만 2014년 노동3권 쟁취를 위해서, 현장에서 노보를 배포한다고 하면 지금이 그 시점이다. 박일수 열사 10주기이고, 원하청노조가 공동으로 사업을 진행하고 있었다는 점, 정규직 노조의 직인이 찍혀 있다는 점을 들어 설득했다. 현장에서 노보를 배포했다. 회사에서 감시를 했으나 물리적인 탄압은 하지는 않았다.  배포하던 하청노조 조합원들은 훌륭하게 일을 수행했다.
 


2013년까지 현대중공업은 밖에서 하면 막지는 않겠다는 입장이었다. 박일수 열사 10주기, 하청노조 조합원들은 현장에서 처음으로 노보를 배포했다. 회사가 그어 놓은 통제선을 처음으로 넘어선 것이다.하청노조 조합원들이 밖에서 배포가 가능했던 것도 2013년 10월부터였다. 이때부터 하청노조 조합원들이 공개적으로 노보를 배포하기 시작한 것이다. 박일수 열사 10주기 추모사업을 진행하면서 2014년 하청노조 임단투를 하자는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조합원들을 주체로 세운 분향소 투쟁


3월말 하청노동자 사망사고가 났다. 2013년말부터 2014년 초 넘어오면서 현대미포조선 같은 경우 하청노동자들이 6개월 사이에 1.5배가 늘었다. 점심 때 줄이 길어 밥을 못 먹고 출근 때 통근버스를 타지 못할 지경이었다. 현대중공업 해양사업부도 마찬가지였다. 저가주수로 생산량이 확 늘어나고 물량팀이 대거 투입됐다. 관리자들이 조회 때 “어디서 사고 나는 것 아니냐, 어중이 떠중이 다 들어와 있다”라고 말했었다. 아니나 다를까 3월말부터 중대재해가 발생하고 하청노동자들이 죽어나가기 시작했다. 하청노조 노안부장은 “멘붕이 온다”고 말할 정도였다. 울산대학병원 영안실에서 유가족과 대책을 논의 하고 나가는데, 또 다시 하청노동자가 죽어서 응급실로 실려 오곤 했다.


저가수주로 생산량은 바짝 늘려났는데, 저임금 노동자들, 물량팀으로 채워지다 보니 사고가 터져 나왔다. 그 시기가 4월16일 세월호 참사와 맞물렸다. 더 이상 사람들이 죽어나가서는 안되겠다. 분명한 행동을 취해야 한다. 그래서 실질적으로 현대중공업을 압박하는 투쟁을 하자. 그렇게 하청노동자 분향소를 정문 앞에 설치했던 것이다. 분향소를 설치고 투쟁했던 시기는 17일 정도 됐다.


중대재해는 두 달 내내 터졌다. 산재 사망사고가 집중해서 터졌던 것은 자본주의 위기, 조선업종 위기와 연결되어 있었던 것이고 이윤을 확보하기 위해 “위험의 외주화”를 한 것이었다. 물량팀이 대거투입 된 결과였다. 분향소 투쟁은 이에 맞선 투쟁이었다. 소수가 싸울 수밖에 없는 조건이었지만 반향이 컸다. 세월호 참사와 정몽준이 서울시장 선거 나감으로써 직접적으로 정치적인 문제가 됐다.
 

분향소 투쟁에 대한 탄압이 들어왔다. 조합원들을 업체 총무가 면담하고 협박했다. 집회하는데 업체 총무가 와서 조합원 빼가는 일도 있었다. 하지만 현장에서 조합원들이 중식시간 선전전 진행하고 분향소는 당번을 통해 거점농성 투쟁을 이어갔다. 그 투쟁 자체가 정치적, 사회적 의미도 있지만 하청노조로 본다면 조합원들이 투쟁의 주체로 확고하게 서는 과정이기도 했다. 조합원들의 질적 도약의 시기였다. 조합원을 공개하는 것도 쉽지 않은 조건에서 공개 거점투쟁을 하고 퇴근투쟁이나 집회 때 마이크를 잡고 발언을 한다는 것은 도약에 가까운 것이었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진짜 노조 간부로서, 투쟁하는 조합원으로 성장했다. 하청노조의 조직적 성과였다.
   

처음 6개 업체로 임단협을 시작했다. 그런데 조합원들이 분향소 투쟁 속에서 확고해졌다. 그리고 임단투 과정에서 확고한 자신감을 가졌다. 타 업체 조합원들의 결의도 일어났다. 최종적으로 분향소 투쟁을 거치면서 6개 업체에서 11개 업체까지 교섭요구 하청업체가 확대됐다. 이 확대도 분향소 투쟁의 성과였다. 투쟁을 통해 성장하고 투쟁을 통해 조직이 됐다. 
    

하청노조 건설 11년만의 임단협 교섭과 합법적인 파업권 획득


현대미포조선으로 조합원 범위를 확대한 것, 지역노조로의 전망과 하청노조가 임단투를 진행한 것이 서로 대립되는 것은 아닌데 방향성에서 큰 전환이 있었다. 현대중공업에서 확 확대하기 힘드니 현대미포조선으로, 온산공단으로의 전망이 논의됐다. 100%로 동의하지 않았지만 현대미포조선에서 하청노동자 조직화로 시작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현대중공업 정규직 노동자들의 변화가 감지되고 가시적으로는 민주파 집행부가 탄생하면서 현대중공업과 현대미포조선에서 노동3권 쟁취 투쟁에 집중하게 된 것이다. 


하청노조 내부에서의 판단의 차이들이 존재했다. 객관적 조건이 변화했다는 점은 대부분 공감했지만 주체가 무엇을 할 것인가가 핵심이었다. 하청노조의 독자적인 임단투를 할 것이냐, 정규직 임단협 속에 묻어 갈 것인가의 차이가 있었다. 하청노조는 독자적인 임단협 투쟁을 결정했다. 


현대중공업 내에서의 계급역관계의 변화, 정규직 노동자들의 변화 속에서 하청노조가 움켜쥐어야 할 기준과 원칙은 무엇인가? 나는 독자성이라고 생각했다. 정규직 노동자들이 자발적인 상태가 됐고 정규직 집행부가 민주파가 되었기 때문에, 정규직 임단협이 하청노동자들의 관심과 기대를 빨아들이는 블랙홀이 될 수도 있다. 하청노조가 독자적인 임단투를 하지 않는다면 하청노동자들에게 하청노조의 존재이유가 사라지고 부정되는 것이라 생각했다. 하청노조의 독자적인 투쟁 없이는 자신의 존재 이유가 사라지는 것이다.



 

지방선거 끝날 무렵, 분향소 투쟁도 끝나고 6개 업체에서 11개 업체로 교섭 업체가 양적인 확대를 했다. 지방선거 끝나고 현대중공업의 탄압을 예상했다. 그런데 먼저 교섭 들어간 6개 업체에서 6월13일 이후에 교섭을 하자고 했다. 결과적으로 우리도 몰랐지만 현대중공업 운영지원부가 알고 있었던 정보가 있었다. 2014년6월12일 현대중공업 노동조합 1차 결의대회 일정이 잡혀 있었던 것이다. 16년만에 4,5000명이 참여한 집회가 개최된 것이다. 이 집회를 통해 현장에서의 계급역관계가 기울어진 것이다. 동시에 11개 하청업체가 하청노조와의 역사적인 교섭이 가능하게 된 측면이 있다.


6월12일 날 45000명이 모였다 이와 관련해서 하청노조의 독자적인 활동을 집고 가야 한다. 지난 10년간 현장에서 버티고 있었던 하청노조의 존재가 자발적이고 집단적인 행동의 토양이 됐다. 또한 12일 날 정규직 조합원들이 모이고 보여줬던 감동과 활력은 하청노조 조합원들이 독자적인 임단투를 당당하게 시작할 수 있도록 했다.


박일수 열사 10주기 추모 사업을 현장에서 당당하게 시작하고 3월달 하청노동자 실태조사 진행하고 4월에는 임단투 보고대회를 현장 식당에서 진행했고 5월에는 분향소 투쟁을 빡쎄게  했다. 하청노조의 독자적인 현장활동이 현대중공업 내에서 계급역관계가 노동자들 쪽으로 기울어지게 되는데 꽤 무거운 추의 역할을 했고 아무도 예상치 못한 45000명의 정규직 조합원들을 집회에 모이게 했다고  생각한다.


정규직 노동자들의 정서가 있었다. “하청들 저렇게 빡쎄게 싸우는데 정규직들은 뭐하냐“는 말들이 나왔다. 대공장에 정규직 조합원들과 하청노동자들이 존재하는데 상호간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주고 받는다. 하청노조가 당당하게 싸우는 과정이 정규직 조합원들에게 영향을 미쳤고 4,500명의 정규직 노동자들이 모임으로써 노동자 쪽으로 역관계가 기울어지니, 이것이 하청노조가 11개 업체랑 역사적 교섭을 하게 된 배경이라고 생각한다.


6말7초 넘어오면서 정규직 2차 집회 진행했고 하청노조는 독자적인 임단투 기조를 유지하면서 무게중심의 변화를 가져왔다. “원하청 공동파업을 조직하자. 원하청 공동 임단투를 진행하고 원하청 공동파업을 조직하자” 정규직 노조와 하청노조 차원에서 위로부터도 진행하고, 현장 부서 정규직 노동자들과 하청조합원들이 진행하는 아래로부터의 원하청 공동투쟁도 한다. 하지만 아래로부터는 아직 구체적인 수단이 드러나지 않았다. 아래로부터 원하청 공동투쟁을 조직하기 위해서 정규직 집회에 반드시 결합한다. 이러한 방침을 수립했다. 

 

7월~8월 두 달 동안 11개 업체와의 지리멸렬한 교섭을 진행했고 원하청 공동파업 조직화를 위해서 7월30일 지역토론회도 개최하고 공동파업 이전에 공동사업에 대한 제안을 정규직 노조에 끊임없이 했다. 결과적으로 위로부터의 공동투쟁은 다 거부 당했다. 그런데 6월12일, 7월24일, 9월4일 3차에 걸친 정규직 임단투 결의대회가 4000 대오를 유지했고 정규직 노조는 쟁의조정신청과 찬반투표까지 가게 됐다.


정규직 집행부가 사석에서 하는 이야기들과 발언들은 “파업 못한다”였다. 하청들이 일하는데 정규직 이 파업할 힘이 없다고 자조적으로 말했다.
 

8월과 9월에는 교섭도 지리멸렬하고 정규직 노조로부터 원하청 공동사업도 거부당했지만 하청노조는 업체 탄압에 맞서 방어투쟁의 시기를 보냈다. 현장 중식 선전전과 신화ENG와 부원테크의 조합원 탄압은 곧 원청 현대중공업의 하청노조 탄압이었다. 그래서 탄압 분쇄 투쟁을 조직했다.
 

추석 전후로 정규직 조합원들의 자발성이 정병모 집행부를 쟁의조정신청과 쟁의행위찬반투표까지 가게 했다. 이에 하청노조는 원하청 공동파업 조직화 기조로 갔다. 동시에 원청 사용자성 쟁취 투쟁도 기조로 결정했다. 11개 하청업체와 교섭을 진행했지만 다시 한 번 바지사장이라는 것을 확인했다. 업체는 단 하나라도 해줄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오직 원청의 승인이 있어야 가능했다. 하청노조는 원하청 공동파업 투쟁과 원청사용자성 쟁취 투쟁을 결합시켰다.  
 

● 조정신청은 언제 들어갔는가?
 

10월24일 날 들어갔다. 11월5일 임시총회를 통해 쟁의행위를 결의했다. 정규직은 역사적인 부분파업을 진행하고 하청노조도 부분파업을 조직하고 집회에 참가했다. 11월7일 정병모 집행부가 파업을 철회하는 실망스런 결정을 한다. 투쟁에 찬물을 끼얹는 행위였다. 하청노조는 원,하청 공동파업 기조를 유지하면서 독자 파업을 진행하고 현장순회투쟁을 전개했다.
 

하청노조는 11월5일부터 해서 19일까지 정병모 집행부가 파업철회를 취소할 때까지 임단투 파업 투쟁 전선을 사수를 했다. 그렇게 하청노조는 정규직 조합원들이 집행부 파업 철회로 인해서 비관하거나 패배주의에 빠지거나 실망하는 것이 아니라 “다시 싸우자” 라는 결의로 전환되는데 분명한 촉매역할을 했다. 
 



 

● 하청노조의 합법적 파업권의 확보와 독자 파업의 의미와 성과는 무엇으로 보나?


하청노동자들은 특히나 노동3권은 투쟁으로 쟁취할 수밖에 없다. 계급역관계가 변화하고 임단투를 진행하면서 하청노조의 일관된 기조는 단결권, 단체교섭권, 단체행동권은 오직 투쟁으로 쟁취한다는 것이었고 마침내 하청노조는 2014년 노동3권을 투쟁으로 쟁취해냈다. 현대중공업에겐 아직 노동3권을 쟁취하지 못했고 여전히 우리의 투쟁의 과제로 남아 있다. 


현대중공업 내에서 하청노동자들이 파업을 했다는 것은 업체가 아니라 현대중공업을 상대로 파업을 한 것이다. 하청들도 파업을 할 수 있다는 것, 이것이 던져주는 의미는 크다.


아래로부터의 공동파업 조직화라는 것이 하나의 구호로 남아 있었고 정규직 임단투 결의대회에 하청노조 깃발을 들고 참여하는 수준의 결합이었다면, 정병모 집행부가 파업을 유보하는 과정에서 정규직 현장실천단이 조직됨으로써 하나의 수단을 얻었다. 하청노조 쟁대위원들은 현장실천단과 함께 아래로부터 공동실천을 조직해나갔다. 현장실천단 같은 경우는 태생적으로는 정규직 노조 집행부의 선봉대 역할이지만 아래로부터의 대중의 자발성 속에서 배출된 선진노동자들이다. 하청노조와의 원하청 공동투쟁이 그렇게 어렵지는 않았다. 일부는 더 긴밀하게 원하청 공동투쟁을 전개됐다.


원하청 공동투쟁의 경험은 이후에 정규직 조합원들이 조합주의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교육이 될 것이다. 역으로 하청노동자들에게도 스스로 조직되서 자신들의 노동3권을 쟁취를 하는  과정에서, ‘나는 차별받는 하청이 아니라 나는 노동자계급’이라는 의식으로 도약시키는 것도 원하청 공동투쟁이다.


원청 하청 신분제적 자기규정이 아니라 노동자계급으로서의 자기규정의 첫 번째 단계가 원하청 공동투쟁이라면 작년 임단투 과정에서 그러한 흐름들이 만들어지고 현장에서 상당부분 대중적으로 만들어진 것 아니냐, 운동의 큰 전진이라고 평가한다.  



● 하청노조의 독자파업은 어떠한 성과 혹은 한계를 현장에 남겼는가?


아래로부터의 원하청 공동파업이 중요했다. 정규직 집행부가 공동파업을 조직하는데 있어 하청노동자들 조직화뿐만 아니라 파업에 어떤 식으로라도 참가하도록 하고 이 속에서 스스로 자각하고 변화를 이끌었어야 하는데, 그랬다면 파업이 엄청나게 파급력을 가졌을 것이다.


아무튼 제한된 조직력 때문에, 하청노조 독자파업은 그 자체만으로는 효과가 미미할 수 밖에 없다. 작업장에 들어가서 작업을 못하도록 하는 것도 물리적인 한계가 명확했다. 처음에는 파업을 하고 작업장 밖을 도는 순회투쟁을 전개 했다. 상징적인 의미는 있었지만 두 세번 반복해서 하다 보니 쟁대위원들도 “왜 하냐?”는 문제제기가 있었다. 


그래서 정규직 집행부가 파업을 철회 했을 때 하청노조 독자파업은 전선을 사수하는 촉매제의 역할을 했지만, 다시 정규직 노조가 파업에 돌입했을 때 하청노조의 독자파업은 미미했고 존재감을 갖지 못했다. 현실의 문제고 역량의 문제다.


다시금 하청노조 독자파업이 부각되었던 건 12월17일 이후로 정규직 집행부가 7시간 파업 정점을 찍고 다시 투쟁이 하강국면으로 진입했을 때이다.  


하청노조의 현장 파업 활동은 의미 있는 진전인데, 하청노동자들에게 미친 영향이나 반응은 확인이 필요한 일이다. 여전히 정규직 임단투를 바라보는 측면이 크고 해당업체의 파업이 업체를 제대로 타격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정규직 노조의 투쟁이 하강국면을 맞으면서 하청노조는 독자 투쟁을 진행하고 있고 원하청 공동요구안(4대요구안), 1만인 현장선언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 하청노조 임단투와 현장하청노동자들의 반응들은 어떤가?


이번 하청노조 임단투에 대한 하청노동자들의 반응에 대한 확인과 평가는 임단투 이후가 될 것이다. 조직화로 귀결될 것인지 아닌지. 하청노조 임단투 시기는 사측과 대립과 갈등, 그래서 긴장이 높아지는 시기이다. 하청노조가 소수이다 보니 현장과의 관계가 확 넓혀지는 것은 쉽지가 않다. 또 임단투라는 시기, 계급 역관계가 충돌하고 있는 이 시기에 하청노조 조합원 중에서, 후원회원 중에서는 업체와의 긴장감이 올라간 상태다 보니 거리를 두기도 한다. 
 



 

● 쓰레기 같은 잠정합의안 나오고 이를 부결시키는 투쟁 과정에서 하청노조는 어떠한 역할을 했는가? 


정규직 노조의 세 차례 부분파업은 전형화 되고 통제된 파업이었다. 현대중공업을 실제적으로 압박할 수 없었다. 선택은 둘 중의 하나였다. 직권조인 가까운 잠정합의를 하던지, 아니면 자각이 있어서 투쟁을 확전시키던지. 지금까지의 과정을 보면 전자로 갈 가능성이 컸다.


사실상의 기본급 동결이었다 원하청 공동요구안인 4대요구안에 대해서는 쟁점화 되지도 못했다. 잠정합의안 나오면  부결투쟁 한다고 방침을 정했다.


하청노조는 정규직 노조가 임단투를 정리하더라도 독자투쟁을 강화해서 임단투 간다는 기조를 수립했다. 이러한 기조로 12월 투쟁을 진행했다. 부결투쟁은 정규직 현장실천단 동지들과 교감하면서 갔다. 젊은 정규직 노동자들이 참가하고 있는 현장실천단이 부결투쟁 한다는 것 자체가 중요했다. 정규직 운동의 세대교차가 이뤄지고 있는 것이고 노동자 민주주의가 승리하는 것이다. 부결이 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부결투쟁 자체는 운동의 세대가 교체되고 있는 것을 의미했다.


하청노조 쟁대위원들과 현장실천단 젊은 정규직 노동자들 사이의 인적 네트워크가 구성되고 부결에 대해 공감이 크고 함께 부결투쟁을 진행했다. 전체적인 현장실천단 젊은 동지들의 분위기이기도 했다. 현장실천단 고참 활동가들은 소극적이었고 반대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부결투쟁은 성사됐다. 결과적으로 부결투쟁도 승리를 했다. 


전선의 축이 바뀌고 있다. 2013년 10월까지는 어용과 민주의 전선 속에서 민주의 싸움이 승리했고. 이 전선은 여전히 남아 있기는 하다. 하지만 이후의 전선은 어떤 민주이냐?이다. 현재 정규직 노조 운동은 자발적인 아래로부터의 활력과 12년 전에 망했었던 조합주의 운동을 했던 고참들, 선배들과의 관계가 뒤엉켜 있다. 낡은 운동의 세력들이 집행부가 됐고 아래로부터의 자발적인 활력들이 현장실천단으로 조직화됐는데 파업철회, 부결투쟁 과정에서 어떤 민주냐를 두고 갈등이 빚어지고 있다. 노동조합관료주의와 노동자 민주주의의 갈등과 대립이 작년 2014년 임단투 과정 속에서 드러난 것이 아니냐. 그래서 2015년 1월7일 부결 자체보다도 부결까지 가는 과정이 대단히 중요하다.


잠정합의안 소식이 전해지고 젊은 현장실천단 동지들은 교섭장 봉쇄투쟁을 전개하려 했으나 고참 활동가들(지단장들)이 위원장 면담한다는 문자 한 방에 진압당했으나 1월7일 부결 투쟁의 예행연습이 됐다. 고참활동가들은 12월 31일날 교섭장 봉쇄투쟁을 막고 대신 정병모 위원장과 면담했으나 아무것도 바뀐 것이 없었다. 연초 만났던 현장실천단 동지들에게 ‘밖에서는 가결이 예상된다’ ‘그래도 부결 투쟁하는 것이 중요하다. 몇 개 분과라도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설득했다. 그동안 현장실천단 젊은 동지들은 노동조합관료주의, 조합주의 고참활동가들을 뛰어넘지 못하고 극복하지 못했다. 현장실천단 전체는 2014년 말에는 유인물 내용상 부결 투쟁이 논리적 귀결이었나, 2015년 초가 되자 소극적이었다. 심지어 어떤 지단장은 부결 투쟁을 해태했다. 하지만 젊은 동지들은 부결 투쟁을 왜 안하냐고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존재하고 있는 현장조직 내에 계파 싸움들이 지저분하게 존재했지만 이걸로 다 설명할 수 없다. 오히려 현장실천단이 부결투쟁에 나서게 된 것은 대중의 자발성과 민주주의의 승리이다. 현장실천단의 부결투쟁은 기존 낡은 운동의 관성과 노동조합관료주의에 대한 공개적인 혁파의 모습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이 흐름이 일회성일 수도 있으나 부결로 드러났다. 7일까지 과정이 정말 중요했고 그동안 넘지 못했던 선을 대중적으로 넘어선 것이다. 


하청노조의 독자적인 투쟁, 나아가 원하청 공동투쟁 공동파업 기조가 2014년 현대중공업 임단투 전체 전선에서 아래로부터의 자발성을 자극하고 노동조합 관료주의를 극복하는 촉매제의 역할을 했다. (3편에 계속)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