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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히-한강 송전탑 위엔 사람이 살았어

"조깅하는 사람들은 여기 사람 사는지도 몰라"

[RevoluSong] 소히의 <한강 송전탑 위엔 사람이 살았어>

기사입력 2010-01-14 오후 4:5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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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뒤 한국사회는 또다시 두 개의 국가로 나눠질지 모른다. 갈수록 심해지는 빈부격차는 엄격한 계급사회의 출현을 예고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같은 인종적 특징을 타고 났을 뿐, 먹고 마시고 입고 살고 교육받고 놀고 즐기는 문화가 완전히 다른 한국 사회의 상위 10%와 나머지 90%의 삶은 너무나 견고한 벽으로 둘러쌓여 형성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 벽을 뚫기 어렵다는 것보다 더 큰 문제는 하위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이들이 스스로 하위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라고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자신이 노동자이면서도 노동자라고 불리기를 꺼려하고, 노동조합의 파업에 적대적이며, 자신이 사는 아파트 값이 오르기만을 열망하는 사람들은 결국 주류의 패러다임에 경도되어 승자독식의 체제를 끊임없이 강화시켜줄 뿐이다.

가령 서울의 서북부나 동북부에 사는 사람들이 강남의 부동산 가격이 오를 때마다 자신이 사는 아파트 값이 덩달아 오르기를 바란다고 치자. 그래서 자신들이 사는 변방의 아파트 가격이 올라간다 한들 그 결과는 참혹하다. 왜냐하면 다함께 급등한 아파트 가격으로 인해 결국 그들의 자녀들은 서울에서 아파트를 구하지 못하는 미래를 맞아 변두리 도시로 쫓겨가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이같은 문화평론가 L의 주장처럼 존재를 배반하는 의식과 이를 뒷받침하는 신화, 그것은 어쩌다 길거리에서 정치적 유인물을 나눠 줄때도 금세 확인된다. 유인물을 가장 받지 않는 부류는 바로 20대와 30대 초반의 젊은이들이다. 자신은 비정규직 문제와 관계없고, 용산참사와 무관하다고 믿는 것이다. 그러나 역으로 이들의 오해와 그 오해를 작동시키는 사회정치문화의 패러다임은 한국 사회에서 왜 혁명이 일어나지 않는지에 대한 답변을 완성시켜준다.

밴드 잠에서 활동하다 솔로로 독립해 활동중인 잔뼈 굵은 인디 뮤지션 소히의 곡 <한강 송전탑 위엔 사람이 살았어>는 바로 이러한 한국사회의 모순같은 현실을 자신의 생생한 체험으로 담아낸 곡이다. 지난 해 초봄 억울하게 직장에서 쫓겨난 콜트콜텍기타 노동조합의 조합원들이 한강 양화대교 옆 고수부지 송전탑에 올라가고 그 곁에서 작은 공연을 했을 때, 그들의 절박함과는 무관하게 어떤 사람들은 그저 조깅을 하며 지나가는 모습을 본 것이다.

세상 사람들이 모든 사회적 문제에 다 관심을 기울일 수는 없겠지만 어떤 사람들은 안간힘을 다해 자신들의 삶을 지키려 싸우는데 어떤 사람들은 무심하게 지나가는 풍경을 지켜보며 그녀는 송전탑에 올라간 사람과 용산참사의 피해자들이 결코 다르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으며 동시에 사람들의 무심함과 외면에 깊이 상처 받은 것이다.

그러나 분명 이것이 우리의 현실일것이다. 민중가요 음악인은 아니지만 지난 2년동안 촛불집회와 용산참사, 콜트콜텍기타 노동조합의 활동현장 등에 기꺼이 달려와서 자신의 1집에 담긴 따뜻한 노래들을 부르곤 했던 뮤지션 소히는 바로 이러한 현실을 놓치지 않고 노래함으로써 2009년의 한국사회를 아프게 증언해냈다. 누군가가 해고당하고, 보금자리에서 쫓겨났다는 것보다 더 슬픈 것은 그 일을 받아들이는 우리들 자신의 모습이다.

그런데 민중가요 음악인들이 현실에 대한 분노와 승리에 대한 다짐에 주로 매달림으로써 말하지 못한 사람들의 오늘을 오히려 이념적으로는 덜 철저하고 경험도 더 적을지도 모르는 그녀가 더 정확하게 기록해낸 것이다. 그것은 그만큼 그녀가 지난 2년동안 이런 저런 문제적 현장에 자주 와서 소박한 마음 하나만으로 노래하고 가면서 현실을 가감없이 들여다보았기 때문일것이다.

그리하여 어쿠스틱 기타와 미디로 찍은 드럼과 이펙트 사운드가 만들어 낸 투명하면서도 다소 몽롱한 사운드보다 중요한 것은 바로 리얼한 그녀의 시선이다. 바로 그녀가 절감한 현실 인식의 차이와 무심함과 얄팍한 사회적 연대에 대한 탄식과 비애이다. 이처럼 현실을 냉정하게 기록하고 진심을 다해 표현해내는 것은 우리 시대 예술가들이 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역할이며 존재의 이유일 것이다. 싸움은 끝이 보이지 않는다해도 좋은 노래는 다시 우리를 멈추지 않게, 아니 멈출 수 없게 만든다. 이것이 바로 노래의 힘이다. 뮤지션 소히가 보내온 편지를 덧붙인다.

"작년 봄, 겨울이 채 끝나기 전의 싸늘한 날씨에 양화대교 옆 한강 고수부지 송전탑에서 조그마한 공연이 하나 있었다.

콜트콜텍 노동자들은 자신들을 부당 해고한 회사에 맞서 억울한 심정을 토로하고자 고압전류가 흐르는 송전탑 위에 올라갔고 그 탑 옆에서 작은 공연과 다큐멘터리 상영회를 가진 것이다. 내게 그 광경과 기억은 참 특별했다. 서늘한 날씨였는데, 위에 올라간 분들의 마실 것과 먹을 것을 긴 줄을 이용해 공급했고 나머지 분들은 옆의 큰 천막에서 생활하고 계셨다.

내 노래를 듣는 이는 서너 명만 빼고는 모두 콜트 노동자들이었고, 공연 하는 곳 옆을 동네 주민들이 조깅이나 산책을 하며 지나갔다. 그렇게 답답한 일을 겪은 사람들은 어디든 위로 올라가야 했다. 콜트콜텍 노동자뿐만 아니라 용산도 그랬고 쌍용자동차도 그랬다. 그래야 사람들이 봐주니까. 관심 가져주니까.

▲ ⓒ프레시안
송전탑 위에서 용산을 바라보는 걸 상상해 보았다. 점점 더 욕심내는 사람들 때문에 삶이 서글퍼진 사람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울고 있는 것을…. 부자든 해고당한 사람이든 삶의 터전을 잃은 사람들이든 모두 한강을 보며 살게 되었지만 참 다른 삶이다. 우리는 마치 각자의 삶인 양 살고 있지만 교묘하게 뺏고 빼앗기며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 교묘함을 가리고 있는 것이 사회와 정부다. 그리고 가려진 장막 사이로 유유히 한강변을 운동하며 지나는 사람들 또한 존재한다.

콜트콜텍 노동자들이 재판에서 작은 승리를 거뒀지만 아직도 그 투쟁은 계속되고 있다. 자신이 죄를 짓고 있다는 사실을, 사람에게 못할 일 하고 있다는 사실을, 꼭 긴 시간 지나지 않아도, 법이 재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인간성 회복의 시대가 어서 열렸으면 좋겠다. 그리고 자신의 자리에서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들이 타인의 고통에 짜투리 마음이라도 내어 줄 수 있는 공존의 시대도 어서 열리길 빈다."



<한강 송전탑 위엔 사람이 살았어>

작사/작곡/노래/연주 소히

한강 송전탑
위엔 사람이 살았어
그 위에선 누굴 위한건지
폐허들이 보였어
폐허 속에서
울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어
법 앞에서만 고갤 떨구는
사람들도 보였어

우리는 이렇게
같은 한강을 바라보며
어쩌면 이렇게
다를 수 있을까

한강 송전탑
위엔 사람이 살았어
송전탑 옆을 지나 조깅하는
사람들도 보였어
그들은 여기
사람 사는지도 몰라
죽을 것 같은 마음으로
살고 있는데

우리는 이렇게
같은 한강을 바라보며
어쩌면 이렇게
다를 수 있을까

내가 받은 상처
시간 지나가도
잊혀질 수 없어
긴 시간 정말 힘들었으니까

우리는 이렇게
같은 한강을 바라보며
어쩌면 이렇게
다를 수 있을까

홍대 앞에서 활동하는 다양한 장르의 뮤지션들이 2009년 대한민국의 현실을 음악으로 표현한다. 매주 화, 목요일 <프레시안>을 통해서 발표될 이번 릴레이음악 발표를 통해서 독자들은 당대 뮤지션의 날카로운 비판을 최고의 음악으로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관련 기사 : "다시 음악으로 희망을 쏘아 올리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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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리반

2010.03.13 14:03 프린트기사 원본복사가 가능한 심플모드입니다.
“두리반이 싸워야 투기꾼들이 함부로 못한다”
철거 투쟁 중인 홍대 앞 식당 ‘두리반’
박종주 기자 메일보내기
 

서울 홍대입구역 인근, 동교동 삼거리에 있는 식당 ‘두리반’을 찾은 것은 금요일 저녁 여섯 시 반 쯤이었다. ‘대강 그 때 쯤 가겠다’고만 잡아 둔 인터뷰 약속은 마침 두리반 식두들의 식사 시간과 겹쳤다. 두리반의 사장인 안종려 씨는 “밥이 없다”며 곤란해 했고, 결국 함께 간 친구와 함께 근처의 다른 식당을 찾아야 했다. 그래 봐야 똑같은 사람이 사는 동네인데도, 홍대역 근처의 식당은 비싸기만 했다.

명색이 ‘식당’인 두리반이 찾아 온 손님에게 줄 밥이 없는 곳이 되어 버린 것은 지난 해 크리스마스 이브의 일이다. 2006년, 두리반이 위치한 동교동 167번지 일대가 ‘지구단위 계획’ 지역으로 지정되고 건물 바로 앞에 공항 철도 공사가 시작되면서 치솟기 시작한 땅값은 두리반의 운명을 뒤흔들어 놓았다. 두리반이 세 들어 있던 건물은 남전디앤씨라는 회사로 넘어갔고, 이내 한국토지신탁으로 다시 넘어 갔다. 2008년 2월에는 가게를 비우라는 명도 소송장이 날아 왔고, 2009년 겨울에는 가게 집기가 들려 나갔다. 크리스마스 이브에는 결국 가게 앞에 펜스가 둘러졌다.

이틀 뒤인 26일, ‘두리반 식구’들은 절단기를 들고 식당을 찾았다. 굵은 철사를 끊고, 양철 판을 들어내고 다시 들어온 두리반. 그들은 그곳에 침낭을 깔고, 휴대용 버너를 설치해 농성장을 꾸렸다. 그리고 지금까지, 80일 가까이 농성을 해 오고 있다. 기자가 두리반을 알게 된 것 역시 그 즈음의 일이다. 하지만 오며 가며 밖에서 보기엔 어두컴컴하고 흉흉하기만 할 뿐 인기척이 없어, 안에 사람이 있을 줄은 생각도 못했다. 그 안에 사람이 있음을 알게 된 지난 11일 불쑥 찾아가 인터뷰 약속을 잡고, 다음날인 12일 저녁, 인터뷰를 고사한 사장 안종려 씨 대신‘두리반 사장의 남편’ 소설가 유채림 씨로부터 자초지종을 들을 수 있었다.

모든 것은 ‘들은 일’일 뿐

 

안종려, 유채림 씨 부부가 두리반을 연 것은 2005년 3월의 일이었다. 딱 일 년만인 이듬해 3월, 두리반이 위치한 동교동 167번지 일대는 마포구의 ‘지구단위 계획’ 지역으로 지정되었다. “그건 농성 하면서 최근에 알게 된 거고, 그 당시에는 전혀 몰랐죠”라는 유채림 씨는 “2007년에 개발 이야기가 떠 돌기 시작하면서 건물이 팔릴까봐 긴장을 하기도 했는데, 건물주들이 ‘쉽게 팔아 넘길 의향을 없으니 안심하라’고 해서 그런가보다 하고 마음을 놓았죠”라고 말했다.

△ 왼쪽 건물의 일층이 두리반. 맞은 편 도로 한 가운데에는 경전철 공사가 진행되고 있다.
ⓒ 프로메테우스 박종주

하지만 몇 배 씩 치솟는 땅값 앞에서 건물은 얼마 지나지 않아 매각되고 말았다. “12월에 건물이 팔렸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새 건물주는 남전 디앤씨라는, ‘투기꾼들이 급조해서 만든 회사’였죠. 어느 날 와서는 가게를 비우라고 엄포를 놓고 가더라구요.” 유채림 씨의 기억 속에서 모든 것은 ‘들은 일’일 뿐이다. 한 가족이 삶을 꾸려 온 가게 건물이 누군가에게 팔렸다는 사실도, 그와 함께 그 자리를 ‘비워야’ 한다는 사실도 말이다. 세입자가 자신의 사정이나 입장을 이야기할 기회는 단 한 번도 주어지지 않았다.

두리반을 비롯해 건물에 세들어 있던 11 세대는 소송을 제기했지만 패소하고 말았다. 상가건물임대차보호법 10조는 최대 5년까지 임차인의 영업권리를 보장하도록 규정하고 있지만 “철거하거나 재건축하기 위한” 경우는 예외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사하는 기간의 영업 보상금이나, 시설투자비, 권리금 등에 대해서도 아무런 보상을 받을 수 없었다. 공영 개발이 아니라 민간 기업의 사업인 탓에 법적 보호를 받을 수 있는 장치가 사실상 없는 것이다.

재판에서 패소하면서 이들은 한국토지신탁의 재판 비용까지 물어야 하게 되어 보증금마저 돌려 받지 못하는 처지로 전락했다. 4층짜리 건물의 지하에 세들어 있던 댄스 학원은 지상층이 다 빈 후 용역 업체에서 건물의 유리창을 다 깨고 펜스를 둘러 철거, 위험 등의 말들을 낙서 해 놓은 탓에 결국 항소조차 포기하고 가게를 비우고 말았다. “건물을 흉물스럽기 짝이 없게, 곧 무너질 것 같이 꾸며 놓으니까 누가 춤을 배우러 오겠어요, 쉽게 무너질 수밖에 없죠. 결국 1원도 못 돌려 받고 쫓겨난 거에요”라고 유채림 씨는 말했다.

나머지 상가들도 오래 버티지 못했다. 결국 항소에서도 패소하고 망연자실해 있던 상가 세입자들이 ‘개별 협상’ 앞에 무너지고 만 것이다. “서로 흩어지면 모두가 죽는다, 뭉쳐서 대응하자”고 약속은 했지만 당장 장사를 할 수 없는 처지에서 버티기는 쉽지 않았다. 남은 아홉 세대의 세입자들은 가게 보증금에나 미칠까 말까 한 보상금을 받고 결국 뿔뿔히 흩어지고, 두리반만이 남아 흉흉한 빈 건물을 지키게 된 것이다.

“두리반이 싸워야 투기꾼들이 함부로 못한다”

 

△ ‘두리반 사장의 남편’ 소설가 유채림 씨.
ⓒ 프로메테우스 박종주
아무리 먹고 살 길이 막막하다고는 해도, 혹은 아무리 자신의 가게의 추억이 소중하다고 해도, 이미 펜스로 막힌 문을 뚫고 들어가 농성을 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쉬운 결정은 아니었을 텐데 어떻게 그런 결심을 하게 되셨나요, 뻔한 질문을 던지자 유채림 씨는 “그 얘기만 하면 눈물이 난다”며 잠시 허공으로 눈을 돌렸다. “24일에 쫓겨 났는데, 용역들이 다 떠나고 나니까 ‘이제 다 끝났구나’하는 절망감이 들었죠. 그런데 집사람(안종려 씨)이 펜스를 두드리면서 대여섯 시간을 가게를 빙빙 돌면서 통곡을 하더라구요. 그날처럼 절망스러웠던 적도 없었죠.”하고 말하는 유채림 씨의 목소리가 조금씩 잠기기 시작했다.

“여섯 시 반쯤 용역들이 떠났는데, 밤 열두 시가 다 돼서 겨우 설득해서 녹번동 집으로 갔어요. 어지어찌 잠이 들었다가 아침에 눈을 떴는데 옆에 집사람이 없더라구요. 부랴부랴 가게로 가 봤더니, 휴일인데도 동네 단골들이 밥을 먹으러 왔다가 그렇게 된 걸 보고는 웬 일이냐고 묻고, 집사람이 울먹거리면서 설명을 쭉 하고는 막 우는데, 아무 것도 할 수가 없는 자신이 너무 원망스러운 거에요. 그랬는데 모교 민주동문회 후배 몇 명이 찾아 와서 ‘농성을 하자’고 저를 설득하기 시작했죠.”

그렇게 설득에 나선 민주동문회의 동문들이 두리반 농성의 가장 큰 공신이었다. 유채림 씨를 설득하는 것에서부터 농성 물품을 조달하고, 순번을 정해 날마다 불침번을 서 준 것이다. 거기에 더해 유채림 씨가 속해있는 한국작가회의 회원들 역시 적극적으로 나섰다. 하지만 ‘농성을 하자’는 한 마디에 두 부부가 그런 결단을 내릴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민주화 운동 하면서 감옥에도 갔다 오고, 촛불 집회 때도 연행 돼 가면서 집회에 다닌 사람이 정작 자기 일을 나약하게 포기하느냐, 두리반이 싸워야 투기꾼들이 함부로 못한다, (개발업자들이)세입자들을 존중하고 협상의 파트너로 생각하도록 하는 계기를 만들어야 하지 않겠느냐, 이런 이야기들에 떠밀리듯이 약속을 했어요. 이대로 물러서고는 집사람이 정말로 못 살 것 같아서, 더더욱 하기로 마음을 먹기도 했죠”라고 유채림 씨는 결심의 계기를 설명했다.

그렇게 시작한 농성이 한 달이 채 되기 전에 두리반의 소식은 마포 곳곳으로 퍼졌다. 민주노동당, 진보신당 등 진보정당들과 마포 촛불 연대, 민중의 집 등 마포 지역의 진보단체들의 연대가 시작된 것이다. 협상 타결로 용산 참사 사건이 일단락되자, 용산 현장에서 활동하던 문화예술인들이나 촛불을켜는그리스도인들 등의 종교인들도 두리반을 찾았다. 덕분에 “마음이 많이 편안해 졌다”는 유채림 씨. 지금 두리반에는, 따로 순번을 정하지 않아도 늘 찾아 와서 함께 밤을 보내는 사람들이 있고 한 주에도 서너번씩 정기적인 문화 공연과 기도회가 열리고 있다.

“마포구 지구단위 계획의 최전방에 두리반이 있다”

 

안종려 씨와 유채림 씨가 식당을 운영한 것은 2001년부터의 일이다. 궁핍하게 살고 있는 소설가 동생에게 보탬이 되고 싶다며, 사촌형이 운영하던 찜질방의 식당코너를 내어 준 것이다. 한창 찜질방 붐이 일어 사람들이 아무 이유 없이도 찜질방에 놀러 오던, 말하자면 ‘호황기’였다. “2년 반을 운영했는데, 24시간 영업이니까 눈코 뜰 새 없이 잠도 못 자며 일을 했다. 집사람이랑 저랑 밤낮 교대로 일하면서 외식 한 번 한 적이 없어요. 그렇게 번 돈에 은행에서 대출도 받고 해서 두리반을 인수했죠. 그게 전부 날아가고 길바닥에 나앉을 상황이 된거에요”하고 말하는 유채림 씨의 표정에서 분통함이 보였다.

유채림 씨는 “길바닥에 나앉는다는 게 다른 게 아니라, 은행 대출은 아직 갚지도 못했거든요. 대출도 못 갚고 빚만 지고 나오게 되는 셈인거죠. 원래 근근히 살던 것보다 더 못한 환경으로 떨어지게 되는 거에요”라며, “지금 가게 반만한 것만 얻어줘도 아무 소리 안 하고 나가서 먹고 살기나 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지금 가게 반 만한 것’ 역시 ‘철거민’에게는 크기만 한 꿈이다. 지난 해 11월, 다른 세입자들이 다 나갔을 무렵 두리반을 찾아 온 용역 업체에게 안종려 씨는 “두리반 반 만한 곳이라도 얻어 주면 나가겠다”고 말했다. 안 된다는 대답이 돌아오자 “그럼 철거하고, 공사 기간동안 함바 식당(건설현장 노동자들을 상대로 장사하는 가건물 형태의 식당)을 하게 해 달라. 그리고 건물이 완공되면 한 귀퉁이라도 임대해 주면 되지 않겠느냐”고 해 봤지만 역시 소용없는 일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애초에 협상할 생각이 없었던 것 같다”는 게 유채림 씨의 생각이다. 대여섯 평 쯤 되는 작은 규모의 가게가 대부분이었던 터라 크지 않은 보상금으로 대부분 세입자들을 내보낼 수 있었지만 유독 두리반은 서른 평이 넘는 큰 규모였던 탓에 보상금 합의가 되지 않았던 것이다.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이천 오백이면 이천 오백, 이런 식으로 보상금 상한선이 있었던 것 같아요. 그 돈으로는 두리반 같은 가게는 해결이 안 되니까, 애초부터 들어 내려고 했던 게 아닐까 생각하고 있어요”라고 유채림 씨는 말한다.

식당을 여는 데 들인 권리금만이라도 보상받을 수 있었다면, 그래서 근처에 새로이 두리반을 열 수 있었더라면 상황이 이렇게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상황을 그렇게 순탄하지 못했고, 어느새 두리반은 마포구의 유명한 ‘접경지역’이 되어 있었다. “어느새 보니까, 홍대입구역에서 신촌역까지, 마포구 지구단위 계획의 최전방에 두리반이 있게 되었더라구요. 우리가 어떻게 싸우느냐에 따라 그나마 다른 영세 세입자들이 다른 곳에서 살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줄 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라는 유채림 씨는 “지금은 우리 가족 보상도 보상이지만, 쉬쉬하면서 우리끼리 협상하고 할 게 아니라 연대해 준 사람들과 이야기해서 문제를 다중으로서 접근해야 할 것 같아요. 지치고 힘든다고 해서 얼렁뚱땅 끝낼 수 없다는 책임감이 생긴거죠”라고 말했다.

“사람이 정말정말 고마웠다”

 

△ 방문객들이 붙여 놓은 응원의 메세지들이 벽을 덮고 있다.
ⓒ 프로메테우스 박종주
농성이 시작된 이후 아직 물리적인 위협이 닥친 적은 없다. 농성 시작 사흘 째 되던 지낸해 12월 29일, 점심 께쯤 찾아 온 지구대 대원이 오후에 철거가 있을 것이라고 알려 주고 갔지만, 소식을 듣고 달려온 종교인들과 대마침 발표된 작가회의 성명서 덕분에 실제로 침탈이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마음을 놓을 수 있는 것도 아닌 탓에 하루하루를 긴장 속에서 보내고 있지만, 그래도 날마다 찾아 와 주는 사람들 덕분에 마음의 여유가 생긴 것도 사실이기는 하다고.

부부에게는 두 아들이 있다. 큰 아들은 곧 군대에 가고, 작은 아들은 올해로 고3이 되었다. 수험생 뒷바라지를 하느라 안종려 씨는 두리반 농성장과 인천의 집을 오가며 ‘출퇴근’ 생활을 하고 있고, 유채림 씨는 한 시도 두리반을 떠나지 않고 농성장을 지키고 있다. 식당 간판을 달고도 길손들에게 밥 한 그릇 내어주기가 어려운 형편이 되어 버렸지만, 커피 인심, 말 인심만큼은 여전히 후하다.

“농성하면서 사람이 정말정말 고마웠다, 그거 하나―그리고 제 아무리 잘났어도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는 사회, 정직하게 노동하고 더불어 함께 살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가려고 노력하는 삶, 그것 자체가 내 자식에게 물려줘야 할 것이고 나도 평생 그렇게 살아야겠다 하는 것을 이번 농성을 통해서 뼛속 깊이 느꼈다”는 유채림 씨는 인터뷰를 마치며 “사람이 정말로 고맙다”는 말을 몇 번이고 반복했다.

건물을 둘러 싼 펜스에 온갖 낙서가 되어 있어 겉보기에는 좀 흉흉하지만, 그리고 밖에서 보기엔 마치 불이 꺼진 것 같기도 하지만 두리반의 문은 항상 열려 있다. 문을 열고 들어 가면 차 한 잔을 권하며,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눌 것이다. 시간을 잘 맞추면 멋진 공연이나 소박한 술자리를 즐길 수도 있다. 화려한 홍대 거리, 그 뒤켠에 있는 질박한 삶의 공간 ‘두리반’을 한 번쯤 찾아 보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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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반장

좋은 인터뷰 내용이 있으면 첨부하기로하고...

김반장은.. 여튼 최고다

소울과 사회적의식,여하튼 거의 모든 면에서...

 

그의 그룹 아이앤아이장단의 공연을 하루에 두번이나 볼 수 있는 영광을 저번 주말에 누릴 수 있었다.

올라가지 않았다면 후회했으리...

그 공연 덕에 나의 춤은 보다 자연스럽게 내 몸속에서 흘러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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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어송라이터 소히

음.. 보사노바를 하는 가수라 한다.

복많게도 이번 두리반 공연에서 소히를 직접 보았다. 아~보사노바 스러운 기타연주도 매력이었다.

 

가수 소히, 그 봄바람을 베낀 노래에 대하여...
 
보사노바 싱어송라이터 소히와의 감성 인터뷰
 
배문희기자
 
ⓒ 배문희 기자

가수 소히는 봄바람같은 목소리를 지녔다. 시린 귀를 부드럽게 스치고 여린 솜털들을 어루만지는 봄바람처럼 그녀의 목소리는 일부러 지어낸 기교가 없이도 사람의 마음을 잔잔히 흔드는 마력을 지녔다.

그런 그녀가 얼마 전 2집 앨범을 들고 왔다. 2집 앨범은 탁월한 송메이커 이한철이 프로듀서를 맡아 제작한 앨범으로 타이틀 곡 '그럼 그렇지'는 발랄한 분위기에 현 세태를 풍자한 가사가 돋보이고, '산책'은 소히의 시적인 감수성이 잘 묻어난다.

그녀는 국내 음악계에서 보기 드문 싱어송라이터다. 보사노바 아티스트가 귀한 국내에서 기존의 보사노바 앨범들이 대부분 카피곡 위주였다면 그녀는 한국과 브라질의 감성을 잘 녹여내 '한국적 보사노바'를 맛깔나게 들려준다.

문화저널21은 합정동에 있는 작은 카페에서 가수 소히를 만나 그녀의 음악세계에 대한 이야기를 나눠봤다.

'한국적 보사노바'란 어떤 색깔인가.
나라마다 가지고 있는 색깔이 있다. 일본에는 일본만의 감성이 있고, 영국에는 영국 특유의 감성이 있다. 나는 브라질 음악을 하고 있지만 한국만의 감수성과 멜로디 라인을 통해 브라질 음악을 표현하고 있다. 브라질 음악을 어떻게 하면 한국적으로 만들까 생각하며 굿거리 장단, 자진모리 장단 등을 연구하기도 한다.

ⓒ 배문희 기자
노래도 노래지만 가사가 참 시적이다. 평소 책을 많이 읽는가.

책 읽는 것을 좋아한다. 예전에는 시와 소설 등 문학을 주로 읽었는데 사회문제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여성학, 사회학 서적도 즐겨 읽는다. 최근에는 자기계발서도 읽고 있다.

1집과 이번에 발매한 2집 'MIGLE'을 비교한다면?
1집에선 음반사의 의도가 살짝 들어가서 재즈풍의 느낌이 있었다면 2집에서는 보다 내가 하고 싶었던 보사노바 음악을 표현하는 데 주력했다.

'한강 송전탑 위엔 사람이 살았어'라는 노래가 화제가 되기도 했다.
콜트콜텍 기타 노동자들이 양화대교 옆에 있는 송전탑 위에 올라가 투쟁을 할 때 그 아래서 공연을 한 적이 있다. 그 위험한 송전탑 위에 사람들이 있는데도 사람들이 아무런 관심도 없이 자기 할 일을 하면서 지나가는 모습을 보고 많은 생각을 했다.

한강을 거니는 사람들은 대부분 나들이를 나온 사람들이다. 그런 한강에서 목숨을 건 싸움을 하는 사람들을 보며 '같은 공간에서 어쩌면 이렇게 다를까'하고 생각했다.

어떤 이들은 그 노래를 듣고 소히씨를 민중가수로 생각하기도 한다.
나의 전체적인 음악을 들어보면 분명 다르다고 느낄 것이다. 하지만 민중가수라고 생각한다해도 나로서는 불만이 없다. 민중가요도 다양해져야 한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음악적 형식이 비슷한 민중가요를 듣다가 '이런 민중가요도 있네'라고 느낀다면 민중가요가 다양해지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평소 사회적 문제에 관심이 많은가.
음악활동을 하면서 사회문제에 자연히 관심을 갖게 됐다. 음악을 통해 소외된 이웃들에게 조금이나마 위로를 전할 수 있다면 좋겠다.

1집을 만들 당시 20대였는데 2집을 들고 나온 지금은 30대다. 30대에 들어서 음악적으로 달라진 점이 있다면.
20대 때는 음악이 좋아서 한다는 생각이었지만 30대에 들어서는 음악을 하는 자세가 더 치열해졌다. 좀 더 완벽주의가 되려고 하는 거지. 또 예전엔 음악에 대해 막연하게 생각했다면 지금은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까를 더 구체적으로 생각하게 된 것 같다. 

음악에서 8~90년대 아날로그 감성이 느껴지는 것 같다.
옛 감성을 좋아한다. 90년대에는 인간에 대한 따뜻함과 그리움의 감성이 있었다. 팝적인 음악과 사회비판적인 노래 등 다양한 음악들도 있었는데 지금은 그런 노래들을 공중파에서 들을 수가 없다. 점점 획일화되고 있는 것 같다.

특유의 자연스럽고 깨끗한 창법이 인상적이다. 마치 조미료가 안 들어간 정갈한 음식 같은 느낌이랄까.
기교 섞인 노래보다는 목소리 자체를 깨끗하게 전달하고 싶다. 또 목소리의 모서리를 최대한 없애 좋은 목소리를 전달하기 위해 노력한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나같은 가수들은 노래를 못 부른다고 생각한다. 다양한 기교와 고음처리를 해야만 노래를 잘한다고 생각하는 분위기가 참 힘들다. 평가를 그런 식으로 받아야 하니까. 나는 내 목소리를 맑고 깨끗하게 전달하면서 오래오래 노래하는 보컬이고 싶다.

ⓒ 배문희 기자
음악활동을 하면서 아르바이트도 한다고 들었다.

아르바이트를 그만 둔지는 몇 달됐다. 음악활동으로 많은 돈을 벌 수는 없지만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할 수 있다는 것 만으로도 행복하다.

좀 더 대중의 입맛에 맞는 음악을 할 생각은 없는지.
대중의 요구를 배제하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내가 좋아하는 음악을 하면서 최대한 접점을 찾고 싶다.

이번에 나온 음반은 대중들과 충분히 소통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낸 음반이다. 만약에 성과가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접점을 찾을 것인가를 고민해야 할 것 같다.

대중에게 알리기 위해 방송 출연을 할 생각도 있다. 예전에는 얼굴이 많이 보여지는 것이 창피하고 그랬는데 나이가 드니까 용감해지는 것 같다.

앞으로도 보사노바 음악을 할 생각인가.
처음엔 락밴드로 음악을 시작했고 그 다음엔 흑인음악을 했다. 관심이 가는 음악이 계속 변했기 때문이다. 앞으로 어떻게 변하게 될지는 예측불허다. 보사노바 음악도 워낙 다양해서 지방마다 특색이 다르기 때문에 보사노바 음악만으로 다양한 변화를 보여줄 수 있을 것 같다. 
 
노래하는 소히 ⓒ그림=배문희 기자
<오프더 레코드 이야기...>

직접 만나본 소히는 모딜리아니 그림에 나오는 여인처럼 목이 길고 신비로운 이미지였다. 속삭이듯 조용한 목소리, 잔잔한 미소. 그녀는 마음이 여려서 사람들 앞에서 노래를 부를 때 긴장이 많이 된다고 한다. 모서리 없는 목소리만큼이나 마음에도 모서리가 없는 것 같았다. 그녀는 이란성 쌍둥이다. 쌍둥이 남동생과 자주 만나지는 않는다. 그녀는 합정동에 산다. 홍대와도 가깝고 한강과도 지척이다. 동네 카페에서 혼자 책을 읽으며 시간을 보내는 것은 그녀가 좋아하는 일들 중 하나다. 
 
문화저널21 배문희 기자 baemoony@mhj21.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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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순간이 올지 알 수 없는

어차피 그 이후 다시 만나지도 않았어. 만날 수가 없었어. 다시 만나면 의도치 않게 흔들릴 것만 같은 내 마음 때문이었어...언젠간 재결합해 다시 잘 살고 있을지도 모른단 건 알고 있었지

사랑하는 마음이나 미워하는 마음은 옅어져갔지만 정체 모를, 한동안 알았었던 사람으로서의 정이랄까? 기억?그렇게 안정되게 살길 바랬었지

 

새로운 가족을 하늘로부터 맞이한  소식을 블로그에서 접하니 묘하게 궁금해진다.

상상못한 낯선 일이기도 하다. 그라는 사람에게는... 하지만 좋은 일이지.

참 이상한 마음인게다. 그는 재결합을 하겠다고 했고 그래서 나는 그와의 인연을 어렵사리 끊었었고.

그는 다시 그의 가족에게로 돌아간 것일까? 난 정확하게도 모른다. 석연치 않은 구석이 조금 있었으니.

 

그 이후 한번도 보지 않길 잘 했어 하지만 언젠가 한 번 춤명상 후 생각이 나 문자메세지를 보냈지... 그리고 얼마 전에도. 하지만 전화는 받고 싶지 않더라구.

 

그런데, 한 번 받았어. 할머니가 돌아가셨다고 했고, 내가 전화를 받아서 고마웠다고 했어. 그 이후론 전화를 받지 않고 하지 않았지. 2년 사이 그의 부모와 할머니가 돌아가셨어..

사실 그는 나의 좋은 친구이자 선배였었지만 하지만 절대 어떤 면에서는 만나지 않아야 할, 맞지 않는 사람이었어. 그래도 좋은 조언자였어.

 

그래, 이젠 확실히 마음 속으로 그의 안정과 행복을 빌어주겠어. 그래야겠어.

나와 타인 사이에 존재하는 과거의 기억이란 복잡미묘하고, 떠올릴 때면 아프기도 해.

 

그래서 그런 기억을 만드는 것이 괴로워.

만들고 싶어질 때면 나는 그냥 문을 닫게 돼.

어떤 순간이 올지 알 수 없는 삶.

 

여인들과의 관계는 동지적이고, 복잡미묘한 기억을 덜 만들지만

남자와의 관계는 그렇지 않아. 뭐,당연한 거지. 자꾸 끄달리게 된다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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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줌 처리

굴러다니던 깔때기를 발견. 득템.

사무실 말통 하나 들고가야겠음.

요강을 비울 때 말통에 깔때기를 꽂고 비우면 되겠군 드디어 해답을 찾았다

핫핫핫

 

사무실 앞 조그만 텃밭에 꽃씨를 뿌렸다.

메마른 가슴에 꽃씨를 뿌려요~ **

농장에는 오늘 파종한다는데 난 사무실 일이 있어서 못 가고 있다.

그런데 비가 온다. 그래, 안 가서 다행인건가...

 

몸쓰는 일이 조금은 더 익숙해진다면. 그것은 다행인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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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아침은 자전거와 버스로 환승해 출근했다.자전거로 15분만 달리면 버스정류장이 나오고 거기에서 버스를 타면 10분 후면 사무실 앞에 도착한다. 가장 이상적인 방법으로 보인다.ㅋㅋ

나는 운이 좋다. 이 정도 교통환경이면 교통 좋은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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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줌과 똥 처리

몇 가지 구상을 해 본다.

어떻게 하면 활용할 수 있을까 요러한 구상을 해보는 것이 재미다.

 

어제 마당에 구덩이를 팠다. 이미 배설한 것을 처리하는 구덩이다. 강아지똥 및 애들 것+언니것은 요강이 있으니 거기에 일을 봐서 비우면 된다. 그것은 큰아이가 하기로 했다.

여기에 동의해주는 언니는 역시 가리는 게 없고 마음이 고운 분이다.

내가 뒷물을 한다고 이야기를 했을 때에도 "그래? 우리 애들도 하면 좋겠다."이런 이야기를 바로 하셨던 분이다.

 

왠만큼 깊게 파서 될런지...는 모르겠다 하하.

 

그리고 마당 귀퉁이에 야외 배설용 구덩이를 하나 더 팠다. 이것은 그 자리에서 배설하는 것이다.

아니면 요강을 마련해서 일을 보고 비우는 것이다. 배설의 방법은 일단 두 가지가 나온다. - 배설용 구덩이에 파거나 요강에 파서 구덩이에 묻거나...하지만 내가 눈 똥을 요강을 비우면서 확인해야 한다는 단점이 있다.똥을 누고 요강에 쌀겨를 좀 뿌릴까? 그러면 덜 거북하겠지 ㅠ.ㅠ.

그것보다, 아무리 언니가 거부감이 없다고 해도, 어떤 게 언니나 애들이 보기에 덜 불편할 것인가 가 중요하다.

 

"똥이 더럽다고 생각하는 것은 - 일단 냄새를 제외하고 모양만 봤을 때 - 본능적인 반응인가, 학습된 반응인가? " 얼마 전부터 생각해오기 시작한 탐구주제인데, 아직 답은 못 찾았따. 그리고 본인의 똥냄새는 그런 대로 참아줄만하다... 이것도 신기하다. -.-;;

 

오줌을 말통에 받아서 삭히는 게 좋다고 했는데, 화장실 구조상 그렇게 할 수가 없다. 새로 지을수도 없구. 구덩이에다 일을 봐서 삭혀서 그 흙을 쓰는수밖에... 텃밭 비료를 마련해야 하므로 어떻게든 오줌과 똥을 다시 텃밭에 돌려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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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이란?

요새 재미난 것을 알게 되어서 탐구중이다. 빈집이라고...

나도 한동안, 그리고 지금도...그런 공간을 꿈꾸었기에...

내가 살아가는 집이라기보다 , 어느 정도 뜻이 비슷하고, 거처가 필요한 사람들이 함께 모여 사는 곳...

그곳이 집이다.

나는 내 집을  소유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지금 사는 집도 언니네가 고친 것을 나는 그냥 몸만 들어가 살고 있는 것이다. 대신 나의 방식대로 요리와 청소를 부지런히 하는 것으로 보답한다. 언니는 미안해하지만...(너무 착한 사람이다..)

 

진안에서도 그 비슷한 생활을 했을 때 아주 많은 것을 배웠고 즐거웠다. 

물론 정서적인 부분이나, 대화와 토론에 있어서 어려운 난관들도 있었지만

남녀가 물론 다른 집을 쓰지만 여성과 남성, 여동생과 언니 오빠들과 함께 산다는 것은 정서적인 외로움을 충족시켜주고 이성과의 대화도 하게 해 주는 그런 대화거리와 시간,공간이 가능하기 때문에 좋은 점이 많았다. 그것을 불편해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개인 방을 원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함께 사는 것의 불편함에 무뎌서인지 나는 그저 그렇게 살만했다.

 

그러나, 내가 피해를 조금 주었을게다.

변온동물이라 보일러를 켰다 껐다 하면서 다른 사람의 발을 실수로 밟는 일도 있었기 때문이다.

잠자리에서만큼은 내가 불편해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 불편하게 되는 경우가 생긴다는 것이 컴플렉스이긴 하다.

 

지금도 언니와 아이들 둘과 강아지와 한 집에 산다

우리는 가족이 아니지만, 가족보다 더 유대감이 느껴진다

성품이 좋으시고, 배려심이 있어서다.

 

강아지가 한밤중에 짖어서 잠을 설치는 것이 딱 한 가지 문제라면 문제겠다.

 

어젠 밭을 일구었는데 큰아이가 자기는 일을 좋아한다며 나서서 괭이질도 하고 삽질도 했다.

보기 드문 어린이다. 아버지가 농사를 짓는 것을 보고 자라서 일이 낯설지가 않댄다.

둘째는 이제 초등학교 1학년이라 귀엽지만 땡깡 부리는 걸 보면서 나중에 내가 아기를 키우고 대할 때 많은 참고가 되리라는 것을 느꼈다.

 

행복하다

또 다른 사람들과의 동거생활

여자들만의 생활이라는 것이 주는 안정감

 

그리고 또 한 친구 부부네 집은 손님들이 많아서 가끔 손님들과의 대화가 간절해지면 그 집으로 놀러가면 된다. ㅎㅎ 그래서 오늘은  그 집으로 고고씽이다.

 

어느 새 나는 또 다른 이들과 한 집에서 생활한다.

솔직히 혼자 사는 것은 재미없다... ㅠ.ㅠ

하지만 결혼이나 동거생활은 하고 싶지 않다. 왜인지...

남자와 살기에는 아직 마음의 준비가 안 됐나보다.

여성성을 갖고 있는 남자라면 조금 나을까?

 

나는 진안에서의 생활을 통해서 조금 부지런해졌다. 그리고 요리실력과 의지도 조금 늘었다.

그래서 지금은 청소가 습관화가 되었다. 같이 사는 건 여러모로 많은 것을 배우고, 느끼게 해준다.

그것이 비록 안 좋은 경험일지라도...

 

 

김디온, 아규 - 도심 속 공동주거실험 2년 ‘빈집’

 

[행복한인터뷰]


 
빈집의 진실 “2000원에 주인되는 집?” 
 
1월 1일 모 일간지 일면 헤드라인은 이러했다. 2000원에 주인 되는 집! 주거난에 허덕이는 이들을 단박에 유혹하는 이 제목은 서울 용산2가 해방촌에 있는 대안적 주거공동체 ‘빈집’을 소개한 기사였다. 빈집은 하루 2,000원 이상의 분담금만 내면 누구나 머물 수 있는 일종의 게스츠하우스(Guests’ house)다. 하루를 묵는 것도 몇 달을 머무는 것도 자유다. 다만 각자 주인으로서 모든 것을 스스로 해나가면서 공동의 삶을 꾸려간다. 
이 기사가 나간 후 많은 이들이 빈집의 문을 두드렸다. 언론에 소개된 맛집이 한바탕 몸살을 앓듯, 빈집은 1월 내내 호기심 인파로 휘청했다. 하지만 무슨 까닭인지 ‘신문 보고 찾아왔던’ 손님들은 오래지 않아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제아무리 커피 값보다 싼 방값이라도 여럿이 매일매일 살아내기가 쉽지만은 않았던 걸까. 
 
접기
새해 벽두 한바탕 해프닝을 터놓는 빈집설립자 아규와 장기투숙자 김디온. 그들은 이번처럼 빈집이 알려질 때마다 ‘빈집이 도대체 어떤 곳이냐’는 질문에 목 아프게 답해야 했다. 그런데 이제는 그 물음을 바꿔 스스로에게 던지고 있다. 빈집이 무엇인가가 아니라 빈집을 어떻게 구성할 것인가로. 나무처럼 조금씩 자라는 빈집에서 동고동락하는 그들을 2월 4일 봄의 길목에서 만났다. 
 
빈집의 탄생 “공간절약 재미만빵! 같이 살자”
 
“빈집을 만들기 전, 일 년 동안 짝꿍(남친)과 배낭여행을 다녔어요. 동남아와 유럽을 돌면서 주로 게스트하우스나 텐트에서 먹고 잤죠. 말레시아에서는 방한 칸 빌려서 한 달을 지냈고요. 거기서 아나키스트 친구를 만났어요. 그들은 일찍이 독립해서 방 한 칸에서 살더라고요. 여행하는 동안 이런저런 방법으로 살아보면서 느꼈죠. 우리가 사는 공간이 생각보다 많이 필요한 게 아니구나. 또 어떤 곳에서 산다 해도 24시간 공간을 점유하는 것도 아니고 세탁기도 한 달에 서너 번 밖에 안 돌리는데 집집마다 있는 건 낭비잖아요.”

배낭여행에서 돌아와 새로운 삶의 터전을 정해야 했던 아규. 그는 여럿이 밥해 먹고 사는 주거공동체를 꾸리기로 결심했다. 짝꿍도 동의했다. 둘이 지내는 것도 좋지만 여럿이 살면 절약도 되고 재밌겠다 싶었다. 다른 친구와 셋이서 의기투합해 서울 남산 아래 해방촌 다세대 주택 4층에 둥지를 틀었다. 2008년 2월 손님(賓)들의 집, 가난한 이들(貧)의 집 ‘빈집’이 탄생한 것이다.
 
방 세 칸짜리 ‘아랫집’에서 시작한 빈집은 인근의 ‘윗집’(2008년 11월) ‘옆집’(2009년 2월) ‘가파른 집’(2009년 4월) 수색 부근의 빈농집 (2009년 10월)까지, 두해를 넘기며 다섯 채로 늘었다. ‘빈마을’이 된 이곳에서, 현재 아기가 있는 부부를 포함해 10대부터 50대까지 32명과 고양이 세 마리가 장기 거주한다. 단기투숙자도 월 20여 명 다녀간다. 
 
빈집의 고민 “혼자 있고 싶을 땐 어떡하지”
빈집은 주인이 없는 하지만 누구나 주인이 될 수 있는 집이다. 아무리 그래도, 말이 그렇지 생판 모르는 낯선 사람과 한 지붕 아래서 먹고 자는 것은 어쩐지 두렵다. 혼자서 고독을 씹고 싶을 땐 어디서 어떻게 해야 하나. 
“사실, 그거였어요. 저는 철저히 혼자 사는 걸 추구했거든요. 친구와 같이 살다가 실패한 경험이 있어서 다시는 누구랑 안 산다고 결심했죠. 빈집이 처음 생기고 집들이 할 때부터 알았는데, 밖에서 1년 간 지켜봐도 들어갈 엄두가 안 났지요. 낮 동안 힘들게 일했는데 집에 와서 또 사람이랑 부대끼면서 쉬지도 못하고, 심지어 모르는 사람이 옆에서 자다니 끔찍하잖아요. 무엇보다 내가 남에게 피해주는 것도 걱정이고요. 그 엄청난 정서운동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지요.” 
오랜 망설임 끝에 빈집 식구가 된 김디온 씨. 실은 남친한테 먼저 빈집에 살고 있으라고 하고는 간을 보다가 결국 옆집으로 이사하면서 빈집 살이를 시작했다. 우려와 달리 일 년 째 빈집에 잘 지내고 있다. 두려움이란 괴물은 빈집이 아니라 마음에 있었고, 그것은 낯선 존재들과의 무수한 부딪침을 통해서 서서히 사라졌다. 담력이 커졌고 소통기술도 늘었다. 사람들 속에서 유유자적 고독을 씹는 노하우도 터득했다.  
 
빈집의 약속 “낯섦을 즐기는 환대의 기술”
빈집은 딱히 금기가 없다. 생활수칙은 집집마다 벽면마다 무수한 쪽지가 대신한다. 설거지 하는 법, 화장실 이용법, 세탁기 사용법 등을 보고 각자 처리한다. 윗집은 아예 장기투숙자 6명이 주방정리, 마루청소, 분리수거, 회계, 화장실, 반찬 만들기 등 6가지 가사노동을 분담한다. 그렇다고 일상이 척척 맞물려 기계적으로 돌아가는 건 아니다. 하지만 빈집에 사는 사람들의 보이지 않은 신뢰, 공간에 대한 힘이 강고하기에 손님이 들어와도 눈치껏 일상을 살아냈다. 크고 작은 갈등은 대화로 조율이 가능했다.
그런데 작년 여름부터 상황이 달라졌다. 장기투숙자들이 서서히 취직하고 신입 단기투숙자들의 비율이 늘어났다. 장기투숙자들이 낮 동안 집을 비우자 환대의 질이 떨어지고 밥 짓고 청소하는 공동생활의 리듬이 흔들렸다.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모여 논의했다. 빈집은 집별로 월2~3회, 마을단위로는 월 1~2회 회의를 연다. 그런데 사안은 달라도 결론은 늘 대동소이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환대의 의무를 다하자는 것, 빈집에 기여하는 활동을 스스로 늘리자는 것이다. 
“장기투숙자들은 손님에 대한 환대의 의무가 있어요. 낯선 사람이 올 때마다 이 공간에 대해 설명해야하죠. 이렇게 하라고요. 그런데 아무 일도 안 하고 무임승차 하려는 사람이 꼭 있어요. 외출할 때 뒷정리나 가사노동을 안 해놓으면 잔소리하죠. 우린 하숙생! 기생인! 이게 가장 심한 욕이에요.(웃음) 당신은 왜 여기 있느냐 왜 같이 살려고 하느냐 묻고 또 묻죠. 못 견디고 스스로 나가는 사람은 있지만, 어떤 경우에라도 먼저 나가라고는 말하지 않아요. 지금까지는 계속 대화로 풀어갔죠. 그 정서노동의 피로가 무척 커요.한 말 하고 또 하고 당한 일 또 당하고. 그런데 또 그게 힘들면서 보람이기도 해요. 새로운 사람들의 반응에 힘이 생기고 조금씩 변하고 나누는 게 좋아요.” 
이건 어디까지나 아규가 고집해온 환대의 기술이다. 이제는 힘에 부쳐 조금 뒤로 빠졌지만 아규는 줄곧 마음을 열고 지속적인 대화를 시도하는 은근과 끈기의 소통법으로 손님을 맞았다. 김디온은 조금 다르다. 직설화법으로 말한다. 일단 일을 시켜 몸소 터득하게 하는 실리형이다. 집안일을 조금만 잘해도 칭찬하고 “믿고 나가요”라며 주인의식을 고취시킨다. 
 
빈집의 환상 “저렴한 하숙집 아니거든”
공동주거에서 가장 난제였던 부엌일은 반찬팀을 만들어 해결했다. 지난 12월부터 한 사람당 2만원씩 낸다. 매주 수요일 낮에 모여 찬거리를 사고 일주일치 밑반찬 만들어서 집집마다 나눠 먹는다. 구성원들이 돌아가면서 한 번씩은 반찬팀을 해야 한다. 자발적 강제다. 건강팀에서는 아침에 약수를 길러 집집마다 나르고 요가와 108배 등 정서적 건강까지 챙긴다. 빈책팀에서는 좋은 책을 골라서 함께 읽는 세미나와 빈집이야기를 기록하는 작업을 진행한다. 이러한 팀활동은 주거공간에 리듬과 균형을 잡아주고 유대를 돈독히 해주었다.
“하숙집이나 고시원 전전하다가 ‘저렴한 하숙집’의 환상을 품고 오는 사람들도 많아요. 이런 이들이 가장 먼저 부딪히는 벽은 가사노동이죠. 생활인이 아니라는 게 문제에요. 기본적인 가사노동에 서툴고 여럿이 무얼 한다는 것을 번잡스러워 해요. 회의한다고 하면 왜 자꾸 모이느냐 불만을 갖죠. 오래 살다 보면 익숙하고 좋아지는데 그것을 견디지 못하고 한두 달 만에 가버려요. 나갈 때 ‘좋은 경험이었어요.’ 이런 말 들으면 아주 서늘하죠.(웃음)”  
아규에 이어 김디온은 반대 사례를 소개했다. 대학에 들어오면서 상경해 6개월간 고시원에 살던 한 친구는 카레가루 푼 멀건 카레밥만 먹다가 빈집에서 사니 “밥 같은 밥 먹고 등 따시고 천국이 따로 없다”고 좋아한다는 것. 또 빈집에 오자마자 첫날부터 빗자루 들고 청소를 하면서 공간을 장악하는 사람도 가끔 볼 수 있다. “그런 사람은 정말 빈집의 주인이 되는 거죠. 남의 집에 가서 청소를 하진 않잖아요.”
 
빈집의 가족 “독거냐 아니냐의 차이다” 
그렇다. 집은 사적공간의 대표명사다. 내 삶에서 내 몸에서 나오는 노폐물을 버리고 큰 불편함 없이 사는 곳이다. 그런데 빈집에서는 낯선 존재들과 공동의 삶을 만들어간다. 그들에게 집은 무엇일까. 골똘히 생각에 잠겼던 아규는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집이란 것이, 혼자 사느냐 같이 사느냐 그 차이 같아요. 애인, 부모 등 누구와 살면 어차피 고요한 사적 공간의 기능은 사라지니까요. 짝꿍이랑 사는 순간 침실부터 부엌, 화장실 모두 공유하잖아요. 두 사람이나 여러 명이나 똑같아요. 시간을 두고 지내면 서로에 대한 신뢰도 싹트고 재밌게 살다보니까 사적공간에 대한 생각이 달라져요.”   
집에 대한 해석이 바뀌면서 가족에 대한 개념도 변했다. 김디온은 얼마 전 친동생이 아기를 낳아 산후조리를 도왔다. 자매애가 남달라 괜시리 애틋한 감정을 느꼈다. 아랫집에서 같이 사는 ‘뚜리’도 소중하다. 꼬물꼬물 신생아 때부터 줄곧 성장을 지켜보았고 매일 서너 시간은 돌보다 보니 정이 흠뻑 들었다. 조금 더 짠하고 덜 짠하고의 미세한 차이가 있을지 모르겠으나 지지고 볶고 살면서 서로의 삶에 영향을 주는 점에서는 매한가지 아닐까, 그는 말한다. 
 
“뚜리가 처음 왔을 땐 정말 힘들었어요. 애기가 우니까 신경이 날카로워져서 밤에 잠도 못자고 공부도 못하고 일상이 엉망이 됐죠. 화가 나서 뒷담화도 하고 상처도 주고받고 그랬어요. 뚜리를 계기로 아기랑 사는 것에 대해, 아기와 어떻게 관계 맺을 것인가 생각하게 됐고, 또 뚜리아빠가 인도사람이거든요. 이주민 소수자의 삶도 고민하게 됐죠. 많이 배워요. 얼마 전엔 뚜리엄마가 빈집이 아기를 키우기 위한 공간은 아니지 않느냐는 말을 하는데 왠지 서운하더라고요.”  
빈집의 비밀 “사적소유, 섹스 감각 바뀐다”   
김디온의 고백처럼 빈집의 공동주거는 혈연중심의 가족주의를 무력화시켰다. 내 집에 대한 애착이 사라지면 내 가족, 내 물건의 사적소유의 감각도 해체되기 마련. 아규는 잠자리까지 공유하는 사이에 “사적소유 웬말이냐”고 정색했다. 처음엔 어색해서 내 것을 챙기는데 점점 공유의 폭이 넓어지더라는 것. 
“그래도 마지막에는 감정적으로 치환되기도 해요. 잘 지내다가 감정 틀어지면 이름과 용도를 붙이게 되죠. 하하. 근데 전 아직도 손톱 깎기는 꼭 제 서랍에 넣어둬요. 왜 그런지 모르겠어요.” 이에 질세라 김디온이 거든다. “나도 그런 거 있어요. 누가 내 책에 누가 줄긋는 거 싫어요.”
 

또 한 가지 중요한 문제. 사적공간이 아닌 공동주거 공간에서 섹스는 어떻게 이루어지는 걸까. 김디온과 아규를 포함해 빈집에는 총 다섯 커플이 있다. 그간은 이집 저집의 남자방 여자방에서 따로 흩어져 지냈으나, 손님맞이용 여유로운 공간을 더 많이 확보하기 위해 방 하나에 이층 침대를 놓고 커플들을 위한 방으로 정할까 궁리중이라고 한다. 아니, 대체 커플들이 한 방에서 지낸다는 것이 어떻게 가능할까. 김디온은 빈집에 살면 커플에 대한 감각도 달라진다고 얘기한다.
 

 

“섹스가 꼭 육체적인 접촉을 통해서만 이뤄지는 게 아니잖아요. 세미나 하면서 정서적으로 교감이 이뤄지면 에로틱한 감성이 생기기도 하고. 관계를 열어두게 돼요. 일상을 폭넓게 공유하는 게 중요하지 커플이라고 해서 별도의 침실이 있고 거기서 단둘이 있을 필요는 없다는 거죠. 물론 커플끼리 내밀한 얘기도 하고 싶고 싸우기도 하고, 꼭 섹스가 아니라 그냥 둘이 뒹굴면서 놀고 싶기도 하지요. 그럴 때는 운 좋으면 비어있는 공간을 활용해요.” 
김디온에게 빈집은 사랑이 쑥쑥 자라는 양질의 토양이다. “저는 공부하고 남친은 목수일목수일을 했었거든요. 둘만의 공감거리가 별로 없었어요. 그런데 이 공간에 살면서 두 사람의 공감거리가 훨씬 풍부해졌어요. 정서적 완충지대 역할을 한다고 할까요. 빈집에 같이 묶여서 복닥복닥 하다보면 재밌어요. 가난한데 풍요로워요.”   
김디온은 이어 빈집에 살면 공부거리가 계속 생긴다고 말했다. 크고 작은 문제가 생길 때마다, 가령 뚜리가 아플 때는 육아서적을 보게 되고, 어떻게 공간을 배치하고 구성할 것인가를 위해 주거학과 욕망을 공부하고, 빈마을 카페를 만들기 위해 바리스타가 되는 법을 공부하는 식이다. 빈집에서 성희롱 발언 사건이 있을 때는 페미니즘에 관한 책을 보면서 대응책을 마련하기도 했다. “도서관에서 책을 잔뜩 빌려다가 읽고 공부면서 삶을 만들어가는 재미가 솔솔 하다.” 
 
빈집의 관문 “인종주의자입니까? 내려가십시오”
진심어린 환대의 기술로 빈집을 빈마을로 키워낸 아규는 최근 빈집의 ‘문턱’ 만들기에 고심한다. 남에게 무관심 하고 자신의 신체, 자신의 소유, 자신의 이익만 챙기며 기생하는 자유주의자, 개인주의자는 빈집과 가장 안 어울리는 존재다. 그들이 틈입할 수 있는 구조를 애초에 차단하는 시스템을 궁리 중이다.
“빈집에 어떤 기준과 원칙이 필요하다는 쪽으로 의견을 모으고 있어요. 장기투숙자와 단기투숙자를 나누는 기준이라든가, 장기투숙자들의 공동운영책임 등 여러 가지 것들이요. 이를 테면, 고양이랑 함께 살 수 있는가, 20인분의 식사를 한 번에 할 수 있나 이런 것도 물어보고 어느 정도는 합의가 되어야지 안 그러면 별의 별 사람이 다 오니까 너무 지치더라고요.”
얼마 전 빈집 회의에 아주 좋은 아이디어가 나왔다. 절이나 성당이 누구에게나 열렸지만 아무나 가지 못하는 공간인 이유는 사천왕문, 일주문 같은 단계별 관문이 있기 때문이라며 빈집도 계단마다 문구를 새겨 넣어 여과장치를 만들자는 제안이었다. “이를 테면 이런 식이죠. 당신은 인종주의입니까? 내려가십시오. 당신은 마초입니까? 내려가십시오. 페미니스트입니까? 올라오십시오. 동물을 사랑하십니까? 환영합니다. 어때요? 괜찮겠죠? 하하.”  
아규가 이처럼 유쾌한 문턱을 만드는 동안 김디온은 알찬 사업을 구상한다. 그간은 아기도 보고 환대의 기술을 익히는 등 관계에 집중했다면 이제 탄탄한 유대관계를 토대로 하나씩 일을 벌여나갈 계획이다. 원래부터 빈집은 막걸리나 맥주 등 술을 빚어 먹었고 옥상 텃밭에서 채소도 키웠다. 대안생리대와 비누도 만들었다. 빈집이 소비의 공간이 아닌 생산의 공간이 되도록 실천해나갔다. 그 범위와 대상을 확장하려는 것.
“빈집에서는 한 달에 30~60만원이면 충분히 살 수 있거든요. 우리 안에서 인적재원을 활용해 그 돈을 버는 방법이 있으리라 생각해요. 빈마을금고, 빈마을카페 만들기 등등 빈집이 빈마을을 넘어 해방촌 지역으로 확장하는 것도 장기적으로 모색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신나는 실험계획서는 빈집 홈페이지에 실시간으로 오른다. 빈집의 좌충우돌 성장일기를 지켜볼 수 있다.
 
빈집의 확산 “우리만 잘살믄 무슨 재민겨”
2008년 2월, 애초에 빈집을 서울 한복판에 마련한 이유는 ‘주거공동체’ 확산 전망과 맞닿아 있다. 아규는 서울외곽이나 지방으로 빠지면 마당 있는 집도 구할 수 있지만 접근성이 떨어지는 것이 문제라며 남산도 가깝고 큰 도서관과 인문학 공동체 수유너머가 있는 해방촌이 여러모로 젊은이들의 주거실험 장소로 맞춤했다고 말했다. 도심에서라면 더 많은 이들과 함께 할 수 있겠다고 판단한 것이다.   
“어쩌면 도시가 이런 빈집 같은 공간이 더 절실하거든요. 서울에 사람은 많은데 비해 마땅히 살 공간이 없잖아요. 학교나 센터 형태로만 있는데 사람들이 밥, 술, 잠을 해결할 곳이 필요하거든요. 저희들처럼 이렇게 많이 살았으면 좋겠어요. 전에 선배가 와서 밥 한 끼 먹더니 그러더라고요. 가난한 것들이 왜 이렇게 맛있는 걸 먹고 사느냐고요.(웃음) 가난해도 같이 살면 풍요롭게 살 수 있다는 걸 보여드리고 싶어요.”
현재 빈집 기록 작업이 활발히 진행 중이다. 빈집 매뉴얼을 책으로 발간하기 위해 ‘책팀’이 매주 2회 모여 학습과 집필에 착수했으며, 빈집에 사는 주현숙 독립다큐멘터리 감독은 빈집이야기를 영상으로 기록하고 있다. 미래의 불안 때문에 오늘을 빼앗기고 희생하는 사람들, 살길이 막막한 젊은이들에게 ‘빈집보고서’가 중요한 삶의 솔루션이 되기를, 행동에 나서도록 촉구하는 생생한 정치팜플릿이 되기를, 그래서 빈집이 민들레 꽃씨처럼 번져나가기를 그들은 희망한다.
김디온은 교육, 생태, 여성, 주거, 노인 등 삶에서 직면하는 모든 문제들을 빈집에서 풀어내고 싶다고 말했다. “장애인이나 노인같이 도움과 보호가 필요한 존재들과 빈집에서 같이 살 수 있을까, 아니 어떻게 같이 살 것인가를 고민해봤어요. 얼마 전 엄마가 아프셨을 때 빈집에 모시고 올까 하는 얘길 했더니 다들 환영하더라고요. 만약 그렇게 된다면 이 안에서 혈연관계가 어떻게 재조정될까도 궁금하고, 일단 모든 가능성은 열어두려고 해요. 빈집에 새로운 사람들이 들어오는 것도 좋지만 여기저기에 빈집이 더 많이 생겨났으면 좋겠어요.” 
2000원에 주인 되는 집. 주인이 되기는 쉬우나 주인으로 살기는 어려운 집. 하지만 주인이 되면 누구보다 행복해지는 집. 주거공동체 빈집은 오늘도 ‘그럼에도 불구하고’를 되뇌이고 ‘혼자만 잘살믄 무슨 재민겨(전우익)’를 외치며 단 한번 뿐인 인생, 단 한 번뿐인 삶의 소중한 실험을 이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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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을 흐르게 하라

아직은 그저 연습수준일 뿐인 나의 기록..그래도 기록자로 한발자국 한걸음을 걸어가는거지

현상을 기록하는 것 뿐 아니라 그 이면을 더 파헤치고 인터뷰도 잘 할 수 있기를 바라며.

여기 있는 것들은 내가 인터뷰한 게 아니라 말씀하는 것을 녹취하여 기록한 것 뿐이므로...

 

"강을 흐르게 하라" 

남한강 생태 답사 및 수경스님과의 대화마당, '수륙대제' 열려
10.04.13 18:50 ㅣ최종 업데이트 10.04.13 18:52 김하나 (rjadmsdlv)

 
 
  
▲ 버드나무에 물이 오른 새순 버드나무는 뽑혔으나 새순은 아직 움트고 있었다.
ⓒ 김하나
버드나무

 

 

지난 10일 오전 10시경, 녹색연합, 제천간디학교, 환경운동연합, 강과 습지를 사랑하는 상주사람들 등 전국 여러 곳에서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했고 이항진 집행위원장의 안내말로 오늘 여강 걷기가 시작되었습니다.

 

"이명박 대통령이 이야기하는 강 살리기의 내용은 지역경제를 살리고 고용을 창출하고 친수공간을 만들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친수공간을 만들겠다고 하는데, 그렇게 되면 한강 둔치처럼 들어가면 익사하는 강이 됩니다. 친수공간은 맞습니다. 누가 친해지느냐가 문제입니다. 인간이 친해질 것인지 시멘트가 친해질 것인지 말입니다. 이런 이야기를 오늘 걸으면서 나누셨으면 좋겠습니다."

 

 

 

여주환경운동연합 이항진 집행위원장은 두 개의 지도를 비교하며 설명을 이었습니다.

 

"이것은 최근 10년간 홍수가 일어난 곳을 표시한 지도이고 이것은 4대강에 보를 만드는 지역입니다. 단순하게 이 두 지도를 겹쳐보았더니 어떻게 이렇게 홍수 안 나는 지역만 보를 만드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여러분들이 오늘 고민하셔야 되는 내용이 이런 거구요. 그 답을 현장에 가셔서 찾으셔야 되겠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여러분들이 답을 찾았다면 오시지 않았겠지요? 답을 고민해야 하겠지요. 걸으면서 대화를 나누시는 게 중요한 일입니다."

 

  
▲ 최근 10년간 수해밀도지역과 4대강 보 설치구간 비교지도 수해밀도지역과 보 설치구간 사이의 일치성은 거의 없습니다. 그리고 홍수는 보를 건설하려는 본류보다는 작은 지류에서 더 많이 발생하고 있다고 합니다.
ⓒ 김하나
홍수
여여주 지역은 한강 살리기 사업 1공구 구간에 속하는 곳입니다. 인근 팔당 유기농 단지의 경우에는 신부들이 매일 미사를 드리며 현장을 지키고 있으며, 지역을 지키려는 지역민의 의지 또한 확고하다고 하지만 여주 구간의 경우는 지역민들의 의견이 분리되어 있습니다. 보상으로 인해 찬성하는 입장인 땅 주인, 이장단협의회와 생태계 파괴를 막고 희귀종을 보호하기 위하여 사업을 반대하는 측으로 나뉘어져 있는 상황입니다. 도로를 지나면서 공사를 찬성하는 단체에서 내걸은 현수막을 볼 수 있었습니다.

 

 

"한강살리기 사업은 우리들의 숙원사업입니다." "여주 한강 살리기 사업에 타 지역 단체의 집회를 거부합니다."라는 내용입니다.

 

안내설명이 끝난 후 시작으로 여러 대의 차량을 이용하여 바위늪구비 습지로 이동하였습니다. 남한강의 아름다운 곳 중 알려져 있는 바위늪구비는 습지가 많고 따라서 갈대와 버드나무가 번성하던 지역입니다. 약 6개월 전까지만 해도 본래의 모습이 남아 있었지만 지금은 버드나무와 갈대를 베어내는 중입니다. 이곳에는 희귀종 식물인 단양쑥부쟁이기 서식하고 있습니다. 원시 상태에 가까운 강에서만 볼 수 있는 풀로서 편안하고 안전한 땅이 아니라 척박하고 원시성이 보존되어 있는 땅에서 잘 자라는데, 그 이유는 편안한 땅에서는 일반적인 다른 식물들과의 경쟁에서 이길 수 없기 때문입니다.

 

  
▲ 고라니의 발자국 갈대밭을 가로질러 뛰어가던 고라니의 발자국입니다.
ⓒ 김하나
고라니

 

 

여주 지역의 환경시민단체에서는 현장을 모니터링하던 중 이 풀을 발견하여, 보존을 요청하였고 이에 따라 공사 진행처에서는 단양 쑥부쟁이 서식지를 표시하고, 안내 표지판을 설치해두었습니다. 이 단양쑥부쟁이의 발견으로 현재 공사를 진척하지 못하는 상황이라고 합니다. 환경영향평가 시행서류에 따르면 단양쑥부쟁이를 이식하겠다고 하지만, 다른 환경에서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지의 여부를 전문가들 또한 장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한강유역환경청에서는 이식을 위한 채취를 허가하여 4월 9일,10일 이틀 사이에 단양 쑥부쟁이 18,000여 개가 채취된 상황입니다.

 

"추측해보면 예전에는 우리 나라 전역에 쑥부쟁이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이 곳에서만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 전역은 강바닥을 다 뒤집어엎었다 이렇게 생각됩니다. 공사를 시행하는 측에서 단양 쑥부쟁이 개체수 전수조사를 했다고 하지만 위치가 틀립니다." 이항진 집행위원장의 말이다.

 

버드나무는 베어졌으나 아직 죽지 않고 새싹을 피워내고 있었으며 갈대 숲 사이로 고라니가 뛰어가는 모습을 두 차례 볼 수 있었고 발자국과 똥도 발견했습니다. 여주 지역 여강에는 총 3개의 보가 설치될 예정입니다. 이포보,여주보,강천보가 생긴다. 각각의 보 간격은 각각 10km이며, 물놀이를 할 수 있는 곳 등을 조성하기 위해서 깊이 모래를 파내고 있는 상황입니다.

 

또한 고라니와 물고기 또한 살 곳을 잃게 되어 어디론가 떠나야만 하는 상황이 됩니다. 앞으로의 공사 계획은 강변 한쪽을 5월말까지 준설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바위늪구비를 지나 여울이 있는 강가에 도착하였습니다. 아래쪽으로는 하중도를 파내고 있는 공사현장이 위치해 있었습니다. 최병성 목사의 진행으로 어떤 물고기가 살고 있는지 과찰해보려 했으나 물고기는 없었습니다.

 

  
▲ 강의 여울 여울은 물을 정화하는 기능을 하고 물고기의 삶터가 되는 곳입니다. 그렇지만 강 바닥을 파내고 보를 설치하면 여울은 없어지고 생태계는 엄청난 변화가 생길 것입니다.
ⓒ 김하나
여울

 

 

"물 속에서는 공기 중보다 소리가 더 잘 전달됩니다. 공사 소음 때문에 물고기들이 이미 다른 곳으로 이동을 한 것 같습니다. 여울이 있어서 강이 산소를 공급받아 정화가 되는데, 보를 만들게 되면 그럴 수가 없게 되고, 여강에서만 볼 수 있는 어종이 사라지고 결국 붕어,잉어, 베스, 블루길만 남을 것입니다."

 

최병성 목사의 말씀입니다.

 

"우리나라 물고기는 대부분 얕은 물에 살고 우리나라에만 있는 희귀한 돌상어 같은 물고기는 여울이 있는 곳에서 삽니다. 그리고 물고기는 알을 자갈 밑에 낳습니다. 따라서 여울이 있어야 물고기가 삽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을 파괴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이명박 대통령이 4대강 사업으로 수영하기 좋은 물을 만들겠다 라고 하는데 한강 평균 수심 3m, 낙동강은 8.5m로 팝니다. 수영을 하시겠습니까? 할 수 있겠습니까? "

 

여울을 지나 점심을 먹고 여주 신륵사에 당도하였습니다. 여주 신륵사 강변에 여강선원을 개원하고 4대강 사업 반대 운동을 펼치고 있는 수경스님은 4대강 사업을 보는 자신의 관점과 우리가 해야할 일이 무엇인가에 대해 이야기하였습니다.

 

  
▲ 수경 스님의 말씀 신륵사 내에 여강선원을 개원하고, 4대강 사업의 문제점을 알리는 활동을 펼치고 있는 수경 스님을 뵈었습니다.
ⓒ 김하나
수경

 

 

"예수님 부처님의 이야기가 아니라 내 자신의 이야기로 내 자신의 삶을 표현한다고 하는 것이 자신이 없고 다만 현상적인 이야기보다는 생명이니 뭐니 하는 이야기보다는 지금까지 우리가 살아온 자신의 삶을 한 번 뒤돌아보면서 삶의 의미를 내밀하게 성찰하는 일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오늘 하루 자기가 살아온 생활, 아침에 일어나서 눈 뜨고 세수하고 밥 먹고 여기까지 오셔서 말씀 하시고 들으시고 점심 먹고 오셨는데 앞으로 전개되는 이런 저런 일을 느끼고 보고 생각하는 것이 우리 하루의 삶인데 이런 하루의 삶을 정말 내밀하게 살펴볼 줄 알아야 그래야 삶의 문제를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자기 자신 안에 있는 욕망이라든지, 분노라든지, 어리석음의 내용이 현상적으로 드러나는 것이라고 전 생각하거든요. 한 두 사람의 문제는 아닙니다. 이명박 대통령의 문제라고는 안 봐요. 다만 이명박 대통령은 대한민국을 책임져서 이런 여러 상황을 올바르게 문제를 진단하고, 조정하고 통합하고 풀어가야 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분에게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지 드러나는 현상은 이명박 대통령만의 문제는 아닙니다.

 

우리 사회, 한반도에서 살고 있는 우리들의 삶의 내용이 이렇게 표출되고 있는 것이거든요 그러기 때문에 자기 자신의 삶을 내밀하게 진단하고 성찰하지 않는 한 풀리지 않습니다. 우리 스스로가 하루하루의 삶을 내밀히 살펴볼 줄 알아야 삶의 문제를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삶의 문제에 대해 진지해져야 하고 적나라하게 드러나지 않으면 밖의 현상을 제대로 바라볼 수 없습니다. 4대강 사업을 통해 우리가 살아온 삶의 모습을 점검해봅시다. 그것이 4대강 사업을 정확하게 인식하고 풀어갈 수 있는 계기를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이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제가 입은 이 옷이 죄수복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중 노릇을 제대로 하면 이 옷이 복전의가 되어 서로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지혜를 주는 옷이어야 하는데 죄수복이라는 느낌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은혜를 갚으며 살아가는 것인지 몸부림치고 방황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 땅과 물의 뭇생명을 위로하는 수륙대제 뭍과 육지에서 헤매는 영혼을 위로하기 위한 수륙대제를 지냈습니다.
ⓒ 김하나
수륙대제

 

이후 여강선원 바로 아래 공터에서 물과 육지에서 헤매는 외로운 영혼들을 위로하기 위해 불법을 강설하고, 음식을 베푸는 수륙대제를 지냈습니다. 바로 옆을 흐르는 강의 위쪽에서는 공사가 현재 진행중입니다. 스님의 바라춤과 승무에 이어 발원문을 낭독하며 제사를 갈무리하고  남한강 근처에 살고 있는 시인 홍일선의 시 낭송('첫시를 쓰던 첫마음으로 돌아가야 하리')과 제천 간디학교 학생들의 참여 소감을 들었습니다.

 

마지막으로 행사 진행팀의 일원인 이선화씨가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도시에서만 살아서 아무 생태 감수성이 없던 제가 여기 2주간 있으면서 단양쑥부쟁이를 눈여겨 봤더니 정이 들어서, 이식한다는 이야기를 들으니까 속이 상하더라구요. 경쟁력이 떨어지는 식물이라서 다른 식물들과 같이 살면 못 살아남아요. 그래서 척박한 곳에 터전을 잡아요. 이식을 하는 것은 그 식물이 거기 살 수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면서 새로운 경쟁으로 다시 내모는 거지요.

 

그게 비단 단양 쑥부쟁이만의 일일까요? 여기 오신 분들이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을까봐 걱정이 돼요. 故 김대중 대통령이 하신 말씀 중에 '행동하지 않는 양심은 양심이 아니다. 하다 못해 벽보고 욕이라도 해라' 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는데 그 말이 되게 인상깊더라구요. 글로 쓸 수 있는 분은 글로 쓰시고 밥 먹는 시간에 계속 주변 사람들에게 말씀해주셨으면 좋겠어요. 4대강 사업이 이렇게 되어가고 있다고 계속해서 많이 말해주면 좋겠어요.

 

그리고 많이 여기를 오셨으면 좋겠어요. 아무 생태 감수성이 없던 제가 2주 머물면서 정이 들었는데, 여러분도 하루라도 오면 다르다고 생각하거든요. 다른 분들 안내해주셔서 이쪽으로 오시면 제가 여기 와서 매일 모니터링하고, 안내하거든요. 얼마든지 안내해드리고 모든 최선과 열정을 다해서 안내하고 소개해드릴테니까 주변 사람들 알려주셔서 오게 해 주세요.여기 있는 분들 다음에 또 뵙고 다른 분들과 같이 또 뵐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행사를 마친 후 참석자들은 예도 통천의 풍물을 따라 강을 따라 걸으면서 하루의 여정을 마무리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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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사를 위한 일

이 아니라

자발적인 뭔가 즐거울 것 같은 일..을 하고 싶다.

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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