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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2014년 여름, 화성공장 “마지막 해고자 복직”

  • 분류
    노동
  • 등록일
    2014/07/31 18:34
  • 수정일
    2014/07/31 18:38
  • 글쓴이
    사노신
  • 응답 RSS



* 기고글은 사노신의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2006년부터 시작해서 올 해까지 횟수로만 8년이다. 기아자동차 화성공장에서 해고자복직 투쟁의 함성이 터져 나온 것이. 해고자의 목소리가 터져 나온 2006년부터 투쟁을 했다는 이유로, 민주노조를 지켜내겠다는 저항을 이유로 해고자들이 하나 둘씩 늘어났다. 또 현장투쟁과 교섭으로 하나씩 해고자들이 복직됐다. 그리고 남은 화성공장의 해고자는 2·3차 하청 해고자 이동우동지 한 명이다. 화성공장 마지막 해고자의 8년 복직투쟁이 이어지고 있다.
 

기아차지부 해고자들의 투쟁과 해고
 

실상 기아차지부의 해고자들이 본격적인 투쟁을 전개한 것은 2012년부터다. 화성공장의 해고자 4인이 기아자동차 해고자복직투쟁위원회(이하 해복투)를 꾸리고 “해고자 전원복직”의 기치를 걸었던 2012년은 4명의 해고자가 현장에서 처음으로 만난 해이기 때문이다.

비정규직 투쟁에 헌신적인 연대와 강제전환배치 반대투쟁으로 08년 구속된 상태에서 해고된 정규직 이상욱동지, 사내하청 대의원으로 사측관리자의 폭력사태에 맞서 투쟁하다 사측이 노조와의 협의를 거부하자 잔업거부 투쟁을 진행하고 단식투쟁을 전개하는 과정에서 10년 해고된 윤주형동지, 기아자동차 비정규직지회(이하 비지회) 지회장・부지회장으로 비지회 투쟁을 이끌다 해고된 김수억, 이동우동지. 이렇게 네 명의 해고자들은 김수억・이동우동지가 2년 6월의 옥살이를 마친 후에야 모두 모일 수가 있었다.

4명의 해고자들은 해고 사유와 시기가 달랐고 정규직과 비정규직, 1차 하청과 2·3차 하청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그리고 노동조합이 인정하는 해고자와 그렇지 않은 해고자로 나뉘고, 조합원으로 인정하는 동지와 그렇지 못한 동지로 나뉘었다. 그렇기에 노동조합의 요구안으로 상정될 수 있는 동지가 있고, 노동조합에서도 나몰라라 내팽겨 쳐지는 동지 또한 생겼다.

이는 어디에서 기인한 것인가? 사측과 어용들의 광범위한 악선동과 유언비어, 이에 동조하거나 암묵적으로 용인하면서 해고자들의 투쟁을 폄하한 노조관료들과 일부 활동가들에 의해 4명의 해고자들은 갈가리 찢겨졌다.

 


유일한 정규직 해고자였던 이상욱동지는 비지회 투쟁에 헌신적으로 연대하면서 사측과 노조관료들의 눈 밖에 났었다. 비지회의 독자적인 투쟁을 옹호하며 당시 정규직 노동조합의 통제를 비판했었기 때문이다. 여기에 노조의 기만적인 전환배치 허용에 항의하다가 해고되고 말았다. 소위 말하는 노조의 ‘지침’을 따르지 않았다는 이유로 해고된 것이다. 그렇기에 정당한 조합활동이 맞냐는 몇 년의 논란 끝에 대의원대회에서 조합활동으로 인정받고 요구안으로 상정될 수 있었다. 물론 요구안으로 상정되었다는 것이 바로 복직된다는 의미는 아니겠지만 조합활동으로 인정받기에 해고 기간의 신분보장을 받음과 동시에 어떻게든 노동조합이 책임지겠다는 결정이며 그렇지 못하다면 항의하고 투쟁할 것을 요구할 근거가 생긴 것이다.

이제는 열사가 된 윤주형동지는 어떠했던가? 정당한 현장투쟁이 어용들의 악선동으로 사측관리자와의 폭력시비로 얼룩지면서 수년 간 대의원대회에서의 논란 끝에 결국 조합 활동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따라서 금속노조 중앙과 기아차지부의 책임 떠넘기기에 신분보장기금 또한 전혀 지급받지 못했다. 당시 분회장의 소통과 지침에 따라 투쟁했고 탄압받았지만 윤주형동지만 덩그러니 남아 해고되고 2년여 동안 경제적 어려움에 시달리면서 노동조합 요구안으로도 상정되지 못하는, 기아차지부 조합원이지만 해고자로는 인정받지 못하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이 된 것이다.

기아차지부와 비지회의 조직통합 이후에 해고된 김수억동지에게 지부는 비지회 투쟁을 핑계로 발목 잡았다. 조직이 통합되었다면 그 이전 조직인 비지회에서의 투쟁 또한 인정하고 함께 책임지는 모습을 보여야 민주노조로써 마땅하건만 기아차지부 조합원이 아니었던 당시의 투쟁으로 해고되었기에 신분보장기금을 지급하니 마니하며 논란되었다. 당연히 통합된 조직을 인정한다면 지부 해고자로 인정하고 신분보장기금을 지급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지부 요구안으로 가져가지만 신분보장기금은 줄 수 없다는 꼼수로 해고자를 힘들게 했다.



기아차지부 조합원도 아니니 해고자로 인정할 수 없다?
 

이동우동지의 경우는 관료주의에 찌든 대공장 노조의 실상을 여실히 보여주는 상황이었다. 비지회 투쟁이 한창이었던 2006년 조직부장이었던 이동우동지는 두 번의 해고장을 받아야 했다. 완성차 비정규직 투쟁으로는 영웅적인 투쟁으로 여겨지는 전년도 비지회와 하청사장단의 임단협 체결에서 소외되었던 2・3차 하청 소속 이동우동지는 비지회의 추가 단협 체결투쟁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이에 원청과 하청은 본격적인 탄압을 준비했다. 정당한 휴직 신청을 받아들이지 않고 1차 해고장을 날렸고 이동우동지가 일하던 곳을 비롯한 2・3하청 조합원이 있던 공정을 다른 하청으로 넘겨 버렸다.

투쟁하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업체를 폐업하고는 투쟁하는 노동자들을 공장 밖으로 날려버리는 악랄한 행위를 자행한 것이다. 결국 06년 임투가 정리되면서 원청사측과 정규직 노동조합의 합의를 통해 원청에서 2・3차 하청에 복직을 권고한다는 회의록을 쟁취했다. 물론 원청 사용자성 인정투쟁을 걸고 투쟁했던 것에 비해 부족한 결과물이었지만 권고라는 형식으로 하청 사장을 강제할 수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동우동지가 속해 있던 2・3차 하청 사측과 또 다른 해고자였던 김지현조직국장의 1차 하청 사측은 즉각적으로 복직 이행을 시행했다.

그러나 2・3차 하청 사측은 이동우동지가 일하던 공정이 없어졌으니 공장 밖으로 복직할 것을 명령했고 복직 명령에 불응한다며 2차 해고장을 날렸다. 비지회는 원하청 사측이 회의록을 일방적으로 파기하고 2차 해고를 자행한 것으로 규정했고 조직통합으로 비지회가 해산될 때까지 이동우동지의 복직을 핵심요구로 가져갔다.

08년 기아차지부와 비지회의 조직통합 당시 부지회장이자 해고자였던 이동우동지는 비정규직의 독자적 투쟁이 정규직 노조의 관료주의와 쪽수에 의해 소멸될 것이고, 정규직 노조의 폭력적인 방식으로서의 흡수통합을 반대했었다. 그렇지만 조합원총회에서 찬성이 더 많았고 이에 따라 남아 있던 비지회 조합원 전체가 기아차지부 조합원으로의 전환을 결정했다. 그런데 1,300여명의 비지회 조합원 중 유일하게 이동우동지만 기아차지부 조합원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지부가 말하는 조합원으로 인정하지 못하는 근거도 빈약하기만 했다. 기아차지부 규정 상 기아차지부 조합원으로 가입할 수 있는 노동자는 “기아차 내”에서 일해야 한다면서 해당업체가 공장 밖으로 나갔으니이동우동지는 지부 조합원으로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바지사장인 하청사장이 누구든 간에 일하던 공정으로의 원직복직 투쟁을 하는 2・3차 하청 해고자에게 하청사장 따라서 나가라는 이야기는 사측의 논리를 그대로 대변할 뿐이었다.

거기에 이런 기아차지부 운영규정은 상급단체인 금속노조 중앙의 조합 규약과 정면으로 배치된다. 산별노조인 금속중앙의 조합원 규정은 이주노동자를 비롯해서 해고자와 금속산업으로의 취업을 준비하는 노동자까지 포괄한다. 그런데 19대부터 지금까지의 기아차지부 집행부에서는 이를 정면으로 부정하고 있다. 대공장 기업지부의 규정이 중앙의 규약을 무시하고 마음대로 적용되는 익숙한 풍경인 것이다. 민주노조라고 하면 가입하려는 노동자를 두 팔 벌려 환영하고 조직을 확대하기 위해 애써야 한다.

그리고 그렇게 조직된 모든 비정규직 노동자들과 함께 투쟁을 통해 비정규직 노동자를 포괄하는 단협체결과 고용안정을 쟁취해야 한다. 이것이 민주노조 운동의 투쟁 정신과 조직확대 방식이다. 그러나 이러한 투쟁과제에 눈감기 위해 이러한 만행이 자행된 것이다. 그래서인지 아직까지 기아차에서는 2・3차 하청과 계약직, 용역・알바 노동자들은 기아차지부를 통한 금속노조 가입 자체가 원천 봉쇄되어 있다.

기아차지부와 기아차비정규직지회가 조직통합을 선언한 이후 대대적으로 정규직이 비정규직을 포용해서 비정규직 철폐투쟁에 나서겠다는 대대적인 선전이 뒤따랐다. 그러나 실상 해당 비지회 부지회장인 2・3차 하청 해고자는 지부 조합원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그에 따라서 지부 해고자가 아니니 요구안으로 올릴 수도, 신분보장기금을 줄 수도 없는 낙동강 오리알이 된 것이다.

 


 

4명 해고자의 해복투, “전원복직”

이렇듯 화성공장 4명의 해고자에 대한 의견과 접근은 다양하거나 악의적이었지만 해고자 복직투쟁을 염원하는 조합원들의 열망은 한결같았다. 또한 갈라치고 차별받고 소외받는 4명 해고자들의 투쟁에 대한 단 하나의 의미를 공유하고 있었다.

노동조합이든 사측이든 그 누가 뭐라고 해도 4명 해고자들은 민주노조를 건설하고 사수하는 투쟁에서 해고되었음을! 조합원과 함께 우리의 권리를 쟁취하기 위한 비타협적 투쟁을 하다가 사측에 의해 해고되었음을! 노동조합이 책임지지 못한다면 우리가, 현장의 조합원들이 책임지고 반드시 현장으로 돌아오게 할 것임을!

4명의 해고자 또한 2012년 해복투를 구성하며 앞서의 원칙을 공유했다. 정규직과 비정규직, 1차 하청과 2・3차 하청, 조합활동으로 인정받는 것과 받지 않는 것, 기아차지부 조합원이든 아니든, 각자의 투쟁이 정파적으로 다르게 형성되었을지언정 작금의 해고투쟁은 동일하게 가져가야 한다는 의지가 모아졌다. 사측의 악선동에도, 어용의 트집잡기에도, 노조 관료들의 해태 속에서도 해복투는 “전원복직”의 요구를 놓지 않으려 노력했다.

대의원대회 논쟁에서 4명 모두 정당한 조합활동 속에서 해고된 해고자임을 주장하며 4명 모두 요구안으로 가져갈 수 없으니 단계적으로 가자는 우회로를 거부하게 4명 모두 요구안을 채택할 것을 요구했다. 한날 한시에 모두 복직되는 것을 요구하냐는 비아냥에 “전원복직”의 요구는 4명의 투쟁이 정당한 조합활동이며 노동조합이 인정해야하는 해고자복직 투쟁의 요구임을 설득했다.

결국 해복투와 해고자투쟁에 함께 하는 동지들이 가지는 주체 역량의 한계 속에서 4명 모두 요구안으로 상정되는 것을 관철시키지 못했다. 그렇지만 임단투 투쟁 과정에서 다시금 “전원복직”의 요구가 현실화될 수 있도록 투쟁을 결의했다. 또한 대대 대응 과정에서 3명의 연봉제 해고자들과 공동대응을 경험하면서 기아차 해고자 7명의 “전원복직”이 필요함을 확인했다. 이러한 동의지반은 12년 임단투에서 소하리 노숙농성을 공동으로 진행하는 성과를 남겼다.

그렇지만 12년 임단협 정리 국면에서 해복투의 “전원복직” 열망과 투쟁은 올곧게 열매를 맺지 못했다. 사측의 갈라치기와 노조 집행부의 묵인 속에서 7명 해고자들에 대한 복직 요구는 차별적이고 단계적인 복직 회의록으로 귀결되었다. (13년 1/4분기 연봉제 해고자 3인과 이상욱 해고자 복직 조치, 14년 1/4분기 김수억 해고자 복직 조치, 윤주형・이동우 해고자 취업알선 구두합의)


남아있는 해고자 복직투쟁!

12년 임단협 투쟁의 결과가 다분히 영향을 미쳤던, 더 크게는 함께 할 것이라고 믿었던 민주노조와 동지들에 대한 배신감이 차곡 차곡 쌓여 비극적 결정으로 우리 곁을 떠났던 2013년 윤주형열사 투쟁을 경과하면서 화성 해고자의 문제는 다시금 수면 위로 드러났다. 민주노조의 탈을 쓰고는 투쟁하는 해고자에 대한 유・무형의 탄압과 회유, 끝갈데 없는 절망을 안겨준 관료들의 행태는 두고두고 비판받고 있다. 장례투쟁에서 지부 집행부가 신규 입사 운운하면서 선언적이라도 복직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사측의 입장을 대변하면서 해고자들을 핍박했을 때 “자결해서라도 해고자 딱지를 떼지 못한다면 어떻게 해고 투쟁하라는 말이냐”는 해고자들의 절규를 기억해야 할 것이다.

2014년 이제 화성공장에는 단 하나의 해고자인 이동우동지가 남아있다.(연봉제 해고자 중 유일하게 투쟁하고 있는 허성욱동지 또한 합의서가 이행되지 못해서 아직 투쟁 중이다. 다행이도 14년 임단협 요구안으로 상정되어 있지만 올해 해결될 수 있을 지는 미지수이다. 지난 4월 합의서 이행이 지연되어 현장의 반발과 투쟁으로 우여곡절 끝에 복직한 김수억동지 또한 사측의 마지막 몽니에 투쟁을 지속하고 있다. 하청 사측이 기존 노동하던 공정이 아닌 청소・조경공정으로 강제발령을 낸 것이다. 심각한 임금저하와 조합원들과 함께 할 수 없는 한직으로의 발령을 통해 고립시키려는 문제가 있기에 노동조합과 함께 투쟁하고 있다.) 

투쟁의 대오는 4명 해복투 때보다, 기아차지부 7명 전원복직 요구를 걸고 투쟁하는 2012년보다 더욱 축소된 것이 사실이다. 임단협 요구안으로 상정조차 되지 못한 가운데 집행부의 의지가 없다면 공문구로 전락하기 십상인 지부 집행부 사업으로 노력하겠다는 입장에서 출발해야 하는 상황이다. 현 상황은 실질적인 현장투쟁을 통한 관료들을 압박하기 보다는 민주노조의 원칙을 주장하며 조합원들의 여론을 환기시키고 마지막 해고자를 올해 안에 복직 시킬 것을 주문하고 있다.

쉽지만은 않은 싸움이다. 그렇지만 매일 진행되는 중식 선전전에서, 화・목 진행되는 퇴근장 선전전 속에서, 소하리/화성/광주공장 비정규직 조합원들에게 서명작업을 조직하면서 확인하는 조합원들의 격려와 지지가 있다. 조합에서 책임지지 않는다면 우리가 책임지겠다는 현장조합원들의 CMS모금이 경제적 버팀목이 되고 있다. 짧지 않은 8년 해고 생활, 반드시 현장에서 책임지겠다는 화성공장 동지들의 투쟁에 주목해야 한다.


기아차 화성공장 비정규직노동자 sanosin@jin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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