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 장 프랑크푸르트학파의 비판이론
1. 비판의 의미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사회비판이론은 인식론적으로 독특한 비판정신에 입각한 것이다. 비판이론에 있어서 비판이라고 하는 개념은 독일철학 특히 칸트, 헤겔 및 마르크스의 인식론에 흐르는 비판정신을 계승한 것이다. 구체적으로 비판이론은 독일철학에서 발전된 비판의 두 가지 개념을 창조적으로 종합한 독특한 비판정신에 근거하고 있다. 한가지는 선험철학을 위한 칸트의 프로그램에 그 뿌리가 있고, 그래서 정당성의 검증(testing of legitimacy)을 뜻하며, 다른 한 가지는 이론과 실천의 대립에 관한 청년 헤겔학도들의 입장을 지칭하는 것으로, 이는 부정(negation)을 뜻하는 것이다. 마르크스가 실재론적 과학의 개념을 개척하면서부터 비판개념의 이 두 가지 의미는 종합될 수 있었다. 『변증법적 이론의 출현』에서 워랜(Scott Warren)도 비판이론의 비판정신을 다음과 같이 특징짓고 있다. 비판이론의 철학적 근원은 마르크스사상에 있어서 중심적 역할을 하는 변증법적 정신을 회복하려는 것이며, 이는 곧 변증법적 이론의 칸트적 및 헤겔적 근원에 복귀하는 것이다. 비판이론의 본질은 마르크스사상에 체현된 칸트와 헤겔의 인식론적 근원을 재정립하고 이를 비판적으로 재구성하는 것이다. 프랑크푸르트학파의 비판이론은, 당시 객관주의적이고 결정론적인 마르크스주의를 거부하고, 칸트의 구성적 인식론을 비판적으로 재구성한 헤겔의 변증법적 인식론을 구체적 현실비판과 실천에 적용한 마르크스의 변증법적 비판정신을 복권시킴으로써 정의로운 사회를 이룩할 수 있는 가능성을 탐색하려는 데 그 특징이 있다. 칸트에 있어서 비판개념은 인간인식의 능동적 구성능력에 따라 지식의 정당성을 검토하는 순수이성의 특징을 의미한다. 경험영역과 무관한 초험적(transcendent) 사변과 독단의 형이상학에서 태어난 칸트는 모든 지식이 경험과 더불어 시작되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간과 공간이라고 하는 감성의 선험적 형식이 없으면 대상직관이 이루어질 수 없고, 범주라는 오성의 선험적 형식이 없다고 하면 개념이 형성될 수 없다고 함으로써, 그는 인식의 모사설을 극복하고 구성설로의 인식론적 전환을 이룩한 것이다. 감성형식과 오성형식은 선험적 주관이기에 경험에 앞서 있고, 그래서 무질서한 경험적 실재에 질서를 부여한다고 하는 칸트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은 대상중시에서 주관중심으로의 인식론적 전환이며, 이렇게 볼 때, 이는 인식의 과정에서 소외되었던 인식의 주체를 복권시킨 근본적 비판이라 아니할 수 없다. 그러나 이러한 전환은 경험적 객관세계를 무시하고 관념적 주관세계로 회귀한 것이 아니라, 인간인식의 구성적 능력이 매개가 되어 주체와 객체, 의식과 대상이 변증법적 상호결정 관계를 이룩함을 뜻하는 것이다. 이러한 구성적 인식론은 인과의 원칙도 현상 그 자체에 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나타난 현상에 대하여 보편적 주관이 선험적으로 구비하고 있는 형식에 따라 우리가 능동적으로 구성한 것이라 규정함으로써, 휴움의 회의론을 극복할 수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인식대상을 인식주체가 선험적으로 구비하고 있는 범주에 의하여 구성하는 것으로 보고, 인식의 종합적 기능을 강조함으로써 의식과 실재, 주관과 객관, 혹은 합리론과 경험론의 진부한 대립을 고차적으로 지양하였기 때문에 칸트는 비판적이면서도 변증법적인 지식이론의 발전에 기여하였다고 하겠다. 칸트가 순수이성비판에서 존재와 사유간의 변증법적 관계를 강조한 점은 헤겔과 마르크스의 인식론에 계승되고, 프랑크푸르트학파의 비판이론이 지식의 대상을 역사적 상황하에서 주체의 구성적 활동에 관련시키려 하는 것도 칸트, 헤겔, 마르크스의 이러한 인식론적 전통에 입각한 것이다. 그러나 칸트는 인식이 감성과 오성의 종합에 의해서만 가능하기 때문에 신, 영혼, 자유, 도덕률처럼 경험영역을 초월하는 세계에 대해서는 이론적 인식이 불가능하다고 하는 새로운 문제를 제기하였다. 사실과 현상의 세계는 이론적 인식이 가능하나 가치와 본질의 세계는 이론적 인식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결국, 순수이성의 구성적 특성을 강조함으로써, 감성과 오성, 객관과 주관간의 이원론을 극복할 수 있었던 칸트가 사실과 가치, 필연과 자유, 현상계와 본체계 사이에 메울 수 없는 심연을 상정함으로써 새로운 차원의 이원론적 문제를 남기게 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인식주체의 선험적 주관이 칸트에 있어서는 미리 주어진 확고하고 완성된 것으로 전제되었으나, 헤겔은 주관적 의식의 자기형성과정 그 자체를 밝히는 것이 참된 인식비판이라고 보았다. 주관적 의식을 완결된 형태로 전제할 것이 아니라 자기형성의 기나긴 도정에서 점진적으로 정교화 되는 것으로 볼 때, 경험의 전제조건이라기보다 거듭된 경험의 과정에서 드러나는 결과적 속성으로 개념화함으로써 비로소 주관과 객관의 대립이 극복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칸트의 출발점이 헤겔에 있어서는 기나긴 여정의 종착점이라 할 수 있다. 헤겔은 아주 단순한 의식으로부터 시작하여 완전한 의식에 이르게 되는 유한정신의 현상학적 자기발전의 과정을 노동을 매개로 하여 밝히고 이 과정에서 이론과 실천, 객관과 주관, 보편성과 특수성의 대립을 변증법적으로 극복할 수 있음을 보였다. 인본주의적 신마르크스주의자들 특히 루카치, 그람시 및 프랑크푸르트학파가 마르크스사상의 헤겔적 요소를 중요시하는 가장 큰 이유는 바로 헤겔이 이와 같은 대립을 극복할 수 있는 이론적 골격을 제시하기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노동을 통하여 인간과 자연, 인간과 인간, 인간과 제도간의 상호작용이 이루어지고, 이때 인간은 소외와 탈소외의 동태적 과정을 거듭하는 가운데 절대정신의 오묘한 섭리에 힘입어 완전한 의식에 이르게 된다는 헤겔의 정신현상학은 절대정신이 유한정신의 변증법적 자기 발전을 통하여 스스로를 실현한다는 것이므로 이는 절대적 관념론이며, 여기서 헤겔은 분명 소외의 긍정적 측면만을 강조하였다 아니할 수 없다. 노동을 자기창조의 과정으로 개념화하고 인간을 스스로의 노동의 결과로 파악한 헤겔의 사상을 마르크스는 높이 평가하였다. 그러나 그는 헤겔의 위대성을 격찬하면서도 헤겔에 있어서 노동개념이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정신노동이며, 의식의 대상은 대상화된 자기의식일 뿐만 아니라, 헤겔은 소외의 긍정적 측면만 강조하고 부정적 측면을 외면함으로써 현상을 설명하고 정당화하는 데서 그친 보수적 결론에 이르게 되었음을 신랄히 비판한다. 이제 마르크스에 이르러 비판이론은, 『포이에르바하 제11명제』에서 선언한 것처럼, 인식비판을 넘어 변혁논리로 발전하게 되며, 이는 당시 자본주의 선발국에 있어서, 노동의 현존이 그 본질로부터 심히 괴리됨으로써 자아창조의 활동이어야 할 노동이 인간성의 긍정이라기보다 오히려 그 부정이라는 현실 인식에서 비롯된 것이다. 인간은 관념적 종교적 존재라는 점에서 동물과 구별된다기보다는 의식주와 같은 물질적 생산수단을 생산하는 활동에 있어서 동물과 뚜렷하게 구별된다는 것이 마르크스의 생각이다. 동물의 경우와 달리 인간에겐 기본욕구의 충족 그 자체는 목적이 아니라 성장 욕구를 실현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므로 인간의 노동은 본질적으로 대자적이다. 욕구의 필연으로부터 자유로워졌을 때의 노동이 참된 의미에서 인간노동이며 잠재적 능력을 외화하는 자유로운 활동이라는 것이다. 소여의 환경을 이용만 하는 동물과 달리, 인간은 이를 능동적으로 변형할 수 있는 창조적 존재이다. 환경에 대한 제어능력을 발전시켜 삶을 쾌적하게 가꾸려고 하는 창조적 활동은 인간노동의 고유한 특성이라는 것이다. 동물의 경우는 본능에 생리적으로 각인된 반사적 활동만 하나 인간은 활동에 앞서 의도적으로 계획하는 유목적적이고 의식적인 존재이다. 뿐만 아니라 동물의 경우와는 달리 인간은 스스로를 개(個)로 인식하면서도 동시에 동류의식이 있는 유적 존재(類的存在)이므로, 동물이 단일방향으로 생산하는 데 비하여 인간은 보편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특징이다. 요컨대, 인간노동의 본질은 자유롭고, 창조적이며, 의식적이고, 사회적인 실천이기 때문에, 노동은 인간성을 실현하는 인간성의 긍정이어야 하나, 당시 노동의 현존은 인간의 자아실현을 가로막는 인간성의 부정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19세기 초부터 오웬 등의 지도 아래 노조운동이 활성화되어 마치 오늘날 우리의 노동현장처럼 경제투쟁과 정치투쟁이 격렬하게 일어났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경제적 모순의 누적에 따라 사회변동이 불가피하게 일어난다고 하는 객관적 결정론자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본의 가치 증식 과정에 내재된 부도덕성을 감상적으로 비판하고 노동조직을 동원하려고 하는 정치적 자원론자도 아니다. 계급의식이 역사적 과정과 무관하게 인간의 의지에 따라 자의적으로 선택될 수 있는 자율의 영역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는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에 나타나는 신비로운 역전이 자본가와 노동자계급 사이에서도 일어날 수 있는 역사적 조건과 주관적 의식의 성숙을 동시에 탐색하려 했던 것이다. 결국, 프랑크푸르트학파의 비판이론은 칸트의 인식론을 비판적으로 재구성한 헤겔의 변증법적 방법을 구체적인 현실비판과 개혁에 적용한 마르크스의 비판정신을 계승하고 있다. 이렇게 볼 때, 비판이론의 비판정신은 다음과 같은 특성을 내포한다고 하겠다. 첫째, 비판이론은 인간을 능동적, 자율적, 창조적인 존재로 본다. 둘째, 인간은 지식만을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경제, 정치, 종교, 언론, 교육제도 등 여러 가지 사회적 제도도 만든다. 셋째, 인간에 의하여 창조된 이러한 사회제도나 과학적 지식이 인간을 위한다는 명분을 표방하면서도, 인간의 창조성, 능동성 및 자율성을 가로막고 억압하는 구조적 질곡이 되기도 한다. 넷째, 인간이성의 능동성, 자율성, 창조성에 대한 확신을 토대로 하여, 이성의 자유로운 실현을 가로막는 구체적인 사회역사적 상황에 대한 자기반성과 성찰을 통해서 이러한 질곡으로부터 해방을 성취하려는 정신이 비판정신의 핵심이라 하겠다. 제1세대 비판이론과 하버마스의 비판이론은 사회적 역사적 맥락에 따라 상당한 차이를 보이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억압과 지배체계에 의해 예속된 인간성을 해방시키고 보다 합리적인 사회를 이룩하며, 개인의 잠재적 가능성을 실현하는 데 이바지하려는 기본정신에 있어서는 일치된다고 하겠다. 따라서 우리가 비판이론을 수용함에 있어서도 이론의 실질적 내용을 우리 사회가 처해 있는 구체적 상황에 비추어 재조명할 필요가 있다.
2. 전통이론과 비판이론 호르크하이머(Horkheimer)의 「전통이론과 비판이론」(1937)은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선언문과 같은 것이며, 그가 이 논문에서 밝힌 기본신조는 비판이론의 방향과 주요관심을 나타낸 것으로, 아도르노와 마르쿠제도 대체적으로 같은 입장이라 할 수 있다. 마르쿠제(Marcuse)의 『철학의 비판이론』(1968)은 물론 아도르노(Adorno)가 『독일사회학의 실증주의 논쟁』(1969)에 붙인 서문도 비판이론의 방법론적 특징을 밝힌 것으로 호르크하이머의 입장과 일치한다고 할 수 있다. 프랑크푸르트학파의 비판이론가들은 모든 전통이론을 비판하였으나, 그 중에서도 특히 실증주의를 대표적 전통이론으로 규정하고 이를 철저하게 비판하였다. 여기서 실증주의는 꽁트를 비롯한 19세기 실증주의, 비엔나 학파의 논리실증주의, 포퍼와 알베르트의 비판적 합리주의 등 자연과학적 모델에 입각한 경험의존적 인식론에 근거한 것을 총칭하는 개념이다. 논리실증주의는 경험적 현상과 그 현상에 관한 지식이 객관적으로 대응한다는 것을 전제하는 일종의 모사설이다. 카르납, 노이라쓰, 쉴릭 등 당시의 실증주의자들은 경험적 사실을 객관적으로 관찰 기술하고, 경험적 사실들간의 관계를 논리적으로 귀납하여 보편적인 법칙을 수립하는 이와 같은 방법이 자연과학뿐만 아니라 사회과학에도 적용되어야 하는 통합과학적 방법론이라 믿었다. 포퍼의 비판적 합리주의는 베이컨 이래로 과학적 방법의 원형으로 인정되어 온 단정적인 귀납논리의 오류를 지적하고 이를 가설적 연역법으로 대치하고, 검증의 원칙을 반증의 원칙으로 대치함으로써 논리실증주의의 인식론적 오류를 극복한 긍정적인 측면이 있으나, 포퍼도 경험의존적이며 방법론적 개체주의에 빠짐으로써 구조적 모순의 파악을 외면하는 새로운 유형의 실증주의라는 것이다. 비판이론가들은 실증주의가 경험적 사실만을 절대시하는 일종의 물신숭배(fetishism)이며, 사회적 현상의 인간적 함의를 망각한 물화된(reified)사상이라고 본다. 실증주의는 자연과학적 모델에 입각한 경험의존적 인식론이기 때문에 현상의 이면에 숨은 본래적 모순을 밝히는 데는 결정적인 한계가 있다. 실증주의가 원래는 신화와 환상 그리고 형이상학의 꿈에서 깨어나 대상세계를 경험적 이성으로 직시하려는 계몽주의적 각성(disenchantment)의 산물이고 계몽주의적 이성의 산물이라 할 수 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의 실증주의는 존재와 당위, 사실과 가치, 이론과 실천을 분리하고 이론의 가치중립성을 표방함으로써, 결과적으로 현상유지 이데올로기로 전락되었다는 것이다. 한편, 호르크하이머는 당시의 생철학에 대해서도 비판적이다. 그는 니체, 딜타이, 베르그송 들이 인간이성이 고정적이고 추상적인 합리주의로 변질된 점을 비판하고, 인간의 구체적 삶에 있어서 정신적 차원을 회복하려 했을 뿐만 아니라, 부패한 사회에 대한 무비판적 동조주의로부터 개인을 구원하려 했던 점을 긍정적으로 평가하였다. 그러나 호르크하이머는 생철학이 주관성과 내면성만을 지나치게 강조함으로써 삶의 사회역사적 차원을 외면하고, 현실의 물질적 자원을 과소평가 하였으며, 추상적인 합리주의를 비판하는 과정에서 이성 그 자체를 거부한 것 등을 생철학의 심각한 문제점으로 보고 이를 비판하였다. 바로 이와 같은 한계성 때문에 생철학은 그 특유의 비판적 계기를 사회비판이론으로 발전시키지 못하고 정치적 실천과의 관련성을 이룩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비판이론가들은 듀이(John Dewey)류의 실용주의사상도 실증주의처럼 철학을 과학주의적 관점에서 접근하였고, 현실적 삶과 진리의 관계를 지나치게 실용적이고 도구적인 관점에서 이해하였다고 비판한다. 이와 같이 환경에 대한 적응만을 강조하는 실용주의는 사회이론의 비판적 계기를 상실하고 현실에의 동조를 수반하였다는 점에서 역시 전통이론에 머문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비판이론은 현상유지 이데올로기로 이용되는 모든 이론을 전통이론으로 규정하고 비판하나, 그 중에서도 실증주의를 대표적 전통이론으로 본다. 앞서 지적한 것처럼, 실증주의가 배타적으로 강조되는 경우에는 기존의 정치경제적 질서에 대한 비판적 이성을 마비시키고, 정치적 타율성을 조장함으로써 가치중립이라고 하는 본래의 의도와는 달리 현상유지 이데올로기로 전락하게 될 위험이 있는 것이다. 비판이론가들은 특히 이와 같은 위험한 사조가 마르크스주의에 접목되어 형성된 이른바 실증주의적 마르크스주의가 제2인터내셔널 이후에는 이른바 '정통 마르크스주의'로 교화되었고, 스탈린 치하에서는 드디어 인간해방의 철학이 인간억압의 무자비한 도구로 악용된 역설적인 전도를 심각한 우려와 함께 개탄하였다. 따라서 비판이론은 사실과 가치, 객관성과 주관성간의 변증법적 관계를 강조한 마르크스사상을 실증주의로부터 구출하고, 이성의 비판적 계기를 회복하려는 것이며, 그 특징은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첫째, 비판이론은 이론의 실천지향성을 강조하고, 실천적 의도를 가진 이론이다. 비판이론은 인간의 삶의 조건을 개선하려는 실천적 관심이 그 특징일 뿐만 아니라, 스스로의 운명을 결정하려고 하는 자기 반성적이고 자아의식이 있는 인간의 노력에 의하여 현실을 개선할 수 있다고 본다. 따라서, 사회변혁의 주체인 우리 개개인이 비판적 성찰력을 함양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우선 현대사회의 구조적 모순과 이데올로기를 비판하고 허위의식을 폭로하는 것이 비판이론의 역할이다. 둘째, 가치중립적 사회과학 혹은 초연한 연구를 강조하는 실증주의의 주장을 비판이론은 정면으로 거부한다. 실증주의가 가치중립성을 강조하고 있으나, 실증주의적 논리의 이면에는 대상세계를 기술적으로 통제하려는 관심이 내재되어 있다. 비판이론은 실증주의의 객관주의적 환상이 사회과학에 있어서 매우 위험스러울 뿐만 아니라,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등 기존체제를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라는 점에서 이를 철저히 배격한다. 셋째, 비판이론은 사회적 현상에 대한 객관적 이해 그 자체를 반대한다기보다는 오히려 어떤 사회적 현상을 특정의 역사적 맥락에서 인식주체의 구성적 활동과 관련시키는 데 주된 관심을 두는 것이 특징이다. 즉 지식의 사회적 및 역사적 특성을 강조하는 것이 그 특징이다. 넷째, 다양한 사회현상의 저변에 숨겨진 본질을 파악하려는 것이 비판이론의 관심이므로, 비판이론은 본질적이고 근본적인 비판을 강조한다. 비판이론은 실재의 본질을 탐구하기 위하여 현상과 본질을 구별하고, 주어진 현실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것이 아니라 이론의 끊임없는 부정적 기능을 강조한다. 요컨대, 실증주의적 전통이론과 비판이론은 여러 가지로 대조적이다. 전자가 분석적 논리를 중요시하는 반면에 비판이론은 변증법적 논리를 강조하고, 전자가 경험적 검증이나 반증을 강조하는 데 비하여 후자는 해석학적 입장을 취하며, 전자가 존재에 관한 가치중립적 기술에 치중하는 것과 대조적으로 후자는 당위에 관한 가치판단을 이론의 핵심으로 삼고 있으며, 전자가 외현적 사실 그 자체를 연구대상으로 하나 후자는 경험적 현상에 의하여 은폐된 사회모순의 심층적 본질을 파헤치려 한다. 그래서 전통이론이 기존사회의 재생산에 기여하는 것과 대조적으로, 비판이론은 기존사회를 정당화하는 데 기여하는 이데올로기 특히 도구적 이성의 비판에 주력한 것이다.
3. 도구적 이성의 비판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가 『계몽의 변증법』에서 설정한 문제는 왜 인류가 계몽된 삶을 누리지 못하고 다시금 야만의 시대로 접어드는가를 밝히는 것이다. 『계몽의 변증법』(Dialectic of Enlightenment)은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중핵적 관심을 이루는 도구적 이성의 출현과 도구적 이성의 지배에 관한 비판적 성찰이기 때문에, 비판이론의 발전과정에 있어서 획기적인 저서이며, 그래서 마르쿠제는 이를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의 최대의 걸작으로 평가하였다. 앞에서 지적한 것처럼 비판이론이 당초에는 이론적 탐구와 정치적 실천간의 통일성을 추구하였으나, 점차 정치적 실천에 대하여 회의적인 입장을 취하게 되었다. 비판이론의 이와 같은 방향전환은 우선 무엇보다도 독특한 역사적 체험 때문이다. 첫째, 사회주의 종주국인 소련의 현실은 사회주의 사회는 가일층 강화된 중앙집권적 관료기구의 출현이 불가피할 것이라는 베버의 예측이 타당함을 입증하였고, 특히 스탈린주의자들의 비인간적 횡포는 비판이론가들에게 로자 룩셈부르크가 왜 레닌식의 당조직 원리를 그리도 철저하게 반대하였는가를 극명하게 예시한 것이다. 둘째, 파시즘의 출현으로 비판이론가들은 선진자본주의 사회가 위기의 상황에 있어서 그 정치세계를 재구성함으로써 혁명적 변화의 위험을 방지할 능력이 있고 노동조직의 단결된 투쟁의 예봉을 둔화시킬 수 있는 능력이 있음을 확인하게 되었고, 따라서 서구 자본주의 사회의 프롤레타리아 계급은 역사발전의 견인차가 될 수 없다는 암담한 체험을 한 것이다. 셋째, 전후의 미국을 비롯한 선진 자본주의 사회는 여러 가지 모순과 갈등을 체제내에 흡수 통합할 수 있음을 현실적으로 보여주었고, 특히 대중문화를 통해서 가시적인 억압에 의존하지 않으면서도 대다수 시민의 의식을 기존체제의 요구에 순응하도록 조종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는 왜곡된 마르크스주의, 계몽주의의 오도된 합리화 추세, 과학과 기술, 문화산업 및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사회의 바람직하지 못한 현상형태를 모두 계몽의 변증법이라는 압축된 개념하에 비판적으로 해석하였고, 따라서 계급투쟁과 사회주의적 이행에 대한 집착을 포기하고, 그 대신 도구적 이성과 계몽의 역설을 철학적으로 비판하는 데 몰두한 것이다. 이와 같이 비판이론가들은 독점자본의 재생산에 기여하는 자본주의 사회의 이데올로기만 비판한 것이 아니라, 점차 권위주의적 관료주의로 경직화되어 가는 공산주의 국가의 비인간적 현실도 신랄하게 비판한 것이다. 그들은 이와 같은 두 가지 추세의 근본원인이 모두 도구적 이성 혹은 기술적 이성에 있다고 보았고, 따라서 사회주의 혁명만으로는 이러한 심각한 문명의 병리를 극복할 수 없다고 믿게끔 되었다. 바로 이러한 관점 때문에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는 마르크스나 루카치와는 달리 정치적 혁명으로서의 실천을 거부하고, 도구적 이성을 비판하는 이론적 실천에 매몰되었고, 정치경제학 비판을 주요 과제로 삼았던 마르크스와 달리 병든 문명 전반에 관한 보다 근본적인 철학적 비판에 몰두하였던 것이다. 마르쿠제도 현대철학 특히 실증주의 사조가 이론의 가치중립성을 강조하고 지식은 사실에 근거하여야 한다고 오해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전체주의를 조장하였다고 비판하는 점에 있어서는 호르크하이머 및 아도르노와 같은 입장이다. 호르크하이머, 아도르노, 마르쿠제 등 비판이론가들은 히틀러의 극우 전체주의든 스탈린의 극좌 전체주의든, 모든 유형의 전체주의는 근본적으로 볼 때, 계몽주의적 이성이 도구적 이성으로 전락한 데 그 원인이 있다고 보았다. 계몽주의적 이성의 이중적 성격은 일찍이 칸트에 의하여 예리하게 지적된 바 있다. 인간에게는 스스로를 보편적 주체로 여기고 자유로운 사회적 삶을 영위하려는 초개인적, 초월적 이성이 있는가 하면, 다른 한편으로는 자기보존의 목적에 따라 대상세계를 정복하고 지배하려는 이기적이고 타산적인 이성도 있다는 것이다. 이성의 개념에는 이와 같이 초월적 이성과 경험적 이성, 보편적 이성과 특수적 이성, 혹은 해방적 이성과 도구적 이성이 있으나, 오늘날은 도구적 이성만 존중되고 결국 계몽주의적 이성이 실증주의의 시녀가 되어 인간에 의한 자연의 지배가 드디어 인간에 의한 인간의 지배로 둔갑하는 계몽의 역설을 초래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가 '계몽의 변증법'이라고 하는 것은, 한때 인류를 신화와 공포로부터 해방시킨 계몽주의적 이성이, 오늘날에 이르러 인류를 새로운 이데올로기적 신화와 공포의 도가니로 밀어넣게 된 역설을 뜻한다. 계몽의 변증법은 "신화는 이미 계몽되었다"는 명제와 "계몽은 신화로 전도되었다"는 두 명제, 즉 중세의 암흑과 억압상태에서 문명사회로 계몽하려던 모더니티의 과제가, 실제로는 문명에서 새로운 차원의 억압으로 되돌아가는 역설, 말하자면 해방과 속박, 계몽과 몽매로 표현할 수 있는 역설적이고 이중적인 구조를 뜻한다.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에 따르면, 타락한 현대인의 모습은 사회진보와 깊이 관련된 현상이다. 한편에서 보면, 경제적 생산성의 발전이 보다 정의로운 사회를 이룩하는 데 필요한 물적 조건을 창출하였다고 할 수 있으나, 다른 한편에서 보면 그것은 기술적인 지배기구와 이를 장악한 사회집단이 다른 사람을 지배할 수 있게 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희망적인 가능성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고, 현대사회의 추세와 발전 방향 중 회의적 차원을 계몽주의적 이성의 전체주의적 특성이 빚어낸 것으로 규정하고 이 측면만을 파헤친 것이다. 종교적 독단과 신화, 가연의 횡포와 가난으로부터 인류를 해방시킨 계몽주의적 이성이 그 자체의 내적 논리로 인하여 삶의 의미를 파괴하고, 과학과 예술을 야만화하였으며, 인류로 하여금 상품의 물신숭배와 권위주의적 관료주의에 얽매이게 함으로써 인간에 의한 인간의 지배를 가능하게 하여 계몽주의적 이상 그 자체를 타락시킨 역설적 전도를 계몽의 변증법이라 한 것이다. 대중사회에 대한 비판은 당시에 토크빌(Alexis de Tocqueville)이나 니체(Friedrich Nietzsche) 등 사상가들에 의하여 이미 제기되었으나,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를 비롯한 비판이론가들이 제기하는 문명비판의 특색은 이를 과학과 실증주의에 대한 전면적 비판과 연결시킨다는 데 있다. 계몽주의적 이성이 실증주의의 시녀가 되어 모든 것을 수량적 척도로 환원하고, 자연을 오직 정복과 지배의 대상으로 여길 뿐만 아니라 모든 것을 목적 달성에 대한 유용성의 관점에서 파악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자연계의 현상 뿐만 아니라 인간의 행동과 관념까지도 어떤 목적에 대한 유용성의 관점에서 판단하며 따라서 자연과 인간을 모두 조종과 지배의 대상으로 인식한다는 것이다. 계몽주의적 이성 그리고 오늘날의 실증주의는 주관성과 객관성, 인간과 자연을 근본적으로 분리하며, 이는 곧 조종과 지배를 정당화하고 그래서 전체주의적 이데올로기의 기초가 되었다는 것이다. 과학과 기술 즉 생산력의 놀라운 발전이 이룩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마르크스가 기대했던 자유로운 사회가 도래할 가능성은 보이지 않고, 오히려 한층 더 심화된 물신숭배와 물상화현상 그리고 허위의 욕구를 자극하는 퇴폐적 문화산업에 의하여 새로운 지배와 억압 속에 인류는 노예화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는 계몽주의 사조로부터 비롯된 모더니티(modernity)를 너무나 철저하게 비판함으로써 진보의 가능성을 전혀 인정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들은 이와같은 병든 문명을 치유할 수 있는 어떤 구체적 대안도 제시하지 못하였다. 이점에 관한 한 하버마스는 그들과 구별된다. 하버마스는 의사소통적 합리성의 논의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모더니티가 진보적 발달 혹은 사회진화를 가능하게 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4. 문화산업 비판 제1세대 비판이론가들은 원래 루카치(Lukacs)의 헤겔주의적 마르크스주의(Hegelian Marxism)에 깊이 공감하였다. 서구의 선진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노동운동(1920년대)이 무참히 짓밟히고 파시즘이 출현한 반면에 후진국이었던 러시아에서 사회주의 혁명이 성공할 수 있었던 역사적 사건은 실증주의적이고 경제결정론적인 정통마르크스주의로는 도저히 설명될 수 없는 사건이었다. 이에 호르크하이머를 비롯한 초기 비판이론가들은 경제결정론과 실증주의로부터 마르크스사상의 변증법적 계기를 되살리기 위하여 루카치의 『역사와 계급의식』(History and Class-Consciousness)에 깊은 관심을 기울였다. 루카치에 따르면, 마르크스사상의 진정한 특징은 아들러나 바우어 등 오스트리아 마르크스주의(Austro-Maxism)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주관적 자원론(subjective voluntarism)도 아니고, 제2인터내셔널 이후 엥겔스, 플레하노프, 부하린 등의 소위 정통마르크스주의가 주장하는 객관적 결정론(objective determinism)도 아니다. 마르크스사상은 객관과 주관, 존재와 당위, 이론과 실천의 상호관련을 강조하는 변증법적 사회이론이며 사회적 실천의 철학이란 것이다. 벅 모어서(Susan Buck-Morss)는 루카치가 제기한 헤겔적 마르크스주의를 다음과 같이 다섯가지 명제로 요약하였다. 첫째, 마르크스주의의 사상적 요체는 총체성을 강조하는 데 있다. 둘째, 프롤레타리아 계급은 자본주의 사회를 총체적으로 인식할 수 있는 유일한 계급이며, 역사발전의 주체요, 동시에 객체이다. 셋째, 전위적 엘리트로 조직된 공산당(vanguard party)은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의식을 계도하고 이를 대변하는 메타주체이다. 넷째, 마르크스사상의 특징은 주관과 객관, 존재와 당위 및 이론과 실천의 변증법적 관계를 강조하는 것이며, 이는 엥겔스의 자연 변증법과는 엄연히 구별되어야 한다. 끝으로 물화현상(reification)은 상품의 물신숭배(commodity fetishism)적 태도가 사회생활의 모든 영역에 널리 확산된 현상이며, 이러한 물화 현상의 이데올로기적 성격을 비판하는 데 마르크스사상의 특징이 있다는 것이다. 위의 다섯 가지 명제들 중에서 총체성 개념,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중요성 및 당의 선도적 역할 등은 정치적 실천을 강조하는 적극적 차원이고, 자본주의 사회의 물화된 사회의식에 대한 변증법적 규명과 그 이데올로기를 비판하는 넷째와 다섯째 명제는 부정적 차원으로 볼 수 있는데,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가 루카치로부터 계승하는 것은 부정적 차원인 것이다. 비판이론가들은 루카치, 코르쉬(Karl Korsch), 그람시 같은 헤겔주의적 마르크스주의 이론가들이 역사발전의 견인차로 규정해 온 프롤레타리아 계급과 당의 전위적 역할에 대하여 회의적이었고, 이 점에 있어서 프랑크푸르트학파의 비판이론은 정치적 실천을 지향하는 마르크스주의와 명백한 결별을 선언한 것이다. 앞에서 언급한 역사적 상황으로 인하여 제1세대 비판이론가들은 노동자 계급의 혁명적 잠재력에 대한 신념을 완전히 상실하고, 당의 선도적 역할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비판적이었다. 이와같이 마르크스주의의 핵심개념인 총체성,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확인 및 당의 선도적 역할 등을 수정 내지 폐기해버린 것처럼, 이데올로기 비판의 보조수단일 뿐이다. 따라서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사회비판이론은 능동적이고 창조적인 인간의 이성을 억압하고, 이성의 자유로운 실현을 가로막는 문화산업을 비판하고, 문화산업에 체현된 이데올로기에 대한 철학적 성찰에 주력한 것이다. 대전 후 미국은 갈브레이스(J.K. Galbraith)의 『풍요한 사회』(Affluent Society), 다니엘 벨(Daniel Bell)의 『이데올로기의 종언』(End of Ideology)이라는 표현이 시사하는 것처럼 눈부신 경제성장을 이룩하여 대량소비사회로 진입하였다. 사회과학자들은 사실에 대한 실증주의적 기술에 치중함으로써 기존의 사회질서를 예찬하고 정당화하였다. 『에로스와 문명』(1966)에서 마르쿠제는 이와같이 물적풍요를 누리는 선진 산업사회는 그 표면적인 풍요의 외양과는 달리, 가공한 억압과 지배 이데올로기가 이면에 숨어 있다고 보고, 이를 폭로하는 사회 비판이론을 전개한다. 이를 위하여 그는 마르크스사상과 프로이드의 정신분석이론을 독창적으로 접목시키고 있다. 마르크스주의에는 인간을 파시즘, 스탈린주의 및 소비위주의 자본주의에 무비판적으로 동조시키는 심리적 메카니즘을 설명할 수 있는 요소가 결여되어 있기 때문에 마르쿠제는 프로이드의 정신분석이론과 문명론을 출발점으로 삼았다. 프로이드의 정신분석이론은 쾌락원칙과 현실원칙간의 갈등에 입각하여 문명의 발전을 설명한다. 모든 문명사회는 문명의 가치와 인간본능의 요구간의 갈등을 극복하고, 본능적 욕구를 억압한 사회적 노력의 결과로 문명을 이룩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에로스(Eros) 혹은 삶의 본능은 성본능이며, 생산적 노동을 위해 에로스의 성본능은 억압되어야 한다. 타나토스(Thanatos) 혹은 죽음의 본능은 파괴적이고 공격적인 본능으로, 이는 자연을 정복하고 노동의 능률성을 높이는 방향으로 선용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문명과 그 불만』에서 프로이드는 세계대전과 같은 역사적 경험을 반성해 볼 때 인간에게는 파괴적이고 공격적인 본능이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고 하였다. 그는 사유재산제도를 철폐하면 인간간의 적대적 관계가 해소될 수 있다고 믿는 사회주의 사상가들의 신념을 '근거없는 환상'이라고 비판하면서, 경제적으로 평등한 사회에서도 성적 욕구와 공격본능으로 인하여 인간은 격렬한 적대적 관계를 극복하기 어렵다고 하였다. 따라서 프로이드는 에로스의 욕구를 억압하여 창조적 노동으로 승화시키고, 타나토스의 파괴적이고 공격적인 본능을 억압하여 자연을 정복하고 노동의 능률성을 제고하는 데 전용하지 않으면 문명의 유지발전은 불가능하다고 보았다. 그래서 그는 문명과 불만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문명사회가 인간의 성욕과 공격적 욕구에 엄청난 억압을 강요하지 않을 수 없다는 점을 생각할 때, 우리는 인간이 문명사회를 이룩하는 대가로 많은 불만을 인내하여야 함을 알 수 있다. 마르쿠제는 쾌락만을 추구하는 본능의 원초적 욕구를 억압하여 이를 창조적으로 승화시킬 때, 즉 쾌락원칙을 현실원칙에 예속시킬 때, 비로소 문명의 발전을 이룩할 수 있고, 따라서 억압없는 사회는 없다고 하는 프로이드의 문명론을 사회비판의 출발점으로 하되 이를 비판적으로 재구성하였다. 마르쿠제는 억압은 문명사회를 이룩하기 위하여 인간이 지불하여야 할 대가라고 하는 프로이드의 견해를 수용하면서도, 이러한 문명론의 보수주의적이고 회의주의적인 정치적 함의를 비판한 것이다. 마르쿠제는 억압의 보편적 차원과 역사적 차원 혹은 억압의 불변적 차원과 가변적 차원을 구별하고, 이러한 차이를 간과한 것이 프로이드의 한계성이라고 하였다. 억압의 불변적 차원은 문명의 유지 존속을 위하여 모든 사회에 필요한 억압이며, 이는 쾌락밖에 모르는 에로스의 욕구를 창조적인 활동으로 승화시켜 개인의 자아실현과 사회의 공익에 이바지하는 바람직한 억압이며 따라서 이를 기본억압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억압의 가변적 차원은 후기 산업사회의 역사적 특성 때문에 사회통제와 지배의 목적으로 악용되는 과잉억압을 뜻하며, 마르쿠제가 "억압없는 사회"라고 할 때의 '억압'이란 과잉억압을 뜻하는 것이다. 과학과 기술이 고도로 발전한 후기 산업사회는 높은 생산성으로 인하여 물질적 풍요를 이룩하고, 노동시간의 단축에 따라 여가시간의 증대로 인하여 리비도(libido)의 에너지가 흘러 넘치게 되었다. 이와 같이 흘러 넘치는 본능적 에너지 즉 과잉의 에너지가 잘못 정치적으로 동원되면, 기존의 체제를 전복할 위험이 있기 때문에 이를 방지하기 위하여 후기 산업사회는 과잉의 억압이 불가피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현대사회의 억압과 통제원리는 물리적 억압이나 가시적 폭력보다 더욱 무서운 가공할 억압의 메커니즘이다. 마르쿠제는 『일차원적 인간』에서 현대사회의 억압 즉 과잉의 억압을 건전하지 못한 불량만화, 전자오락, 프로경기, 록 콘서트, 향락산업, 성의 해방, 포르노그라피 등 주로 흥행위주의 문화산업과 퇴폐적 활동을 조장함으로써 에로스의 창조적 승화를 방해하고 허위의 욕구를 충동하여 비판적 이성을 마비시키는 억압으로 설명하고 있다. 이와 같은 향락 및 흥행위주의 퇴폐적인 문화산업은 긍정적 문화를 짓밟고, 해방과 자유를 표방하면서 인간이성을 마비시키기에 억압적이며, 에로스의 창조적 승화를 가로막는 것이므로 역승화인 것이다. 그래서 인간을 향락위주의 일차원적 존재로 전락시키는 후기산업사회의 지배원리를 마르쿠제는 억압적 역승화라 하였다. 아도르노도 『미니마 모랄리아』(Minima Moralia)에서 소비사회와 문화산업을 비판적으로 분석하였다. 문화산업이란 문자 그대로 문화의 산업화를 지칭하고, 그 주된 기능은 사회구성원들의 욕구, 태도 및 성향에 영향을 미쳐 그들을 소비사회에 통합시키는 것이다. 오늘날 소비사회는 재화와 용역뿐 아니라 예술, 정치, 문화 및 일상생활의 모든 영역을 상품처럼 표준화시키고 획일화하여 현대인의 삶을 황폐화시킨다. 베블렌(Thorstein Veblen)의 문화비판의 관점을 수용하면서, 아도르노도 현대인의 소비성향은, 진정한 욕구를 충족하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사회적 지위를 과시하기 위한 과시적 소비(conspicuous consumption)가 그 특징이라고 하였다. 과시적 소비를 주도하는 상류계급은 물론, 이들의 허장성세를 흉내내기 위하여 능력에 무리한 출혈구매를 하거나, 아니면 상류계급이 애용하는 상품과 유사해 보이는 모조품이라도 소유하려는 중산계급의 애처로운 모방풍조는, 근본적으로 볼 때 현대판 야만의 병리적 징후이며, 이러한 병리는 확대일로에 있는 문화산업에 의하여 더욱 빠른 속도로 확산되고 있는 것이다. 마르크스도 자본주의 사회의 이데올로기로 상품의 물신숭배(commodity fetishism)를 지적하고 이를 비판하였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본주의 사회의 이데올로기, 대중문화 및 상업주의가 노동자계급을 완전히 통합시킬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아도르노와 마르쿠제는 후기 자본주의 사회의 문화산업과 그것이 창출하는 허위의 욕구 속에 노동자 계급이 완전히 흡수 통합되었기 때문에 사회변혁의 가능성과 사회변혁을 주도할 계급 혹은 그러한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집단의 존재가능성에 대하여 매우 회의적이었다. 제1세대 비판이론가들의 회의적 관점은 아도르노의 부정의 변증법에서 가장 뚜렷하게 나타난다.
5. 부정의 변증법 비판이론의 특성은 변증법적 방법을 중요시하는 데 있다는 점은 이미 앞에서 지적하였으나, 아도르노의 변증법은 헤겔, 마르크스 및 루카치의 변증법과는 다르다. 헤겔, 마르크스 및 루카치의 변증법은 부정의 부정에 의하여 긍정이 될 수 있는 변증법이나, 아도르노는 이성의 부정성(negativity)은 인정하면서도 부정의 부정에 의하여 긍정이 될 수 없는, 그래서 주관과 객관의 통일성을 부정하는, 부정의 변증법(negative dialectics)이다. 변증법을 보는 이러한 인식론적 견해의 차이는 정치적 실천에 대한 입장의 차이와 깊이 관련된 것이므로 프랑크푸르트학파의 특성을 파악하는 데 있어서, 부정의 변증법은 매우 중요한 의의가 있다고 하겠다. 아도르노에 따르면, 철학은 대체적으로 인식론적 혹은 형이상학적으로 절대적 출발점, 궁극적 실재를 전제로 하여 이에 근거하는 혹은 동일성의 철학(philosophy of identity)에 말려드는 오류를 범했다는 것이다. 주관과 객관, 특수와 보편, 이론과 실천 혹은 존재와 사유 같은 이원적 대립개념을 접근함에 있어서, 철학자들은 대립항의 어느 한쪽에 일차적 중요성을 부여함으로써, 어떤 통일적 체계를 형성한 후, 다른 모든 것을 이 체계에 포섭하려하는데, 이를 동일성의 철학이라 한다. 비판이론가들은 주관과 객관, 사유와 존재간의 완전한 일치를 주장하는 이러한 동일성의 철학을 비판한다. 그래서 그들은 헤겔의 관념론적 동일성 이론(idealist identity theory)은 물론 이른바 정통 마르크스주의의 유물론적 동일성 이론(materialist identity theory)도 거부하는 것이다. 정통 마르크스주의는, 사회는 경제적 생산양식내의 객관적 모순이 누적되면 역사 발전의 법칙성에 따라 사회주의로 이행된다고 봄으로써 객관적인 역사법칙에 인간의 주관성이 포섭된다고 하는 유물론적 동일성 이론에 근거하고 있으나, 아도르노는 역사발전을 물질적 요인의 객관성에 환원할 수 없다고 보았다. 뿐만 아니라, 역사의 과정은 결코 세계정신이나 절대정신의 자기현현으로 환원될 수도 없기 때문에 관념론적 동일성 이론도 심각한 오류를 범했다는 것이다. 아도르노에 따르면, 헤겔이 인간정신을 활동의 과정으로 개념화하고 인식에 내재한 부정성을 강조한 것은 탁월하나, 그가 주객 동일성을 전제하고 절대정신의 자기현현에 토대한 것은 심각한 문제점이며 근거없는 환상이라는 것이다. 그는 헤겔이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적 관계를 밝힘에 있어서 인간의 자의식이 사회적 삶의 과정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고, 인식의 발전도 논리적이고 과학적인 체계에 따라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삶의 실제적 과정을 통하여 이루어진다고 한 것은 헤겔 철학의 강점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아도르노는 헤겔이 주체와 객체의 완전한 동일성을 상정하고 특히 이러한 동일성을 절대정신의 자기 전개과정을 이해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정신이나 주관성을 객관세계보다 우위에 두는 것은 칸트나 피히테의 주관적 편향성과 다를 바 없다고 비판한다. 이와 같이 동일성의 철학은 객관적인 것에 입각한 실증주의적 통합이나, 주관적 요소에 치중한 관념론적 통합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주관과 객관, 존재와 사유 등 모든 차이를 해소하고 종결시키려 하나, 아도르노에 따르면, 이러한 차이는 결국 완결적으로는 해소될 수 없는 것이며, 변증법적 진리는 오히려 끝없는 비동일성에 그 특징이 있다는 것이다. 아도르노가 동일성의 철학을 철저하게 비판하는 것은 벤야민(Water Benjamin)과 니체(Nietzsche)로부터 영향을 받은 바 크다. 벤야민은 첫째로 개별적 현상은 일반적 개념에 비추어 이해될 수 있다는 주장을 반대하였고, 둘째로 보편성은 오직 구체적 현상들과 그 구조를 통해서만 파악될 수 있다는 이유로 보편과 특수간의 동일성 이론을 반대하였다. 벤야민처럼 아도르노도 특수와 보편간의 동일성이론 혹은 총체성이론에 철저하게 반대한 것이다. 총체성이론을 반대하는 아도르노의 입장을 존슨(Pauline Johnson)은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아도르노는 주객관계의 모순성을 극복하려는 총체론적 관점을 거부한다. 총체론적 관점은 주객관계의 이율배반적 특성을 그 관계의 한쪽을 흡수병합함으로써 관계의 본질을 은폐하려고 하는 것이다. 아도르노에 따르면, 마르크스사상은 이와 같은 총체론적 시각을 비판하는데 관심이 있다...... 마르크스의 사상은 특수와 보편간의 관계에 관한 비총체론적 시각이 타당함을 밝히려는 것이다. 니체는 철학의 근원주의나 일반범주가 구체적 삶의 역동성을 파악할 수 없게 한다는 점에서 동일성 철학을 폐기하였고, 특히 그는 철학적 범주들이 궁극적으로는 권력의지에 불과하다고 함으로써 모든 철학적 체계의 정당화를 냉소하였다. 그래서 아도르노는 어떤 절대적 기점과 궁극적 근원을 상정하며 동일성을 추구해 온 모든 철학에 대한 니체의 성상파괴적 비판에 전적으로 동의하였고, 니체의 사상을 "서구사상의 진정한 전환점"이라고 격찬하였다. 이러한 측면을 생각할 때, 니체는 물론 아도르노의 사상에서도 우리는 탈현대사상의 선구를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도르노가 니체사상에 무비판적으로 동조하는 것은 아니다. 특히, 니체가 모든 지식을 권력의지로 보면서도, 이 권력의 원천을 구체적인 사회경제적 문맥과 관련시키지 않고 절대화함으로써, 니체의 생철학은 비판적 계기를 상실하였다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아도르노의 부정의 변증법은 당시의 역사적인 상황과 깊이 관련된 것이며, 구체적 상황에 대한 철학적 반응이라 할 수 있다. 마르크스나 루카치 등이 예견하였던 프롤레타리아의 혁명의 가능성이 유럽에서는 극히 회의적이라는 상황인식, 노동운동의 탄압이나 나치의 반인륜적 파쇼주의의 등장과 스탈린의 극좌 전체주의가 자행한 테러적 만행은 말할 것도 없고, 독재권력의 이와 같은 비인간적 횡포에 무기력한 동조 내지 잔인한 침묵으로 일관했던 현대문명의 위기, 그리고 대전 후 선진 자본주의 사회가 근본적 변혁에 대한 자기방어력을 보였던 독특한 상황에 직면하여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좌파 지식인들은 극도의 절망과 좌절을 느꼈고, 이러한 극단적인 좌절의 표현이 부정의 변증법으로 표현된 것이다. 헤겔의 절대정신이나 마르크스의 경제법칙은 부정의 부정에 의하여 긍정이 될 수 있는 긍정의 변증법이나, 위에서 밝힌 문명의 암전으로 인하여 긍정과 희망의 신학을 상실한 아도르노는 부정의 부정에 의해서 긍정이 될 수 없는 부정, 극단적인 부정을 일관되게 견지해야 하는 부정, 그래서 고차적 지양이 불가능한 절대적 부정이 있음을 강조하기 위하여 부정의 변증법을 제안한 것이다. 그래서 아도르노는 변증법을 객관적인 기만의 상황에 대한 끊임없는 자기반성이며, 따라서 무모한 실천으로부터 이론의 자율성이 인정되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다음과 같이 주장하고 있다. 이론과 실천의 일치에 대한 지나친 요구로 인하여 이제 이론은 무모한 실천의 시녀로 전락되고 있다...... 실천에 혈안이 된 독단과 금기가 진정한 이론을 파괴하고 있으나, 올바른 실천을 위해서는 우선 이론의 자율성을 회복하여야 한다. 이론과 실천의 관계는 결코 고정된 확고불변의 관계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변화하는 역사적 상황에 따라 가변적임을 알아야 한다. 오늘날 걷잡을 수 없는 혼란과 소동으로 인하여 이론이 경멸되고 무력화되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론은 혼란과 무질서의 극을 치닫는 이 시대를 냉정히 증언하는 역할을 담당하여야 한다. 정치적 실천으로부터 사회비판이론의 자율성이 존중되어야 한다는 이상과 같은 주장은 아도르노뿐만 아니라 호르크하이머에서도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주장은 학파형성 초기에 그들이 강조했던 입장과 비교할 때 주목할 만한 시작전환이라 아니할 수 없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원래 그들은 인식주체의 주관성이 개입될 여지가 없을 정도로 사회변동의 객관적 필연성을 강조한 '정통 마르크스주의'의 경제결정론을 비판하면서, 비판이론에 자기성찰적 차원을 회복시키고, 그래서 객관과 주관, 존재와 당위, 이론과 실천의 동태적이면서도 변증법적인 관계를 강조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전술한 바 역사적 상황의 변화로 인하여 점차 정치적 실천에 회의를 품게 되었고, 드디어 호르크하이머는 자신의『비판이론』에 붙인 1968년의 서문에서 마르크스주의적인 급진적 실천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것은 사이비 혁명론자들이라 매도하기에 이르렀다. 제1세대 비판이론은 첫째, 결정론적이고 실증주의적인 마르크스주의의 조류를 비판하고 변증법적 마르크스주의의 철학적 기초를 회복하였고, 둘째, 마르크스주의를 과학적 진리나 확고한 교리로 보지 않고 역사적 상황에 비추어 사회를 비판하는 개방적 비판이론으로 재해석하였고, 셋째, 문화영역을 경제적 토대의 부수현상이 아니라 사회적 역동의 핵심으로 보아야 할 필요성을 강조하고, 넷째, 마르크스주의가 소홀히 했던 비판이론의 심리학적 차원을 부각시킨 것이 특징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공헌에도 불구하고, 제 1세대 비판이론은 결과적으로 이론과 실천의 통일성을 거부함으로써 이론적 지식과 정치적 실천간의 괴리를 해결하지 못한 채 이를 미해결의 유산으로 남긴 것이다. 이론과 실천간의 근본적인 통일성을 이룩하고, 그래서 제1세대가 남긴 탈정치화된 비판이론을 인식론적으로 재구성하려는 것이 하버마스의 출발점이었다.
제 3 장 하버마스의 비판이론
1. 지식과 관심 호르크하이머, 아도르노, 마르쿠제가 사망하고, 1970년대 초반에 신좌파운동이 퇴조하며서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역사는 종결되는 듯 했으나, 오늘날 이 학파의 사회비판이론은 하버마스(Habermas), 오페(Clauss Offe), 슈미트(Alfred Schmidt), 벨머(Albrecht Wellmer) 등에 의하여 비판적으로 계승되고 있고, 특히 하버마스는 그 중 대표적 인물이라 할 수 있다. 앞에서 지적한 것처럼, 제1세대 비판이론가들이 이론과 실천의 동일성을 거부하고 결과적으로 실천과 유리된 이론의 자율성을 주장한 것과 달리, 하버마스는 비록 인식록적 차원이긴하나, 이론과 실천의 불가분성을 강조하였다. 실증주의를 전면적으로 그리고 철저하게 배격한 전자와 달리, 하버마스는 실증주의적 방법을 비판적으로 수용하고 있다. 전자가 고급문화와 긍정적 문화에서 현실초월의 가능성을 탐색한 것과는 대조적으로, 후자는 문화를 보다 경험적이고 일상적이며 상호주관적인 생활양식으로 이해한다. 제1세대 비판이론가들이 가공할 억압과 소외가 만연된 현대문명에 대하여 베버와도 같이 극히 회의주의적이었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하버마스는 모더니티(modernity)의 긍정적인 가능성을 확신하고 있으며, 전자가 일차원적이고 도구적인 이성을 비판하는 것으로 일관했던 것과는 달리, 후자는 도구적 이성의 비판과 함께 민주적 상호작용의 가능성 및 의사소통적 이성의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다는 것이 특징이라 하겠다. 루카치로부터 아도르노에 이르기까지의 사회비판이론이 결과적으로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 것은, 하버마스에 따르면, 그들이 모두 의식의 철학에 묶여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마치 후기 비트겐슈타인(Wittgnenstein) 이후의 많은 철학자들이 인간의 의식도 언어적으로 구성되고 언어를 통해서 형성된다고 보는 것처럼, 근년에 이르러 하버마스도 비판이론이 이제 의식의 철학을 버리고 언어철학으로 파라다임 전환을 하여야 함을 역설하고 있다. 하버마스의 이와 같은 언어적 전회를 이해하기 위하여, 여기서 우리는 우선 그가 인식론적 수준에서 이론과 실천을 통합하기 위하여 제기한 지식구성의 관심에 관한 개념을 검토하고자 한다. 『지식과 관심』(Knowledge and Human Interests)에서 하버마스는 지식을 구성하는 준선험적 관심을 기술적 관심, 실천적 관심 및 해방적 관심으로 범주화하였다. 그는 기술적 관심 실천적 관심, 해방적 관심에 상응하는 지식 혹은 학문을 각기 경험적 분석적 학문, 역사적 해석적 학문 및 비판적 사회과학으로 분류하고, 각 학문영역의 지식은 그에 상응하는 인지적 관심과 불가분의 관계가 있음을 강조하였다. 특히 그는 실증주의와 역사주의가 소홀히 했던 인식론적 문제점을 재검토하고, 기술적 관심과 실천적 관심의 한계성을 비판하여, 이를 토대로 사회비판이론의 인식론적 근거를 정립하려 하였으며, 따라서 이는 모든 근원주의를 파괴한 아도르노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입장이라 하겠다. 경험적 분석적 학문은 가설연역적 이론을 수립하여 이를 토대로 대상세계를 통제하고 조종하려는 기술적 관심에 의하여 지배되고 있다. 즉, 경험적 분석적 학문은 대상세계를 경험적으로 그리고 실증적으로 관찰하고 이를 독립변인과 종속변인으로 구분하여 그들간의 규칙적 관계를 탐구한다. 이러한 규칙성에 관한 가설을 설정하고 이를 경험적으로 검증하거나 혹은 반증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검증과 반증의 과정을 거쳐 보다 완벽한 보편법칙을 수립하고 보편법칙에 힘입어 보다 정확한 예측을 하려고 하는데, 예측의 궁극목적은 대상세계를 기술적으로 통제하는 데 있기 때문에, 경험적 분석적 탐구는 도구적 행위체계의 틀 안에서 이루어진다고 할 수 있다. 어떤 의미에서 경험적 분석적 학문은 환경에 대한 인간적응의 필요성을 반영하는 것이며, 따라서 그것이 표방하는 가치중립성과는 달리, 환경을 기술적으로 통제하고 조종하려는 관심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이와 같이 경험적 분석적 학문이 실재를 객관적이고 가치중립적으로 기술하는 것을 표방하고 있으나, 그 논리의 이면에는 기술적 통제의 관심이 은폐되어 있다는 것이다. 경험적 분석적 학문의 대표적 유형인 자연과학의 방법론적 특징은 실재에 관한 보편명제를 형성하여 자연을 통제하는 기술적 수단을 제공하는 것이며, 따라서 자연과학적 지식의 의미는 예측가능성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자연과학적 지식이 예측적 지식이라는 것은 그 궁극적 의미 혹은 관심이 기술적 이용 가능성에 있고, 그래서 본질적으로 가치중립적 지식일 수 없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경험적 분석적 학문은 도구적 행위에 긴밀히 관련된 것이므로 도구적 조종과 질적으로 다른 행위유형, 가령 의사소통적 행위를 설명하기에는 범주적 제약이 있다고 하겠다. 이는 마르크스가 하부구조로 분류한 생산영역 즉 노동영역, 혹은 목적합리적 영역에만 한정된 유용성이 있을 뿐이며, 따라서 경험적 분석적 지식은 모든 지식의 보편적이고 정당한 척도가 될 수 없는 것이다. 하버마스는 자연과학뿐만 아니라, 경제학, 정치학, 사회학 등의 사회과학도 그것이 법칙정립적 지식을 발견하고, 이를 토대로 하여 사회적 실재를 기술적으로 통제하려는 도구적 목적에 기여하는 경우에는 모든 경험적 분석적 학문으로 범주화하고 있다. 그가 경험적 분석적 학문이 기술적으로 통제하려는 도구적 목적에 기여하는 경우에는 모두 경험적 분석적 학문으로 범주화하고 있다. 그가 경험적 분석적 학문이 기술적 관심에 의하여 주도된다고 한 것이 과학자가 반드시 기술적으로 통제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탐구에 종사한다는 것을 뜻하는 것은 아니므로, 기술적 관심이 과학자 개개인의 특정 동기유형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기술적 관심이라는 것은 인간이 자연에 노동력을 투하함으로써 스스로를 생물학적 및 문화적으로 변형시키고 재생산하는 삶의 방식과 관련된 것이며, 이러한 생산활동은 기술적 통제의 관심을 필요로 할 뿐만 아니라 또한 이를 형성하기도 한다. 그래서 하버마스에 따르면, 관심이라는 개념은 순수하게 경험적인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순수하게 선험적인 것도 아니며, 우리 삶의 일반적 특성에 유래하는 것이기 때문에 준선험적인 개념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역사적 해석적 학문은 지식을 획득하는 방법적 틀이 다르다. 역사적 해석적 학문이 지식을 획득하는 방법은 경험과 관찰보다는 의미 이해를 중요시하고, 가설의 검증이나 반증보다는 텍스트의 해석에, 인과적 설명보다는 주관적 의미세계에 대한 해석학적 이해에 의존한다. 역사적 해석적 학문은 일상적인 언어교류에 의하여 매개되는 상징적이고 상호주관적인 의미세계를 해석하고 이해하는 데 그 목적이 있고, 그래서 해석자는 텍스트의 지평에 스스로를 전치하고 감정이입하여 상호이해하는 실천적 관심에 의하여 지배된다. 두 가지 유형의 인지적 관심 즉 기술적 관심과 실천적 관심을 구별함에 있어서 하버마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구별에 따른다. 즉, 기술은 무엇을 제작하거나 조립할 때 나타나는 목적합리적 행위유형을 지칭하고, 실천은 상호주관적인 의사소통의 과정에서 나타나는 상호작용적 행위유형을 뜻하기 때문에, 하버마스가 실천적 관심이라고 할 때 실천의 개념은, 마르크스의 실천 개념과는 달리, 다분히 일상적인 언어생활과 깊이 관련된 것이다. 일상적 언어놀이의 문법 혹은 문화적 전통의 구조가 상징, 행위, 그리고 표현을 연결해주고 상호작용과 세계해석의 틀이 된다는 점에서, 역사적 해석적 탐구는 상호이해를 가능하게 하는 문화적 전통을 중요시한다고 볼 수 있다. 하버마스는 해석학적 전통이 상징적 상호 작용, 이해 및 해석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은 그 강점으로 인정하고 수용하면서도, 해석학이 비판적 성찰과 자기반성을 판단중지한 채, 전통에 묶인 삶의 형식을 있는 그대로 해석하고 이해하려고 하는 무비판적 역사주의에 빠져 있다고 비판하였다. 마치, 경험적 분석적 학문이 인간존재의 근본적 관심과 무관하게 대상세계를 있는 그대로 객관적으로 관찰 기술하고, 그러한 관심으로부터 초연한 순수이론을 수립할 수 있다고 하는 객관주의적 환상에 젖어 있는 것처럼, 역사주의도 정신적 사실을 직접적 소여의 증거인양 착각하여, 이를 있는 그대로 해석하고 이해하여 순수이론을 수립하려고 하는 또다른 유형의 객관주의적 환상에 빠져 있기 때문에, 사회인식에 필요한 비판적 성찰과 자기반성이라고 하는 비판적 계기를 상실하고 있다는 것이다. 1970년대의 사회과학계에 관심의 초점이 되었던 가다머와 하버마스간의 논쟁도 바로 이 점에 관한 것이다. 하버마스가 경험적 분석적 학문과 역사적 해석적 학문을 비판함에도 불구하고, 그가 이들의 가치를 전적으로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양자는 모두 지식의 한 가지 유형에 불과할 뿐이라는 것이다. 사회현상에 대한 경험적 분석적 학문의 객관주의는 행위자의 주관적 의도나 의미세계를 해석함에 있어서는 결정적인 한계가 있기 때문에, 그는 사회과학의 방법론에 해석학을 도입한다. 가치중립석이나 객관주의에 대해 가다머(Hans-Georg Gadarmer)는 하머마스보다 더욱 철저하게 비판적이다. 가다머에 따르면, 계몽주의와 계몽주의의 산물인 자연과학적 객관주의도 다른 선입견을 배격하는 일종의 선입견이라는 것이다. 그는 딜타이나 베티(Emilio Betti)같은 해석학자들까지도 자연과학적 객관주의의 환상에 사로잡혀, 인식의 무전제성이란 오류에 빠지게 되었다고 비판하였다. 가다머는 인간의 인식은 역사적 삶의 공동체에 그 뿌리가 있는 이해의 전구조(fore-structure)에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고, 소속된 사회적 환경과 문화적 전통의 선입견을 전적으로 배제할 수 없다고 함으로써, 합리적 비판보다는 전통의 권위를 강조하는 보수적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이와는 달리, 하버마스는 일상언어에 반영되고, 사회제도에 각인되며, 역사적 전통에 체현된 이데올로기적 조종과 도구적 이성의 억압을 폭로하기 위해서는 행위자의 주관적 의도를 왜곡하고 제약하는 객관적 요인에 대하여 철저한 자기반성을 하지 않을 수 없다고 본다. 요컨대, 가다머의 해석학이 반계몽주의적 낭만주의에 영향을 받고 있다면, 하버마스의 비판이론은 계몽주의적 이성과 자기반성의 힘에 깊은 확신을 견지하고 있다. 하버마스에 따르면, 주관적으로 의도된 의미세계와 객관적 제약요인간의 괴리는 결국 경험적 분석적 학문이나 역사적 해석적 학문 중 어느 하나만으로는 극복할 수 없다는 것이다. 양자는 각기 사회적 실재의 상이한 영역 혹은 상이한 차원에 초점을 두고, 자기의 입장만을 강조하기 때문에 타협이 불가능하며, 바로 이와 같은 모순성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변증법적 중재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주관적 의도와 객관적 제약의 차원으로 인하여 사회적 삶은 자율성과 규칙성이라고 하는 상호모순된 요소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비판적 사회과학은 문화적 업적만을 긍정하는 데 만족할 것이 아니라, 역사적 업적의 의미를 비판적으로 반성하여, 기존의 사회를 보다 자유로운 사회로 발전시킬 수 있는 변증법적 이론을 만들어야 한다. 경험적 분석적 학문과 역사적 해석적 학문은 지식을 구성하는 다양한 인지적 관심들 중에서 각기 한 가지의 관심에만 집착함으로써, 마치 그것을 모든 지식에 보편타당한 절대적 기준인 것처럼 여기는 독단에 빠져 있기 때문에 하버마스는 이러한 독단으로부터 해방되기 위한 자기성찰을 강조한 것이다. 비판이론 혹은 비판적 사회과학은 사회적 행위의 과학적 예측에 목적을 둔 법칙정립적 지식을 형성하는 데 만족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상호주관적으로 합의된 의미만을 추구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비판이론은 왜곡된 의사소통의 근본원인이 되는 사회의 이데올로기적 지배구조를 심층적으로 파헤치는데 그 특징이 있기 때문에 해방적 관심에 의하여 주도된다고 하겠다. 이와 같은 해방적 관심에 의하여 인도되는 비판적 사회과학이 하버마스가 분류한 지식의 셋째 유형이다. 하버마스는 자기반성을 그 요체로 하는 비판적 사회과학의 원형을 경험적 분석적 학문의 인과적 설명과 역사적 해석적 학문이 강조하는 해석학적 이해가 변증법적으로 종합된 마르크스의 이데올로기 비판과 프로이드의 정신분석이론에서 볼 수 있다고 하였다. 마르크스는 정치경제학 비판을 통하여 자본주의 경제의 구조와 역동을 분석조건으로 파헤친 후, 이를 토대로 하여 인간의 자기성찰이 물질적인 생산조건에 의하여 체계적으로 왜곡되는 이데올로기를 비판하였기 때문에, 마르크스의 비판은 해방적 관심에 의하여 주도되고 있다. 한편, 프로이드는 심리적 억압의 원인이 된 과거의 에피소드를 치료자가 분석적으로 재구성하고, 이를 근거로 하여 꿈을 심층적으로 해석함으로써, 환자로 하여금 자기성찰을 할 수 있게 하는 방법적 틀을 제공하였다는 것이다. 결국, 비판적 사회과학의 원형은 인과적 설명과 해석적 이해를 변증법적으로 종합한 설명적 이해라 할 수 있고, 마르크스의 이데올로기 비판과 프로이드의 정신분석은 모두 법칙적 관계에 관한 정보를 제공함으로써 당사자의 의식에 자기성찰을 촉진하려는 해방적 관심에 의하여 주도된 것으로 불 수 있다는 것이다.
2. 사적 유물론의 재구성 위에서 본 것처럼, 경험적 분석적 학문은 기술적 관심, 역사적 해석적 학문은 실천적 관심에 의하여 각기 주도되기 때문에, 모든 지식은 상응하는 지식을 구성하는 관심과 분리될 수 없다는 점을 밝힘으로써, 호르크하이머나 아도르노와는 달리, 하버마스는 이론과 실천의 통일성을 인식론적으로 정립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지식을 구성하는 관심에 관한 그의 이론에 대하여 몇 가지 비판이 제기되었다. 첫째, 세가지 관심은 모두 지식에 선행하는 전제라는 점에서 보면 선험적이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관심은 사회적 삶의 경험적 과정을 통해서만 구체화된다는 점에서 볼 때 경험적이라 아니할 수 없고, 따라서 하버마스의 지식구성 관심의 개념은 인식론적으로 매우 애매한 것이다. 이는 선험적인 것이라면 경험에 앞선 것이며, 우리가 경험적 내용에 의존한다면 선천적 종합 판단의 보편성과 필연성을 정당화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둘째, 세 가지 관심 혹은 하버마스의 표현처럼 준선험적 관심들은 각기 상응하는 지식에 고유한 것이므로 대등한 것처럼 보이나, 기술적 관심과 실천적 관심은 궁극적으로는 해방적 관심으로 통합된다고 주장하는 것을 보면 세가지 관심들은 결코 대등한 관계라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셋째, 하버마스는 기술적 관심과 실천적 관심이 인식주체의 자기 성찰을 통해서 해방적 관심으로 통합되며, 자기성찰의 힘을 통해서만 자식과 관심은 통일성을 이룩한다고 하였다. 그래서 자기성찰 혹은 자기반성은 인지적 관심에 관한 하버마스의 이론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개념이나, 맥카시(Thomas McCarthy)나 번스타인(Richard Bernstein)에 따르면, 가장 애매한 개념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하버마스가 사용하는 성찰(reflection)이라는 개념은 이중의 의미를 내포하기 때문에 애매하다. 한 가지는 퍼어스(Charles Peirce)나 딜타이에서 볼 수 있는 지식구성의 주관적 조건에 관한 성찰이고, 다른 한 가지는 마르크스나 프로이드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언어와 행위의 구주에 은폐된 이데올로기 비판이라 할 수 있는 자기성찰이다. 전자는 지식비판, 후자는 이데올로기 비판과 각기 관련된 성찰을 뜻하므로, 『지식과 관심』에서 하버마스가 사용하는 성찰의 개념은 매우 애매한 것이다. 따라서, 지식과 관심에 관한 그의 이론은 스스로도 인정한 것처럼 쟁점을 해결한 것보다는 오히려 많은 문제점을 제기한 것이다. 그래서 『의사소통적 행위이론』(Theory of Communicative Action)에서는 지식과 관심에 관하여 제기한 당초의 삼분법을 버림은 물론 인식론적 접근을 폐기하고, 사회적 삶의 역사적 과정을 목적합리적행위와 의사소통적 행위로 범주화하게 되며, 그는 이를 위하여 마르크스의 사적 유물론을 비판하는 것으로부터 출발 한다. 하버마스는 마르크스가 『경제적 철학적 초고』에서 이미 노동(labor)과 상호작용(interaction)이라는 두 가지 차원을 상정하고, 이들간의 관계를 생산력과 생산관계간의 변증법적 관계로 파악한 것은 탁월한 통찰력이라고 격찬하였다. 그 이유는 인간의 사회적 삶이 발전하기 위해서는 노동과 상호작용, 기술적 지식과 도덕적 의식, 혹은 목적 합리성과 의사소통적 합리성이라는 두 가지 차원의 발전이 조화롭게 이룩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독일 이데올로기』이후에 마르크스는 노동과 상호작용간의 변증법적 관계를 밝히기보다는, 상호 작용 영역을 노동으로, 의사소통적 행위를 도구적 행위로 환원하였고, 그래서 하버마스에 따르면, 결과적으로 마르크스는 자신의 변증법적 사상이 기계론적 이론으로 오해될 소지를 스스로가 만들었다는 것이다. ..... 마르크스에 있어서는 인간과 자연환경간의 물질적 상호작용을 규제한 생산활동 즉 도구적 행위가 모든 범주를 형성하는 파라다임이 된다. 그래서 모든 것이 생산의 자기운동 속으로 해소되어 버리게 되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이유로, 생산력과 생산관계간의 변증법적 관계에 대한 마르크스의 탁월한 통찰력은 종종 기계론적 방식으로 오해될 수밖에 없었다. 하버마스에 따르면, 생산력과 생산관계라는 개념을 노동과 상호작용 혹은 목적합리적 행위와 의사소통적 행위로 대체함으로써, 마르크스사상에 대한 기계론적 해석을 극복할 수 있고, 이와 같은 재구성을 통하여 마르크스가 원래 의도했던 비판적 계기를 되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사회적 삶의 실질적 토대는 물질적 생산양식이며, 생산양식은 생산력과 이 생산력의 발전 단계에 대응하는 일정한 사회적 생산관계로 구성된다고 보았다. 그리고 생산력 발전이 일정한 단계에 이르게 되면, 발전된 생산력과 낡은 생산관계 사이에는 갈등과 모순이 야기되고, 이러한 모순이 누적되면, 필연적으로 새로운 생산관계가 출현하며, 그에 따라 조만간 그 사회의 정치적, 법률적, 철학적, 종교적 측면을 포함하는 모든 이념적 상부구조의 변화가 수반된다고 봄으로써, 마르크스는 역사발전의 원동력은 생산력에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하버마스는 사적 유물론의 기본명제인 이와 같은 상하부 구조론은 후기 자본주의 사회의 변화된 실상을 설명하기에는 결정적으로 한계성이 있다는 것이다. 첫째, 마르크스 당시와 같은 자유방임적 자본주의 단계에 있어서는 국가의 역할이 극히 제한적이었고 따라서 경제활동은 자유경쟁과 시장원리가 지배하고 있었다. 그러나 대규모기업의 출현이 본격화되고 경제영역에 대한 국가권력의 개입이 현저하게 증대된 후기 자본주의 즉 '조직화된 자본주의'(organized capitalism)단계에 있어서는 더 이상 경제 영역과 정치영역을 분리하여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이다. 둘째로 후기 자본주의 사회에 있어서 갈등과 위기의 중심부는 경제 영역이 아니라, 오히려 정치 영역이라는 것이다. 오늘날의 경제활동은 상당한 정도로 재기업과 연결된 정부에 의하여 조종되고 있기 때문에, 국가기구의 정치적 권력이 기업의 자본축적을 지원하는 역할을 수행하고 있으나, 만약 이러한 역할을 성공적으로 수행하는 과정에서 국가 기능에 대한 대중의 동의와 충성심을 얻지 못한다고 하면 정당성의 위기(legitimation crisis)에 처하게 된다. 하버마스에 따르면, 후기 자본주의의 가장 핵심적 모순은 경제적 모순이 아니라, 바로 이와 같은 정당성의 위기경향이라는 것이다. 요컨대, 아담 스미스(Smith)가 신뢰하였던 '보이지 않는 손'이 국가개입이라고 하는 보다 가시적인 통제로 대치된 후기 자본주의 사회를 분석하는 데 있어서는 마르크스의 고전적 상하부 구조론은 결정적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셋째로 계급갈등이 사회변혁의 잠재적 요인이었던 마르크스의 시대와는 달리, 오늘날의 선진 자본주의 사회에 있어서는 노동자 조직과 사용자 및 정부간에 이른바 노 사 정 간의 타협과 계약이 제도적으로 확립되고 있어 계급화해가 선진자본주의의 구조적 특징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제 계급의식의 개념은 퇴색되고, 해방에 대한 관심도 더 이상 경제적 차원에서만 접근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소외현상도 더 이상 경제적 측면에 국한하여 파악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넷째로 오늘날은 연구와 개발에 대한 대규모 투자가 본격화되어, 과학과 기술 및 산업생산이 상호긴밀한 관계를 이룩하였다. 그래서 과학과 기술의 진보가 경제성장을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인으로 등장한 후기 자본주의적 생산에 있어서는, 과학과 기술이 잉여가치를 생성 창출하는 주요 원천이라 할 수 있고, 따라서 노동력만이 잉여가치를 창출한다고 하는 마르크스의 노동 가치설은 이제 그 설득력을 잃게 되었다는 것이다. 끝으로, 하버마스가 후기 자본주의의 가장 뚜렷한 특성으로 우려하는 것은 과학과 기술의 논리가 하나의 보편적 기준으로 사회생활의 모든 영역에 깊이 침투하였고, 특히 과학 및 기술주의가 정치적 문제해결에 광범위하게 이용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와 같이 정치가 테크놀로지의 일종으로 왜곡된 이른바 정치의 과학화 현상은 선진 자본주의사회의 새로운 이데올로기로 등장한다. 과학과 기술이 보급하는 지식은 한편으로는 덜 이데올로기인 듯하면서도, 다른 한편에서 보면 보다 강력한 이데올로기적 정당화 기능을 수행한다고 할 수 있다. 기술적 의식은 허위의식과 같은 전통적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가치중립성과 객관성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이데올로기적이라 할 수 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의 세계가 갖는 소박성과 상식성에 비하면 그 과학성과 엄밀성으로 인하여 아무런 의심없이 받아들이게 된다는 점에서 전통적 이데올로기보다 더욱 강력한 정당성의 근거로 작용한다. 따라서 현대사회에 만연된 기술적 의식은 생활세계의 상징적 상호작용과 의사소통적 합리성을 억압하고 대중의 탈정치화에 기여하는 새로운 이데올로기이며, 이와 같이 기술적 의식이 우리의 삶을 황폐화시키는 문명의 병이를 하버마스는 생활세계의 식민지화라 하였다. 그러나 과학적 사고방식의 인식론적 한계성을 적나라하게 비판하고, 과학과 기술이 현대사회의 새로운 지배 이데올로기로 이용된다는 점에서 과학과 기술을 전면적으로 비판했던 초기 비판이론가들과는 달리, 하버마스는 과학과 기술을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과학자 공동체가 지식의 단순한 생산에 안주하지 않고, 그들의 연구결과와 지식이 갖는 사회적 및 인간적 함의에 대하여 부단한 자기성찰과 개방적 논의를 거듭함으로써 과학과 기술이 인류의 번영에 기여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 하버마스의 입장이라고 하겠다. 요컨대, 후기 자본주의는 경제에 대한 국가권력의 증대된 개입, 정당화의 위기, 계급화해로 인한 계급갈등의 퇴조, 일차적 생산력으로서의 과학과 기술의 발전과 그에 따른 생활세계의 식민지화와 사물화 현상의 만연 등으로 특징지울 수 있다. 생활세계의 식민지화와 사물화 현상을 극복하는 방안에 있어서도 하버마스는 마르크스와 다른 입장을 취하고 있다. 이와 같은 문명의 병리는 마르크스가 주장한 사회주의 혁명으로 극복될 수 없다는 것이다. 하버마스는 오히려 사회주의 사회가 되면 국유화된 거대한 생산수단을 국가가 획일적으로 통제 조종하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가일층 강화된 중앙집권적 관료기구가 출현하기 때문에 사회주의적 이행에 극히 비판적이었던 베버(Max Weber)의 관점을 지지한다. 이러한 입장을 그는 『의사소통적 행위이론』의 제2권에서 다음과 같이 밝혔다. "체계(system)와 생활세계(life-world)는 마르크스에 있어서도 '필연의 영역'과 '자유의 영역'이라는 은유로 표현되었다. 마르크스는 사회주의 혁명이 후자를 전자의 통제로부터 해방시킬수 있다고 보았다. 사회주의 혁명에 대한 이와 같은 기대를 반대했던 베버의 진단은 옳다. 사적 자본의 폐지가 결코 현대 산업노동의 철창(iron cage)을 폐기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의사소통적으로 구조화된 생활세계가 사물화되는 현상을 단순히 계급분화의 문제로 환원한 것이 마르크스와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오류라는 것이다. 후기 자본주의의 핵심적 갈등은 단순한 물질적 재화의 분배문제가 아니라, 오히려 의사소통적 이성에 의하여 생활세계를 되찾고 삶의 규범적 질서를 근본적으로 변혁함으로써 해결될 수 있는 문제에 기인된다는 것이다. 3. 언어적 전회 하버마스는 우리의 일상적 의사소통의 형식 그 자체 속에 이른바 자유, 정의, 진리와 같은 보편적 원칙이 내재해 있으므로, 의사소통적 행위이론이 사회이론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고 본다. 비판적 사회이론을 위한 이와 같은 '언어적 전회'(linguistic turn)는 후기 비트겐슈타인 이래 의식의 철학에서 언어철학으로 전환되고 있는 20세기 철학의 한 조류와도 같은 것이다. 언어가 인간생활의 독특한 특징이고, 인간의 삶은 의사소통 과정을 떠나서는 이해할 수 없으므로, 그는 언어행위(speech actions)를 분석하는 데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촘스키(Noam Chomsky)의 언어학이론과 오스틴(Austin)과 서얼(Searle)이 제기한 언어행위이론에 힘입어, 하버마스는 의사소통능력도 합리적으로 재구성될 수 있다고 선언한다. 촘스키는 언어능력(linguistic competence)과 언어수행(linguistic performance)을, 각기 심층구조와 표면구조에 비유하여 엄격하게 구별하였다. 그의 변형 생성문법의 주된 관심은 전자 즉 언어능력에 집중되었고, 언어능력만이 보편적 개념화가 가능하다고 보았다. 그러나 하버마스에 따르면, 재구성적 언어분석의 목적은 문법적으로 타당한 문장을 구성할 수 있고 타인에게 납득될 수 있게 표현할 수 있는 유능한 화자라면 누구나 숙달해야 할 규칙들을 명백하게 규명하는데 있다. 이 점에 있어서는 언어행위이론이나 언어학이 다를 바 없다. 그러나 언어학이 언어능력에 관한 전제로부터 출발하는 것과 대조적으로, 언어행위이론은 의사소통능력을 상정하는 데서 시작한다. 그래서 우리는 언어능력뿐만 아니라 의사소통능력도 개념으로 정립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버마스의 문장의 구문론적, 음성학적 및 의미론적 측면뿐만 아니라 언술행위의 실용적 측면도, 말하자면 언어능력뿐만 아니라 언어수행도 보편적 개념으로 정립할 수 있다고 본다. 여기서 하버마스가 의사소통능력이라고 하는 것은 촘스키의 언어수행과 같은 개념이다. 요컨대, 의사소통능력도 보편적 개념화가 가능하다고 보는 하버마스는 언어능력만이 보편성이라고 보는 촘스키와는 그 입장이 다르다. 촘스키의 변형생성문법이 언어능력의 보편성을 강조한 것이라면, 하버마스의 의사소통론은 언어수행의 측면도 보편적 근거를 갖는다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하버마스는 촘스키가 언어능력을 생래적으로 결정되어 있다고 상정하는 데 거부감을 느끼고, 일상적인 언어수행에 분석의 초점을 두었다. 이와같이 일상적인 언어수행에 초점을 둔 언어이론은 비트겐슈타인에서도 볼 수 있다. 후기 비트겐슈타인은 언어의 본질은 실재를 묘사하는데 있다고 하는 자신의 전기사상 즉 언어그림이론에 내재된 본질주의를 스스로 비판하고, 언어에 본질이라고 할 수 있는 어떤 공통된 특성은 없고, 오직 일상적 문맥에 따라 언어가 어떤 방식으로 사용되고 있는가를 검토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였다. 언어현상도 놀이처럼 상호주관적인 어떤 규칙에 따르며, 이러한 규칙에 따름으로써 언어사용자들이 합의에 이를 수 있다고 보았다. 하버마스는 비트겐슈타인의 언어놀이이론을 수용하고, 의사소통행위가 상호주관적인 규칙에 대한 성찰을 내포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일상적인 언어행위에 대한 보다 체계적인 분석은 오스틴과 서얼에서 볼 수 있다. 언어적 의사소통의 기본단위는 언어행위이며, 단어나 문장이 아니라, 말이 기본단위라는 것이다. 그런데 모든 언어행위는 분석적으로 구분할 수 있는 두 가지 요소, 즉 명제적 내용(propositional content)과 비언표적 행위(illocutionary acts)로 구성되어 있다. 어떤 명제를 P라 할 때, '나는 P라고 주장한다', '나는 P라고 약속한다', '나는 P를 명령한다'와 같은 언어행위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동일한 명제적 내용(P)이 상이한 수행동사(주장한다, 약속한다, 명령한다 등의 동사)와 연결될 때, 비언표적 행위 혹은 지배문장과 명제적 내용 혹은 종속문장으로 구별할 수 있는 두 요소로 구성된다. 지배문장은 언어행위의 비언표적 효력을 결정하고, 동시에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간의 관계 즉 의사소통의 양식을 결정하며, 이는 곧 종속문장(명제적 내용)이 소통되는 실용적 상황을 나타내는 것이다. 종속문장 혹은 명제적 내용은 의사소통내용을 실재세계와 연결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의사소통능력은 문법적으로 타당한 문장을 만들고 이해하는 능력뿐만 아니라, 의사소통양식에 따라 언어를 수행하고 이해할 수 있음은 물론 의사소통되는 내용을 실재세계와 관련지을 수 있는 능력을 포함한다는 것이다. 하버마스의 보편적 실용론은 일상적인 언어행위의 기초라 할 수 있는 의사소통능력에 관한 형식적 특성을 구체화한 것이다. 형식적 특성으로 볼 때, 모든 언어행위는 문법적으로 옳고, 외적 실재, 내적 실재 및 사회의 규범적 실재에 합당하다는 것을 암암리에 전제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버마스에 따르면, 언어행위를 수행함에 있어서 우리는 누구나 암암리에 네 가지 타당성주장을 깔고 있다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보편적 실용론의 핵심은 첫째, 말하는 사람은 자신의 말이 듣는 사람이 이해할 수 있도록 문법적으로 타당하고, 둘째, 말하는 사람은 자신이 말한 것은 외적 실재에 비추어 볼 때 진리이며, 셋째, 말하는 사람은 나타낸 표현이 자신의 내면적 의도를 정직하게 말한 것이며, 넷째, 말하는 사람은 자신이 말한 것은 기존의 사회적 규범에 비추어 볼 때 정당하다는 것을 암암리에 주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위에서 제시한 네 가지 타당성 주장 즉 이해가능성(comprehensibility), 진리성(truth), 진실성(veraciousness) 및 정당성(rightness)은 모든 언어행위에 내재되어 있는 어떤 전제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네 가지 타당성 주장 중에서 이해가능성 주장만 언어에 직접적으로 관련된 것이고, 다른 세 가지 요소는 모두 언어외적실재(extralinguisticd reality)에 관한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갈등과 견해차를 극복하고 의사소통을 가능하게 하기 위해서는 타당성 주장을 정당화할 수 있도록 개방적인 논의와 담론을 존중하여야 하며, 개방적이고 진정한 담론의 규범을 준수하여야 한다. 4. 계몽과 모더니티의 과제 우리가 이미 앞에서 본 것처럼, 후기 자본주의 단계에 이르러 경제영역에 대한 국가권력의 점증하는 개입, 새로운 유형의 과학화된 이데올로기 기능에 의한 계급화해와 그에 따른 계급갈등의 점진적 퇴조, 하이테크혁명에 의하여 잉여가치의 주요원천으로 등장한 과학과 기술의 높여진 위상, 그리고 이에 수반된 생활세계의 황폐화와 새로운 차원의 문화적 물상화 등 일련의 징후로 인하여, 이른바 '역사의 진보'라는 것이,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보기에도, 마르크스가 제시한 역사법칙에 따르지 않는다는 역사적 사실을 거듭 확인하게 되자, 오늘날의 네오마르크스주의자들 중에는 이같이 변화된 현실상황을 해석하는 또하나의 이론적 자원을 마르크스와는 이념적 입장이 다른 베버(Weber)의 사상에서 찾는 경향이 뚜렷하다. 하버마스가 역사의 진보 혹은 진보적 역사관이라고 하는 것은 구체적으로 18세기 경에 꽁도르세(Condorcet)를 비롯한 계몽주의 철학자들이 형성한 계몽의 과제 혹은 현대의 과제를뜻한다. 베버가 지적한 것처럼, 현대의 특성 즉 모더니티(modernity)는 종교와 형이상학의 중세적인 획일적 세계관의 미몽으로부터 깨어나, 과학과 도덕률 그리고 예술이 각기 자율적영역으로 분화된 데서 비롯되었다. 말하자면 계몽주의적 사조에 의하여 중세의 봉건적 횡포와 종교적 독단이 무너짐과 동시에 중세의 획일적 세계관이 붕괴되면서 과학적 진리, 규범적 정의, 심미적 가치의 영역은 이제 자율적 영역으로 분화되어 각 영역고유의 내적 논리에 따라 독자적으로 제도화되기에 이르렀으니, 베버는 이를 모더니티의 출현으로 보았다. 과학적 지식의 발전은 인류로 하여금 자연환경을 합리적으로 통제 지배할 수 있게 하고, 도덕과 법 그리고 예술 영역의 자율적 발전은 우리의 사회적 삶을 합리적으로 영위할 수 있게 한다는 점에서 모더니티의 과제(project of modernity)는 곧 인류를 몽매에서 계몽으로 인도하는 계몽의 과제이며, 일찍이 꽁도르세는 이를 '인간정신의 진보'로 요약하였다. 하버마스가 모더니티의 과제라고 하는 것은 18세기 계몽주의 사조에서 비롯된 역사의 진보에 관한 확신과 사회적 삶의 합리적 조직에 대한 확신을 뜻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명백히 구별하여야 할 것은 합리성 개념이다. 합리성이라는 것도 여러 가지 차원의 합리성이 있을 수 있으나, 우선 두 가지 유형의 합리성을 구별하여야 한다. 우리가 설정한 어떤 목적을 달성하는 데 이용할 수 있는 여러 가지 대안적인 수단들 중에서 가장 능률적인 수단을 선택할 수 있는 타산적 이성이라는 의미의 합리성을, 일반적으로 목적합리성이라고 한다. 그러나 우리는 비록 목적달성에 비능률적이라 하더라도, 가능한 한 우리 모두가 동의하고 합의를 이룩하는 데 높은 가치를 부여하는 경우도 있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목적합리성과는 다른 차원의 합리성이기 때문에, 이를 특별히 의사소통적 합리성이라 할 수 있다. 말하자면, 합리적이라는 것도 착안점에 따라서 목적합리적인 것도 있고 또한 의사소통에 합리적인 것도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하버마스에 따르면, 원래 모더니티의 과제는 목적합리성과 의사소통적 합리성을 모두 포함하고 있다는 것이다. 위에서 설명한 바, 계몽사조에서 비롯된 모더니티의 과제를 보면 하버마스의 주장에 동의할 수 있다. 객관적 과학의 발전으로 자연환경을 통제하고 지배하려는 과제는 목적합리적인 것이요, 도덕과 법 그리고 예술의 자율적 발전으로 사회적 삶을 합리적으로 영위하려고 한 당초의 기획은 의사소통적 합리성을 뜻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마르크스, 베버, 루카치, 호르크하이머, 아도르노, 마르쿠제의 문명비판을 따르면서도, 이들에 대하여 하버마스가 철저한 비판을 제기하는 이유의 하나는 그들이 모두 계몽사조의 후예이면서도, 계몽주의적 과제가 원래 설정했던 두 가지 유형의 합리성 중에서 의사소통적 합리성은 망각해 버리고, 계몽의 과제 즉 모더니티의 과제를 목적합리성 그 자체인양 착각하게 되었고, 결과적으로 계몽주의적 과제가 완전히 낭패가 난 것처럼 허무주의적 결론을 내렸다는 데 있다. 다소 현학적이고 난해한 하버마스의 글을 저자가 쉽게 푸는 과정에서 하버마스의 사상의 심오함을 단순화하고 왜곡하였을 가능성도 없지 않으나, 『의사소통행위론』(The Theory of Communicative Action, Vol. I.) 143페이지부터 두서너 장을 보면 이에 대한 자세한 논의를 접할 수 있다. 요컨대, 베버가 합리화라고 하는 것, 호르크하이머 등 프랑크푸르트학파가 도구적 이성, 도구적 합리성이라고 하는 것은 모두 목적합리성이며, 이들이 계몽주의적 이성의 전면적 몰락을 선언한 것도 계몽의 과제 즉 모더니티의 과제 중 한 측면만을 보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하버마스도 계몽의 역기능을 인정하고 이에 대한 다각적인 비판을 제기하였으나, 그는 모더니티를 전향적 발전으로 보는 모더니티의 대변자이다. 앞에서 지적한 것처럼, 하버마스는 서구사회의 근대화(modernization)를 베버와 같이 합리화(rationalization) 과정으로 규정하였다. 그러나 그는 근대화 과정을 도구적 합리성이 지배하는 자율적 하위체계의 분화로 보는 베버, 이를 물상화로 개념화한 루카치 및 이성 그 자체를 도구적 이성으로 본 제1세대 비판이론가들의 합리성 개념을 비판적으로 극복한 것이다. 루카치는 『역사와 계급의식』에서 상품의 물신숭배가 경제영역뿐만 아니라 사회적 사람의 모든 영역에 폭넓게 침투함으로써 지본주의적 경제원리가 인간관계까지도 사물의 관계로 타락시킨 것을 지적하면서, 서구의 합리화과정을 물상화로 개념화하였고, 역사발전의 주체요 동시에 객체인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의식에 의해서 물상화를 극복할 수 있다고 하였다.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는 루카치의 물상화개념을 수용하면서도, 이를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이라는 특정의 역사적 맥락에 국한하지 않고,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를 가릴 것 없이 점증하는 도구적 이성이 수반한 필여적 귀결이라 봄으로써 물상화개념을 철학적으로 한층 더 정교화하였다. 루카치의 관점은 현대사회의 인간소외를 단순한 경제영역뿐만 아니라, 사회적 삶의 모든 영역으로 일반화시켰다는 점에서 이른바 정통 마르크스주의의 편협한 인식을 극복할 수 있게 하였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급갈등이 계급화해로 대치된 선진사회의 변화된 상황하에서는 더 이상 설득력이 없는 진부한 관점이라 아니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차원에서 보면, 호르크하이머, 아도르노, 마르쿠제 등 제1세대 비판이론가들이 물상화 개념을 체제 초월적으로 일반화하고 철학적 수준에서 대상세계를 정복하고 지배하려는 도구적 합리성 개념으로 발전시킨 것은 루카치를 능가하는 통찰력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의 결론은 인간의 합리성 혹은 이성 그 자체를 도구적 이성과 동일시함으로써, 이성의 이름으로 사회를 비판하는 비판이론 그 자체를 막다른 골목으로 몰고 간 역설적 결론이며 따라서 극복되기 어려운 회의론에 빠진 것이다. 하버마스의 의사소통행위론은 바로 이와 같은 딜레마로부터 탈피하기 위하여 제기되었고, 이를 위하여 그는 의식철학(philosophy of consciousness)으로부터 언어철학(linguistic philosophy)으로의 파라다임 전환을 강조하고, 인간이성의 인지적이고 도구적인 측면을 보다 포괄적인 의사소통적 합리성의 일부로 여기는 새로운 시각을 제시하였다. 그래서 탐구의 초점은 인지적 도구적 합리성으로부터 의사소통적 합리성(communicative rationality)으로 옮겨진다. 의사소통적 합리성의 파라다임에서는 객관세계의 어떤 것과 단독적인 주체간의 관계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바로 그 어떤 것을 이해하는 과정에서 이룩되는 상호주관적 관계가 중요하다. 데카르트 이래의 인식론적 유아론(solipsism)에서는 객관세계에 대한 어떤 규정은 사유하는 인식주체 혹은 단독적 주체의 사유활동을 통해서 이루어진다고 보았다. 그러나 하버마스는 데카르트적 관점을 거부하고 헤겔적 관점에서 인간의 인식작용을 이해하고 있다. 즉, 우리는 우리의 주체 혹은 자아를 의식할 수 있기 위해서는 우선 타자의 존재를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가령, 어떤 과학적 지식도 과학자 개인의 단독적 성찰에 의해서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특정 개인의 인식주관 그 자체도 다른 과학도들과의 관계를 통해서만 형성되는 것이므로, 과학자 공동체의 상호주관적 합의를 전제로 한다. 사회는 독자적으로 유리된 원자적 개인들의 집합체가 아니라, 대화적으로 구성되고 상호일체를 지향하는 공통체로 인식되어야 한다. 이렇게 볼 때, 과학자가 객관적 자연에 관한 단순한 지식만을 생산하는 데 만족할 수 없고, 과학적 지식의 사회적 및 인간적 함의에 대한 자유롭고 개방적인 토론을 거쳐야 하며,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과학이 인간해방에 기여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버마스가 생산성 제고나 행정의 능률화가 중요시되는 경제와 행정 같은 하위체계에 통용되는 인지적 도구적 합리성뿐만 아니라, 대화적으로 구성되는 의사소통적 삶의 영역에 필수적인 윤리적 정치적 합리성 및 심미적 실천적 합리성도 중요시되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따라서 하버마스가 현대의 특성(modernity)를 합리화과정으로 규정할 때, 그가 합리성이라고 지칭하는 것은 목적합리성과 의사소통적 합리성을 포괄하는 넓은 의미의 합리성이며, 특히 전자를 후자의 일부로 내포하는 포괄적 개념의 합리성을 뜻한다. 과학과 기술발전이 경제성장에 기여함과 동시에 생태계를 파괴하여 궁극적으로는 인류존재의 종말을 실감케 하며, 테크노크라시가 행정의 능률성에 기여하는 것 못지 않게 개인의 자율성을 침해하고, 진정한 언로를 차단하며, 그래서 민주적 가치를 훼손할 뿐만 아니라, 공장자동화, 사무자동화, 가정생활의 자동화 등 각종 편의의 증대와 함께 문명의 이기가 확대됨과 동시에 시민의 모든 사적 삶이 치밀한 분석과 감시를 피할 수 없는 원형감옥(panopticon)에 속박되는 문명의 병리로 인하여 삶의 세계가 황폐화되는 추세를 극복하기 위하여 하버마스는 의사소통적 합리성을 강조한 것이다. 이와같이 정립된 합리성 개념 혹은 의사소통적 행위론은 하버마스에게 여러 가지 새로운 돌파구를 제공하게 되었다. 첫째, 일상적인 언어수행의 과정에서 우리가 타당성 주장을 수용하고 있다고 하는 보편적 실용론이 강조한 것처럼, 일상적인 대화에까지 강력한 합리성 개념을 부여함으로써, 하버마스는 제1세대 비판이론의 회이론을 극복할 수 있게 되었다. 호르크하이머, 아도르노 및 마르쿠제는 지식이나 가치의 어떤 궁극적 토대가 있다는 데 대하여 극히 회의적이었고, 이 점에 있어서 상대주의적 입장을 견지하였으나, 하버마스는 의식철학에서 언어철학으로 전회함으로써 언어행위에 내재된 타당성 기초는 부인할 수 없는 보편적 전제이며, 이런 의미에서 선험적 전제(transcendental presupposition)라는 것이다. 따라서 보편적 실용론 혹은 의사소통적 합리성은 사회이론의 보편적 기초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둘째, 하버마스의 새로운 합리성 개념은 정치의 과학화를 극복할 수 있는 규범적 방안을 제시하고 있다. 앞서 지적한 바와 같이, 후기 자본주의사회에 있어서는 갈등과 위기의 중심부가 경제영역이 아니라 정치영역이다. 오늘날의 정치적 결정은 윤리적 과제라기 보다는 과학적 과제로 인식되기에 이르렀고, 따라서 기술적 이성의 도구적 논리에 따르기 때문에 정치의 과학화를 초래하였다. 하버마스는 의사소통적 언어의 메카니즘에 내재된 자유와 화해의 규범을 준수할 때, 비로소 우리는 정의로운 사회를 이룩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이를 위하여 정치적 의사결정과정에 시민들의 폭넓은 참여를 촉구하고, 합리적이고 자유로운 논의를통해서 의사결정과정을 민주화함으로써 갈등과 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셋째, 그는 목적합리성까지 내포하는 포괄적인 합리성 개념을 상정함으로써, 편협하고 단편적인 합리성 개념에 의존한 나머지 회의주의적 결론을 내렸던 베버, 호르크하이머 및 아도르노 등의 딜레마를 극복할 수 있었다. 베버와 제1세대 비판이론가들은 모더니티를 도구적 합리성과 동일시함으로써 모더니티의 잠재적 가능성을 전면적으로 부정하였으나, 하버마스는 계몽주의적 이성의 병리현상 혹은 합리화의 역설은 우리가 합리성을 포괄적 개념으로 볼 때, 합리성이 과다해서라기보다는 합리적 정신이 덜 발달한 데서 기인된 현상이며, 따라서 모더니티의 병리는 계몽주의적 이성을 전면적으로 거부하기보다는 한층 더 계몽된 이성에 의해서 극복될 수 있다고 보았다.
|
최근 댓글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