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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또 하나의 약속, 또 하나의 투쟁

  • 분류
    문화
  • 등록일
    2014/07/31 13:08
  • 수정일
    2014/07/31 13:16
  • 글쓴이
    사노신
  • 응답 RSS
 



* 7월 25일에 발행한 <focus>에 실린 기사입니다.


최근 삼성이 반도체 피해자들의 피해를 인정하고 협상에 나서고 삼성서비스지회 노동자들이 노동조합을 인정받는 등 세계적으로 유명한 반노조 기업 삼성에 작은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이는 물론 반올림을 비롯한 노동사회단체들과 활동가들, 노동자들의 끈질긴 투쟁에 의한 것이지만 삼성 문제를 다룬 <또 하나의 약속>이나 <탐욕의 제국> 같은 영화들도 어느 정도 기여를 한 지점이 있을 것이다. 

실제 노동문제를 다루는 상업영화가 극히 드문 현실에서 <또 하나의 약속>은 삼성반도체 문제라는 노동운동에서조차 주변화 된 투쟁을 상업영화의 틀에서 풀어냈다는 점에서 상당한 의미가 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 영화에 대한 상업적·비평적 평가는 그다지 높지 못했다. 
 

이중의 무시

 
비슷한 시기에 개봉되어 여러모로 <또 하나의 약속>과 비교된 <변호인>은 제작진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관객이 늘어나며 상영관이 확대된 끝에 결국 천 만 영화가 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노무현 자신이 한 말처럼 시장의 힘이 권력을 이긴 것이다. 그러나 <또 하나의 약속>은 별다른 외압이 없다는데도 교묘한 방식으로 상영 확대가 저지되었다. 이런 현실은 지금 우리가 자본의 뒤에 국가가 있던 시대에서 국가의 뒤에 자본이 있는 시대를 살고 있음을 명쾌히 보여준다. 

삼성이 가진 힘은 막강하다. 그리고 한국이 삼성공화국이라고 불린 정도가 된 데는 삼성에 대해 엄청난 특혜를 베푼 노무현 정권에 상당한 책임이 있다. 그뿐 아니라 민주주의의 후퇴, 비정규직의 양산 역시 노무현 정권 시절에 더욱 심화되었다. 

<변호인> 같은 영화가 얼마 되지 않은 과거의 기억들에 대한 망각을 요구하며 한 개인의 신성화에 기여하는 정치적·윤리적으로 매우 위험한 태도를 보인 반면, <또 하나의 약속>은 삼성 문제와 그에 투쟁하는 사람들을 다루고 있다는 자체만으로 그러한 태도에 문제를 제기하고 있지만 상업적 뿐 아니라 비평적으로도 크게 다루어지지 않았다. 

얼마 전 <씨네21>은 창간 19주년 특집으로 1995년에서 2013년까지 최고의 데뷔작을 뽑았는데, <변호인> <감시자들>에 이어2013 2위에 올랐다. 실제로 <변호인>은 작년 말 올해 초 비평담론에서 (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가장 많이 언급된 영화였다. 

이에 반해 <또 하나의 약속>에 대한 비평적 반응은 의례적인 치하 외에 별로 진지하게 다루어지지 못했다. 전반적인 반응은 의도는 좋지만 예술적 완성도가 떨어지는 영화라는 것 같다. 이는 <변호인>에 비교할 때 더욱 두드러지는데 적어도 <변호인>에는 완성도에 대한 지적은 드물기 때문이다. 

저널 평단에서 <또 하나의 약속>에 대한 언급이 상대적으로 적은 것은 좋은 의도로 만들어진, 게다가 자본의 탄압을 받고 있는 영화에 평가의 잣대를 들이 밀어 괜히 초칠 필요는 없다는 암묵적 합의가 이루어진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이러한 태도들이 과연 정당한지는 의문이다. <또 하나의 약속>이 영화적으로 별로 언급할 게 없는 영화라는 인식에는 영화 자체 이외의 다른 부분에 대해서 괄호를 치고 판단을 중지해야 한다는 사고가 깔려 있는 것 같다. 그것은 그 자체로 이데올로기적인 것일 수 있다. 
 

또 하나의 약속 vs 변호인


몇몇 평론가들은 <변호인>에서 인물들이 평면적이라고 지적하지만, 사실 <변호인>은 상업영화가 세련되게 보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명확히 알고 있는 영화로 보인다. 관객들은 몇 가지 영화적 장치들과 배우들의 호연을 통해 곽도원이 분한 차동영 경감의 과거, 조민기가 분한 강 검사의 출세지향성, 송영창이 분한 판사의 속물성을 구체적으로 인지할 수 있다. 

그 결과 이 영화의 재판 장면은 이러한 구체적인 인격들의 충돌이 빚어내는 그 어떤 액션 영화 부럽지 않은 박진감을 보여준다. 쉽게 말해 <변호인>은 통속적으로 보이지 않는 통속적인 영화이며 최근의 저널 평론은 이를 높이 사는 경향이 있다. 

<또 하나의 약속>은 훨씬 노골적으로 통속적이고 평면적으로 보인다. 이 영화에 대한 평자들의 주저는 아마도 이 때문일 텐데, 통속적이면서도 평면적이라는 것은 결국 이른바 완성도 낮음, 만듦새가 허술해 보인다는 얘기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이 영화가 생각보다 슬프지 않다는 반응이 많았는데, 실제로 이 영화는 피해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러닝타임의 약 4분의 1 정도 지점을 빼면 신파적 소재에 비해 감정적으로 상당히 밋밋하다. 영화 하이라이트가 되어야 할 재판 장면 역시 별로 극적이지 않다. 살아 움직이는 <변호인>의 법정과 달리 삼성 측 변호사는 사무적이고 법정 분위기는 건조하다. 

<변호인>의 생동감 넘치는 악역들에 비해 <또 하나의 약속>에서 그나마 가장 일관된 악역은 이보근 실장인데 야비해 보이긴 하지만 삼성이라는 거대한 악의 대변자로 보기에는 왜소한 인물로, 어떤 구체성을 가진 인물이라기보다는 기능적인 인물에 가깝다. (심지어 7년의 세월 동안 이 사람은 계속 실장이다.) 

이런 점들 때문에 이 영화는 일반적인 관객들에게 재미없고 평범한 영화로 보일 가능성이 높다. 이것이 정말 재능과 자원의 부족인지 의도된 것인지 명확하게 알기는 어렵다. 그러나 적극적으로 평가한다면 겉보기에 약점으로 보이는 이런 변들이 오히려 영화의 내적 이야기 구조와 관객의 지나친 동화를 방지하고 삼성과의 대결이 인격적 개인들의 충돌이 아니라 삼성이라는 시스템과 싸움이라는 것을 드러내는 면이 있다. 

예컨대 <변호인>은 스스로 실화가 아니라고 말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하지만, 이렇게 창출된 현실성은 판타지와 실제의 경계를 흐리고 사실로 믿고 싶은 관객들의 욕망에 부응하는데 기여한다. 영화 끝부분에서 스스로를 실화로 선언해 버리는 것은 이러한 동일시를 완성하며 다양한 극적 장치들은 역사적, 비판적 사고와 성찰의 계기보다는 영웅주의에 봉사하고 있다. 

그러나 감정적 과잉 없이 이러한 일들이 벌어진 배경을 설명하는데 집중하는 <또 하나의 약속>은 어떤 의미에서는 이 영화가 목적하는 바에 적합한 연출이며 현실에 대한 정치·윤리적인 태도와 연결되어 있다. 이 영화가 실화 그대로를 옮긴 영화는 결코 아니지만 적어도 <변호인>의 태도보다는 현실에 대한 우월한 윤리적 태도를 보여준다. 

마지막 자막이 올라오는 크레딧 신이 흔히 비교되고 있지만 <변호인>의 마지막 장면은 역사에 대한 조작과 개인에 대한 찬양에 가까운 반면 <또 하나의 약속>은 영화의 창작에 대한 능동적인 사회적 참여를 반영하고 있다는 면에서 분명한 차이가 있다. 

물론 <또 하나의 약속> 역시 분명 이데올로기적 한계를 갖고 있다. 노무사와 같은 전문인에 대한 의존성, 대중투쟁이 아니라 소수 피해자들의 법률적 투쟁으로 이루어진다는 점 등은 실화를 소재로 한 영화 자체의 한계에 가까울 것이지만, 재판 과정에서 삼성과 국가의 관계가 명확히 드러나지 않고 체제의 제도적 공정성에 대한 환영을 깨지 못하는 점은 아쉬운 점이다. 그러나 이런 한계 역시 별로 지적되지 못했다.

 
문제는 완성도가 아니다

 
<또 하나의 약속>이 대단한 예술작품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또 하나의 약속>에 대한 비평적 침묵은 이런 영화를 평가할 비평적 틀이 부재한 주류 비평담론의 협소함을 보여주기 충분하다. 

1970년대 유럽에서 맑스주의적인 영화이론과 평론이 주류이던 시절이 있었다. 이는 대개 당시 유행하던 구조주의/포스트구조주의의 영향을 받아 겉으로 드러난 표면적인 정치성보다 숨겨진 이데올로기적 태도에 주목했다. 이런 비평적 관점은 60년대 이후 급진화 되고 있던 좌파 모더니즘 영화들과 상호작용하면서 내용보다 형식이 중요하다고 보는 창작 및 비평의 시대가 오게 했다. 이 시대의 비평과 창작 경향은 헐리우드 고전 영화의 매끄러움보다 텍스트 내부의 균열과 충돌을 보려고 했으며, 때문에 기존 영화의완성도라는 잣대에 흠집을 내고 무력화시키는 경향이 있었다.

프랑스의 대표적 영화잡지 <카이에 뒤 시네마>는 정치적으로 영화를 다섯 가지로 분류했는데, 그에 따르면 A범주의 영화들은 내용과 형식 모두 주류 이데올로기의 지배를 받고 있는 상업 영화, B범주는 내용과 형식 모두 급진적인 영화, C범주는 내용은 모호하나 형식적인 면에서 관습성을 깨고 있는 영화, D범주는 저항적이고 정치적인 내용을 담고 있지만 형식은 관습적인 영화, E범주는 겉으로 볼 때 내용과 형식 모두 관습적이지만 이데올로기적 균열성을 스스로 폭로하는 영화로 나누었다.

이런 비평적 기준에 의해 가장 높이 평가된 영화는 B범주였고, 가장 낮게 평가된 것은 A범주와 D의 범주의 영화였다. 독재정권의 정치적 음모를 폭로하는 그리스 출신 감독 코스타 가브리스의 <계엄령> 같은 영화들은 전형적인 D범주로 분류되며 가장 큰 피해자가 됐는데, 이 기준에 따르면 <변호인>이나 <또 하나의 약속> 같은 영화도 모두 D범주로 분류될 것이다. 

하지만 한국의 비평담론에서 <또 하나의 약속> 같은 영화가 과소평가되고 있는 것은 이런 심오한 논리의 내적 정치성 때문이 아니라 통칭 완성도라 불리는 다소 애매한 포괄적인 기준에 의해서이다. 여기에서는 캐릭터와 내러티브의 깊이와 복잡성, 구체성들이 중요시 되는데, 충분히 영리한 상업 영화라면 그 이데올로기와 무관하게 비평담론과 높아진 관객의 눈높이에 칭찬받을 만한 것이 무엇인가를 알고 충족시킬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구현된 현실성이 오히려 더욱 인위적 것일 가능성이 있으며, 텍스트의 관습적 형식 자체에 내제된 이데올로기적 성격을 근본적으로 문제 삼던 시기 이후에도 여전히 이런 잣대가 통용되고 있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텍스트의 전복성에 집중하는 70년대 좌파적 비평논리도 종국에는 작가주의 같은 전통적 비평담론에 포섭되고 말았다. 애초부터 텍스트에 전복성을 부여하는 예술적 주체로서 작가개념이 살아남을 여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고다르 같은 좌파 모더니스트가 천재적 예술 작가로 신화화 되는 것을 피하기 어려웠다. 허나 비대한 제도적 시스템으로 존재하는 영화라는 특수한 문화상품에 있어 전복성은 텍스트 내부보다는 오히려 생산과 유통, 소비의 변화가 더 중요할 수 있다. 

예를 들어 <파업전야>의 경우, <카이에 뒤 시네마> 식 분류로는 역시 D범주 영화로 평가될 것이다. 그러나 <파업전야> 같은 영화가 갖고 있는 중요성은 영화과 대중운동과 관계 속에 생산되고 유통되고 관람되는 방식에 있었다. <또 하나의 약속>은 여러 가지 내적 한계들이 있지만 생산과 유통의 방식에서 관객을 또 하나의 주체로 만들어 내고 있으며, 노조나 운동단체에서 집단적인 관람 운동으로 나타났다. 결과적으로 노동운동에서도 주변부였던 반도체 공장의 실상을 더욱 많은 사람들이 알게 되었다. 

영화가 이미 생산되는 초기부터 제작에 참여하고 유통을 확대하려는 운동이 일고 그것이 실제 관람과 토론으로 이어지는 상황은 분명 텍스트 자체의 전복성보다 더 높은 전복적 가치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텍스트 외적 부분에 대한 평가는 이뤄지지 않고 있다. 
 

윤리성과 정치성이 예술성과 완전히 자율적인 것인가

 
70년대 <카이에 뒤 시네마>의 비판적 관점은 작가주의와 같은 전통적인 예술관을 벗어나는 면이 있었다. 창작자보다 관람자들의 능동적 문화를 중시한 컬트 무비 같은 말이 비평 용어로 등장한 것도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였다.

그러나 서구에서 80년대 대중운동의 퇴락과 전반적인 보수화를 겪으며 좌파 모더니즘은 쇠락했고, 다시 미학적 자율성이 강조되고 낡은 작가주의가 부활하는 경향이 나타났다. 한국에서도 90년대 형성된 미학적 자율성에 대한 편향은 일정 정도 예술성과 완성도를 등치시키는 경향으로 흘러갔으며, 이는 이른바 정치적인 영화들에 대한 평가에 난점을 드러낸다. 

재작년에 개봉된 <26>의 경우에도 완성도 논쟁을 피할 수 없었는데, <26>의 정치적 내용에 대해 전혀 동의하진 않지만 이런 영화들을 일괄적으로 완성도라는 잣대로 비판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26>에 대해 완성도가 떨어지는 영화라고 맹렬히 비판했으면서 <또 하나의 약속>에 대해서는 침묵하거나 의례적인 찬사를 보내는 것도 기묘한 일이다. 

90년대 후반 이후 상업 영화의 틀 내에서 사회운동이나 노동자를 다룬 영화들은 거의 없었다. 여기에는 한국 영화의 르네상스의 이면에 정치 과잉의 시대에 대한 환멸로부터 미적 영역으로 이동해간 사람들의 기여가 컸다는 측면이 일정정도 작용하고 있다. 이는 영화의 비평과 흥행에 있어서 어떤 영화들이 좋은 평가를 받는가에 꽤 영향을 끼치고 있다고 생각한다. 

<변호인> (찬성이든 반대든) 이슈를 타는 것에는 영화 자체적인 부분보다는 대부분 좌파 자유주의나 중도좌파인 주류 비평담론의 정치성과 연관이 아주 없진 않을 것이다. 비평담론 자체가 근거하고 있는 계급적 위치, 정치적 입장에서 비평의 메커니즘이 작동하고 있다는 것이다. 

반면 <26>에 대한 혹독한 평가는 이 영화의 (자유주의자들이 매우 혐오하는) NL적인 정치성이 주류 비평담론의 자유주의적 성향에 거슬렸을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차라리 완성도보다는 이 영화가 갖고 있는 이데올로기에 비판이 가해졌어야 했다. 

영화에 대한 평가와 담론화에 이미 정치적 태도가 작동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영화적 평가에 있어 애써 정치를 배제하는 태도는 이상하다. 구체적 맥락 속에서 이데올로기적 태도와 생산과 유통에서 주체들과 맺는 관계와 효과가 이론적·비평적 틀 내로 들어와 평가될 필요가 있다.

이정인 wjddls72@jin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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