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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스트... 한국을 대체 뭐로 아는 거냐?

1. 김윤진 - 극중 이름 <선> - 은 어쨌거나 "회장님" 소리를 듣는 사람의 딸로 나온다. 가든파티를 여는 장면이나 남편인 <진>과 아버지인 "회장" 사이의 관계를 보더라도 결코 범상한 신분은 아니다. 그러나 정작 그녀는 남편과 아버지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영어를 배우기 전까지는 영어를 하지 못한 것으로 나온다. 어쩔 수 없는 상황에 의해 그녀 스스로 영어를 할 수 있음을 밝히기까지 남편인 <진>이 전혀 알아채지 못했을 정도로.

 

우리나라 재벌집안 교육이 그렇게 형편없었나? 하긴 <루루공주>를 보면 재벌집안 여자들은 덜떨어진 바보로 나오기는 하지만, 아무래도 그런 여자가 영어 하나 못할까? 최소한의 단어 정도는 알아들어야 하는 것 아닌가? 영어를 한다고 해서 <진>이 놀라거나 자존심 상해 해야 할 이유도 없고 말이다.

 

 

2. 더 압권인 것은 <선>의 남편이자 <선>의 아버지인 "회장님"의 보좌관까지 되는 남편 <진>이 영어를 전혀 못 한다는 것. 아주 간단한 단어조차 알아채지 못한다. 진짜 아주 간단한 생활영어조차 못한다. 뗏목을 타고 섬을 떠날 때 김윤진이 그를 위해 만들어 건네준 영어단어장을 보면 아마 무어라 말이 나오지 않을 것이다. 그런 아주 간단한 단어를 일부러 단어장까지 만들어 건네주다니.

 

무엇보다 한국의 영어교육은 아주 지랄맞은 데가 있어서 중학교만 졸업하면 어느 정도 간단한 회화는 가능하다. 영어교육 어떻네 하고 난리를 피우지만 우리나라 중학교 영어 교과서 무척 잘 되어 있다. 최소한 영어시간에 졸지만 않았다면 아주 간단한 일상적인 대화 정도는 나눌 수 있다. 인사를 한다거나, 밥을 먹는다거나, 아니면 최소한 내가 지금 어떤 상황인가를 설명하는 데는 무리가 없다. 더구나 <선>은 "회장님"의 딸이고, <진>은 그런 <선>의 남편이자 "회장님"의 사위이지 않은가 말이다.

 

 

3. <선>의 아버지가 경영하는 회사라는 것도 수상쩍기는 마찬가지다. 환경부 차관의 집에 총을 든 킬러를 보내지 않나, LA의 정체불명의 거래처에 심부름을 시키지 않나, 이건 무슨 기업의 회장이라기보다는 조폭의 보스와도 같은 모습이다. 그러나 최소한 드라마상에 나온 모습으로 <선>의 아버지는 조폭의 보스가 아니다. 마치 80년대 홍콩느와르에서 일상적으로 나오던 비밀결사와 결탁한 기업가의 모습 그대로다.

 

 

4. 환경부 차관이라는 사람이 사는 집이 참 멋지다. 일본풍이지? 분명 일본풍이다. 어찌 보면 고증이 잘 되었다고도 할 수 있다. 한국의, 특히 엘리트라 불리우는 사람들 가운데 일본 마니아들이 많이 있으니까. 그 환경부 차관이라는 이도 일본 마니아였던 것일까? 사는 집을 온통 일본식으로 치장해 놓고 살 정도로?

 

 

5. "회장님"의 심부름을 온 사람에게 딸의 개를 빼앗아 선물하는 센스는 또 뭔가? 한 나라의 환경부 차관 쯤 되는 이가 아무렴 선물로 줄 게 없어 딸의 개를 뺏어서 선물로 주나? 우리나라 환경부 차관 월급이 그렇게 짠가? 아니 환경부 차관에게는 뒷줄로 들어가는 돈 없어? 무엇보다 기르던 개 받으면 뭐가 좋은가? 아무래도 수상쩍다. 거기서 왜 하필 개를 선물로 준 것일까? 그것도 기르던 개를. 북한에서 일부러 차로 개를 치어 당간부에게 뇌물로 바치곤 했다는 말이 떠오른 것은 왜일까?

 

 

6. 환경부 차관을 죽이라고 "회장님"이 보낸 킬러. 무려 총씩이나 들고 있다. 믿겨지는가? 총을 들고 있다. 총을 들고 행정부 관료를 죽이려 하고 있다. 어디 동남아시아나 남미의 거의 무법지대에 가까운 나라들을 연상한 모양이다. 마피아가 태연히 고위관료를 암살하고, 검찰이 오히려 범죄조직을 두려워하는 행정공백의 저개발국가를 생각하고 묘사한 것이 분명하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최소한 길 가다 총 맞아 죽을 일 없는, 그랬다가는 환경부 차관이 아니더라도 큰 뉴스가 될 수 있는 나라라는 건 개념이 없는 모양이지?

 

 

7. <진>이 아내에게 죽었다고 거짓말 했던 아버지를 찾아가는 장면. 좋다. 어촌 풍경이라는 게 여러가지 있으니까 나무로 얼기설기 짜맞춘 선착장이라든가, 선착장에 아무렇게나 걸려 있는 물고기들은 그러려니 하겠다. 그런데 그 아버지 등 뒤로 둥실 떠다니는 돛단배는 무언가? 돛단배다. 분명 돛단배다. 돛도 단 배가 아니라 돛을 단 배다. 우리나라에서 마지막으로 돛단배를 타고 물고기를 잡은 것이 언제였을까?

 

 

8. 한국 남자에 대한 표현도 아주 지랄이다. 아무렴 요즘 남자가 아내가 비키니 좀 입었다고 그렇게 난리치나? 한국 남자가 조금 - 아니 많이 가부장적이기는 해도 바닷가에서 비키니 입고 물에 뛰어드는 것 가지고 그렇게 지랄거리지는 않는다. 물론 아주 없는 것은 아니지만 최소한 30줄 안쪽에서는 그런 남자 그리 많지 않다. 더구나 한국 남자들은 체면을 무척 생각하기 때문에 아무리 마음에 안 드는 일이 있어도 집 밖에서 그렇게 노골적으로 말하고 행동하지는 않는다는 말이다.

 

 

9. 김윤진의 캐릭터도 웃기기는 마찬가지다. 학원에서 영어를 배워야 했던 김윤진이 놀랍게도 식물의 전문가다. 정확히는 약용식물의 전문가. 도대체 어디서 배운 것일까? 한국인은 모두 허브의 전문가라 생각하는 것일까? 영어는 못해도 비전으로 전해받은 식물에 대한 전승이 따로 있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마치 일본 만화에서 "중국 3천년의 비전"이라는 말로 모든 것을 합리화시키는 것이 생각나 웃음부터 난다.

 

 

10. 내가 미국 드라마나 영화를 아주 안 본 것은 아니지만 이렇게까지 엉망으로 묘사한 작품은 보다보다 처음이다. 일본식 집에, 돛단배가 떠다니는 어촌에, 총을 들고 관료를 죽이려는 킬러에, 한국에서도 시대착오적인 가부장적 남성에, 무엇보다 어떻게 "회장님"씩이나 되는 이의 딸과 사위가 영어 한 마디 하지 못하는가 말이다. 한국이라는 나라가 얼마나 우습게 여겨졌으면 이따위로 묘사했을까?

 

새삼 세계에서 한국이라는 나라가 어디 있는지조차 모르는 사람들이 대다수라는 말이 현실에 와 닿는다. 하다못해 한국이 어디에 붙어 있는 나라고, 한국에 대해 최소한의 경험이나 지식이라도 갖고 있는 사람들이 주위에 있었다면 이런 식의 어처구니 없는 묘사는 없었을 텐데. 아니 그보다 한국이라는 나라가 미국인들에게 어떻게 인식되어지고 있는가 조금은 엿볼 수 있게 되어 입맛이 쓰다. 역시 미국에게 한국은 그렇게 우스운 것일까? 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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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한 고양이 쿠로... 별로 유쾌하지 않은 동화.

이 만화를 단정지어 말하자면? 동화다. 말 그대로 동화다. 고양이를 주인공으로 한. 고양이의 세계를 다룬. 그림도 딱 동화풍이다. 동화의 삽화를 보는 듯 단순하면서도 분방한 그림에 귀여운 캐릭터들. 컷 하나하나가 동화의 삽화를 보는 것 같고 그래서 어느새 아무런 거부감 없이 쿠로의 세계로 빠져들게 만들어 버린다.

그러나 아름답고 즐겁기만 한 동화냐면 그것은 결코 아니다. 태어나서 얼마 안 되어 쿠로는 자신의 형이 누군가에 의해 강제로 끌려가는 것을 보게 된다. 그리고 얼마 안 있어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종이박스에 담겨 두 동생과 함께 버려진다. "털보"에게 구해지기는 하지만 그때 이미 남동생은 죽어있는 채였다. 아직 젖도 채 떼지 않을 나이에 어미로부터도 형제로부터도 떨어진 채 죽음마저 경험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그런 쿠로의 경험은 오렌지의 일가를 만나면서 더 처절함을 더한다. 어미인 양 여겼던 오렌지의 어미는 차에 치여 목숨을 잃는다. 남겨진 오렌지와 마다라, 하이이로는 어미의 보호 없이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남아야 했고, 그것은 아직 어린 새끼인 그네들에게는 너무나도 처절한 싸움을 통해 살아남는 법을 배워간다. 쿠로가 사는 집에 몰래 들어와 먹이를 얻어먹으려다 "털보"에게 얻어맞는 하이이로를 보는 쿠로의 모습은 그래서 차마 볼 수 없이 애처롭기만 하다.

이처럼 처절하던 오렌지들의 투쟁은 여우여인에 의해 오렌지가 거둬지면서 한 차례 일단락된다. 거칠고 난폭한 숫코양이이던 오렌지는 편안한 쉼터와 맛있는 먹이를 얻은 댓가로 거세되고 발톱마저 잃는다. 쿠로의 여동생 칭코에게 관심을 보이던 숫코양이인 오렌지는 더이상 숫코양이가 아니게 된 채, 항상 다투던 쿠로에게마저 배를 드러내야 하는 한심한 처지가 된다. 그럼에도 결코 여우여인의 품을 떠날 수 없는 것은 차라리 그것이 나을 정도로 산다는 것이 힘들기 때문일 것이다.

오렌지에게 닥친 재앙은 마찬가지로 칭코에게도 닥치는데, 그토록 좋아하고 따르던 보스 마시로와 관계를 갖기 시작한 지 얼마만에 털보는 칭코에게 불임시술을 해버린다. 역시나 숫코양이가 아니게 된 오렌지와 마찬가지로 칭코 역시 더 이상 암코양이가 아니게 된 것이다. 결국 보스 마시로도 암코양이가 아닌 칭코에게는 더 이상 관심을 보이지 않고, 발정기에 보스 마시로의 새끼를 밴 것은 칭코가 아닌 둔한 마다라였다. 그것을 보는 칭코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그렇게 태어난 마다라의 새끼 네 마리 가운데 살아남은 것은 단 두 마리. 한 마리는 태어나서 얼마 안 있어 더 이상 움직이지 않게 되어 버리고, 다른 한 마리 코마다라는 무심코 도로에 나섰다 차에 치여 형체도 알 수 없이 죽어 버린다. 그러고 보면 쿠로의 남동생도 종이박스 안에서 차게 식어버렸다. 쵸비라는 한 달 만에 버려진, 어미만 찾다 목소리마저 잃어버린 새끼 고양이도 추운 겨울 추위를 이기지 못하고 얼어죽었었다. 고양이의 새끼란 참으로 약하고 약해서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죽어버린다.

그래서 하이이로는 맛도 없는 먹이와 종이박스로 만든 허름한 집으로도 낡은 아파트에 사는 할아버지 곁에서 행복할 수 있었던 것이리라. 맛이 없어도 굶주리지 않아도 되었고, 허술해도 의지할 곳이 있으니 그것만으로도 행복할 수 있었던 것일 게다. 그래봐야 얼마 지나지 않아 낡은 아파트가 헐리면서 한 차례 봄날의 꿈이 되어 버리기는 하지만 말이다. 살아간다는 것은, 그것도 의지할 곳도 보호해줄 누군가도 없이 살아간다는 것은 그만큼 처절하고 잔인한 일인 것이다.

묘한 고양이 쿠로는 그 처절하고 잔인한 삶을 너무나도 담담하게, 소름이 끼칠 정도로 냉정하게 따뜻한 애정이 담긴 눈으로 그려낸다. 그래서 동화는 너무 아름답고 또 너무 잔인하다. 너무나도 쉽게 죽어 버리는 새끼고양이들이나, 작은 인정에 목말라 하는 들고양이들이나, 인간의 편리를 위해 당연한 본능마저 당연하지 않게 되어 버린 고양이들은 너무나도 아무렇지도 않게 그려지고 있어 어느새 메이도록 슬픈 감정이 북받쳐 오른다.

더구나 나는 고양이를 기르고 있다. 너무나도 사랑스러운 고양이가 바로 내 주위에 두 마리나 있다. 아직 작기만 하던 새끼 때 종이상자에 담겨 우리집에 오던 모습을 아직도 기억한다. 겁에 질려 감히 종이상자 밖으로 나오지도 못하고, 쓰다듬어주려 손을 내밀어도 겁먹어 컁컁거리던 그 작고 어리던 녀석들의 모습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그래서 남의 이야기 같지가 않다. 어쩌면 그저 그런 만화 가운데 하나였을지도 모르는 이 만화가 이토록 가슴에 와 닿는 것은 그 때문일 것이다. 쿠로에게서, 칭코에게서, 오렌지에게서, 우리집 쭈르기와 꼬맹이의 모습을 발견한 때문일 것이다.

만화로서도 매우 완성도가 높다. 허술해 보이지만 결코 허술하지 않다. 단순해 보이지만 단순하지도 않다. 담담하고 냉정하면서도 따듯하고 유쾌한 감정이 넘친다. 한참 고양이 쿠로를 따라가다 보면 마치 나 자신도 고양이 쿠로가 된 양 고양이의 세계에 빠져들 수도 있다. 분명 좋은 만화다. 그림도 딱 적당하고, 이야기들도 맛깔나다. 연출도 동화와도 같은 만화의 내용을 아주 잘 받쳐주는 딱 그대로의 연출이다. 너무 완성도가 높아 읽는 것조차 부담스러운 그야말로 수작이라 하겠다.

한 번 씩들 읽어보시라. 재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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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영식 선생이 돌아갔다.

흔히 사람들은 신영식 하면 소년신문에 연재되었던 네컷만화 똘배를 떠올린다. 그만큼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는 뜻이리라. 하긴 언제부터인가 똘배가 신영식 선생의 대표캐릭터가 되어 이런저런 여러 만화에 등장하기도 했었으니까.

 

그러나 나의 경우 신영식 하면 똘배보다도 액션만화작가로서 먼저 기억한다. 이근철 선생이 어느새 만화방에서 보이지 않게 되어 버린 이후, 한국액션만화의 정통을 이었던 작가로서. 치밀한 상황설정, 박진감넘치는 연출, 그리고 디테일하면서도 스케일 큰 스토리까지. 아직도 그 뒤를 잇는 작가가 나오지 않았다 할 정도로 그의 액션만화는 그야말로 독보적이었다.

 

한 가지 아쉬움이 있다면 그 만화 상당수가 반공이데올로기를 담고 있다는 것. 하지만 그조차도 그 시대 상황을 고려한다면 그리 흠잡힐 일은 아니다. 아니 오히려 액션만화 작가로서 아주 훌륭한 소재인 반공과 냉전이라고 하는 현실을 만화로서 잘 구현해냈다고 하는 데에서 진정한 액션만화의 대가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도 감히 그 뒤를 이을만한 작가가 나오지 않았을 정도로.

 

1950년생. 올해 나이 우리 나이로 57살이다. 만으로는 56살. 환갑을 넘기는 것이 그리 특별한 일이 아니게 되어 버린 요즘 너무나도 이른 나이다. 하는 일 없이 밥이나 축내는 어떤 이들에 비해서 너무나도 너무나도 이른 이른 나이다. 하늘이 그의 재능을 시기한 것일까? 아니면 더 이상 그의 자리가 없음을 안타까워한 것일까? 그 재주와 그 작품에 어울리지 않게 소리없이 어느 한 순간 모습이 보이지 않는가 싶더니, 이렇게 너무도 일찍 세상을 등지고 말았다.

 

아직도 그 감동을 잊지 못하고 있는데. 그 흥분과 그 전율을 아직도 또렷이 떠올릴 수 있는데. 제목도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그 많았던 만화 가운데에서 오로지 그만의 치밀하고 박력있는 장면 장면을 아직도 하나하나 기억하고 있는데. 그런데... 그런데... 그런데... 아직 더 많은 것을 보여줄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게 되었다. 이제 추억만이 그의 자리를 대신하게 되었다.

 

고우영... 박봉성... 이제는 신영식까지... 어린시절 나를 울고 웃게 만들던 그 대단하던 만화가 선생님들도 이렇게 세월속에 하나둘 사라져 가는 것일까? 이제 또 누가 다시 그들의 뒤를 이을까? 세월의 무상함이 몸서리쳐지도록 시린 밤이다. 

 

시간은 너무도 무정하고 무심하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부디 극락왕생하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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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잔인하다.

오늘 11시경 전기가 나갔다. 그리고 12시 조금 안 되어서인가 다시 전기가 들어왔다. 배터리에 의지해 노트북으로 토닥토닥 글을 쓰고 있으려니 전기가 들어오고 얼마 안 있어 전화벨소리가 울린다. 동생이다.

"오빠, 나 무서워. 내려와!"

서른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어서도 막내는 역시 막내다. 몇 번 퉁기다 끝내 못 이긴 체 옷을 챙겨입고 아래로 내려갔다. 그런데,

"오빠!"

라고 나를 외쳐 부르는 동생의 발밑에 뭔가 하얗고 검은 것이 꾸물대고 있다.

"고양이잖아?"

고양이였다. 배는 하얗고 등은 검은 아주 작은 고양이. 작고 부드러워 무척이나 귀여운 고양이였다.

"웬 고양이냐?"
"몰라. 아까부터 자꾸 나를 쫓아와 달라붙어..."

보아하니 집고양이다.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들고양이는 결코 사람을 따르지 않는다. 아무리 먹이를 주며 꼬드겨도 결국에는 사람이 무서워 경계하고 도망가는 것이 들고양이다. 이렇게 사람을 따른다는 자체가 사람의 손을 탄 적이 있는, 사람이 길렀던 집고양이라는 증거다.

"누가 기르던 것일까?"
"누가 버렸겠지."
"그냥 길 잃은 거 아냐?"
"아파트 현관 앞에 쪼그리고 앉아 울고 있었다며? 잃어버린 사람이 있었다면 알아서 찾아갔겠지."

어찌나 울어댔는지 고양이는 울지도 못할 정도로 목이 쉬어 있었다. 내게도 다가와 몸을 부비기에 살며시 쓰다듬어 주었더니 애처로울 정도로 말라 있다. 튼튼하다 못해 비만인 우리집 고양이에 비해 아예 뼈조차 만져지지 않을 정도로 너무도 너무도 말라 있었다.

"배고프겠다."
"그렇겠지. 요즘처럼 추운 날 들고양이가 먹을만한 게 뭐가 있겠냐?"

더구나 우리 아파트는 철도와 도로로 외부로부터 고립되어 있어 사람이 다니기조차 힘들다. 고양이야 얼마든지 오갈 수 있을 지 모르지만, 그래도 먹이를 찾자고 이리저리 돌아다니기엔 무척 불리한 구조다.

결국 고양이가 먹을 수 있는 건 아파트에서 나오는 음식물 쓰레기 뿐. 그러나 그조차도 대부분은 분리수거한다고 따로 음식물쓰레기 수거함에 모아 처리하고, 그나마 고양이가 먹을 수 있는 음식물쓰레기조차 이렇게 추운 날씨에는 얼어버리기 쉬우니 그렇게 작고 약한 고양이로서는 먹을 것을 찾는다는 자체가 무척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먹이 주면 안돼. 정들어."

말은 그렇게 하지만 결국 고양이가 안되어서 일부러 집에까지 올라와서 우리집 두 녀석이 먹던 밥그릇에 고양이밥을 가득 담아서 그릇째로 내려가 그 고양이에게 주었다.

"짭짭짭짭짭..."

며칠을 굶었던 것인지 그렇게 애교를 떨며 달라붙던 것이 언제였냐는 듯 고양이는 내가 내려놓은 밥그릇을 보자마자 아예 머리까지 파묻고 게걸스레 고양이밥을 먹어댔다. 우리집 녀석들은 맛 없다고 배고파도 입조차 대지 않는 것을 세상에 이보다 맛있는 건 없다는 양 미친듯이 달려들어 깨물고 앂고 삼켜댔다.

"많이 굶었나 보다."
"응..."

아마 며칠은 굶은 모양이다. 아무리 집에서 길렀던 고양이라지만 어지간히 배가 고프지 않고서야 그렇게 사람에게 달라붙으려 하지 않는다. 그리고 처음 보는 사람이 있는 앞에서 함부로 먹이를 먹지도 않는다. 그만큼 경계심이 강한 동물이 고양이이기 때문이다.

"올라가자."
"하지만..."
"그럼 데려다 기를래?"
"그래도..."
"두 녀석 있는 것도 감당 못해 한다는 거 알지?"
"불쌍하잖아..."
"그래서 감당도 못할 고양이를 하나 더 늘리자고?"

서른이 가까워서도 동생은 여전히 동정심이 많다. 그리고 나는 동정심을 갖기엔 너무 나이가 들어 버렸다. 그토록 싫어했던 어른이 되어 어른의 말을 하고 있다.

"끝까지 책임지지 못할 거라면 너무 가까이 가지 않는 게 좋아. 어차피 녀석은 앞으로도 혼자서 살아가야 할 테니까. 그냥 밥그릇이나 여기에 두고 가자. 당분간 이걸로라도 배를 채울 수 있게."

덜그럭... 덜그럭...

어찌나 열심히 밥을 먹는지 플라스틱 고양이 밥그릇이 이리저리 부딪혀 덜그럭소리를 내는 것을 뒤로 하고 동생과 나는 엘리베이터에 오랐다.

"어떻게 해? 걔가 나 봤어!"
"어떻게 하긴?"

그러고 보니 나도 본 것 같다. 그렇게 열심히 밥을 먹으면서도 힐끗힐끗 나와 동생의 눈치를 살피던 녀석의 모습을. 배보다도 정이 고팠던 것일까? 그래서 그렇게 배가 고픈 와중에도 그나마 짧은 정이나마 베풀던 동생과 내가 그리도 신경쓰인 것일까?

그러나 결국에는 한 순간의 감상. 나는 애써 무시하고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현관으로 들어설 때까지 나나 동생이나 아무말도 할 수 없었다. 그 작고 말랐던 하얗고 검은 고양이 녀석이 눈에 밟힌 때문이다.

"개새끼들...!"

현관문을 들어서며 내 입에서 끝내 참지 못한 한 마디 말이 튀어나오고 말았다.

"뭐가?"
"고양이 버리는 새끼들! 끝까지 책임지지 못할 거면 처음부터 기르지나 말지, 멋대로 데려다 길들여 놓고 사정이 달라졌다고 버려? 씨발! 차라리 신경통에 좋다고 잡아먹는 사람들이 낫다. 그렇게 버리고 나면 고양이들이 어떻게 되는지 알기나 하는 거야?"

들고양이의 평균수명이 대략 3년 남짓이라고 한다. 아니 대부분은 첫해를 넘기지 못하고 죽고, 그나마 아주 운좋은 적은 수만이 두 번째 계절을 맞이할 수 있다고 한다. 그만큼 사람이 사는 도시는 고양이에게는 그리 살기 좋은 환경이 아니다. 사람에게 속하지 않은 고양이에게 있어 서울이라고 하는 도시는 결코 살아가기에 적당한 그런 곳이 아니다.

그런데 집에서 기르던, 사람에게 길들여진 고양이를 그런 도시로 풀어놓는다는 것은 무슨 의미이겠는가? 아니 사람에 의지해 살아가던 고양이를 아무런 준비도 없이 그 살벌하고 황량한 회색정글로 쫓아버린다는 것은 어떠한 의미이겠는가?

화가 치밀었다. 참을 수 없이 화가 치밀었다. 저렇게 고양이를 버리는 인간들에게. 그리고 저런 고양이들이 살아갈 수조차 없는 도시를 만들어낸 인간들에게. 그리고 결국 그런 인간들 속에 살아갈 수밖에 없는 나에게. 이런저런 변명을 하더라도 다른 사람들이나 같이 녀석을 외면하고 돌아서야만 했던 나 자신에게.

인간이란 왜 이리도 잔인한 동물일까? 왜 이리도 제멋대로이고 잔인하면서도 또한 반성을 모르는 동물인 것일까? 저 고양이는, 사람을 저리도 따르는 저 작은 고양이는 이제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한 그릇 가득 담아준 고양이밥으로 당장 얼마간은 먹을 수 있다 하더라도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그리고 고양이를 버린 그 사람은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고양이를 버렸던 것일까?

"씨발!"

욕밖에 안 나왔다. 아무래도 욕밖에 안 나왔다. 어휘력이 딸려서다. 사고력이 딸려서다. 무엇을 이야기하려 해도, 무언가를 생각해내려 해도, 나오느니 오로지 분노로 들끓는 욕지거리 뿐이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욕을 하는 것 한 가지 뿐이었다.

차라리 보지 않았으면 좋았을 것이다. 차라리 처음부터 몰랐으면 좋았을 것이다. 그렇게 버려진 고양이가 있고, 그 버려진 고양이가 어떻게 살아간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그저 보지 않고 듣지 않고 없는 것처럼 그렇게 여기고 살았으면 좋았을 것이다.

오늘은 무척이나 아픈 날이었다. 내리는 겨울비처럼이나 무척이나 우울하고 슬픈 날이었다. 아마도 며칠은 그 고양이가 눈에 밟혀 쉽게 잊혀지지 않을 것같다. 그 고양이를 버린 사람과 그 고양이를 외면할 수밖에 없었던 나 자신과 함께. 물론 얼마 지나지 않아 흔적도 없이 잊혀져 버리고 말겠지만.


제발 기르지는 못하더라도 버리지는 말자. 차라리 기르지 못할 것 같으면 처음부터 기르지를 말자. 버려진 고양이가 어떻게 되어버릴 것인가를 먼저 생각하고, 무책임하게 버릴 것이라면 처음부터 아예 기르지를 말자. 제발, 제발이다. 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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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동을 재미있게 보려면...

야동의 재미는 크게 영상 3: 소리 7로 나눌 수 있다. 역시 남 하는 거 훔쳐보는 건 보는 것보다 듣는 것이다. 믿기지 않으면 당장 사운드 뮤트로 해놓고 야동 돌려보라.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야동은 야사만도 못하다. 야하기는 한데 전혀 흥분이 되지 않는다. 성적인 흥분을 줄 수 없는 야동이라는 게 대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영상은 다시 여배우(혹은 남자배우)의 외모 2 : 동영상의 화질 1로 구성되는데, 남자의 경우는 남자배우의 외모따위 별로 신경쓰고 싶지 않지만, 여자의 경우는 남자배우의 외모는 물론이고 여배우의 외모에도 많은 관심을 기울이므로 이 비율은 성별에 따라 조금 다르다. 여기에 대해서는 나중에 한 번 이야기할 기회가 있겠지.

 

어쨌거나 일단 내가 남자이므로 남자 기준으로 말하자면 북유럽쪽 야동에 나오는 여자들이 가장 예쁘다. 그리고 다음이 동유럽. 남미는 탱글탱글 야성적인 맛이 있고. 영국과 프랑스에서 만들어진 것들은 솔직히 눈으로 보는 재미는 없다. 미국은 포르노산업의 메카답게 스펙트럼이 넓어서 뭐라 하기 애매하지만 눈요기에 좋기로 플레이보이가 가장 좋고 보는 즐거움이 있기로는 허슬러다. 물론 내 개인적인 감상이다.

 

동영상의 화질은 주로 색감으로 나타나는데, 약간 붉은 기운이 도는 화면이 좋다. 모니터로는 색온도가 높은 쪽이 좋고, 그래픽카드로는 라데온이 좋다. 텔레비전은? 모르겠다. 텔레비전으로 야동을 본 것이 꽤 오래전 일이라. 솔직히 텔레비전으로는 조금 에러인 것이 야동이라는 것은 쪼그리고 앉아 모니터에 집중할 때 제맛이 나기 때문이다. 당당하게 텔레비전으로 야동 보고 있으면 왠지 보는 느낌이 나지 않는다. 어두컴컴한 방에서 이불 뒤집어쓰고 보는 야동이야 말로 진정한 야동이다. 아마도 중고딩때의 트라우마 때문일 게다.

 

동영상은 일단 이렇고 소리를 다시 나누면 고음2 : 저음 5로 나눌 수 있다. 흔히 야동이라 하면 뾰족하고 높은 신음소리를 떠올리기 쉬운데, 솔직히 그런 건 이제 갓 야동에 입문한 초심자들을 위한 3류 야동에서나 강조하는 것이고, 진정한 야동의 맛을 즐기려면 저음에 집중해야 한다. 헐떡이는 낮은 신음소리. 쇳소리에 가까운 갈라진 목소리에 질척이며 끈적거리는 마찰음. 그것이야 말로 진정으로 야동을 보는 즐거움이다. 들릴 듯 말 듯 집중하지 않으면 잘 들리지 않는 그 소리에 야동의 진정한 맛이 숨어있는 것이다.

 

결론은 야동을 진정으로 재미있게 즐기려면 사운드, 특히 저음부에 신경써야 한다는 것. 어차피 눈으로 보는 거야 메이커와 출연배우만 잘 고르면 되는 것이니, 보는 입장에서 진정으로 신경써야 하는 것은 사운드인 것이다. 그 가운데서도 중요한 것이 역시 헤드폰. 야동의 사운드는 스피커로 듣는 것이 아니다. 헤드폰 쓰고 불 끄고 이불 뒤집어 쓴 채 눈이 벌개져서 오타쿠 화장실 마려운 포즈로 보는 것이다. 따라서 중요한 건 헤드폰. 헤드폰이야 말로 포르노를 보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요소라 할 수 있는 것이다.

 

돈 좀 되면 사운드카드에 투자해도 좋고, 돈이 조금 더 덤비면 앰프에 돈을 들여도 좋지만, 그래도 역시 마지막에 도달하는 곳은 헤드폰이다. 저음부에 강한, 저음을 확실하게 분리해주는 헤드폰. 야동의 새로운 세계를 맛볼 수 있을 것이다.

 

 

 

잘리려나? 이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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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담의 리얼함...? (1)

흔히들 건담의 중요한 설정 가운데 하나인 뉴타입을 "우주시대에 맞게 진화된 새로운 인류"라 정의한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최초의 뉴타입이라는 라라아 슨은 콜로니가 아닌 지구, 그것도 인도의 한 뒷골목 출신이다. 토미노 요시유키의 소설판을 보면 인도의 한 뒷골목에서 몸을 팔다가 샤아를 만나면서 지온에 들어오게 되는데, 아무로에게 마음을 끌리면서도 끝내 샤아를 지키기 위해 죽어야 했던 이유가 바로 그때 그녀를 구원해준 것이 샤아였기 때문이었다.

 

하사웨이 노아 역시 지구 태생이다. 아버지인 브라이트 노아도 지구출신이고 어머니인 미라이 야시마도 지구연방의 명문 출신이다. 태어난 곳도 역시 지구. 1년전쟁이 끝나고 지구로 돌아간 미라이와 브라이트 사이에서 태어나 <역습의 샤아>까지 지구에서 자랐다.

 

<역습의 샤아>에서 최악의 패륜녀로 악명을 높인 퀘스 파라야 또한 지구인. 그녀의 아버지는 지구연방의 고관이고, 그녀 역시 샤아와의 협상을 위해 우주로 향하는 아버지를 따라 셔틀에 오르기 전에는 우주로 나와 본 적이 없다.

 

그나마 스페이스노이드라 할 수 있는 초기 뉴타입이자 최강의 뉴타입 아무로 레이도 스페이스 노이드 1세다. 지구출신인 양친이 사이드7으로 이주해 와서 낳은 자식이 아무로 레이다. 진화라는 것이 과연 단 1세대만에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일까?

 

카뮤 비단이나 쥬드 아시타에 대해서는 패스. 얘들에 대한 설정은 아직까지는 없으니까.

 

물론 하만 칸이나 파프테마스 시로코의 경우는 완벽한 우주태생의 뉴타입들이다. 시부크 아노 또한 스페이스노이드로서의 뉴타입이고. 그런 점에서 우주세기의 새로운 인류 뉴타입이라는 설정은 그럴싸해 보이기는 한다. 그러나 앞서 설명한 그렇지 않은 초기 뉴타입들은 어떻게 설명할까?

 

사실 78년 방영되기 시작한 <기동전사 건담> 방영분 초기에는 뉴타입이라는 존재는 거의 언급되지조차 않는다. 아무로 레이가 모빌슈츠에 타자 마자 메뉴얼 한 번 훑어보고 조종하는 것을 두고 뉴타입 어쩌고 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것은 <마징가 제트>에서의 카부토 코지도 마찬가지였다. 설정상 아버지 템 레이의 작업을 옆에서 훔쳐보면서 건담에 대한 데이터를 이미 알고 있었다고 되어 있으니 굳이 뉴타입이어야 할 이유는 없다.

 

사실 뉴타입이라고 하는 것 자체가 토미노 감독의 전작 <라이덴>에 등장하던 초능력의 아류에 불과하다 할 수 있다. 전체주의의 영향인지 일본에서는 초인을 소재로 한 만화나 애니메이션이 오래전부터 상당히 널리 유행하고 있었는데, 로봇이라고 하는 비합리적인 설정을 정당화하기 위한 수단으로써 로봇 애니메이션에서도 자주 사용되곤 했었다. 이를테면 <단바인>의 오라배틀러라던가, <라이덴>의 주인공 아키라의 초능력과 같은 식으로. <파이브 스타 스토리즈>에서의 기사라는 존재도 그와 같다. 뉴타입이란 단순히 그러한 연장에 불과한 것이다.

 

그래서 초기 뉴타입은 사람들의 환상과는 달리 지구인이거나 우주이민 1세대였고, 오히려 우주세기의 사람들 가운데에서는 강력한 뉴타입이 드물게 나타나고 있다. 심지어 역습의 샤아에 이르면 등장하는 뉴타입 가운데 절반 - 하사웨이와 퀘스 - 이 지구인이기까지 하다.

 

이러한 모순을 제작진에서도 뒤늦게나마 깨달은 것인지 최근 개봉된 극장판 를 보면 뉴타입에 절망하는 올드타입의 한계를 보여주던 캐릭터 라이라 라이라에게 뉴타입을 연상시키는 모습을 부여한다. 결국은 <기동전사 z건담>의 초기설정을 극장판에서 부정하지 않으면 안 되었을 정도이니 그 모순이 얼마나 큰가를 알 수 있다.

 

우주세기를 위해 새로이 진화된 인류라고 하는 뉴타입. 그러나 정작 뉴타입 가운데 스페이스 노이드보다는 지구인 - 어스노이드, 혹은 스페이스 노이드 1세대가 더 많았던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지구의 중력에 사로잡힌 영혼" 어쩌구 주절거리는 하만과 샤아의 모습이 몹시도 공허하게 느껴지는 것은 비단 나만은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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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우라 켄타로의 만화를 안 읽는 이유...

아마 만화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라도 베르세르크의 이름은 알 것이다. 박력 넘치는 그림, 치밀함과 스케일을 고루 갖춘 스토리, 생동감 넘치는 캐릭터, 더구나 그 처절하기까지 한 리얼함까지... 그야말로 최고의 만화 가운데 하나라 할 수 있는 작품이 바로 이 베르세르크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나는 이 만화를 읽지 않는다. 해적판으로 우리나라에서도 꽤나 일찍 이 만화를 발견한 사람 가운데 한 명임에도 말이다. 이유는 이 작가의 다른 만화들 때문이다.

 

청랑이라는 만화가 있다. 두 권짜리이던가? 소꿉친구인 남녀 고등학생 둘이 삼국지 시대로 타임슬립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다룬 만화 용랑전과 비슷한 컨셉으로, 역시 비행기를 타고 가다 12세기 몽골로 떨어지는 소꿉친구 남녀 고등학생을 주인공으로 하고 있다. 물론 이 정도야 다른 만화나 소설, 영화 등에서도 많이 단골로 사용하는 설정이니 표절이라 할 수도 없고, 특별히 그러한 점이 문제가 될 이유는 없다. 내가 문제시 여기는 것은 다른 부분이다. 바로 주인공 남녀가 12세기 몽골에서 만나는 인물. 칭기즈칸이다.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일본인 가운데는 이 칭기즈칸이 일본인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그 모델은 12세기 일본의 역사를 크게 뒤바꾼 겐페이 합전의 영웅 미나모토노 요시츠네. 겐지의 토료 미나모토노 요시토모의 아홉번째 아들로써 배다른 형인 미나모토노 요리토모를 도와 당시 일본을 지배하고 있는 헤이케를 무너뜨리고 가마쿠라 막부를 세우는 데 크나큰 공을 세운 인물이다.

 

그는 단순히 능력만 뛰어난 것이 아니었다. 인품도 훌륭해서 배다른 형이자 가마쿠라 막부를 연 첫번째 쇼군인 미나모토노 요리토모가 그 능력과 인망을 경계하고 두려워해서 그를 배척하고 공격했을 때에도 형제끼리 다툴 수 없다 하여 후지와라의 후원과 많은 무사들의 지지를 업고 있었음에도 저항하지 않고 순순히 죽음을 맞이했을 정도로 정의가 깊고 인정이 많은 인물이었다.

 

그런 인물이다 보니 사람들은 자연히 그의 죽음에 대해 깊은 아쉬움을 가지게 되었다. 그래서 그가 죽지 않고 살아 도망쳤다고 하는 이야기가 어느샌가 모르게 인구에 회자되게 되었다. 지금도 생존설이 끊이지 않고 있는 엘비스 프레슬리처럼. 이미 죽은 지 오래인 사람을 보았다고 하는 목격자가 아직도 나오고 있는 현실이고 보면 그보다 더 정보의 정확성이나 전달속도가 뒤떨어진 시대에 죽었던 사람을 살리는 정도야 일도 아니었다.

 

그런데 그렇게 미나모토 요시츠네의 생존설이 민간에 퍼지던 어느 날 갑자기 일본인들은 그들이 이제껏 경험해보지 못한 기마전술로 무장한 침략자를 맞이하게 된다. 일본인으로서는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말을 타고 칼을 휘두르고, 창을 찌르며, 활을 쏘는 기술을 선보인 그들은 일본인들에게 크나큰 충격이었다. 심지어 몽골의 침략 이전의 일본과 이후가 다르다 할 정도로 일본은 그로 인해 큰 변화를 겪게 된다. 그리고 그때 일본인들은 칭기즈칸의 이름도 함께 전해듣는다. 미나모토 요시츠네가 죽을 무렵 대륙에서 세계의 정복자가 되었던 전설적인 영웅의 이름을.

 

미나모토노 요시츠네는 어딘가 살아 있을 것이다라는 소박한 믿음은 그렇게 그의 죽음과 비슷한 무렵 대륙에서 세계의 정복자가 되었던 칭기즈칸에게로 이어지고, 칭기즈칸이 이끌던 몽골군의 공포스럽기까지 한 힘은 요시츠네의 전설로 덧붙여졌다. 지금도 정설로서 받아들여지고 있는 요시츠네의 신기에 가까운 기마전술이라는 것은 그때에 비로소 완성된 것이었던 것이다.

 

물론 최소한의 상식을 갖춘 사람이라면야 이러한 설을 진실이라고 받아들이지는 않는다. 일본 밖의 세계에 대한 정보에 어두웠던 에도 이전의 시대라면 모를까, 메이지유신 이후 동아시아의 역사와 철학, 과학 등 거의 모든 학문에 선구적 발자취를 남겼던 근대의 일본인이 단순히 전설에 불과한 이야기를 사실로 믿는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 그러나 아주 일부, 극히 특이한 사고를 갖는 사람들은 아직도 그러한 사실을 믿고 있다. 칭기즈칸의 무덤을 찾기 위한 작업에 막대한 돈을 아낌없이 투자할 수 있었던 그들. 누구일까? 바로 일본의 극우다.

 

우리나라에도 그런 사람들이 있다. 검도도 우리나라에서 건너갔다. 종이접기도 우리가 전해준 것이다. 꽃꽃이도 원래 우리의 것이었다. 유도도 고려의 유술이 건너간 것이다. 다도도 고려의 것이 일본에 전해져 정착된 것이다. 등등등... 모든 것의 원류는 한국이며 한국이야 말로 모든 문화의 종주국이라 주장하는 이들. 심지어 일본의 천황까지도 한국인이었다 고집하고 싶어하는 그들. 일본에도 그러한 무리들이 있어, 세계에서 가장 광대한 제국을 일구었던 칭기즈칸을 자신들의 영웅으로 만들고 싶어했던 것이다.

 

미우라 켄타로의 만화 청랑은 바로 그러한 무리들의 역사관과 세계관을 그대로 담은 만화였다. 미나모토노 요시츠네가 몽골고원으로 건너가 칭기즈칸이 되고, 무사시보 벤케이는 그를 보좌하는 제베가 되었다. 하지만 그조차도 주인공 남녀의 아들이 칭기즈칸의 양자가 되어 이후 쿠빌라이칸이 되는 데에는 미치지 못한다. 쿠빌라이의 일본원정을 고향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노력으로 만들어 버렸으니. 우리나라 국수주의자들은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역사딸딸이의 궁극이라 할 것이다.

 

 

물론 이것 하나만 가지고 미우라 켄타로의 정치적 성향을 미루어 짐작한다는 것은 너무 성급할 수 있다. 나 또한 이것 하나만 가지고 문제 삼을 생각은 없었다. 어차피 일본 만화라는 게 작화를 담당하는 만화가와 스토리를 담당하는 스토리작가의 분업화가 확실히 정착되어 있고, 그나마도 편집자의 입김이 강하게 작용하는 체제인 터라 미우라 켄타로 개인의 문제는 아니라 좋게 생각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 뒤에 나온 미우라 켄타로의 단편집에 있었다. 제목이 "지팡구"였던가? 만화의 내용은 아주 단순하다. 핵전쟁이 있었다. 그래서 모든 것이 파괴되고 세계는, 아니 일본은 무정부의 혼란에 빠져든다. 모든 인간들이 절망과 공포로 어쩔 줄 몰라 하는 상황에서 한 사람 구세주가 나탄잔다. 혼란을 질서로 바꾸고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어줄 영웅. 바로 야쿠자다. 믿기는가? 야쿠자게 세계를 구한다.

 

더구나 그 야쿠자가 세계를 구하는 방식이라는 것도 지극히 야쿠자스럽다. 강제된 질서와 그 질서에 복종하는 개인. 일본 만화나 영화, 드라마에서 많이 나오는 와和. 박정희로 인해 우리에게도 많이 익숙한 그것. 초등학교 어린아이들에게조차 제식훈련을 시켜가며 강요하던 바로 그것. 대동아공영권을 외치며 귀축미영을 몰아내기 위해 전선으로 나아가는 병사들에게 일본 대본영이 부르짖었던 그것은 일본이 자랑하는 일본의 혼 야마토 타마시大和魂다.

 

아다시피 일본의 극우는 필연적으로 야쿠자와 맞닿아 있다. 일본 총리 고이즈미의 할아버지도 야쿠자 출신이었다. 야쿠자로서 쌓아 놓은 지역에서의 연고를 바탕으로 중앙 정계와 연줄이 닿아 정치에 입문했던 것이 고이즈미 총리의 할아버지였고, 그것이 고이즈미의 아머지와 고이즈미에게로 삼대에 걸쳐 세습되었던 것이다. 고이즈미 뿐만이 아니다. 뒤져보면 야쿠자와 어떤 식으로든 연관되지 않은 정치인이 없다고 할 정도다.

 

범죄조직이 무슨 극우냐고 할 지 모르지만 원래 범죄조직처럼 극우와 가까운 것이 없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2000년 새역모의 교과서 왜곡 파동 때 손가락을 자르는 퍼포먼스를 벌인 인간들은 바로 그 지역 조폭들이었다. 아니 그 전에 해방공간에 파업 노동자와 사회주의자들을 상대로 백색테러를 저지르던 인간들도 조폭이었다. 왜? 극우의 논리란 바로 조폭의 논리니까.

 

송강호가 그러지 않던가? "내... 내가 그러... 그렇다면 그런 거야! 아... 안 그러면... 배... 배... 배신이야!" 라고. 이게 바로 조폭의 논리다. 의심도 저항도 이탈도 허락되지 않는, 이른바 묻지마 의리, 묻지마 단결, 묻지마 복종이야 말로 조폭이 지향하며 추구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극우주의자들의 - 이라고 쓰고 꼴통이라 읽는다. - 묻지마 민족, 묻지마 국가와 근본적으로 같은 것이다.

 

감히 보스에게 반항하면 안 되듯 국가에게 반항하면 결코 안된다. 강도강간살인마약밀매를 밥먹듯 저지르는 같은 조직원을 형제애로서 감싸주듯, 학살과 약탈을 자행하는 국가와 민족에 대해서도 무한한 애정을 보여야 한다. 국가는 선이며 민족은 진리다. 그것은 결코 의심해서는 안되는 절대가치이며, 거기에서 벗어나는 것은 배신이며 죽음으로 갚아야 할 죄이다. 그래서 지금도 거리에서 마이크로 떠들어대는 인간들은 깍두기머리들이다. 군대라고는 가본 적 없는, 그저 어깨에 힘이나 주고 평범한 사람들을 위협할 줄이나 아는 무리들이 군대를 이야기하고 전쟁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미우라 켄타로의 "지팡구"는 이러한 야쿠자의 속성을 그대로 담아내고 있었다. 매우 긍정적으로. 아마 기억할 것이다. 아놀드 슈왈츠제네거가 주연했던 "유치원으로 간 사나이"라는 영화를. 군대식의 억압과 통제에 길들여지는 아이들의 모습을 미화해 보여주던 끔찍하도록 혐오스럽고 공포스런 영화를. 여기서 아놀드 슈왈츠제네거를 야쿠자에, 유치원 아이들을 혼란에 빠진 인간들에 대입하면 바로 지팡구라는 영화가 된다. 보는 내내 한없이 불쾌하고 끔찍한 만화였다.

 

이 두 편의 만화는 미우라 켄타로라는 만화가에 대한 나의 인상을 결정지었다. 그리고 이들 작품들을 통해 형성된 미우라 켄타로에 대한 인식은 베르세르크에 대한 해석에도 영향을 주었다. 그래서 베르세르크 역시 내게는 무척이나 끔찍한 만화 가운데 하나이기도 하다. 전혀 다른 시대, 전혀 다른 세계, 전혀 다른 캐릭터의, 전혀 다른 만화임에도 같은 작가의 작품이라고 하는 고리는 결코 다르지 않은 느낌으로 여겨지게 했던 것이다.

 

지금도 미우라 켄타로라는 이름을 들으면 청랑이 생각난다. 지팡구도 생각나고. 베르세르크의 주인공 카츠의 압도적인 폭력과 광기에서 "지팡구"의 야쿠자를 떠올린다. 결국에는 폭력과 파괴로서 모든 것을 해결할 수밖에 없는 만화의 내용은 지팡구가 추구하던 그것과 전혀 다르지 않다. 그래서 그의 만화를 읽는 것은 내게 무척이나 큰 고통이다. 즐거워야 할 만화가 고통이라는 것만으로도 읽어서는 안 될 이유는 충분한 것이고.

 

이것이 내가 미우라 켄타로라는 만화가를 싫어하고, 그의 만화를 읽지 않는 별 대단찮은 허접한 이유다. 진짜 싫다. 미우라 켄타로나 그의 만화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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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글쓰기가 싫어져서리...

인터넷에 그저 자유롭게 자기 생각을 글로 끄적일 뿐인 것 가지고 논객이네 뭐네 해가며 편을 가르고 공격을 해대는 데에 질려서 한 두어달 글을 안 썼습니다. 한 번은 아예 제가 올려놓은 글을 비밀번호까지 알아내서 싹 지워버리더군요. 어느날 가보니 게시판에 글이 하나도 안 남아있더라는... 그 순간 등줄기로 사악 차가운 기운이 오르면서 글 쓴다는 게 싫어졌습니다. 그래서 그동안 블로그를 개점휴업하고 있었죠.

 

하지만 이제 준비하던 문화동인홈페이지도 어느 정도 윤곽을 잡아가고, 글로 먹고 사는 주제에 언제까지나 찌그러져 있기도 뭣 해서 슬슬 블로그 운영을 재개할까 합니다. 단 블로그 수는 줄여서요. 진보넷과 야후와 경향신문에 각각 하나씩, 전혀 다른 주제로 블로그를 운영할까 합니다. 진보넷은 이제까지 하던 대로 주로 대중미디어 관련 블로그로 할 생각이구요. 뭐 봐주는 사람들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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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로 만든 더블제타 건담...

1. 에르 비아노가 갑자기 비차에게 마음을 주기까지의 중간과정이 생략되어 있다. 46화에서 출격하기 전 비차가 따뜻한 한 마디를 건낸 것에서 갑자기 감정반전. 이전까지 쥬도에게 마음을 주고 있던 건 어떻게 된 거냐? 비차가 에르 비아노에게 마음이 있다는 거야 쥬도의 "비챠와 에르를 두고 다투고 싶지 않아."라는 대사에서 구체화된 바 있지만. 하지만 그조차도 비차가 에우고를 배반할 때 에르와 어떤 커뮤니케이션도 없었다는 점에서 설득력이 없어진다.

2. 루 루카와 목성으로 떠나는데 말야... 루 루카와 쥬도 사이에도 중간과정은 생략되어 있거든? 도대체 어떻게 해서 쥬도가 루 루카와 함께 목성으로 가는 건데? 루 루카가 쥬도에게 마음이 있다는 거야 중간에 몇 번 언급된 바 있지만 쥬도는 아니잖아? 그놈은 여자에는 전혀 관심없는 완전 어린애인데. 결론은... 루카에게 잡아먹힌 건가? 다른 가능성은 생각할 수조차 없잖아? 그렇게 한 순간에 나 이제부터 얘랑 살래 할 다른 개연성이 있어? 더블제타건담에?

3. 그레미 토토 이 덜떨어진 자식이 일으킨 덜떨어진 반란이라는 것도 그렇다. 반란이라는 건 자기가 권력을 잡기 위해서 일으키는 것 아닌가? 그런데 코아3에 액시즈를 충돌시켜? 액시즈는 네오지온의 근거지인데? 코아3는 지온의 발흥지인데? 그런데 하만 하나 때려잡겠다고 자신의 근거지로 지온의 발흥지를 파괴한다?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는 거냐? 하기야 그런 덜떨어진 자식이니까 싸우는 도중 모습을 드러내고 루 루카의 제타건담에 뒈져버렸지. 쯧.

4. 결론은 히키코모리. 하만도 역시 히키코모리였다. 세상에 대한 불신과 증오를 가지고 혼자 틀어박혀 뇌내망상이나 키우는. 그레미 토토도 마찬가지고, 플 투도 마찬가지고. 인조뉴타입인 강화인간들도 인위적인 히키코모리들이고. 하만의 장미에 정신을 놓는 마슈마 제로나 모빌슈츠에 열광하는 캬라 슨이나... 세일러 마즈의 샤아 아즈나블에 대한 평가도 걸작이지. 우주의 의지 같은 것에 사로잡혀 사명감을 갖고 있다고. 전형적인 히키코모리 아닌가? 하만이 쥬도와 일대일 대결을 통해 자살하듯 죽은 것도 히키코모리 특유의 자기파괴욕구 때문일 듯. 그렇게 말고는 하만의 뻘짓을 이해할 도리가 없잖아?

5. 마슈마 제로가 죽는 장면도 그래. 마슈마 제로의 역할은 캬라 슨이 그레미 토토의 부대와 싸우는 것을 뒤에서 엄호하면서 뒤 이어 나올 증원을 견제하는 것 아니었나? 캬라 슨은 일반 모빌슈츠 부대를 상대하고, 마슈마 제로는 뉴타입 부대를 적으로 상정하고, 그런데 혼자 액시즈까지 달려들었다가 사로잡혀 죽어? 바보냐? 아무리 뇌내망상 강화인간이라 할지라도 그렇게 무모할 리 없잖아?

6. 그래도 더블제타 건담의 의의라면 역습의 샤아의 내용을 예고한다는 것이겠지. 하만 칸의 모습은 역습의 샤아에서의 샤아의 모습이기도 하니까. 어쩌면 하만 칸 자체가 샤아의 오마쥬인지도. 샤아에게 감화된 결과 그런 모습이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하만 칸의 모습에 세일러 마즈의 샤아에 대한 평가를 더하면 그야말로 역습의 샤아 자체가 된다. 캐릭터 디자이너도 역습의 샤아에서와 같은 기타즈메 히로유키이고. 처음에는 어설프기 그지없더니만 후반으로 갈 수록 역습의 샤아 삘이 나는구만.

7. 그런데 더블제타 건담에 단바인 팀이 다수 참여했나? 아무래도 그림에서 단바인 삘이 많이 나서 말야. 나중에 나오는 퀸만사의 경우 단바인에 나오는 오라배틀러 딱 그거던데. 캐릭터의 표정이라던가 동작도 그렇고. 특히 싸우는 장면의 그 어색함은 단바인 그 자체. 전작에 비해 기사삘이 강한 것도 어쩌면 그 때문일 듯. 한 번 알아봐야겠다. 기타즈메 히로유키가 단바인에 참여한 적이 있는지. 최소한 메카닉 디자이너 중 한 명은 단바인 팀이다. 단바인도 좋아하는 편이기는 하지만...

8. 어쨌거나 결론은 발로 만든 애니라는 것. 다른 건 다 참겠는데 개연성 없는 건 못 참겠다. 플이 플투에게 죽는 장면도 그렇고, 에마리가 퇴각하는 플투를 공격해서 반격을 자초해 죽는 것도 그렇고, 뜬금없는 그레미 토토의 뉴타입 부대에 둘러싸여 전사하는 캬라슨도 생뚱맞기는 마찬가지다. 그래서 몰살의 토미노인게지. 개연성이야 어찌되었든 일단 죽이고 보자는 식이니까. 개연성이 있다면 왜 몰살이라 그러겠나? 제타 건담에서도 마찬가지였는 걸. 하여튼 쯧...

9. 그래도 역대 건담 가운데 여자 캐릭터가 가장 예쁜 건담시리즈였다. 단일캐릭터로는 단연 세일러 마즈와 크리스티나 맥켄지가 수위를 다투지만, 등장캐릭터 평균으로 따진다면 더블제타가 본좌다. 에마리, 루 루카, 엘 비안노, 하만 칸, 캬라 슨, 라사라, 플, 플 투까지... 더구나 전편의 화 유이리와 세일러 마즈까지 찬조출연하지 않던가. 그림만 조금 더 예뻤더라면... 어쩌면 더블제타 건담의 더블은 두 배로 예쁜 여자들이 출연한다는 뜻에서의 더블인지 모르겠다. 그냥 뭐...

10. 막판 6화는 진짜 지겹기 이를 데 없어서 겨우겨우 끝까지 봤다. 처음 봤을 때도 30화 넘기기가 힘들어서 32화에선가 보다 끝내버렸는데, 그래도 이번에는 근성으로 끝까지 볼 수 있었다. 하기야 그래도 제타건담보다는 낫다. 이건 극장판 보는 내내 언제 끝나나 시간만 재고 있었으니까. 키프레임으로 스킵해서 보느라 2시간 가까운 극장판을 다 보는 데 고작 40분 걸렸을 정도. 역시 어렸을 때나 건담이지 대가리 크고 나니 역시 아니다. 이런 걸 그렇게 좋아 추종했었다니. 뭐 어릴 적 한 때 추억이기는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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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제 생일이라네요...

자화상
오늘은 9월 7일. 음력으로 8월 4일. 지금으로부터 무려 **년 전에 내가 태어난 날이라지요? 그때 부모님들은 대단한 인물이 될 거라며 기쁘게 웃으셨다고 하는데... 아마도 지금 이모양 이꼴이 될 것을 알았다면 미역국도 제대로 넘어가지 않으셨을 겁니다. 몰랐다는 게 천만다행이죠. 어쨌거나 생일입니다. 축하해주실 분들은 축하해주시길...

추신1) 생일선물도 받습니다.*^^* 

추신2) 그리고 위의 그림은 제 자화상이랍니다. 닮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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