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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0/05/03
    싱어송라이터 소히
    씨앗(산길)
  2. 2010/04/26
    어떤 순간이 올지 알 수 없는
    씨앗(산길)
  3. 2010/04/21
    오줌 처리
    씨앗(산길)
  4. 2010/04/16
    오줌과 똥 처리(1)
    씨앗(산길)
  5. 2010/04/16
    집이란?
    씨앗(산길)
  6. 2010/04/13
    행사를 위한 일(2)
    씨앗(산길)
  7. 2010/04/12
    '4대강' 사업 이면 드러내는 뮤직비디오 '공개'
    씨앗(산길)
  8. 2010/04/12
    '금호동 철거민' 유 이사, 사고 치다"
    씨앗(산길)
  9. 2010/04/09
    실행
    씨앗(산길)
  10. 2010/04/08
    체증처럼 마음 속에 쌓여있는 답답함과 분노와 아픔
    씨앗(산길)

싱어송라이터 소히

음.. 보사노바를 하는 가수라 한다.

복많게도 이번 두리반 공연에서 소히를 직접 보았다. 아~보사노바 스러운 기타연주도 매력이었다.

 

가수 소히, 그 봄바람을 베낀 노래에 대하여...
 
보사노바 싱어송라이터 소히와의 감성 인터뷰
 
배문희기자
 
ⓒ 배문희 기자

가수 소히는 봄바람같은 목소리를 지녔다. 시린 귀를 부드럽게 스치고 여린 솜털들을 어루만지는 봄바람처럼 그녀의 목소리는 일부러 지어낸 기교가 없이도 사람의 마음을 잔잔히 흔드는 마력을 지녔다.

그런 그녀가 얼마 전 2집 앨범을 들고 왔다. 2집 앨범은 탁월한 송메이커 이한철이 프로듀서를 맡아 제작한 앨범으로 타이틀 곡 '그럼 그렇지'는 발랄한 분위기에 현 세태를 풍자한 가사가 돋보이고, '산책'은 소히의 시적인 감수성이 잘 묻어난다.

그녀는 국내 음악계에서 보기 드문 싱어송라이터다. 보사노바 아티스트가 귀한 국내에서 기존의 보사노바 앨범들이 대부분 카피곡 위주였다면 그녀는 한국과 브라질의 감성을 잘 녹여내 '한국적 보사노바'를 맛깔나게 들려준다.

문화저널21은 합정동에 있는 작은 카페에서 가수 소히를 만나 그녀의 음악세계에 대한 이야기를 나눠봤다.

'한국적 보사노바'란 어떤 색깔인가.
나라마다 가지고 있는 색깔이 있다. 일본에는 일본만의 감성이 있고, 영국에는 영국 특유의 감성이 있다. 나는 브라질 음악을 하고 있지만 한국만의 감수성과 멜로디 라인을 통해 브라질 음악을 표현하고 있다. 브라질 음악을 어떻게 하면 한국적으로 만들까 생각하며 굿거리 장단, 자진모리 장단 등을 연구하기도 한다.

ⓒ 배문희 기자
노래도 노래지만 가사가 참 시적이다. 평소 책을 많이 읽는가.

책 읽는 것을 좋아한다. 예전에는 시와 소설 등 문학을 주로 읽었는데 사회문제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여성학, 사회학 서적도 즐겨 읽는다. 최근에는 자기계발서도 읽고 있다.

1집과 이번에 발매한 2집 'MIGLE'을 비교한다면?
1집에선 음반사의 의도가 살짝 들어가서 재즈풍의 느낌이 있었다면 2집에서는 보다 내가 하고 싶었던 보사노바 음악을 표현하는 데 주력했다.

'한강 송전탑 위엔 사람이 살았어'라는 노래가 화제가 되기도 했다.
콜트콜텍 기타 노동자들이 양화대교 옆에 있는 송전탑 위에 올라가 투쟁을 할 때 그 아래서 공연을 한 적이 있다. 그 위험한 송전탑 위에 사람들이 있는데도 사람들이 아무런 관심도 없이 자기 할 일을 하면서 지나가는 모습을 보고 많은 생각을 했다.

한강을 거니는 사람들은 대부분 나들이를 나온 사람들이다. 그런 한강에서 목숨을 건 싸움을 하는 사람들을 보며 '같은 공간에서 어쩌면 이렇게 다를까'하고 생각했다.

어떤 이들은 그 노래를 듣고 소히씨를 민중가수로 생각하기도 한다.
나의 전체적인 음악을 들어보면 분명 다르다고 느낄 것이다. 하지만 민중가수라고 생각한다해도 나로서는 불만이 없다. 민중가요도 다양해져야 한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음악적 형식이 비슷한 민중가요를 듣다가 '이런 민중가요도 있네'라고 느낀다면 민중가요가 다양해지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평소 사회적 문제에 관심이 많은가.
음악활동을 하면서 사회문제에 자연히 관심을 갖게 됐다. 음악을 통해 소외된 이웃들에게 조금이나마 위로를 전할 수 있다면 좋겠다.

1집을 만들 당시 20대였는데 2집을 들고 나온 지금은 30대다. 30대에 들어서 음악적으로 달라진 점이 있다면.
20대 때는 음악이 좋아서 한다는 생각이었지만 30대에 들어서는 음악을 하는 자세가 더 치열해졌다. 좀 더 완벽주의가 되려고 하는 거지. 또 예전엔 음악에 대해 막연하게 생각했다면 지금은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까를 더 구체적으로 생각하게 된 것 같다. 

음악에서 8~90년대 아날로그 감성이 느껴지는 것 같다.
옛 감성을 좋아한다. 90년대에는 인간에 대한 따뜻함과 그리움의 감성이 있었다. 팝적인 음악과 사회비판적인 노래 등 다양한 음악들도 있었는데 지금은 그런 노래들을 공중파에서 들을 수가 없다. 점점 획일화되고 있는 것 같다.

특유의 자연스럽고 깨끗한 창법이 인상적이다. 마치 조미료가 안 들어간 정갈한 음식 같은 느낌이랄까.
기교 섞인 노래보다는 목소리 자체를 깨끗하게 전달하고 싶다. 또 목소리의 모서리를 최대한 없애 좋은 목소리를 전달하기 위해 노력한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나같은 가수들은 노래를 못 부른다고 생각한다. 다양한 기교와 고음처리를 해야만 노래를 잘한다고 생각하는 분위기가 참 힘들다. 평가를 그런 식으로 받아야 하니까. 나는 내 목소리를 맑고 깨끗하게 전달하면서 오래오래 노래하는 보컬이고 싶다.

ⓒ 배문희 기자
음악활동을 하면서 아르바이트도 한다고 들었다.

아르바이트를 그만 둔지는 몇 달됐다. 음악활동으로 많은 돈을 벌 수는 없지만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할 수 있다는 것 만으로도 행복하다.

좀 더 대중의 입맛에 맞는 음악을 할 생각은 없는지.
대중의 요구를 배제하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내가 좋아하는 음악을 하면서 최대한 접점을 찾고 싶다.

이번에 나온 음반은 대중들과 충분히 소통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낸 음반이다. 만약에 성과가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접점을 찾을 것인가를 고민해야 할 것 같다.

대중에게 알리기 위해 방송 출연을 할 생각도 있다. 예전에는 얼굴이 많이 보여지는 것이 창피하고 그랬는데 나이가 드니까 용감해지는 것 같다.

앞으로도 보사노바 음악을 할 생각인가.
처음엔 락밴드로 음악을 시작했고 그 다음엔 흑인음악을 했다. 관심이 가는 음악이 계속 변했기 때문이다. 앞으로 어떻게 변하게 될지는 예측불허다. 보사노바 음악도 워낙 다양해서 지방마다 특색이 다르기 때문에 보사노바 음악만으로 다양한 변화를 보여줄 수 있을 것 같다. 
 
노래하는 소히 ⓒ그림=배문희 기자
<오프더 레코드 이야기...>

직접 만나본 소히는 모딜리아니 그림에 나오는 여인처럼 목이 길고 신비로운 이미지였다. 속삭이듯 조용한 목소리, 잔잔한 미소. 그녀는 마음이 여려서 사람들 앞에서 노래를 부를 때 긴장이 많이 된다고 한다. 모서리 없는 목소리만큼이나 마음에도 모서리가 없는 것 같았다. 그녀는 이란성 쌍둥이다. 쌍둥이 남동생과 자주 만나지는 않는다. 그녀는 합정동에 산다. 홍대와도 가깝고 한강과도 지척이다. 동네 카페에서 혼자 책을 읽으며 시간을 보내는 것은 그녀가 좋아하는 일들 중 하나다. 
 
문화저널21 배문희 기자 baemoony@mhj21.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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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순간이 올지 알 수 없는

어차피 그 이후 다시 만나지도 않았어. 만날 수가 없었어. 다시 만나면 의도치 않게 흔들릴 것만 같은 내 마음 때문이었어...언젠간 재결합해 다시 잘 살고 있을지도 모른단 건 알고 있었지

사랑하는 마음이나 미워하는 마음은 옅어져갔지만 정체 모를, 한동안 알았었던 사람으로서의 정이랄까? 기억?그렇게 안정되게 살길 바랬었지

 

새로운 가족을 하늘로부터 맞이한  소식을 블로그에서 접하니 묘하게 궁금해진다.

상상못한 낯선 일이기도 하다. 그라는 사람에게는... 하지만 좋은 일이지.

참 이상한 마음인게다. 그는 재결합을 하겠다고 했고 그래서 나는 그와의 인연을 어렵사리 끊었었고.

그는 다시 그의 가족에게로 돌아간 것일까? 난 정확하게도 모른다. 석연치 않은 구석이 조금 있었으니.

 

그 이후 한번도 보지 않길 잘 했어 하지만 언젠가 한 번 춤명상 후 생각이 나 문자메세지를 보냈지... 그리고 얼마 전에도. 하지만 전화는 받고 싶지 않더라구.

 

그런데, 한 번 받았어. 할머니가 돌아가셨다고 했고, 내가 전화를 받아서 고마웠다고 했어. 그 이후론 전화를 받지 않고 하지 않았지. 2년 사이 그의 부모와 할머니가 돌아가셨어..

사실 그는 나의 좋은 친구이자 선배였었지만 하지만 절대 어떤 면에서는 만나지 않아야 할, 맞지 않는 사람이었어. 그래도 좋은 조언자였어.

 

그래, 이젠 확실히 마음 속으로 그의 안정과 행복을 빌어주겠어. 그래야겠어.

나와 타인 사이에 존재하는 과거의 기억이란 복잡미묘하고, 떠올릴 때면 아프기도 해.

 

그래서 그런 기억을 만드는 것이 괴로워.

만들고 싶어질 때면 나는 그냥 문을 닫게 돼.

어떤 순간이 올지 알 수 없는 삶.

 

여인들과의 관계는 동지적이고, 복잡미묘한 기억을 덜 만들지만

남자와의 관계는 그렇지 않아. 뭐,당연한 거지. 자꾸 끄달리게 된다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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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줌 처리

굴러다니던 깔때기를 발견. 득템.

사무실 말통 하나 들고가야겠음.

요강을 비울 때 말통에 깔때기를 꽂고 비우면 되겠군 드디어 해답을 찾았다

핫핫핫

 

사무실 앞 조그만 텃밭에 꽃씨를 뿌렸다.

메마른 가슴에 꽃씨를 뿌려요~ **

농장에는 오늘 파종한다는데 난 사무실 일이 있어서 못 가고 있다.

그런데 비가 온다. 그래, 안 가서 다행인건가...

 

몸쓰는 일이 조금은 더 익숙해진다면. 그것은 다행인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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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아침은 자전거와 버스로 환승해 출근했다.자전거로 15분만 달리면 버스정류장이 나오고 거기에서 버스를 타면 10분 후면 사무실 앞에 도착한다. 가장 이상적인 방법으로 보인다.ㅋㅋ

나는 운이 좋다. 이 정도 교통환경이면 교통 좋은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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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줌과 똥 처리

몇 가지 구상을 해 본다.

어떻게 하면 활용할 수 있을까 요러한 구상을 해보는 것이 재미다.

 

어제 마당에 구덩이를 팠다. 이미 배설한 것을 처리하는 구덩이다. 강아지똥 및 애들 것+언니것은 요강이 있으니 거기에 일을 봐서 비우면 된다. 그것은 큰아이가 하기로 했다.

여기에 동의해주는 언니는 역시 가리는 게 없고 마음이 고운 분이다.

내가 뒷물을 한다고 이야기를 했을 때에도 "그래? 우리 애들도 하면 좋겠다."이런 이야기를 바로 하셨던 분이다.

 

왠만큼 깊게 파서 될런지...는 모르겠다 하하.

 

그리고 마당 귀퉁이에 야외 배설용 구덩이를 하나 더 팠다. 이것은 그 자리에서 배설하는 것이다.

아니면 요강을 마련해서 일을 보고 비우는 것이다. 배설의 방법은 일단 두 가지가 나온다. - 배설용 구덩이에 파거나 요강에 파서 구덩이에 묻거나...하지만 내가 눈 똥을 요강을 비우면서 확인해야 한다는 단점이 있다.똥을 누고 요강에 쌀겨를 좀 뿌릴까? 그러면 덜 거북하겠지 ㅠ.ㅠ.

그것보다, 아무리 언니가 거부감이 없다고 해도, 어떤 게 언니나 애들이 보기에 덜 불편할 것인가 가 중요하다.

 

"똥이 더럽다고 생각하는 것은 - 일단 냄새를 제외하고 모양만 봤을 때 - 본능적인 반응인가, 학습된 반응인가? " 얼마 전부터 생각해오기 시작한 탐구주제인데, 아직 답은 못 찾았따. 그리고 본인의 똥냄새는 그런 대로 참아줄만하다... 이것도 신기하다. -.-;;

 

오줌을 말통에 받아서 삭히는 게 좋다고 했는데, 화장실 구조상 그렇게 할 수가 없다. 새로 지을수도 없구. 구덩이에다 일을 봐서 삭혀서 그 흙을 쓰는수밖에... 텃밭 비료를 마련해야 하므로 어떻게든 오줌과 똥을 다시 텃밭에 돌려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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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이란?

요새 재미난 것을 알게 되어서 탐구중이다. 빈집이라고...

나도 한동안, 그리고 지금도...그런 공간을 꿈꾸었기에...

내가 살아가는 집이라기보다 , 어느 정도 뜻이 비슷하고, 거처가 필요한 사람들이 함께 모여 사는 곳...

그곳이 집이다.

나는 내 집을  소유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지금 사는 집도 언니네가 고친 것을 나는 그냥 몸만 들어가 살고 있는 것이다. 대신 나의 방식대로 요리와 청소를 부지런히 하는 것으로 보답한다. 언니는 미안해하지만...(너무 착한 사람이다..)

 

진안에서도 그 비슷한 생활을 했을 때 아주 많은 것을 배웠고 즐거웠다. 

물론 정서적인 부분이나, 대화와 토론에 있어서 어려운 난관들도 있었지만

남녀가 물론 다른 집을 쓰지만 여성과 남성, 여동생과 언니 오빠들과 함께 산다는 것은 정서적인 외로움을 충족시켜주고 이성과의 대화도 하게 해 주는 그런 대화거리와 시간,공간이 가능하기 때문에 좋은 점이 많았다. 그것을 불편해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개인 방을 원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함께 사는 것의 불편함에 무뎌서인지 나는 그저 그렇게 살만했다.

 

그러나, 내가 피해를 조금 주었을게다.

변온동물이라 보일러를 켰다 껐다 하면서 다른 사람의 발을 실수로 밟는 일도 있었기 때문이다.

잠자리에서만큼은 내가 불편해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 불편하게 되는 경우가 생긴다는 것이 컴플렉스이긴 하다.

 

지금도 언니와 아이들 둘과 강아지와 한 집에 산다

우리는 가족이 아니지만, 가족보다 더 유대감이 느껴진다

성품이 좋으시고, 배려심이 있어서다.

 

강아지가 한밤중에 짖어서 잠을 설치는 것이 딱 한 가지 문제라면 문제겠다.

 

어젠 밭을 일구었는데 큰아이가 자기는 일을 좋아한다며 나서서 괭이질도 하고 삽질도 했다.

보기 드문 어린이다. 아버지가 농사를 짓는 것을 보고 자라서 일이 낯설지가 않댄다.

둘째는 이제 초등학교 1학년이라 귀엽지만 땡깡 부리는 걸 보면서 나중에 내가 아기를 키우고 대할 때 많은 참고가 되리라는 것을 느꼈다.

 

행복하다

또 다른 사람들과의 동거생활

여자들만의 생활이라는 것이 주는 안정감

 

그리고 또 한 친구 부부네 집은 손님들이 많아서 가끔 손님들과의 대화가 간절해지면 그 집으로 놀러가면 된다. ㅎㅎ 그래서 오늘은  그 집으로 고고씽이다.

 

어느 새 나는 또 다른 이들과 한 집에서 생활한다.

솔직히 혼자 사는 것은 재미없다... ㅠ.ㅠ

하지만 결혼이나 동거생활은 하고 싶지 않다. 왜인지...

남자와 살기에는 아직 마음의 준비가 안 됐나보다.

여성성을 갖고 있는 남자라면 조금 나을까?

 

나는 진안에서의 생활을 통해서 조금 부지런해졌다. 그리고 요리실력과 의지도 조금 늘었다.

그래서 지금은 청소가 습관화가 되었다. 같이 사는 건 여러모로 많은 것을 배우고, 느끼게 해준다.

그것이 비록 안 좋은 경험일지라도...

 

 

김디온, 아규 - 도심 속 공동주거실험 2년 ‘빈집’

 

[행복한인터뷰]


 
빈집의 진실 “2000원에 주인되는 집?” 
 
1월 1일 모 일간지 일면 헤드라인은 이러했다. 2000원에 주인 되는 집! 주거난에 허덕이는 이들을 단박에 유혹하는 이 제목은 서울 용산2가 해방촌에 있는 대안적 주거공동체 ‘빈집’을 소개한 기사였다. 빈집은 하루 2,000원 이상의 분담금만 내면 누구나 머물 수 있는 일종의 게스츠하우스(Guests’ house)다. 하루를 묵는 것도 몇 달을 머무는 것도 자유다. 다만 각자 주인으로서 모든 것을 스스로 해나가면서 공동의 삶을 꾸려간다. 
이 기사가 나간 후 많은 이들이 빈집의 문을 두드렸다. 언론에 소개된 맛집이 한바탕 몸살을 앓듯, 빈집은 1월 내내 호기심 인파로 휘청했다. 하지만 무슨 까닭인지 ‘신문 보고 찾아왔던’ 손님들은 오래지 않아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제아무리 커피 값보다 싼 방값이라도 여럿이 매일매일 살아내기가 쉽지만은 않았던 걸까. 
 
접기
새해 벽두 한바탕 해프닝을 터놓는 빈집설립자 아규와 장기투숙자 김디온. 그들은 이번처럼 빈집이 알려질 때마다 ‘빈집이 도대체 어떤 곳이냐’는 질문에 목 아프게 답해야 했다. 그런데 이제는 그 물음을 바꿔 스스로에게 던지고 있다. 빈집이 무엇인가가 아니라 빈집을 어떻게 구성할 것인가로. 나무처럼 조금씩 자라는 빈집에서 동고동락하는 그들을 2월 4일 봄의 길목에서 만났다. 
 
빈집의 탄생 “공간절약 재미만빵! 같이 살자”
 
“빈집을 만들기 전, 일 년 동안 짝꿍(남친)과 배낭여행을 다녔어요. 동남아와 유럽을 돌면서 주로 게스트하우스나 텐트에서 먹고 잤죠. 말레시아에서는 방한 칸 빌려서 한 달을 지냈고요. 거기서 아나키스트 친구를 만났어요. 그들은 일찍이 독립해서 방 한 칸에서 살더라고요. 여행하는 동안 이런저런 방법으로 살아보면서 느꼈죠. 우리가 사는 공간이 생각보다 많이 필요한 게 아니구나. 또 어떤 곳에서 산다 해도 24시간 공간을 점유하는 것도 아니고 세탁기도 한 달에 서너 번 밖에 안 돌리는데 집집마다 있는 건 낭비잖아요.”

배낭여행에서 돌아와 새로운 삶의 터전을 정해야 했던 아규. 그는 여럿이 밥해 먹고 사는 주거공동체를 꾸리기로 결심했다. 짝꿍도 동의했다. 둘이 지내는 것도 좋지만 여럿이 살면 절약도 되고 재밌겠다 싶었다. 다른 친구와 셋이서 의기투합해 서울 남산 아래 해방촌 다세대 주택 4층에 둥지를 틀었다. 2008년 2월 손님(賓)들의 집, 가난한 이들(貧)의 집 ‘빈집’이 탄생한 것이다.
 
방 세 칸짜리 ‘아랫집’에서 시작한 빈집은 인근의 ‘윗집’(2008년 11월) ‘옆집’(2009년 2월) ‘가파른 집’(2009년 4월) 수색 부근의 빈농집 (2009년 10월)까지, 두해를 넘기며 다섯 채로 늘었다. ‘빈마을’이 된 이곳에서, 현재 아기가 있는 부부를 포함해 10대부터 50대까지 32명과 고양이 세 마리가 장기 거주한다. 단기투숙자도 월 20여 명 다녀간다. 
 
빈집의 고민 “혼자 있고 싶을 땐 어떡하지”
빈집은 주인이 없는 하지만 누구나 주인이 될 수 있는 집이다. 아무리 그래도, 말이 그렇지 생판 모르는 낯선 사람과 한 지붕 아래서 먹고 자는 것은 어쩐지 두렵다. 혼자서 고독을 씹고 싶을 땐 어디서 어떻게 해야 하나. 
“사실, 그거였어요. 저는 철저히 혼자 사는 걸 추구했거든요. 친구와 같이 살다가 실패한 경험이 있어서 다시는 누구랑 안 산다고 결심했죠. 빈집이 처음 생기고 집들이 할 때부터 알았는데, 밖에서 1년 간 지켜봐도 들어갈 엄두가 안 났지요. 낮 동안 힘들게 일했는데 집에 와서 또 사람이랑 부대끼면서 쉬지도 못하고, 심지어 모르는 사람이 옆에서 자다니 끔찍하잖아요. 무엇보다 내가 남에게 피해주는 것도 걱정이고요. 그 엄청난 정서운동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지요.” 
오랜 망설임 끝에 빈집 식구가 된 김디온 씨. 실은 남친한테 먼저 빈집에 살고 있으라고 하고는 간을 보다가 결국 옆집으로 이사하면서 빈집 살이를 시작했다. 우려와 달리 일 년 째 빈집에 잘 지내고 있다. 두려움이란 괴물은 빈집이 아니라 마음에 있었고, 그것은 낯선 존재들과의 무수한 부딪침을 통해서 서서히 사라졌다. 담력이 커졌고 소통기술도 늘었다. 사람들 속에서 유유자적 고독을 씹는 노하우도 터득했다.  
 
빈집의 약속 “낯섦을 즐기는 환대의 기술”
빈집은 딱히 금기가 없다. 생활수칙은 집집마다 벽면마다 무수한 쪽지가 대신한다. 설거지 하는 법, 화장실 이용법, 세탁기 사용법 등을 보고 각자 처리한다. 윗집은 아예 장기투숙자 6명이 주방정리, 마루청소, 분리수거, 회계, 화장실, 반찬 만들기 등 6가지 가사노동을 분담한다. 그렇다고 일상이 척척 맞물려 기계적으로 돌아가는 건 아니다. 하지만 빈집에 사는 사람들의 보이지 않은 신뢰, 공간에 대한 힘이 강고하기에 손님이 들어와도 눈치껏 일상을 살아냈다. 크고 작은 갈등은 대화로 조율이 가능했다.
그런데 작년 여름부터 상황이 달라졌다. 장기투숙자들이 서서히 취직하고 신입 단기투숙자들의 비율이 늘어났다. 장기투숙자들이 낮 동안 집을 비우자 환대의 질이 떨어지고 밥 짓고 청소하는 공동생활의 리듬이 흔들렸다.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모여 논의했다. 빈집은 집별로 월2~3회, 마을단위로는 월 1~2회 회의를 연다. 그런데 사안은 달라도 결론은 늘 대동소이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환대의 의무를 다하자는 것, 빈집에 기여하는 활동을 스스로 늘리자는 것이다. 
“장기투숙자들은 손님에 대한 환대의 의무가 있어요. 낯선 사람이 올 때마다 이 공간에 대해 설명해야하죠. 이렇게 하라고요. 그런데 아무 일도 안 하고 무임승차 하려는 사람이 꼭 있어요. 외출할 때 뒷정리나 가사노동을 안 해놓으면 잔소리하죠. 우린 하숙생! 기생인! 이게 가장 심한 욕이에요.(웃음) 당신은 왜 여기 있느냐 왜 같이 살려고 하느냐 묻고 또 묻죠. 못 견디고 스스로 나가는 사람은 있지만, 어떤 경우에라도 먼저 나가라고는 말하지 않아요. 지금까지는 계속 대화로 풀어갔죠. 그 정서노동의 피로가 무척 커요.한 말 하고 또 하고 당한 일 또 당하고. 그런데 또 그게 힘들면서 보람이기도 해요. 새로운 사람들의 반응에 힘이 생기고 조금씩 변하고 나누는 게 좋아요.” 
이건 어디까지나 아규가 고집해온 환대의 기술이다. 이제는 힘에 부쳐 조금 뒤로 빠졌지만 아규는 줄곧 마음을 열고 지속적인 대화를 시도하는 은근과 끈기의 소통법으로 손님을 맞았다. 김디온은 조금 다르다. 직설화법으로 말한다. 일단 일을 시켜 몸소 터득하게 하는 실리형이다. 집안일을 조금만 잘해도 칭찬하고 “믿고 나가요”라며 주인의식을 고취시킨다. 
 
빈집의 환상 “저렴한 하숙집 아니거든”
공동주거에서 가장 난제였던 부엌일은 반찬팀을 만들어 해결했다. 지난 12월부터 한 사람당 2만원씩 낸다. 매주 수요일 낮에 모여 찬거리를 사고 일주일치 밑반찬 만들어서 집집마다 나눠 먹는다. 구성원들이 돌아가면서 한 번씩은 반찬팀을 해야 한다. 자발적 강제다. 건강팀에서는 아침에 약수를 길러 집집마다 나르고 요가와 108배 등 정서적 건강까지 챙긴다. 빈책팀에서는 좋은 책을 골라서 함께 읽는 세미나와 빈집이야기를 기록하는 작업을 진행한다. 이러한 팀활동은 주거공간에 리듬과 균형을 잡아주고 유대를 돈독히 해주었다.
“하숙집이나 고시원 전전하다가 ‘저렴한 하숙집’의 환상을 품고 오는 사람들도 많아요. 이런 이들이 가장 먼저 부딪히는 벽은 가사노동이죠. 생활인이 아니라는 게 문제에요. 기본적인 가사노동에 서툴고 여럿이 무얼 한다는 것을 번잡스러워 해요. 회의한다고 하면 왜 자꾸 모이느냐 불만을 갖죠. 오래 살다 보면 익숙하고 좋아지는데 그것을 견디지 못하고 한두 달 만에 가버려요. 나갈 때 ‘좋은 경험이었어요.’ 이런 말 들으면 아주 서늘하죠.(웃음)”  
아규에 이어 김디온은 반대 사례를 소개했다. 대학에 들어오면서 상경해 6개월간 고시원에 살던 한 친구는 카레가루 푼 멀건 카레밥만 먹다가 빈집에서 사니 “밥 같은 밥 먹고 등 따시고 천국이 따로 없다”고 좋아한다는 것. 또 빈집에 오자마자 첫날부터 빗자루 들고 청소를 하면서 공간을 장악하는 사람도 가끔 볼 수 있다. “그런 사람은 정말 빈집의 주인이 되는 거죠. 남의 집에 가서 청소를 하진 않잖아요.”
 
빈집의 가족 “독거냐 아니냐의 차이다” 
그렇다. 집은 사적공간의 대표명사다. 내 삶에서 내 몸에서 나오는 노폐물을 버리고 큰 불편함 없이 사는 곳이다. 그런데 빈집에서는 낯선 존재들과 공동의 삶을 만들어간다. 그들에게 집은 무엇일까. 골똘히 생각에 잠겼던 아규는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집이란 것이, 혼자 사느냐 같이 사느냐 그 차이 같아요. 애인, 부모 등 누구와 살면 어차피 고요한 사적 공간의 기능은 사라지니까요. 짝꿍이랑 사는 순간 침실부터 부엌, 화장실 모두 공유하잖아요. 두 사람이나 여러 명이나 똑같아요. 시간을 두고 지내면 서로에 대한 신뢰도 싹트고 재밌게 살다보니까 사적공간에 대한 생각이 달라져요.”   
집에 대한 해석이 바뀌면서 가족에 대한 개념도 변했다. 김디온은 얼마 전 친동생이 아기를 낳아 산후조리를 도왔다. 자매애가 남달라 괜시리 애틋한 감정을 느꼈다. 아랫집에서 같이 사는 ‘뚜리’도 소중하다. 꼬물꼬물 신생아 때부터 줄곧 성장을 지켜보았고 매일 서너 시간은 돌보다 보니 정이 흠뻑 들었다. 조금 더 짠하고 덜 짠하고의 미세한 차이가 있을지 모르겠으나 지지고 볶고 살면서 서로의 삶에 영향을 주는 점에서는 매한가지 아닐까, 그는 말한다. 
 
“뚜리가 처음 왔을 땐 정말 힘들었어요. 애기가 우니까 신경이 날카로워져서 밤에 잠도 못자고 공부도 못하고 일상이 엉망이 됐죠. 화가 나서 뒷담화도 하고 상처도 주고받고 그랬어요. 뚜리를 계기로 아기랑 사는 것에 대해, 아기와 어떻게 관계 맺을 것인가 생각하게 됐고, 또 뚜리아빠가 인도사람이거든요. 이주민 소수자의 삶도 고민하게 됐죠. 많이 배워요. 얼마 전엔 뚜리엄마가 빈집이 아기를 키우기 위한 공간은 아니지 않느냐는 말을 하는데 왠지 서운하더라고요.”  
빈집의 비밀 “사적소유, 섹스 감각 바뀐다”   
김디온의 고백처럼 빈집의 공동주거는 혈연중심의 가족주의를 무력화시켰다. 내 집에 대한 애착이 사라지면 내 가족, 내 물건의 사적소유의 감각도 해체되기 마련. 아규는 잠자리까지 공유하는 사이에 “사적소유 웬말이냐”고 정색했다. 처음엔 어색해서 내 것을 챙기는데 점점 공유의 폭이 넓어지더라는 것. 
“그래도 마지막에는 감정적으로 치환되기도 해요. 잘 지내다가 감정 틀어지면 이름과 용도를 붙이게 되죠. 하하. 근데 전 아직도 손톱 깎기는 꼭 제 서랍에 넣어둬요. 왜 그런지 모르겠어요.” 이에 질세라 김디온이 거든다. “나도 그런 거 있어요. 누가 내 책에 누가 줄긋는 거 싫어요.”
 

또 한 가지 중요한 문제. 사적공간이 아닌 공동주거 공간에서 섹스는 어떻게 이루어지는 걸까. 김디온과 아규를 포함해 빈집에는 총 다섯 커플이 있다. 그간은 이집 저집의 남자방 여자방에서 따로 흩어져 지냈으나, 손님맞이용 여유로운 공간을 더 많이 확보하기 위해 방 하나에 이층 침대를 놓고 커플들을 위한 방으로 정할까 궁리중이라고 한다. 아니, 대체 커플들이 한 방에서 지낸다는 것이 어떻게 가능할까. 김디온은 빈집에 살면 커플에 대한 감각도 달라진다고 얘기한다.
 

 

“섹스가 꼭 육체적인 접촉을 통해서만 이뤄지는 게 아니잖아요. 세미나 하면서 정서적으로 교감이 이뤄지면 에로틱한 감성이 생기기도 하고. 관계를 열어두게 돼요. 일상을 폭넓게 공유하는 게 중요하지 커플이라고 해서 별도의 침실이 있고 거기서 단둘이 있을 필요는 없다는 거죠. 물론 커플끼리 내밀한 얘기도 하고 싶고 싸우기도 하고, 꼭 섹스가 아니라 그냥 둘이 뒹굴면서 놀고 싶기도 하지요. 그럴 때는 운 좋으면 비어있는 공간을 활용해요.” 
김디온에게 빈집은 사랑이 쑥쑥 자라는 양질의 토양이다. “저는 공부하고 남친은 목수일목수일을 했었거든요. 둘만의 공감거리가 별로 없었어요. 그런데 이 공간에 살면서 두 사람의 공감거리가 훨씬 풍부해졌어요. 정서적 완충지대 역할을 한다고 할까요. 빈집에 같이 묶여서 복닥복닥 하다보면 재밌어요. 가난한데 풍요로워요.”   
김디온은 이어 빈집에 살면 공부거리가 계속 생긴다고 말했다. 크고 작은 문제가 생길 때마다, 가령 뚜리가 아플 때는 육아서적을 보게 되고, 어떻게 공간을 배치하고 구성할 것인가를 위해 주거학과 욕망을 공부하고, 빈마을 카페를 만들기 위해 바리스타가 되는 법을 공부하는 식이다. 빈집에서 성희롱 발언 사건이 있을 때는 페미니즘에 관한 책을 보면서 대응책을 마련하기도 했다. “도서관에서 책을 잔뜩 빌려다가 읽고 공부면서 삶을 만들어가는 재미가 솔솔 하다.” 
 
빈집의 관문 “인종주의자입니까? 내려가십시오”
진심어린 환대의 기술로 빈집을 빈마을로 키워낸 아규는 최근 빈집의 ‘문턱’ 만들기에 고심한다. 남에게 무관심 하고 자신의 신체, 자신의 소유, 자신의 이익만 챙기며 기생하는 자유주의자, 개인주의자는 빈집과 가장 안 어울리는 존재다. 그들이 틈입할 수 있는 구조를 애초에 차단하는 시스템을 궁리 중이다.
“빈집에 어떤 기준과 원칙이 필요하다는 쪽으로 의견을 모으고 있어요. 장기투숙자와 단기투숙자를 나누는 기준이라든가, 장기투숙자들의 공동운영책임 등 여러 가지 것들이요. 이를 테면, 고양이랑 함께 살 수 있는가, 20인분의 식사를 한 번에 할 수 있나 이런 것도 물어보고 어느 정도는 합의가 되어야지 안 그러면 별의 별 사람이 다 오니까 너무 지치더라고요.”
얼마 전 빈집 회의에 아주 좋은 아이디어가 나왔다. 절이나 성당이 누구에게나 열렸지만 아무나 가지 못하는 공간인 이유는 사천왕문, 일주문 같은 단계별 관문이 있기 때문이라며 빈집도 계단마다 문구를 새겨 넣어 여과장치를 만들자는 제안이었다. “이를 테면 이런 식이죠. 당신은 인종주의입니까? 내려가십시오. 당신은 마초입니까? 내려가십시오. 페미니스트입니까? 올라오십시오. 동물을 사랑하십니까? 환영합니다. 어때요? 괜찮겠죠? 하하.”  
아규가 이처럼 유쾌한 문턱을 만드는 동안 김디온은 알찬 사업을 구상한다. 그간은 아기도 보고 환대의 기술을 익히는 등 관계에 집중했다면 이제 탄탄한 유대관계를 토대로 하나씩 일을 벌여나갈 계획이다. 원래부터 빈집은 막걸리나 맥주 등 술을 빚어 먹었고 옥상 텃밭에서 채소도 키웠다. 대안생리대와 비누도 만들었다. 빈집이 소비의 공간이 아닌 생산의 공간이 되도록 실천해나갔다. 그 범위와 대상을 확장하려는 것.
“빈집에서는 한 달에 30~60만원이면 충분히 살 수 있거든요. 우리 안에서 인적재원을 활용해 그 돈을 버는 방법이 있으리라 생각해요. 빈마을금고, 빈마을카페 만들기 등등 빈집이 빈마을을 넘어 해방촌 지역으로 확장하는 것도 장기적으로 모색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신나는 실험계획서는 빈집 홈페이지에 실시간으로 오른다. 빈집의 좌충우돌 성장일기를 지켜볼 수 있다.
 
빈집의 확산 “우리만 잘살믄 무슨 재민겨”
2008년 2월, 애초에 빈집을 서울 한복판에 마련한 이유는 ‘주거공동체’ 확산 전망과 맞닿아 있다. 아규는 서울외곽이나 지방으로 빠지면 마당 있는 집도 구할 수 있지만 접근성이 떨어지는 것이 문제라며 남산도 가깝고 큰 도서관과 인문학 공동체 수유너머가 있는 해방촌이 여러모로 젊은이들의 주거실험 장소로 맞춤했다고 말했다. 도심에서라면 더 많은 이들과 함께 할 수 있겠다고 판단한 것이다.   
“어쩌면 도시가 이런 빈집 같은 공간이 더 절실하거든요. 서울에 사람은 많은데 비해 마땅히 살 공간이 없잖아요. 학교나 센터 형태로만 있는데 사람들이 밥, 술, 잠을 해결할 곳이 필요하거든요. 저희들처럼 이렇게 많이 살았으면 좋겠어요. 전에 선배가 와서 밥 한 끼 먹더니 그러더라고요. 가난한 것들이 왜 이렇게 맛있는 걸 먹고 사느냐고요.(웃음) 가난해도 같이 살면 풍요롭게 살 수 있다는 걸 보여드리고 싶어요.”
현재 빈집 기록 작업이 활발히 진행 중이다. 빈집 매뉴얼을 책으로 발간하기 위해 ‘책팀’이 매주 2회 모여 학습과 집필에 착수했으며, 빈집에 사는 주현숙 독립다큐멘터리 감독은 빈집이야기를 영상으로 기록하고 있다. 미래의 불안 때문에 오늘을 빼앗기고 희생하는 사람들, 살길이 막막한 젊은이들에게 ‘빈집보고서’가 중요한 삶의 솔루션이 되기를, 행동에 나서도록 촉구하는 생생한 정치팜플릿이 되기를, 그래서 빈집이 민들레 꽃씨처럼 번져나가기를 그들은 희망한다.
김디온은 교육, 생태, 여성, 주거, 노인 등 삶에서 직면하는 모든 문제들을 빈집에서 풀어내고 싶다고 말했다. “장애인이나 노인같이 도움과 보호가 필요한 존재들과 빈집에서 같이 살 수 있을까, 아니 어떻게 같이 살 것인가를 고민해봤어요. 얼마 전 엄마가 아프셨을 때 빈집에 모시고 올까 하는 얘길 했더니 다들 환영하더라고요. 만약 그렇게 된다면 이 안에서 혈연관계가 어떻게 재조정될까도 궁금하고, 일단 모든 가능성은 열어두려고 해요. 빈집에 새로운 사람들이 들어오는 것도 좋지만 여기저기에 빈집이 더 많이 생겨났으면 좋겠어요.” 
2000원에 주인 되는 집. 주인이 되기는 쉬우나 주인으로 살기는 어려운 집. 하지만 주인이 되면 누구보다 행복해지는 집. 주거공동체 빈집은 오늘도 ‘그럼에도 불구하고’를 되뇌이고 ‘혼자만 잘살믄 무슨 재민겨(전우익)’를 외치며 단 한번 뿐인 인생, 단 한 번뿐인 삶의 소중한 실험을 이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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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사를 위한 일

이 아니라

자발적인 뭔가 즐거울 것 같은 일..을 하고 싶다.

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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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대강' 사업 이면 드러내는 뮤직비디오 '공개'

(저기 사진 속에 드럼 치는 분이 김반장^^;; 김반장도 윈디시티도 멋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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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대강' 사업 이면 드러내는 뮤직비디오 '공개' 

메디컬투데이 2010-04-05 07:40:35 발행   
 
 
 
 
'저수지의 개들' Take 1. 남한강, 인디밴드 '윈디시티' 참가
[메디컬투데이 박엘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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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경운동연합은 4대강 사업으로 고통 받고 있는 강의 눈물을 담아 제작 중인 영상 프로젝트 '저수지의 개들' 첫 번째 뮤직비디오 '저수지의 개들 - Take 1. 남한강'을 4일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통해 동시 공개했다.

4대강 중 남한강을 배경으로 한 이 뮤직비디오는 인디 밴드 ‘윈디 시티’의 강을 위한 창작곡 ‘위하여’란 곡으로 제작됐으며 다양한 생명의 터전인 강의 소중함을 환기하고 4대강 사업의 이면을 드러내는 내용으로 구성돼있다.

4대강 뮤직비디오의 제목은 우리 강을 죽이는 4대강 사업의 보 건설이 결국 강의 자연스러운 흐름을 끊어 강을 흐르지 않는 호수와 저수지로 만들 것이란 뜻의 ‘저수지’와 4대강을 헤집고 있는 거대한 삽질, 그리고 완공 후 그 저수지에서 어쩔 수 없이 살아가야 할 우리들을 상징하는 ‘개’를 합한 것으로,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의 동명 영화제목 '저수지의 개들'을 차용했다는 설명이다.

4대강 뮤직비디오가 촬영된 경기도 여주 남한강 일대에는 3개의 보 건설과 준설 작업, 그리고 하천변을 파괴하며 조성되는 위락단지 공사 등이 진행 중에 있다.

촬영팀은 지난 3월13일, 당초 준설 작업이 진행 중인 신륵사 인근 금당천 공사 현장에서 첫 촬영을 시도했으나 공사 관계자들의 강한 출입 제지로 인해 공사 현장이 바라보이는 제방도로 위에서 윈디 시티의 미니콘서트와 함께 촬영을 진행했다.

아울러 위락단지가 조성되는 신륵사 앞 남한강변과 탁수 발생 등으로 문제가 되고 있는 강천보 공사 현장 등에서도 촬영이 이뤄졌다.

저수지의 개들 - Take 1. 남한강은 추후 20분 내외 단편 다큐멘터리로도 제작될 예정이다. 또한 영상 프로젝트 '저수지의 개들'은 한강, 금강, 영산강, 낙동강에서 각각 다른 개성을 가진 뮤지션들이 참가하는 릴레이 게릴라 콘서트 형식의 로드 무비이자 음악 다큐멘터리로 제작된다.

뮤지션들은 자연과 사람의 조화를 생각하는 음악과 함께 성장 및 개발 지상주의 논리 아래 돌이킬 수 없을 파괴의 위기에 직면한 강의 의미를 돌아보는 내용을 담게 될 것이다. 각 공연은 짧은 뮤직비디오와 20분 내외 단편 다큐멘터리로 제작되며 전체 60분 내외 장편 다큐멘터리 한 편으로 완성될 예정이라고 환경연합측은 밝혔다.

이 뮤직비디오의 감독인 최진성 영화감독은 "커다란 포클레인에 의해 마구잡이로 파헤쳐진 강물과 더불어 그 속에서 집을 잃어버린 나무와 물고기와 새들의 모습은 지금 대한민국의 도시 곳곳에서 개발에 의해 쫓겨나는 힘없는 '우리들'의 모습이기도 합니다"라고 말했다.

이어 최 감독은 " '세상에서 제일 멋진 밴드' 윈디 시티와 함께한 남한강에서의 즐거운 '놀이'와 더불어 지속적으로 이어질, 낙동강, 영산강, 금강에서의 또 다른 뮤지션들과 함께 이어질 우리의 '놀이'를 기대해 주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기계를 멈추고, 같이 즐겁게 뛰어다니며 놀고 싶습니다"라고 연출의도를 밝혔다.

한편 '저수지의 개들 - Take 1. 남한강' 뮤직비디오는 지난 1일 저녁 7시에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열린 인디다큐페스티발 폐막식에서 깜짝 상영됐으며 4일 환경연합 홈페이지 등 온라인으로 에서 동시 공개된다. 또한 15일 목요일에는 환경운동연합 주최로 오프라인 공식 시사회 및 제작 파티가 홍익대 앞 클럽에서 열릴 계획이다.

 



<인디밴드 윈디시티, '위하여' 가사 전문>

세상에 많은 이들이
모두가 밝은 내일을 꿈꾸네
세상에 모든 이들이
모두가 건강하기를 바라네
하지만 우리의 생명의 물줄기 강을 갈라서
흐르는 물을 막아 고이게 한다는 것이
과연 내일을 위한 걸까? 음...?

세상에 어떤 이들은
강을 살린다고 말하네
세상에 어떤 이들은
치솟는 땅값에 비명을 지르네
하지만 홍수가 나지 않는 곳에 대비를 하고
흐르는 물을 막아 고이게 한다는 것이
과연 강을 살리는 길일까? 음...?

강물을 위하여
흐르는 강물을 위하여
이 모든 생명을 위하여

우리의 내일을 위하여
더불어 삶을 위하여
뛰어노는 우리의 아이들을 위하여

사람들아
내 얘기를 좀 들어보소
이 금수강산이
과연 우리들만의 것인가?

탐욕에 눈이 멀어 우리가 얻을게 무언가?
우리는 돈을 먹고 살수는 없다네
잊지 말게나 물은 모든 생명의 근원이라는 것을

강물을 위하여
흐르는 강물을 위하여
우리의 건강한 생명을 위하여

우리의 강산을 위하여
아름다운 강산을 위하여
푸르게 가꿔질 이 강산을
강산을 위하여

riddim

시냇물은 졸졸졸
모래알은 반짝
우리 강산 지켜나가세
시냇물은 졸졸졸
고기들 왔다 갔다
아이들을 뛰놀게 해주세
우리가 전해 받은 이 금수강산에 아름다움을
우리아이들에게 느끼게 해주세 우리 모두 모두 다같이
길이 보전될 강산을 위하여!

파괴와 탐욕으로 뜨는 삽 그만!

조화와 화합을 꿈꾸는 삶 yeah!

거기엔 일등도 꼴지도 없다네
모두가 다르기에 다르기에 다르기에 아름다울 뿐

이 모든 생명이 반짝이는 내일을 위하여
모두가 다르기에 아름다운 내일을 위하여
정겹게 웃으며 함께 나아갈 내일을 위하여  


메디컬투데이 박엘리 기자 (ellee@md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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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호동 철거민' 유 이사, 사고 치다&quot;

'금호동 철거민' 유 이사, 사고 치다"

[권은정의 'Social Job'] 철거 운동에서 신협까지 : 논골신협 유영우 이사

기사입력 2009-03-12 오전 7:16:59

<프레시안>은 성공회대학교 사회적기업연구센터와 공동으로 최근 큰 관심을 모으는 '사회적 기업(social entrepreneur)'의 현주소를 확인하고 더 나은 모습을 찾는 새로운 인터뷰 연재를 마련한다.

전문 인터뷰어 권은정 씨가 직접 한국의 다양한 사회적 기업가를 찾아가 그들이 세상을 어떻게 바꾸고 있는지 그 생생한 목소리를 직접 듣는다. 이 연재는 총 20회에 걸쳐 매주 목요일 독자 여러분을 찾아간다.

이 연재를 공동으로 진행하는 성공회대학교 사회적기업연구센터(소장 이영환 교수)는 사회적 기업가 인적 자원 개발 교육과 사회적 기업 발전을 위한 연구 활동을 하는 성공회대학교 부설 연구기관이다. (☞
사회적기업연구센터 바로 가기)

"'금호동 철거민' 유 이사, 사고 치다"
"20대 청년의 반란…빗자루 들고 아줌마와 함께 청소를!"
"일하고 싶은 실업자는 다 모여라"
"중고를 새 컴퓨터로…덤으로 세상도 재생합니다"
"'대박' 연극 흥행 비결은? '옆집 아저씨·아줌마!"

"귀농? 농사 지을 생각은 일찌감치 버리세요"

▲ 유영우 '주거권 실현을 위한 국민연합 상임이사. ⓒ프레시안

철거 운동에서 시작해
신용협동조합을 운영한다고? 어떻게 연결되는 것이지? 금호동 언덕길을 올라가면서 궁금증이 더했다. 이 지역은 그전에 서울의 산동네였다. 가난한 달동네 사람들이 옹기종기 붙어살던 지역에 지금은 말쑥한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 있다. 상전벽해. 도시개발에는 어쩐지 어울리지 않는 표현이지만 그 변화는 놀랄 만하다.

더구나 이곳에 살던 주민들은 강제된 변화에 굴복하지 않고 자신들의 능력을 드러내 보여주었다. 그 중심에 서 있었던 사람 유영우 씨를 신협
사무실에서 만났다. 언덕꼭대기 논골사거리에 다정한 듯 보이는 3층 건물이 논골신용협동조합이다. 주민 두엇이 창구에서 예금을 하고 있었다.

논골신협은 1997년 11월에 정부로부터 인가를 받은 후 10여 년간 한해도 거르지 않고 신장세를 보여 왔다. 현재 전체 조합원 가입 수는 2700명, 자산은 140억 원이다. 자산 3억 원으로 시작해서 이제 명실상부한 지역 사회 서민
금융의 파수꾼으로 당당히 자리매김하게 된 것이다.

유영우 씨는 초창
기부터 10년 넘게, 바로 며칠 전까지 이사장으로 일했다. 지금은 이사 직함을 갖고 있는 논골신협과 함께 걸어온 사람이다. 늘 개량한복을 입고 다닌다는 이 중년 신사는 백발만 아니라면 충분히 젊은이 대접을 받고도 남을 만큼 경쾌해 보인다. 그의 또 다른 직함은 '주거권 실현을 위한 국민연합 상임이사'다. 이 일 또한 10여 년 넘게 해오고 있다.

▲ "철거 운동에서 신협으로. 유영우 이사가 만들어낸 이 연결점은 우리가 제대로 해낸 운동이 어떤 결실을 맺을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좋은 본보기다." ⓒ프레시안
약속 날짜를 잡으려고 연락했을 때 그는 당장 시간내기가 어렵다고 했다. 용산 참사 때문에 일정이 바쁘다고, 지방워크숍에도 가야하고 강연도 해야 한다고 했다. 철거민들이 자신의 권리를 지키려다 죽어가는 세상이니 유 이사가 바쁜 건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자신이 금호동 산동네 철거민이기도 하니 개발 지역에서 곧 내몰릴 주민들에게 해줘야할 이야기가 많다. 요즘 그는 왕십리
뉴타운재개발 지역에 나가 철거 주민들과 상담 활동을 한다. 쉬지 않고 철거민을 생산해내고 있는 도시의 살벌한 재개발. 그 속에 사는 사람들의 주거권을 지켜내는 일, 유 이사에게 그 일은 처음이고 끝이다.

철거 운동에서 신협으로. 유 이사가 만들어낸 이 연결점은 우리가 제대로 해낸 운동이 어떤 결실을 맺을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좋은 본보기다. 그 출발점은 어떠했을까? 유 이사는 철거 운동이 시작된 1993년에 당시 자신의 모습을 이렇게
묘사했다.

"그때 저는 그냥 평범한 소시민이었지요."

이렇게 저렇게 잘해보려고 했던
사업이 다 망하자 유 이사는 가족을 끌고 금호동 산동네로 이사를 왔다. 그는 먹고살기에 몹시 바빴고 결국 세상은 나만 잘 먹고 잘살면 되는 거 아닌가하는 생각을 주로 했다. 정치·사회 문제 고민? 그런 건 관심 밖이었다. 초등학생 남매를 둔 아버지로서 어깨도 만만치 않게 무거웠다.

"어느 날 애들 엄마가
공부방에 갔다 오더니 이 동네가 개발을 한다고, 다 나가야 한다고 그러더군요. 제가 그랬지요. 당연히 나가야지, 남의 집 세 살면서 나가라면 나가야하는 거 아니냐고."

그의 아내는 생각이 달랐다. 그냥 나가면 안 된다, 정당한 권리 주장을 해야 한다, 공부방 설명회에 나가서 이야기를 좀 들어보자고 설득했다.

"그때 설명회에 오신 분이 설명을 잘해서인지 이야기를 듣고 보니 뭘 해야 되겠구나 싶더라고요. 마을 주민들 대책회의가 열리고 엉겁결에 제가 바로 위원장을 맡게 되었어요."

본격적으로 철거 운동에 집중하기 위해 그는 다니던
직장도 그만뒀다. 그때 시절을 떠올리면 유 이사는 이렇게 말한다.

"인생이 완전히 바뀐 것이지요. 소시민에서 투사가 된 것이지요."

▲ 유영우 이사는 1993년 금호·행당·하왕 지역 재개발에 맞서 철거민 운동을 조직해 가이주 단지 입주를 쟁취했다. ⓒ프레시안

당시 금호·행당·하왕 지역 전체에 개발의 바람이 몰아쳤다. 철거 대상 지역 주민들 모두가 힘을 모아 연대 활동을 펼쳤다. 위원장인 유 이사가 주거연합 성동지역 지부장 일도 자연스레 떠맡았다. 철거 운동이 진행되어 가이주 단지
입주를 논의 하는 단계에 다다르자 개발업자들과 주민들 간에 더욱 팽팽한 기운이 돌았다.

가이주 단지란 아파트 입주까지 세입자 주민들이 거주할 수 있는 시설 공간을 말한다. 어디나 할 것 없이 개발 지역에 살던 세입자들은 경제적으로 열악한 사람들이다. 세입자들은 주거
이전비와 3개월치 생활비를 받아 나가거나 임대아파트 입주 중에 선택해야했다. 입주를 원한다 하더라도 당장 어려운 형편 때문에 얼마 안 되는 돈을 받고 나가는 이들도 많았다. 임대아파트 입주를 선택한 세입자들에게도 여전히 문제가 있었다. 공사 기간 동안 살 데가 필요한 것이다. 완공까지 7년 길게는 10년도 걸리는데 그 시기 동안 다른 곳에 이사 갔다가 오기란 불가능했다.

인근 지역 전월세 값은 이미 상승해서 멀리 외곽으로 나가야 겨우 살집을 얻을 수 있었다. 다른 데로 이사를 간다는 것은 생활권 이탈을 의미한다. 산동네 주민들은 그동안 살면서 그들만의 살뜰한 공동체가 형성되어
일자리나 금전 거래가 가능했지만 멀리 이사가 버리면 이마저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떨어지지 않고 모여서 안정적으로 살 수 있는 가이주 단지가 필요했다. 주민들은 열심히 싸웠다. 세입자 가구 250세대가 3년 동안 철거 운동을 해서 마침내 가이주단지로 입주할 수 있었다. 102세대가 입주했다. 샌드위치패널로 만든 공간은 식구 수에 따라 5평이나 7평으로 배정되었다. 문하나 열면 바로 코앞에 이웃이 얼굴을 들이밀고 있었다. 그렇게 4년을 지냈으니 어떻게 서로 정들지 않을 수 있었을까.

▲ "주거가 안정되자 철거 운동은 바로 다음 단계로 들어갔다. 지역 주민 운동에 보다 적극적으로 집중하기 시작했다. '우리 삶을 어떻게 개척할 것인가. 가난한 우리가 힘을 모아서, 남의 도움 받지 않고 지역 사회에 기여하면서 잘 살 수 있는 그런 운동을 해보자.'" ⓒ프레시안
금호동 지역에 이어 다른 지역에서도 연이어 가이주 단지가 허용되었다. 성공적인 선례 덕분에 힘없는 철거민들이 그나마 약간의 힘을 얻었다. 지금에 와서야 간략하게 정리되는 그 세월이지만 얼마나 고생이 심했을 것인가. 가이주 단지 자리를 확보하기 위해 대형 텐트를 4개나 쳐놓고 40일간 농성한 적도 있었다. 협상 과정이 만만했을 리가 없다. 격렬하게 싸우기도 했을 것이다.

"그럼요 많이 맞기도 하고…. 특히 엄마들이 많이 다쳤지요. 남자들은 싸움이 일어나면 격해져서 크게 부상한다고 해서 철거 싸움 때엔 엄마들이 앞에 주로 나갔는데 많이 다쳤지요. 경찰서에 끌려가 조사도 받고…. 저는 그때 지명수배 되어 도망 다니기도 했었지요. 주민 모두가 늘 일상적으로 긴장 상태에 있었어요. 철거가 언제 들어올지 모르니까 항상 대기상태죠. 우리가 순번 정해서 마을순찰 돌고 그랬는데 공사한다고 다 허물어 놓아서 마을이 완전히 폐허 같았지요."

지금은 대학생이 된 유 이사의 딸은 그 시절을
행복하게 회상한단다. 학교에 다녀와서 대책위 사무실 아니면 공부방에 가서 놀았는데 동네 어른들이 모두 엄마처럼 돌봐주었다. 저녁밥도 다 같이 먹고 밤늦어서야 엄마아빠 손을 잡고 집으로 돌아갔다. 온동네 사람들이 한 식구처럼 살았던 시대였다.

주거가 안정되자 철거 운동은 바로 다음 단계로 들어갔다. 지역 주민 운동에 보다 적극적으로 집중하기 시작했다. '우리 삶을 어떻게 개척할 것인가. 가난한 우리가 힘을 모아서, 남의 도움 받지 않고 지역 사회에 기여하면서 잘 살 수 있는 그런 운동을 해보자.'

운동의 형식은 협동조합운동이었다. 이 운동은 사실 철거 운동과 동시에 진행되었다. 1994년부터 주민자치 협동체
건설을 위한 기획단을 만들어 기초를 다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주민, 활동가 중심으로 신협, 생협, 생산자 협동조합, 사회복지 협동조합 4개 분야로 나누었다. 주민들은 각자 분과로 들어가 공부했다. 1996년에 들어오면서 운동이 본격화 되었다. 맨 처음 출발한 게 신협, 그다음이 생산자협동조합이었고, 생협은 중도 포기했다가 이제 올해 다시 출발한다. 사회복지 쪽은 그간 지속적으로 해오고 있다.

당시 그는 기획단 대표를 맡아 주도적으로 이 운동을 이끌었다. 어떻게 그전에 경험도 없었을 텐데 가능했나?

"협동조합운동은 전통적으로 빈민운동에서 해온 실험이잖아요. 저도 이걸 처음 접했을 때 굉장한 쇼크를 받았지요. 그때 공부방
선생님이 <몬드라곤에서 배우자>라는 책을 주셨는데 세상에 이런 것도 있구나 싶었지요. 철거 투쟁을 하면서 많은 사람들을 만났는데 모두 주민운동, 빈민운동 속에서 함께 하더라고요. 그때부터 많이 보고 배웠지요. 현장에 가서 보고 듣고. 우리 동네 주민들과 같이 가서 직접 보게 했지요. 모두가 협동 운동은 당연히 해야 한다는 인식을 가지게 되더라고요. 우리 지역이 짧은 시간에 운동이 가능했던 것은 미리 열심히 공부한 덕이라고 봐요."

▲ 유영우 이사의 철거민 운동은 협동 운동으로 전화했다. 논골신용협동조합은 그 성과다. ⓒ프레시안

유영우 이사는 서울 토박이다. 여럿 누나를 둔 막내아들로 자랐으니 남들 어려운 것에 대해서 그다지
신경 쓰지 않고 살았던 것 같다고 그가 고백한다. 그의 안에서 어떤 변화가 일어났던 것일까?

"글쎄, 그게 미스터리라니까요. 하하하…. 근데 확실한 것은 이거죠. 과거에 제가 소시민으로 살 때는 사회의 구조적인 모순이나 부조리에 관심을 가지지 않았어요. 사회 돌아가는 것도 매스컴이나, 신문에서 말하는 대로 알았고, 그런데 여기 뛰어 들어와 싸움하는 과정에서 구조적인 모순을 온 몸으로 느끼게 된 거지요. 경찰이 저렇게 하면 안 되는데, 왜
철거용역깡패가 가난한 주민들에게 폭력을 휘두르는지, 개발에서 나오는 막대한 이익이 어디로 가는지, 직접 보고 경험하면서 제가 눈을 뜨게 된 것이지요. 우리 사회에 구조적 모순이 엄청 많구나, 이것을 고치지 않으면 안 되겠구나, 우리 아이들한테 까지 이런 걸 넘겨주면 안 되겠다, 하는 막연한 사명감, 그런 게 자연스럽게 생겨나더군요. 한번 발을 들여 놓으면서 다시는 못 빠져 나가게 된 거지요. 하하하…".

유 이사는 철거 운동 하던 그 시절을 떠올리며 참 신기하다고 했다. 부부가 운동하느라 돈벌이를 하나도 못했는데 그들 가족이 끼니를 굶은 적이 없었다는 것이다.

"대문 밖에 나가보면 누가 쌀자루를 갖다놓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은 살림에 보태라고 돈을 건네주기도 했어요. 다 같이 가난한데도 이웃이 그렇게 해주니 제가 열성을 가지고 안할 수가 없었지요."

철거 운동에서 신협운동으로 넘어가면서 주민들은 진정한 운동의 기쁨과
보람을 맛볼 수 있었을 것 같다. 신협을 가장 쉽게 설명하는 슬로건이 있다. '1인은 만인을 위하여, 만인은 1인을 위하여!' 이웃들은 모두가 힘을 모으면 얼마나 큰 위력이 생기는지 목격하게 된 것이다. "어떤 불특정 다수가 이용하는 금융기관과 달리 조합원으로 가입한 조합원만이 이용하는 기관이지요. 조합원이 출자한 돈으로 또 조합원에게 대출해 주는 것이지요. 때문에 철저하게 지역사회 내에서 참여하는 이들이 서로 도움을 주고받게 되는 것이지요."

논골신협은 그동안 꾸준히
성장해왔다. 누구도 이렇게 쑥쑥 커갈 줄 몰랐을 것이다. 그 성공 비결은?

"신협을 철거민이 만들었다는 것이지요. 그것도 아주 가난한 이들이 만들었다는 게 근본 힘이에요. 그때 인근 지역 다 합해서 250세대였는데 각 마을마다 출자금을 거두는 책임자를 정해서 매일 거두었지요. 신협 인가를 받으려면 3억 원은 만들어야 했으니까요. 조합원은 누구라도 될 수 있었으니 어른들은 물론 아이들도 가입했지요.
바구니를 들고 다니면 주민들이 몇백 원, 몇천 원씩 넣었지요. 수기통장에 오늘은 누가 얼마 출자했다하고 도장 찍어주고…. 그렇게 95년 말부터 시작해서 인가날 때 까지 쉬지 않고 했지요."

초창기에 바구니를 들고 조합비를 거두었던 바로 그 사람들이 여전히 신협에서 중심 역할을 한다. 철거 싸움 당시의 그 뭉쳐진 힘이 신협 발전의 원동력이 되고 있는 것이다. 한때 다들 어려웠던 IMF 위기당시 논골신협도 약간의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인가 받자말자 그 위기가 닥친 거지요. 그때 부실경영 신협은 곧바로 퇴출되고 그랬지요. 그런 소식이 언론에 실리면서 신용도가 떨어져 우리도 참 어려웠어요. 예금주들이 돈을 찾아가고…. 우리 조합원들이
초심을 잃지 않고 굳건하게 버티면서 주변에 홍보도 열심히 하고해서 그 위기를 넘겼지요."

▲ 유영우 이사는 신용협동조합 활동이 궁극적으로 지역 주민 통합에 큰 역할을 한다고 강조한다. ⓒ프레시안
유 이사에게 신협은 인생의 보람이면서 자신의 판단이 옳았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제가 협동 운동을 배우면서 가진
비전은 결국 각 지역 공동체가 잘되어야 나라의 전반적 부분이 튼튼해진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가난하고 힘은 없지만 협동공동체 운동을 통해 지역 사회 발전에 기여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주민들이 같이 할 수 있도록 만들어 가는 게 목표입니다."

유 이사는 신협 활동이 궁극적으로 지역 주민
통합에 큰 역할을 한다고 강조한다.

"지역 주민들 신협을 개방하며 같이 하자고 했더니 다들 꺼리더군요. 철거 싸움할 때 우리를 봤으니 좋은
인상이 아니었지요. 만날 이런 저런 항의에 온 동네가 떠나가게 스피커로 투쟁가를 틀어놓고 했으니까요. 우리를 빨갱이, 떼쟁이라고 했을 거예요. 그런데 어느날 은행이라고 만들어놓고 있으니, 뭐하나 싶었을 거예요."

지금 건물을 사서 옮겨온 지가 2년 되었다. 그전에는 골목 안에 20평짜리 건물에 세를 살았다. 신뢰도가 더 커지는 것이 분명했다. 인근 주민들, 특히 장사하는 이들이 조합원으로 많이 참여했다. 주민통합을 위해 신협이 애를 쓰자 과격한 이미지에 대한 시각이 변하면서 인근 주민들이 조합원 가입을 시작했다.
야유회, 단오제 행사를 열고 지역에서 모임이 있으면 달려갔다. 신협이 경제공동체로서 인지도와 신뢰를 얻게 되면서 신협으로 모여드는 주민들은 더 많아지고 있다.

유 이사의 가슴에는 철거 운동에서 시작한 협동 운동의 불씨가 꺼지지 않고 있다. 앞으로 더욱 큰 불꽃으로 번져나갈 것이다.

"운동을 통해 배운 것, 그걸 모르고 살았다면 지금쯤, 인생 헛살았다는 생각했을 겁니다. 어렵고 힘들었지만 결코 후회해 본 적 없었지요."

유영우 이사는 결국 혼자만 잘사는 세상이 아니라 다 같이 잘사는 동네를 만들어내
고야 말았다.

▲ "운동을 통해 배운 것, 그걸 모르고 살았다면 지금쯤, 인생 헛살았다는 생각했을 겁니다. 어렵고 힘들었지만 결코 후회해 본 적 없었지요." ⓒ프레시안

세상을 바꾸는 혁신 '사회적 기업'

사회적 기업(social entrepreneur)에 대한 관심이 놀랍게 증폭되고 있다. 불과 수년 전에 빈곤 대책의 일환으로 거론되는가 싶더니 어느새 시민운동의 핵심 화두가 되었다. 지속 가능하고 인간적인 사회를 일구는 대안에 대한 간절한 열망 때문일 것이다. 지난 정부에서 사회적기업육성법(2007)을 제정하는 등 기대감을 한껏 높였고, 복지 정책에 시들한 현 정부에서도 사회적 기업에 대한 기대는 여전하다.

하지만 사회적 기업의 의미에 대한 인식은 다양하고 혼란스럽다. '착한 기업', '윤리적 기업', '대안 기업', '이윤이 아니라 빵을 위한 기업' 등 긍정적인 의미 부여가 많지만, '낮은 질의 주변부 일자리'라는 비판도 무시할 수 없다.

우선 사회적 기업의 개념 자체가 분명치 않다. 사회적기업육성법에서는 '취약 계층에게 일자리를 제공하는 등의 사회적 목적을 추구하면서 동시에 영업 활동을 수행하는 기업'으로 규정되어 있다. 이러한 정의에는 약간의 문제점이 있다. 왜냐하면 현존하는 모든 기업은 크든 작든 나름대로의 사회적 의미와 목적을 가지기 때문이다. 또 현행법은 사회적 기업에 대한 인증제를 시행하고 있는데, 이에 따라 요건에 맞는 기업이나 단체만 사회적 기업으로 배타적으로 인정됨으로써, 사회적 기업의 정신을 공유하는 수많은 조직체들이 배제되고 있다. 특히 사회적 목적을 추구하지만 영리활동을 하지 않는 수많은 NGO, NPO 등이 체계적으로 배제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은 사회적 기업의 엄밀한 개념보다는 그 기본 정신이 무엇인가가 더 중요하다는 점을 시사한다. 사회적 기업의 기본 정신에 대해서도 많은 논의가 가능하겠지만, 필자는 그 핵심은 사회적 기업가 정신(social entrepreneurship)이고, 이는 곧 세상을 변화시키는 혁신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즉, 실업과 빈곤, 사회적 배제와 소외 등 자본주의 시장경제가 야기한 사회적 폐해를 해결하고자 하는 혁신적인 모색이 사회적 기업의 기본 정신이라는 것이다. 사회적 기업은 이러한 사회적 혁신을 위해 필요한 새로운 차원의 경제적 활동을 의미한다. 물론 좁은 의미의 상공업 활동에 국한하지 않는다.

실직자를 위해 고용을 창출하거나 창업을 지원하는 일은 물론, 장애인을 교육하고 불우 청소년의 자존감 회복을 지원하는 등 취약계층에게 사회 서비스를 제공하는 기업, 장애인이 중심이 되는 일터, 노동자들이 자주적으로 운영하는 기업, 환경을 보호하고 생태마을을 만드는 기업, 농촌공동체를 회복하는 귀농·귀촌운동, 대안화폐로 지역사회 공동체를 만드는 레츠(Lets) 운동, 소규모의 커뮤니티 비즈니스, 가난한 사람들에게 신용대출하는 협동조합, 주민들의 다양한 욕구에 대응하는 워커즈 컬렉티브(workers' collectives) 등 그 영역은 다양하고 무궁하다. 사회적 기업은 현대 사회가 해결하지 못하는 공백을 채워나가는 선구자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다양한 모색의 너머에는, 사람들 간의 신뢰에 기반을 둔 대안적이고 협동적인 사회경제 체제의 모델을 만들어보고자 하는 희망이 놓여있는데, 이는 상품과 이윤을 중심으로 조직되는 비인간적인 시장경제 체제를 넘어서고자 하는 희망이다. 사회적 기업이 영리활동에만 의존하지 않고 보다 폭넓은 사회적 자원동원을 필요로 하고, 또 그것을 바람직하게 여기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렇게 볼 때, 사회적 기업 운동은 이제까지 우리 사회의 변혁을 위해 애써온 사회운동의 정신과 별개의 것으로 보기 어렵다. 오히려 변혁의 과제를 새로운 시각으로 접근하는 것이고, 이를 시민들의 삶의 현장에서 출발하여, 창의적이고 지속가능하게 추구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사회적 기업은 사회운동과 사회복지를 보는 새로운 시각(new perspective)이라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시민들의 방치된 욕구를 충족하고, 낙후된 지역사회를 재생하며, 보다 높은 삶의 질을 향한 혁신을 창의적이고 지속가능한 방식으로 꾀하는 것이 사회적 기업가 정신일 것이다. 물론 사회적 기업 운동은 사회적 기업가 혼자의 운동이 아니다. 많은 이해관계자들이 소유와 운영에서 주체적이고 민주적으로 참여하는 것이 핵심적인 요소이다. 하지만, 이를 조직화하는 것은 사회적 기업가의 사명이므로 사회적 기업의 성패가 이들에게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러한 사명을 체현하고 있는 사회적 기업가와 사회적 기업가 정신을 확인하는 것이 본 기획의 목적이다. 앞으로 '성공회대학교 사회적기업연구센타'와 <프레시안>은 20회의 기획 연재를 통해 이를 확인해 보고자 한다. 위에서 강조한 대로 여기에서 다루는 사회적 기업은 정부의 협소한 개념 정의에 구속되지 않는다. 오히려 사회적 기업가 정신을 체현하고 있지만,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사회의 변혁을 위해 헌신해온 많은 분들을 폭넓게 찾아내고자 하는 것이 우리의 소망이다.

이영환(성공회대 교수·성공회대 사회적기업연구센타 소장)

▲ 프레시안은 성공회대학교 사회적기업연구센터와 공동으로 세상을 바꾸는 '사회적 기업'을 만들어가는 사회적 기업가 20인을 발굴해 소개할 예정이다. 지난 2월 17일 서울 옥인동 프레시안 사무실에서 공동 기획 협약을 하는 박인규 프레시안 대표(왼쪽)와 이영환 사회적기업연구센터 소장(오른쪽). ⓒ프레시안
 
 
 

/권은정 전문인터뷰어

 

-- 6년전 2주간의 연수에서 만났던 아영이가 이 분의 딸이라는 것을 나중에 어쩌고저쩌다 검색을 통해 알았다. 아영인 잘 지내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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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행

#1 항상 갈등만 하고 고민만 했다. 그리고 난 글을 잘 쓴다는 생각 절반과, 능력 없다는 생각 절반을 가지고 살았다. 기자가 되고 싶었고 그래서 시민의 소리 기자학교 프로그램도 듣고, 오마이뉴스 시민기자가 되었지만  열심히 쓰지 않았다. 항상 내 마음 한 켠에는 응어리가 있었는데 마을조사단을 하면서 기록자로서 일을 할 적에는 그런 응어리가 많이 풀렸다. 하지만 과거를 기록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현재를 기록할 필요에 대한 고민이 있었다. 꿈을 이루는 방법은 꼭 정답이 없다고 생각했다.

 

직업 기자가 되지 않아도 글을 쓸 수는 있으니까말이다. 그렇게 마음먹고 나니 고민은 많이 줄었고

시민기자로 글을 때때로 쓰던 2001년의 나는..9년이 지나서야 다시 글을 쓰고 있다.그 동안 그렇게 여러 경험을 하고 여러 사람을 만나고 여러 곳에 있었으면서 왜 글을 써 볼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가... 이제 9년이 지나서야 비로소 내 마음 속에서 쓰고 싶어진 것일까?

강이 나를 움직였다. 강을 걷고 와 이것을 쓰지 않으면 안 되겠고 너무 쓰고 싶었기 때문에 쓰기 시작했다

가끔은 시덥쟎은 글도 쓰고 싶지만, 그래도 밥값을 하는 글을 쓰고 싶다. 아무도 쓰지 않는 것에 대해서 쓰고 싶다.. 써야 한다...

 

그 동안 놓친 글감과 열정,경험들이 무지 후회스럽지기는 하다...

예전에 사귀던 선배가 일 하면서 열심히 글을 써 보라고 했던 말이 이제서야 실감난다.

그 선배의 말은 이제서야 내 마음에 박혀온다. 많이 사랑했고, 보지 않지만 선배는 종종 댓글로 나를 격려해준다. 선배는 이렇게 이야기했다.

 

요즈음 내가 드는 생각은 말이다.살아간다는 건, 사랑이라든가 하는 감정따위가 아니라.."서로가 서로를 기억해 주는 것"이 살아간다는 것이라고 여긴단다.

 

그러게요, 그게 맞는 듯해요. 난 기억을 잘 지우지 못하거든요.

 

# 2

어제는 해외에 나가있는 친구에게서 이메일 답장도왔고

돕 님께서 다정한 댓글도 달아주셨고

섬진강 은어님께서 한 달 전에 달아준 댓글을 우연히 확인했다

그리고 기타로 김광석 노래를 연주하는 기쁨도 누렸다.

그리고 땅의 여자를 보고 감독님이 존경스러웠다. 솔직히 질투심도 있다. 여성농민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만들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고, 때때로 하고 있기에... 그래도 존경스럽다.같은 여자로서 더.

그리고 오늘아침엔 이사를 했다. 행거가 필요했는데 마침 하나 있었다. 더 이상 살림을 살 필요가 없어서 다행이다.고맙고 반가운 인연이다. 행복한 일이 많다.

 

#3.낙동강을 가려다가 여주로 발길을 틀기로 했다.

낙동강은 차편이 이루말할 수 없이 복잡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어제 그렇게 낙동강이 확 땡기지 않았던 것이었군

 

#4 

난 지금 이 곳에서 출퇴근하면서 논을 볼 수 있어서 행복하고 곧 흙을 만질 것이기에 행복하다.

사랑과 상처에 대한 부담없이 눈 마주치고 만질 수 있는 강아지가 있어서 행복하다

강아지에게 다시 사랑을 배울 수 있을지도 모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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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증처럼 마음 속에 쌓여있는 답답함과 분노와 아픔

--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걷고, 기록하고, 마음에서 잊지 않는 것 밖에 ---

 

아픈 마음으로 만난 4대강 현장... 영산강을 따라 걷다
10.03.09 21:46 ㅣ최종 업데이트 10.03.10 21:55  dmsdlv)

 
 
한동안 잊고 있었습니다. 말로는 4대강 사업을 반대하면서 마음 속에서 잠시 치워두었던 것은 그 사안을 떠올릴 때마다 마음이 답답해왔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다가 몇 달 전 백수가 되어 시간이 많이 생겼습니다. 그러다보니 신문을 열심히 구독하게 되었고 하루 걸러 한 번씩 4대강의 문제점을 깊이 다룬 기사들을 보게 됐습니다.
 
점차 내 마음 속에 지금의 공사상황에 대한 궁금증과 답답함이 커지게 됐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이메일을 확인하다가 영산강 도보순례에 대한 내용을 보았고 '그래 영산강으로 가자' 결심했습니다.
 
  
▲ 신성리 이장님의 말씀을 듣는 참가자들 주민으로서 겪은 피해와 앞으로 우려되는 문제에 대해 이야기해주셨습니다.
ⓒ 김하나
4대강

 

보트로만 탐사했을 뿐 내 발걸음으로 영산강과 만나본 적은 없던 터였습니다. 지난 1일, 나주시 다시면 석관정에 도착하니 광주환경운동연합 회원들과 실무자, 천주교 정의평화위원회, 성당 신도들이 출발 채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오전 10시가 조금 넘어 출발하기 시작했습니다.

 

강의 상황만큼이나 날씨도 좋지 않았습니다. 끊임없이 내리는 비를 맞고 걸으며 강변을 둘러보니 덤프트럭 10-20대 가량 움직이며 쉴 새 없이 흙을 실어나르고 있었습니다. 물길 우회 공사, 준설 작업, 작업한 토사를 야적하기 위해 덤프트럭 여러 대가 이리저리 움직이는 모습은 마치 영화 속에서 보았던 로봇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 죽산보 공사 현장 물막이 공사와 물길 우회공사가 진행중이다.
ⓒ 김하나
4대강

 

비가 오는 날도 공사는 멈추지 않는다고 합니다. 참가한 사람들은 나주시 죽지마을에서 점심을 먹고 오후 1시 30분경 죽산보 공사현장에 다다랐습니다. 죽산보에서는 보를 건설하기 위해 물길을 돌리고 물막이공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강을 이렇게 헤집어놓을 줄 상상하지 못했기에 눈 앞에 펼쳐진 공사현장은 충격이었습니다.

 

정부에서는 홍수예방, 물 확보를 명분으로 내세우고 있으나 실제 강 옆에 살고 있는 주민들의 말은 이와 배치됩니다. 참가자들은 신석리 이장님으로부터 지역 주민 입장에서 보는 공사의 문제점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얼마 전에도 보리밭이 침수피해를 입었고 공사가 진행되고 나면 수위가 높아져서 피해가 더 커질 것입니다. 그리고 물이 부족하다고 하는데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국민이라면 누구나 예측할 수 있는 일일 터인데 정부의 눈에는 이 침수피해에 대한 것이 그저 간과해도 될 하찮은 일일까요? 정부가 내세우는 목적과 다른 진짜 목적은 수심 6m 확보와 수로 폭 확보 즉, 운하 건설을 위한 기반을 만드는 것입니다. 아래로 수심을 확보하기 위해 무자비한 준설을 진행하고, 위로 수심을 확보하기 위해 보를 만드는 것이지요.

 

  
▲ 논길을 걷는 참가자들 천주교 정의평화위원회 회원, 천주교 신도, 광주환경연합 활동가 및 회원, 시민들이 강을 바라보며 걷고 있습니다.
ⓒ 김하나
4대강

 

강을 살리기 위해서는 강을 틀어막아서는 안 되고 흐르게 두어야 할 터이지만, 지금 우리 눈 앞에 펼쳐지는 광경은 그러한 상식을 송두리째 뒤흔드는 것입니다. 4대강 사업에 투입되는 총 예산은 22조이며 이 중 영산강에 투입되는 예산이 2조8천억이고 죽산보 공사는 영산강 공사현장 중 가장 규모가 큰 곳으로 1500억이 투입된다고 합니다.

 

4대강 사업은 전국적으로 내년까지 제반 공사를 마쳐 이명박 대통령 임기 내에 공사를 마무리할 계획으로 진행하고 있으며, 보를 건설하게 되면 수위는 홍수 발생시 지금보다 2-3m 정도 높아져 침수피해를 피할 수 없을 것으로 예측됩니다.

 

  
▲ 승촌보 공사현장 보를 만들기 위한 작업으로 먼저 물막이공사를 진행하고 있다.
ⓒ 김하나
4대강

 

현장에는 CCTV가 설치되어 있는데 광주환경운동연합 임낙평 의장의 말에 따르면 이것은 다른 지역 공사현장과 속도를 비교해서 독촉하려는 목적에서 설치한 것이라고 합니다. 공사를 하기 전 환경영향평가와 수리모형실험을 거쳐야만 하는데 이것을 생략하고 강행하고 있는 것 또한 졸속으로 진행된다는 증거입니다.

 

걷는 내내 마음이 무거웠습니다. 한 사람으로서 걷고 있는 것이 이렇게 부끄러울 수 있을까요. 영산강을 걷는 걸음은 그 후로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지난 7일에는 광주환경연합 소속 소모임인 광주천 지킴이 모래톱 회원들의 승촌보 공사현장~영산포 구간 답사에 동행했습니다. 

 

4대강 사업 일환으로 영산강에 설치되는 보는 2개로 각각 죽산보와 승촌보인데 이날 걸은 곳이 바로 승촌보 공사현장을 포함한 구간입니다. 오전 9시경 용산마을에서 출발하여 승촌마을로 들어서니 미나리꽝이 펼쳐지고 그 곳에서는 어머니, 아버지들께서 물장화를 신고 한창 작업 중이었습니다.

 

  
▲ 미나리 채취 중인 마을 어머니들 이 곳은 광주지역에서 유통되는 미나리의 70%를 생산하는 곳이라고 한다. 하천에 인접한 곳이기 때문에 미나리를 재배하기 좋은 조건으로 생산량도 많고 마을의 안정적인 소득원이다.
ⓒ 김하나
4대강

 

이곳에서 생산되는 미나리꽝은 광주 지역의 70%이며 안정적인 소득을 보장해주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공사가 시작되면 이 곳도 침수될 계획이며, 승촌마을은 저지대이기 때문에 공사를 통해 수위가 높아지면 침수피해를 당할 수밖에 없어서 마을과 강 사이에 제방을 높게 설치할 것이라고 합니다. 강과 단절되게 되는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곳곳에 만들어진 하중도도 물에 잠겨버립니다. 마을주민들은 대부분 반대하고 있으나 무서워서 적극적으로 반대 의사를 표현하지는 못한다고 합니다.

 

승촌보 공사현장 역시 죽산보 현장과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보를 건설하고, 2500톤급 바지선이 다닐 수 있을 정도로 기본 수심을 4.5m로 유지하고, 수위를 11~12cm 정도 유지할 계획으로 공사를 진행 중이므로, 이름만 보일뿐, 규모는 댐에 가깝다고 합니다.

 

걷는 내내 마음이 콱콱 막혀 왔습니다. 다시는 볼 수 없을지 모르는 풍경들을 마음에 새기며 한 걸음 한 걸음 걸었습니다. 광주땅을 지나 나주에 들어서서 걷다보면, 아름다운 하중도를 만날 수 있습니다.

 

  
▲ 나주지역 강변에 조성된 하중도와 유채꽃밭 강 가운데에 있는 하중도에는 나무가 자라고 있다. 그리고 아래쪽에는 나주시에서 조성한 유채꽃밭이 있다.
ⓒ 김하나
4대강

 

강 가운데에 만들어진 하중도에는 나무가 자라고 있으며, 강변쪽에는 나주시에서 유채꽃밭을 조성해 놓았지만 공사가 계속 진행되면 내년이면 이곳도 볼 수 없게 된다고 합니다. 이뿐만이 아니라 광주하수종말처리장 인근의 습지도 없어지게 될 것이고, 멀게는 영산강 상류 담양에까지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의견도 나오고 있습니다.

 

강은 물만 흐르는 곳이 아니라 그 물에 깃들어 물고기와, 풀과 나무, 새들이 살아가고 있는 하나의 공동체입니다. 사람이 셀 수 없는 시간 동안 흘러 만들어온 공동체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다시 살려내기 어려운 것입니다. 

 

현재 4대강별로 각각 공사중지가처분 신청이 진행 중이며 지역 주민들과 시민단체 활동가들이 현장답사, 소송, 시민홍보 등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사라지고 난 후 미래 세대들에게 어떤 자연을 남겨줄 것인지. 어떠한 말과 글로 이 아픈 마음을 정확히 표현할 수 있을까요.

 

덧붙이는 글 | 4대강 막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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