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 문 초 록
풀란차스의 푸코 비판과 수용에 관한 연구
풀란차스는 초기에는 “구조주의적 국가이론”, 그리고 후기에는 “관계론적 국가이론”을 통해 마르크스주의 정치의 복원을 꾀한다. 『국가, 권력, 사회주의』(1978)에서 관계론적 국가이론의 내용이 가장 명시적으로 나타나며, 푸코는 이러한 전환에 깊숙히 관련되어 있다.
푸코는 근대정치를 “진리의 정치”라고 규정하고 비판한다. 진리의 정치학은 진리의 소유자인 주체(군주·계급·국가)를 상정하고 있다. 주체는 권력을 통해 진리/허위를 심판하며, 비진리를 억압하고 배제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진리의 정치학은 “권리의 이론”으로서 “과학적 진술의 정치학”이라 할 수 있다. 푸코는 마르크스주의 자체도 진리의 정치학이라고 주장하며, 경제적 마르크스주의를 비판한다. 푸코의 진리의 정치비판은 첫째로 왕(주체·계급)의 목을 자른다. 주체는 선험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권력의 피조물에 불과하다. 따라서 주체는 권력에 의해 정상화된다. 두번째로 권력은 주체(개인·계급)가 소유할 수 있는 고정된 양이 아니다. 권력은 진리의 정치를 구현하기 위해 대상(피지배계급)을 억압한다는 관념은 잘못됐다. 관계성으로서의 권력은 사회내에 내재(편재)하며, 현실적인 것을 생산한다. 주체는 권력이 채용한 지식과 통치테크닉(생체정치와 해부정치)을 통해 생산된다. 세번째는 저항의 문제를 비판한다. 국가권력에 대한 저항(총체적인 혁명) 개념을 비판한다. 저항은 모세혈관과 같은 사회 곳곳의 영역에서 이루어져야한다. 네번째는 정치를 제한하는 국가/시민사회라는 대당, 즉 진리의 정치가 상정했던 정치영역과 경제영역의 구분을 폐기한다. 푸코는 권력테크닉이 사회에 편재되어 있는 방식을 검토한다. 따라서 진리의 정치비판은 다차원적 공간(국가만이 아니라)에서 이루어지는 다주체(계급적대만이 아니라)들의 정치라는 가능성을 제시한다.
풀란차스는 푸코의 진리의 정치비판을 수용한다. 그도 동일하게 과학을 자처해온 "경제환원론적 마르크스주의"와 "도구주의적 국가론"을 비판한다. 풀란차스는 정치이론의 근거를 생산관계와 노동분업에 근거하고, 계급과 계급투쟁을 자신의 준거점으로 삼았다. 관계론적 국가이론에서 국가는 계급관계의 물질적 응축이며, 이러한 응축은 제도에 각인된다. 따라서 국가는 계급투쟁의 장이다. 이러한 기본적 입지점 때문에 푸코를 수용하면서도 비판한다. 첫째로 푸코의 정상화를 수용하여 고립화를 주장하지만, 이것은 풀란차스에 있어 무정형적 개체가 아니라 계급적 주체로 실현된다. 두번째는 푸코의 권력의 생산성 개념을 받아들이지만, 그것은 억압성을 그 기본전제로 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국가는 생산성/억압성 모두를 통해 계급지배를 유지한다. 세번째는 미시저항의 개념을 수용하지만, 국가밖의 저항, 또는 계급적대에 근거한 총체적 전략을 꾀한다. 마지막으로 그는 국가와 시민사회의 구분을 폐기하고 정치와 경제의 외재성을 비판하면서도, 계급국가의 시민사회에 대한 지배를 주장한다.
풀란차스의 푸코 수용은 형식적인 것에 머물렀다. 그는 푸코가 비판했던 근대정치로의 회귀경향을 보인다. 풀란차스는 푸코의 “미시적 적대의 다원성”을 “거시적 적대의 다차원성”으로, “미시적 우연성”을 “거시적 우연성”으로 수용하여, 구체적 상황에 근거하는 정치이론을 전개해야했다. 그러나 풀란차스는 생산관계·노동분업과 계급·계급투쟁에 근거하여 “계급적대의 단순성”과 “계급지배의 거시적 필연성”을 고수했다. 따라서 그의 정치이론은 (국가)“이론”화되고 말았다.
*일러두기
1. 국문 단행본은 『』, 논문은 「」 으로 표시하고, 영문책은 이탤릭체, 논문은 "" 으로 표기한다.
2, 영문 인용문은 본문에 번역본을 표기하였을 때는 번역본을 따르고, 그렇지 않은 경우는 영문책을 인용하였다.
3, [ ]표시는 인용문의 뜻을 정확히 하거나, 강조하기 위해 임의로 첨가한 것이다.
목 차
Ⅰ. 머리말
1. 문제제기 2. 논문의 구성
Ⅱ. 5월사태와 마르크스주의
1. 관계론적 권력이론과 푸코의 마르크스주의 비판 2. 관계론적 국가이론과 풀란차스의 마르크스주의 비판 3. 푸코와 풀란차스의 유사점
Ⅲ. 풀란차스의 푸코 비판과 수용
1. 풀란차스의 푸코 비판
2. 푸코 수용과 관계론적 국가론
Ⅳ. 풀란차스와 푸코에게 있어서의 ‘정치’
1. 푸코의 진리의 정치비판
2. 풀란차스에 있어서의 정치
Ⅴ. 요약 및 결론
참 고 문 헌
SUMM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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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머리말
1. 문제제기
본 논문은 푸코와 풀란차스의 정치 비판을 통해 정치에 대한 새로운 이해의 가능성을 모색하려는데 목적을 두고 있다.1) 이를 위해 우선 양자의 마르크스주의 비판을 살펴보고자 한다. 양자는 공통적으로 마르크스주의의 비판을 통해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정교화하고 있다. 그러한 정치적 입장은 풀란차스에게서는 “관계론적 국가이론”으로 푸코에게서는 “관계론적 권력이론”으로 표명된다. 이들은 이러한 입론에서 전략적, 관계론적 권력을 수용하고 다양한 저항을 고민했다는 점에서 유사하지만, 풀란차스가 계급분석을 전제한 반면, 푸코는 어떠한 선험적이고 미리 결정된 주체의 존재도 부정한다는 점에서 상이하다. 푸코의 저작은 일견 마르크스주의에 대해 무관심해 보이고, 또 사실상 그의 저작에서 마르크스주의 이론과 정치학에 대한 토론을 찾아보기 어렵다. 그러나 푸코의 “분석적 초점, 방법론적 지향 그리고 [그의] 저작의 정치적 열망은 … 마르크스주의 이론과 정치학에 대한 반응 또는 실질적으로는 마르크스주의적 분석과 사회주의적 정치전략 양자에 대한 근본적인 비판으로 독해”2)될 수 있다.
본 논문은 푸코의 작업이 마르크스주의의 비판 즉 경제환원론적, 목적론적 역사주의적 마르크스주의의 비판을 곳곳에 내장하고 있다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다른 한편 풀란차스의 ꡔ국가, 권력, 사회주의ꡕ는 마르크스주의의 옹호로 시작되고 있다. 그러나 그의 마르크스주의의 옹호가 푸코가 비판한 경제론적 마르크스의 옹호라고 보기는 어려우며, 오히려 그는 푸코보다 더욱 근본적으로 마르크스주의를 비판한다고 볼 수 있다.3) 풀란차스의 비판은 바로 푸코가 겨냥한 경제결정론에서 도출되는 토대상부구조론, 도구주의적 국가론, 좌익-기술 관료주의 국가론 등에 향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양자는 모두 경제주의적 입장의 마르크스를 비판한다.
본 논문은 풀란차스의 푸코비판에 초점을 맞추고자 한다. 본 논문은 특히 풀란차스가 ꡔ국가, 권력, 사회주의ꡕ에서 푸코와 유사점들을 인정하고 푸코를 수용하여 자신의 논지를 발전시키지만, 이와 동시에 그는 수용의 측면보다는 푸코에 대한 비판에 더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다는 점에 유의하고자 한다. 이것은 풀란차스가 얼마나 철저하게 계급투쟁의 토대 위에 서 있는가를 보여 줄 것이고, 또한 양자가 동일한 경제 결정론적 마르크스주의를 비판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푸코가 비판할 때 서 있었던 지점과 풀란차스의 지점이 서로 다르며, 그들의 비판의 효과도 상이함을 드러낼 것이며, 결과적으로 양자의 상이한 정치 비판을 보여줄 것이다. 푸코의 목적은 “모든 장소의 모든 것들을 다루는 총체적이고 체계적인 이론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점진적인 전략적 지식을 세우기 위하여 권력의 메커니즘의 종별성(specificity)을 분석하는 것”4)이고 따라서 그의 실천은 말단의 권력의 영역 곳곳에서 진행될 수밖에 없다. 이런 의미에서 “푸코의 권력 이론은 혁명이 아니라 국부적 저항의 연장함(tool kit)”5)인 것이다. 그러나 풀란차스는 바로 이러한 푸코의 정치 이론을 비판하고 있다. 그는 우선 푸코가 “권력을 무수히 미시 상황 속에서 희박화․분산화 된다는 관점의 선호” 때문에 “계급들과 계급투쟁을 현저하게 과소평가하고, 국가의 중심적 역할을 심각하게 무시”6)한다는 것이다. 요컨대 풀란차스에 있어 저항의 근거는 계급적 관계 즉 생산 관계이며, 그 속에서 일어나는 계급투쟁인 것이다. 그의 정치는 계급, 계급투쟁, 계급 권력, 계급 국가와 밀접한 관련을 갖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푸코와 풀란차스의 정치 비판을 구체적으로 다루고자 한다. 푸코는 진리의 정치를 비판한다. 진리의 정치는 보편적 진리를 소유한 국가, 계급과 같은 선험적, 거시적 주체를 상정하고 권력의 기제를 통해 허위를 억압하고 사회를 틀지운다. 푸코는 정치적 의도는 있으나, 주체는 없는 과정으로 정치를 파악한다. 따라서 지식과 권력의 결탁 속에서 항상 자신을 진리의 담지자로 파악하도록 조작하는 군주 또는 주권인 “진리의 권력”(power of truth)의 목을 자른 후 일상적이고 내재화된 정상화와 규격화에 대항하는 국부적 저항의 담론을 “새로운 진리의 정치학”7)(new politics of truth)“이라고 주장한다. 이것은 중심화하고, 국가화하려는 마르크스주의의 정치에 대한 비판으로 읽혀질 수 있다. 풀란차스는 이러한 푸코의 “진리의 정치 비판”의 문제의식과 권력 테크닉을 수용하고 있다.8) 국가는 계급투쟁의 물질적 응축이며, 따라서 그의 정치 이론은 게급투쟁의 이론으로 정립된다. 그러나 그는 곧 “특정의 생산 양식”속에서 “정치의 부문 이론”9)을 완성하고자 했던 초기의 문제의식의 연장선상에서 “정치 이론”을 “국가 이론”으로 편입시킨다. 이런 의미에서 그의 정치 이론은 “국가 비판”이 아니라, “국가의 통치이론”이다.10) 따라서 그는 국가를 계급의 통일성에 종속된 것으로 보고 억압성과 개체화의 주체를 강조하게 된다. 특히 계급적대에 모든 것을 중층결정시킴으로서 적대의 문제를 단순화한다. 이것은 계급국가와 민중으로 표상된다.
Walzer는 푸코의 논의가 현대사회의 실체에 관한 어떤 인식을 제공해 주지만, 그의 정치 이론의 가장 큰 결여는 “규율과 법과 정치의 세계를 회피”하고 결과적으로 “정치세계를 식민화”(Walzer 59)한다고 주장한다. 같은 맥락 속에서 풀란차스가 경제주의적 형식주의적 결정 이론에 근거한 과학적 마르크스주의를 비판한 것은 옳았으나, 계급의 존재를 결정적인 것으로 파악하고, 국가 속에서 자신의 이론을 전개하려 했던 점은 또 다른 생활 세계의 “식민화의 시도”로서, 우연성과 역사성을 무시한 정치“이론”이라는 비판을 면하기 어렵다.
2. 논문의 구성
이상과 같은 문제의식에서, 우선 2장은 푸코와 풀란차스가 보는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논의이다. 푸코가 근대철학과 정치에 대해 비판할 때, 그것은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비판을 내장하고 있고, 풀란차스가 푸코를 참고한다고 했을 때, 그것은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비판을 통해 마르크스주의를 재수용하려는 노력이다.
양자는 관계론적 권력이론과 관계론적 국가이론을 비판의 준거점으로 삼고 있다. 따라서 양자가 가지고 있는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입장은 각각의 관계론적 권력이론과 관계론적 국가이론의 함의를 드러내게 될 것이며, 이를 통해 3절은 양자의 유사점을 논의한다.
푸코의 관계론적 권력이론에서 마르크스주의 비판은 네 가지 범주에서 고찰 가능하다. 즉 이것은 주체/대상, 억압성/생산성, 편재성/저항 그리고 국가/시민사회 범주가 그것이다. 풀란차스의 관계론적 국가이론 역시 네 가지 차원에서 살펴볼 수 있다. 첫째는 지배계급이 점거한 국가라는 관념에 대한 비판이고, 두 번째는 국가의 역할에 대한 논의이고, 세 번째로 이행의 문제에 대한 토론이고, 마지막으로 국가/시민사회 대당에 대한 비판을 통한 풀란차스의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비판과 그의 관계론적 국가이론이다. 그런데 이러한 양자의 네 가지 비판의 범주는 각각의 영역에서 유사점이 존재한다. 3절은 바로 각 범주가 어떻게 서로 수렴되는가에 대한 논의이다. 이러한 유사점은 68년의 경험을 매개로 한 푸코의 전환11)과 이를 수용하면서 동일한 68의 지형에 서 있었던 풀란차스12)에게 있어서 당연한 것이다. 따라서 68년 5월사태의 의미를 살펴볼 것이다.
3장은 풀란차스의 푸코 비판과 수용을 통해 후기 풀란차스로의 이행을 논해 보고자 한다. 따라서 이 장은 본격적인 푸코와 풀란차스의 논의의 장이 될 것이다. 우선 풀란차스의 푸코비판13)은 다른 영역에서가 아니라 유사점이 있는 그 영역에서부터 시작되는데 각각의 영역은 앞서의 유사점에서 논하였던 네가지 범주에서 살펴볼 것이다. 유사점에서 서로 차이가 있는 이유는 풀란차스가 생산관계와 계급, 계급투쟁의 전제를 전혀 포기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즉 그는 계급의 입장에서 모든 논의들을 변형한다.14) 이로써 앞서 푸코와 풀란차스의 유사점, 그리고 풀란차스의 푸코 비판을 통해 본 차이점의 논의는 풀란차스가 푸코를 어떻게 수용하고 또 비판했는가의 실제를 보여줄 것이다. 따라서 3장 2절에서는 풀란차스의 관계론적 국가이론을 살펴볼 것이다. 관계론적 국가이론은 푸코의 영향과 초기 구조주의적 국가이론과의 연관성을 해명해 줄 것이다.
푸코의 논의와 풀란차스의 주장을 정치 이론의 입장에서 정리하고 평가하는 것이 마지막 장이다. 여기서는 푸코의 진리의 정치 비판과 풀란차스의 푸코의 수용과 비판을 평가한다. 마지막 결론에서는 푸코와 풀란차스의 입론을 요약하고, 양자의 정치이론에 대한 평가를 통해 새로운 정치비판의 가능성을 논의할 것이다.
Ⅱ. 5월사태와 마르크스주의
풀란차스와 푸코는 마르크스주의를 비판하였다. 5월사태는 풀란차스와 푸코의 마르크스주의 비판에 경험적 근거를 제공하였다. 5월사태는 “확립된 기존의 통치와 신념들 그리고 관습뿐 아니라 지배 제도들과 이에 반대하는 제도들의 정당성, 생산과 소비 그리고 정보의 모델들 등을 포함한 사회생활의 여러 근본적인 측면들에 대한 도전”15)이었다. 5월사태는 주체, 권력 그리고 저항의 문제에 대한 기존의 이론과 마르크스주의에 의문을 제기했다.
68년 5월사태의 가장 큰 피해자는 프랑스 공산당이었다. 당시 프랑스 공산당은 “지도부에 체화되어 있는 당과 ‘전문가’들이 역사를 만든다”16)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으며, 진리의 체현자로서 중심적 역할을 하기를 원했다. 5월사태에 대해 프랑스 공산당 기관지 『위마니떼』는 “학생들의 행동을 모험주의로 비난했으며, 객관적 기준으로 볼 때 운동이 혁명적이지도 프롤레타리아적이지도 못하”17)다고 평가하고, “노동자들의 요구를 임금 인상과 노동시간 단축으로 제한”18)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Glucksmann은 “공산당 지도부가 이들 운동에 대해 가한 제약이 ··· 정부적 차원의 저항보다도 훨씬 더 큰 효과를 지니고 있었다”19)고 주장했다. 스마트 역시 “68년 5월이 던진 의미 중 하나는 제도화된 정치적 반대 조직들이 그들 조직 구성원들 중 상당히 큰 분파를 대변하지 못할 뿐 아니라 새로운 그룹을 대변하는 것은 고사하고라도 이해하는 것조차 불가능”20)고 비판한다.
공산당의 이러한 인식과 5월사태의 양상에 대한 입장은 푸코의 진술에서도 잘 드러나고 있다. 푸코는 “프랑스 공산당에 가까웠던 지식인들 중에 구금이나 정신병리학의 정치적 사용, 또는 넓은 의미에서 사회 전체가 훈육적 권력의 메커니즘 안으로 매몰되어 있다는 인식 따위에 문제제기를 할 수 없도록 하는 이상한 분위기가 있”었으며, “이 분야에서 내[푸코]가 시도하려고 한 것에 대해 프랑스의 좌파 지식인들은 냉담한 반응”을 보였다고 적고 있다. 이어서 그는 “이러한 문제들은 정치적인 색깔을 띠면서 부각되며, 뿐만아니라 나의 초기 저작들이 얼마나 소극적이고 분명한 자세를 취하지 못했던가를 보여주게 된 것은 1968년을 전후해서야 가능해 졌”21)다고 술회한다.
5월사태의 영향은 푸코로 하여금 초기부터 권력에 대한 문제설정을 자신이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자각하게 했다:
돌이켜 보건대 나는 다음과 같이 자문해 보고 싶습니다. ꡔ광기와 문명ꡕ 혹은 ꡔ병원의 탄생ꡕ에서 나는 권력을 제외하고 다른 어떤 것에 대하여 말했었던가? 그러나 나는 권력이라는 낱말을 사용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내 임의대로 그런 분석의 모델도 제시하지 않았다는 것을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좌파든 우파든 이것은 분명 당시 우리가 우리 자신을 발견하는 정치적인 상황과 연계된 불가능성이 있었다고 나는 말할 수 있습니다. 이 권력의 문제가 논의되는 것을 보는 것은 어려웠습니다.22)
따라서 5월의 현장을 목격했던 푸코가 68년 5월이라는 역사의 대륙을 종단하면서 얻은 성과물은 권력에 대한 이론화이다:
권력이 행사되는 구체적인 방식이 무엇인가 라는 질문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1968년 이후에나 가능할 수 있었는데 그것도 권력의 미세한 그물망에 걸려 있는 민중들이 겪는 일상생활의 투쟁을 통해서였습니다. 이제 비로소 권력의 구체적인 모습이 드러날 수 있게 되었고 권력의 작동 메커니즘을 분석함으로써 지금까지 정치적 대상 밖에 머물러 있던 여러 가지 모습을 훌륭하게 설명할 수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23)
5월을 통해서 권력에 대한 이론화를 추구했던 푸코는 근대 철학의 선전자(“프랑스 좌파 지식인”)로 부터 자유롭게 자신의 의견을 주장할 수 있었으며 그 결과가 지식-권력론, 즉 반주체적 권력 이론이다. 다시 말하면 5월사태는 푸코에게 있어 마르크스주의의 혁명과 실천에 대한 비판을 가능하게 했고 이것은 “진리의 정치”에 대한 비판과 생체권력(bio-power)에 대한 이론화를 가져왔다:
1968년의 혁명이 가능할 수 있었던 것은 어쩌면 마르크스주의의 입장을 거부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유럽의 혁명운동이 어떻게 19세기와 20세기를 풍미했던 마르크스주의의 영향권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었을까요? 이것이 바로 1968년의 경험이 우리에게 제시하는 문제의식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즉, 마르크스주의=혁명운동이라는 등식은 하나의 도그마를 만들어 냈는데, 여기에 육체적 권력, 또는 육체적 정치가 갖는 중요성이 부각되는 것입니다.24)
이상에서 보듯이 5월사태는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비판과 권력의 문제에 의문을 제기했고, 이것은 이론과 정치의 개방을 가져왔다. 특히 5월을 통해서 저항은 국가권력이나 계급들 간의 투쟁으로 치환되는 것이 아님을 푸코는 주장하였다. 즉 5월의 현실 앞에 절대정신의 권위에 기댄 총체적 이론의 사망선고를 내렸으며 현실의 실천에도 새로운 가능성을 부여했다. 특히 푸코는 5월사태를 통해 자신의 초기의 주체 비판에 대한 문제설정을 극단으로 밀고 감으로써 니체에게 빌린 계보학을 더욱 현실의 영역으로 확대했고, 이는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적극적인 비판을 함유한다.25)
풀란차스 역시 68년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그런데 그는 초기 구조주의 국가이론에서 부터 그람시의 영향을 받아 국가기구 속에 계급관계가 응축되어 있다고 주장했고, 이미 관계론적인 권력개념등을 사고하고 있었다. 그리고 5월사태를 통해서 권력과 정치에 대한 비마르크스주의적 개념을 수용하면서 더욱 이러한 문제의식을 발전시킨다:
… 국가의 변혁은 무엇보다도 생산관계의 변형에, 따라서 그것이 초래하는 국가와 경제의 분리의 변형에 조응하며, 그러므로 계급투쟁에 조응한다. … 나는 이미 『정치권력과 사회계급』에서 이러한 연구 방향을 추구했다. 그러나 이제 1968년 5월 이전에 쓰여진 그 저작의 한계를 지적해야 한다. 그 저작에서 정확하게 생산관계를 출발점으로 파악했다는 점에서 (자본주의적) 사회적 분업의 역할을 강조하였지만, 그 분업의 완전한 내용을 파악하지는 못했다. 일련의 장애를 타개한 것은 5월 그 자체이며, 그 결과 발생한 노동운동의 고유성이다.26)
1978년의 『국가, 권력, 사회주의』는 그리스 군정의 민중 봉기에 의해 붕괴되는 등 “연이은 포르투갈, 스페인의 남부유럽의 민주화를 목격하면서 풀란차스는 5월 이후 이미 보이기 시작한 ‘계급투쟁의 우위성’ 테제로의 이동을 가속화하면서 국가를 그 내부에 계급투쟁의 모순이 침투되고 각인된 ‘계급투쟁의 장’ 내지 ‘사회적 관계의 응집’”27)으로 정의한다. 이러한 인식은 5월사태를 통해 관계론적 권력개념에 주목한 푸코를 수용함으로써 관계론적 국가이론으로 구체화된다. 이러한 국가이론에 근거하여 풀란차스는 경제결정론적 마르크스주의를 비판한다.
이상에서 보듯 5월사태는 푸코와 풀란차스에게 마르크스주의를 비판하는 경험적 근거를 제공한다. 이러한 경험을 통해 푸코는 권력개념을 이론화하고, 풀란차스는 관계론적 국가이론를 정립한다. 이러한 입론 속에서 양자는 과학적 마르크스주의를 비판한다. 그들의 비판의 공통점은 마르크스주의가 “과학”을 지향했다는 데 있다. 즉, 경제 결정론적 마르크스주의가 역사 발전의 기본 원칙을 설정하고 생산력과 생산 관계의 모순에 의해 사회 변동을 설명하려 한 것에 대한 비판이다. 이들이 비판한 마르크스주의는 “지식과 권력의 이분법적 구도를 상정하고 정치철학의 가장 근본적인 과제가 지식 또는 진리로 권력의 횡포를 막는 방법을 강구하는 것”28)이라는 서양의 정치철학의 전통에 서 있는 존재이다29). 양자는 이러한 비판을 통해 “관계론적 권력이론과”과 “관계론적 국가론”을 주장한다.
1. 관계론적 권력이론과 푸코의 마르크스주의 비판
관계론적 권력(relational power) 혹은 그물망(network)으로서의 권력개념은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비판을 곳곳에 내장하고 있다. 푸코의 권력에 대한 기본 시각은 ‘“누가 권력을 잡고 있는가?” 혹은 “권력자가 어떤 의도, 어떤 목표를 가지고 있는가?”와 같은 문제에서 “주체가 권력의 결과로서 구성되는 과정”으로 초점을 옮겼다.30) 왜냐하면 권력은 고정된 양으로 존재하는 실체가 아니다. 따라서 개인, 계급과 같은 주체들이 소유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제 권력은 “제도도 아니고, 구조도 아니며, 일부 사람들에게 부여되어 있다고 하는 특정한 권세도 아니다. 그것은 주어진 한 사회에서 복잡한 전략적 상황에 부여되는 이름”31)인 것이다. 본 논문에서는 이와같은 관계론적 권력론을 주체/대상, 억압성/생산성, 편재성/저항 그리고 국가/시민사회라는 범주를 통해 접근하며, 각각의 이러한 영역에서 마르크스주의를 비판한다.
우선 주체/대상 그리고 주체에 의한 권력 소유라는 관점은 근대철학과 마르크스주의에 의해 오랫동안 유지되어 왔다. 즉 근대철학의 심장부에 놓인 중심 주제는 주체(“인간중심주의”32))라는 문제 설정이었고, 마르크스주의는 그 주체를 계급으로 구체화시켰다. 따라서 5월 정국에서 공산당이 계급 주체의 부재라는 판단 때문에 운동에 적극 개입하기를 거부한 것은 당연했다. 그러나 푸코는 인간 주체는 당연히 자율적이며 책임을 져야 한다고 주장해 온 철학적 전통과 계급주체를 상정한 마르크스주의 양자에 반대한다.33) 근대철학의 준별점을 푸코는 주체(인간)의 출현 속에서 찾으며, 그의 주저 『사물의 질서』에서 “인간의 죽음”을 선언한다. 푸코는 다음의 같이 말한다:
어쨌든 한 가지는 확실하다. 즉 인간은 인간의 인식에 제기된 가장 오래된 문제도 아니며, 가장 영속적인 문제도 아니다. 하나의 제한된 지역에서의 상대적으로 단기간의 시기(16세기 이래의 유럽문화)를 표본으로 추출해 보더라도 인간이 그 속에서 생겨난 최근의 산물임은 확실하다.34)
그리고 푸코는 “우리는 인간이 마치 해변의 모래사장에 그려진 얼굴이 파도에 씻기듯 이내 지워지게 되리라고 장담할 수 있다”35)고 주장한다. 여기서 그는 근대철학의 질문방식 자체을 바꾸어 버린다. 즉 “선험적 주체”를 묻는 대신에 “인식적이거나 실천적 관계 속에서 구성되는 주체의 형식이 무엇인가”에 대해, “우리의 발전이 어떻게 가능한가” 라는 식으로 문제제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났는가”36)라고 묻는다.
이러한 푸코의 근대철학의 담론에 대한 비판과 주체담론의 효과에 대한 비판은 “계급주체”를 발견함으로써 관념론 철학과 결별했던 마르크스주의에도 적용된다. 푸코는 우선 마르크스주의가 근대철학의 아류임을 입증함으로써 그 비판의 포문을 연다:
서구 지식의 심층 단계에서 마르크스주의는 어떠한 실질적인 단층을 도입하지 않았다. ··· 마르크스주의는 그(당시의) 인식론적 배치를 뒤흔들 의도도 없었으며, 조금이라도 수정할 어떠한 힘도 갖추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 배치에 전적으로 의존했기 때문이다. ··· 마르크스주의는 19세기의 사고 내에 존재한다.37)
마르크스주의는 주체/대상, 허위/진리의 근대 인식론적인 문제 설정을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못한 근대철학의 한 구성인자이다. 그것은 근대철학이 갖는 선험적 주체, 즉 계급을 전제한다. 푸코는 이러한 마르크스주의의 계급주체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 J. A. Miller의 “서로 적대하는 주체들의 실체”에 대한 의문에 푸코는 다음과 같이 답한다. “투쟁에서 한쪽에서는 프롤레타리아, 다른 쪽에서는 부르주아지라는 주어진 주체는 존재하지 않는다. 누가 누구에 대항해서 싸우는가? 우리 모두는 서로가 싸운다. 그리고 다른 어떤 것에 대해 투쟁하는 어떤 것이 우리 각자 내에 항상 있다.”38) 따라서 푸코는 “우리는 한편으로는 ‘지배자’ 다른 한편으로는 ‘피지배자’와 같은 이분법적 구분과 단단하고 원초적인 지배조건은 이제 가정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하면서, “우리는 차리리 지배관계의 다양한 생산에 주목해야한다”39)고 주장한다. 푸코가 주목한 지배관계로서의 권력은 관계적인 것으로 사고되며, 하나의 전략으로서 이해되며 이제 특정한 주체를 상정하지 않는 의도성으로 나타난다.40) 다시 말해서 푸코는 “권력의 메커니즘, 기술 그리고 행위는 부르주아지에 의해서 발명된 것도, 효과적인 지배양식을 추구하는 지배계급의 창작품도 아니다. 차라리 그것들은 부르주아지에 대하여 그 정치적·경제적 효용성을 드러내는 그 순간부터 발달”41)했다. 이처럼 푸코는 선험적 주체가 권력을 소유한다는 주장을 비판하고, 오히려 이러한 주체는 권력의 피조물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42) 푸코에게 있어서 권력은 제도, 국가 등에 자리잡고 있는 개인, 계급에 의해 소유될 수 있는 고정된 양이 아니다:
권력은 타인에 대하여 그것을 독점적으로 행사하는 어떤 개인의 손에 존재하는 것으로 이해되어서는 안된다. 권력은 행사의 대상이 되는 이들 뿐만 아니라 그것을 행사하는 이들 모두가 사로잡혀 있는 기계이다.··· 권력은 그것을 소유하거나 행사하는 어떤 개인과 더 이상 동일시될 수 없다. 그것은 아무도 소유할 수 없는 기계가 되었다.43)
푸코의 이와같은 다양한 지배관계와 관계론적 권력개념은 사회계급이 노동자/자본가라는 이분법적 문제설정과 자본주의적 계급지배라는 관념44)에 대한 비판이며, 노동자계급이 항상 자본주의라는 구조속에서 잠재적인 진보․변혁의 주체라는 신념에 대한 문제제기이고, 나아가 마르크스주의의 근본적인 전제인 토대/상부구조론에 대한 의문이다.
권력의 그물망에서 존재하는 주체라는 푸코의 명목론적 관점은 마르크스주의의 과학과 이데올로기 구분에 대한 비판으로 나아간다:
나는 이데올로기의 개념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이유로 사용하기 곤란하다고 본다. 첫째는, 이데올로기는 마치 진실이라는 것이 틀림없이 존재한다는 전제 아래에 그 진실에 반대되는 지식은 모두 이데올로기라고 몰아 부치는 인상을 주기 때문이다. 둘째로, 이데올로기가 갖는 용어상의 난점은 그것이 주체, 또는 주관이라는 차원을 내포하고 있다는 점이다. 셋째로, 이데올로기는 하부구조나 물질성 또는 경제적 결정요인에 비하면 부차적인 위치에 있다고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바로 이와 같은 세 가지 이유 때문에 이데올로기라는 용어를 쓰는데 주의를 해야 한다.45)
내가 당신에게 일깨워 주려고 한 것은 그 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오랫동안 마르크스주의가 과학이냐 아니냐 하는 쓸데없는 질문에 관심을 두고 있었는가 하는 점이다. ··· 나는 당신이 마르크스주의를 이런 식으로 변호하는 것 자체가, ··· 과학이라는 믿음에 작용하는 권력의 효과에 무의식적으로 영향을 받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46)
또한 이러한 주체/권력에 대한 비판은 이제 더 이상 주체(계급)에 의한 실천이 진리를 보증한다는 근대철학(마르크스주의)의 정당성에 의문을 제기한다.
두 번째로 억압성/생산성이라는 권력개념에 대해 살펴보자. 푸코의 권력론은 권력을 소유한 주체들이 억압하고 금지한다는 전통적인 권력의 부정적 이미지의 입장을 비판한다. 이것은 마르크스주의에도 해당되는데, 중세의 정치철학에서 권력개념을 군주 또는 법의 억압성에 맞추었다면, 마르크스주의는 피지배계급에 대한 지배계급의 억압으로 권력을 파악한다. 푸코는 강조한다:
이제는 배제한다, 처벌한다, 억누른다, 검열한다, 고립시킨다, 숨긴다, 가린다 등의 부정적인 표현으로 권력의 효과를 기술하지 말아야 한다. 사실상 권력은 생산한다. 현실적인 것을 생산하고, 객체의 영역과 진리에 관한 의례를 생산하는 것이다.47)
이처럼 푸코에 있어 권력은 억압기능보다도 생산적이고 긍정적인 방식으로 정의된다. 따라서 권력의 고유기술인 통치 테크닉에 주목한다. 푸코가 자신의 주요 저작을 통해 제시하고 있는 계보학적 분석이 사실상 모두 통치 테크닉에 대한 분석이라고 할 수도 있는데 “통치 테크닉의 특징은 그 대상이 신체이다. ꡔ감시와 처벌ꡕ에서 신체에 관한 정치경제학이라는 용어가, ꡔ성의 역사ꡕ에서는 생체권력이라는 용어가 등장하는데, 이 두 개념은 모두 신체를 중심으로 작동하는 권력 방식”48)을 나타낸다.
생체권력이란 해부정치와 생체정치로 구분되는데 이것들은 신체에 가해지는 권력의 기술적 측면, 즉 통치테크닉의 대표적인 두 유형이다. 이 두 유형은 신체의 최대한의 발현을 보장한다는 점에서 모두 삶에 대한 권력이다. 따라서 푸코는 “삶을 빼앗든가 살게 내버려두는 낡은 권리 대신에 삶을 북돋아 주든가 그것을 허용하지 않는 권력이 들어 섰다”49)고 말한다:
생각컨대 먼저 형성된 하나의 극은 기계로서의 신체를 중심에 두었다. 다시 말해서 신체의 조련, 신체적 능력의 최적화, 체력의 착취, 육체의 유용성과 순응성의 병행적 증대, 효과적이고 경제적이고 경제적인 통제 체계로의 신체의 통합, 이 모든 것의 훈육을 특징짓는 권력 과정, 곧 인체에 대한 해부 정치에 의해 확보되었다.50)
다소 늦은 18세기 중엽에 형성된 두 번째 극은 종 개념으로서의 신체, 곧 생명의 역학이 스며들고 생물학적 과정에서 디딤돌의 역할을 하는 신체를 중심으로 한다. 다시 말해서 증식, 출생률과 사망률, 건강의 수준, 수명, 장수, 그리고 이것들을 변화시킬 수 있는 제반조건들이 중심적인 문제인데, 일련의 개입 및 조절하는 통제 전체 , 즉 인구를 대상으로한 생체정치가 그것들을 떠맡는다.51)
이처럼 해부정치가 해부학적이고 개별화시키며 규격화시키고 육체의 개발을 조장하는 특징을 갖는다면, 생체정치는 신체를 생물학적으로 다루고 해부정치를 통해 형성된 주체의 삶의 가장 세세한 부분까지 배려해 주는 생산성으로 특징 지어진다. 전자의 권력은 그 작동을 통해 “천편일률적인 규율을 개인[신체]들에게 부과함으로써 규격화(normalize)”한다. 나아가 이것은 “각각의 개인들의 신체에 각인됨으로써 그들을 개별화(individualize)시켜내는 효과”52)를 거둔다. 후자는 목자적 권력(pastoral power)로 특징지워지는데, 목자(shepherd)가 모든 양떼(flock)들의 행동들을 책임지듯이, 개인의 삶과 모든 행동을 배려하는 근대권력의 모습을 보여준다. 여기에서 양떼가 목자에게 바치는 순종이 이성에 굴복했던 것이 아니라, 이성에 철저한 순종을 의미했다는 점에서 순종을 이끌어내기 위한 특별한 지식의 형태가 요구되는 계기를 설명한다. 이제 권력은 지식을 채용하고 지식자체는 권력에 의해 기능하게된다.53)
세번째로 편재성/저항이라는 논의를 통해 관계론적 권력개념에 접근할 수 있다. 앞서 권력이 어떤 주체를 전제하지 않으며, 소유될 수 있는 사물이 아니라는 진술은 권력이 사회 곳곳에 모세혈관처럼 편재되어 있다는 진술을 내장한다. 따라서 권력관계는 그물망처럼 권력(기술)의 전사회적 확산과 국가나 계급이 소유할 수 없다는 푸코의 권력에 대한 진술은 계급이 국가권력의 점거를 통해 혁명에 도달한다는 마르크스주의 주장에 반대한다. 마르크스주의적 저항은 “첫째, 단순한 정권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는 국가를 상대로 하여 싸우려 하기 때문에 (국가와) 동일한 정치적·군사적 힘이 필요하다. 그래서 처음부터 같은 위계의 메커니즘과 권력구조를 지니고 있는 국가기구로서 출발하여야 한다. ·· 둘째, 프롤레타리아 독재기 동안의 국가기구는 계급적대에 대처하기 위하여 효율상 그대로 존속”54)시켜야 한다. 이러한 정통 마르크스주의의 혁명전략은 푸코의 권력이론에서는 이해될 수 없는 것이다:
권력 관계들은 변화될 수 있고 뒤집어질 수 있으며 불안정한 것입니다. 주체들이 자유롭지 못하다면 권력관계도 있을 수 없다는 것에 주의해야 합니다. 만약 누군가가 완전히 타자의 처분권 안에 있고, 상대방이 무제한적인 폭력을 행사할 수 있는 그의 소유물이 된다면, 권력관계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권력관계속에는 필연적으로 저항의 가능성이 존재하며 저항의 가능성-폭력적 저항, 탈출, 계략, 상황을 역전시킬 전략 등-이 없다면 권력 관계도 있을 수 없습니다.55)
푸코가 권력을 소유한 국가기구를 상정하지 않듯이 저항 또한 국가기구 전복으로 등치될 수 없는 것이다. 이처럼 푸코는 일상적인 차원의 편재되어 있으며 따라서 이러한 미시적인 차원의 권력에 대한 투쟁없이는 사회혁명이란 무의미하며 실재로 가능하지도 않다고 본다. 따라서 국가는 이러한 일상적 권력이 기능하는 권력망을 토대로 해서 작동하므로 국가에 대한 저항 또한 국소적 특수적 투쟁을 통해 달성될 수 있는 것이다. 즉 저항은 국가기구나 제도에 대한 것이 아니라 편재되고 분산된 권력 관계망 도처에 존재하며 이러한 권력에 대한 저항의 전략이 짜질 때 의미를 갖게 된다. 이제 푸코에 있어서 저항은 권력과의 대당 속에서 권력의 사슬만큼 다양한 모습으로 존재하며, 권력을 강화하는 지식․지식인 등의 다양한 권력적 결집체의 곳곳에 편재되고 관계적인 특성 속에서 존재한다.56)
마지막으로 국가/시민사회의 대당을 통해 푸코의 권력이론의 함의를 살펴본다. 관계론적 권력이론은 선험적주체가 권력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전략적 장에서 권력의 주체가 형성되는 것이고, 권력은 억압의 기제가 아니라, 오히려 생산성을 특징으로하고, 한점에 응집하여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 구석구석에 편재됨을 특징으로 한다. 이러한 새로운 권력개념은 “노동자계급의 과학”이기를 자처했던 경제결정론적 마르크스주의와 양립할 수 없다. 이것은 경제적 마르크스주의가 토대/상부구조, 시민사회/국가라는 이분법을 상정하고, 경제의 우위성을 골간으로 국가는 경제적 영역의 자본의 이해를 반영하는 도구적인 수단으로 간주함으로써 자신의 정체성을 획득하는데서 드러난다. 따라서 중심(주체, 국가)의 해체와 권력의 사회로의 편재됨을 강조하고 있는 푸코에게 “사적영역”과 “공적영역”의 분리는 더 이상 의미를 갖지 못하며, 이것 자체가 지식/권력의 결탁에 불과한 것으로 간주한다.
이처럼 푸코는 권력관계를 국가의 영역만으로 한정하고, 국가를 단일한 계급에 의해 점거되어 있다는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비판속에서 권력이론을 전개한다. 푸코의 이러한 논의들은 마르크스주의가 정치를 경제의 부속물로 간주하고 거시정치로 모든 정치를 환원하는 입장에 대한 비판이다. 이러한 정치복원의 입장은 마르크스주의자의 입장에서 마르크스주의를 비판한 풀란차스의 다음 논의를 통해 어떻게 드러나고 있는지 살펴본다.
2. 관계론적 국가이론과 풀란차스의 마르크스주의 비판
ꡔ국가, 권력, 사회주의ꡕ에서 풀란차의 마르크스주의 비판은 근본적이다. 그는 “정통”이라는 개념 자체에 대한 의문을 제기한다. 이것은 기존의 경제결정론적 마르크스주의, 그리고 소련의 권위에 의해 공식화된 스탈린주의적 마르크스주의가 과연 정통 마르크스주의인가에 대한 질문이다. 풀란차스는 “정통 마르크스주의라는 것은 있을 수 없”고, “어느 누구도 신성한 교조와 텍스트를 지키는 사람으로 행동할 수 없”으며 따라서 풀란차스 자신은 “어떤 진정한 마르크스주의 이름으로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풀란차스 자신의 “이름으로 말하는 것에 책임을 진다”57)고 진술하고 있다. 이것은 마르크스주의가 “과학”의 담론을 추구해 온 목표에 대한 의문이다. 그는 마르크스라는 이론이 유토피아를 보증하는 과학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즉 “어떤 이론이 아무리 과학적이라 하더라도, (마르크스주의를 포함해서) 그 이론에 가능한 한도 이상의 것을 요구할 수는 없”(SPS 22)고, “전체화를 목표로 하는 일반이론을 가지고는 문제의 모든 복잡성을 파악할 수 없”(SPS 24)는 것이다. 즉 “모든 형식주의적 이론주의의 주장과는 반대로, 다양한 생산양식을 관통하는 불변의 이론적 대상을 가지는(경제과학) 경제의 일반이론이 있을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러한 생산양식을 관통하는 불변의 대상을 가지는 (정치과학, 정치사회학) 정치적인 것-국가의 일반이론 또한 있을 수 없다”(SPS 19)고 주장한다. 특히 그는 기존의 과학의 담론으로서 마르크스주의자에 의해 강력하게 주장되어 온 이론과 실천의 관계, 즉 실천이 이론을 보증한다는 도구주의적 실천관에 의문을 던진다. 이론과 실천의 일치에 대한 회의는 신철학자들이 주장하듯이 마르크스주의가 동유럽 사건에 대해 책임을 지라는 주장에 대한 반비판이다:
이론과 실천, 이론과 현실 사이에 항상 구조적 거리가 존재한다. … 계몽 철학자들이 서구의 전체주의에 대해 책임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마르크스주의 역시 동구에서 발생한 것에 대해 책임이 없다. … 스탈린은, 나폴레옹 1세가 루소의 오류, 프랑코가 예수의 오류, 히틀러가 니체의 오류, 그리고 뭇솔리니가 소렐의 오류가 아닌 것과 마찬가지로, ‘마르크스의 오류’가 아니다.(SPS 23)
“정통”이라는 관념의 폐기, “과학”이라는 담론의 포기 그리고 “이론과 실천의 변증법적 통일”이라는 도구적 실천관의 비판은 마르크스주의 역사에서 정통으로, 과학으로 그리고 합법칙적 과정의 확인으로서의 실천을 제기해 온 경제결정론적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비판이다. 이제 구체적으로 마르크스주의 비판을 살펴본다.
풀란차스는 초기에는 구조주의적 마르크스주의 입장에서,58) 후기에는 전략관계론적인 입장에서 마르크스주의를 비판하고 있다. 어느 입장에서나 비판하고 있는 마르크스주의는 푸코가 비판한 토대상부구조의 구조를 가지고 있고 단선적인 발전관에 매몰된 경제환원론적인 마르크스주의이다.59)
풀란차스는 관계론적 국가이론은 국가를 “본질적인 실체로 간주할 수 없으며, ‘자본’과 마찬가지로 세력관계이며, 보다 정확하게는 계급들과 계급분파들 사이의 세력관계(항상 특수한 형태로 국가안에서 표현된다)의 물질적 응축”(SPS 128-9)으로 정의한다. 그리고 “국가의 물질성은 생산관계와 사회적 분업”(SPS 75)에 기초하며, 이러한 물질적 응축은 제도적 물질성으로 구체화된다. 그러므로 국가는 “계급모순에 의해 구성되고, 계급모순을 통해 분화”(SPS 132)되는 것이며, 따라서 계급투쟁의 장인 것이다. 또한 국가정치는 “국가내부의 [계급]모순의 실제적 과정을 통해 확립”(SPS 134)된다. 이러한 관계론적 국가론에 입각하여 풀란차스가 비판하고 있는 마르크스주의를 살펴보자.60)
이것은 첫째로 계급주체로서의 국가관념에 대한 비판을 살펴볼 것이며, 두 번째로 국가의 역할을 지식/권력과 개체화라는 논의를 통해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비판을 살펴보고, 세번째로 저항 즉 이행의 문제에 대해 토론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국가/시민사회 대당에 대한 비판을 논한다.
첫째로 풀란차스는 단일한 계급의 지주로서의 국가에 대한 관념을 비판한다. 이것은 국가를 지배계급에 의해 점거된 것, 즉 “국가는 부르주아지의 공동의 관심사를 처리하는 집행위원회”라는 마르크스주의 전통에 대한 비판이다. 이것은 도구주의적 국가론과 기술관료주의적 국가론에 대한 비판이다. 도구주의적 국가는 “각 지배계급은 자신의 요구에 따라 국가를 구성하고 자신의 이해에 적합하게 국가를 마음대로 조작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모든 국가는 계급독재에 불과할 뿐”(SPS 12)이고, 기술관료주의적 국가론 역시 “독자적인 국가권력이 있으며 그 이후에 다양한 방식으로 지배계급들에 의해 이용된다는 것과 결코 다른 것이 아니다. 분명히 말해서 그들은 계급적 성격이 아니라 국가의 계급적 이용”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 (SPS 13)
풀란차스는 “국가는 현실역사의 주체가 아니다. 현실의 역사는 주체없는 과정이며, 계급투쟁의 과정이기 때문”(SPS 114)이다. 즉 풀란차스는 “시간적, 공간적 모태(matrix)는 역사적으로 계급투쟁의 산물로 나타난다. 이러한 모태는 역사의 주체로서 행위하는 계급의 산물이 아니라, 과정의 결과”이며, 따라서 “근대민족은 부르주아지의 창조물이 아니라, ‘근대적’ 사회계급들 사이의 세력관계의 결과”(SPS 115)인 것이다. 또한 계급관계의 물질적 응축으로서의 국가는 주체없는 투쟁의 장이다. 이러한 “계급모순은 넓은 의미의 국가요원(다양한 행정, 사법, 군대, 경찰 그리고 다른 국가관료들) 내부의 분열을 매개로 국가에 각인”(SPS 154)되고 특히 국가외부에서 진행되는 민중투쟁도 국가에 영향을 미친다. 국가는 이런 의미에서 “통일된 담론을 창출하지 않는다. … 국가는 권력의 전략과 일치하는 노선에 따라 분절과 파편으로 분열되어 있는 담론”(SPS 32)을 만든다.
이러한 진술은 국가정치가 단순히 계급의 이익을 전일적으로 보장한다는 도구주의적 국가나, 계급중립적으로 존재한다는 기술관료주의적 국가론에 대한 비판이다. 이러한 국가론은 특히 정치를 억압과 지배로 파악하게 하는데, 풀란차스는 “국가정치는 미시정치의 충돌의 결과이며, 국가수뇌부의 전체적 의도의 적용이 아니다”(SPS 135-6)라고 주장한다.
두 번째로 국가의 역할에 대한 논의, 특히 지식/권력과 개체화 논의를 통해 기존의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비판적 논지를 살펴본다. 전통적인 마르크스주의 입장에서 국가의 기능은 억압/이데올로기의 쌍으로 인식되어져 왔다. 풀란차스는 알튀세를 같은 관점에서 비판한다. 억압적 장치와 이데올로기 장치의 구별을 통한 이해는 “국가가 억압과 이데올로기적 주입(그것 이외에는 없다)을 통해 작동한다”는 것인데 여기에 따르면, “국가의 효율성은 어느정도 국가가 금지하고 배제하고 방해하는 무엇에 있거나, 또는 속이고 거짓말하고 모호하게 하고 감추고 그리고 잘못된 것을 믿도록 사람들을 이끄는 국가의 능력”(SPS 30)에 있다는 것이다.
풀란차스는 “생산관계의 구성에서 그리고 사회계급들의 경계설정과 재생산에서 국가가 수행하는 역할은 국가가 자신을 조직된 물리적 억압의 행사로만 한정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며 … 국가의 가장 적극적인 역할은 억압+이데올로기라는 쌍으로 한정되지 않는다”(SPS 28)는 점을 지적한다. 반면에 국가는 “적극적인 방식으로 현실을 창조하고 변형하고 만든다.”(SPS 30) 그리고 풀란차스는 「정신노동과 육체노동: 지식과 권력」(SPS 54-62)이라는 절을 통해 이것을 설명하고 있다. 육체노동과 정신노동의 분할은 “자본주의하에서 특수한 형태로 존재한다. 이 특수성은 자본주의에서 직접노동자가 그의 노동수단으로부터 완전히 분리되었다는 점”(SPS 55)과 관련이 있는데 즉 생산관계와 사회적 노동분업의 결과이다. 이러한 분할은 국가의 경우에는 결정적의 의미를 갖는다. 왜냐하면 “국가장치 전체, 즉 이데올로기적 장치뿐 아니라 억압적 및 경제적 장치에 있어서, 국가는 육체노동으로부터 분리된 정신노동을 구현하며, 정신노동과 정치적 지배 사이의 따라서 지식과 권력 사이의 유기적 관계는 자본주의 국가에서 가장 완벽한 방식으로 실현”(SPS 55-6)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식과 지식의 기술을 생산하는데, 풀란차스는 부르주아 통계와 국립통계경제연구소(INSEE)를 예를 들고 있다.
이처럼 정신노동(지식과 권력)은 국가에 물질화되고 육체노동은 인민대중에 집중화된다. 즉 국가는 “정신노동의 중추에서 재생산되는 권력과 지식관계의 모사”이며, “자본주의 국가의 준거틀은 가장 세부적인 것에서도, 정신노동의 중추에서 도출되고 내재화되는 육체노동과 정신노동 사이의 자본주의적 분할을 재생산”(SPS 58-9)한다.
자본주의 국가는 또한 개인들을 개체화시킨다. 자본주의 국가는 “‘개인’, 즉 자유의 주체인 법적, 정치적 인격으로 원자화”하는데, 구체적으로 “중앙집권화되고 관료제를 확립한 국가는 이 원자화를 창출하고 형식적으로 등가인 개체(국민주권과 인민의지)로 세분화된 사회체(인민-국민)의 통일성(대의제 국가)”을 만든다. 개체화를 상품관계에서 야기되는 법적-정치적 이데올로기의 산물이라고 설명하는 입장을 풀란차스는 비판한다. 이들은 자본주의 국가의 기초를 “자본유통과 ‘일반화된 상품교환의 영역’에 위치짓고자했다. 즉 ‘사적’ 상품소유자 사이의 교환, 노동력의 계약적인 구매와 판매, 등가교환, 추상적 교환가치등이다. 이것은 상품교환자들을 묶는 체계인 형식적, 추상적 법과 법적 규범의 지형일 뿐만 아니라, 법적-정치적 ‘개인-인격’으로 설정되는 시장사회의 고립된 분자들의 ‘형식적’, ‘추상적’ 평등과 자유가 발생하는 지형”(SPS 50)이라고 주장한다.
이에 대해 풀란차스는 “이것은 개체화의 과정을 배타적으로 상품교환에 위치시키고, 생산관계나 계급관계에 위치시키지 않는다. 이 이해는 계급관계를 국가의 근거로 파악한다고 자부하지만, 개체화를 상품물신성에 기초한 단순히 신비화된 출현으로 간주하는 입장”(SPS 50)이라고 비판한다. 개체화는 생산관계와 사회적 분업에 기초하여 설명되어야 한다. 특히 자본주의 국가의 “제도적 물질성이 이 개체화에 뿌리를 내리며, 동시에 국가장치는 그렇게 구성된 전체에 대해 권력을 행사하는 방식으로 주형된다”(SPS 65)고 풀란차스는 파악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풀란차스 자신의 초기의 입장에서 “고립효과”의 내용이 법적-정치적 이데올로기 메커니즘 및 국가의 이데올로기적 역할에 국한되었다고 자기비판하고 있다.(SPS 69-70)
세 번째로 경제결정론적 마르크스주의는 변혁과 관련하여 두가지 점에서 특징적인데 하나는 시원적 본질, 단선적 발전이라는 관념을 조장한다. 즉 “아리스토텔레스적인 본성 또는 본질을 가진, 그리고 내부 결합관계를 통해 스스로를 재생산하는 요소들로 구성”(SPS 15)된다고 형식주의적-경제주의 입장은 주장한다. 또한 역사가 경제과정의 합법칙적 발전에 종속된다는 생산력의 우위성에 근거한 마르크스주의의 역사관을 생산한다. 그러므로 “마르크스주의의 역사에서 형식주의적-경제주의적 입장은 지속적인 유혹이었으며, 오늘날에도 여전히”(SPS 15) 그렇다고 풀란차스는 말한다. 다른 하나는 국가권력의 점거가 혁명이라는 도식이다. 이것은 권력이 국가와 동일시 되며, 따라서 국가에 대항하는 새로운 권력의 탄생을 통해 새로운 권위체의 창출을 주요한 혁명의 전략으로 생각한다. 이것이 레닌의 이중권력론61)이다. 이처럼 “이중권력 전략이 취한 전통적 태도는 국가장치의 파괴”(SPS 263)를 통한 혁명이었다.62)
우선 단선적인 발전관에 대해 풀란차스는 “다양한 생산양식을 관통하여 그 대상(국가)의 변형을 지배하는 일반적 법칙을 설정할 수 있는 국가의 일반 이론이 존재하지 않는 한 한국가에서 다른 국가로의 이행에 관한 일반 이론은 존재하지 않는다”(SPS 22)고 주장한다. 이것은 계급투쟁에 종속된다. 또한 풀란차스는 국가가 “가장 조그마한 혈관으로 확산되고 권력의 여러 부분들과 모든 계급권력을 둘러싸는(포위하는) 경향”(SPS 37)이 있으며, 이것은 제도적 물질성에 응축된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혁명은 단순히 국가권력의 전복으로 달성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특히 국가권력의 제도적 물질성은 단순히 국가권력의 쟁취에 의해 근저적으로 변화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풀란차스는 이행전략으로서의 “민주적 사회주의론”를 전개한다. 이것은 국가 밖의 민중투쟁과 국가내의 투쟁을 통해 국가 내에서 권력의 센터를 장악할 수도 있고 국가분쇄를 거치지 않고서도 “진정한 질적 단절들”63)을 통해 국가성격의 변혁을 가져온다는 것이다.64)
네 번째로 국가/시민사회분리에 대해 풀란차스는 비판한다. 마르크스주의에서 오랫동안 특권을 누려온 것은 경제주의적 관점이다. 이러한 관점은 국가를 경제관계에서 파악하고 있다. 즉 “경제적인 것의 (결과적으로 정치적인 것의, 국가의)공간과 장을 본질적으로 불변의 것으로 취급하며, 또한 그것들의 가장된 자기 재생산에 의해 그려지는 내재적 한계를 가진 것으로 취급”(SPS 15)한다.
이것은 자본주의 생산양식에서 경제와 정치, 토대와 상부구조의 분리라는 관념을 산출한다. 풀란차스는 전자본주의 생산양식의 특징과 비교하면서 이를 설명하고 있다. 점유자와 소유자가 분리되어 있는 것이 전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특징이라면, 자본주의 생산양식은 “직접생산자가 노동수단과 노동대상”으로 부터도 분리되어 존재한다. 즉 직접생산자들은 “경제적 소유관계뿐만 아니라 점유관계에서도 그것들로부터 분리”된다. 이러한 구조는 “국가와 경제의 공간(자본의 축적과 잉여가치의 생산)사이의 상대적 분리”라는 관념을 만든다. 따라서 이러한 분리는 “국가와 경제의 새로운 공간과 각각의 장”을 만든다. 이처럼 “국가와 자본의 재생산의 공간이 상호 분리되어 있는 것은 자본주의에만 특수”한 것이라고 풀란차스는 주장하며, 이 분리때문에 “마치 국가가 외부로부터 경제에 개입”(SPS 16)한다고 인식되어진다. 따라서 생산관계와 경제영역의 착취의 핵심에서 진행되는 투쟁의 역할을 모호하게 한다.
풀란차스의 관계론적 국가론은 생산관계와 노동분업에 토대를 두는 국가가 계급관계의 응축이고 생산관계의 구성과 재생산에서 상부구조로 파악된 국가가 직접 거기에 현존한다고 주장한다. “정치적-이데올로기적 관계가 생산관계의 실제적인 구성에 현존하기 때문에 정치적-이데올로기적 관계는 생산관계의 재생산에 있어서 본질적 역할을 수행하며, 또한 생산 및 착취과정이 동시에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지배와 복종의 관계의 재생산과정이 된다. 이로 인한 기본적인 전제사항에 기초하여, 생산관계의 구성과 재생산에서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관계를 집중하고 응축하고 물질화하고 구현하는 요소인 국가는 특정한 생산양식에서 특수한 형태로 현존”하는 것이다. 이처럼 “생산관계 내부에서 정치적 (그리고 이데올로기적)관계가 현존하는 것은 생산관계의 우위”(SPS 26)를 나타낸다. 풀란차스는 이러한 관점에서 네가지 조류의 마르크스주의를 비판하고 있다.
우선 토대와 상부구조라는 위상기하학적인 표현은 다음의 두 가지 잘못된 관념을 산출한다:
첫째로 … 이 관념에 따르면 국가와 경제의 관계는 경제적 토대에 대한 국가의 반작용에 불과하다. 이것은 국가에 대한 전통적인 기계적-경제주의적 인식이다. 두 번째로 사회전체가 본성에 있어 그리고 본질적으로 서로 자율적인 심급 (instance) 또는 수준(level)이라는 형태로 고려된다. … 이는 다양한 생산양식을 산출할 수 있는 생득적으로 자율적인 심급들의 사후적인 조합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심급들의 본질은 주어진 생산양식에서 심급들 간의 상호관계에 선행하는 것이기 때문이다.(SPS 15)
첫 번째 입장은 도구주의적 국가론의 이해이고 두 번째는 알튀세류의 구조주의적 국가론의 이해이다.65) 이러한 이해는 풀란차스에 의해 거부당한다. 첫째로 “모두 인식론적으로 구별되는 대상인 경제의 일반이론, 말하자면 경제적 공간의 초역사적 작동에 대한 이론의 가능성과 정당성을 승인”(SPS 16)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특히 기술주의로 귀결되는데 기술주의는 “생산관계는 궁극적으로 생산력 자체의 기술적 과정의 단순한 결정화-외피-반영에 불과”하다.(SPS 26) 두 번째 비판은 두 이해 모두 국가와 경제적 공간 사이의 관계는 원래적으로 외재성의 관계로 인식한다는데 있다. 그러므로 경제주의에서 비롯되는 “토대와 상부구조라는 건축학적 이미지는 사실 사회적 실재의 접합을 정확하게 표현할 수 없으며, 따라서 규정적 역할 또한 정확하게 표현할 수 없다.”(SPS 16) 이러한 외재성에 대한 비판은 이미 ꡔ독재의 위기ꡕ에서 비판되고 있다:
국가와 사회계급간의 관계는 번번이 외재성의 관계로 설명되어 왔다. 이는 전형적인 부르주아적 이데올로기지만, 마르크스의 국가이론에도 영향을 주었다. … 이러한 문제들에 있어 국가는 주체 또는 사물로 간주된다. … 국가를 사물로 보는 것은 도구주의적 개념이다. 여기서 국가는 본질적으로 단순한 도구, 즉 기제로서 지배계급에 의해 자의적으로 조작될 수 있는 것이다. 또 국가가 지배계급의 이익을 대표하는 것은 지배계급이 자력으로는 움직이지 못하는 이 도구를 ‘장악’하기 때문이다.66)
이러한 입장은 국가와 시민사회의 관계가 두 개의 실체로 상호대립하면서 계급들은 “외부로부터 단순히 ‘영향력’을 산출함으로써 국가에 작용하며 각각의 계급이 국가의 부분이나 전체를 장악”(CD 79)한다는 환상을 가져다준다.67) ꡔ국가, 권력, 사회주의ꡕ에서 풀란차스는 “생산양식은 다른 심급과 관계맺기 이전에 불변의 구조를 가지는 다양한 심급들의 결합으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각 심급은 시작 바로 거기에서부터 심급들의 상호관계와 접합에 의해 구성되”(SPS 17)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세 번째로 풀란차스는 자본논리학파를 비판한다. 그들은 “국가를 자본의 논리”에서 도출, 즉 “자본의 축적과 확대재생산과의 관계에서 자리매김”하려는 입장이다. 이들은 “자본축적이라는 ‘경제적 범주’로부터 자본주의 국가의 고유한 제도를 ‘도출’ 또는 연역”(SPS 51)하는데 풀란차스는 우선 “경제적 기능이 기본적인 기능이 아니며, 경제적 기능만으로는 정치적 제도를 완전하게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을 지적”(SPS 52)한다. 그는 “자본주의 생산관계가 국가와 계급들 및 계급투쟁의 관계를 분석하는데 유일한”(SPS 53) 출발점이며, 경제적 기능은 정치, 이데올로기적 관계가 내재적으로 존재하는 특수한 자본주의 생산관계에 접합되어 있다고 비판한다.
네 번째는 “자본주의 국가의 기초를 자본유통과 일반화된 상품교환의 영역에 위치 짓고자”(SPS 50)하는 이탈리아 마르크스주의 조류(델라볼페, 체로니)와 르페브르 등에 대해 비판한다.68) 풀란차스는 이들의 “국가와 경제의 상대적 분리가 국가와 시민사회의 분리”로 나타나며, “고립된 개인의 욕구와 교환의 장소인 이 시민사회는 그 자체가 개체화된 법적 주체들의 계약적 결사체”로 표현된다. 이러한 시민사회와 국가의 분리는 “상품관계의 핵심에 머물고 있는 이데올로기적 메커니즘으로 국가의 물신화로 환원된다”고 비판한다. 이러한 이해의 근본적 잘못은 “국가의 기초를 자본의 확대 재생산의 전체 순환에서 규정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생산관계가 아니라 유통관계와 상품교환에서 구하려는”(SPS 50)한다. 이러한 이해는 “자본주의 국가의 제도적 특수성이라는 문제를 제기하기는 하지만, 국가/시민사회, 국가/계급투쟁의 어떠한 접합도 불가능하게하며” 또한 “국가에 대한 연구를 빈약”하게 한다.(SPS 51)
(풀란차스 자신이 파악하는 마르크스주의인) 관계론적 국가론에서 볼 때, 풀란차스는 “마르크스의 사상에 반대하여 만들어진 잘못된 비난 중에서 확실히 국가주의라는 비난보다 더 무지하고 무분별한 것은 없다”고 주장한다. 그는 “마르크스주의가 정치와 권력의 문제를 국가의 문제로 환원시키는 국가주의적 시각에 빠져 있다”69)고 비판한 푸코와 신철학자, 특히 마르크스가 사적(私的)사회와 대립으로서 국가를 강조했다고 주장한 굴룩스만를 직접적적으로 겨냥하고 있다. 풀란차스는 “이것은 생산관계 그 자체가 권력현상이자 계급권력의 기초라는 사실을 망각한 허상의 마르크스에 대한 비판”이라고 응수한다.
풀란차스는 마르크스주의가 국가/시민사회 분리라는 관념을 과학이라는 명목아래 끊임없이 자기동일시하려 했으며, 정치는 경제의 부속물로 취급했다. 또한 이러한 범주속에 다양하게 분출되었던 마르크스주의 역시 정치의 경제로의 종속, 또는 그 역의 형태로 정치를 질식시켰다고 비판한다. 그의 관계론적 국가론은 이러한 의미에서 자신의 마르크스주의 정치복원의 프로젝트를 위한 것이다. 4장 2절은 이에 대한 논의이다.
3. 푸코와 풀란차스의 유사점
관계론적 국가론과 관계론적 권력론에서의 권력에 대한 양자의 비판은 “양적이고, 소유될 수 있다”는 전통적 관념의 폐기라는 동일한 결론에 도달한다.70) 이러한 권력에 대한 새로운 개념화에 대한 동의는 여러 측면에서 유사점을 함유한다.
양자는 첫째로 관계론적 권력에 의해구성되는 주체와 두 번째로 관계론적 권력의 본성, 즉 억압적이기 보다는 생산적이라는 특성, 그리고 이러한 권력의 생산물 즉 개체화 논의와 세 번째로 관계적 권력론에서 제기되는 저항, 이행의 문제의 영역에서 유사점을 논의한다. 마지막으로 국가/시민사회 대당이 어떻게 관계론적 권력에 의해 격파되는지를 살펴보고 정치개념에 대한 토론을 한다.
주체의 문제와 관련하여 “양자는 개별화의 본성과 기제에 대한 오랜 관심”을 가졌다. 즉 “시원적 주체의 존재를 부정”했으며 “어떤기제속에서, 어떤 기제를 통하여 활동과 인식의 주체가 구성되는가를 설명”71)한다. 양자는 “어떻게 주체가 형성되는가?”에 관심을 두었다. 그러나 푸코는 근대 규율사회에서 새로운 권력테크닉에 의해서 주체가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는가였고, 풀란차스는 자본주의 사회의 계급국가가 어떻게 일반민중으로부터 계급성을 박탈하여 자신을 정당화시키는가에 주체형성의 문제에 관심을 둔다.
푸코가 주체개념을 전저작을 통해 비판했을 때, 이것은 “주체형성의 문제,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인간이 주체로 만들어지는 다양한 양식들에 대한 역사적 분석(이것은 푸코 저작 전반에 걸친 주제)”72)을 의도한 것이다. 즉 선험적으로 주어진 “근대주체 죽이기”를 통해 사회에서 구체적으로 현존했다 사라지고, 사라졌다 드러나는 상이한 주체, 그러한 주체가 가능한 배경을 고찰한다. 그는 인간이 주체로 되는 특수한 양식에 대한 분석에 주의를 기울인다. 이것의 결과가 규율권력에 의한 개별화와 정상화에 대한 분석이다.
한편 풀란차스는 국가와의 관련 속에서 국가가 어떻게 계급주체를 계급구성원으로서가 아니라 평등하고 자유로운 개인적 법적 주체, 즉 계급관계를 은폐시키는 고립효과를 창출하는가의 관점에서 주체의 문제를 서술하고 있다. 따라서 그의 입장에서는 주체형성의 문제는 “자본주의 국가의 민중통제 전략속에서 주체(민중)가 어떻게 변형되어 형성되는가”라는 문제제기이며 응답이다. 풀란차스의 개체화는 물질적 준거틀 즉, 자본주의적 사회적 분업의 전제인 공간적 시간적 모태위에 성립한다.:
이 기본적인 물질적 준거틀은 사회적 원자화와 세분화의 주형이다. 그리고 이것은 노동과정과 그것의 실천에 의해 구현된다. 생산관계의 전제인 분업을 구현하는 이 준거틀은 테일러리즘의 기초인 연속적이고 동질적이며 분할되고 파편화된 공간-시간의 조직화에 의존한다.(SPS 64)
두 번째로 풀란차스와 푸코 양자는 권력에 대한 관계적 접근을 채택했으며 권력과 전략사이의 연계를 탐구했다. 특히 ꡔ국가, 권력, 사회주의ꡕ에서 풀란차스도 투쟁의 우위성을 강조하면서 국가는 투쟁중인 계급세력들이 균형을 이룬 물질적 응축이라고 주장했다는 점에서 국면적 권력관계를 주장하고 있다.
또한 “양자에게 있어 권력은 생산적이고 능동적”73)인 것으로 주장된다. 푸코가 권력은 생산적이고 정상화하며 능동적인 기능을 강조하고 있다면74) 풀란차스는 레닌의 국가관(무장력과 감옥등의 특별한 몸체)을 거부하고 있다. 국가는 “장기적으로 억압만으로는 그 지배 기능을 행사할 수 없”으므로 “지배기능에는 언제나 이데올로기적 지배가 수반”(CD 80)되어야 하는데 이것은 국가가 계급지배의 재생산을 위해 생산적 역할을 병행해야 한다. 국가의 생산적 역할은 생산관계를 재생산하고 물질적 양보를 조직하고 권력블록을 통일시키고 비계급적 관계에 대해 계급적으로 적당한 지위를 부여하고 지식을 생산하고 자본주의 사회의 공간적 시간적 모태를 형성 하는 등 능동적 역할을 수행한다.
이들은 권력과 지식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유사성을 지닌다. 푸코의 권력론의 특징이 지식-권력론으로 나타나는데 이것은 권력이 지식과 맺는 관계를 그의 분석의 주요 관심으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풀란차스는 정신/육체노동의 분리를 통해 국가에 응축된 지식이 정치적 및 이데올로기적 계급지배의 재생산을 돕는다고 주장한다. 풀란차스는 푸코의 권력이 효과적 지배를 위해 지식과 결탁한다는 권력/지식 논의를 이어받아 , 지배의 효과적 주체로서의 국가는 지식의 응집체임을 주장한다. 따라서 “국가장치는 생산 과정으로부터 분리되며, 기본적으로 정신노동을 결정화한 것”이다. 더 나아가 “이데올로기적 장치는 말할 것도 없고, 군대, 재판소, 행정기관과 경찰이라는 자본주의적 형태의 국가장치 역시 지식과 담론의 작동 및 그것에 대한 통제를 전제”로 한다. 그리고 국가는 과학-지식을 독점하여 자본주의 국가의 특수한 담론을 형성하고 지배를 확장한다.
세 번째 양자의 유사점은 “권력과 국가가 사회에 편재되어 있다”는 논의에서도 발견된다. 푸코에게 권력이란 “모든 사회관계에 내재 즉 권력관계란 다른 유형의 관계들 경제과정, 지식관계, 성적관계 속에 내재되어 있다”75)고 본다. 또한 푸코는 “권력이 있는 곳에 저항이 있으며, 그렇지만 아니 더 정확히 말해서 그렇기 때문에 저항은 권력에 대해 외재적인 것이 아니다”라고 주장한다. 풀란차스도 권력관계는 생산관계의 구성에 외재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현존하며, 국가는 이러한 사회관계의 응축으로서 사회관계를 반영하고 그리고 그 사회관계에 직접적으로 개입한다고 본다. 풀란차스는 또한 “국가는 하나의 관계이자 힘의 관계의 응집으로서 계급국가로서의 본성 자체에 의해 국가내부에 계급적 모순을 재생산”(CD 82)한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저항은 관계 내부 즉 국가와 제도에 내재한다.
저항에 대해 양자는 미시적 반란, 즉 일반대중운동에 관심을 갖는다. 푸코는 “다만 한 가지 투쟁에 대한 단언으로 권력관계의 처음과 끝을 전부 설명할 수 없”기에 “투쟁에 대한 논의가 의미를 갖기 위해서는 특정한 투쟁의 장에서, 누가, 어떠한 투쟁에, 언제, 어디서, 어떠한 방법으로, 어떠한 목적을 갖고서 투쟁을 주도해 나가고 있는가를 살펴보아야”76) 한다고 주장한다. 즉 거시적 틀로 환원되지 않는 다양한 저항의 장소와 다양한 저항의 형태에 관심을 기울인다. 풀란차스도 남부유럽의 군부독재의 몰락에 자극을 받아 다음과 같이 진술하고 있다:
민중들이 독재정권을 ‘내부로부터’ 전복시키기 위해 실제로 국가기구에 참여하는 것만이 독재정권의 내부모순을 첨예화시키고 그 속에서 동맹세력을 찾을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은 아니라는 점이다. … 정면 공격만이 투쟁의 전부는 아니며, 또 내적 모순의 격화가 독재정권을 붕괴시킬 수 있다는 사실로부터 ‘내부로부터의 전복’과 같은 여하한 전략을 끌어내는 것도 잘못이다. 내적 모순은 민중이 국가기구로부터 얼마간 떨어져서 영구투쟁을 지속하고 국가기구내의 ‘동요하는’ 사람들을 자기 편으로 만들려고 노력할 때 가장 잘 표출된다. 정확히 바로 이때 민중투쟁의 성과가 정권의 중심부에서 최고로 내면화된다.77)
국가 밖에서 존재하는 민중투쟁이 언제나 국가에 내면화된다는 풀란차스의 진술은 “민중투쟁이 전면적이고 정면적인 봉기형식을 취하지 않을 때조차도 최종적으로 결정적 역할”(CD 85)을 한다. 그리고 파워블럭과 노동자 계급간의 모순은 “부르조아적 국가내에서는 기본적으로 ‘얼마간 떨어져서’, 즉 국가내의 순전히 중재된 재생산에 의해 표출”(CD 104)된다.
마지막 유사성은 국가/시민사회의 분리에 대한 비판이다. 푸코는 권력이 편재되었을 뿐 아니라 개인을 배려하는 사목권력을 통해 정상화시켰으므로 또 다른 사적 영역의 외재적 장에 대한 관념이 필요하지 않는다. 푸코의 이와같은 사회체 전체를 가로지르는 관계적 권력에 대한 관념은 국가/시민사회의 대당은 허구적이다. 관계론적 국가론에 근거하는 풀란차스 또한 국가/시민사회의 대당설정은 자본주의 생산양식에서 유래하고 지배계급의 전략에서 기인하는 하나의 환상에 불과하다. 실제의 운동과정은 국가가 이미 경제관계에 내재되어 있으며, 그 역 또한 그러하다.
양자는 국가/시민사회분리에 대한 비판을 통해 정치에 대한 비판의 근거를 마련한다. 푸코는 중심화하는 몸체 즉 국가라는 실체에 대한 소멸을 통해 진리의 정치에서 제기하는 문제설정을 기각한다. 즉 그는 권리의 주체, 억압의 주체, 중심으로 환원된 국가 주체를 거부하고 미시영역에서 다차원적 다주체들의 실천과정에 주목한다. 풀란차스는 또한 국가 정치를 주장한다. 즉 단일한 실체로서의 국가가 아니라, 혼돈되고, 비일관된 국가 내의 계급관계 속에서 계급들의 다양한 세력관계의 이론화를 통해 정치의 가능성을 사고한다.
Ⅲ. 풀란차스의 푸코 비판과 수용
1. 풀란차스의 푸코 비판
풀란차스의 푸코비판은 관계론적 국가론과 관계론적 권력론의 근본적인 차이에 기인한다. 관계론적 국가론의 핵심은 생산관계와 노동분업에 근거하는 계급관계의 물질적 응축으로서의 ‘국가’의 중심적 역할에 대한 승인이다. 따라서 변혁은 국가내에서의 변혁, 즉 국가의 제도적 물질성에 대한 계급역관계에 대한 점차적 변경이다. 국가․계급중심성을 강조하는 관계론적 국가론의 진술은 관계론적 권력론의 입장에서 볼때, 경제적 환원주의․(계급․국가)중심성으로 회귀한다. 이제 마르크스주의 비판에서 드러났던 모든 유사점은 형식적 사이비 유사임에 불과하다.78)
이 절은 풀란차스의 푸코비판을 통해 관계론적 국가이론과 관계론적 권력이론의 차이점을 앞서 설정했던 네 가지 범주, 즉 주체․권력(풀란차스에 있어서는 국가주체, 또는 국가내의 주체 나아가 국가의 토대), 권력(국가)의 권력행사 방식, 저항(이행의 문제), 그리고 정치의 문제라는 문제속에서 살펴본다.
풀란차스와 푸코는 “주체없는 의도성”으로서의 권력개념을 제기하고 있으며, 따라서 세력관계의 다양한 전략과 주체형성에 주목했다. 그러나 푸코가 권력관계에 따라 미시적 영역에서의 다양한 형태의 주체형성을 상정했다면, 풀란차스는 계급주체에 한정되는 경향을 보인다. 따라서 푸코는 평민정신(Plebeian Spirts)79)을, 풀란차스는 계급본능80)(Class Instincts)을 저항의 근거로 제시한다.81) 또한 “의도는 있으나 주체없는 과정의 장”을 푸코는 사회체 전체․관계자체에 개방하고, 의도의 다양성을 인정하는 반면, 풀란차스는 국가에 한정시키고 있으며, 의도자체의 결과를 계급의 이익실현의 음모로 한정하여 파악하고 있다. 풀란차스에게 있어서 계급의 이익을 보장하는 국가의 기능은 결정적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풀란차스는 국가가 계급지배의 전사회적 확장과 효과적 지배를 위해 행사하는 권력에 주목한다. 그것은 국가가 정신노동을 국가에 집중시켜 지식을 독점하는 결집체로 나타나게 하고82) 법적․정치적 이데올로기를 동원해 개체화시키는 이유이다.83) 따라서 국가는 생산관계와 노동분업의 물질적 기초에 종속되며, 계급투쟁에 반응한다.84) 반면 풀란차스는 푸코가 “생산관계와 노동의 사회적 분업에 뿌리박은 권력(국가)의 물질성(materiality)에 대한 어떤 해석도 거부”(SPS 67)한다고 비판한다. 따라서 푸코는 “계급들과 계급투쟁을 현저하게 과소평가하고, 국가의 중심적 역할을 심각하게 무시”(SPS 44)한다.85) 따라서 푸코의 다이아그램은 자본주의의 특수이론으로서의 풀란차스의 국가권력과 비교된다. 푸코에 있어 “권력의 준거틀은 어떤 특수한 장의 구체화에 선행하고 그리고 그것은 다이아그램(diagram; 판옵티콘 panoptism) 즉 각 장(field)에 내재한 추상적 기계(abstract machine)를 구성”(SPS 67-8)한다. 반면에 풀란차스에 있어 “제도와 권력실천의 주요 물질적 틀인 이러한 공간적 시간적” 장소(spatio-temporal matrices)가 권력의 준거틀이며, 따라서 푸코의 “인식론적 기능에서 구조주의에 의해 사용된 구조의 개념과 유사한 다이아그램(이것은 각 권력 상황에 내재)”(SPS 98-9)은 풀란차스에 의해 “경제적인 것”에 권력의 준거틀이 없다고 비판받는다.86) 따라서 풀란차스는 우리가 푸코의 논의에서 두 가지 조건만 충족된다면 마르크스주의의 출발점으로 이해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우선, [푸코를 이해할 때] 우리는 현대권력의 제도적 종별성(specificity)에 근거한 ‘경제적인 것’의 정확한 개념을 가져야만 한다. 푸코는 경제적인 것에 이 종별성을 관련시키려고 하나, 대부분 마르크스주의와 경제적인 것에서 제도의 물질적 개반을 포기한다. 두번째로 국가와 생산관계 및 노동의 사회적 분업 사이의 관계는 공간적이고 시간적인 모태의 수단에 의해 모든 그것의 복잡성에서 이해되어져야만 한다.(SPS 68-9)
두번째로 풀란차스는 앞서의 논의에 근거하여 푸코를 비판한다. 푸코의 주체는 경제적인 틀을 모태로 형성되지 않으며, 사회적 지배도 다이아그램이라는 “추상적 기계”이므로, 풀란차스의 계급의 이익관철의 기제로 파악된 국가와는 달리 국가의 기능이 뚜렷한 목표를 가지지 못한다. 풀란차스와 푸코의 유사성은 정상화, 개별화와 권력테크닉의 생산성에 있다. 그러나 풀란차스가 상정하는 개별화 권력은 계급권력이므로 통치테크닉의 지배방식으로 억압성(계급억압)에 대해 강조한다.87) 따라서 풀란차스는 푸코의 규율에 의한 억압의 내면화논리88)는 “정상화 규율의 측면인 피지배 계층의 복종을 물질적으로 조직하는 권력테크닉의 한 측면을 밝히는 장점”(SPS 79)은 있으나, “권력행사에서 법의 최소한의 역할 조차 과소평가”하고 따라서 “근대 국가의 역할을 과소평가”하고 억압적 기구(군대, 경찰, 사법기구 등)의 기능을 이해하는데 실패“(SPS 77)한다고 비판한다. 즉 푸코는 ”물리적 폭력과 동의의 문제까지 흡수하는 권력테크닉에 전기능적(omnifunctional) 지위를 부여“89)(SPS 79)받는데 왜냐하면 ”규율이 복종을 설명하기에는 충분할지라도, 어떻게 투쟁의 존재를 허용할 수 있는가라는 문제가 존재“(SPS 79)하기 때문이다. 즉 전 사회적 규율과 그에 대한 동의만이 존재하기 때문에 저항은 관념으로 존재할 뿐이다.
풀란차스는 국가가 합법적인 물리적 폭력을 독점하고 있으며, 폭력은 이전보다 더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한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국가에 의해 독점된 물리적 폭력은 권력의 기술과 동의의 메카니즘의 기초이다. 즉 동의 자체는 이미 폭력을 전제하고 있다. 그런데 국가는 계급국가이므로 권력의 물질적 조직화를 계급관계로 파악해야하며, 이때 조직된 물리적 폭력은 계급관계의 존재와 재생산의 전제조건이다. 따라서 계급국가에 내재된 법 또한 본질적으로 억압의 조직자 즉 물리적 폭력의 조직자로 파악해야 한다. 따라서 법은 지배의 유지라는 차원에서 적극성과 폭력성을 드러낸다.(SPS 80-85 참조)90) 그러나 풀란차스는 ”계급분할된 사회에서 항상 법 보다 선행하는 것은 합법적 폭력과 물리적 억압의 실천가로서의 국가“(SPS 85)라고 덧 붙인다. 따라서 투쟁은 항상권력의 기초이며, 투쟁의 근거는 계급관계에서 그 기반을 두고 있다.
세번째로, 저항의 문제와 관련하여 풀란차스는 푸코를 비판한다. 풀란차스는 푸코의 논리적 궁지(impasse)는 ‘저항’의 논거를 제시하지 못한다“(SPS 79)는 것인데, 이것은 권력에 대한 그의 독특한 진술 때문이다. 풀란차스는 주장하기를 권력이 있는 곳에 저항이 있다”91)는 푸코의 테제는 권력이 있는 곳에 “왜 항상 저항이 있어야 하는지? 저항은 어디에서 나오고 어떻게 그것이 가능한지?”(SPS 149)를 밝히지 못함으로써 저항의 기반을 제공하는데 실패했다. 즉 중심으로 환원되지 않고 추상적 기계에 의해 설명되는 권력은 “본질화, 절대화 되는 반면, 저항은 권력에 대한 이차적인 반사적 행위로 축소”92)된다.93) 따라서 푸코는 저항의 근거를 “권력에 대해 근본적으로 외재적(external)인 어떤 것”(SPS 150)을 상정하는데 그것이 “평민(plebs)”이다.94) 풀란차스는 “‘평민’에 대한 주장도 저항의 진술처럼 근거없는 것”이며 또한 “자연적이며 원시적이고 평민적 정신의 산물”(Jessop, State Theory, p. 288)인 평민/저항은 그들이 그들 자신의 전략을 채택하자마자 권력에 통합되고 분해“(SPS 150-1)된다. 왜냐하면 “‘평민’ 스스로 전략을 설정한다는 사실은 평민을 실체화된 권력에 ‘통합’시키고, 평민을 권력에 대해 절대적인 외부(실제로는 비장소;non-site)로부터 사라지게 하고 다시 권력망에 빠뜨리는 것”이기 때문이다.(SPS 153)95)
반면 풀란차스는 푸코와 동일하게 권력/저항의 쌍을 상정하나 계급과 계급의 응축인 제도적 물질성을 전제하고 있다. 그는 “권력의 한계는 권력자체의 기제속에 내재한 것이다. 왜냐하면 이 기제는 피지배계급을 언제나 투쟁으로 끌어 들이고 응축시키고, 그들을 완전히 흡수 통합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계급적대에 근거하는 “계급투쟁은 언제나 권력제도와 기구보다 우선적”(SPS 149-52)이다.
저항에 대한 이러한 관점은 정치전략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진다. 푸코의 사회적 관계로서의 권력과 권력/저항의 쌍이라는 개념은 중심(국가, 정당 등)으로 환원되지 않는 저항의 다원성을 주장한다. 즉 푸코는 “새로운 사회운동은 (정치정당과 같은) 정치적 조직을 지배하는 것에 의해 동등하려는 시도를 거부해야한다. 왜냐하면 이것은 또한 국가체계 속으로 재흡수로 이끌어질 것이기 때문”96)이라고 주장한다. 반면 풀란차스는 “국가의 사회화”(계급관계의 응축으로서의 국가)에 대한 논의점을 통해 국가 내부의 단절을 이행의 정치전략으로 사고한다. 국가는 외부적인 민중 투쟁 조차도 이미 그 몸체에 계급관계로 각인하는 사회체이다. 그러므로 정치전략은 또 다른 몸체의 권력을 통한 현존국가의 소멸이 아니라 존재하는 국가 내에서 국가의 점유를 꾀해야한다. 그러나 제도적 물질성으로서의 국가는 계급의 역관계를 국가기구에 체화시키고 있으므로 “사회주의로의 이행이 단순한 국가권력의 전환”에 의해서가 아니라 즉 이행은 “단지 국가기구의 지배자를 바꾸는 것이 아니라, 국가기구의 실제적 조직구조의 급격한 변환”97)이며 이것은 국가기구에 대한 적극적인 참여전략에 의해 가능하다. 따라서 푸코와 달리 중심에로의 접근이 오히려 강조되고 있다.
마지막으로 국가/시민사회에 대한 논의를 살펴보자. 푸코와 풀란차스 양자는 앞에서 보듯, 국가/시민사회의 관념을 비판한다. 그런데 계급․국가라는 입지점을 가진 풀란차스로 인해 양자는 차이를 드러낸다. 푸코는 권력과 저항의 편재성과 권력테크닉의 전사회적 규율화에 대한 논의를 통해 정치영역인 중심적 기구와 그밖의 것에 대한 영역설정을 거부한다면, 풀란차스의 관계론적 국가론은 정치적인 것의 사회적 편재성에 대한 논의를 통해 국가/시민사회의 대당을 비판한다. 이것에 대한 논의는 다음절에서 다룬다.
2. 푸코 수용과 관계론적 국가론
“푸코와 풀란차스의 유사점(2장 3절)과 차이(3장 1절)”의 논의를 통해 이미 풀란차스의 푸코 수용과 후기 풀란차스(구조주의 국가론에서 관계론적 국가이론으로 전환)로의 이행을 암시 받는다. 왜냐하면 앞의 두 절에서 이미 푸코의 수용과 비판이 논의 되었다. 이 절은 푸코의 논의가 계급의 관점을 유지하는 풀란차스에 의해 어떻게 비판적으로 수용되었는가를 검토한다.98) 개체화, 지식/권력, 생산성/억압성, 그리고 국가/권력의 범주에서 논한다.
첫째로 풀란차스는 개별화 논의에서 푸코를 참조한다. 푸코는 권력의 실천에 의한 정상화를 분석한다. 이것은 생체권력에 의해 신체에 각인 되는 해부정치와 개인의 삶을 보장하는 생체정치(사목권력)에 의해 보증된다. 풀란차스는 푸코의 논의를 적극적으로 수용한다. 그는 푸코의 독창적 공헌{이것은 “특정한 권력의 제도에 대한 유물론적 분석을 제공”(SPS 67)하는데}이 “국가권력이 행사되는 주체의 신체성을 형지우는 권력 행사의 [단지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기술의 물질성에서 표현된다”(SPS 70)99)는 것을 통찰한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곧 풀란차스는 푸코를 비판한다. 왜냐하면, 푸코가 권력의 이러한 물질성을 생산관계와 사회적 분업에서 파악하는 것을 거부하기 때문이다. 푸코는 권력(개체화)의 준거틀을 판옵티콘 또는 각각의 장에 내재하는 추상적 기계(다이아그램)로 본다.(SPS 67-8) 풀란차스의 개체화는 “자본주의적 신체에 현존하는 생산관계와 사회적 분업의 물질적 형상이며 또한 이 개체화는 이러한 (정치적)신체를 창조하고 복종시키는 국가의 실천과 기술의 물질적 효과”(SPS 67)이다. 이러한 진술은 세부적으로 관찰되어야 한다.
우선 사회적 분업(특수한 자본주의의 시간적 공간적 모태)이 개체화의 기반이지만 “이러한 생산관계와 노동구조의 구조가 세분화된 사회체의 특정한 형태, 즉 개체화를 직접 만들지는 않는다”(SPS 64) 이것은 테일러리즘과 같은 연속적이고 동질적이며, 분할되고 파편화된 공간-시간의 조직화인 노동과정과 그것의 실천에 의해 구현된다. 따라서 그 구조적 준거틀과 실천에 조응하는 상이한 신체성이 주조된다. 그러므로 “부르주아적 개체화와 노동자 계급적 개체화가 있으며, 또한 부르주아적 신체와 노동자 계급적 신체가 있다”(SPS 75) 이러한 통찰은 푸코의 정상화에 대한 구체화로 이해된다.
두 번째로, 자본주의 국가의 제도적 물질성이 이 개체화에 뿌리를 내린다. 이것은 국가장치가 그 개체화에 맞도록 구조화됨을 의미한다. 반면에 국가는 단지 사회적 분업의 단순한 모사가 아니라, 인민대중의 고립화에 적극적으로 참여한다.100) 이것은 이데올로기적 작용을 통해서 강화되는데, 이데올로기적 실천을 단순한 진리/허위의 대당속에 위치시켜서는 안된다. 즉 “지배적 이데올로기의 기본적 형태는 이미 국가의 실천에 물질화 되어 있기 때문”이며 따라서 “국가 장치와 권력의 실천에서 직접 구현되는 사회적 분업으로부터 분비되는 기본적이고 ‘자연발생적’ 형태를 가진 이데올로기”인 것이다.101)
두 번째는 지식-권력의 논의에서 푸코를 수용한다. 우선 푸코는 지식과 권력의 관계를 동전의 양면으로 파악한다. 그래서 그는 첫번째로 “지식의 장이 상관적으로 구성되지 않는다면 권력관계는 존재하지 않으며 동시에 권력관계를 전제하지 않고서도 이것을 구성하는 지식은 존재하지 않는다”102)고 주장한다. 두 번째로 그는 두 가지 유형의 지식인 즉, 보편적(universal) 지식인과 전문적(specific) 지식인을 제시한다.103)
푸코의 첫 번째 논의와 관련하여 풀란차스는 이러한 푸코의 논의를 직접적으로 수용한다. 그러나 그는 자본주의 생산관계와 사회적 분업이라는 문제설정에서 이것을 제기한다. 이것은 육체노동과 정신노동의 분할이라는 사회적 분업에서부터 지식권력에 대한 설명을 제공하는데, 이러한 분할영역의 집중점은 국가이다.104) 즉 국가는 이 분리에 결정적인 의미를 가지며 이것은 국가의 물질성으로 표현된다. 즉 국가장치 전체, 즉 이데올로기 장치 뿐 아니라 억압적105) 및 경제적 장치에 있어서, 국가는 육체노동으로부터 분리된 정신노동[지식과 권력]을 구현“(SPS 55)한다. 그리고 이러한 자본주의적 형태의 국가장치(이데올로기 장치 뿐 아니라 군대, 재판소, 행정기관과 경찰 등)는 지식과 담론의 작동 및 그것의 통제를 행하고 이러한 지식과 담론으로부터 육체노동의 측면에 위치하는 인민대중은 배제된다. 이처럼 다양한 국가장치와 그 담당자에 의해 지식[과학]이 영속적으로 독점된다. 따라서 노동의 사회적 분업의 특수성에 따라 자본주의 국가에서 지식과 권력의 유기적 관계는 가장 완벽한 방식으로 실현된다.
두 번째 지식인에 관해 논의한다. 푸코의 권력/지식의 논리를 계급국가의 관점에서 수용한 풀란차스는 “지식인”에 대한 논의에서도 푸코의 관점을 변형한다. 푸코는 “‘보편적인 것’, ‘전형적인 것’, 또는 ‘만인에게 옳고 참된 것’”106)을 이야기하는 진리의 담지자, 위대한 작가로서의 보편적 지식인과 “[단지] 몇 명의 동료와 더불어 삶을 풍요롭게 하기도 하고 때로는 삶을 파괴할 수도 있는 권력을 가진 사람, 국가에 봉사할 수도 국가에 반할 수도 있는 영혼의 찬미자가 아니라 삶과 죽음을 요리하는 전략가”107)로서의 전문적 지식을 구분하면서 2차 대전 후 전문적 지식인의 등장을 주장한다. 그러면서 그는 전문적 지식인의 지도적 역할을 포기한다. 왜냐하면 “사건들(events)을 통해서 대중(the masses)이 지식을 결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드러났고, 그들이 가지고 있는 국지적이고 대중적인 형식의 지식이, 제도와 현대적인 지식인이 그 안에서 활동하는 일반화된 ‘진리의 체계’와 연결된 권력의 효과에서 점차 신용을 잃고 자격을 빼앗기고 또는 비합법적인 것으로 간주”108)되었기 때문이다.109)
풀란차스는 전문적 지식인을 국가 내에서의 지배계급인 부르주아지와 연관시킨다. 부르주아 계급의 권력을 대표하는 자본주의 국가는 “부르주아지가 다양한 직업과 정신노동에 특유한 전문화를 전제로 한 지형에 기초하는 한, 부르주아지는 그 자신이 지배계급으로 형성되기 위해서 유기적 지식인 집단을 필요로 하는 역사적 최초의 계급”이다. 그리고 이러한 유기적 지식인은 “지배계급(부르주아지)의 헤게모니를 조직하는”(SPS 61) 역할을 수행한다. 이처럼 풀란차스는 푸코와는 달리 자본주의의 노동의 분업에 따른 유기적 지식인에 주목하였을지라도 그는 이를 계급지배의 토대에 따라 변형하여 부르주아지의 적극적 역할에 주목한다.110)
풀란차스가 푸코를 인용하는 세 번째 논의는 권력의 생산성이라는 푸코의 통찰이다. 권력은 주권자에 의해 소유되고 그의 지배를 위해 억압(때로는 이데올로기의 수단을 동원해서)의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관계를 형성하고 생산한다. 풀란차스는 푸코의 입장에 동의한다. 관계적 권력을 사고하고 국가의 균열을 이론화한 풀란차스는 생산관계(계급관계)를 재생산하고, 지배계급을 통일시키고 피지배 계급에 물질적 양보와 개체화를 통한(국가)권력을 상정했다.111)
그러나 계급이익의 담지자로 파악한 풀란차스의 관계론적 국가는 푸코의 생산적 권력에 전적으로 동의할 수가 없다.112) 왜냐하면 사실 풀란차스에게 있어 그 생산성은 계급지배의 확립을 위한 일정한 타협전술 즉 최소의 비용전술과 효과적 지배기술에 불과할 뿐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풀란차스는 계급사회의 지배로서의 국가의 (내재된) 폭력성에 더 많은 주목을 하고 그 핵심기제로 “법”을 지목한다.
“자본주의적 법과 그 특수성(추상성․보편성․형식성)의 뿌리는 생산관계와 사회적 분업에서 탐구”(SPS 86)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공공질서의 조직자와 시민사회 속에서의 자유롭고 평등한 법적 주체라는 관념으로서의 법의 이미지를 벗어날 수가 없다. 이처럼 법은 외재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지배메카니즘에 이미 내재되어 있으며, 이것은 자본주의 국가의 제도적 물질성에 각인된다. 따라서 법의 역할은 자본주의적 생산관계와 노동분업의 강화와 관련있다. 그런데 계급사회에서 계급적대의 핵심은 폭력이고, 따라서 물리적 폭력이 공공연한 형태로 나타나지 않는다 할지라도 “폭력은 여전히 아니 이전보다 더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SPS 80)한다. 그러므로 지배 기제로서의 법의 핵심은 폭력이며 따라서 법은 억압의 조직자, 물리적 폭력의 조직자이며 죽음을 관리한다. 그러나 법은 부정적으로 작동되지 않는다. 정당성의 법적 이데올로기에 근거하여 “인민에게 발언을 허용할 뿐 아니라 … ‘어떤 다른 무엇’-행위-적극성이 있다는 식으로”(SPS 83) 적극적 행위를 허용하고 (지배의 틀을 유지하는 한에서, 아니 지배를 강화하는 차원에서) 피지배 계급들의 권리를 반영한다. 그러나 법의 이러한 기능은 결코 국가의 계급지배의 모든 수단일 수 없다. 국가는 국가이성이라는 명분 하에 “국가의 활동, 역할, 장소는 법과 법적 규정을 넘어서 멀리 뻗쳐”(SPS 84)진다.
마지막으로 풀란차스는 국가/시민사회에 대해 논의한다. 권력에 대한 푸코의 논의는 두 가지 차원에서 살펴 볼 수 있다. 첫째가 사회적 관계의 다차원성으로서의 권력과 두 번째는 권력의 편재성과 권력테크닉의 전사회적 확산이라는 차원 즉 규율, 다이아그램이라는 측면에서의 권력의 작동이다. 전자에서는 주체 없는 의도로서의 권력에 대한 논의가 가능하고, 후자에서는 모세혈관 곳곳에서 진행되는 저항의 다원성과 저항의 목표 즉 규율의 변경에 관한 논의를 할 수 있다.113)
풀란차스는 두 가지 차원 모두에서 푸코를 수용 비판하고 있다. 그는 사회적 관계를 국가 안으로 끌어들여 국가 내에서의 관계를 사고하고 있으며, 따라서 국가는 세력관계의 응축이다. 응축으로서의 국가는 계급투쟁에 종속되며 따라서 국가의 정책은 단일한 계급이 아니라, 다계급의 관계의 산물로서 (단일한 계급의 의도가 관철되는 것이 아니라는 의미에서) 주체 없는 과정이다. 이처럼 풀란차스는 푸코의 관계로서의 권력개념을 수용하되, 계급 관계로서의 계급권력으로, 그리고 사회라는 차원을, 사회관계가 응축된 것으로 파악된 국가라는 영역으로 논의를 변경한다.114)
두 번째로 풀란차스는 푸코의 권력의 편재성 논의를 국가(계급)권력의 편재성의논의로 변경한다.115) 왜냐하면 권력관계는 생산관계와 노동분업에 그 물질적 토대를 두고 있으며 국가가 자본주의적 관계의 응축이므로 권력관계는 사회에 편재된다. 따라서 국가는 계급투쟁의 응축이고 이 투쟁에 조응한다. 그리고 계급투쟁은 국가에 대해 우위를 점하고 국가를 넘어 펼쳐진다. 왜냐하면 생산관계에 내재된 계급관계를 국가는 모두 포괄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풀란차스의 발본적인 저항의 대상은 자본주의적 생산관계이다.
이상의 이러한 관점에서 양자는 국가/시민사회, 토대/상부구조, 사적/공적 영역의 대당을 해체하고 있다. 그런데 푸코의 해체는 쉽게 이해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는 모든 중심성의 해체와 모든 관계에 편재된 권력을 다루기 때문이다. 그러나 풀란차스의 입장은 논쟁을 제기한다. 그는 생산관계․노동분업의 중심적 근거를 토대로 계급과 계급투쟁으로 모든 것을 환원한다. 심지어 그는 남성․여성의 문제를 계급관계에서 중층 결정된다고 본다. 특히 그는 국가를 계급관계의 물질적 응축이지만 무정형적인 것이 아니라 계급적 통일성이 유지되는 부르주아지의 지배가 관철되는 기제로 파악하고 있다. 따라서 그의 논의는 그가 그토록 비판했던 계급국가의 사회의 관여라는 외재성의 비판의 여지를 남긴다. 따라서 그는 국가의 생산관계의 내재성․편재성과 계급국가로서의 중심성 그리고 이에 따른 이행의 상이한 전략의 접합을 과제로 남긴다. 이러한 문제가 미해결된 채 맞은 그의 요절은 그에게 상이한 평가를 가능하게 한다.
제솝은 풀란차스를 “자신[풀란차스]이 인정했던 것보다 더 많은 영향을 푸코에게 받았으며 훨씬 덜 마르크스주의적이었으며 훨씬 더 푸코적이었다”116)고 평가하면서도 그가 경제환원론에서 벗어나지 못했다고 평가한다.
반면 우드는 “새로운 ‘진정’ 사회주의자(New 'True' Socialism: NTS)의 최초의 대변자라기 보다는 그들의 선구자에 속하는 인물 중 최후의 사람117)”이라고 파악한다. 풀란차스에 대한 평가의 기본관점은 (경제환원론자로의 회귀냐 사민주의자냐라는) 이분법적으로 평가하기 보다는 스스로가 지적했듯이 “정통”이라는 권위를 부정하고 구체적 시간과 공간의 모태에서 마르크스주의의 전화노력의 적극성에 맞추어져야 한다.
Ⅳ. 풀란차스와 푸코에게 있어서의 ‘정치’
1. 푸코의 진리의 정치비판
푸코의 관계론적 권력론은 “진리의 정치”에 대한 비판이다. 진리의 정치학이란 과학적 진술의 정치학(the politics of the scientific statement)118)으로 칭하는데 이것은 담화의 주체를 상정하고 그 주체는 진리(과학)의 소유자로 표상 한다. 진리의 정치(근대정치학)는 근대 군주제도의 성립과 관련 있다. 즉 “군주제는 봉건적 권력의 대행자들 사이에 벌어진 끊임없는 투쟁을 배경으로 성립”하였고, 따라서 “군주는 전쟁과 폭력과 약탈을 종식시킬 수 있는 힘을 가진 심판관”이다. 군주의 역할은 “사법적 기능과 금지 기능을 갖춘 권력 기구를 완성”하는 것이고 그래서 “주권, 법, 금지는 권력을 대표하는 체계”이고 이것이 “권리의 이론”(theory of right)이라는 틀로서 이론적 모양을 갖추었다. 이러한 문제 설정은 오늘 날까지 중요한 정치학의 문제이다:
우리가 필요한 것은 주권이나 법률, 금지라는 주제에 얽매여 있는 정치철학이 아닙니다. 이제 우리는 왕의 머리를 잘라 버려야 합니다.(cut off the King's head) 정치학 이론에서는 아직도 이 일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119)
푸코의 관계론적 권력개념은 이러한 “권리의 이론”으로서의 “진리의 정치”에 대한 비판이다. 진리의 정치비판은 왕의 머리를 자르는 일에서부터 시작된다. 그러므로 첫 번째 주체의 문제를 살펴보고 두 번째로 주체가 채용한 권력의 기제 즉 지식과 권력 그리고 권력테크닉에 대한 비판을 살펴보고, 푸코의 진리정치 프로젝트를 비판하고자 한다. 그것은 첫째로 권력에 대한 설명에 있어 기능주의자라는 비판을 살펴보고 두 번째는 저항의 문제에 대해 세 번째로 규범의 문제영역에서 이루어지는 비판을 다룬다.
우선 진리의 정치학은 국가 또는 주권자를 진리의 심판관으로 상정하고 이데올로기적, 제도적 처벌권을 가지고 허위라고 규정된 것을 억압하고 금지한다. 즉 진리의 정치학은 타자를 진리/허위의 대당에 의해 억압한다. 푸코는 이러한 진리담론을 비판한다. 따라서 “진리의 정치학” 비판의 “정치적 과제는 오류나 환상, 소외된 의식이나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진리 그 자체”120)에 있다. 푸코에 있어서 진리는 그 자체로 진실인 것이 아니라 허위와 진리를 판단하는 기준인 것이다.121) 그 기준은 주체․주권․국가․계급 등으로 표상 된다. 푸코는 이러한 주체를 폐기한다. 주체의 폐기는 근대적 의미의 국가이론의 폐기로 이어지고 “그것은 사회학, 심리학, 범죄학 등등으로 대체된다. 그 왕은 목이 없고, 정치세계는 실제적 중심을 가지지 않는다.”122) 거대한 용기에 담겨져 있던 권력 또한 분산되고 파편화된다. 그리고 권력 자체가 새롭게 정의된다.
이제 푸코는 새로운 주체 또는 새로운 권위체를 설정하거나, 또는 형성하는 메커니즘에 대해 말한다. 이것은 권력에 대한 새로운 문제 설정이다. 푸코는 진리/권력쌍의 오래된 동맹을 비판한다. 즉 진리는 그 자체가 권력체계의 도움에 의해 인정된다. 반대로 권력은 진리(정의)의 담론을 통해 자신의 보편성을 강요한다. 정치세계는 이러한 진리와 권력의 메커니즘이다:
진리는 하나의 진리가 만들어지고 분배되고 통용되고 작용하도록 만드는 질서화된 절차의 체계라고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진리는 권력 관계와 순환적으로 연결되어 있어 권력이 진실을 생산하고 떠받쳐 주고 있으며, 역으로 진리는 권력의 효과를 유도하고 확산시키는 것이다. 진리의 체계라는 말이 그래서 생긴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진리의 체계는 단순히 이데올로기적이라거나 상부 구조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 될 것이다. 체계는 자본주의를 이루고 발전시켜 가는 하나의 조건이다. 약간의 수정이 필요하겠지만, 이러한 진리의 체계는 사회주의 사회에서도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123)
진리의 정치학은 권력과 권력기제의 결탁을 통해 진리 제정권과 진리자의 옹립에 대한 담론이다. 이것은 두 가지 점에서 특징적이다. 우선 진리의 정치학이 지식과 지식인을 자신의 통일성 확립에 동원한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권력테크닉을 발전시키고 전사회적으로 확산시킨다는 것이다.
전자와 관련하여 푸코는 더 이상 진리의 정치학이 상정하는 정치주체는 선험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푸코는 “인간이 주체로서 구성되는 서로 다른 양식의 역사를 서술”124)함으로써 진리의 정치학의 주체가 권력관계의 산물임을 보여준다. 따라서 푸코의 권력에 대한 서술은 “양적으로 존재하며, 정치주체의 귀속되어 주체의 의지에 따라 질서유지와 억압에 봉사”한다는 근대권력이론, 근대주체이론 나아가 진리의 정치비판이다.
또한 이러한 주체비판은 지식과 지식인의 역할을 설명한다. 지식은 권력을 배제된 근원적인 진리의 이데아에 대한 열망으로 가득찬 장이 아니라, 권력과 동일한 영역에서 권력/지식으로 존재한다. 이런 의미에서 “권력이 달라지면, 지식이 변한다.”(another power, another knowledge)125) 따라서 푸코는 진리가 아니라 “진리의 체계”에 주목한다. 그러므로 담론의 장, 지식의 장에서 우리는 지식의 본질이 아니라 권력, 권력의지를 밝혀내야한다. 지식인은 권력/지식에 동원된다. 이때의 지식인은 전통적 지식인이 아니라, 전문지식인이다. 후자는 전자가 보편적 지식의 표상인 반면, 특정한 삶의 영역에서 자신의 일에 전문적인 사람들을 뜻한다. 그런데 푸코가 보기에 전문적 지식인은 단순히 권력에 채용된 도구가 아니다. 권력이 있는 곳에 저항이 있다는 푸코의 진술은 전문적 지식인도 권력관계의 장에 위치지워져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푸코는 오히려 국부적 영역에서의 이들의 저항의 적극적 가능성을 얘기한다. 왜냐하면 각각의 공간에서 “진리의 체계”에 대항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 푸코에게 전문적 지식인이 ”현재 진리가 작용하고 있는 사회, 경제, 문화적 주도권의 형태로부터 진실의 힘을 분리“126) 하는 가능성을 소지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식인의 역할은 “서로 다른 지식에 수평적 관계를 맺어 주었다거나, 정치적 초점이 다른 여러 가지 투쟁의 이슈들을 유기적으로 연관되도록 중개 역할을 했다는 점에서 찾아야 한다. 따라서 법관이나 정신과 의사, 의사나 복지 정책 담당자, 그리고 실험실에 처박혀 있는 기술자, 나아가서는 사회학자에 이르기까지 그들은 모두 각자의 영역에서 일을 하고 있지만 상호 교류와 지원을 통해 지식인이 이끌어 가야 할 거대한 정치적 운영 과정에 참여”127)하는 것이다.
이처럼 푸코는 “‘경제적, 전략적 영역에 있어서 테크닉-과학적 구조들’의 확산에서 야기되는 변화, 과학적 합리성의 형식의 성장과 확산 그리고 그것과 관련된 지적 활동과 새로운 관직 형태의 등장은 ‘지식인이 정치화되는 전반적 과정’”을 보여준다. 이제 지식인은 정치적 상품인 것이다.
푸코는 역사의 과정을 진보 또는 가치(자유 평등 등)의 실현으로 파악하고 권력행사가 폭력의 감소와 동의 (다른 의미에서 헤게모니)의 확산으로 파악하는 접근법을 거부한다. 그는 “개인과 인구를 겨냥한 권력의 새로운 테크놀로지의 등장과 발전, 그리고 정치적 합리성의 새로운 형식들의 접합을 포함하는 통치화라는 복잡한 과정을 통해 이해”128)한다. 이것은 국가/시민사회, 폭력/동의의 대당을 설정하고 전자에서 후자로의 이행이라는 현대사회의 설명방식을 발본적으로 비판한다. 이것은 정치사회를 국가에 한정하고 정치적 실천 자체도 국가에로의 실천(혁명)으로 설명에 대한 비판이다. 나아가 개별화(정상화, 규격화)되는 개인들에 대한 설명을 제공함으로써 모세혈관의 말단에서 전개되는 저항과 전략의 새로운 차원을 또한 제기한다.
푸코의 “새로운 진리의 정치”에 대한 프로젝트는 세 가지 점에서 비판될 수 있다 첫번째는 권력에 대한 기능주의적 설명방식과 두번째는 저항의 문제이고 세 번째는 규범의 문제이다. Walzer는 푸코의 논의를 검토한 후 그를 무정부주의자 그리고 더 나아가 허무주의자라고 평가하는데 전자는 저항의 문제설정에서 후자는 규범의 문제설정에 대응한다.129)
사회 곳곳에 편재되어 주체없는 감시의 기제인 푸코의 추상적 기계(판옵티콘, 다이아그램)의 문제설정은 “종종 순수하게 기술적인 분석에 도달하고, 또 종종 가장 전통적인 기능주의의 인식론적 전제를 이어 받는 신기능주의”(SPS 87)이다. Walzer는 다음과 같이 평한다:
푸코는 감옥 또는 은신처의 Kafka가 아니다. 그의 설명은 초현실적이지도 신비적이지도 않다. 이 규율 사회는 어떤 사회 즉 사회 전체이다. 그리고 이 전체의 그 부분들의 설명에서 푸코는 기능주의자이다. 아무도 이 전체를 계획하지 않았고, 아무도 그것을 통제하지 않는다. 그러나 마치 보이지 않는 손에서처럼 모든 전체의 부분은 다시 서로 적합시킨다. 때때로 푸코는 그 적합에 놀란s다.(Walzer 62)
이러한 기능주의적 설명은 사회전체를 가로지르는 권력, 그 권력이 채용한 권력테크닉과 규격화된 개인의 결과이다.
두번째는 권력/저항의 쌍이 비판된다. 푸코의 저항은 권력(구체적으로 권력테크닉)과의 연관 속에서 존재하며 이에 따라 비판의 표적이 된다. 즉 저항과 권력은 동일한 다른 이름이며, 따라서 저항은 권력과 마찬가지로 편재성 유동성을 가지게 된다. 권력의 또 다른 특성은 생산성인데 규율화된 개인은 생산적인 권력에 왜 미시저항(micro-revolt)을 시도하는지 설명될 수 없다. 그래서 저항의 근거로 “평민정신”(plebian spirit)이 등장하지만 이것 또한 사회관계가 권력관계이고 저항관계인데 여기로부터 분리되어 설명된 평민정신은 기술적 의미밖에 가지지 못한다. 이처럼 기능주의적 입장은 저항의 기반, 즉 중심화된 주체와 적대의 문제설정을 폐기한다. 따라서 저항의 대상도 막연한 규율메카니즘이다.
저항에 대한 이러한 입장은 세번째로 푸코에게 규범의 문제를 제기한다. 이것은 더욱 발본적이다. 인식론적 수준에서 에피스테메의 단절(연속적이지 않고 발전적이지 않은)과 정치적 지배에 있어서 통치테크닉의 상이한 형태 속에 귀속되는 푸코의 역사는 가치의 문제에 둔감하다. 그는 이성․자유․평등의 문제를 권력의지 또는 진리의 효과로 설명하면서 “진리의 정치학”의 프로젝트에 다름 아니라고 비판한다:
푸코의 급진적 폐지주의는 무정부주의자가 아니라 허무주의자이다. 푸코에게 있어 남겨진 것 즉 명백한 인간은 없고, 새로운 법전, 규율만이 산출될 것이다. 그리고 우리에게 푸코는 이것이 우리가 살았던 것보다 더 좋을 것이라는 기대를 주지 않는다. 또한 그는 우리에게 더 좋은 것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방식을 우리에게 주지 않는다. (Walzer 61)
이상에서 보듯이 푸코의 “진리의 정치” 비판은 근대적 정치에 대한 발본적 비판이다. 그러나 근본적 해체전략은 새로운 통찰을 제공해주지만, 근대정치학의 긍정적인 주장까지도 무시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그것은 규범에 대한 문제이며, 저항주체에 대한 문제이다. 이에 대해 Walzer는 다음과 같이 주장하고 있다:
나는 푸코와 토마스 홉스(그는 정치 이론의 영역에서 푸코의 위대한 적대자인데)를 비교하여 획득된 논의를 정리한다. … 홉스는 정치적 주권에 관하여 매우 잘못된 설명을 제공한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현대 국가의 실제에 관한 어떤 것을 포착한다. 푸코는 우리에게 국부적(local) 규율에 관한 매우 잘못된 설명을 제공한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사회의 실제에 관한 어떤 것을 포착한다.130)
풀란차스는 푸코를 수용하면서도 계급과 사회주의라는 문제설정을 통해 푸코와 차이를 보인다. 다음은 풀란차스가 정치논의를 통해 이것이 어떻게 접합되었는지 살펴본다.
2. 풀란차스에 있어서의 정치
풀란차스와 푸코의 만남은 풀란차스에게 “정치”에 대한 새로운 가능성으로 와 닿는다. 즉 과학/이데올로기의 철학적 반정립과 사회/국가의 정치적 반정립을 비판하고 관계적이라는 권력개념과 권력의 유동성․편재성이라는 특징의 푸코의 담론은 풀란차스에게 계급투쟁으로서 정세적․관계적 마르크스주의를 복원하려는 시도로 나타난다. 그의 관계론적 국가론은 이러한 문제의식의 결과이다. 그러나 푸코를 수용하여 계급투쟁의 이론으로서 국가론을 복원하여 마르크스주의 정치의 공백을 시도하였던 그는 계급과 계급투쟁을 국가이론화 시킴으로써 한계를 드러낸다. 본 절은 푸코의 만남을 통해 풀란차스가 마르크스주의의 정치복원 노력과 그의 이러한 노력에 대한 비판을 다룬다.
우선 풀란차스는 푸코의 진리의 정치비판을 승인하고, 관계론적 권력개념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마르스스주의를 계급투쟁의 이론으로 전화시킨다. 풀란차스는 관계적인 권력의 편재성을 무정형의 사회, 즉 규율이 광범위하게 작동하는 사회가 아니라 생산관계와 노동분업에 위치지운다. 따라서 권력은 사회적 노동관계 속에 편재되며, 국가는 이러한 관계에 이미 내재되어 있다. 이것은 규율권력이 사회 도처에서 존재한다는 푸코의 주장과 동일한 맥락이며, 따라서 풀란차스에게 국가/시민사회라는 대당은 왜 그러한 관념이 생겨났는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그의 대답은 이것 또한 점유와 소유에 대한 자본주의적 생산관계 속에 내재된 것으로 파악된다.
이제 시민사회 자체와 국가자체의 분리를 계급투쟁이 가로지른다. 국가는 생산관계적, 노동분업적 그리고 사회적 계급투쟁의 물질적 응축이다. 사회적 계급은 국가에 각인되고 그것은 제도적 물질성에 반영된다. 국가정책과 국가진술은 단일한 계급의 의도에 따라 생산되는 것이 아니라, 계급투쟁의 효과이다. 따라서 국가정치는 계급투쟁의 그 자체이며 계급투쟁의 결과로서 나타난다. 이것은 법 또한 “사회적 행위자들에게 형식적 응집의 틀”(SPS 88)을 부과한다. 따라서 “지배계급들과 피지배계급들 사이의 관계에서 계급들의 위치와 행위자를 많든 적든 배분하는 작용”(SPS 90)을 행한다. 즉 “법적 공리는 지배계급들의 정치적 예측을 가능하게 한다. 법적공리는 계급들 사이의 세력관계를 표현하면서 전략적 계산의 토대로서 작동한다. 이는 법적 공리가 법체계의 변수 속에 피지배 계급들의 저항과 투쟁이라는 요인을 포함한다. 따라서 자본주의적 법은 계급투쟁에 종속된다. 따라서 인민의 저항은 국가와 제도적 물질성에 각인되어 있다.
그러나 이러한 풀란차스의 진술은 국가의 계급적 통일성을 주장하면서 변형되기 시작한다. 국가는 생산성을 가진다. 그러나 이 생산성은 억압성에 다름아니다. 왜냐하면 국가의 생산성은 효율성을 위한 억압성의 자기변신이기 때문이다. 법은 생산관계와 분업을 그 모태로하며 “행위자들의 파편화(개체화)를 형성하는데 협력”(SPS 87)한다. 법은 또한 일반적 합의의 정당성을 지니고 나타나면서 ”사회적 상상력 속에서 행위자들의 통일성을 기록함으로써 그 통일성을 표현하며, 그리고 개체화의 다양한 과정을 공고하게 한다. 그리고 사회적 행위자가 원자화되는 그리고 노동수단으로부터 분리되는 순간부터 순수한 기호(추상성․보편성․형식성) 양식에 기초하여 조직된 법은 상상의 표상인 이데올로기적 메카니즘에서 특권적 지위를 획득한다“(SPS 88) 이처럼 국가는 법과 폭력성을 이용하여 시민사회와 국가의 분리를 조장하고 개인에게서 계급성을 박탈한다.
이상에서 보듯 풀란차스는 한쪽에서는 푸코를 수용하여 국가정치(계급투쟁)의 역할을 강조하기도 하지만, 또 한편에서는 국가권력 통일을 주장하며 진리의 정치로 회귀한다. 그러나 국가내의 투쟁을 상정할 때조차 그 권력관계의 주체는 쁘띠부르주아지와 헤게모니 분파간의 관계이고 더 나아가 국가기구의 물질성에 대한 변형을 장기적 테제로 제출하고 있다. 따라서 그의 입장은 계급의 입장에 서 있으며 계급국가인 것이다. 적대의 단순성에 대한 그의 주장은 이를 잘 보여준다. 그는 성의 문제, 계층의 문제등 모든 모순에 계급적대를 상정한다. 국가는 계급의 의도가 각인되고 지배가 관철되는 영역이다. 따라서 그의 정치이론은 국가이론화된다. 그 예가 레닌의 이중권력론이다.
레닌의 이중권력에 대한 그의 평가는 그의 입장이 얼마나 이론적인가하는 것을 보여준다. 러시아라는 구체적 상황의 산물임에도 불구하고 풀란차스는 “진리의 정치학”의 입장에서 연유된 것으로 파악한다. 즉 전략과 전술은 상황성의 범주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의 관계론적 국가이론에서 위치지우길 원했다. 따라서 계급투쟁은 물질적으로 응축된 국가라는 관점에서 다루어진다.
국가/시민사회의 이분법의 해체도 사실 국가의 관점에서 시민사회의 재배를 사고한다. 그리고 국가의 계급적 통일성에 대한 논의와 저항이 국가 밖의 대중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논의를 통해 국가/시민사회의 대당으로 다시 회귀한다. 이처럼 그는 관계론적 입장, 즉 투쟁의 입장에서 정치를 파악하기를 거부하고 국가의 입장에서 정치를 파악했다. 정치세계를 살아가는 대중의 입장에서 정치를 파악하기를 거부하고, 계급지배를 효과적으로 보장하는 국가의 입장에서 정치를 파악한다. 따라서 그의 푸코의 수용은 국가이론의 논의틀이 변하지 않은채 형식적인 참조에 그친다. 그는 푸코의 국가, 계급중심성의 해체와 저항의 다차원성의 일상영역의 정치를 참고해야했다. 투쟁의 우연성과 일상성 그리고 계급적대의 단순성으로 환원되지 않는 적대의 다원성을 정치세계로부터 끌어내야 했다. 그러나 푸코가 허무주의․기능주의․무정부주의에서 고민하듯이 그는 국가주의․이론주의에서 한 발자국도 옮기지 못했다. 양자는 결국 미시정치와 거시정치의 이론적 양극에서 방황했다.
Ⅴ. 요약 및 결론
풀란차스의 푸코 비판과 수용이 정치 이론의 관점에서 과연 성공적으로 끝났는가 하는 것이 마지막 결론에서 논의하고자 하는 내용이다.
우선 풀란차스는 푸코의 “진리의 정치”비판에 대한 기획에 동의한다. 그들은 “진리의 정치”의 주범을 마르크스로 보고 있다는데 유사점을 가지나, 푸코는 이것이 “정통” 마르크스주의이며, 따라서 마르크스 전체에 대한 비판이라는 경향을 보이는 반면 풀란차스는 “정통” 마르크스주의는 존재하지 않으며 따라서 푸코가 비판한 경제주의적 마르크스주의는 허상의 마르크스주의라고 반박한다.
이처럼 푸코와 풀란차스 양자가 경제 결정론적 마르크스주의를 비판했던 이유는 이것이 정치를 철학화 과학화하는데 있다. 이러한 마르크스주의는 예정된 변혁, 선험적 주체, 그리고 그 선험적 주체가 점령하고 있는 국가의 문제설정을 통해 정치 영역을 질식시킨다. 따라서 푸코는 진리의 정치의 모든 문제 설정을 해체한다. 이제 푸코에게 주체는 없으며 따라서 계급은 존재하지 않는다. 제도와 법도 실체로서 존재하지 않는다. 오로지 남는 것은 사회의 모든 곳을 관통하는 규율이며 실체 없는 의도이고 저항이다. 저항과 의도는 관계성의 범주이다.
Walzer는 이러한 푸코의 논의가 규율로 모든것을 설명했다는 점에서 기능주의이고, 실체가 없다는 점에서 무정부주의이며, 가치의 전제가 없다는 점에서 허무주의라고 평가한다. 푸코는 근대적 문제설정의 폐기속에서 규범과 정치주체라는 핵심까지 버린것이다. 푸코는 마르크스주의가 정치를 질식시키고 있다는 자신의 비판이 자기 자신에게로 돌려진다. 그의 “새로운 진리의 정치”(new politics of truth)는 “정치 해체학”이다.
제솝이 언급했듯이 풀란차스는 이러한 푸코의 논의에서 마르크스주의 위기 탈출의 해법을 찾는다. 경제적 마르크스주의의 비판을 위해 고심하던 풀란차스에게, 특히 그의 관계론적 국가론의 완성을 추구하던 풀란차스에게 푸코가 주는 암시는 무척이나 중요했다. 우선 풀란차스는 푸코의 시원적 주체의 부정이라는 테제에 동의했고, 국가의 문제를 넘어 사회 영역의 일상사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다. 그리고 저항이 각 사회 세세한 영역에서 일어나는 것에 대해 눈을 돌린다. 그는 마르크스주의를 개방한다. 따라서 정치 행위자는 일상의 영역, 즉 정치의 세계 속에서 계급과 같이 선험적이 아니라, 관계 속에서 서로간의 정치적 행위를 통해 국가뿐만이 아니라 다양한 생활 공간에서 드러난다.
푸코를 올바르게 이해했음에도 불구하고 ꡔ국가, 권력, 사회주의ꡕ는 근본적으로 포기할 수 없는 “계급범주”로 인해, 진리정치비판의 적극성을 사장한다.
푸코의 “규율”이라는 작동을 통한 사회적 지배를 생체정치, 해부정치라는 생산성에 집중할 때에도 풀란차스는 계급의 입장에서 그것이 계급성을 박탈하는 음모로 파악했고, 나아가 생산성은 계급 지배의 억압성을 통해 보증 받는다고 주장했다. 또한 푸코가 국가의 존재를 부정하면서 사회의 편재성을 주장할 때, 풀란차스는 이를 받아들여 계급투쟁이 “국가를 넘어 펼쳐진다”고 주장하는데 이렇게 할 때에도 계급의 효과적 지배를 위해 사회 말단까지 작용한다는 계급의 입장의 주장을 견지한다. 그리고 국가가 계급들의 물질적 응축이고 불안정한 평형이며 제도적 물질성을 가진 것으로 주장할 때조차도 국가 자체가 지배계급의 이해관계를 보장하는 중요한 행위자라는 입장을 잃지 않는다. 저항의 문제에 있어서도 저항의 센터를 국가와 계급모순 안에서 찾고자 했으며 국가 밖에서 찾을 때도 국가내에 포섭을 강조했다. 따라서 풀란차스의 푸코수용, 그리고 풀란차스의 토대 국가중심주의적 마르크스주의 비판의 기획은 푸코를 참조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푸코의 수용은 자신의 계급이라는 대전제 속에서 계급지배의 응집점, 즉 국가에서 정치를 사고했기 때문이다.
결국 푸코를 참조했을 때조차도 풀란차스의 정치 이론은 그가 초기부터 가졌던 생각 즉 정치의 부문 이론은 국가의 분석으로 대체되어야 된다는 생각에 충실했다. 단지 후기와의 차별성이 있다면 푸코의 수용 속에서 국가의 사회성 즉 국가의 편재성과 계급투쟁의 공간으로 사고했다. 그러나 이것도 잠시뿐이었다.
결론적으로 풀란차스는 푸코의 관계론적 권력론에서 “계급투쟁의 우연성”과 “적대의 다차원성”의 범주를 발전시키고 그것을 “구체적 상황”(정치세계)속에서 사고했어야 했다. 그러나 그는 이 모든 가능성을 계급국가 속에서 파악한다. 즉 이론으로 확립된 계급국가에서 정치현상을 파악한다. 따라서 “계급투쟁의 필연성”과 “적대의 단순성”으로 이론화된다. 이처럼 풀란차스의 정치 이론은 푸코의 “정치 이론의 해체”를 받아들이지만 국가 이론으로 대체시키고 그것을 “정치 세계의 직접성”(directness)에 근거하지 못함으로써 역사화 시키지 못하고 이론화시켰다는 점에서 실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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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MMARY
Study on Poulantzas' critique and acception of Foucault.
Yoo, Bumsang
Political Science
Graduate School
Seoul National University
Poulantzas tries to revive marxist politics through "structural state theory" in his early ages and through "relational state theory" in his later years. The book State, Power, Socialism(1978) deals with relational state theory in its greatest part. Foucault was largely involved in the transformation from the former to the latter theory.
Foucault defines modern politics "politics of truth" and criticizes it. Politics of truth preconditions lord, class and state as the subject of truth. The Subject criticizes truth/false through power and ostracizes non-truth. In this sense, politics of truth, as a "theory of right", can be defined as "the politics of the scientific statement". Foucault insists that marxism itself is politics of truth and criticizes economic marxism.
Foucault's criticism of politics of truth first cuts off the King' head(subject, class). The subject is not a priori but a mere creation of power. Therefore, the subject becomes normalized through power. Second, it is wrong to conceive that power oppresses the object in order to realize the politics of power. Relational power is imminent(ubiquity) within the society and produces the real. Subject produces the subject through knowledge and domination technique(bio-politics and anatomo-politics) selected by the power. Third, he criticizes resistance. He criticizes resistance against state power(global revolution). Resistance should be made in every sector of the society like capillary. Fourth, he abolishes differentiation between politics, formed by the concept of politics of truth, and economics, in other words "state/civil society" (superstructure/base) which restricts politics. Foucault examines how power techniques are ubiquiry inside the society. Therefore, criticism of politics of truth poses the possibility that it can be accomplished in the politics of multi-subjects that it can be accomplished in the politics of multi-subjects in multi-sphere(not only in state)
Poulantzas accepts Foucault's criticism of politics of truth. He also criticizes "economic-reductionist marxism", which equalizes itself to science, and "instrumental state theory". Poulantzas based the differences of political theories on relations of production and labor distribution and modeled himself after class and class struggle. In relational state theory, state is material condensation of classes and this is inscribed to institution. Therefore, state is the field of class struggle.
Poulantzas accepts and criticizes Foucault on these grounds. First, he insists on individualization by accepting Foucault's theory, but he realizes it through the class subject not through amorphous individual. Second he accepts Foucault's production of power based on the concept of repression. Therefore, state maintains rule over class though both production and repression. Third, he accepts micro-revolt but pursues a global strategy based on resistance out of state or class antipathy. Finally, he rejects differentiation between state and civil society and criticizes the externality of politics and economics. He insists on the rule over civil society by a class state.
Poulantzas' acceptance of Foucault remained as a formality. His theory shows reduction to modern(truth) politics criticized by Foucault. Poulantzas had to develop his political theory by accepting "micro-diversity of antipathy" and "micro-contingency" as "macro-diversity of antagonist" and "macro- contingency" based on concrete examples. However, Poulantzas continued "simplicity of class-antipathy" and "macro-necessity of class domination" based on the relations between production and labor distribution and class․class struggle. Therefore, his political theory became (state) "Theory"
1) 본 논문은 푸코의 비판적 프로젝트 전체, 즉 고고학적 단계, 계보학적 단계 그리고 자아에의 관심을 보이는 시기 전체를 참고하지 않는다. 또한 전기의 풀란차스의 구조주의적 입장과 후기의 관계론적 국가이론과 ꡔ국가, 권력, 사회주의ꡕ 이후의 시기 모두를 고찰하지도 않는다. 주로 푸코의 계보학적 단계와 풀란차스의 관계론적 국가이론만을 검토한다. 이것은 첫째로, 양자의 초기의 입장은 기존에 많은 사람들에 의해 소개되었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풀란차스가 푸코의 계보학만을 참조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필요에 따라 양자의 논의 전체를 언급한다. 여기서 한가지 지적할 것은 풀란차스의 푸코 수용에 대한 논의가 국내에서 거의 소개가 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이것은 첫째로 한국의 80년대 정치상황에서 과학주의를 표방한 담론인 스탈린주의의 경제결정론적 마르크스주의나 알튀세류의 구조주의적 입장이 설득력을 가졌기 때문이며, 두 번째로 그 당시 정치학자들에게 독일철학이 참조되었고, 프랑스철학이 소개 되어 있지 않은 것도 그 이유이다. 따라서 과학주의(경제결정론, 그리고 부분적으로 알튀세)에 대한 비판으로 가득차고 정치학자에게 생소한 푸코를 참조한 ꡔ국가, 권력, 사회주의ꡕ는 한국정치학에서 구조주의적 입장에서 취사선택될 뿐이었고, 푸코는 풀란차스와 관련하여 논의되지 않았다. 그리고 푸코를 위시해서 포스트논자들이 회자되는 90년대에 들어서도 ꡔ국가, 권력, 사회주의ꡕ가 주목받지 못하는 것은 최장집 교수의 언급처럼 “국가이론의 때이른 쇠퇴”때문이다. 그러나 국가/시민사회의 대당을 해체하는 푸코와 풀란차스가 볼 때 “국가이론의 쇠퇴와 시민사회론의 부활”이라는 담론은 토대/상부구조의 경제환원론적 오류이며, 따라서 이러한 문제설정은 근대정치학(진리의 정치학)의 문제설정에 다름아니다.
출처 : http://www.communnale.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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