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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중공업사내하청지회 김백선 사무장 인터뷰 (1) : 투쟁을 통해 성장하고 투쟁을 통해 조직됐다

[노동] 투쟁을 통해 성장하고 투쟁을 통해 조직됐다

 
 

현대중공업사내하청지회 전(前) 지회장 조성웅 동지가 하청지회 김백선 사무장의 인터뷰를 보내주셨다. 최근 하청지회는 현대중공업과 교섭을 촉구하며 1월 12일부터 노숙농성 돌입해 있다. 올해로 설립 12년 째, 동토의 십 년 세월을 딛고 작년 임단협 투쟁 이후 새로운 전기를 맞고 있는 현중하청지회의 상황과 과제를 잘 알 수 있는 기사라고 생각한다. 인터뷰가 긴 탓에 오늘부터 3일 동안 나눠서 게재하려 한다. 인터뷰를 하고 정리해 기고해 주신 두 동지에게 깊은 감사의 말을 전하며, 골리앗의 늑대들이라는 옛 신화를 넘어 하청노동자라는 새로운 주체가 일어서고 있는 현대중공업의 현재를 알고 싶은 동지들에게 일독을 권한다. [편집자]


한 사람의 역사가 결정적인 때가 있다. 그는 속도가 규정할 수 없는, 오래도록 기다리고 또한 준비하고 있었던 사람이다. 마찬가지로 한 조직의 역사가 결정적인 때가 있다. 그것은 속도에 강제받는 것이 아니라 끈질긴 활동의 정규성이 만들어 낸 사람들 사이의 신뢰의 문제다.

현대중공업사내하청지회는 설립된 지 올해로 12년이 됐다. 지난 시간 동안 참 뭘 해도 주목받지 못하는 동토의 땅에서, 그 고립과 외로움 속에서 열사의 피 값으로 세워진 깃발을 포기하지 않았다. 모든 현장 노동자들의 말문이 틀어 막히는 어용이 지배하는 지난 10여년, 하청노조는 의식적으로 매주 발행했던 유인물을 통해 현대중공업 정규직, 하청노동자들의 이해를 대변했고 나아가 전국적 사안에 대해 “계급 전체의 이해”를 대변해왔다. 끈질긴 선전 선동 조직활동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올해 조선사업장에서 계급역관계의 변화가 뚜렷하게 나타났다. 정규직 노동자들이 변하기 시작했고 하청노조 조합원들은 자기 희생을 통한 결단을 통해 현대중공업 설치 한 통제선을 과감하게 뛰어넘었다.

현대중공업 사내하청지회는 기간 현장 밖으로 내몰린 고립된 섬, 해고자 조직의 성격이 강했다면 2014년 하청노조 임단협 투쟁을 통해 현장에 기반을 갖는 대중적인 노동조합으로 거듭났다.

또한 10여년의 어용의 지배를 끝장내고 맞이한 원하청 노동자들의 공동파업은 노예의 삶과 단절하고 있다는, 돌이킬 수 없이 다른 삶으로 진입하고 있다는 것을 뚜렷하게 보여주고 있다.

위로부터의 지침에 의해 통제되고 전형화된, 생산에 타격을 주지 못하는 관료적 파업, 작년 정병모 집행부가 수행한 파업의 성격을 이렇게 규정할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은 하나의 진실이지만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원하청 공동파업 속에 뿌려진 긍정적인 변화의 힘이고, 이미 등장하고 있는 다른 삶으로 진입하기 위한 거대한 질문들이다. 이 거대한 질문들은 과거 낡은 조합주의 운동 질서와의 단절을 위한 계급투쟁이 될 수밖에 없다.

난 작년 하청노조의 임단협 투쟁 과정을 평가하면서 투쟁주체들의 변화과정, 그 계급적 성장, 그리고 중공업 정세 속에서의 하청노조의 역할을 되돌아보면서 이 계급투쟁의 과정을 기록하고 싶었고 현대중공업에서의 전망을 찾고 싶었다.

현대미포조선에서 일하면서 현대중공업사내하청지회 사무장을 맞고 있는 김백선 동지는 참 바쁘다. 이 바쁜 김백선 동지가 짬을 내 세 차례에 걸쳐 인터뷰에 응해 줬다. 김백선 동지의 인터뷰를 통해 작년 현대중공업 하청노조의 투쟁을 하나의 그림으로 볼 수 있을 것이고 그들이 꿈꾸는 전망까지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 내가 지회장을 할 때 많은 동지들에게 밥상 차려 놓으면 숟가락 얻지 말고 함께 밥상을 차리자고 제안도 많이 했는데 현대중공업으로 이전하는 이들이 거의 없었다. 그런데 참 전망 없는 현대미포조선으로 이전하게 된 계기는 무엇이었는가?


 

2007년까지 노동해방실천연대(준) 집행위 상근 활동을 했다. 2007년 2월 총회 후, 이후 활동을 고민했다. 이전을 고민하면서 노동자 도시인 울산을 우선적으로 고려했다. 울산에 2007년 5월10일에 내려왔다. 김석진 동지가 현대미포조선소에 있어서 내려오는데 영향이 컸다. 난 인생 경로를 결정하는데 있어 고민을 많이 하지 않는다. 울산이 대표적인 노동자 도시이고 사회주의 노동운동을 하는데 있어 의미가 크겠다는 생각이었다.

2007년 5월말에 현대미포조선 하청에 들어가는 것을 생각하고 있었고 기다리고 있었다. 노동부 워킹넷 들어가서 현대중공업 하청 업체에서 인원을 뽑는 것 보고 입사원서를 넣고 현대중공업에 취업이 됐다. 2007년 12월말까지 현대중공업에서 일했다. 이 과정에서 현대미포조선에 일자리가 생기고 건승ENG에 입사를 했다.


● 몇 년을 일했고 어떤 일을 했는가? 현장에서 일하면서 겪게 되는 하청노동자로서의 삶은 어떠했는가?


크레인 정비일을 했다. 지프크레인, 타워크레인, 천장크레인을 관리 보수 수리하는 일이다.

현대중공업에서는 회전기사업부에서 일했다. 크레인 정비 보다는 상대적으로 안전했다. 현대미포조선으로 옮긴 후 아직까지 하고 있는 크레인 정비일은 위험성이 큰 작업이었다. 지프크레인 붐대 끝까지 올라가서 작업을 했다. 신입사원들은 무섭고 위험해서 며칠 일하다가 그만두기도 했다. 크레인이 고장이 나면, 고공에서 일을 하니까 위험하고 무서웠을 것이다. 고소작업은 대단히 스트레스가 심했다. 게다가 한 겨울에 입사를 했었다. 활동가로서 취업한 것이 아니었다면 당장 업체를 그만두었을 것이다.

하청노동자의 삶은 원하청 차이가 있지만 조선소 일 자체가 거칠고 힘들다. 지프크레인 붐대 끝에 올라가서 점검하다가 잠깐 쉴 때도 있는데 도크장를 바라본다. 거대한 블록이 이동하는 것을 보면 위험해 보이고 그 밑에서 용접하는 사람들도 보이고 족장 설치하는 것도 보이고 모든 것이 다 위험하다. 그리고 현대중공업도 그렇고 현대미포조선에서도 하청노동자들은 더 힘들고 어렵고 더러운 일을 했다.

미포에서만 7년 정도 일했다. 현장을 잘 몰랐지만 직관적으로 선택하고 들어왔다. 그래도 그나마 공개 활동을 하지 않았어도 반공개 활동은 했다. 울산노동자 배움터 교육에도 참여하고 있었고 노동해방실천연대(준) 울산지역 활동도 하고 있었다. 현장에서 공개활동을 할 수 없는 조건 속에서 지역 반공개 활동을 했지만 한계가 분명 있었다. 2008년 1년차, 2009년 2년차, 그러다 2010년 3년차 쯤 가니까 조금씩 답답해지기 시작했다. 조선소 하청노동자 조직화라는 건, 만만치가 않은 것이었다. 특히 현장 들어간지 3년쯤 돼서 힘도 들었던 것은 막연하게나마 현장활동의 실마리 풀리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그게 그렇지 않더라는 것이다. 하청노동자들이 워낙 업체별로 분절되어 있었고 그래서 업체를 뛰어넘기가 힘들었다. 그런데 미포에 하청에도 활동가들이 몇 명 있었는데, 2010년쯤 되니까 다 나가버리더라. 나 빼고 아무도 없었다. 답답하기는 했는데 외롭고 힘들다기 보다는 하청노동자 조직화의 실마리가 뭘까를 고민했다. 혼자지만, 우회하지 않고 제대로 시도를 해보고 싶었다.

3년에서 4년차 넘어가는 시기에 업체 내에서 상여금 삭감에 맞서 원상회복 투쟁을 했다. 대단한 것은 아니지만 전환점의 의미가 있었다. 지난 3년 동안은 업체 내에서도 일은 잘하는 것이 아니었고 그냥 ‘좋은 형’이었다. 그런데 일은 못하는 형이었다. 친해진 동료들에게는 정치, 노동 이야기도 했다.

그런데 이 때 동생들 모아서 상여금 삭감에 대해서 원상회복시키는 계획을 같이 수립했고 업체 절반 이상의 서명을 받아냈다. ‘상여금 삭감이 임금삭감에 해당되고, 우리는 상여금 삭감에 동의한 적이 없다’ 이러한 서명 동의서를 돌렸고 과반 이상의 서명을 받아냈다. 업체 내에서 한 번 과감하게 싸웠다. 성과는 컸다. 좋은 형에서 어떤 문제를 함께 상의할 수 있는 괜찮은 사람이 됐다. 업체 내 사람들에게는 노동자 대표라는 느낌을 줬다. 업체 내에서 문제가 발생했을 때 날 찾아오게 되었고, 동료들에게는 믿을 수 있는 사람이라는 평가가 내려졌다. 



이 투쟁을 통해 업체 내에서의 활동은 전환점을 이뤘다. 싸움을 함께 했던 동료들과는 간헐적인 수준이었지만 학습모임을 진행했었다. 북카페 더불어 숲에서 1년 정도 기본적인 학습을 진행했다. 또 현대차 비정규직 불법파견 판결처럼 시의적인 사건이 벌어졌을 때에는 시사프로그램을 함께 보면서 토론하고 모임을 진행했다. 그러다 2012년도 경부터는 노동자배움터에서 학습을 제대로 진행해보려고 시도했다. 그런데 시사프로그램과 노동영화 보고 토론하는 것에서 한 단계 업그레이드 되니까 이탈자가 생기기도 했다.

하청노동자들은 업체별로 분절되어 있다. 3년차 넘어가니까 업체 내에 맹아가 꾸려졌지만, 타 업체에서 하청노동자 조직화를 함께 모색할 동지가 없었다. 게다가 현장에서 공동투쟁을 함께 할 정규직이 없었다. 현대미포조선에는 김석진 동지 한 명만 있었다.

이러던 차에 2013년 1월30일 날, 서울시경 보안수사대 4과 팀원 전체가 건승ENG에 들이 닥쳤다. 영장이 없어서 체포는 하지 못했다. 내가 현장 들어온 지 벌써 4년이 넘어가는데 현대미포조선은 전혀 몰랐던 듯 하다. 이때 내 신분이 공개가 됐다.

노동해방실천연대(준) 조직사건은 2012년 6월에 났었다. 지도부 4인은 체포는 되었으나 구속은 되지 않았다. 그러자 보안수사대에서는 기소된 4명 이외에 추가로 3명을 피의자로 탄압했는데, 특히 필명으로 지역과 현장에서는 반공개,비공개로 활동을 하고 있는 나를 주요 타겟으로 삼았다.

지역 동지들은 조언이 반반이었다. “세게 나가라 반. 나머지 반은 여기서 해고되면 할 수 있는 것이 없으니, 해고를 막을 수 있게끔 해라”

이때 재미있었던 것이 마침 이 무렵 한국GM 부평 비정규직 지회 이영수 동지의 학력 허위 기재건에 대해서 대법원에서 부당해고 승소 판결이 난 것이다. 그런데 이영수 동지도 노동해방실천연대(준) 조직 사건으로 추가로 탄압받던 피의자 3명 중 1명이었다. 결국 현대미포조선도 조사해서 학력 허위 기재로 해고는 부당해고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내가 다니는 건승ENG 업체 총무의 부인이 현대중공업 도장부 하청업체에 다니고 있었고 그런데 000동지도 그 업체에 다니고 있었는데, 000 동지에게 “내 남편이 미포에 하청업체 총무인데 사회주의자를 학력 허위 기재로 해고시키려 하는데 해고가 안된다”고 말하더라는 것이다. 아무튼 그래서 현대미포조선에서는 해방연대(준) 재판결과가 유죄로 나오면 그걸로 나를 해고시키려고 했던 것 같다.

다시 하청노조 건설, 하청노동자 조직화 얘기로 돌아가면, 5년차 되던 2012년에는 하청노조 건설에 대한 구체적인 실천을 고민하게 되었다. 여름부터 현대중공업 사내하청지회와 현대미포조선 정규직 3개 현장조직에 제안해서 현대미포조선에서 “하청노동자 조직화 어떻게 할 것인가”를 주제로 모임을 진행했다. 6개월 정도 진행했는데, 하필이면 아까 말했던 2013년도 1월에 보안수사대 탄압 사건이 터지고 나서 모임이 중단됐다. 보안수사대는 한달이 지나자 또 회사로 처들어와서 임의 동행을 요구했었다. 그래서 공세적으로 국가보안법 탄압 분쇄 투쟁으로 전환했다. 지역에서 공개적인 기자회견도 하고 대책위도 구성했고, 이후 탄압이 중단되지 않을 경우, 서울에서의 기자회견과 상경 투쟁 등을 준비했었다. 그러자 탄압이 중단되서, 4월달에 다시 현중하청지회와 미포 3개 현장조직의 모임을 진행했다. 이때는 하청조직화에 대해서 이제는 말이 아니라 행동을 결정할 단계였다. 6개월 동안 지지부진했기 때문이다. 최종 결론은 현대미포조선 정규직들은 하청조직화에 대해서 의지가 없고 능력도 없는 것으로 정리했다.

2009년 현대미포조선 굴뚝 투쟁하고 나서 정규직 민주파가 완전히 괴멸됐다. 현장에서 유인물 배포하려면 탈취를 당했고, 심지어는 집 앞에서 잠복하고 있다가 유인물을 탈취하기도 했다. 이것이 2010년이었다. 정규직조차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조건이었다.

원래 조선하청지역노조(지역지회)로의 전망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현대미포조선에서 원하청 공동투쟁을 통해 하청노동자들이 조직화 되면 하청노조 건설이 가능하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원하청 공동투쟁 속에서 사회주의 노동운동으로의 도약을 그리고 있었다. 그런데 현대중공업사내하청지회 하창민 지회장은 나의 이런 생각을 존중하면서 일단은 하청 조직화를 위해서 같이 대응하자고 제안했다. 6개월 넘게 말만 주고받는 동안, 정작 현중사내하청지회는 현대미포조선에 하청노동자들을 대상으로 격주로 유인물 작업을 시작하고 있었다. 물론 나도 기사를 쓰면서 협조적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결국 2013년 여름에 최종적으로 정리가 됐다. 하창민 지회장은 지역 조직화 전망을 제기했고, 나는 현대미포조선 원하청 공동투쟁이 원칙적으로 의미가 크다고 생각했지만 현실에서는 정규직 쪽이든 하청 쪽이든 둘 다 안되는 조건이었고, 지금 중요한 것은 하청노동자 조직화였다. 현중사내하청지회는 이미 시작했고 할 수 있는 조건이었다.

그 무렵 자연스럽게 현대미포조선 하청노동자들까지 조합원 범위를 확대할 수 있도록 규칙을 변경하는 논의가 되고 있었다. 나는 하청노조 조합원으로서 현대미포조선 하청조직화 사업을 하기로 했다. 이후 경로는 열어두고 가자는 것, 지금 중요한 것은 하청노동자들 조직화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1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현중사내하청지회는 조직화 수단의 틀거리를 마련해가는 과정이었고 2013년 하청노조 총회 때 규칙 개정하고 임원으로 선출됐다. 이것이 현대미포조선에서 하청노조 건설의 하나의 경로가 됐다.


● 2014년 현대중공업 노조 임원선거에서 예상치 않게 12년 어용노조의 지배를 갈아치웠다. 현대중공업의 변화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이를 어떻게 평가했는가? 활동가로서 어떤 계획을 가졌는가?


현중사내하청지회는 2013년 10월 총회 때 규칙 열어 현대미포조선까지 조합원 범위를 확대했다. 현대미포조선에서 하청노동자들 조직해서 정규직 노동자들을 견인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총회 때 그렇게 사업계획을 제출했다.

그런데 아무도 몰랐던 객관적인 변화, 사건이 터졌다. 어용노조의 지배를 갈아치운 것이다. 이러한 객관적 조건의 변화가 주체적 조건의 변화를 강제했고 평가가 확 달라졌다. 현대중공업에서 민주파 당선은 상징적 사건이었다. 현대중공업 내 계급역관계가 변화하고 있었다. 현대중공업 정규직 노동자들이 변한 것이었다. 2014년도 사업계획 수정을 가지고 연말 연초에 토론하고 논쟁했다.


● 하청노조는 규약변경을 통해 현대미포조선까지 조합가입 범위를 확대했고 현대미포조선 하청노동자인 동지는 임원을 결의했는데, 이것이 하청노조에게 미친 영향은 무엇이라고 보는가?


질문 자체가 적절하지 않다. 현대중공업과 현대미포조선은 업종과 지역이 일치하고 또 같은 그룹사이다. 특수한 경우다.

현대미포조선 하청노동자 조직화는 다 동의가 되는데, 현대미포조선, 온산공단까지 가는 지역지회로 조직되는 것이냐, 현대미포조선 독자노조의 맹아가 되는 것이냐? 결정되어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이러한 질문들이 실천과정 속에서 자연스럽게 답이 도출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현대중공업 정규직 노동자들이 변화하고 민주파가 당선 됐다. 5000여명이 자발적으로 임단협 투쟁결의대회에 참여했다. 계급역관계가 반전에 가까운 수준으로 가시화됐다. 현중 노동자들이 깨어난 것이다. 당선은 “어 뭐지”였지만 5000여명의 집회 참여는 정규직 노동자들이 깨어 난 것이었다.

따라서 정세적으로 지역지회 조직화가 집중적인 사업은 아니었다. 하청노조를 둘러싼 객관적 조건이 변화하고 하청노조 주체적 조건의 변화도 강제했다. 정규직 노동자들의 변화가 없었다면 하청노조 임단투 하겠다고 결정하지 못했을 것이다. 객관적 조건의 변화 속에서 원하청 공동투쟁, 공동파업의 전망을 가졌다. (2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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