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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10/05/28
    지선님의 홈피에서 퍼온 글
    씨앗(산길)
  2. 2010/05/28
    마음의 장난
    씨앗(산길)
  3. 2010/05/28
    뜻밖의 선물
    씨앗(산길)
  4. 2010/05/28
    어머니와 대화
    씨앗(산길)
  5. 2010/05/28
    경계없이 오면 안 돼
    씨앗(산길)
  6. 2010/05/26
    시와 님
    씨앗(산길)
  7. 2010/05/20
    관계
    씨앗(산길)
  8. 2010/05/12
    사투리
    씨앗(산길)
  9. 2010/05/12
    소설가 서영은의 글..(1)
    씨앗(산길)
  10. 2010/05/12
    연민-가브리엘 로스
    씨앗(산길)

지선님의 홈피에서 퍼온 글

모든 꽃이 시들듯이
청춘이 나이에 굴복하듯이
생의 모든 과정와 지혜와 깨달음도
그때그때 피었다 지는 꽃처럼
영원하진 않으리.
삶이 부르는 소리를 들을 때마다 마음은
슬퍼하지 않고 새로운 문으로 걸어갈 수 있도록
이별과 재출발의 각오를 해야만 한다.
무릇 모든 시작에는 신비한 힘이 깃들어 있어
그것이 우리를 지키고 살아가는 데 도움을 준다.
우리는 공간들을 하나씩 지나가야 한다.
어느 장소에서도 고향에서와 같은 집착을 가져선 안 된다.
우주의 정신은 우리를 붙잡아 두거나 구속하지 않고
우리를 한 단계씩 높이며 넓히려 한다.
여행을 떠날 각오가 되어 있는 자만이
자기를 묶고 있는 속박에서 벗어나리라.
그러면 임종의 순간에도 여전히 새로운 공간을 향해
즐겁게 출발하리라.
우리를 부르는 생의 외침은 결코
그치는 일이 없으리라.
그러면 좋아, 마음이여
작별을 고하고 건강하여라.


- <유리알 유희> 헤르만 헤세










여행은 힘과 사랑을

그대에게 돌려준다.

어디든 갈 곳이 없다면

마음의 길을 따라 걸어가 보라.



그 길은 빛이

쏟아지는 통로처럼

걸음마다 변화하는 세계

그곳을 여행할 때 그대는 변화하리라..



- 잘랄루딘 루미(회교 신비주의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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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장난

오래전부터 일하고 싶었던 잡지사가 있었다기자를 구한다는 글이 났다

잡지기자는 사실 내 오랜 꿈이다....

 

순간 잠깐 흔들렸다

글치만 지금 하는 일을 더 배우고 싶다, 그리고 지금 사는 곳에 정이 들어가고 있다. 지금 같이 일하는 친구들이 좋다.지금 사는 집의 텃밭이 소중하다... 이유가 많군^^

 

무엇보다 잡지사는 우리 부모님 사는 광주에 있어서 일하면 독립할 수 없다. 크흐흐

 

아는 후배가 그곳에 들어가 일하게 되었다는 소식 접했을때 내가 갖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으로 속이 쓰렸었지..그땐 백수였으니까...

 

이렇게 우스운 마음 가지고 나이먹도록 무던히 살아가야할텐데...쯧쯧...

미련을 왜 그토록 달고 다니는가..산길..

털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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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밖의 선물

루시드폴의 평범한 사람 을 듣다가 울다

다시 울게 될 줄 몰랐는데, 아마 맥주를 한 병 마셔서그랬나? ^^

듣다가 울게 되는 노래가 몇 곡 있는데 이 노래도 그러했다

나는 심지어 잡지기사를 읽다가도 운다.

몇년전부터,다시 눈물이 내게 돌아왔다는 것이 내심 반가웠다

 

어쨌든...

그 다음날 이 노래를 검색했다

용산 참사에 대한 내용을 담은 노래라고 해서 관련 포스팅을 찾았는데

어떤 블로거가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노래인것 같다는 포스팅을 한 것을 찾았다

댓글로. 용산참사에 대한 내용이라고 들었지만 님의 말처럼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노래일 수도 있겠다는 글을 남겼다

 

오늘 내블로그에 답글이 달렸다

루시드폴 시디가 두개인데 하나를 선물하고 싶다는 거였다

믿어지지 않게 기쁜 소식!

그래서 그 분의 시디가 도착하면 나는 요새 내가 홀릭하고, 당분간 홀릭해마지않을 시와의 음반을 사서 드리려 한다. ^^;;; 흐흐.. 시와 팬이 또 하나 늘어나는겐가? ^^:;; 3명 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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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

얼마 전 친구가 부른 노래 두 곡을 날마다 반복재생한다.

너무 슬프게 불러서 그 노래를 들을 때마다 그 아이를 떠올린다.

이유도 모른 채 나는 슬픈 노래를 부른 그 아이의 얼굴을 떠올리며 그 노래를 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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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기 시작하는 것, 사랑하는 과정, 그리고 헤어짐

상대의 가슴에 내 가슴에 깊은 우물 하나 파는 일이다

언제 마를까 그 우물

내 우물은 내가 껴안을 수 있지만 상대의 우물은 내가 파버린 그 우물은 어떡한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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흙을 어루만지는 일은 마음을 어루만지는 일...

작두콩 기둥 방울토마토 기둥 이것저것 할일은 많은데

사무실 일에 대한 에너지를 많이 쏟으니 텃밭에 덜 에너지를 쏟게 되어 가끔은 일을그만둘 것인가, 일을 어떻게 줄일 것인가.. 텃밭에 집중할것인가... 고민된다. 작물들이 마음 쓰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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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와 대화

자꾸 이야기하다보면 감정이 욱,하고 올라와버린다.

엄만 차분히 들어주시는데 말이다

 

엄마에 대해 내가 그리고 있는 잘못된 상이 점차 흐려져가고 있지만 여전히 남아 있어서 나는 엄마를 두려워했다. 그리고 사랑하지만 미워했다.

 

결국 자기 마음의 풀리지 않는 문제였고 정면승부를 두려워했던 것이다.

믿지 못했던 것이다. 어머니와 쌓아온 시간의 앙금을 많이 풀어냈지만, 정작 내 마음 속에서 못 풀었던 것은 내 편견이었다니...복에 겨워 투정을 부렸던 게다.

 

엄마에게 적금을넘겨달라고 했고, 전에 저축했던 일부 돈을 달라고 했다.

걱정했는데 쉽게 이해하시고 주시겠다고 했다

적금으로 세계여행 갈 수도 있다고 했다. 깰 수는 없지만, 대신 다른 데서 돈을 찾아서 주겠다고 했다.

 

그래 정공법이안 되면 돌아가는 거지...뭐

마지막 딱 하나가 남는다. 결혼

 

결혼 이야기, 선을 보라고 해서 보기 싫지만 어쩔 수 없이 보겠다고 했다. 답이 없지 않나. 내 진심은 그게 아니었지만...

 

어머니는 신랑감의 조건으로 원치 않는 것을 몇 개 나열하셨었다.

그리고 믿었던 아버지가 결정적으로 한 마디 하신다.

양쪽 부모가 다 있는 사람이었으면 한다는 거였다.

 

결국 안 되는 조건만 계속 늘어나는 거 아닌가.

무력해지고 내 인생이 뭔가 싶어서

제발 조건을 달지 말아달라고 욱,해서 열변을 토했더니

엄마가 이해해주셨다.

선도 원하지 않으면 보지 말라고 했다.

일단 단정은 짓지 않으시겠다는 뜻으로 보인다.

나중엔 어떻게 될지 몰라도..

 

내가 나중에 누군가를 데리고 와도 거절하지 말라고 못을 박았다

이 방식이 폭력적일 수도 있는데... 그거 아는데...

더 이상 눈치보고, 걱정하고, 의식하기 싫어서 그렇게 말해버렸다,,,

뭐 그래도, 농사 짓는 사람은 끝까지 싫어하실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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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계없이 오면 안 돼

알았지?

이젠 나도 경계를 지을 거야.

그게 서로를 위한 배려일거야 그렇지? ^^

보다 오래 볼 수 있는 관계...

 

너 반성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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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 님

NEWS > 인터뷰 2010.03.31

인디10│① 시와 “좀 전형적이면 어떤가”

 


여신과 악동의 세계로 왜곡되기도 하지만, 여전히 ‘홍대 앞’은 뮤지션들의 공간이다. 그리고 관악구의 붕가붕가 레코드가 장기하라는 스타를 배출하고, 인천의 루비살롱이 단기간에 유망주들을 쏟아내면서 지역 편중화가 해소되는 듯 보였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인디 뮤지션들이 가장 많이 모여드는 곳은 역시 ‘홍대 앞’이다. 2010년, 봄. 홍대 신에서 가장 주목받는 여성 뮤지션들을 <10 아시아>가 소개한다. 그 첫 번째 순서는 이달 초 첫 정규 앨범을 발표한 시와. 기타를 들고 나직하지만 힘 있는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는 그녀는 어느 시간, 어느 장소에 데려다 놓아도 어울릴 만큼 트렌드와 먼 음악을 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바로 그 점 때문에 많은 사람은 그녀를 언제, 어디에서나 사랑받을 수 있는 뮤지션이 될 것이라고 예상한다. 그리고 직접 만난 시와는 음악보다 유쾌한 성격과 음악만큼이나 아름다운 대답으로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은 사람이었다.

앨범 제작 전반을 직접 책임졌다고 들었다. 예약 판매로 자금을 보충했고, 배송도 직접 한다고 하던데.
시와
: 이전에 발표했던 EP 역시 사비로 제작한 것이었고, 다른 직업이 있어서 다행히 그때의 수익을 저축할 수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다른 레이블에서 먼저 제의가 없었던 것도 사실이고. 배송은 순전히 배송비를 아끼려고 홍대 인근의 몇 분께 직접 전달해 드린 건데 알아보고 좋아해 주시는 분들이 있어서 감사하다. 홈페이지에 ‘2NE1이 배송 이벤트 하는 것보다 반가웠다’는 후기가 올라오기도 했다. (웃음)

“이번 앨범에는 프로듀서 오지은의 긍정적인 힘이 많이 작용”



음악만 하기에도 생각할 일들이 많을 텐데 살림살이 전반을 이끌어 나가려면 힘든 일이 많을 것 같다.
시와
: 사정을 터놓고 알렸기 때문에 오히려 외부에서 많이 격려해 주시고, 도움도 주신다. 그래서 정작 힘든 것은 내 마음이다. 최근에 <아름다운 이 아침 김창완입니다>에 출연했는데, 노래 첫 대목에서 잘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방송이라 다시 할 수도 없고 간신히 노래를 마쳤는데 나중에 들어보니까 오히려 첫 부분을 더 잘 불렀더라. 마인드 컨트롤을 잘해야 하는데 스스로에게 가장 엄격한 사람이 되어서 나에게 장애물을 만드는 경우가 있다. 자신에게 잘했다고 말해줄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게 지금으로서는 가장 어려운 일이다.

늦은 나이에 음악을 시작한 것으로 안다.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을 텐데.
시와
: 어려서부터 노래를 하고 싶다는 마음은 있었지만 좀 더 특출난 재능이 있는 사람들이 하는 일이라는 생각에 섣불리 도전을 못했다. 그런데 클럽 빵에 공연을 보러 갔다가 충동적으로 오디션을 보게 되었다. 당시에 음악 치료를 배우고 있었던 터라 기타 연주와 작곡하는 법을 간단하게나마 익혔을 때였다. 남의 기타를 빌려서 자작곡을 불렀는데 내 목소리가 마이크로 들어가고 앰프를 통해 나오는 그 경험이 너무나 강렬하게 좋더라. 그 기분만으로도 만족했을 텐데 오디션을 두 번 더 보고 공연까지 할 수 있게 되었다. 2006년 2월의 일이다.

다소 즉흥적으로 시작된 음악 활동인데, 첫 공연을 할 때 창작곡은 얼마나 있었나?
시와
: 6곡을 불렀는데 그중에 5곡이 자작곡이었다. 그중에 살아남은 곡이 EP에 실렸던 ‘길상사에서’고.

아니, 그렇게 의미 있는 곡인데 왜 정규 앨범에는 실리지 않았나? ‘길상사에서’로 시와를 기억하는 사람도 많은데 말이다.
시와
: 앨범에서는 새로운 곡을 더 들려 드리고 싶은 마음도 있었고, 그때 녹음했던 모습 자체로 마음에 드는 곡이라서 다시 작업하지 않았다. 대신 EP에 있던 ‘랄랄라’는 정규 앨범에 다시 실었다. 당시에 녹음하면서 보너스 트랙처럼 만들었던 곡이라 성기게 작업했던 것 같아서 이번에는 정성 들여서 다시 녹음했다. 그리고 프로듀서가 내 노래 중에서 ‘랄랄라’만큼 대중적인 곡이 없다고 워낙 추천을 해서. (웃음)

바로 그 프로듀서가 뮤지션 오지은이다. 얼핏 성향이 굉장히 다를 것 같은 두 사람의 만남인데, 그래서인지 앨범의 분위기도 예상과 다른 지점들이 있다. 망설임이나 머뭇거림의 정서가 많은 부분 확신으로 변한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시와
: 아무래도 프로듀서의 긍정적인 힘이 많이 작용했다. 예전에는 짧은 호흡의 EP나 컴필레이션 앨범 안에서 한 곡을 녹음하는 것이라서 듣는 사람을 생각하기보다는 내 마음속의 느낌에 집중해서 부르는 편이었다. 그러나 앨범 전체를 만들 때는 좀 더 편하게 들을 수 있어야 한다고 지은이 조언한 부분이 있다. 끊어질 듯 이어지는 목소리를 전체적으로 가져가기보다는 효과적으로 배치하자는 건데, 나는 프로듀서를 전적으로 신뢰했다. 내 장점을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고민을 많이 해 주었고, 늘 강요하기보다는 선택지를 주는 방식이었으니까.

“나는 노래를 어떻게 들어달라고 말하기가 망설여진다”


그러나 이전의 애절한 창법을 좋아하던 팬들의 반응은 달랐을 것 같다.
시와
: 밋밋해졌다는 평가도 있었고, 충분히 그렇게 받아들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기존 팬들의 만족도를 높이는 것보다는 더 많은 사람이 노래를 들을 수 있게 하는 쪽을 선택했다고 볼 수 있다.

결과적으로 여러 리뷰들이 긍정적인 평가를 내렸으니 판단이 성공한 셈이다. 그런데 리뷰들이 하나같이 ‘전형적이다. 그러나 그것이 문제 되지 않는다’로 요약되는 것은 읽는 입장에서도 신기한 경험이었다. (웃음)
시와
: 내가 직접 쓴 보도 자료에 ‘전형적인’이라는 표현이 있어서 더욱 그렇게 된 것 같기도 하다. (웃음) 프로듀서인 지은과 앨범을 준비할 때 우리가 의문을 품었던 것은 많은 리뷰들이 여성 싱어송라이터의 앨범에 대해서 기존의 사람들과 다른 무언가를 꼭 짚어내려고 한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그런 특별한 점이 없이 기타 하나 들고, 마음속 이야기를 하는 나는 그런 글을 볼 때마다 기가 죽는 거다. 그런 고민에 대해서 지은이 ‘그게 뭐 어때’라고 이야기하면서 조니 미첼의 < Both Sides Now >를 들려주더라. 형식이 전형적인 건 문제가 아니라고. 물론 의도한 만큼 만들어내지는 못했지만, 그런 방식의 노력으로 출발한 음반이다.

그렇다면 자주 듣는 음악도 주로 여성 싱어송라이터들의 음반들인가?
시와
: 오히려 자주 듣는 음악은 클래식이다. 좋은 음악이 많지만 계속 듣기에는 소리가 꽉 차 있는 게 많아서 다른 일을 하면서 듣기가 벅차더라. 그래서 라디오를 켜 놓더라도 클래식 채널로 돌리게 된다. 요즘은 아르보페르트의 <알리나>를 주로 듣는데, 온음표로 이어지는 음악이다.

앨범 제목인 ‘소요’는 천천히 목적 없이 걷는 것을 이르는 말이다. 이 단어를 고른 이유는 방향성 때문인가, 속도감 때문인가.
시와
: 물론 천천히 가는 걸음에 어울리는 음악이기도 하거니와, 나는 노래를 어떻게 들어달라고 말하기가 망설여진다. 듣는 사람이 어떤 감정이나 어떤 추억을 갖고 감상하게 될지 나로서는 알 수 없다. 그래서 마음껏 즐겨달라는 의미로 제목을 붙였다. 처음에는 앨범의 제목이 없었는데, 마포 도서관에서 책을 보다가 ‘소요’라는 단어를 발견했다.

<태풍태양>에서 천정명이 연기했던 인물의 이름이 ‘소요’였다. 느린 산책.
시와
: 아! 좋아하는 영화다. 그렇다면 더욱 좋다. 천정명 씨를 좋아하기도 하니까! (웃음)

“감사할 일이 많다는 건, 분명 삶에 도움이 되는 일”


앨범의 느낌을 걸음걸이에 비유하는 것도 그렇고, 곡을 만들 때 장소의 영향을 많이 받는 것 같다. 장면을 그려내고자 하는 노력을 하나?
시와
: 노영심의 콘서트를 보러 갔던 길상사가 3곡이나 선물해 줬고, 독일 여행을 갔을 때도 2곡을 만들었으니 그럴 수도 있겠다. 특수교육을 전공하면서 음악치료를 공부했는데, 그때 선생님께 음악치료를 받기도 했었다. 경험해야 알 수 있는 거니까. 당시에 주어진 과제가 생각을 끊어내고 느끼기를 많이 하는 것이었다. 처음엔 그게 뭔지 몰랐는데, 색깔, 크기 같은 판단의 단어, 이성의 단어들을 버리고 그냥 바라보는 일을 해야 하는 거더라. 길상사에 갔을 때도 그 과정을 연습했다. 돌계단에서 나무를 바라보면서 나무를 느끼려고 애를 쓰다 보니 바람이 불고, 풍경 소리가 들리고, 가지가 흔들리는데, 그 순간 확 알겠더라. 그리고 악기도 없었지만 수첩에 떠오르는 가사와 음표를 미솔솔 미파미레도시 써서 노래를 완성했다.

이름인 ‘시와’도 단골이었던 바의 이름이라고 들었다.
시와
: 그렇다. 그 바의 주인이 이집트의 시와 사막에 다녀와서 그 이름을 지었다고 하더라. 그러나 나는....... 이집트 가고 싶을 뿐이고! (웃음) EBS <세계테마여행>을 즐겨보는데 다른 뮤지션이 시와 사막에 간 적이 있더라. 덩치 큰 바오밥 나무에 순록 뿔 같은 가지들이 솟아 있는데 노을이 지는 풍경이 그렇게 이국적이고 예쁠 수가 없더라. 나도 보내주시면 정말 잘할 수 있는데. (웃음)

공감각적인 분위기가 정점에 달한 곡이 <빵 컴필레이션>에도 실렸던 ‘화양연화’다. 자전거, 해를 노래하지만 분위기가 선명하게 전달된다.
시와
: 앨범을 만들면서 첫날 녹음한 게 ‘화양연화’였는데 너무 힘들어서 결국 마지막 날 다시 녹음을 했다. 한번 발표했던 곡이라 잘해야 한다는 압박감과 다르게 들려야 한다는 부담감이 있었던 것 같다. 그래도 가장 힘든 곡을 처음에 작업한 건 잘한 일이었다. 그 후로 프로듀서와 정말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었으니 감사한 일이지.

이전의 ‘화양연화’가 상황에 직면한 느낌이라면, 앨범에 실린 ‘화양연화’는 지난 일을 반추하는 느낌이다.
시와
: 와! 그렇게 느꼈다면 정말 기쁘다. 감사하다.

인터뷰 내내 느끼지만, 왜 이렇게 감사한 일이 많은가. (웃음)
시와
: 나에게 기대치가 낮아서 그렇다. (웃음) 어쩌면 특수교육을 직업으로 하고 있어서 그럴지도 모르겠다. 장애를 가진 아이들을 만나면 작은 기쁨이 전부다. 연필을 못 잡던 아이가 연필을 쥐고, 자리에 앉게 되고, 양말에 발을 끼우고, 그런 게 정말 기쁘고 칭찬할 일들이다. 공부를 잘하게 되는 건 너무 먼 일이고. 그런 경험이 나에게도 영향을 미치는 것 같다. 그렇지만 감사할 일이 많다는 건, 분명 삶에 도움이 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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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

드러내고 싶지 않은 건가

드러내고 싶은 건가

 

왜 나는 나를 가두고 스스로를 구원하지 못하고 있는가

 

역시 사랑 앞에 서면 그것은 잘 안 된다

 

더욱 잘 될 것 같지만 그렇지가 않다

 

ㅠ,ㅠ,

 

너무 깊은 생각 때문

너무 깊은 방어 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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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투리

나도 전라도 사람이지만

전라도 사투리를 가끔 맛깔나게 구사하는 친구를 보면 참 재밌다. 말이나 억양이나 완전히...

요새 다들 서울말 쓰는데 .. 물론 평상시에는 그냥 일반 표준말이더라.. 그런데 그 가끔의 사투리가 ㅎㅎ

 

서울말은 따라하기 쉽다믄서?

서울말은 왜 이렇게 낯선지 몰러 ㅋㅋ

난 사투리보다도 억양이 완전 전라도 억양이야..

 

친구가 생겼다.

얼마 안 되는 친구가 하나 늘었다.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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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서영은의 글..

 인생의 짐은 타인과의 관계에서 빚어지는 것이 태반이다. 짐을 지는 것으로 사랑이 가늠되기도 한다. 아무 짐도 지지 않는다는 것은 타인에 대해 의무도 책임도 안 지려는 태도이다. 때문에, 짐을 무조건 가볍게 하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다. 그것은 목적을 이루기 위한 방법일 뿐, 무거운 짐을 질 수 있는 영육의 능력을 키우는 것이 짐을 벗는 것 이상으로 중요한 것이다. - 꿈꾸는섬

 

김동리와 결혼을 하고 나서도 나는 한 번도 내가 그의 여자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나는 호적상에 엄연한 그의 세번째 아내였지만 나는 여전히 그의 여자가 아니었다. 수많은 날들 저편에서 그는 항상 내 사는 집 문을 조심스럽게 두드린 감춰진 남자였다.
(…) 김동리를 만난 지 3년째 되던 어느 해 정월, 교통이 끊길 정도로 눈이 많이 내렸다.
나는 김동리의 수필집을 보다가 연인을 그리워하는 한시(漢詩)를 인용한 부분이 너무 좋아 목소리라도 듣고 싶어 공중전화로 가서 전화를 했다. 손소희 선생님이 전화를 받았다. 그냥 끊고 집으로 돌아왔으나 끓어오르는 그리움을 진정시키기 어려웠다. 생각다 못해, 그 시를 종이에 써서 봉투에 넣어가지고 집을 나섰다. 그리고 용두동에서부터 신당동까지 걸어서 가는데 눈이 어찌나 많이 쌓였는지 걸음을 옮기기가 힘들 지경이었다. 마침내 김동리의 집 앞에 이르렀을 때는 조금 이르긴 해도 외등이 켜져 있었다. 지나다니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틈에 나는 외등 전봇대 밑의 눈을 파헤치고, 또 흙을 파헤치고 가지고 간 봉투를 거기에 파묻었다. 그리고 나서 다시 흙으로 덮고, 눈으로 덮고 나서 되돌아섰다. ‘이 담장 안에 내 연인이 살고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하며 집으로 돌아가는데, 내 발자국이 그대로 남아 있어, 그때 마침 손소희 선생님이 밖으로 나와 본다면, 어떤 발자국이 문 앞에서 끊긴 것을 수상하게 여길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가는 길에 공중전화를 보고 안으로 들어가서 전화를 했다. 다행히 그분이 전화를 받았다.
“제가 지금 집 앞 전봇대 아래 편지를 파묻어놓았으니 나가서 보세요.”
“알았어.”
하는 목소리가 이미 한 옥타브 높아져 있었다. 나는 그분이 그 봉투를 눈 속에서 파내서 꺼내어본 소감을 그 다음날 회사에 출근한 뒤에야 들을 수 있었다. 자취방에 전화가 없었기 때문이다. (322~325쪽)

그는 스스로 “나는 김동리란 거물의 온갖 것들, 그의 갈증, 외로움, 정염, 모순, 인색함 등 온갖 인간적인 것들을 붙잡고 씨름해온 사람”이라고 말한다. 쉽사리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사람에게 곁을 주지 않는 것은 남편 김동리가 그에게 남긴 유산이다.
산티아고 길 위에서 길었던 김동리와의 사랑과, 그에 반해 너무도 짧았던 아내로서의 삶을 고통스럽게 또 행복하게 회고한 그는 서울로 돌아와, 자신이 소유하고 있던 김동리의 유품과 그가 남긴 문학자료들을 모두 기증했다.

 

- 어떤 만남이든 다 흔적을 남기게 마련이다. 추억, 기억 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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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민-가브리엘 로스

나는 어떤 거짓된 감정으로 나를 위장하고 있는지 잘 살펴볼 일이다..

^_^

 

 

연민

 

 

연민의 감정은 두려움, 분노, 슬픔, 그리고 기쁨의 과실로서 온다.

그대가 일상에서 이 두려움, 분노, 슬픔, 그리고 기쁨의 감정들을

알아차릴 때, 그대는 비로소 다른 사람의 삶에서

그 감정들에 공감할 수 있다. 그리고 그들이 정확히

필요로 하는 것을 주기 시작한다. 연민은 무조건 상대를 껴안아주는

그런 것이 아니다. 때때로 그것은 상대방의 뺨을 때리는 것처럼

보일 때도 있다. 연민은 필요한 것을 알아차리고 그것을 줄 만큼

충분히 초연해졌을 때, 비로소 다른 사람들의 감정을

느낄 수 있는 어떤 것이다.

 

 

그대는 물론 다른 사람들의 고통과 기쁨, 두려움을 느낄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그대의 것이 아니다.

오히려 감정이 그대를 그들과 연결시켜준다고 하는 게 옳을 것이다.

그대가 정말 연민의 마음을 갖고 있다면,

사람들이 그대의 마음을 힘들게 할까봐 저어할 때에도

그대는 그것을 느끼고 그들의 두려움을 자기것처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대는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의 감정을 투사하는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질 때, 비로소 진정한 연민의 감정을 갖게 된다.

 

 

1970년대초에 배우들과 작업을 하기 시작했을 때,

나는 그들에게 5가지 감정을 표현하도록 요구했다. 그때 나는

무척 놀랐다. 그들은 전문적인 배우들이고,

우리가 만날 수 있는 사람들 중에서 가장 표현적인 사람들이었다.

그럼에도 그들 모두 5가지 감정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했다.

그들은 여전히 자신의 감정의 진부한 틀에 머물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그때 보았다.

우리 모두 자신의 감정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한다는 것을.

제대로 자기 감정을 살지 못한다는 것을.

자기 감정에 충실하지 못하다는 것을....

 

 

그들이 가장 표현하기 힘들어했던 것은 연민이었다.

그들 모두 다른 이들의 불행에 눈물이 메마른 듯이 보였고,

동작도 틀에 박힌 행동이었다.

 

 

연민은 다른 사람들의 감정을 인정하고 그 감정의 흐름을

따라가는 데서부터 시작된다. 연민은 카멜레온과 같다.

연민은 그때그때 상황의 필요에 따라 두려움의 표정을 지을

수도 있고, 분노, 슬픔, 기쁨, 심지어 낙담의 표정을 지을 수도

있는 그런 것이다. 그래서 카멜레온 같다고 하는 것이다.

연민을 느낀 부처는 한눈에는 미소를,

한눈에는 눈물을 지었다고 한다.

부처의 임무는 사람들의 손을 잡고 모든 게 다 잘 될 거라고

위로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을 진정한 자유에 이르게 하는 것이다.

 

 

부처의 가르침 속에서,

연민은 상대가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도록

그에게 필요한 무엇인가를 하는 것이다. 설령 그것이 무엇이든.

 

 

연민에 대한 일반적인 오해는 이런 것이다.

연민은 다른 사람들의 처지에 대해 미안한 감정을 갖는 거라는.

하지만 그런 감정은 단순한 센티멘탈리즘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동정을 표현하는 것에 불과하다. 오히려 참된 연민은

다른 사람들이 처한 어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뭔가를 해주는 것이다. 그것은 때로는 거짓말일 수도 있고,

잘 될 거라는 장밋빛 위로일 수도 있고, 힘들어하는 부분을

대신 떠맡아서 챙겨주는 것일 수도 있다.

 

 

우리는 모두 자신이 연민의 마음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고,

자비심이 있는 사람이라고,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싶어한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진정한 연민이 무엇인지 잘 모른다.

 

 

한번은 워크숍에서 참가자들을 다섯 가지 감정 중에서

자신에게 맞는 한가지 감정의 그룹에 들어가도록

나누어본 적이 있다. 그들 중 절반이 연민의 그룹 쪽을 선택했다.

분노의 그룹에는 아무도 들어가지 않았다.

그래서 내가 말했다.

“좋아요. 그러면 연민 그룹에 든 사람들은 이제부터 모두

분노의 그룹에 들어갔다고 생각하기 바래요.”

그러자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전 화나지 않았어요! 전 분노의 그룹에 속하지 않아요.”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모두들 뾰루퉁한 표정들이었다.

역설적이게도 그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분노의 감정을

드러내고 있었던 것이다.

 

 

때때로 연민은 다른 사람들의 감정에 함께 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한번은 내가 가르치는 맛사지 과정에서였다.

한 여인이 맛사지 테이블 위에 누운 채 히스테릭하게 느껴질

정도로 슬피 울기 시작했다. 그녀의 파트너와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몹시 당황했다. 그들은 모두 뒤로 물러났다.

그들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고, 그들의 얼굴에는

당혹감과 고통의 감정이 스쳐갔다.

 

 

나 역시 그녀의 목소리의 어떤 톤과

그녀의 전신에서 느껴지는 어떤 에너지의 진동이

내가 그녀에게 다가가는 것을 막았다.

언짢기는 했지만 그래도 사람들은 그녀에게 다가가 그녀를

위로했으며, 그녀의 울음을 진정시키려고 했다.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쩔쩔매고 있었다.

나는 가만히 미소지었다. 그들은 내게 물었다.

왜 선생님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계시냐고.

그리고 왜 그녀에게 다가갈 때 선생님한테서

한기가 느껴지는지 모르겠다고. 그녀의 고통에 대한 연민이

느껴지지 않는지 모르겠다고.

 

 

마침내 내가 말했다. “그건 아주 간단해요. 그녀가 슬피

우는 건 진짜가 아니기 때문이에요. 그녀는 여러분들에게

자신의 감정을 시험해보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문제는

그녀의 의지가 너무도 강하다는 거예요.”

 

 

살다보면 종종 이런 일과 마주하게 된다. 내 경험으로 보자면,

누군가 정말 고통스러워한다면, 우리는 진정으로 그를 위로하고

싶어진다. 내가 아직 젊고 겁이 많았을 때, 에살른에서 있었던

또 다른 경험이 생각난다. 그때는 우연히 어떤 그룹과 만나

처음으로 그룹활동에 참가하고 있었다. 우리 모두는 목욕탕

욕조 안에 앉아있었다. 그때 갑자기 한 여인이 큰소리로

격렬하게 울기 시작했다. 그녀는 7년전에 죽은 남편이

생각나 울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 자리에 있는 우리가 모두

욕조 가장자리에 앉아 있는 동안 그녀는 아래쪽에 있는

탕 속으로 들어갔다.

 

 

리더가 그녀에게 욕조 안을 빙 돌라고 했다. 그러면서

우리에게 그녀가 자기 앞에 오면 그녀를 위로해주라고 했다.

우리는 한사람씩 그녀가 자기 앞에 올 때마다 탕 속에 들어가

그녀를 꼭 껴안아주었다. 그녀는 구슬같은 눈물을 뚝뚝 떨어뜨렸다.

 

 

내가 맨 마지막 차례였다. 그녀가 내 앞에 왔을 때

나는 왠지 그녀가 자기연민에 빠져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그녀는 내게 도움을 청했다. 그때 마음속에서 다음과

같은 생각이 떠올랐다. “물론 도와드릴 겁니다. 하지만

나는 당신이 내게 오길 바래요. 당신이 있는 곳으로 가는

것은 왠지 바람직하지 않아 보이는군요. 오직 당신이 내게

오실 때만 나는 당신을 도와드릴 수 있어요.”

다른 사람들은 내가 거칠고 차갑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나는 그녀가 내가 말하려고 하는 것이 뭔지 알 거라고

생각했다. 나는 얼핏 그녀의 영혼을 들여다보았고, 그녀는

그것을 알아차렸다. 그녀는 내쪽으로 움직여왔다.

 

 

위의 두 가지 경우에서,

연민의 마음은 그들이 있어야 할 본래의 자리에 있게 하는 것이다.

나는 그들의 연극에 동조할 마음이 없었다. 정말로 필요한 것은

그들의 손을 잡아주는 것보다는

그들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스스로 깨닫게 하는 것이었다.

그때 그들은 비로소 또 다른 광장으로 나아갈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상황이라면 정확히 껴안아주고, 위로해주고,

그들이 힘을 낼 수 있도록 옆에서 친구가 되어주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그대가 정말 연민의 마음을 가진 사람이라면

그대는 값싼 동정보다는 그들이 앞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그래서 변화에 맞설 수 있도록 인도해주어야 하는 것이다.

만일 어떤 미망인이 아무런 희망없는 슬픔의 심연 속에 빠져

있다면, 단순히 그녀를 위로하기보다는 그녀가 그곳에서 나올 수

있도록 인도해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그녀가 슬픔을 딛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겠는가.

 

 

연민은 누군가에게 그들이 필요로 하는 것 - 그것이 늘

그들이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닐지라도 - 을 주는 것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그대가 슬픔에 빠져있는 어떤 남자와 함께 있다고

해보자. 그에게 이제 그만 슬퍼하라고 말하는 것은,

그만큼 슬퍼했으면 됐다고 말하는 것은 연민이 아니다.

만일 정말로 됐다면 그는 그대의 말이 아니라더라도

슬퍼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상황에서는 그에게 자신의 슬픔의 핵심을 느끼도록

해주는 것이 최선이다. 그가 그 슬픔을 통과해야 한다는 것을,

그 슬픔을 온전히 겪어야 한다는 깨닫게 해주는 것이 최선이다.

결코 우회하거나 뛰어넘을 수 없다는 것을 알게 해주는 것이

최선이다. 그대가 그와 함께 울어주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게 해주는 것이다.

 

 

우리들 주위에는 거짓된 연민 - 윤리적 의무감이 없는

감상적 센티멘탈리즘이 - 이 만연해 있으며

또한 지나치게 냉정하거나 심장이 없는 것처럼 행동하는 사람들이

널려있다.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의 감정에 지나치게

무감각한가 하면, 너무도 쉽게 다른 사람들의 감정에 반응하거나

그로 인해 상처를 받는다.

 

 

어느 날 나는 뉴욕에서 워크숍을 하는 동안 잠시 짬을 내어

길을 건너 던바의 카페테리아에 갔다. 그곳은 매달 정부에서

주는 고정수입으로 사는 60명이 넘는 사람들이 모여드는

그 지역의 대표적인 장소였다. 나는 친절하게 생긴

한 노인의 뒤에 줄을 섰다. 그는 주의깊게 으깬 감자와

배, 시골치즈, 그리고 제너럴 푸드사에서 나온 젤로를

고르고 있었다. 그것이 그가 매일 먹는 주메뉴 같았다.

그는 계산대에 가더니 점원에게 몇 번이나

다음과 같은 말을 반복했다. “어느 날 새 메뉴가 나올 거라고

믿고 있지. 그런데 도대체 변화가 없어. 똑같애.

물론 나는 원치 않아도 그걸 좋아해야 한다는 걸 알지만.

내가 들고 온 게 값이 맞지?”

점원은 정면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돌처럼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아니요. 그건 5불 49전인데요. 다음 손님요!”

 

 

그 노인은 몹시 당황하듯, 비틀거리며 내내 혼자 앉아있던

테이블로 돌아갔다. 그가 원한 것은 오직 작은 미소와

다정한 말이었다. 그러나 점원은 그걸 받아들이길 거부했다.

마치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는 것은 그녀의 에너지를

소모할 뿐이라는 듯이.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그녀가 매일 만나는 ‘외로운 사람들’에게 따뜻하게 대하는 것보다

그처럼 돌처럼 무표정한 표정을 짓는 것이 더 많은 에너지를 소모하게

한다는 점이다.

 

 

많은 사람들이 우리의 감정은 연료와 같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것을 소모하거나 사용하거나 남에게 주어버리면 곧 고갈될

것이라는 듯이. 그러나 이 에너지는 사용하고 나면 고갈되어 버리는

일용품이 아니다. 우리의 몸 속을 흐르는 피처럼,

우리의 감정 또한 흐르고, 사용될 필요가 있다. 그때

그것은 스스로 재충전되고 우리의 삶을 건강하게 해줄 것이다.

감정적 에너지를 사장해두는 것은, 댐에 가두어두는 것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의 마음을

다치게 할 뿐이며, 궁극적으로 자살행위나 다름없다.

 

 

계산대의 점원은 외로운 노인에게 그가 혼자가 아니라는

확신을 주기를 거부했을 뿐 아니라 그의 하루를 따뜻하게 만들어

줄 수 있는 인간적인 온정을 주기를 거부했다. 그녀는

자신을 감정의 시체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최근의 심리학적

연구는 보여준다. 친절하게 굴면 생리적으로도 도움이 된다는

것을. 몸에 활력이 넘치게 되고, 가슴의 어두운 에너지로부터

자유롭게 된다는 것을.

 

 

물론 모든 사람의 주의에 반응할 필요는 없다. 개중에는

좋지 않은 감정적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 경우도 얼마든지

있기 때문이다. 한번은 워크숍에서 한 여성이 내가 하는 모든 것에

끼어들어 사사건건 반대를 했다. 그녀의 목적은

끊임없이 자신에게 관심을 집중하려는 것이었다.

상황이 명확해지자 나는 사람들로 하여금 원을 만들게 한

다음 그녀를 가운데에 세웠다. 나는 부드럽게 말했다.

“이제 당신은 우리 모두의 관심을 받고 있습니다.”

그러자 그녀는 울음을 터뜨렸다.

 

 

때때로 연민은 다른 사람들의 감정을 함께 나누는 것을

포함한다. 성난 아이에게 최상의 것은 그의 분노를 다른 데로

돌리거나, 내려놓게 하는 것이 아니다. 그의 분노를 억제해야

한다고 설득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아이의 분노에게

기회를 주고, 스스로 확인하게 하는 것이다. 아마도 그대는

몹시 당황하거나 아이보다 더 성이 나서

펄쩍펄쩍 뛸지도 모른다.

 

 

하지만 바로 그 순간이야말로 우리의 동료나 애인, 아이들,

또는 친구들로 하여금 그들의 감정을 숨쉬게 하고

적절한 표현을 찾도록 도와줄 수 있는 가장 좋은 기회이다.

연민은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의 감정 속에 들어가

그들의 닫혀져 있던 감정의 문을 활짝 열고는

위장된 감정의 베일을 걷어내도록 지원하는 것이다.

 

 

많은 가족에서

어떤 감정은 허용되고 어떤 감정은 허용되지 않는 것을 본다.

내 남편의 경우에 분노는 자연스러운

것이며, 그 표현은 신성한 것이다. 그와 그의 가족은

분노를 드러내는 것을 아주 자연스럽게 생각한다. 그러나

나의 가족에서 분노를 드러내는 것은 금기시되었다. 대신

슬픔은 표현하도록 허용되었다. 그래서 나는 내 남편의

분노에 놀라지 않는 법을 배워야만 했다. 그렇게 우리 부부는

낯선 감정을 서로에게 가르쳐야 했고 인정하게 해야 했다.

그래서 그는 슬픔을 받아들이고, 나는 분노를 인내할 수 있도록.

 

 

정말로 건강하고 살아있다는 것을 느끼며

다양한 관계가 지속되게 하려면 이런 종류의 교환도 필요하다.

이러한 교환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사실이야말로

우리 주위에 있는 그 많은 관계들이

너무도 쉽게 지루해지고, 실패로 끝나게 되는 이유이다.

관계의 생명의 핏줄은 억제와 부정의 덩어리들에 의해서 동맥경화가

일어난다. 우리의 창조적이고 건전한 삶의 에너지는

바로 이런 회피의 끊없는 소모적인 전략들에 의해서

사그라드는 것이다.

 

 

어떤 관점에서 보면, 연민은 텅 비워진 감정이라고 말할 수 있다.

즉, 그대가 상대방의 감정의 진실에 마음의 문을 열 때

그대 역시 그대의 과거의 감정으로부터 자유로워지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연민은 텅빈 그릇과 같다. 만일 그대가

그것을 두려움으로 채운다면, 다른 사람들의 두려움을

제대로 담을 수 없게 된다. 오직 그대가 세련되게 조율된

감정의 도구일 때만, 그대는 다른 사람들의 감정의 서정시가

되고, 노래가 될 수 있다. 만일 그대가 진정으로 다른

사람들의 감정을 느낀다면, 그대는 해결되지 않은 두려움과

분노, 슬픔의 왜곡된 필터를 통해서 반응하지 않을 것이다.

대신 그 순간에 가장 적절한 방법으로 반응할 것이다.

 

 

연민은 텅 비워진 감정이다.

바로 그 텅 비워진 감정으로부터 온갖 감정이 흐를 때

그대의 역동적인 고요함이 모든 삶의 에너지의 근원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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