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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 68혁명 프랑크푸르트학파의 비판이론

68운동 기존질서 엎으려는 ‘국제적 저항’
문화혁명이었나 과격주의자들의 발작이었나
세대반란이었나 카니발이었나
프랑스, 미국, 독일, 이탈리아 등지서
따로 또 같이 일어난 ‘저항의 지도’를 되짚어본다
한겨레 오철우 기자
▲ 68운동
잉그리트 길혀-홀타이 지음. 정대성 옮김. 들녘코기토 펴냄. 1만2000원
서구사회를 이해하는 열쇠말 가운데 ‘68세대’가 있다. 1968년 절정에 달했던 거대한 변화의 물결에 참여했고 그에 감화받았던 세대다. 세대로 계산하면 벌써 40여년 전 일이니, 어찌보면 한 세대 이상이 지난 아득한 일이기도 하다. 그래도 여전히 ‘68운동’에 대한 분석은 다 끝나지 않는다. “이제껏 세계혁명은 단 둘뿐이었다. 하나는 1848년에, 그리고 또 하나는 1968년에 일어났다. 둘 다 역사적 실패로 끝났지만 둘 다 세계를 바꾸어놓았다”(이매뉴얼 월러스틴)라는 평가가 있듯이, 그 거대함은 한 세대의 시간만으로 다 어루만질 수 없기에 말이다.

독일 역사학자 잉그리트 길혀-홀타이(빌레펠트대학 교수)가 쓴 <68운동>은 해일처럼 몰아쳐 서구사회의 정신과 제도를 뒤흔들었던 1968년 운동의 기승전결을 되짚으며 분석한 책이다. 비교적 적은 분량에 68운동의 핵심을 빠르게 정리한 이 책은 68운동이 자양분을 준 지금의 서구 시민사회와 저항문화를 이해하는 데에도 도움을 줄 만하다.

68운동은 여러 이름으로 불렸다. 지은이 길혀-홀타이 교수가 열거했듯이 ‘학생봉기’, ‘세대반란’, ‘문화혁명’, ‘세계체제 혁명’으로, 또는 ‘카니발’이나 ‘과격주의자들의 발작’으로 이해됐다. 저항하는 젊음의 열병 같은 축제였을까, 정신문명의 새로운 자각이었을까. 한 나라 안의 격동이었을까, 세계 차원의 새 살 움틈이었을까. 평가자들마다 다른 시선들은 그 때마다 다른 이름을 만들어냈다. 지은이는 여기에 또하나의 이름을 얹는 것일까.

길혀-훌타이 교수의 분석은 이전의 68운동 분석들과는 다르게 독특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는데, 그 독특함은 68운동이 프랑스, 미국, 독일, 이탈리아 같은 여러 나라에서 ‘기존 권위에 대한 전사회적 대항의 기획’이라는 닮은꼴로 일어난 국제적 운동이었을 강조하는 대목에 담겨 있다. 지은이는 각 나라마다 ‘따로 또 같이’ 일어난 ‘저항의 지도’를 역사비교의 방법을 통해 그려내고 있는 셈이다. 저항의 과제는 어느 나라에서건 언제나 ‘참여 확대’와 ‘의식 개혁’이라는 두 가지로 압축됐다.

국제베트남회의, 혁명을 배태

1968년 앞뒤의 시절에 서구사회엔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


책의 첫 장면은 베트남혁명을 지지하여 1968년 2월 독일에서 열린 ‘국제베트남회의’ 안의 긴장과 활기다. 여기에 참여한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미국의 신좌파 대표들은 구좌파과는 뚜렷히 구분된 새 세대들이었다. 68운동의 중심이었다. 회의 뒤에 1만5천여명이 참여한 다국적 평화행진은 68운동이 바로 이들을 잇는 국제적 운동이었음을 보여주는 상징 사건으로 묘사된다.

신좌파 지식인의 새로운 인식은 현실사회주의인 소련의 스탈린주의에 대한 분명한 반기였다. 무력한 선배 좌파들은 새 세대 좌파들한테 비난의 화살을 받아야만 했다. 반자본의 목소리에 더해 사회주의 개혁에 대한 요구가 쏟아졌다. 권위와 관료주의는 배격됐다. 또한 신좌파는 실존주의와 심리분석을 그들의 사상 지평에 과감히 끌어들였고, 집단 해방과 더불어 개인 해방을 부르짖었다. 개인의 생활세계, 가족, 성적 관계는 강조됐다.

▲ 비틀즈의 1967년 새 앨범 <페퍼 상사의 외로운 마음 클럽 밴드>의 표지. 큰 반향을 일으켰던 이 앨범은 히피 문화의 영향이 깊게 베인 작품으로, 당시 베트남전쟁 반대 시위자들이 벌인 펜타곤 앞 시위의 모습과 닮아 미국 68운동의 시위문화에 종종 인용됐다. 사진 <68운동> 102쪽에서.
신좌파와 대항문화의 새로운 자각엔 여러 요소들이 접합됐다. 체 게바라와 호치민은 영웅으로 떠올랐고, 히피, 록, 비틀즈, 밥 딜런은 이들의 문화가 됐다. 자유분방한 하위문화는 찬양됐다. 사르트르, 마르쿠제, 프란츠 파농의 책들은 이들의 필독서였다. 대학 캠퍼스에선 대학과 교수사회의 권위에 반발하는 자율과 자치, 평의회의 깃발이 점거농성과 시위 속에서 세워졌다. 차별에 반대하는 흑인과 노동자들이 함께했다. 코뮌 형태의 대안적 집단 생활공동체의 창설이 실험됐다. ‘조직보다 직접행동’을 내세운 그들은 갖가지 깜짝 시위를 동원해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이런 흐름의 중심에 미국 민주사회학생연맹, 독일 사회주의학생연맹, 프랑스 혁명적 공산주의청년 같은 신좌파들이 있었다.

참여와 저항의식, 보물로 남겨

지은이는 68운동의 붕괴 과정에서도 닮은꼴을 발견한다. 조직과 폭력의 문제는 붕괴를 촉진했다. “68운동은 조직문제와 대결하는 가운데, 경쟁하는 집단이나 정당, 분파, 하부문화 속으로 용해된다. 나아가 68운동은 폭력문제와 대결하며 분열되고 지지를 잃는다. 행동의 급진화 과정에서 나타난 폭력문제가 조직문제를 둘러싼 갈등을 더 첨예하게 만든 것이다.”(154쪽) 예컨대, 미국 민주사회학생연명은 폭력시위 문제를 둘러싸고 격렬한 내부논쟁을 벌이다 분열해 1969~70년 해산했으며 무장투쟁을 주장한 일부 그룹은 지하로 들어갔다. 한편으로는 붕괴과정에서 “68운동은 그 신성화나 악마화에 관계없이 공히 일상의 정치투쟁을 위해 도구화됐다.”(175쪽)

68운동은 무엇을 남겼고, 68세대는 무엇으로 남았는가. 68운동이 품은 ‘저항의 구상’은 얼마나 실현됐는지를 따져볼 때, 그것은 아마도 ‘대부분의 실패와 부분적인 성공’으로 비쳐질 만하다.

신좌파 그룹은 기존 조직에 복귀해 다시금 개인을 집단에 종속함으로써, 자기 결정과 개인 해방을 목표로 삼은 68운동의 반권위주의를 포기하기도 했다. 또 68운동의 정서는 대안적 대항문화의 환경에서 계속됐지만 동시에 그것은 여러 차례 단순화해 때때로 하부문화의 우상화를 낳기도 했다. 68운동의 후계로 등장한 여성운동과 대안운동, 생태운동 같은 운동은 68운동이 그린 구체적 유토피아와 비교할 때 기존 사회질서에 대한 전 사회적 대항의 구상을 펼쳐내지 못했다.

그렇지만 값진 경험은 기억의 공동체에 남았다. 지은이는 68운동의 영향이 조직적으로 계승되진 못했지만 서구사회에 의식의 전환을 가져다주었다고 평가한다. “68운동은 이런 의식 전환이 무관심의 타파와 활발한 사회 ‘참여’, 그리고 상품사회와 소비사회에 대한 비타협과 거부를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전제에서 출발했다. 나아가 68운동이 선전한 이행 전략은 ‘개인’에서 시작하고, 사회 참여를 통한 개인의 변화가 ‘다른’ 사회를 낳기 위한 전제조건이라고 보았던 것이다.”(178쪽) 기존 질서 전체에 맞서는 ‘대항의 구상’을 지닌 것으로는 “최후의 사회운동”이었던 68운동이 남긴 보물은 참여와 저항의 의식이었다.

오철우 기자 cheolwoo@hani.co.kr

 

[펌] [프랑크푸르트 학파 | 게시판

2004/12/12 14:28
http://blog.naver.com/dkddyd/80008464853
출처 블로그 > 잡다 혹은 섬세
원본 http://blog.naver.com/krinein/20004929158

아래 글은 노명우님의 홈페이지( http://myhome.naver.com/mwnho/index.html )에서 퍼왔습니다.

 

***

 

현대사상의 궤적 - 프랑크푸르트 학파

노명우(사회학, {문화/과학} 편집위원)

 

 

한 학파의 역사와 궤적 서술은 위험한 시도이다. 게다가 궤적을 쫓고있는 학파가 스승과 제자의 관계를 기반으로 스승이 천명한 학문의 목표를 제자들이 이어받아 계속 발전시키는 과정을 통해 형성되지 않았을 경우에는 더더욱 위험하다. 우리에게 '프랑크푸르트 학파' 혹은 '비판이론'으로 알려진 연구집단이 바로 이 경우에 해당된다. 우리는 관행적으로 '프랑크푸르트 학파'라고 말하지만, 그 학파는 다른 학파와는 구별되는 독특한 형성사를 보여준다. 호르크하이머(Horkheimer), 아도르노(Adorno), 마르쿠제(Marcuse), 뢰벤탈(L wenthal) 그리고 벤야민(Benjamin)과 같은 학자군을 부르기 위해 '프랑크푸르트 학파'라는 기호를 사용할 수 있다. 하지만 이 학자군을 구성하는 학자들의 독창성과 고유한 연구영역의 다양성을 생각해보면, 이들을 하나의 집합체로 파악하는 관행은 사실이라기 보다 희망에 가깝다. 또한 우리가 '프랑크푸르트 학파'라고 부르는 일련의 학자들이 관여했던 [사회조사연구소(Institut f r Sozialforschung)] 역시 안정적이고 지속적인 연구공간이 아니었다. [사회조사연구소]는 유태인 디아스포라의 운명을 공유했다. 따라서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궤적을 따라가기 위한 현명한 방법은, 그 학파를 단일한 연구집단으로 파악할 수 있는  사상의 핵을 찾는 것보다는 [사회조사연구소]의 부침 속의 불연속성이 빚어내는 다양한 색깔의 흔적에 주목하는 것이다.

 

1. 그륀베르크와 [사회조사연구소] 설립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형성과 [사회조사연구소]는 매우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하지만 [사회조사연구소]의 역사를 통해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궤적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연구소 역사내의 네 개의 중요한 단절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사회조사연구소]는 1) 1923년 설립되고 칼 그륀베르크(Carl Gr nberg)가 소장을 맡았던 시절 2) 호르크하이머가 사회조사연구소장으로 취임한 1930년 이후 3) 나치즘으로 인한 사회조사연구소의 망명 시기 4) 종전 이후 독일로 귀환이라는 단절적 계기를 거치면서, [사회조사연구소]와 결합했던 연구자들이 지속적으로 바뀌었고, 그에 따라 연구소의 중요 연구 방향도 크게 달라졌다.

[사회조사연구소] 설립의 기원은 1922년의 마르크스주의 워크샵(marxistische Arbeitswoche)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1923년 5월 20일 튀링엔(T ringen)에서 열린 이 워크숍에는 이후 서구 마르크스주의 역사에 굵직한 족적을 남긴 게오르그 루카치(Georg Lukacs)와 칼 코르쉬(Karl Korsch) 등이 참가하였다. 참가자들 중 [사회조사연구소]의 성격과 관련하여 우리의 주목을 끄는 인물은 프리드리히 폴록(Friedrich Pollock)과 펠릭스 바일(Felix Weil)이다. 펠릭스 바일은 대부호의 아들이었다. 펠릭스 바일의 아버지인 헤르만 바일(Hermann Weil)은 프랑크푸르트 대학에 거액의 기부금을 넘겨주었다. 이로써 훗날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출현을 가능하게 한 [사회조사연구소]는 설립될 수 있었다. 초대 소장으로 경제학자인 쿠르트 게를라흐(Kurt Gerlach)가 내정되어 있었으나, 1922년 그가 갑자기 사망하게 됨에 따라 칼 그뤼넨베르크가 초대 소장을 맡았다.

1923년 연구소의 설립부터 1933년까지 [사회조사연구소]의 연구방향은 경험주의적 색채가 강했다. 연구소의 초대 소장이었던 그륀베르크는 [사회조사연구소]를 마르크스주의의 역사유물론을 경험적이고 구체적으로 연구하는 중심지로 만들려 했다. 따라서 그륀베르크 소장의 [사회조사연구소]의 중요 인물들은 1923년의 마르크스주의 워크샵 참가자들이었다. 그륀베르크 시절 [사회조사연구소]는 {사회조사연구지(Zeitschrift f r Sozialforschung)}의 전신이라고할 수 있는 {그륀베르크 연보(Grnberg Archivs)}를 발행했는데, {그륀베르크 연보}에는 주로  마르크스주의 워크숍에 참가했던 사람들의 글이 수록되어 있다. 코르쉬의 {마르크스주의와 철학(Marxismus und Philosophie)}, 루카치의 {모세스 헤스와 관념론적 변증법적 문제(Moses Hess und die Probleme der idealitischen Dialektik)}와 같은 논문들이 대표적인 그 실례이다. 그륀베르크 시절 [사회조사연구소]는 마르크스주의 이론을 경험적으로 연구함으로써 마르크스주의의 혁신에 기여하려 하였다. 비트포겔(Wittvogel)의 {중국에서의 경제와 사회}, 그로스만(Grossman)의 {소련 연방에서의 1917-1927년간의 경제 계획의 실험} 등이 이러한 경향의 연구들이다. 하지만 그륀베르크 이후 [사회조사연구소]의 소장에 새로 임명된 호르크하이머와 함께 [사회조사연구소]의 연구 경향은 새로운 방향을 따라가게 된다.

 

 

3. 호르크하이머와 비판이론

 

그륀베르크 시절의 학자들과 달리 1930년 호르크하이머(Horkheimer)가 새로운 연구소장으로 임명되면서 우리가 '프랑크푸르트 학파'라 부르는 새로운 학자들이 [사회조사연구소]에 영입되었다. 연구소의 새소장 호르크하이머는 그륀베르크와 달리 연구 강조점을 경험적이고 실증적 방법론보다 철학에 두었다. 이런 경향은 1932년 마르쿠제(Marcuse)가 1938년에 아도르노(Adorno)가 [사회조사연구소]의 연구원으로 영입되면서 한층 강화되었다(호르크하이머 소장 시절 [사회조사연구소]의 중요 연구원으로 프롬(Fromm), 라이히(Reich), 노이만(Neumann)과 준 연구원으로 있었던 블로흐(Bloch) 등이 있다).

아주 잘 알려진 삽화가 있다. 호르크하이머가 왼쪽에 하버마스를 가운데에 아도르노를 그리고 오른쪽에 마르쿠제를 두고 뒤편에서 셋을 감싸고 있는 삽화이다. 이 삽화에서 호르크하이머는 누구보다도 커다랗게 그려져 있어서, 그와 비교하면 마르쿠제, 아도르노 그리고 하버마스는 어린아이처럼, 혹은 갓 박사학위를 마친 신참내기 학자처럼 보인다. 이 삽화는 [사회조사연구소] 내의 호르크하이머의 주도적 위치를 보여준다. [사회조사연구소]의 책임자였던 호르크하이머는 그 누구보다 연구소에서 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프랑크푸르트 학파를 지칭하는 또 다른 명칭인 '비판이론'이라는 호칭은 호르크하이머가 {사회연구지}에 발표한 논문의 제목 [전통적 이론과 비판적 이론(Traditionelle und Kritische Theorie)]에서 유래했다.

호르크하이머는 여러 가지 측면에서 엥겔스를 연상시킨다. 호르크하이머는 대부르조아의 자제였지만 도덕적 판단에 근거한 보다 나은 세계에 대한 유토피아적 열망을 늘 간직하고 있었다. 호르크하이머가 조카에게 보낸 젊은 시절의 편지에는 이런 말들이 쓰여있다. "누가 이 비참함을 고발할까? 너? 나? 우리는 우리가 도살한 자의 살점이 복통을 일으킨다고 불평하는 식인마에 불과해. 아니. 아니. 그보다 더 심해. 넌 안정과 재산을 향유하고 있지만 그 안정과 재산의 대가는 밖으로는 희생자들의 숨통을 조르고, 그들을 피 흘리게 하고 고통으로 몸부림치게 하지....넌 침대에서 잠을 자고 옷을 입지. 하지만 그걸 생산하려고 우리는 채찍을 휘두르며 배고픈 사람들에게서 돈을 강탈한다. 넌 네 모닝 코트의 재료를 만들기 위해 얼마나 많은 여자들이 기계 옆에서 쓰러지는지 알지 못해. 다른 이들은, 네가 심리 치료를 위해 지불하는 돈을 너의 아버지가 계속 벌 수 있게 하려고, 의식이 있는 상태에서 유독 가스에 타 죽는다. 넌 도스도예프스키의 작품을 두 페이지 이상은 읽을 수 없다는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게 될 거야. 우린 괴물이다. 그렇지만 전혀 가책을 느끼지 않아."

가난한자에 대한 호르크하이머의 이러한 연대의식은 그를 마르크스주의 전통에 가깝게 서게 하였고, 그는 사회비판이론 생산을 연구소의  중요 과제를 삼았다. 호르크하이머에게 비판이론은 전통적 이론과는 달리 사회와 과학에 대한 긍정이 아니라 비판적 태도를 견지한 이론을 의미한다. 호르크하이머는 비판이론을 이렇게 요약한다. "비판이론이 1920년대에 생겨났을 때, 비판이론은 보다 나은 사회에 대한 사유에서 출발했고 비판이론은 사회에 대해 비판적으로 행동했을 뿐만 아니라 과학에 대해서도 비판적이었다."

그가 전통적(traditionell) 이론이라고 비판하는 경향은 호르크하이머의 '비판적' 태도처럼 사회를 총체적으로 파악하는 이론을 지향하지 않고, 단지 부분적 사실의 관찰에 만족하는 '경험주의'적 편향을 보여주었다. 호르크하이머는 이러한 전통적 이론은 사회비판으로 나가지 못하고 사회를 긍정하는 보수적인 이론으로 회귀된다고 주장했다. 자연과학을 과학지식의 모델로 삼는 전통적 이론과 달리, 호르크하이머는 독일관념론의 급진화(Radikalisierung)를 통해 전통적 이론을 넘어서려 했다. 전통적 이론은 이론가를 사회의 연관망에서 벗어난 추상적인 중립의 위치에 있는 것으로 생각한지만, 호르크하이머에게 비판적 행동은 전통적 이론과는 달리 "사회 자체를 대상으로 삼는 인간행동"을 지칭했다. 호르크하이머에게 전통적 이론을 벗어나는 문제는, 실증주의적 방법론을 넘어섬과 동시에 이론가의 사회적 지위에 대한 재고를 포함했다.

호르크하이머 시절의 [사회조사연구소] 연구원들은 현실을 비판하는 또 다른 비판 기획인 마르크스주의를 비판하려는 공통된 목표의식을 지녔다. 이는 분명 그륀베르크의 [사회조사연구소]의 연구 프로그램과 구별되는 지향점이었다. 비판이론은 도구화된 마르크스주의 비판을 통해 마르크스 사상을 현재화(Aktualisieurung)하면서 동시에 혁신(Radikalisierung)하려 하였다. 스스로를 비판이론진영의 일원이라고 생각하는 이링 페쳐(Iring Fetscher)는 비판이론을 이렇게 정리한다. "프랑크푸르트 학파는 일련의 마르크스주의적 비판의 시도들을 현재화하는 것으로 해석할 경우 하나의 학파로 이해할 수 있다." 또한 마틴 제이(Martin Jay)의 {변증법적 상상력} 이후 비판이론의 역사를 개괄한 뛰어난 연구서로 꼽히는 {프랑크푸르트학파(Die Frankfurter Schule)}의 저자 비거하우스(Wiggerhaus)는 프랑크푸르트 학파는 내부의 이론적 패러다임의 상이함에도 불구하고 "사회의 자본주의적재생산의 물신성 비판이라는 마르크스주의적 비판의 전통 내부에서 이론은 합리적이어야 한다는 점"을 지향한 단일학파라는 것을 지적한다.

 

4. [사회조사연구소]의 망명

 

1933년 1월 30일 히틀러가 독일에서 권력을 장악하자 [사회조사연구소]는 더 이상 비판이론 연구 프로그램을 독일에서 수행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사회조사연구소]의 중요 인물들은 유태인이었기 때문이다. 1933년 4월 15일 호르크하이머는 교수직에서 물러났고, 나치의 위험을 피해 미국으로 망명했다. 아도르노 역시 영국을 거쳐 미국으로 피신했다. 여러 경로를 통해 미국으로 망명한 [사회조사연구소]의 연구원들은 1935년 컬럼비아 대학의 도움으로 뉴욕에 [사회조사연구소]를 재건했다.

[사회조사연구소] 또한 유태인의 운명을 걷고 있던 이 기간 동안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1세대의 대표적 인물인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는 공동으로 {계몽의 변증법}을 출간하였다. {계몽의 변증법}은 망명을 통해 오히려 성숙해진 [사회조사연구소]의  비판적 연구의 기획을 잘 담고 있다. 이 저서를 통해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는 [사회조사연구소]뿐만 아니라 독일과 인류의 문명 자체를 위험에 빠트린 나치즘의 뿌리가 바로 서양의 계몽정신에 내재해 있음을 밝혔다. {계몽의 변증법}에서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는 현대의 야만의 근원을 규명하면서, 현대적 야만의 또 다른 형태를 '문화산업'에서 발견하였고, 이로부터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중요한 연구 영역인 문화현상에 대한 주목이 자연스럽게 발생하였다. 미국 망명 시절 [사회조사연구소]는 나치즘의 기원을 규명하기 위한 권위주의에 관한 대규모 프로젝트를 수행하였다. 또한 이들은 {가족과 권위에 관한 연구(Studien  ber Autorit t und Familie)}와 {편견에 관한 연구}라는 공동연구를 통해 나치즘 현상을 정신분석학과 대중심리학을 통해 규명하기 시작하였다. 이 공동연구는 후에 마르쿠제와 프롬의 심리학적 연구의 밑거름이 되었다. [사회조사연구소]가 미국에 망명해 있는 동안, 프랑크푸르트 학파는 전통적 이론 비판과 마르크스주의 비판을 넘어서서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고유한 연구영역을 개척했다.

 

5. 독일 귀환과 68운동

 

나치의 패망 이후 [사회조사연구소]는 다시 독일로 귀환했고,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는 다시 프랑크푸르트 대학의 교수로 복직되었다.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는 1969년에 재발간된 {계몽이 변증법}의 공동 서문에서, [사회조사연구소]의 귀환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우리는 이 책이 씌어진 곳인 미국으로부터 독일로 돌아왔는데, 그것은 이론적으로나 실제적으로나 어떤 다른 곳보다 독일이 작업하기에 더 나으리라는 확신 때문이었다. 프리드리히 폴록과 함께 우리는 {계몽의 변증법}에서 언급한 관념들을 더 발전시키겠다는 생각 속에서 사회연구소를 재건했다."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영향력은 독일로 돌아온 이후 강해졌다. {계몽의 변증법} 서문에서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가 밝혔듯이, 귀환 이후 이들은 {계몽의 변증법}에서 시도된 지향들을 지속적으로 발전시켰고, 이 시기에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는 각자 기념비적인 연구들을 출간했다. 호르크하이머는 {도구적 이성비판 (Zur Kritik der instrumentellen Vernuft)}을 통해 이성의 도구화로 인한 현대사회의 야만을 비판했고, 아도르노는 {부정의 변증법(Negative Dialektik)}, {프리즘. 문화비판과 사회(Prismen. Kulturkritik und Gesellschaft)}를 통해 {계몽의 변증법}에서 제기된 비판사회이론을 지속적으로 발전시켰다.

독일로 귀환한 [사회조사연구소]는 아도르노가 칼 포퍼와 벌인 실증주의 논쟁과 1968년 독일사회학대회 개회연설을 계기로 한 '후기 자본주의 사회/산업사회' 논쟁을 통해 국제적 명성을 얻었지만, 연구소의 중요 멤버들 사이의 관심분야는 [사회조사연구소]의 설립 초기와 미국 망명 시절과는 달리 공동의 프로젝트를 수행할 수 없을 정도로 분화되어 있었다. 호르크하이머는 정년 퇴임을 앞 둔 1958년 [사회조사연구소] 소장직을 공동소장이었던 아도르노에게 물려주었지만, 아도르노 곁에 미국에 남는 길을 선택한 마르쿠제와 피레네 산맥을 넘다 자살한 벤야민은 없었다.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영향력은 1968년 운동에서 꽃을 피우는 듯 했다. 학생들은 비판이론이 정치적 행동주의의 사상을 풍부하게 해줄 원천이라 생각했다. 미국에 남은 마르쿠제는 학생운동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지만, 학생운동이 격화되고 있던 당시 아도르노는 직접적 정치적 실천을 선택하지 않고, 미학이론을 선택했다. 아도르노는 정치적 급변의 시기에 {부정의 변증법} 이후의 다음 저서로 {미학이론( sthetische Theorie)}을 선택했다. 이러한 아도르노의 '정치적 절제'에 실망한 학생들이 [사회조사연구소]를 점거하는 해프닝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6. 1968년 이후의 프랑크푸르트 학파

 

신좌파 운동이 유럽을 휩쓸고 있던 1968년 아도르노는 '정치적 절제'의 수수께끼를 담고 있는 {미학이론}을 완성하지 못한 채 사망했다. 호르크하이머도 1973년 세상을 떠나게 됨에 따라, 프랑크푸르트 학파를 재건했던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의 시대는 끝이 났다.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 이후 위르겐 하버마스(J rgen Habermas), 오스카 넥트(Oskar Negt), 클라우스 오페(Claus Offe)그리고 알브레히트 벨머(Albrecht Wellmer)와 같은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2세대로 호칭되는 학자들이 배출되지만,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의 사망 이후 구심점이 상실된 프랑크푸르트 학파는 하나의 학파라기보다 비판적 사회과학에 대한 은유에 더 가까워졌다. 하버마스는 역사유물론의 재구성으로부터 출발하여 언어학적 선회를 통해 의사소통이론으로, 넥트는 노동운동이론으로, 오페는 정치학으로, 벨머는 미학이론으로 나아갔다. 2세대들에게는 그 어떤 구심점도 없다. 하지만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사상사적 영향력은 여전하다. 1999년 1월 27일 개최된 나치희생자를 위한 추모행사에서 연방의회 의장인 볼프강 티제는 이렇게 말했다. "1월 27일은 우리 독일인에게는 공공영역에서 그리고 사적으로 우리의 최근 역사와 우리의 상상을 뛰어넘는 사건을 회고해야하는 동기를 제공합니다. 따라서 기억 속에서 현재의 과제와 미래를 동시에 착목해야 합니다. 아도르노의 잘 알려진 테제, 즉 교육의 과제는 다시는 아우슈비츠는 되풀이되도록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우리 시민들을 겨냥한 것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오늘의 추모식은 깨어있음에 대한 요구입니다."

우리의 상식으로 연방의회 의장이 연설문에서 학자들의 이름을 언급하는 것은 의아하게 보일 것이다. 그렇다고 이런 현상은 우리와 다른 문화를 지닌 독일의 문화적 독특성이라고 볼 수도 없다. 연방의회 의장이 아도르노를 언급한다는 것은, 독일에서 프랑크푸르트 학파는 단지 하나의 학파가 아니라 비판정신 일반의 은유에 해당된다는 것을 지시한다. 프랑크푸르트 학파는 단순히 학자들의 모임을 지칭하는 기호로 사용되지 않는다. 프랑크푸르트 학파는 현실을 비판하고, 더 나은 사회를 모색하려는 학자들의 지향을 지칭하는 기호에 가깝다. 나치와 협력 혐의 때문에, 하이데거의 전후 하이데거의 영향력은 학문적인 파장만을 불러일으킨다면,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영향력은 학계를 뛰어넘는다. 헬무트 베커는 이렇게 말했다. "전후 독일의 모든 사회학적 그리고 철학적 사유는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를 받아들이거나, 혹은 비판하든가 둘 중의 하나일 뿐이다." 그렇기에 프랑크푸르트 학파 이해는 전후 현대 독일사회를 파악하는 중요한 실마리이자, 현대 독일의 인문사회과학의 지형을 파악하는 데에도 큰 도움이 된다.

비판이론가들이 현대 독일의 인문사회과학을 대표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이들 인물의 삶 속에 독일 현대사의 중요한 궤적들이 새겨져 있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자신을 망명할 수밖에 없었던 독일 현대사의 야만의 근원을 학문적으로 파고들었고, 야만의 근원과 지속적인 대결을 벌였다. 그랬기에 프랑크푸르트 학파는 학문적 업적과 정치적 태도 사이의 괴리를 보여주는 하이데거와 달리, 학자들에게만 영향력이 있는 지식인이 아니라 동시대인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준 독일의 비판적 지성과 동의어로 받아들여질 수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이 학파의 궤적을 찾는 작업은 단순히 이 학파가 제출한 테제를 해석하는 것으로 끝날 수 없다.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궤적은 지식인이 사회 속에서 자기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변치 않는 비판정신에 있다는 한 사례이기 때문이다.

 

 

 

[펌] 프랑크푸르트학파 | 게시판 2004/12/12 14:27
http://blog.naver.com/dkddyd/80008464843
출처 블로그 > 혀비땅
원본 http://blog.naver.com/naligood93/40004690115

(당시에 난 모든 리포트를 책베끼기로 대체하는 유행에 반기라도 들 듯 모두 스스로 찾아서 내 글을 썼다. 그러나 지금도 프랑크푸르트학파는 모호한 채로 남아 있다. 그래도 제출시한에 밀려서 어거지로 쓰긴 했는데 영...)

 

 

Ⅰ. 들어가며


서구 철학의 현대적 흐름은 크게 주류·비주류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근대 이후 인간 이성에 대한 끝없는 신뢰와 선형적 역사관을 갖고 있는 주류 사상은 보수성과 함께 급진화된 신자유주의적인 자본주의 구조와 일맥상통하고 있다. 더군다나, 매스-커뮤니케이션의 발달과 그로 인한 세계시장 단일화에도 사상적으로 긍정적 배경을 제공하고 있다. 반면에 마르크스나 막스 베버 이래의 비주류적 사상은 선형적 역사관을 버리고, 변증법적인 나선형 역사관을 통해 인간과 사회의 성격을 규명하려고 시도했다. 반면에 이러한 이성적인 모든 노력은 단지 허구일 뿐이라는 생각에서 비합리적이고, 비사회적인 심미주의로 진리를 찾으려는 일단의 흐름이 생겼다. 특히 1960년대 말 서구에서의 진보적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포스트모더니즘적 경향을 주도한 지식인과 보수나 탈현대 모두를 거부하고 정치세력화를 통한 신사회운동을 주장한 독일의 녹색당등의 흐름도 있었다. 전인류의 문명과 과학기술의 발달이 진보와 어떤 관계를 갖는가를 두고 보수·진보라는 구분하기 힘든 틀 속에서 유럽의 지적 전통은 다른 지역의 지배적·피지배적인 많은 집단들의 이데올로기로 이용되기도 한다. 안서니 기든스의 제3의 길도 그런 맥락의 하나이다.

20세기 초반의 혼란스럽던 이런 지식사회의 흐름들 속에서 마르크스와 헤겔 등의 독일철학의 전통 속에서 비판이론이라는 원칙적 흐름을 가지고 저서와 논문집발표를 통해 활동한 프랑크푸르트 학파에 대해서 살펴보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라 본다. 특히, 이 학파의 성격과 발전과정, 대표적 학자들을 살펴봄으로써 현대사상사에서 차지하는 비중과 영향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Ⅱ.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생성 및 흐름


1. 프랑크푸르트 사회과학 연구소의 건립(1923-1933)


1922년 펠릭스 바일에 의해 ‘제 1회 마르크스 연구 주간’에서 <비판이론>이 나타날 계기가 주어졌다. 물론, 이때는 비판이론학자들인 호르크하이머, 마르쿠제, 아도르노는 보이지 않았다. 코르쉬, 비트포겔, 폴로크, 졸게, 루카치 등이 모여 프랑크푸르트 사회과학 연구소가 1923년 설립되었다. 물론, 펠릭스 바일 아버지로부터의 기부금이 재정적 원천이어서 대학으로부터 재정적 독립이 가능했다. 최초의 연구과제는 노동운동의 역사와 이론들, 경제와 문화의 상호작용, 사회적 발전의 특성 등이었다. 초대 소장으로 그뤈베르크가 임명되었다. 그는 자본주의의 사회주의로의 이행이라는 낙관적 관점을 가진 사람으로 신념적 방법론과 비맑스적 방법론에 대한 연구도 해야만 한다는 것을 인식했다. 설립 후 몇 년간은 소련의 마르크스주의자들과 다양한 접촉을 했으나 공식 정당과는 어떠한 정치적 영향을 받지도 않으려 했다. 이때. 내부에는 소비에트 공산주의 지지자와 폴로크나 호르크하이머와 같은 맑시즘의 회복을 바라는 두 그룹으로 양분되어 있었다.

호르크하이머는 사회문제에 대한 학제연구의 필요성을 주장하면서 실증주의를 비판했다. 즉, 단순한 실증가능한 사실을 떠나 헤겔적 사회철학을 개선하는 것을 통해, 인간의 실질적·정신적 문화 전체를 다루는 사회철학으로의 전환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여기서 철학적 이론과 개별 과학적 실천을 변증법적으로 상호 침투시키는 것이 호르크하이머의 목표인 것이다.

1932년 최초의 <사회연구지>가 출판되었으나, 1933년 9월부터는 파리에서 출판되었다. 여기서도 호르크하이머의 이론 확립과 그 이론의 보완을 위한 학제간 연구의 필요성과 이상향적 추구라는 특성이 나타났다.

1939년에서 1941년까지는 <철학과 사회과학 연구>라는 이름으로 뉴욕에서 간행되었다. 이 연구지를 통해 현실 적용적 마르크스연구와 프로이트의 정신분석 연구가 세상을 만날 수 있게 되었다.


2. 미국 망명시기(1933-1950)


1933년 1월 30일 히틀러가 권력을 장악하자 연구소는 제네바 지부로 이주했다. 이때 명칭은 ‘국제사회연구협회’였다. 대부분이 교수직에서 해임되어 탈출했고, 비트포겔은 강제수용소에서 동년 11월 석방되어 영국으로 망명했다. 1935년 회원들은 미국의 뉴욕으로 건너가 컬럼비아 대학의 건물에서 영위했다. 1922년이래 아도르노는 호르크하이머와 친교를 맺고 1929년 연구소와 관계를 갖고, 1938년에는 뉴욕으로 이주하면서 정회원이 되었다. 마르쿠제·프롬·라이히·노이만·그로스만·보르케나우·뢰벤탈 등도 관계를 가지며 활동했다.

파시즘에 대한 대항의 의미에서, 또 생계를 위해서 2차 대전 중 마르쿠제·노이만·뢰벤탈은 미국 정보국의 OSS요원으로 활동했다. 그들은 히틀러-스탈린 협정을 두고 파시즘과 소비에트 맑시즘을 구조적으로 유사하다고 결론 내렸고, 자본주의의 파시즘화는 필연이라고 파악하고 자본주의를 비판했다. 다만 미국의 도움을 받는 상황에서 그러한 비판적 내용은 조심스런 어휘선택을 해야 했고, 미국의 학자들과의 교류를 줄어들게 했다. 특히, 아도르노는 미국에서 대중매체에 의한 규격화와 예술의 소비재화의 현상은 존재의 물상화를 가져온다는 생각을 했지만 그런 말은 나중에나 할 수 있게 되었다.


3. 귀국이후(1950년 이후)


종전 후 1946년 프랑크푸르트 시(市)와 대학으로부터 귀국요청을 받았고 1950년 아도르노·폴로크와 함께 호르크하이머도 독일로 돌아 왔다. 그러나, 마르쿠제 등은 미국에 남았다. 새로운 프랑크푸르트 2세대들은 이때부터 두각을 나타낸 하버마스·오스카 네그트·슈미트·오페·벨머 등이다.

하버마스는 맑시즘을 받아들여 현대의 입장에서 그것을 해석하고 개선한 비판이론을 전개했다. 『사적유물론의 재구성』(1976)이 바로 그런 류이다. 그는 주류 사회과학이론과의 대결을 통해 사회학의 주요 흐름을 역사적으로 검토했으며, 『정신분석학을 언어분석으로 받아들인 나의 시도』를 통해서, 해석학의 중요성 때문에 언어를 고찰해야 하고, 의사소통이 사회적 행위의 전부이기 때문에 의사소통을 위한 언어분석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그는 이후에 <비판이론>연구를 프랑크푸르트 대학 밖에서 진행했는데, 과격한 헉생들과의 대결 때문이었다. 1971년 막스-프랑크 연구소의 지도자가 되었다. 오스카 네그트는 사회학 교수였으나, 새로운 교육학습형태에 대한 발표와 비판이론적인 칸트·헤겔 연구가 주목받았고, 특히 프랑크루르트 학파에서 보기 드물게 정치활동에서도 적극적이었다. 클라우스 오페는 자본주의와 서독의 정치체제의 관계, 정치적 결정의 정당성의 문제 등을 연구했다. 슈미트는 마르쿠제의 저서를 독일어로 번역하고, <사회연구지>를 변역해서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초기 사상을 소개한 점에서 공적이 컸다. 벨머는 포퍼와 비판이론의 관계, 언어분석학과 비판이론의 관계에 대해 연구했으며, 아도르노와 하버마스에 근거해서 마르크스에 대한 내재적 비판을 시도했다.


Ⅲ.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성격 논쟁


1. 서구 맑시즘의 변형 과정에서의 프랑크푸르트 학파


1) 서구의 좌파적 흐름

①네오맑시즘

-맑스주의의 본질은 휴머니즘이라고 정의하고, 현대의 비인간화를 해결해야 한다고 주장    한다. 이러한 흐름은 맑스 초기 저작들의 발견으로 인본주의 논쟁과정에서 형성되었다. 소    련의 맑시즘이 독단적이고, 교조적으로 왜곡되었다는 자기성찰적 자세에서 그것에 도전하    는 이론적 계기를 마련했다. 프랑크푸르트 학파 역시, 이런 맥락에서 바라보는 시각에서     네오맑시즘의 일단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

②신좌파운동(New Left)

-1950년 후반에 구좌파에 실망하면서 선진산업사회의 부조리와 병폐에 대한 저항과 비판    에서 비롯되었다. 스탈린체제에 반대한 좌익지식인들이 냉전 심화로 정치무관심이나 보     수적으로 변질된 것이 구좌파였다면, 이에 반한다고 신좌파라 한다. 1960년대 미국 대학     에서 인종차별문제 등의 민권운동, 베트남전 반대, 반핵, 소외문제에서 비롯한 히피족의     반문화운동 등의 형태로 과격한 반체제운동으로 전개되었다.

③유로코뮤니즘

-2차대전 이후 소련중심의 세계공산주의운동에 반발하여 다원적 사회주의 사회건설을 표    방하였던 유고의 티토, 폴란드의 듀브체크·차우체스크 등의 노선에서 그 이념적 기초를 두    고 있다. 스탈린 사후에 스탈린 격하운동, 중·소 이념분쟁, 소련의 체코진압(1968)은 소련    의 사회주의 맹주로서의 역할에 의구심을 갖게 했고, 소련 공산당에 불만이 고조되었다.     또한, 경제 성장 속의 복지국가 지향적 서구사회에서는 맑스-레닌주의의 기반이 약화되었    다. 이러한 주·객관적 여건이 1970년대, 특히 이태리·프랑스·스페인의 공산당들은 ‘반소 독    자노선’ , ‘다원적 사회주의 건설’을 주장하도록 했다.


2) 프랑크푸르트 학파는 네오맑시즘이다.

정통 마르크스주의의 철학사상은 변증법적 유물론과 소외론이고, 경제이론은 잉여가치설과 자본주의 몰락론이다. 그리고, 정치적이론은 계급투쟁론과 폭력혁명론이다. 그런데, 초기의 맑스 저작은 휴머니즘적인 성향이 강했고, 후기는 공산주의적 혁명이론이 주를 이룬다. 이것은 휴머니즘을 기반으로 혁명이론이 성립되는 것이다.

그러나, 레닌은 후진 러시아의 공산혁명의 합리화를 위한 전술적 도구로 이용했으며, 스탈린은 일국사회주의 건설론에 의해 소련의 이익 추구와 스탈린 독재의 기반으로 이용했다. 국가사회주의권에서는 이러한 맑시즘의 왜곡으로 비인간화가 심각하게 대두되었다. 또한, 자본주의는 몰락하리라는 예언적 믿음은 약점을 보완해서 발전을 거듭하고 있고, 산업화에 의한 문화수준·생활수준의 향상, 교육수준의 향상 등으로 대중은 평화와 안정을 바라게 되었다. 여기에 비판적인 지식인들의 맑시즘 비판을 막아야만 하는 3중의 과제 때문에 좌파적 지식인들은 맑시즘의 새로운 해석과 새로운 운동을 모색해야만 했다. 네오맑시즘이 바로 그것이다. 지역적으로는 서구에서는 실존주의적 맑시즘,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비판이론, 유로코뮤니즘의 형태로, 제3세계에서는 해방신학이나 종속이론으로 전개되기도 했다. 분야별로는 정치, 경제, 사회, 심리, 미학, 신학 등에 두루 접합되어 발전했다.


3)좌파적 실천철학으로써의 프랑크푸르트 학파

프랑크푸르트 연구소의 초기과정에서 맑스.엥겔스 사상을 심도 있게 연구 했다. 그들의 비판이론은 네오맑시즘의 발전에 큰 영향을 끼쳤다.

소련의 국가사회주의는 맑시즘의 왜곡이었고, 자본주의도 인간성을 소외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는 비판 아래 현대산업사회의 기술발달은 이성의 도구화현상으로 나타났으며, 맑시즘적 노동해방을 넘어 일상생활의 전반 속에서의 소외론을 전개했다. 예를 들면, 성, 가족, 노동문화, 언어, 의사소통, 사회적 행위, 제도, 정신분석 등의 여러 각도에서 분석을 시도했다.

또한, 그 방법적 극복방안으로 인간성의 회복과 주체성 부활에 초점을 두었다. 특히, 자본체제하의 이러한 방법은 사회구간의 개혁을 통해서만이 가능한데, 계몽된 사람들이 조직체를 이루고 현재의 집권세력을 교체하는 과정이 필연적이라고 생각했다.

하버마스는 특히, 현재는 생활수준의 향상으로 자본가와 노동자간의 공개적인 갈등관계가 사라졌으며, 과학기술의 발달로 지배의 감시 도구가 발달한 지배, 조작을 통한 계급의식의 마비의 지배를 통해 보이지 않는 억압구조를 재생산한다고 했다.

또한, 현대 후기 자본주의사회의 본질적 모순은 계급적 대립이 아니라, 기술적 인식에 의한 지식과 대화의 개량화, 표준화로 행동이 도구화되어 버렸으며, 인간관계마저 규제하고 있는 점이라 했다. 이러한 의사소통의 단점은 주체적 각성을 못하게 하고, 결국 개인적 소외를 조장한다고 보았다. 마르쿠제는 자본주의 사회든, 공산주의 사회든 비인간화에 대항하는 투쟁이 필요함을 역설했다. 노동자 계급은 계급투쟁의 주체로서, 지위가 상실되었기 때문에 -기업경영에 동참, 생활수준의 향상, 계층상승욕구를 통한 경쟁에의 맹목적 지향- 보수적으로 바뀌었으며, 대신에 과학기술의 창조, 소유가 가능한 지식인과 학생들이 주체가 되어 인간해방을 위한 혁명을 수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결론적으로 유물사관이라는 카테고리에서 출발했지만, 경제 결정론을 수정해서 개인의 의식적 각성에 의한 경제라는 하부구조와 사회제도라는 상부구조의 변화를 이루어야 한다는 주장을 한 것이다.


4) 맑시즘에서 출발한 “변증법적 비판이론”

이론과 현실을 통합해서 변증법, 역사성, 전체성을 고려한 사회철학이 성립되어야 한다는 입장에서 『계몽주의의 변증법』을 통해 Marxism의 혁명이론으로써 기존의 분석 철학을 비판했다. 그러나, 맑시즘의 수정을 내부에서 불가피하게 느꼈는데, 그 주요내용은 아래과 같다.

①경제 결정론에 대한 비판이다. 결국 하부구조의 변화 동인에 의해 상부구조가 변동한다    는 도식과 자본주의 붕괴론의 신념을 재검토하게 되었다.

②프롤레타리아에 의한 현실 부정과 그 조직적 힘에 의한 혁명이 가능하지 않다는 점인데,    더 이상 노동계급은 자신을 계급적 전위로 인식하지 않는다는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현실    절망적, 비관적 상황인식이 녹아있다고 볼 수 있다.

③잉여가치론에 대한 반론인데, 마르쿠제는 잉여가치론적인 착취보다는 자본주의 내부의     모순 해결을 위한 복지국가와 같은 내적 보완장치가 개발되며, 통합적 현상들이 생겨난다    고 했다.

④맑스가 상정한 유토피아는 역사적 발전과정의 끝을 예정한 것인데, 헤겔의 역사종말론과    동일한 실수를 했다는 입장이다. 더군다나 유토피아는 ‘평등과 자유’ 라는 제로섬적 두 요    소의 성격으로 정당성마저 위태롭게 되었다.

이러한 비판적 수용을 통해서 실은 맑시즘의 현대화를 유지하려 했다는 점에서 마르쿠제의 사상은 논쟁의 근거가 된다. 그는 프랑크푸르트 학파 중에서 가장 실천적인 측면을 많이 강조했고, 맑시즘의 카테고리를 지키려 한 사람이다. 현대 사회의 폭력적 구조를 인식하기 힘들게 하는 조작된 욕구충족과, 비판의식 망각을 위한 여러 기제를 없애기 위해서는 전면적인 폭동과 반란 밖에 없다고 판단했다. 그는 부분적인 수정이나 개혁보다도 근본적인 전복만이 유일한 수단이라 여겼다.


2. 사회철학에서 막스 베버 후계자로서의 프랑크푸르트학파


기술적인 합리성에 의한 새로운 지배 체제의 대두라는 관념과 근대 세계의 합리화 과정을 설명했던 막스 베버의 관념 사이에는 부정할 수 없는 유사성이 들어 있음을 찾을 수 있다.   1950년대와 60년대의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이론적 전개는 점점 더 마르크스의 사상으로부터 벗어나서 선진 산업사회에 내재하는 역사적 성격을 논리화했던 막스 베버의 이론으로 탈바꿈했다고 볼 수 있다. 그것은 기술적 합리성이나 합리화의 성격을 이제는 더 이상 인간의 통제력이 미칠 수 없는 새로운 사회를 형성시켜 나가고 있는 추상적인 힘으로 인식한다는 점이다. 과학과 합리적인 행정 체계에 의해서 개인뿐만이 아니라 사회 집단까지도 변화시켜 버린다는 뜻이다. (원초적인 기술적 결정론) 그리고, 이러한 변화는 비관적이라는 점까지 베버와 흡사하다. 막스 베버는 냉혹한 성격을 가지고 있는 합리주의와 차가운 지성주의의 확대 현상으로 인하여, 사회는 보다 더 순수한 의미의 도구적인 사회 관계의 지배 속으로 떨어지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더욱 비관적인 것은 인간에게는 이러한 것을 막아낼 수 있는 효과적인 방지책이 아무 것도 없다는 점이다. 마르쿠제도 베버의 인식과 마찬가지의 성격을 보여준다. 즉, 사회적인 삶을 지배하는 것은 기술적 합리주의이며 이와 같은 상황으로 나아가고 있는 전개 과정에서는 어떠한 힘으로도 그것을 막을 수가 없다고 주장하였다. 극히 예외적이지만, 미미한 가능성이 있다면 그것은 이러한 상황에 맞서는 적대적인 혁명 세력의 봉기를 사회의 최하 계층 속에서 기대할 수 있을 뿐이라고 믿었다. 최하 계층이란 기존 체제로부터 소외된 국외자나 추방된 사람들이며, 약탈당하고 있거나 다른 인종 또는 다른 색깔을 가진 사람들로부터 억울하게 억압당하고 있는 사람들과, 직장을 잃어버린 실업자들, 그리고 곧 실업자의 운명에 놓일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라고 말한다.

프랑크푸르트 학파가 후반기에 접어들면서부터 보여주기 시작한 사회적 변혁에 대한 절망적인 인식은 사실상 근대 서구 사회의 분석에서부터 연유된 일반적인 성격이기도 하다. 그것은 또한 그 당시 사회적 사조의 광범한 성격에 대한 저항이었으며, 이러한 상황은 19세기  말부터 시작된 과학으로서의 실증주의에 대한 비판일 뿐만 아니라 과학과 기술에 대한 일반적인 적대감의 한 표현이었다. 특히 과학과 기술이 미친 사회적 결과에 대한 깊은 우려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했다.

1차 대전에 의해서 조성되었던 사회적 대변혁과 문명의 파괴, 그리고 그 후에 일어났던 독일 국가사회주의자들의 전체주의적 정치 체제의 괴로운 경험과 그 뒤를 이로 1945년부터 국제 사회가 초강대국에 의해서 분할 지배됨으로써 끝없이 되풀이 되고 있는 핵무기의 경쟁으로 치달리는 현실 상황들은 모든 사람들에게 문화의 상실감과 전락감을 누적적으로 경험하게 했으며 극단적인 비합리성의 횡행을 보여주었다. 바로 이런 것들로부터 파생된 생각이 실증주의에 대한 적대감이다.

마르쿠제의 사상은 1960년대 후반기 동안 비교적 짧은 시기이나마 미국의 학생 운동에 상당한 반응을 불러 일으켰다. 뿐만 아니라 유럽 여러 나라의 학생 운동에까지도 큰 영향을 미쳤다.

합리적인 생산 양식과 행정 체제라는, 혐오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던 현실적인 사회 현상에 대한 막스 베버의 주장을 바탕으로 하여 나타난 것이 바로 “후기 산업사회”논쟁이다. 다니엘 벨과 같은 보수주의자들은 현대 산업사회에서는 중요한 계급들 사이의 차이가 점차 줄어가고 있는데, 이러한 현상은 중산 계급이 중심이 되고 있는 바람직한 사회로의 지향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반면에 급진주의자들의 해석은 19세기 자본주의의 계급 구조는 대단히 큰 변화를 가져왔지만, 서구 사회에서는 이제 새로운 기본적 분쟁이 일어나기 시작했다고 말한다. 후기 산업사회의 직접적 갈등을 가진 집단은 더 이상 부르죠아지 계급이나 프롤레타리아계급이 아니라, 정치적 결정 과정이나 경제적인 행동 과정에서 명령을 내리는 사람들과 이러한 사회 구조 속에서 점점 더 종속적인 참여만을 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로 바꾸었다는 것이다.

이런 비관론적 사고는, 호르크하이머가 말년에  더 이상 비판론자로서가 아니라 종교 사상가로서의 접근이라는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3. 실증주의 등의 균형론자나 기능론자들의 주장에 대한 유럽의 지적

  반항으로써, 사회구조주의로써 프랑크푸르트 학파


실증주의라는 이름으로 또는 과학주의나 객관주의라는 이름으로 과학적인 인과 관계의 명증성을 주장하고 있는 균형론자들의 주장이 큰 반격을 받았던 적은 60년대와 70년대였으며, 이러한 반격에서 가장 중요하게 논의되었던 내용은 학문 연구에서의 가치의 문제에 대한 것으로서 이것은 곧 학문과 인간에 대한 관계를 중심으로 하는 논의에 대한 인식의 관점이라 할 수 있다. “인간의 얼굴을 인간답게 그리려는 노력”이 인간은 무엇인가라는 원초적인 질문에서부터 시작될 수 있다면, 학문에 대한 연구도 학문이 인간과 어떤 관계 위에 서야 하는가 라는 물음에서부터 시작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바로 이러한 원초적인 문제에 대하여 유럽의 지적인 전통 위에 서서 사회 구조의 전체성을 조감함으로써 인식의 실마리를 발견하려 했던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학문적인 기여는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고 말할 수 있게 된다.  그들은 인간과 학문의 관계라던가 인간과 인간의 관계, 그리고 사회 속의 인간의 관계를 깊이 있게 밝히기 위하여 때로는 유럽적인 지적 전통들, 구체적으로 말하면 마르크르의 이론에서부터 막스베버의 주장에 이르는 여러 가지 논의들을 재구성함으로써, 이 문제에 대한 그들의 인식은 마침내 사회학과 심리학, 철학을 하나로 결속시킬 수 있게 되었고 그 뒤에는 역사학과 경제학도 부가시킬 수 있었다. 즉, 20세기 후반의 지적 토양의 편향과 이용 가능한 지식만의 생존이라는 환경 속에서,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심층적이고, 전체적인 인식적 사고는 그런 것들을 회복할 수 있는 중요한 매개가 되었다.


Ⅳ.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대표적 학자들


1. 막스 호르크하이머  Max Horkheimer (1895-1971)

아버지의 권유로 사업가로 훈련을 받았으나 결국은 학자의 길을 걷게 되었다. 처음에는 심리학과 철학을 공부했으며, 1925년에 프랑크푸르트 대학에서 강사로 일했다. 이때부터 일생동안의 친구였던 폴 로크와 프랑크푸르트 사회과학 연구소의 초창기 연구원이 되었다. 1931년 그는 이 연구소의 제 2대 소장이 되었다. 나치가 정권을 장악하자, 제네바로 피신했다가 1934년 뉴욕으로 이주했다. 이때부터 독일로 귀국할 때까지 컬럼비아 대학의 한 건물에서 임시로 피난 생활을 하게 되었다. 1950년에 프랑크푸르트 사회과학 연구소와 함께 독일로 귀국하여 1957년 은퇴할 때까지 소장직을 맡아 했다.

저서로는 『비판이론 : 논선』, 『이성의 침식』, 『계몽(주의)적 변증법 -아도르노 공저』등이 있다.


2. 프리드리히 폴로크  Friedrich Pollock (1874-1970)

사업가로 훈련을 받다가 1차 대전이 끝난 후 뮌헨 대학, 프라이부르그 대학, 프랑크푸르트 대학에서 경제학과 정치학을 수학했다. 1923년 <제 1차 마르크스주의자 연구 주간>에 참여했으며, 프랑크푸르트 사회과학 연구소의 창립에 주도적 인물의 하나로 일했다. 호르크하이머와의 깊은 우정으로 뉴욕으로 이주했다가 그와 함께 1950년 다시 독일로 돌아왔다. 1959년 은퇴 후에 호르크하이머와 함께 스위스의 몽타그놀라의 한 촌가에서 보냈다. 폴로크는 주로 소련의 계획 경제 문제에 대하여 연구하였으며, 1930-40년대에는 그의 중요한 논문을 수집해서 저서로 발간했다. 『자본주의의 단계』,『자동화의 사회·경제적 결과』등이 그것이다.


3. 허버트 마르쿠제  Herbert Marcuse (1898-1979)


베를린 대학과 프라이부르그 대학에서 철학을 연구했으며 그 뒤에 훗설·하이데거 등과 함께 수학하기도 했다. 1932년에 프랑크푸르트 사회과학 연구소의 일원이 되었다. 1933년에 다른 연구원들과 함께 처음에는 제네바로 피신했다가 뉴욕으로 망명했다. 그곳에서 1934-40년까지 호르크하이머와 함께 연구원으로 일했다. 이후에 한때나마 미 국무성의 동유럽부서에서 근무하기도 했으며, 1950년에는 컬럼비아 대학으로 되돌아왔다. 1954년에서 1967년까지는 브렌다이스 대학에서 강의를 했으며, 그 뒤에는 캘리포니아 대학에서 연구했다. 대표적인 저작으로는 『이성과 혁명』,『소비에트 맑시즘의 비판적 분석』,『일차원적 인간』,『부정론 : 비판이론의 논집 -30년대 그의 논문들을 수집한 것』등이 있다.


4. 데오도르 아도르노  Theodor W. Adorno (1903-1969)

프랑크푸르트 대학에서 철학, 사회학, 심리학, 음악이론을 연구한 후 1925년 비엔나로 갔다. 음악이론에 대한 연구를 계속하다가 다시 프랑크푸르트 대학으로 돌아와서 1931년 강사로 일하면서 연구소와는 비공식적인 관계를 맺게 되었다. 이후에 나치가 정권을 장악하게 되자 그는 약 4년 동안 옥스퍼드 대학에서 보냈으며, 뉴욕으로 이주하여 1938년 그곳으로 이주해 있던 프랑크푸르트 사회과학 연구소의 정회원으로 일하게 되었다. 아도르노는 미국에서 그의 철학적인 연구와 음악에 대한 이론 탐구를 계속 하였으며, 편견과 권위주의에 대한 연구 계획에 참여하기도 했다. 그런 연구 결과를 수집한 저서가 『권위주의적 개성』이다. 1950년에 사회과학 연구소가 다시 독일로 돌아가자 아도르노는 부소장, 공동소장으로 일했고, 1959년 호르크하이머와 폴로크가 은퇴한 이후에는 소장으로 일했다. 저서는 『부정적 변증법』,『계몽주의적 변증법 -호르크하이머 공저』,『현대 음악철학』,『 권위주의적 개성』등이다.


5. 위르겐 하버마스  Jügen Habermas (1929- )


그는 후기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대표적 사상가로서 아도르노와 함께 이곳에서 연구했다. 처음에는 아도르노의 조교로 일하다가 그후에 하이델베르그 대학에서 철학을 강의했다. 다시 프랑크푸르트 대학에서 철학과 사회학 교수로서 일했고, 1972년에 스탄베르그에 있는 막스 플랑크 연구소로 옮겨갔다. 1980년대에 다시 프랑크푸르트 대학에서 정교수로 지내고 있다. 그는 주로 지식이론과 그것에 대한 문제를 다루었으며, 최근에는 마르크스의 역사이론과 후기 자본주의 사회분석에 대해 연구하고 있다. 대표적 저서는 『이성적인 사회를 위하여』,『지식과 인간의 관심』,『정통성의 위기』,『커뮤니케이션과 사회의 발전』등이다.


Ⅴ. 결론


프랑크푸르트 학파는 독일의 철학적 전통 -칸트, 헤겔, 마르크스 등- 위에서 사회주의나 자본주의 국가에서의 비인간화라는 점에 입각한 연구와 해결방안을 모색했다. 학문적인 면에서도 과학주의에 의한 이념적 보수성과 학문풍토의 협소성을 극복하는데 공헌했다. 그렇게 하기위해서 서구 전통이론을 망라하는 방대한 작업을 진행했으며-맑시즘의 재검토, 니이체와 막스 베버적 인식, 하이데거·슈팽글러로부터의 영향, 유대교에 대한 연구 등등- 마르크스의 원형을 현대화하는 작업과 함께, 실재로 정치 투쟁적 급진성을 실천하지는 않았지만 실천철학으로써의 사회이론을 정립하고자 하였다. 사실 그들의 노력은 새로운 창의적 학문이라기 보다는 기존의 이론들을 통합하고 전체적으로, 직관적으로 연결하려는 실험들을 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런 맥락에서 프로이드의 정신분석학으로 유물론적 구조화를 시도하기도 했으며, 심리학에서부터 사회구조적인 이론에까지 그 영향력은 진행형이다.

그러나, 지나친 실증주의에 대한 회의는 자신의 주장을 증명하기 위한 과학적 개량적 접근을 부정했다. 따라서, 대안 없는 비판이나 부정으로 매도되기도 했다.

한가지 더 집고 넘어가야 할 것은, 이 학파를 단순하게 관념론자들이라거나 맑시스트, 혹은 근본적으로 우파적 성향을 지닌다는 등의 결론을 내리기가 쉽다는 점이다. 또한 그런 고정관념으로 프랑크푸르트 학파를 검토하려 해도 그 증명이 용이하다. 그러나, 그것은 위에서 언급했듯이 그들의 방대한 적업과 학자간의 상이한 관심영역 때문이다. 그들이 진정한 휴머니즘을 위한 학제간 연구를 말했듯이 그들을 평가 혹은 검토할 때에도 그런 시각이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제 2 장 프랑크푸르트학파의 비판이론 | 게시판 2004/12/12 1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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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 장  프랑크푸르트학파의 비판이론

1. 비판의 의미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사회비판이론은 인식론적으로 독특한 비판정신에 입각한 것이다. 비판이론에 있어서 비판이라고 하는 개념은 독일철학 특히 칸트, 헤겔 및 마르크스의 인식론에 흐르는 비판정신을 계승한 것이다. 구체적으로 비판이론은 독일철학에서 발전된 비판의 두 가지 개념을 창조적으로 종합한 독특한 비판정신에 근거하고 있다. 한가지는 선험철학을 위한 칸트의 프로그램에 그 뿌리가 있고, 그래서 정당성의 검증(testing of legitimacy)을 뜻하며, 다른 한 가지는 이론과 실천의 대립에 관한 청년 헤겔학도들의 입장을 지칭하는 것으로, 이는 부정(negation)을 뜻하는 것이다.
 마르크스가 실재론적 과학의 개념을 개척하면서부터 비판개념의 이 두 가지 의미는 종합될 수 있었다. 『변증법적 이론의 출현』에서 워랜(Scott Warren)도 비판이론의 비판정신을 다음과 같이 특징짓고 있다. 비판이론의 철학적 근원은 마르크스사상에 있어서 중심적 역할을 하는 변증법적 정신을 회복하려는 것이며, 이는 곧 변증법적 이론의 칸트적 및 헤겔적 근원에 복귀하는 것이다. 비판이론의 본질은 마르크스사상에 체현된 칸트와 헤겔의 인식론적 근원을 재정립하고 이를 비판적으로 재구성하는 것이다.
 프랑크푸르트학파의 비판이론은, 당시 객관주의적이고 결정론적인 마르크스주의를 거부하고, 칸트의 구성적 인식론을 비판적으로 재구성한 헤겔의 변증법적 인식론을 구체적 현실비판과 실천에 적용한 마르크스의 변증법적 비판정신을 복권시킴으로써 정의로운 사회를 이룩할 수 있는 가능성을 탐색하려는 데 그 특징이 있다.
 칸트에 있어서 비판개념은 인간인식의 능동적 구성능력에 따라 지식의 정당성을 검토하는 순수이성의 특징을 의미한다. 경험영역과 무관한 초험적(transcendent) 사변과 독단의 형이상학에서 태어난 칸트는 모든 지식이 경험과 더불어 시작되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간과 공간이라고 하는 감성의 선험적 형식이 없으면 대상직관이 이루어질 수 없고, 범주라는 오성의 선험적 형식이 없다고 하면 개념이 형성될 수 없다고 함으로써, 그는 인식의 모사설을 극복하고 구성설로의 인식론적 전환을 이룩한 것이다.
 감성형식과 오성형식은 선험적 주관이기에 경험에 앞서 있고, 그래서 무질서한 경험적 실재에 질서를 부여한다고 하는 칸트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은 대상중시에서 주관중심으로의 인식론적 전환이며, 이렇게 볼 때, 이는 인식의 과정에서 소외되었던 인식의 주체를 복권시킨 근본적 비판이라 아니할 수 없다. 그러나 이러한 전환은 경험적 객관세계를 무시하고 관념적 주관세계로 회귀한 것이 아니라, 인간인식의 구성적 능력이 매개가 되어 주체와 객체, 의식과 대상이 변증법적 상호결정 관계를 이룩함을 뜻하는 것이다. 이러한 구성적 인식론은 인과의 원칙도 현상 그 자체에 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나타난 현상에 대하여 보편적 주관이 선험적으로 구비하고 있는 형식에 따라 우리가 능동적으로 구성한 것이라 규정함으로써, 휴움의 회의론을 극복할 수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인식대상을 인식주체가 선험적으로 구비하고 있는 범주에 의하여 구성하는 것으로 보고, 인식의 종합적 기능을 강조함으로써 의식과 실재, 주관과 객관, 혹은 합리론과 경험론의 진부한 대립을 고차적으로 지양하였기 때문에 칸트는 비판적이면서도 변증법적인 지식이론의 발전에 기여하였다고 하겠다. 칸트가 순수이성비판에서 존재와 사유간의 변증법적 관계를 강조한 점은 헤겔과 마르크스의 인식론에 계승되고, 프랑크푸르트학파의 비판이론이 지식의 대상을 역사적 상황하에서 주체의 구성적 활동에 관련시키려 하는 것도 칸트, 헤겔, 마르크스의 이러한 인식론적 전통에 입각한 것이다.
 그러나 칸트는 인식이 감성과 오성의 종합에 의해서만 가능하기 때문에 신, 영혼, 자유, 도덕률처럼 경험영역을 초월하는 세계에 대해서는 이론적 인식이 불가능하다고 하는 새로운 문제를 제기하였다. 사실과 현상의 세계는 이론적 인식이 가능하나 가치와 본질의 세계는 이론적 인식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결국, 순수이성의 구성적 특성을 강조함으로써, 감성과 오성, 객관과 주관간의 이원론을 극복할 수 있었던 칸트가 사실과 가치, 필연과 자유, 현상계와 본체계 사이에 메울 수 없는 심연을 상정함으로써 새로운 차원의 이원론적 문제를 남기게 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인식주체의 선험적 주관이 칸트에 있어서는 미리 주어진 확고하고 완성된 것으로 전제되었으나, 헤겔은 주관적 의식의 자기형성과정 그 자체를 밝히는 것이 참된 인식비판이라고 보았다. 주관적 의식을 완결된 형태로 전제할 것이 아니라 자기형성의 기나긴 도정에서 점진적으로 정교화 되는 것으로 볼 때, 경험의 전제조건이라기보다 거듭된 경험의 과정에서 드러나는 결과적 속성으로 개념화함으로써 비로소 주관과 객관의 대립이 극복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칸트의 출발점이 헤겔에 있어서는 기나긴 여정의 종착점이라 할 수 있다.  헤겔은 아주 단순한 의식으로부터 시작하여 완전한 의식에 이르게 되는 유한정신의 현상학적 자기발전의 과정을 노동을 매개로 하여 밝히고 이 과정에서 이론과 실천, 객관과 주관, 보편성과 특수성의 대립을 변증법적으로 극복할 수 있음을 보였다. 인본주의적 신마르크스주의자들 특히 루카치, 그람시 및 프랑크푸르트학파가 마르크스사상의 헤겔적 요소를 중요시하는 가장 큰 이유는 바로 헤겔이 이와 같은 대립을 극복할 수 있는 이론적 골격을 제시하기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노동을 통하여 인간과 자연, 인간과 인간, 인간과 제도간의 상호작용이 이루어지고, 이때 인간은 소외와 탈소외의 동태적 과정을 거듭하는 가운데 절대정신의 오묘한 섭리에 힘입어 완전한 의식에 이르게 된다는 헤겔의 정신현상학은 절대정신이 유한정신의 변증법적 자기 발전을 통하여 스스로를 실현한다는 것이므로 이는 절대적 관념론이며, 여기서 헤겔은 분명 소외의 긍정적 측면만을 강조하였다 아니할 수 없다.
 노동을 자기창조의 과정으로 개념화하고 인간을 스스로의 노동의 결과로 파악한 헤겔의 사상을 마르크스는 높이 평가하였다. 그러나 그는 헤겔의 위대성을 격찬하면서도 헤겔에 있어서 노동개념이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정신노동이며, 의식의 대상은 대상화된 자기의식일 뿐만 아니라, 헤겔은 소외의 긍정적 측면만 강조하고 부정적 측면을 외면함으로써 현상을 설명하고 정당화하는 데서 그친 보수적 결론에 이르게 되었음을 신랄히 비판한다.
 이제 마르크스에 이르러 비판이론은, 『포이에르바하 제11명제』에서 선언한 것처럼, 인식비판을 넘어 변혁논리로 발전하게 되며, 이는 당시 자본주의 선발국에 있어서, 노동의 현존이 그 본질로부터 심히 괴리됨으로써 자아창조의 활동이어야 할 노동이 인간성의 긍정이라기보다 오히려 그 부정이라는 현실 인식에서 비롯된 것이다.
 인간은 관념적 종교적 존재라는 점에서 동물과 구별된다기보다는 의식주와 같은 물질적 생산수단을 생산하는 활동에 있어서 동물과 뚜렷하게 구별된다는 것이 마르크스의 생각이다. 동물의 경우와 달리 인간에겐 기본욕구의 충족 그 자체는 목적이 아니라 성장 욕구를 실현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므로 인간의 노동은 본질적으로 대자적이다. 욕구의 필연으로부터 자유로워졌을 때의 노동이 참된 의미에서 인간노동이며 잠재적 능력을 외화하는 자유로운 활동이라는 것이다. 소여의 환경을 이용만 하는 동물과 달리, 인간은 이를 능동적으로 변형할 수 있는 창조적 존재이다. 환경에 대한 제어능력을 발전시켜 삶을 쾌적하게 가꾸려고 하는 창조적 활동은 인간노동의 고유한 특성이라는 것이다. 동물의 경우는 본능에 생리적으로 각인된 반사적 활동만 하나 인간은 활동에 앞서 의도적으로 계획하는 유목적적이고 의식적인 존재이다. 뿐만 아니라 동물의 경우와는 달리 인간은 스스로를 개(個)로 인식하면서도 동시에 동류의식이 있는 유적 존재(類的存在)이므로, 동물이 단일방향으로 생산하는 데 비하여 인간은 보편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특징이다.
 요컨대, 인간노동의 본질은 자유롭고, 창조적이며, 의식적이고, 사회적인 실천이기 때문에, 노동은 인간성을 실현하는 인간성의 긍정이어야 하나, 당시 노동의 현존은 인간의 자아실현을 가로막는 인간성의 부정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19세기 초부터 오웬 등의 지도 아래 노조운동이 활성화되어 마치 오늘날 우리의 노동현장처럼 경제투쟁과 정치투쟁이 격렬하게 일어났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경제적 모순의 누적에 따라 사회변동이 불가피하게 일어난다고 하는 객관적 결정론자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본의 가치 증식 과정에 내재된 부도덕성을 감상적으로 비판하고 노동조직을 동원하려고 하는 정치적 자원론자도 아니다. 계급의식이 역사적 과정과 무관하게 인간의 의지에 따라 자의적으로 선택될 수 있는 자율의 영역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는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에 나타나는 신비로운 역전이 자본가와 노동자계급 사이에서도 일어날 수 있는 역사적 조건과 주관적 의식의 성숙을 동시에 탐색하려 했던 것이다.
 결국, 프랑크푸르트학파의 비판이론은 칸트의 인식론을 비판적으로 재구성한 헤겔의 변증법적 방법을 구체적인 현실비판과 개혁에 적용한 마르크스의 비판정신을 계승하고 있다. 이렇게 볼 때, 비판이론의 비판정신은 다음과 같은 특성을 내포한다고 하겠다. 첫째, 비판이론은 인간을 능동적, 자율적, 창조적인 존재로 본다. 둘째, 인간은 지식만을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경제, 정치, 종교, 언론, 교육제도 등 여러 가지 사회적 제도도 만든다. 셋째, 인간에 의하여 창조된 이러한 사회제도나 과학적 지식이 인간을 위한다는 명분을 표방하면서도, 인간의 창조성, 능동성 및 자율성을 가로막고 억압하는 구조적 질곡이 되기도 한다. 넷째, 인간이성의 능동성, 자율성, 창조성에 대한 확신을 토대로 하여, 이성의 자유로운 실현을 가로막는 구체적인 사회역사적 상황에 대한 자기반성과 성찰을 통해서 이러한 질곡으로부터 해방을 성취하려는 정신이 비판정신의 핵심이라 하겠다.
 제1세대 비판이론과 하버마스의 비판이론은 사회적 역사적 맥락에 따라 상당한 차이를 보이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억압과 지배체계에 의해 예속된 인간성을 해방시키고 보다 합리적인 사회를 이룩하며, 개인의 잠재적 가능성을 실현하는 데 이바지하려는 기본정신에 있어서는 일치된다고 하겠다. 따라서 우리가 비판이론을 수용함에 있어서도 이론의 실질적 내용을 우리 사회가 처해 있는 구체적 상황에 비추어 재조명할 필요가 있다.

2. 전통이론과 비판이론
 호르크하이머(Horkheimer)의 「전통이론과 비판이론」(1937)은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선언문과 같은 것이며, 그가 이 논문에서 밝힌 기본신조는 비판이론의 방향과 주요관심을 나타낸 것으로, 아도르노와 마르쿠제도 대체적으로 같은 입장이라 할 수 있다. 마르쿠제(Marcuse)의 『철학의 비판이론』(1968)은 물론 아도르노(Adorno)가 『독일사회학의 실증주의 논쟁』(1969)에 붙인 서문도 비판이론의 방법론적 특징을 밝힌 것으로 호르크하이머의 입장과 일치한다고 할 수 있다.
 프랑크푸르트학파의 비판이론가들은 모든 전통이론을 비판하였으나, 그 중에서도 특히 실증주의를 대표적 전통이론으로 규정하고 이를 철저하게 비판하였다. 여기서 실증주의는 꽁트를 비롯한 19세기 실증주의, 비엔나 학파의 논리실증주의, 포퍼와 알베르트의 비판적 합리주의 등 자연과학적 모델에 입각한 경험의존적 인식론에 근거한 것을 총칭하는 개념이다.
 논리실증주의는 경험적 현상과 그 현상에 관한 지식이 객관적으로 대응한다는 것을 전제하는 일종의 모사설이다. 카르납, 노이라쓰, 쉴릭 등 당시의 실증주의자들은 경험적 사실을 객관적으로 관찰 기술하고, 경험적 사실들간의 관계를 논리적으로 귀납하여 보편적인 법칙을 수립하는 이와 같은 방법이 자연과학뿐만 아니라 사회과학에도 적용되어야 하는 통합과학적 방법론이라 믿었다. 포퍼의 비판적 합리주의는 베이컨 이래로 과학적 방법의 원형으로 인정되어 온 단정적인 귀납논리의 오류를 지적하고 이를 가설적 연역법으로 대치하고, 검증의 원칙을 반증의 원칙으로 대치함으로써 논리실증주의의 인식론적 오류를 극복한 긍정적인 측면이 있으나, 포퍼도 경험의존적이며 방법론적 개체주의에 빠짐으로써 구조적 모순의 파악을 외면하는 새로운 유형의 실증주의라는 것이다.
 비판이론가들은 실증주의가 경험적 사실만을 절대시하는 일종의 물신숭배(fetishism)이며, 사회적 현상의 인간적 함의를 망각한 물화된(reified)사상이라고 본다. 실증주의는 자연과학적 모델에 입각한 경험의존적 인식론이기 때문에 현상의 이면에 숨은 본래적 모순을 밝히는 데는 결정적인 한계가 있다. 실증주의가 원래는 신화와 환상 그리고 형이상학의 꿈에서 깨어나 대상세계를 경험적 이성으로 직시하려는 계몽주의적 각성(disenchantment)의 산물이고 계몽주의적 이성의 산물이라 할 수 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의 실증주의는 존재와 당위, 사실과 가치, 이론과 실천을 분리하고 이론의 가치중립성을 표방함으로써, 결과적으로 현상유지 이데올로기로 전락되었다는 것이다.
 한편, 호르크하이머는 당시의 생철학에 대해서도 비판적이다. 그는 니체, 딜타이, 베르그송 들이 인간이성이 고정적이고 추상적인 합리주의로 변질된 점을 비판하고, 인간의 구체적 삶에 있어서 정신적 차원을 회복하려 했을 뿐만 아니라, 부패한 사회에 대한 무비판적 동조주의로부터 개인을 구원하려 했던 점을 긍정적으로 평가하였다. 그러나 호르크하이머는 생철학이 주관성과 내면성만을 지나치게 강조함으로써 삶의 사회역사적 차원을 외면하고, 현실의 물질적 자원을 과소평가 하였으며, 추상적인 합리주의를 비판하는 과정에서 이성 그 자체를 거부한 것 등을 생철학의 심각한 문제점으로 보고 이를 비판하였다. 바로 이와 같은 한계성 때문에 생철학은 그 특유의 비판적 계기를 사회비판이론으로 발전시키지 못하고 정치적 실천과의 관련성을 이룩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비판이론가들은 듀이(John Dewey)류의 실용주의사상도 실증주의처럼 철학을 과학주의적 관점에서 접근하였고, 현실적 삶과 진리의 관계를 지나치게 실용적이고 도구적인 관점에서 이해하였다고 비판한다. 이와 같이 환경에 대한 적응만을 강조하는 실용주의는 사회이론의 비판적 계기를 상실하고 현실에의 동조를 수반하였다는 점에서 역시 전통이론에 머문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비판이론은 현상유지 이데올로기로 이용되는 모든 이론을 전통이론으로 규정하고 비판하나, 그 중에서도 실증주의를 대표적 전통이론으로 본다. 앞서 지적한 것처럼, 실증주의가 배타적으로 강조되는 경우에는 기존의 정치경제적 질서에 대한 비판적 이성을 마비시키고, 정치적 타율성을 조장함으로써 가치중립이라고 하는 본래의 의도와는 달리 현상유지 이데올로기로 전락하게 될 위험이 있는 것이다.
 비판이론가들은 특히 이와 같은 위험한 사조가 마르크스주의에 접목되어 형성된 이른바 실증주의적 마르크스주의가 제2인터내셔널 이후에는 이른바 '정통 마르크스주의'로 교화되었고, 스탈린 치하에서는 드디어 인간해방의 철학이 인간억압의 무자비한 도구로 악용된 역설적인 전도를 심각한 우려와 함께 개탄하였다. 따라서 비판이론은 사실과 가치, 객관성과 주관성간의 변증법적 관계를 강조한 마르크스사상을 실증주의로부터 구출하고, 이성의 비판적 계기를 회복하려는 것이며, 그 특징은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첫째, 비판이론은 이론의 실천지향성을 강조하고, 실천적 의도를 가진 이론이다. 비판이론은 인간의 삶의 조건을 개선하려는 실천적 관심이 그 특징일 뿐만 아니라, 스스로의 운명을 결정하려고 하는 자기 반성적이고 자아의식이 있는 인간의 노력에 의하여 현실을 개선할 수 있다고 본다. 따라서, 사회변혁의 주체인 우리 개개인이 비판적 성찰력을 함양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우선 현대사회의 구조적 모순과 이데올로기를 비판하고 허위의식을 폭로하는 것이 비판이론의 역할이다.
 둘째, 가치중립적 사회과학 혹은 초연한 연구를 강조하는 실증주의의 주장을 비판이론은 정면으로 거부한다. 실증주의가 가치중립성을 강조하고 있으나, 실증주의적 논리의 이면에는 대상세계를 기술적으로 통제하려는 관심이 내재되어 있다. 비판이론은 실증주의의 객관주의적 환상이 사회과학에 있어서 매우 위험스러울 뿐만 아니라,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등 기존체제를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라는 점에서 이를 철저히 배격한다.
 셋째, 비판이론은 사회적 현상에 대한 객관적 이해 그 자체를 반대한다기보다는 오히려 어떤 사회적 현상을 특정의 역사적 맥락에서 인식주체의 구성적 활동과 관련시키는 데 주된 관심을 두는 것이 특징이다. 즉 지식의 사회적 및 역사적 특성을 강조하는 것이 그 특징이다.
 넷째, 다양한 사회현상의 저변에 숨겨진 본질을 파악하려는 것이 비판이론의 관심이므로, 비판이론은 본질적이고 근본적인 비판을 강조한다. 비판이론은 실재의 본질을 탐구하기 위하여 현상과 본질을 구별하고, 주어진 현실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것이 아니라 이론의 끊임없는 부정적 기능을 강조한다.
 요컨대, 실증주의적 전통이론과 비판이론은 여러 가지로 대조적이다. 전자가 분석적 논리를 중요시하는 반면에 비판이론은 변증법적 논리를 강조하고, 전자가 경험적 검증이나 반증을 강조하는 데 비하여 후자는 해석학적 입장을 취하며, 전자가 존재에 관한 가치중립적 기술에 치중하는 것과 대조적으로 후자는 당위에 관한 가치판단을 이론의 핵심으로 삼고 있으며, 전자가 외현적 사실 그 자체를 연구대상으로 하나 후자는 경험적 현상에 의하여 은폐된 사회모순의 심층적 본질을 파헤치려 한다. 그래서 전통이론이 기존사회의 재생산에 기여하는 것과 대조적으로, 비판이론은 기존사회를 정당화하는 데 기여하는 이데올로기 특히 도구적 이성의 비판에 주력한 것이다. 

3. 도구적 이성의 비판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가 『계몽의 변증법』에서 설정한 문제는 왜 인류가 계몽된 삶을 누리지 못하고 다시금 야만의 시대로 접어드는가를 밝히는 것이다. 『계몽의 변증법』(Dialectic of Enlightenment)은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중핵적 관심을 이루는 도구적 이성의 출현과 도구적 이성의 지배에 관한 비판적 성찰이기 때문에, 비판이론의 발전과정에 있어서 획기적인 저서이며, 그래서 마르쿠제는 이를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의 최대의 걸작으로 평가하였다.
 앞에서 지적한 것처럼 비판이론이 당초에는 이론적 탐구와 정치적 실천간의 통일성을 추구하였으나, 점차 정치적 실천에 대하여 회의적인 입장을 취하게 되었다. 비판이론의 이와 같은 방향전환은 우선 무엇보다도 독특한 역사적 체험 때문이다.
 첫째, 사회주의 종주국인 소련의 현실은 사회주의 사회는 가일층 강화된 중앙집권적 관료기구의 출현이 불가피할 것이라는 베버의 예측이 타당함을 입증하였고, 특히 스탈린주의자들의 비인간적 횡포는 비판이론가들에게 로자 룩셈부르크가 왜 레닌식의 당조직 원리를 그리도 철저하게 반대하였는가를 극명하게 예시한 것이다.
 둘째, 파시즘의 출현으로 비판이론가들은 선진자본주의 사회가 위기의 상황에 있어서 그 정치세계를 재구성함으로써 혁명적 변화의 위험을 방지할 능력이 있고 노동조직의 단결된 투쟁의 예봉을 둔화시킬 수 있는 능력이 있음을 확인하게 되었고, 따라서 서구 자본주의 사회의 프롤레타리아 계급은 역사발전의 견인차가 될 수 없다는 암담한 체험을 한 것이다.
 셋째, 전후의 미국을 비롯한 선진 자본주의 사회는 여러 가지 모순과 갈등을 체제내에 흡수 통합할 수 있음을 현실적으로 보여주었고, 특히 대중문화를 통해서 가시적인 억압에 의존하지 않으면서도 대다수 시민의 의식을 기존체제의 요구에 순응하도록 조종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는 왜곡된 마르크스주의, 계몽주의의 오도된 합리화 추세, 과학과 기술, 문화산업 및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사회의 바람직하지 못한 현상형태를 모두 계몽의 변증법이라는 압축된 개념하에 비판적으로 해석하였고, 따라서 계급투쟁과 사회주의적 이행에 대한 집착을 포기하고, 그 대신 도구적 이성과 계몽의 역설을 철학적으로 비판하는 데 몰두한 것이다.
 이와 같이 비판이론가들은 독점자본의 재생산에 기여하는 자본주의 사회의 이데올로기만 비판한 것이 아니라, 점차 권위주의적 관료주의로 경직화되어 가는 공산주의 국가의 비인간적 현실도 신랄하게 비판한 것이다. 그들은 이와 같은 두 가지 추세의 근본원인이 모두 도구적 이성 혹은 기술적 이성에 있다고 보았고, 따라서 사회주의 혁명만으로는 이러한 심각한 문명의 병리를 극복할 수 없다고 믿게끔 되었다.
 바로 이러한 관점 때문에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는 마르크스나 루카치와는 달리 정치적 혁명으로서의 실천을 거부하고, 도구적 이성을 비판하는 이론적 실천에 매몰되었고, 정치경제학 비판을 주요 과제로 삼았던 마르크스와 달리 병든 문명 전반에 관한 보다 근본적인 철학적 비판에 몰두하였던 것이다. 마르쿠제도 현대철학 특히 실증주의 사조가 이론의 가치중립성을 강조하고 지식은 사실에 근거하여야 한다고 오해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전체주의를 조장하였다고 비판하는 점에 있어서는 호르크하이머 및 아도르노와 같은 입장이다.
 호르크하이머, 아도르노, 마르쿠제 등 비판이론가들은 히틀러의 극우 전체주의든 스탈린의 극좌 전체주의든, 모든 유형의 전체주의는 근본적으로 볼 때, 계몽주의적 이성이 도구적 이성으로 전락한 데 그 원인이 있다고 보았다. 계몽주의적 이성의 이중적 성격은 일찍이 칸트에 의하여 예리하게 지적된 바 있다. 인간에게는 스스로를 보편적 주체로 여기고 자유로운 사회적 삶을 영위하려는 초개인적, 초월적 이성이 있는가 하면, 다른 한편으로는 자기보존의 목적에 따라 대상세계를 정복하고 지배하려는 이기적이고 타산적인 이성도 있다는 것이다.
 이성의 개념에는 이와 같이 초월적 이성과 경험적 이성, 보편적 이성과 특수적 이성, 혹은 해방적 이성과 도구적 이성이 있으나, 오늘날은 도구적 이성만 존중되고 결국 계몽주의적 이성이 실증주의의 시녀가 되어 인간에 의한 자연의 지배가 드디어 인간에 의한 인간의 지배로 둔갑하는 계몽의 역설을 초래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가 '계몽의 변증법'이라고 하는 것은, 한때 인류를 신화와 공포로부터 해방시킨 계몽주의적 이성이, 오늘날에 이르러 인류를 새로운 이데올로기적 신화와 공포의 도가니로 밀어넣게 된 역설을 뜻한다. 계몽의 변증법은 "신화는 이미 계몽되었다"는 명제와 "계몽은 신화로 전도되었다"는 두 명제, 즉 중세의 암흑과 억압상태에서 문명사회로 계몽하려던 모더니티의 과제가, 실제로는 문명에서 새로운 차원의 억압으로 되돌아가는 역설, 말하자면 해방과 속박, 계몽과 몽매로 표현할 수 있는 역설적이고 이중적인 구조를 뜻한다.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에 따르면, 타락한 현대인의 모습은 사회진보와 깊이 관련된 현상이다. 한편에서 보면, 경제적 생산성의 발전이 보다 정의로운 사회를 이룩하는 데 필요한 물적 조건을 창출하였다고 할 수 있으나, 다른 한편에서 보면 그것은 기술적인 지배기구와 이를 장악한 사회집단이 다른 사람을 지배할 수 있게 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희망적인 가능성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고, 현대사회의 추세와 발전 방향 중 회의적 차원을 계몽주의적 이성의 전체주의적 특성이 빚어낸 것으로 규정하고 이 측면만을 파헤친 것이다. 종교적 독단과 신화, 가연의 횡포와 가난으로부터 인류를 해방시킨 계몽주의적 이성이 그 자체의 내적 논리로 인하여 삶의 의미를 파괴하고, 과학과 예술을 야만화하였으며, 인류로 하여금 상품의 물신숭배와 권위주의적 관료주의에 얽매이게 함으로써  인간에 의한 인간의 지배를 가능하게 하여 계몽주의적 이상 그 자체를 타락시킨 역설적 전도를 계몽의 변증법이라 한 것이다.
 대중사회에 대한 비판은 당시에 토크빌(Alexis de Tocqueville)이나 니체(Friedrich Nietzsche) 등 사상가들에 의하여 이미 제기되었으나,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를 비롯한 비판이론가들이 제기하는 문명비판의 특색은 이를 과학과 실증주의에 대한 전면적 비판과 연결시킨다는 데 있다. 계몽주의적 이성이 실증주의의 시녀가 되어 모든 것을 수량적 척도로 환원하고, 자연을 오직 정복과 지배의 대상으로 여길 뿐만 아니라 모든 것을 목적 달성에 대한 유용성의 관점에서 파악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자연계의 현상 뿐만 아니라 인간의 행동과 관념까지도 어떤 목적에 대한 유용성의 관점에서 판단하며 따라서 자연과 인간을 모두 조종과 지배의 대상으로 인식한다는 것이다. 계몽주의적 이성 그리고 오늘날의 실증주의는 주관성과 객관성, 인간과 자연을 근본적으로 분리하며, 이는 곧 조종과 지배를 정당화하고 그래서 전체주의적 이데올로기의 기초가 되었다는 것이다.
 과학과 기술 즉 생산력의 놀라운 발전이 이룩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마르크스가 기대했던 자유로운 사회가 도래할 가능성은 보이지 않고, 오히려 한층 더 심화된 물신숭배와 물상화현상 그리고 허위의 욕구를 자극하는 퇴폐적 문화산업에 의하여 새로운 지배와 억압 속에 인류는 노예화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는 계몽주의 사조로부터 비롯된 모더니티(modernity)를 너무나 철저하게 비판함으로써 진보의 가능성을 전혀 인정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들은 이와같은 병든 문명을 치유할 수 있는 어떤 구체적 대안도 제시하지 못하였다. 이점에 관한 한 하버마스는 그들과 구별된다. 하버마스는 의사소통적 합리성의 논의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모더니티가 진보적 발달 혹은 사회진화를 가능하게 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4. 문화산업 비판
 제1세대 비판이론가들은 원래 루카치(Lukacs)의 헤겔주의적 마르크스주의(Hegelian Marxism)에 깊이 공감하였다. 서구의 선진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노동운동(1920년대)이 무참히 짓밟히고 파시즘이 출현한 반면에 후진국이었던 러시아에서 사회주의 혁명이 성공할 수 있었던 역사적 사건은 실증주의적이고 경제결정론적인 정통마르크스주의로는 도저히 설명될 수 없는 사건이었다. 이에 호르크하이머를 비롯한 초기 비판이론가들은 경제결정론과 실증주의로부터 마르크스사상의 변증법적 계기를 되살리기 위하여 루카치의 『역사와 계급의식』(History and Class-Consciousness)에 깊은 관심을 기울였다.
 루카치에 따르면, 마르크스사상의 진정한 특징은 아들러나 바우어 등 오스트리아 마르크스주의(Austro-Maxism)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주관적 자원론(subjective voluntarism)도 아니고, 제2인터내셔널 이후 엥겔스, 플레하노프, 부하린 등의 소위 정통마르크스주의가 주장하는 객관적 결정론(objective determinism)도 아니다. 마르크스사상은 객관과 주관, 존재와 당위, 이론과 실천의 상호관련을 강조하는 변증법적 사회이론이며 사회적 실천의 철학이란 것이다.
 벅 모어서(Susan Buck-Morss)는 루카치가 제기한 헤겔적 마르크스주의를 다음과 같이 다섯가지 명제로 요약하였다. 첫째, 마르크스주의의 사상적 요체는 총체성을 강조하는 데 있다. 둘째, 프롤레타리아 계급은 자본주의 사회를 총체적으로 인식할 수 있는 유일한 계급이며, 역사발전의 주체요, 동시에 객체이다. 셋째, 전위적 엘리트로 조직된 공산당(vanguard party)은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의식을 계도하고 이를 대변하는 메타주체이다. 넷째, 마르크스사상의 특징은 주관과 객관, 존재와 당위 및 이론과 실천의 변증법적 관계를 강조하는 것이며, 이는 엥겔스의 자연 변증법과는 엄연히 구별되어야 한다. 끝으로 물화현상(reification)은 상품의 물신숭배(commodity fetishism)적 태도가 사회생활의 모든 영역에 널리 확산된 현상이며, 이러한 물화 현상의 이데올로기적 성격을 비판하는 데 마르크스사상의 특징이 있다는 것이다.
 위의 다섯 가지 명제들 중에서 총체성 개념,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중요성 및 당의 선도적 역할 등은 정치적 실천을 강조하는 적극적 차원이고, 자본주의 사회의 물화된 사회의식에 대한 변증법적 규명과 그 이데올로기를 비판하는 넷째와 다섯째 명제는 부정적 차원으로 볼 수 있는데,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가 루카치로부터 계승하는 것은 부정적 차원인 것이다.
 비판이론가들은 루카치, 코르쉬(Karl Korsch), 그람시 같은 헤겔주의적 마르크스주의 이론가들이 역사발전의 견인차로 규정해 온 프롤레타리아 계급과 당의 전위적 역할에 대하여 회의적이었고, 이 점에 있어서 프랑크푸르트학파의 비판이론은 정치적 실천을 지향하는 마르크스주의와 명백한 결별을 선언한 것이다. 앞에서 언급한 역사적 상황으로 인하여 제1세대 비판이론가들은 노동자 계급의 혁명적 잠재력에 대한 신념을 완전히 상실하고, 당의 선도적 역할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비판적이었다. 이와같이 마르크스주의의 핵심개념인 총체성,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확인 및 당의 선도적 역할 등을 수정 내지 폐기해버린 것처럼, 이데올로기 비판의 보조수단일 뿐이다. 따라서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사회비판이론은 능동적이고 창조적인 인간의 이성을 억압하고, 이성의 자유로운 실현을 가로막는 문화산업을 비판하고, 문화산업에 체현된 이데올로기에 대한 철학적 성찰에 주력한 것이다. 
 대전 후 미국은 갈브레이스(J.K. Galbraith)의 『풍요한 사회』(Affluent Society), 다니엘 벨(Daniel Bell)의 『이데올로기의 종언』(End of Ideology)이라는 표현이 시사하는 것처럼 눈부신 경제성장을 이룩하여 대량소비사회로 진입하였다. 사회과학자들은 사실에 대한 실증주의적 기술에 치중함으로써 기존의 사회질서를 예찬하고 정당화하였다. 『에로스와 문명』(1966)에서 마르쿠제는 이와같이 물적풍요를 누리는 선진 산업사회는 그 표면적인 풍요의 외양과는 달리, 가공한 억압과 지배 이데올로기가 이면에 숨어 있다고 보고, 이를 폭로하는 사회 비판이론을 전개한다. 이를 위하여 그는 마르크스사상과 프로이드의 정신분석이론을 독창적으로 접목시키고 있다. 마르크스주의에는 인간을 파시즘, 스탈린주의 및 소비위주의 자본주의에 무비판적으로 동조시키는 심리적 메카니즘을 설명할 수 있는 요소가 결여되어 있기 때문에 마르쿠제는 프로이드의 정신분석이론과 문명론을 출발점으로 삼았다.
 프로이드의 정신분석이론은 쾌락원칙과 현실원칙간의 갈등에 입각하여 문명의 발전을 설명한다. 모든 문명사회는 문명의 가치와 인간본능의 요구간의 갈등을 극복하고, 본능적 욕구를 억압한 사회적 노력의 결과로 문명을 이룩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에로스(Eros) 혹은 삶의 본능은 성본능이며, 생산적 노동을 위해 에로스의 성본능은 억압되어야 한다. 타나토스(Thanatos) 혹은 죽음의 본능은 파괴적이고 공격적인 본능으로, 이는 자연을 정복하고 노동의 능률성을 높이는 방향으로 선용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문명과 그 불만』에서 프로이드는 세계대전과 같은 역사적 경험을 반성해 볼 때 인간에게는 파괴적이고 공격적인 본능이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고 하였다. 그는 사유재산제도를 철폐하면 인간간의 적대적 관계가 해소될 수 있다고 믿는 사회주의 사상가들의 신념을 '근거없는 환상'이라고 비판하면서, 경제적으로 평등한 사회에서도 성적 욕구와 공격본능으로 인하여 인간은 격렬한 적대적 관계를 극복하기 어렵다고 하였다.
 따라서 프로이드는 에로스의 욕구를 억압하여 창조적 노동으로 승화시키고, 타나토스의 파괴적이고 공격적인 본능을 억압하여 자연을 정복하고 노동의 능률성을 제고하는 데 전용하지 않으면 문명의 유지발전은 불가능하다고 보았다. 그래서 그는 문명과 불만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문명사회가 인간의 성욕과 공격적 욕구에 엄청난 억압을 강요하지 않을 수 없다는 점을 생각할 때, 우리는 인간이 문명사회를 이룩하는 대가로 많은 불만을 인내하여야 함을 알 수 있다.
 마르쿠제는 쾌락만을 추구하는 본능의 원초적 욕구를 억압하여 이를 창조적으로 승화시킬 때, 즉 쾌락원칙을 현실원칙에 예속시킬 때, 비로소 문명의 발전을 이룩할 수 있고, 따라서 억압없는 사회는 없다고 하는 프로이드의 문명론을 사회비판의 출발점으로 하되 이를 비판적으로 재구성하였다. 마르쿠제는 억압은 문명사회를 이룩하기 위하여 인간이 지불하여야 할 대가라고 하는 프로이드의 견해를 수용하면서도, 이러한 문명론의 보수주의적이고 회의주의적인 정치적 함의를 비판한 것이다.
 마르쿠제는 억압의 보편적 차원과 역사적 차원 혹은 억압의 불변적 차원과 가변적 차원을 구별하고, 이러한 차이를 간과한 것이 프로이드의 한계성이라고 하였다. 억압의 불변적 차원은 문명의 유지 존속을 위하여 모든 사회에 필요한 억압이며, 이는 쾌락밖에 모르는 에로스의 욕구를 창조적인 활동으로 승화시켜 개인의 자아실현과 사회의 공익에 이바지하는 바람직한 억압이며 따라서 이를 기본억압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억압의 가변적 차원은 후기 산업사회의 역사적 특성 때문에 사회통제와 지배의 목적으로 악용되는 과잉억압을 뜻하며, 마르쿠제가 "억압없는 사회"라고 할 때의 '억압'이란 과잉억압을 뜻하는 것이다.
 과학과 기술이 고도로 발전한 후기 산업사회는 높은 생산성으로 인하여 물질적 풍요를 이룩하고, 노동시간의 단축에 따라 여가시간의 증대로 인하여 리비도(libido)의 에너지가 흘러 넘치게 되었다. 이와 같이 흘러 넘치는 본능적 에너지 즉 과잉의 에너지가 잘못 정치적으로 동원되면, 기존의 체제를 전복할 위험이 있기 때문에 이를 방지하기 위하여 후기 산업사회는 과잉의 억압이 불가피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현대사회의 억압과 통제원리는 물리적 억압이나 가시적 폭력보다 더욱 무서운 가공할 억압의 메커니즘이다. 마르쿠제는 『일차원적 인간』에서 현대사회의 억압 즉 과잉의 억압을 건전하지 못한 불량만화, 전자오락, 프로경기, 록 콘서트, 향락산업, 성의 해방, 포르노그라피 등 주로 흥행위주의 문화산업과 퇴폐적 활동을 조장함으로써 에로스의 창조적 승화를 방해하고 허위의 욕구를 충동하여 비판적 이성을 마비시키는 억압으로 설명하고 있다.
 이와 같은 향락 및 흥행위주의 퇴폐적인 문화산업은 긍정적 문화를 짓밟고, 해방과 자유를 표방하면서 인간이성을 마비시키기에 억압적이며, 에로스의 창조적 승화를 가로막는 것이므로 역승화인 것이다. 그래서 인간을 향락위주의 일차원적 존재로 전락시키는 후기산업사회의 지배원리를 마르쿠제는 억압적 역승화라 하였다.
 아도르노도 『미니마 모랄리아』(Minima Moralia)에서 소비사회와 문화산업을 비판적으로 분석하였다. 문화산업이란 문자 그대로 문화의 산업화를 지칭하고, 그 주된 기능은 사회구성원들의 욕구, 태도 및 성향에 영향을 미쳐 그들을 소비사회에 통합시키는 것이다. 오늘날 소비사회는 재화와 용역뿐 아니라 예술, 정치, 문화 및 일상생활의 모든 영역을 상품처럼 표준화시키고 획일화하여 현대인의 삶을 황폐화시킨다. 베블렌(Thorstein Veblen)의 문화비판의 관점을 수용하면서, 아도르노도 현대인의 소비성향은, 진정한 욕구를 충족하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사회적 지위를 과시하기 위한 과시적 소비(conspicuous consumption)가 그 특징이라고 하였다. 과시적 소비를 주도하는 상류계급은 물론, 이들의 허장성세를 흉내내기 위하여 능력에 무리한 출혈구매를 하거나, 아니면 상류계급이 애용하는 상품과 유사해 보이는 모조품이라도 소유하려는 중산계급의 애처로운 모방풍조는, 근본적으로 볼 때 현대판 야만의 병리적 징후이며, 이러한 병리는 확대일로에 있는 문화산업에 의하여 더욱 빠른 속도로 확산되고 있는 것이다.
 마르크스도 자본주의 사회의 이데올로기로 상품의 물신숭배(commodity fetishism)를 지적하고 이를 비판하였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본주의 사회의 이데올로기, 대중문화 및 상업주의가 노동자계급을 완전히 통합시킬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아도르노와 마르쿠제는 후기 자본주의 사회의 문화산업과 그것이 창출하는 허위의 욕구 속에 노동자 계급이 완전히 흡수 통합되었기 때문에 사회변혁의 가능성과 사회변혁을 주도할 계급 혹은 그러한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집단의 존재가능성에 대하여 매우 회의적이었다. 제1세대 비판이론가들의 회의적 관점은 아도르노의 부정의 변증법에서 가장 뚜렷하게 나타난다.

5. 부정의 변증법
 비판이론의 특성은 변증법적 방법을 중요시하는 데 있다는 점은 이미 앞에서 지적하였으나, 아도르노의 변증법은 헤겔, 마르크스 및 루카치의 변증법과는 다르다. 헤겔, 마르크스 및 루카치의 변증법은 부정의 부정에 의하여 긍정이 될 수 있는 변증법이나, 아도르노는 이성의 부정성(negativity)은 인정하면서도 부정의 부정에 의하여 긍정이 될 수 없는, 그래서 주관과 객관의 통일성을 부정하는, 부정의 변증법(negative dialectics)이다. 변증법을 보는 이러한 인식론적 견해의 차이는 정치적 실천에 대한 입장의 차이와 깊이 관련된 것이므로 프랑크푸르트학파의 특성을 파악하는 데 있어서, 부정의 변증법은 매우 중요한 의의가 있다고 하겠다.
 아도르노에 따르면, 철학은 대체적으로 인식론적 혹은 형이상학적으로 절대적 출발점, 궁극적 실재를 전제로 하여 이에 근거하는 혹은 동일성의 철학(philosophy of identity)에 말려드는 오류를 범했다는 것이다. 주관과 객관, 특수와 보편, 이론과 실천 혹은 존재와 사유 같은 이원적 대립개념을 접근함에 있어서, 철학자들은 대립항의 어느 한쪽에 일차적 중요성을 부여함으로써, 어떤 통일적 체계를 형성한 후, 다른 모든 것을 이 체계에 포섭하려하는데, 이를 동일성의 철학이라 한다. 비판이론가들은 주관과 객관, 사유와 존재간의 완전한 일치를 주장하는 이러한 동일성의 철학을 비판한다.
 그래서 그들은 헤겔의 관념론적 동일성 이론(idealist identity theory)은 물론 이른바 정통 마르크스주의의 유물론적 동일성 이론(materialist identity theory)도 거부하는 것이다. 정통 마르크스주의는, 사회는 경제적 생산양식내의 객관적 모순이 누적되면 역사 발전의 법칙성에 따라 사회주의로 이행된다고 봄으로써 객관적인 역사법칙에 인간의 주관성이 포섭된다고 하는 유물론적 동일성 이론에 근거하고 있으나, 아도르노는 역사발전을 물질적 요인의 객관성에 환원할 수 없다고 보았다. 뿐만 아니라, 역사의 과정은 결코 세계정신이나 절대정신의 자기현현으로 환원될 수도 없기 때문에 관념론적 동일성 이론도 심각한 오류를 범했다는 것이다.
 아도르노에 따르면, 헤겔이 인간정신을 활동의 과정으로 개념화하고 인식에 내재한 부정성을 강조한 것은 탁월하나, 그가 주객 동일성을 전제하고 절대정신의 자기현현에 토대한 것은 심각한 문제점이며 근거없는 환상이라는 것이다. 그는 헤겔이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적 관계를 밝힘에 있어서 인간의 자의식이 사회적 삶의 과정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고, 인식의 발전도 논리적이고 과학적인 체계에 따라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삶의 실제적 과정을 통하여 이루어진다고 한 것은 헤겔 철학의 강점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아도르노는 헤겔이 주체와 객체의 완전한 동일성을 상정하고 특히 이러한 동일성을 절대정신의 자기 전개과정을 이해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정신이나 주관성을 객관세계보다 우위에 두는 것은 칸트나 피히테의 주관적 편향성과 다를 바 없다고 비판한다.
 이와 같이 동일성의 철학은 객관적인 것에 입각한 실증주의적 통합이나, 주관적 요소에 치중한 관념론적 통합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주관과 객관, 존재와 사유 등 모든 차이를 해소하고 종결시키려 하나, 아도르노에 따르면, 이러한 차이는 결국 완결적으로는 해소될 수 없는 것이며, 변증법적 진리는 오히려 끝없는 비동일성에 그 특징이 있다는 것이다.
 아도르노가 동일성의 철학을 철저하게 비판하는 것은 벤야민(Water Benjamin)과 니체(Nietzsche)로부터 영향을 받은 바 크다. 벤야민은 첫째로 개별적 현상은 일반적 개념에 비추어 이해될 수 있다는 주장을 반대하였고, 둘째로 보편성은 오직 구체적 현상들과 그 구조를 통해서만 파악될 수 있다는 이유로 보편과 특수간의 동일성 이론을 반대하였다. 벤야민처럼 아도르노도 특수와 보편간의 동일성이론 혹은 총체성이론에 철저하게 반대한 것이다. 총체성이론을 반대하는 아도르노의 입장을 존슨(Pauline Johnson)은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아도르노는 주객관계의 모순성을 극복하려는 총체론적 관점을 거부한다. 총체론적 관점은 주객관계의 이율배반적 특성을 그 관계의 한쪽을 흡수병합함으로써 관계의 본질을 은폐하려고 하는 것이다. 아도르노에 따르면, 마르크스사상은 이와 같은 총체론적 시각을 비판하는데 관심이 있다...... 마르크스의 사상은 특수와 보편간의 관계에 관한 비총체론적 시각이 타당함을 밝히려는 것이다.
 니체는 철학의 근원주의나 일반범주가 구체적 삶의 역동성을 파악할 수 없게 한다는 점에서 동일성 철학을 폐기하였고, 특히 그는 철학적 범주들이 궁극적으로는 권력의지에 불과하다고 함으로써 모든 철학적 체계의 정당화를 냉소하였다. 그래서 아도르노는 어떤 절대적 기점과 궁극적 근원을 상정하며 동일성을 추구해 온 모든 철학에 대한 니체의 성상파괴적 비판에 전적으로 동의하였고, 니체의 사상을 "서구사상의 진정한 전환점"이라고 격찬하였다. 이러한 측면을 생각할 때, 니체는 물론 아도르노의 사상에서도 우리는 탈현대사상의 선구를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도르노가 니체사상에 무비판적으로 동조하는 것은 아니다. 특히, 니체가 모든 지식을 권력의지로 보면서도, 이 권력의 원천을 구체적인 사회경제적 문맥과 관련시키지 않고 절대화함으로써, 니체의 생철학은 비판적 계기를 상실하였다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아도르노의 부정의 변증법은 당시의 역사적인 상황과 깊이 관련된 것이며, 구체적 상황에 대한 철학적 반응이라 할 수 있다. 마르크스나 루카치 등이 예견하였던 프롤레타리아의 혁명의 가능성이 유럽에서는 극히 회의적이라는 상황인식, 노동운동의 탄압이나 나치의 반인륜적 파쇼주의의 등장과 스탈린의 극좌 전체주의가 자행한 테러적 만행은 말할 것도 없고, 독재권력의 이와 같은 비인간적 횡포에 무기력한 동조 내지 잔인한 침묵으로 일관했던 현대문명의 위기, 그리고 대전 후 선진 자본주의 사회가 근본적 변혁에 대한 자기방어력을 보였던 독특한 상황에 직면하여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좌파 지식인들은 극도의 절망과 좌절을 느꼈고, 이러한 극단적인 좌절의 표현이 부정의 변증법으로 표현된 것이다.
 헤겔의 절대정신이나 마르크스의 경제법칙은 부정의 부정에 의하여 긍정이 될 수 있는 긍정의 변증법이나, 위에서 밝힌 문명의 암전으로 인하여 긍정과 희망의 신학을 상실한 아도르노는 부정의 부정에 의해서 긍정이 될 수 없는 부정, 극단적인 부정을 일관되게 견지해야 하는 부정, 그래서 고차적 지양이 불가능한 절대적 부정이 있음을 강조하기 위하여 부정의 변증법을 제안한 것이다. 그래서 아도르노는 변증법을 객관적인 기만의 상황에 대한 끊임없는 자기반성이며, 따라서 무모한 실천으로부터 이론의 자율성이 인정되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다음과 같이 주장하고 있다.
 이론과 실천의 일치에 대한 지나친 요구로 인하여 이제 이론은 무모한 실천의 시녀로 전락되고 있다...... 실천에 혈안이 된 독단과 금기가 진정한 이론을 파괴하고 있으나, 올바른 실천을 위해서는 우선 이론의 자율성을 회복하여야 한다. 이론과 실천의 관계는 결코 고정된 확고불변의 관계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변화하는 역사적 상황에 따라 가변적임을 알아야 한다. 오늘날 걷잡을 수 없는 혼란과 소동으로 인하여 이론이 경멸되고 무력화되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론은 혼란과 무질서의 극을 치닫는 이 시대를 냉정히 증언하는 역할을 담당하여야 한다.
 정치적 실천으로부터 사회비판이론의 자율성이 존중되어야 한다는 이상과 같은 주장은 아도르노뿐만 아니라 호르크하이머에서도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주장은 학파형성 초기에 그들이 강조했던 입장과 비교할 때 주목할 만한 시작전환이라 아니할 수 없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원래 그들은 인식주체의 주관성이 개입될 여지가 없을 정도로 사회변동의 객관적 필연성을 강조한 '정통 마르크스주의'의 경제결정론을 비판하면서, 비판이론에 자기성찰적 차원을 회복시키고, 그래서 객관과 주관, 존재와 당위, 이론과 실천의 동태적이면서도 변증법적인 관계를 강조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전술한 바 역사적 상황의 변화로 인하여 점차 정치적 실천에 회의를 품게 되었고, 드디어 호르크하이머는 자신의『비판이론』에 붙인 1968년의 서문에서 마르크스주의적인 급진적 실천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것은 사이비 혁명론자들이라 매도하기에 이르렀다.
 제1세대 비판이론은 첫째, 결정론적이고 실증주의적인 마르크스주의의 조류를 비판하고 변증법적 마르크스주의의 철학적 기초를 회복하였고, 둘째, 마르크스주의를 과학적 진리나 확고한 교리로 보지 않고 역사적 상황에 비추어 사회를 비판하는 개방적 비판이론으로 재해석하였고, 셋째, 문화영역을 경제적 토대의 부수현상이 아니라 사회적 역동의 핵심으로 보아야 할 필요성을 강조하고, 넷째, 마르크스주의가 소홀히 했던 비판이론의 심리학적 차원을 부각시킨 것이 특징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공헌에도 불구하고, 제 1세대 비판이론은 결과적으로 이론과 실천의 통일성을 거부함으로써 이론적 지식과 정치적 실천간의 괴리를 해결하지 못한 채 이를 미해결의 유산으로 남긴 것이다. 이론과 실천간의 근본적인 통일성을 이룩하고, 그래서 제1세대가 남긴 탈정치화된 비판이론을 인식론적으로 재구성하려는 것이 하버마스의 출발점이었다.

 

 

 

 

 

 

 

 

 

 

 

 

 

 

제 3 장 하버마스의 비판이론

 1. 지식과 관심
 호르크하이머, 아도르노, 마르쿠제가 사망하고, 1970년대 초반에 신좌파운동이 퇴조하며서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역사는 종결되는 듯 했으나, 오늘날 이 학파의 사회비판이론은 하버마스(Habermas), 오페(Clauss Offe), 슈미트(Alfred Schmidt), 벨머(Albrecht Wellmer) 등에 의하여 비판적으로 계승되고 있고, 특히 하버마스는 그 중 대표적 인물이라 할 수 있다.
 앞에서 지적한 것처럼, 제1세대 비판이론가들이 이론과 실천의 동일성을 거부하고 결과적으로 실천과 유리된 이론의 자율성을 주장한 것과 달리, 하버마스는 비록 인식록적 차원이긴하나, 이론과 실천의 불가분성을 강조하였다. 실증주의를 전면적으로 그리고 철저하게 배격한 전자와 달리, 하버마스는 실증주의적 방법을 비판적으로 수용하고 있다. 전자가 고급문화와 긍정적 문화에서 현실초월의 가능성을 탐색한 것과는 대조적으로, 후자는 문화를 보다 경험적이고 일상적이며 상호주관적인 생활양식으로 이해한다.
 제1세대 비판이론가들이 가공할 억압과 소외가 만연된 현대문명에 대하여 베버와도 같이 극히 회의주의적이었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하버마스는 모더니티(modernity)의 긍정적인 가능성을 확신하고 있으며, 전자가 일차원적이고 도구적인 이성을 비판하는 것으로 일관했던 것과는 달리, 후자는 도구적 이성의 비판과 함께 민주적 상호작용의 가능성 및 의사소통적 이성의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다는 것이 특징이라 하겠다.
 루카치로부터 아도르노에 이르기까지의 사회비판이론이 결과적으로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 것은, 하버마스에 따르면, 그들이 모두 의식의 철학에 묶여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마치 후기 비트겐슈타인(Wittgnenstein) 이후의 많은 철학자들이 인간의 의식도 언어적으로 구성되고 언어를 통해서 형성된다고 보는 것처럼, 근년에 이르러 하버마스도 비판이론이 이제 의식의 철학을 버리고 언어철학으로 파라다임 전환을 하여야 함을 역설하고 있다. 하버마스의 이와 같은 언어적 전회를 이해하기 위하여, 여기서 우리는 우선 그가 인식론적 수준에서 이론과 실천을 통합하기 위하여 제기한 지식구성의 관심에 관한 개념을 검토하고자 한다.
 『지식과 관심』(Knowledge and Human Interests)에서 하버마스는 지식을 구성하는 준선험적 관심을 기술적 관심, 실천적 관심 및 해방적 관심으로 범주화하였다. 그는 기술적 관심 실천적 관심, 해방적 관심에 상응하는 지식 혹은 학문을 각기 경험적 분석적 학문, 역사적 해석적 학문 및 비판적 사회과학으로 분류하고, 각 학문영역의 지식은 그에 상응하는 인지적 관심과 불가분의 관계가 있음을 강조하였다. 특히 그는 실증주의와 역사주의가 소홀히 했던 인식론적 문제점을 재검토하고, 기술적 관심과 실천적 관심의 한계성을 비판하여, 이를 토대로 사회비판이론의 인식론적 근거를 정립하려 하였으며, 따라서 이는 모든 근원주의를 파괴한 아도르노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입장이라 하겠다.
 경험적 분석적 학문은 가설연역적 이론을 수립하여 이를 토대로 대상세계를 통제하고 조종하려는 기술적 관심에 의하여 지배되고 있다. 즉, 경험적 분석적 학문은 대상세계를 경험적으로 그리고 실증적으로 관찰하고 이를 독립변인과 종속변인으로 구분하여 그들간의 규칙적 관계를 탐구한다. 이러한 규칙성에 관한 가설을 설정하고 이를 경험적으로 검증하거나 혹은 반증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검증과 반증의 과정을 거쳐 보다 완벽한 보편법칙을 수립하고 보편법칙에 힘입어 보다 정확한 예측을 하려고 하는데, 예측의 궁극목적은 대상세계를 기술적으로 통제하는 데 있기 때문에, 경험적 분석적 탐구는 도구적 행위체계의 틀 안에서 이루어진다고 할 수 있다.
 어떤 의미에서 경험적 분석적 학문은 환경에 대한 인간적응의 필요성을 반영하는 것이며, 따라서 그것이 표방하는 가치중립성과는 달리, 환경을 기술적으로 통제하고 조종하려는 관심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이와 같이 경험적 분석적 학문이 실재를 객관적이고 가치중립적으로 기술하는 것을 표방하고 있으나, 그 논리의 이면에는 기술적 통제의 관심이 은폐되어 있다는 것이다. 경험적 분석적 학문의 대표적 유형인 자연과학의 방법론적 특징은 실재에 관한 보편명제를 형성하여 자연을 통제하는 기술적 수단을 제공하는 것이며, 따라서 자연과학적 지식의 의미는 예측가능성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자연과학적 지식이 예측적 지식이라는 것은 그 궁극적 의미 혹은 관심이 기술적 이용 가능성에 있고, 그래서 본질적으로 가치중립적 지식일 수 없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경험적 분석적 학문은 도구적 행위에 긴밀히 관련된 것이므로 도구적 조종과 질적으로 다른 행위유형, 가령 의사소통적 행위를 설명하기에는 범주적 제약이 있다고 하겠다. 이는 마르크스가 하부구조로 분류한 생산영역 즉 노동영역, 혹은 목적합리적 영역에만 한정된 유용성이 있을 뿐이며, 따라서 경험적 분석적 지식은 모든 지식의 보편적이고 정당한 척도가 될 수 없는 것이다.
 하버마스는 자연과학뿐만 아니라, 경제학, 정치학, 사회학 등의 사회과학도 그것이 법칙정립적 지식을 발견하고, 이를 토대로 하여 사회적 실재를 기술적으로 통제하려는 도구적 목적에 기여하는 경우에는 모든 경험적 분석적 학문으로 범주화하고 있다. 그가 경험적 분석적 학문이 기술적으로 통제하려는 도구적 목적에 기여하는 경우에는 모두 경험적 분석적 학문으로 범주화하고 있다. 그가 경험적 분석적 학문이 기술적 관심에 의하여 주도된다고 한 것이 과학자가 반드시 기술적으로 통제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탐구에 종사한다는 것을 뜻하는 것은 아니므로, 기술적 관심이 과학자 개개인의 특정 동기유형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기술적 관심이라는 것은 인간이 자연에 노동력을 투하함으로써 스스로를 생물학적 및 문화적으로 변형시키고 재생산하는 삶의 방식과 관련된 것이며, 이러한 생산활동은 기술적 통제의 관심을 필요로 할 뿐만 아니라 또한 이를 형성하기도 한다. 그래서 하버마스에 따르면, 관심이라는 개념은 순수하게 경험적인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순수하게 선험적인 것도 아니며, 우리 삶의 일반적 특성에 유래하는 것이기 때문에 준선험적인 개념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역사적 해석적 학문은 지식을 획득하는 방법적 틀이 다르다. 역사적 해석적 학문이 지식을 획득하는 방법은 경험과 관찰보다는 의미 이해를 중요시하고, 가설의 검증이나 반증보다는 텍스트의 해석에, 인과적 설명보다는 주관적 의미세계에 대한 해석학적 이해에 의존한다.
 역사적 해석적 학문은 일상적인 언어교류에 의하여 매개되는 상징적이고 상호주관적인 의미세계를 해석하고 이해하는 데 그 목적이 있고, 그래서 해석자는 텍스트의 지평에 스스로를 전치하고 감정이입하여 상호이해하는 실천적 관심에 의하여 지배된다. 두 가지 유형의 인지적 관심 즉 기술적 관심과 실천적 관심을 구별함에 있어서 하버마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구별에 따른다. 즉, 기술은 무엇을 제작하거나 조립할 때 나타나는 목적합리적 행위유형을 지칭하고, 실천은 상호주관적인 의사소통의 과정에서 나타나는 상호작용적 행위유형을 뜻하기 때문에, 하버마스가 실천적 관심이라고 할 때 실천의 개념은, 마르크스의 실천 개념과는 달리, 다분히 일상적인 언어생활과 깊이 관련된 것이다.
 일상적 언어놀이의 문법 혹은 문화적 전통의 구조가 상징, 행위, 그리고 표현을 연결해주고 상호작용과 세계해석의 틀이 된다는 점에서, 역사적 해석적 탐구는 상호이해를 가능하게 하는 문화적 전통을 중요시한다고 볼 수 있다. 하버마스는 해석학적 전통이 상징적 상호 작용, 이해 및 해석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은 그 강점으로 인정하고 수용하면서도, 해석학이 비판적 성찰과 자기반성을 판단중지한 채, 전통에 묶인 삶의 형식을 있는 그대로 해석하고 이해하려고 하는 무비판적 역사주의에 빠져 있다고 비판하였다. 마치, 경험적 분석적 학문이 인간존재의 근본적 관심과 무관하게 대상세계를 있는 그대로 객관적으로 관찰 기술하고, 그러한 관심으로부터 초연한 순수이론을 수립할 수 있다고 하는 객관주의적 환상에 젖어 있는 것처럼, 역사주의도 정신적 사실을 직접적 소여의 증거인양 착각하여, 이를 있는 그대로 해석하고 이해하여 순수이론을 수립하려고 하는 또다른 유형의 객관주의적 환상에 빠져 있기 때문에, 사회인식에 필요한 비판적 성찰과 자기반성이라고 하는 비판적 계기를 상실하고 있다는 것이다. 1970년대의 사회과학계에 관심의 초점이 되었던 가다머와 하버마스간의 논쟁도 바로 이 점에 관한 것이다.
 하버마스가 경험적 분석적 학문과 역사적 해석적 학문을 비판함에도 불구하고, 그가 이들의 가치를 전적으로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양자는 모두 지식의 한 가지 유형에 불과할 뿐이라는 것이다. 사회현상에 대한 경험적 분석적 학문의 객관주의는 행위자의 주관적 의도나 의미세계를 해석함에 있어서는 결정적인 한계가 있기 때문에, 그는 사회과학의 방법론에 해석학을 도입한다. 가치중립석이나 객관주의에 대해 가다머(Hans-Georg Gadarmer)는 하머마스보다 더욱 철저하게 비판적이다. 가다머에 따르면, 계몽주의와 계몽주의의 산물인 자연과학적 객관주의도 다른 선입견을 배격하는 일종의 선입견이라는 것이다. 그는 딜타이나 베티(Emilio Betti)같은 해석학자들까지도 자연과학적 객관주의의 환상에 사로잡혀, 인식의 무전제성이란 오류에 빠지게 되었다고 비판하였다. 가다머는 인간의 인식은 역사적 삶의 공동체에 그 뿌리가 있는 이해의 전구조(fore-structure)에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고, 소속된 사회적 환경과 문화적 전통의 선입견을 전적으로 배제할 수 없다고 함으로써, 합리적 비판보다는 전통의 권위를 강조하는 보수적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이와는 달리, 하버마스는 일상언어에 반영되고, 사회제도에 각인되며, 역사적 전통에 체현된 이데올로기적 조종과 도구적 이성의 억압을 폭로하기 위해서는 행위자의 주관적 의도를 왜곡하고 제약하는 객관적 요인에 대하여 철저한 자기반성을 하지 않을 수 없다고 본다. 요컨대, 가다머의 해석학이 반계몽주의적 낭만주의에 영향을 받고 있다면, 하버마스의 비판이론은 계몽주의적 이성과 자기반성의 힘에 깊은 확신을 견지하고 있다.
 하버마스에 따르면, 주관적으로 의도된 의미세계와 객관적 제약요인간의 괴리는 결국 경험적 분석적 학문이나 역사적 해석적 학문 중 어느 하나만으로는 극복할 수 없다는 것이다. 양자는 각기 사회적 실재의 상이한 영역 혹은 상이한 차원에 초점을 두고, 자기의 입장만을 강조하기 때문에 타협이 불가능하며, 바로 이와 같은 모순성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변증법적 중재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주관적 의도와 객관적 제약의 차원으로 인하여 사회적 삶은 자율성과 규칙성이라고 하는 상호모순된 요소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비판적 사회과학은 문화적 업적만을 긍정하는 데 만족할 것이 아니라, 역사적 업적의 의미를 비판적으로 반성하여, 기존의 사회를 보다 자유로운 사회로 발전시킬 수 있는 변증법적 이론을 만들어야 한다. 경험적 분석적 학문과 역사적 해석적 학문은 지식을 구성하는 다양한 인지적 관심들 중에서 각기 한 가지의 관심에만 집착함으로써, 마치 그것을 모든 지식에 보편타당한 절대적 기준인 것처럼 여기는 독단에 빠져 있기 때문에 하버마스는 이러한 독단으로부터 해방되기 위한 자기성찰을 강조한 것이다.
 비판이론 혹은 비판적 사회과학은 사회적 행위의 과학적 예측에 목적을 둔 법칙정립적 지식을 형성하는 데 만족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상호주관적으로 합의된 의미만을 추구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비판이론은 왜곡된 의사소통의 근본원인이 되는 사회의 이데올로기적 지배구조를 심층적으로 파헤치는데 그 특징이 있기 때문에 해방적 관심에 의하여 주도된다고 하겠다. 이와 같은 해방적 관심에 의하여 인도되는 비판적 사회과학이 하버마스가 분류한 지식의 셋째 유형이다.
 하버마스는 자기반성을 그 요체로 하는 비판적 사회과학의 원형을 경험적 분석적 학문의 인과적 설명과 역사적 해석적 학문이 강조하는 해석학적 이해가 변증법적으로 종합된 마르크스의 이데올로기 비판과 프로이드의 정신분석이론에서 볼 수 있다고 하였다. 마르크스는 정치경제학 비판을 통하여 자본주의 경제의 구조와 역동을 분석조건으로 파헤친 후, 이를 토대로 하여 인간의 자기성찰이 물질적인 생산조건에 의하여 체계적으로 왜곡되는 이데올로기를 비판하였기 때문에, 마르크스의 비판은 해방적 관심에 의하여 주도되고 있다. 한편, 프로이드는 심리적 억압의 원인이 된 과거의 에피소드를 치료자가 분석적으로 재구성하고, 이를 근거로 하여 꿈을 심층적으로 해석함으로써, 환자로 하여금 자기성찰을 할 수 있게 하는 방법적 틀을 제공하였다는 것이다. 결국, 비판적 사회과학의 원형은 인과적 설명과 해석적 이해를 변증법적으로 종합한 설명적 이해라 할 수 있고, 마르크스의 이데올로기 비판과 프로이드의 정신분석은 모두 법칙적 관계에 관한 정보를 제공함으로써 당사자의 의식에 자기성찰을 촉진하려는 해방적 관심에 의하여 주도된 것으로 불 수 있다는 것이다.

 2. 사적 유물론의 재구성
 위에서 본 것처럼, 경험적 분석적 학문은 기술적 관심, 역사적 해석적 학문은 실천적 관심에 의하여 각기 주도되기 때문에, 모든 지식은 상응하는 지식을 구성하는 관심과 분리될 수 없다는 점을 밝힘으로써, 호르크하이머나 아도르노와는 달리, 하버마스는 이론과 실천의 통일성을 인식론적으로 정립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지식을 구성하는 관심에 관한 그의 이론에 대하여 몇 가지 비판이 제기되었다.
 첫째, 세가지 관심은 모두 지식에 선행하는 전제라는 점에서 보면 선험적이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관심은 사회적 삶의 경험적 과정을 통해서만 구체화된다는 점에서 볼 때 경험적이라 아니할 수 없고, 따라서 하버마스의 지식구성 관심의 개념은 인식론적으로 매우 애매한 것이다. 이는 선험적인 것이라면 경험에 앞선 것이며, 우리가 경험적 내용에 의존한다면 선천적 종합 판단의 보편성과 필연성을 정당화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둘째, 세 가지 관심 혹은 하버마스의 표현처럼 준선험적 관심들은 각기 상응하는 지식에 고유한 것이므로 대등한 것처럼 보이나, 기술적 관심과 실천적 관심은 궁극적으로는 해방적 관심으로 통합된다고 주장하는 것을 보면 세가지 관심들은 결코 대등한 관계라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셋째, 하버마스는 기술적 관심과 실천적 관심이 인식주체의 자기 성찰을 통해서 해방적 관심으로 통합되며, 자기성찰의 힘을 통해서만 자식과 관심은 통일성을 이룩한다고 하였다. 그래서 자기성찰 혹은 자기반성은 인지적 관심에 관한 하버마스의 이론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개념이나, 맥카시(Thomas McCarthy)나 번스타인(Richard Bernstein)에 따르면, 가장 애매한 개념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하버마스가 사용하는 성찰(reflection)이라는 개념은 이중의 의미를 내포하기 때문에 애매하다. 한 가지는 퍼어스(Charles Peirce)나 딜타이에서 볼 수 있는 지식구성의 주관적 조건에 관한 성찰이고, 다른 한 가지는 마르크스나 프로이드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언어와 행위의 구주에 은폐된 이데올로기 비판이라 할 수 있는 자기성찰이다. 전자는 지식비판, 후자는 이데올로기 비판과 각기 관련된 성찰을 뜻하므로, 『지식과 관심』에서 하버마스가 사용하는 성찰의 개념은 매우 애매한 것이다.
 따라서, 지식과 관심에 관한 그의 이론은 스스로도 인정한 것처럼 쟁점을 해결한 것보다는 오히려 많은 문제점을 제기한 것이다. 그래서 『의사소통적 행위이론』(Theory of Communicative Action)에서는 지식과 관심에 관하여 제기한 당초의 삼분법을 버림은 물론 인식론적 접근을 폐기하고, 사회적 삶의 역사적 과정을 목적합리적행위와 의사소통적 행위로 범주화하게 되며, 그는 이를 위하여 마르크스의 사적 유물론을 비판하는 것으로부터 출발 한다.
 하버마스는 마르크스가 『경제적 철학적 초고』에서 이미 노동(labor)과 상호작용(interaction)이라는 두 가지 차원을 상정하고, 이들간의 관계를 생산력과 생산관계간의 변증법적 관계로 파악한 것은 탁월한 통찰력이라고 격찬하였다. 그 이유는 인간의 사회적 삶이 발전하기 위해서는 노동과 상호작용, 기술적 지식과 도덕적 의식, 혹은 목적 합리성과 의사소통적 합리성이라는 두 가지 차원의 발전이 조화롭게 이룩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독일 이데올로기』이후에 마르크스는 노동과 상호작용간의 변증법적 관계를 밝히기보다는, 상호 작용 영역을 노동으로, 의사소통적 행위를 도구적 행위로 환원하였고, 그래서 하버마스에 따르면, 결과적으로 마르크스는 자신의 변증법적 사상이 기계론적 이론으로 오해될 소지를 스스로가 만들었다는 것이다.
 
 ..... 마르크스에 있어서는 인간과 자연환경간의 물질적 상호작용을 규제한 생산활동 즉 도구적 행위가 모든 범주를 형성하는 파라다임이 된다. 그래서 모든 것이 생산의 자기운동 속으로 해소되어 버리게 되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이유로, 생산력과 생산관계간의 변증법적 관계에 대한 마르크스의 탁월한 통찰력은 종종 기계론적 방식으로 오해될 수밖에 없었다.
 
 하버마스에 따르면, 생산력과 생산관계라는 개념을 노동과 상호작용 혹은 목적합리적 행위와 의사소통적 행위로 대체함으로써, 마르크스사상에 대한 기계론적 해석을 극복할 수 있고, 이와 같은 재구성을 통하여 마르크스가 원래 의도했던 비판적 계기를 되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사회적 삶의 실질적 토대는 물질적 생산양식이며, 생산양식은 생산력과 이 생산력의 발전 단계에 대응하는 일정한 사회적 생산관계로 구성된다고 보았다. 그리고 생산력 발전이 일정한 단계에 이르게 되면, 발전된 생산력과 낡은 생산관계 사이에는 갈등과 모순이 야기되고, 이러한 모순이 누적되면, 필연적으로 새로운 생산관계가 출현하며, 그에 따라 조만간 그 사회의 정치적, 법률적, 철학적, 종교적 측면을 포함하는 모든 이념적 상부구조의 변화가 수반된다고 봄으로써, 마르크스는 역사발전의 원동력은 생산력에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하버마스는 사적 유물론의 기본명제인 이와 같은 상하부 구조론은 후기 자본주의 사회의 변화된 실상을 설명하기에는 결정적으로 한계성이 있다는 것이다.
 첫째, 마르크스 당시와 같은 자유방임적 자본주의 단계에 있어서는 국가의 역할이 극히 제한적이었고 따라서 경제활동은 자유경쟁과 시장원리가 지배하고 있었다. 그러나 대규모기업의 출현이 본격화되고 경제영역에 대한 국가권력의 개입이 현저하게 증대된 후기 자본주의 즉 '조직화된 자본주의'(organized capitalism)단계에 있어서는 더 이상 경제 영역과 정치영역을 분리하여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이다.
 둘째로 후기 자본주의 사회에 있어서 갈등과 위기의 중심부는 경제 영역이 아니라, 오히려 정치 영역이라는 것이다. 오늘날의 경제활동은 상당한 정도로 재기업과 연결된 정부에 의하여 조종되고 있기 때문에, 국가기구의 정치적 권력이 기업의 자본축적을 지원하는 역할을 수행하고 있으나, 만약 이러한 역할을 성공적으로 수행하는 과정에서 국가 기능에 대한 대중의 동의와 충성심을 얻지 못한다고 하면 정당성의 위기(legitimation crisis)에 처하게 된다. 하버마스에 따르면, 후기 자본주의의 가장 핵심적 모순은 경제적 모순이 아니라, 바로 이와 같은 정당성의 위기경향이라는 것이다. 요컨대, 아담 스미스(Smith)가 신뢰하였던 '보이지 않는 손'이 국가개입이라고 하는 보다 가시적인 통제로 대치된 후기 자본주의 사회를 분석하는 데 있어서는 마르크스의 고전적 상하부 구조론은 결정적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셋째로 계급갈등이 사회변혁의 잠재적 요인이었던 마르크스의 시대와는 달리, 오늘날의 선진 자본주의 사회에 있어서는 노동자 조직과 사용자 및 정부간에 이른바 노 사 정 간의 타협과 계약이 제도적으로 확립되고 있어 계급화해가 선진자본주의의 구조적 특징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제 계급의식의 개념은 퇴색되고, 해방에 대한 관심도 더 이상 경제적 차원에서만 접근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소외현상도 더 이상 경제적 측면에 국한하여 파악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넷째로 오늘날은 연구와 개발에 대한 대규모 투자가 본격화되어, 과학과 기술 및 산업생산이 상호긴밀한 관계를 이룩하였다. 그래서 과학과 기술의 진보가 경제성장을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인으로 등장한 후기 자본주의적 생산에 있어서는, 과학과 기술이 잉여가치를 생성 창출하는 주요 원천이라 할 수 있고, 따라서 노동력만이 잉여가치를 창출한다고 하는 마르크스의 노동 가치설은 이제 그 설득력을 잃게 되었다는 것이다.
 끝으로, 하버마스가 후기 자본주의의 가장 뚜렷한 특성으로 우려하는 것은 과학과 기술의 논리가 하나의 보편적 기준으로 사회생활의 모든 영역에 깊이 침투하였고, 특히 과학 및 기술주의가 정치적 문제해결에 광범위하게 이용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와 같이 정치가 테크놀로지의 일종으로 왜곡된 이른바 정치의 과학화 현상은 선진 자본주의사회의 새로운 이데올로기로 등장한다. 과학과 기술이 보급하는 지식은 한편으로는 덜 이데올로기인 듯하면서도, 다른 한편에서 보면 보다 강력한 이데올로기적 정당화 기능을 수행한다고 할 수 있다.
 기술적 의식은 허위의식과 같은 전통적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가치중립성과 객관성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이데올로기적이라 할 수 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의 세계가 갖는 소박성과 상식성에 비하면 그 과학성과 엄밀성으로 인하여 아무런 의심없이 받아들이게 된다는 점에서 전통적 이데올로기보다 더욱 강력한 정당성의 근거로 작용한다. 따라서 현대사회에 만연된 기술적 의식은 생활세계의 상징적 상호작용과 의사소통적 합리성을 억압하고 대중의 탈정치화에 기여하는 새로운 이데올로기이며, 이와 같이 기술적 의식이 우리의 삶을 황폐화시키는 문명의 병이를 하버마스는 생활세계의 식민지화라 하였다.
 그러나 과학적 사고방식의 인식론적 한계성을 적나라하게 비판하고, 과학과 기술이 현대사회의 새로운 지배 이데올로기로 이용된다는 점에서 과학과 기술을 전면적으로 비판했던 초기 비판이론가들과는 달리, 하버마스는 과학과 기술을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과학자 공동체가 지식의 단순한 생산에 안주하지 않고, 그들의 연구결과와 지식이 갖는 사회적 및 인간적 함의에 대하여 부단한 자기성찰과 개방적 논의를 거듭함으로써 과학과 기술이 인류의 번영에 기여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 하버마스의 입장이라고 하겠다.
 요컨대, 후기 자본주의는 경제에 대한 국가권력의 증대된 개입, 정당화의 위기, 계급화해로 인한 계급갈등의 퇴조, 일차적 생산력으로서의 과학과 기술의 발전과 그에 따른 생활세계의 식민지화와 사물화 현상의 만연 등으로 특징지울 수 있다.
 생활세계의 식민지화와 사물화 현상을 극복하는 방안에 있어서도 하버마스는 마르크스와 다른 입장을 취하고 있다. 이와 같은 문명의 병리는 마르크스가 주장한 사회주의 혁명으로 극복될 수 없다는 것이다. 하버마스는 오히려 사회주의 사회가 되면 국유화된 거대한 생산수단을 국가가 획일적으로 통제 조종하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가일층 강화된 중앙집권적 관료기구가 출현하기 때문에 사회주의적 이행에 극히 비판적이었던 베버(Max Weber)의 관점을 지지한다.
 이러한 입장을 그는 『의사소통적 행위이론』의 제2권에서 다음과 같이 밝혔다. "체계(system)와 생활세계(life-world)는 마르크스에 있어서도 '필연의 영역'과 '자유의 영역'이라는 은유로 표현되었다. 마르크스는 사회주의 혁명이 후자를 전자의 통제로부터 해방시킬수 있다고 보았다. 사회주의 혁명에 대한 이와 같은 기대를 반대했던 베버의 진단은 옳다. 사적 자본의 폐지가 결코 현대 산업노동의 철창(iron cage)을 폐기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의사소통적으로 구조화된 생활세계가 사물화되는 현상을 단순히 계급분화의 문제로 환원한 것이 마르크스와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오류라는 것이다. 후기 자본주의의 핵심적 갈등은 단순한 물질적 재화의 분배문제가 아니라, 오히려 의사소통적 이성에 의하여 생활세계를 되찾고 삶의 규범적 질서를 근본적으로 변혁함으로써 해결될 수 있는 문제에 기인된다는 것이다.
 
3. 언어적 전회
 하버마스는 우리의 일상적 의사소통의 형식 그 자체 속에 이른바 자유, 정의, 진리와 같은 보편적 원칙이 내재해 있으므로, 의사소통적 행위이론이 사회이론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고 본다. 비판적 사회이론을 위한 이와 같은 '언어적 전회'(linguistic turn)는 후기 비트겐슈타인 이래 의식의 철학에서 언어철학으로 전환되고 있는 20세기 철학의 한 조류와도 같은 것이다.
 언어가 인간생활의 독특한 특징이고, 인간의 삶은 의사소통 과정을 떠나서는 이해할 수 없으므로, 그는 언어행위(speech actions)를 분석하는 데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촘스키(Noam Chomsky)의 언어학이론과 오스틴(Austin)과 서얼(Searle)이 제기한 언어행위이론에 힘입어, 하버마스는 의사소통능력도 합리적으로 재구성될 수 있다고 선언한다.
 촘스키는 언어능력(linguistic competence)과 언어수행(linguistic performance)을, 각기 심층구조와 표면구조에 비유하여 엄격하게 구별하였다. 그의 변형 생성문법의 주된 관심은 전자 즉 언어능력에 집중되었고, 언어능력만이 보편적 개념화가 가능하다고 보았다. 그러나 하버마스에 따르면, 재구성적 언어분석의 목적은 문법적으로 타당한 문장을 구성할 수 있고 타인에게 납득될 수 있게 표현할 수 있는 유능한 화자라면 누구나 숙달해야 할 규칙들을 명백하게 규명하는데 있다. 이 점에 있어서는 언어행위이론이나 언어학이 다를 바 없다. 그러나 언어학이 언어능력에 관한 전제로부터 출발하는 것과 대조적으로, 언어행위이론은 의사소통능력을 상정하는 데서 시작한다. 그래서 우리는 언어능력뿐만 아니라 의사소통능력도 개념으로 정립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버마스의 문장의 구문론적, 음성학적 및 의미론적 측면뿐만 아니라 언술행위의 실용적 측면도, 말하자면 언어능력뿐만 아니라 언어수행도 보편적 개념으로 정립할 수 있다고 본다. 여기서 하버마스가 의사소통능력이라고 하는 것은 촘스키의 언어수행과 같은 개념이다. 요컨대, 의사소통능력도 보편적 개념화가 가능하다고 보는 하버마스는 언어능력만이 보편성이라고 보는 촘스키와는 그 입장이 다르다.
 촘스키의 변형생성문법이 언어능력의 보편성을 강조한 것이라면, 하버마스의 의사소통론은 언어수행의 측면도 보편적 근거를 갖는다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하버마스는 촘스키가 언어능력을 생래적으로 결정되어 있다고 상정하는 데 거부감을 느끼고, 일상적인 언어수행에 분석의 초점을 두었다. 이와같이 일상적인 언어수행에 초점을 둔 언어이론은 비트겐슈타인에서도 볼 수 있다. 후기 비트겐슈타인은 언어의 본질은 실재를 묘사하는데 있다고 하는 자신의 전기사상 즉 언어그림이론에 내재된 본질주의를 스스로 비판하고, 언어에 본질이라고 할 수 있는 어떤 공통된 특성은 없고, 오직 일상적 문맥에 따라 언어가 어떤 방식으로 사용되고 있는가를 검토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였다.
 언어현상도 놀이처럼 상호주관적인 어떤 규칙에 따르며, 이러한 규칙에 따름으로써 언어사용자들이 합의에 이를 수 있다고 보았다. 하버마스는 비트겐슈타인의 언어놀이이론을 수용하고, 의사소통행위가 상호주관적인 규칙에 대한 성찰을 내포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일상적인 언어행위에 대한 보다 체계적인 분석은 오스틴과 서얼에서 볼 수 있다. 언어적 의사소통의 기본단위는 언어행위이며, 단어나 문장이 아니라, 말이 기본단위라는 것이다. 그런데 모든 언어행위는 분석적으로 구분할 수 있는 두 가지 요소, 즉 명제적 내용(propositional content)과 비언표적 행위(illocutionary acts)로 구성되어 있다.
 어떤 명제를 P라 할 때, '나는 P라고 주장한다', '나는 P라고 약속한다', '나는 P를 명령한다'와 같은 언어행위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동일한 명제적 내용(P)이 상이한 수행동사(주장한다, 약속한다, 명령한다 등의 동사)와 연결될 때, 비언표적 행위 혹은 지배문장과 명제적 내용 혹은 종속문장으로 구별할 수 있는 두 요소로 구성된다. 지배문장은 언어행위의 비언표적 효력을 결정하고, 동시에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간의 관계 즉 의사소통의 양식을 결정하며, 이는 곧 종속문장(명제적 내용)이 소통되는 실용적 상황을 나타내는 것이다. 종속문장 혹은 명제적 내용은 의사소통내용을 실재세계와 연결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의사소통능력은 문법적으로 타당한 문장을 만들고 이해하는 능력뿐만 아니라, 의사소통양식에 따라 언어를 수행하고 이해할 수 있음은 물론 의사소통되는 내용을 실재세계와 관련지을 수 있는 능력을 포함한다는 것이다. 하버마스의 보편적 실용론은 일상적인 언어행위의 기초라 할 수 있는 의사소통능력에 관한 형식적 특성을 구체화한 것이다. 형식적 특성으로 볼  때, 모든 언어행위는 문법적으로 옳고, 외적 실재, 내적 실재 및 사회의 규범적 실재에 합당하다는 것을 암암리에 전제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버마스에 따르면, 언어행위를 수행함에 있어서 우리는 누구나 암암리에 네 가지 타당성주장을 깔고 있다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보편적 실용론의 핵심은 첫째, 말하는 사람은 자신의 말이 듣는 사람이 이해할 수 있도록 문법적으로 타당하고, 둘째, 말하는 사람은 자신이 말한 것은 외적 실재에 비추어 볼 때 진리이며, 셋째, 말하는 사람은 나타낸 표현이 자신의 내면적 의도를 정직하게 말한 것이며, 넷째, 말하는 사람은 자신이 말한 것은 기존의 사회적 규범에 비추어 볼 때 정당하다는 것을 암암리에 주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위에서 제시한 네 가지 타당성 주장 즉 이해가능성(comprehensibility), 진리성(truth), 진실성(veraciousness) 및 정당성(rightness)은 모든 언어행위에 내재되어 있는 어떤 전제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네 가지 타당성 주장 중에서 이해가능성 주장만 언어에 직접적으로 관련된 것이고, 다른 세 가지 요소는 모두 언어외적실재(extralinguisticd reality)에 관한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갈등과 견해차를 극복하고 의사소통을 가능하게 하기 위해서는 타당성 주장을 정당화할 수 있도록 개방적인 논의와 담론을 존중하여야 하며, 개방적이고 진정한 담론의 규범을 준수하여야 한다.
 
4. 계몽과 모더니티의 과제
 우리가 이미 앞에서 본 것처럼, 후기 자본주의 단계에 이르러 경제영역에 대한 국가권력의 점증하는 개입, 새로운 유형의 과학화된 이데올로기 기능에 의한 계급화해와 그에 따른 계급갈등의 점진적 퇴조, 하이테크혁명에 의하여 잉여가치의 주요원천으로 등장한 과학과 기술의 높여진 위상, 그리고 이에 수반된 생활세계의 황폐화와 새로운 차원의 문화적 물상화 등 일련의 징후로 인하여, 이른바 '역사의 진보'라는 것이,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보기에도, 마르크스가 제시한 역사법칙에 따르지 않는다는 역사적 사실을 거듭 확인하게 되자, 오늘날의 네오마르크스주의자들 중에는 이같이 변화된 현실상황을 해석하는 또하나의 이론적 자원을 마르크스와는 이념적 입장이 다른 베버(Weber)의 사상에서 찾는 경향이 뚜렷하다.
 하버마스가 역사의 진보 혹은 진보적 역사관이라고 하는 것은 구체적으로 18세기 경에 꽁도르세(Condorcet)를 비롯한 계몽주의 철학자들이 형성한 계몽의 과제 혹은 현대의 과제를뜻한다. 베버가 지적한 것처럼, 현대의 특성 즉 모더니티(modernity)는 종교와 형이상학의 중세적인 획일적 세계관의 미몽으로부터 깨어나, 과학과 도덕률 그리고 예술이 각기 자율적영역으로 분화된 데서 비롯되었다. 말하자면 계몽주의적 사조에 의하여 중세의 봉건적 횡포와 종교적 독단이 무너짐과 동시에 중세의 획일적 세계관이 붕괴되면서 과학적 진리, 규범적 정의, 심미적 가치의 영역은 이제 자율적 영역으로 분화되어 각 영역고유의 내적 논리에 따라 독자적으로 제도화되기에 이르렀으니, 베버는 이를 모더니티의 출현으로 보았다.
 과학적 지식의 발전은 인류로 하여금 자연환경을 합리적으로 통제 지배할 수 있게 하고, 도덕과 법 그리고 예술 영역의 자율적 발전은 우리의 사회적 삶을 합리적으로 영위할 수 있게 한다는 점에서 모더니티의 과제(project of modernity)는 곧 인류를 몽매에서 계몽으로 인도하는 계몽의 과제이며, 일찍이 꽁도르세는 이를 '인간정신의 진보'로 요약하였다. 하버마스가 모더니티의 과제라고 하는 것은 18세기 계몽주의 사조에서 비롯된 역사의 진보에 관한 확신과 사회적 삶의 합리적 조직에 대한 확신을 뜻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명백히 구별하여야 할 것은 합리성 개념이다. 합리성이라는 것도 여러 가지 차원의 합리성이 있을 수 있으나, 우선 두 가지 유형의 합리성을 구별하여야 한다. 우리가 설정한 어떤 목적을 달성하는 데 이용할 수 있는 여러 가지 대안적인 수단들 중에서 가장 능률적인 수단을 선택할 수 있는 타산적 이성이라는 의미의 합리성을, 일반적으로 목적합리성이라고 한다. 그러나 우리는 비록 목적달성에 비능률적이라 하더라도, 가능한 한 우리 모두가 동의하고 합의를 이룩하는 데 높은 가치를 부여하는 경우도 있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목적합리성과는 다른 차원의 합리성이기 때문에, 이를 특별히 의사소통적 합리성이라 할 수 있다.
 말하자면, 합리적이라는 것도 착안점에 따라서 목적합리적인 것도 있고 또한 의사소통에 합리적인 것도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하버마스에 따르면, 원래 모더니티의 과제는 목적합리성과 의사소통적 합리성을 모두 포함하고 있다는 것이다. 위에서 설명한 바, 계몽사조에서 비롯된 모더니티의 과제를 보면 하버마스의 주장에 동의할 수 있다. 객관적 과학의 발전으로 자연환경을 통제하고 지배하려는 과제는 목적합리적인 것이요, 도덕과 법 그리고 예술의 자율적 발전으로 사회적 삶을 합리적으로 영위하려고 한 당초의 기획은 의사소통적 합리성을 뜻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마르크스, 베버, 루카치, 호르크하이머, 아도르노, 마르쿠제의 문명비판을 따르면서도, 이들에 대하여 하버마스가 철저한 비판을 제기하는 이유의 하나는 그들이 모두 계몽사조의 후예이면서도, 계몽주의적 과제가 원래 설정했던 두 가지 유형의 합리성 중에서 의사소통적 합리성은 망각해 버리고, 계몽의 과제 즉 모더니티의 과제를 목적합리성 그 자체인양 착각하게 되었고, 결과적으로 계몽주의적 과제가 완전히 낭패가 난 것처럼 허무주의적 결론을 내렸다는 데 있다.
 다소 현학적이고 난해한 하버마스의 글을 저자가 쉽게 푸는 과정에서 하버마스의 사상의 심오함을 단순화하고 왜곡하였을 가능성도 없지 않으나, 『의사소통행위론』(The Theory of Communicative Action, Vol. I.) 143페이지부터 두서너 장을 보면 이에 대한 자세한 논의를 접할 수 있다. 요컨대, 베버가 합리화라고 하는 것, 호르크하이머 등 프랑크푸르트학파가 도구적 이성, 도구적 합리성이라고 하는 것은 모두 목적합리성이며, 이들이 계몽주의적 이성의 전면적 몰락을 선언한 것도 계몽의 과제 즉 모더니티의 과제 중 한 측면만을 보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하버마스도 계몽의 역기능을 인정하고 이에 대한 다각적인 비판을 제기하였으나, 그는 모더니티를 전향적 발전으로 보는 모더니티의 대변자이다.
 앞에서 지적한 것처럼, 하버마스는 서구사회의 근대화(modernization)를 베버와 같이 합리화(rationalization) 과정으로 규정하였다. 그러나 그는 근대화 과정을 도구적 합리성이 지배하는 자율적 하위체계의 분화로 보는 베버, 이를 물상화로 개념화한 루카치 및 이성 그 자체를 도구적 이성으로 본 제1세대 비판이론가들의 합리성 개념을 비판적으로 극복한 것이다.
 루카치는 『역사와 계급의식』에서 상품의 물신숭배가 경제영역뿐만 아니라 사회적 사람의 모든 영역에 폭넓게 침투함으로써 지본주의적 경제원리가 인간관계까지도 사물의 관계로 타락시킨 것을 지적하면서, 서구의 합리화과정을 물상화로 개념화하였고, 역사발전의 주체요 동시에 객체인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의식에 의해서 물상화를 극복할 수 있다고 하였다.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는 루카치의 물상화개념을 수용하면서도, 이를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이라는 특정의 역사적 맥락에 국한하지 않고,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를 가릴 것 없이 점증하는 도구적 이성이 수반한 필여적 귀결이라 봄으로써 물상화개념을 철학적으로 한층 더 정교화하였다. 
 루카치의 관점은 현대사회의 인간소외를 단순한 경제영역뿐만 아니라, 사회적 삶의 모든 영역으로 일반화시켰다는 점에서 이른바 정통 마르크스주의의 편협한 인식을 극복할 수 있게 하였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급갈등이 계급화해로 대치된 선진사회의 변화된 상황하에서는 더 이상 설득력이 없는 진부한 관점이라 아니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차원에서 보면, 호르크하이머, 아도르노, 마르쿠제 등 제1세대 비판이론가들이 물상화 개념을 체제 초월적으로 일반화하고 철학적 수준에서 대상세계를 정복하고 지배하려는 도구적 합리성 개념으로 발전시킨 것은 루카치를 능가하는 통찰력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의 결론은 인간의 합리성 혹은 이성 그 자체를 도구적 이성과 동일시함으로써, 이성의 이름으로 사회를 비판하는 비판이론 그 자체를 막다른 골목으로 몰고 간 역설적 결론이며 따라서 극복되기 어려운 회의론에 빠진 것이다.
 하버마스의 의사소통행위론은 바로 이와 같은 딜레마로부터 탈피하기 위하여 제기되었고, 이를 위하여 그는 의식철학(philosophy of consciousness)으로부터 언어철학(linguistic philosophy)으로의 파라다임 전환을 강조하고, 인간이성의 인지적이고 도구적인 측면을 보다 포괄적인 의사소통적 합리성의 일부로 여기는 새로운 시각을 제시하였다.
 그래서 탐구의 초점은 인지적 도구적 합리성으로부터 의사소통적 합리성(communicative rationality)으로 옮겨진다. 의사소통적 합리성의 파라다임에서는 객관세계의 어떤 것과 단독적인 주체간의 관계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바로 그 어떤 것을 이해하는 과정에서 이룩되는 상호주관적 관계가 중요하다.
 데카르트 이래의 인식론적 유아론(solipsism)에서는 객관세계에 대한 어떤 규정은 사유하는 인식주체 혹은 단독적 주체의 사유활동을 통해서 이루어진다고 보았다. 그러나 하버마스는 데카르트적 관점을 거부하고 헤겔적 관점에서 인간의 인식작용을 이해하고 있다. 즉, 우리는 우리의 주체 혹은 자아를 의식할 수 있기 위해서는 우선 타자의 존재를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가령, 어떤 과학적 지식도 과학자 개인의 단독적 성찰에 의해서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특정 개인의 인식주관 그 자체도 다른 과학도들과의 관계를 통해서만 형성되는 것이므로, 과학자 공동체의 상호주관적 합의를 전제로 한다.
 사회는 독자적으로 유리된 원자적 개인들의 집합체가 아니라, 대화적으로 구성되고 상호일체를 지향하는 공통체로 인식되어야 한다. 이렇게 볼 때, 과학자가 객관적 자연에 관한 단순한 지식만을 생산하는 데 만족할 수 없고, 과학적 지식의 사회적 및 인간적 함의에 대한 자유롭고 개방적인 토론을 거쳐야 하며,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과학이 인간해방에 기여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버마스가 생산성 제고나 행정의 능률화가 중요시되는 경제와 행정 같은 하위체계에 통용되는 인지적 도구적 합리성뿐만 아니라, 대화적으로 구성되는 의사소통적 삶의 영역에 필수적인 윤리적 정치적 합리성 및 심미적 실천적 합리성도 중요시되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따라서 하버마스가 현대의 특성(modernity)를 합리화과정으로 규정할 때, 그가 합리성이라고 지칭하는 것은 목적합리성과 의사소통적 합리성을 포괄하는 넓은 의미의 합리성이며, 특히 전자를 후자의 일부로 내포하는 포괄적 개념의 합리성을 뜻한다. 과학과 기술발전이 경제성장에 기여함과 동시에 생태계를 파괴하여 궁극적으로는 인류존재의 종말을 실감케 하며, 테크노크라시가 행정의 능률성에 기여하는 것 못지 않게 개인의 자율성을 침해하고, 진정한 언로를 차단하며, 그래서 민주적 가치를 훼손할 뿐만 아니라, 공장자동화, 사무자동화, 가정생활의 자동화 등 각종 편의의 증대와 함께 문명의 이기가 확대됨과 동시에 시민의 모든 사적 삶이 치밀한 분석과 감시를 피할 수 없는 원형감옥(panopticon)에 속박되는 문명의 병리로 인하여 삶의 세계가 황폐화되는 추세를 극복하기 위하여 하버마스는 의사소통적 합리성을 강조한 것이다. 이와같이 정립된 합리성 개념 혹은 의사소통적 행위론은 하버마스에게 여러 가지 새로운 돌파구를 제공하게 되었다.
 첫째, 일상적인 언어수행의 과정에서 우리가 타당성 주장을 수용하고 있다고 하는 보편적 실용론이 강조한 것처럼, 일상적인 대화에까지 강력한 합리성 개념을 부여함으로써, 하버마스는 제1세대 비판이론의 회이론을 극복할 수 있게 되었다. 호르크하이머, 아도르노 및 마르쿠제는 지식이나 가치의 어떤 궁극적 토대가 있다는 데 대하여 극히 회의적이었고, 이 점에 있어서 상대주의적 입장을 견지하였으나, 하버마스는 의식철학에서 언어철학으로 전회함으로써 언어행위에 내재된 타당성 기초는 부인할 수 없는 보편적 전제이며, 이런 의미에서 선험적 전제(transcendental presupposition)라는 것이다. 따라서 보편적 실용론 혹은 의사소통적 합리성은 사회이론의 보편적 기초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둘째, 하버마스의 새로운 합리성 개념은 정치의 과학화를 극복할 수 있는 규범적 방안을 제시하고 있다. 앞서 지적한 바와 같이, 후기 자본주의사회에 있어서는 갈등과 위기의 중심부가 경제영역이 아니라 정치영역이다. 오늘날의 정치적 결정은 윤리적 과제라기 보다는 과학적 과제로 인식되기에 이르렀고, 따라서 기술적 이성의 도구적 논리에 따르기 때문에 정치의 과학화를 초래하였다. 하버마스는 의사소통적 언어의 메카니즘에 내재된 자유와 화해의 규범을 준수할 때, 비로소 우리는 정의로운 사회를 이룩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이를 위하여 정치적 의사결정과정에 시민들의 폭넓은 참여를 촉구하고, 합리적이고 자유로운 논의를통해서 의사결정과정을 민주화함으로써 갈등과 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셋째, 그는 목적합리성까지 내포하는 포괄적인 합리성 개념을 상정함으로써, 편협하고 단편적인 합리성 개념에 의존한 나머지 회의주의적 결론을 내렸던 베버, 호르크하이머 및 아도르노 등의 딜레마를 극복할 수 있었다. 베버와 제1세대 비판이론가들은 모더니티를 도구적 합리성과 동일시함으로써 모더니티의 잠재적 가능성을 전면적으로 부정하였으나, 하버마스는 계몽주의적 이성의 병리현상 혹은 합리화의 역설은 우리가 합리성을 포괄적 개념으로 볼 때, 합리성이 과다해서라기보다는 합리적 정신이 덜 발달한 데서 기인된 현상이며, 따라서 모더니티의 병리는 계몽주의적 이성을 전면적으로 거부하기보다는 한층 더 계몽된 이성에 의해서 극복될 수 있다고 보았다. 

출처 블로그 > 가우리블로그정보센터(GBC)
원본 http://blog.naver.com/uuuau/40008422226
제3강: 인간성 상실과 소외의 심화
우리는 어떻게 소외와 불안, 고독에서 벗어날 것인가:
프랑크푸르트철학 對 三空과 緣起


당신은 왜 사무치는 고독에 몸부림을 칩니까?

우리의 삶은 왜 늘 고독하고 불안한가? 독거노인처럼 가난하고 헐벗고 아무도 돌보는 이 없는 사람만이 아니다. 돈을 주체하지 못하는 사람들, 한 번 뜨면 수십만 대중들이 환호를 보내는 스타조차 언뜻 돌아보면 혼자이다. 당신은 왜 혼자입니까? 다른 이들을 위하여 그리 많은 일을 하였고 재산도 넉넉하며 당신을 사랑한다고, 존경한다며 따르는 사람들도 주위에 많은데 이 밤 당신은 왜 뼈에 사무치는 고독에 몸부림을 칩니까?
당신은 왜 주위 사람으로부터 사람 대접을 받지 못합니까? 덜 먹고 덜 입으며 그리 베풀었는데도 그들은 왜 은혜를 원수로 갚습니까? 당신이 높은 자리에 있을 때는 쓸개까지 내줄 것 같았던 이들이 왜 지금은 당신을 애써 외면합니까, 그들이 숭배한 것은 당신이 아니라 당신의 자리란 말입니까? 직장처럼 약육강식하는 장은 그렇다 치고 당신이 가장 사랑하는 당신의 자녀마저 왜 당신을 무시합니까?
카프카의 <<변신>>이란 작품이 있다. 평범한 샐러리맨 그레고르 잠자는 잠을 자다 어느 날 갑자기 벌레로 변한다. 그러자 그가 가장 사랑하였고 그를 사랑하였던 가족들은 그를 징그러워하고 혐오스러워 한다. 그가 그토록 사랑하였던 누이마저. 그는 끝없는 소외와 고독 속에서 죽어간다. 마침내 그가 죽자 가족들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소풍을 떠난다.
사람이 벌레로 변하는 일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런 입장에서 보면 이는 현실성이 없는 소설이다. 그러나 이 소설만큼 우리 사회가 얼마나 인간을 소외시키고 있는 가에 대하여 극명하게 보여준 작품도 드물다. 우리 모두는 벌레가 아닌가? 벌레 같은 존재이면서도 위엄이 있는 인간이라고, 모두에게 사랑 받고, 인정받고 있다고 착각하는 것은 아닌가? 잠자가 죽었을 때 오히려 가족들이 피크닉을 떠난 것처럼 내가 죽었을 때 내 주변의 사람들은 그리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 살아가지 않겠는가, 나 또한 다른 이들에게 아무 의미도 갖지 못하는 존재인 것은 아닌가?

소외란 따돌림이 아니다

널리 보면 요새 유행하는 따돌림, 왕따도 소외의 일종이다. 무슨 일인가 같이 하고 싶은데 “넌 빠져.”라는 소리를 들었을 때, 다들 정장을 입고 왔는데 나만 허름한 차림으로 모임에 나타났을 때, 모두들 잘 하고 있는데 나만 못하여 그것을 지켜보는 대상으로 머물 때 우리는 소외를 느낀다. 그러나 소외는 따돌림 이상의 것이다. 20세기에 와서 왜 사람들은 서로를 소외시키고 자기 스스로도 소외되어 끝없는 고독과 상실감에 몸부림을 치고 때로는 소외를 못 이겨 히틀러의 파시즘 같은 것에 열광하는가?
프랑크푸르트 철학자들은 이에 대해 깊이 있게 연구하였다. 따돌림이란 인간 집단이 형성되면서부터 생긴 것이라면, 소외는 엄격히 말하여 자본주의 체제가 등장하여 고도 산업사회로 발전하면서 보편화한 것이다. 호르크하이머, 아도르노, 마르쿠제, 하버마스 등은 20세기 고도 산업사회 속의 인간 문제를 탐구하기 위하여 마르크스와 프로이트, 현상학과 헤겔을 종합한 독특한 사회철학을 폈으니 그를 일러 프랑크푸르트 철학, 또는 비판철학이라 명명한다. 이들은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비판으로 마르크스, 6백만을 학살하는 히틀러에게 환호를 보낸 독일 국민처럼 비합리적으로 행동하는 대중들의 무의식을 분석하는 도구로 프로이트를, 사회현상을 하나의 텍스트로 놓고 실증주의를 넘어 주체의 자유의지에 따라 분석하는 틀로는 현상학을 종합하여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그들은 비판에 머물지 않고 이런 상황에서 인간주체가 갖추어야 할 이성의 지표는 헤겔에게서 끌어왔다.
이들이 볼 때 자본주의 체제는 사용가치를 교환가치로 뒤집어버린 사회이다. 이것이 무슨 소리인가? 나는 십 년이 넘게 쓴 만년필을 한 자루 가지고 있다. 이제 펜촉이 닳고닳아 글씨는 쓰는 족족 번지고 뚜껑은 너덜너덜해져 쓸 때마다 소음을 낸다. 남들은 이제 버리라고 하지만 이 펜에는 버릴 수 없는 역사가 스미어 있다. 나는 이 펜으로 편지를 써서 한 여인의 마음을 사 그를 아내로 삼고 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좌절해 있는 후배에게 다시 일어설 용기를 주기도 하였다. 그러기에 나에게 이 펜은 지구상에 존재하는 어떤 고급 만년필보다도 소중하다. 이것을 다른 물질, 특히 화폐와 교환하여 얻는 가치는 단돈 몇 십 원에 불과하지만 나는 수십 만원에 달하는 고급 만년필과 이것을 바꾸지 않는다.
그러나 이것은 내 만년필에나 해당할 뿐, 다른 영역에서는 그렇지 않다. 이것을 들고 백화점에 가서 이것과 몇백 원 짜리 볼펜 몇 자루와 바꾸어 가겠다고 하면 점원은 나를 미친 놈으로 알 것이다. 그는 만년필에 담긴 역사를 모른다. 그 만년필이 잉크만 주입하면 아직 얼마나 많은 글을 쓸 수 있고 이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감동시킬 수 있는 지 잘 알지 못한다. 그에겐 사용가치는 보이지 않고 오로지 교환가치만 따져지는 것이다. 이처럼 자본주의 사회는 교환가치가 지배하는 사회, 교환가치가 사용가치보다 우월한 사회다.
교환가치와 사용가치가 전도된 사회에 나타나는 보편적 현상이 물화(物化, reification)다. 자본주의 사회는 교환가치를 우선시하여 모든 것을 물질로, 돈으로 대체하여 바라보기에 사람들의 관계가 사물의 성격을 지닌다. 노동은 진정한 자기를 실현하는 것도, 자기 앞의 세계를 변화시키는 인간 주체의 실천 행위도 아니다. 돈 버는 수단일 뿐이다. 그저 돈을 벌기 위하여, 돈을 벌어 더 많은 물질을 구하기 위하여 자신의 육체를 소진하고 마음에 없는 아부를 하기도 하고 남을 곤경에 빠트리기도 한다. 인간 주체가 노동을 기획하고 다른 이들과 토론을 하고 협동을 하며 생산을 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기계의 한 부속품이 되어 아무 생각 없이 기계적인 일을 반복할 뿐이다.
스무 너댓 살까지는 좀더 많은 돈을 벌 능력을 키우고 자격을 갖추기 위하여 인생의 황금기를 코피를 흘리며 밤을 새워 공부하는 것으로 보내고, 그리 하여 학벌을 따면 그 간판으로 좀더 많은 연봉과 더 높은 자리를 얻기 위하여 모든 것을 던지고 모든 수단을 동원한다. 그러다 몇몇은 그리 빨리 달려온 탓에 병을 얻어 도중 하차하고 남은 자들은 종착역까지 달려가지만 그때서야 그렇게 얻은 것이 아무 것도 아님을 깨닫는다. 온통 물화한 삶의 연속이다.
물화한 개인은 자기 주변의 모든 것을 물질의 눈으로, 상품관계로 바라본다. 그래서 우리 집에 대해 묻는 이들에게 우리 집 창으로 아름다운 관악산 능선이 보이고 뒤뜰에는 과꽃이 흐드러졌다고 하면 그들은 잘 알아듣지 못한다. 평당 얼마짜리 아파트의 몇 평 아파트라 해야 금세 이해한다.
온갖 삶들이 이렇듯 물화되어 있으니 우리는 서로를 소외시킨다. 배우자를 고를 때조차 그 사람의 교환가치를 따진다. 돈이나 권력이 있는 가문이냐, 그렇지 않으냐, 몇 평의 아파트와 몇 개의 열쇠를 가지고 오느냐, 연봉은 얼마인가가 중요한 척도이다. 좀더 약은 사람이라면 지금은 가난하더라도 미래의 가치, 학벌은 어떠며 머리는 좋은 지, 성실성은 있는 지 따진다. 인품은 그 다음이다. 더 심한 경우는 자신의 아내가 결혼 때 가져온 지참금이 작다고 폭행을 하고 이혼을 해 버린다. 결혼해서 해로하는 부부라고 예외는 아니다. 사랑은 이미 식어버리고 “그냥 산다고”들 말한다. 아내는 남편을 돈 벌어 오는 기계로, 남편은 아내를 살림하는 가정부쯤으로 생각한다. 남편은 승진과 출세라는 목표를 이루기 위하여 가정을 유지하고 아내는 홀로는 부양 능력이 없어서, 아님 애써서 자식들의 성공에 자신의 삶의 목표를 맞추고 가족을 끌어안는다. IMF 때 직장에서 잘렸다고 가장 따스하게 보듬어줄 줄 알았던 아내가 이혼하자고 제안했을 때 그는 과연 어디에서 삶의 의미를 찾을까?
가장 믿고 의지해야 하는 부부관계가 이런데 다른 인간관계야 어떻겠는가? 가족이든, 친구든, 동료든 서로 경쟁의 대상일 뿐이다. 나 스스로가 인간성을 상실하였으며 타인 또한 인간으로 대하지 않는다. 현실은 카프카의 <<변신>>보다도 비극적이다. 거기선 그래도 죽이지는 않고 죽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이제 사람들은 몇 푼돈을 얻기 위하여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 부모나 자식, 아내나 남편, 친구들을 살해하기도 한다. 우리는 나를 가장 이해하고 사랑하는 사람이 몇몇 물질을 얻고자 나를 죽일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현대인들은 물질적 풍요에 있으면서도 모두가 고독하고 항상 불안하다.
현대인을 병들게 하는 소외가 더 있다. 동일화의 소외. 현대인들은 매스미디어가 던지는 환상에 젖어 주체를 상실하고 자신을 그들 환상과 동일화한다. 서민 주부들은 연속극의 스타들에 자신을 동일화하여 그들과 같이 울고 웃는다. 그러는 가운데 드라마 속의 가난한 여주인공이 갖은 고생 끝에 재벌 2세와 결혼하여 고급 차 타고 특급 호텔에서 감미로운 클래식을 들으며 캐비어를 먹으면 자신이 주인공이 된 것으로 착각한다. 그러는 사이에 서민 주부가 가졌던 불만과 갈등은 사라진다. 동일화의 소외가 기존체제를 유지시키는 기제로 작용하는 것이다.
자기로부터, 정확히 말하여 자기 동일성으로부터 소외되는 것 또한 문제이다. 어떤 행동을 한 후 그런 자기 자신이 굉장히 낯선 경험을 한 적이 있는가? 행정고시에 합격하였다는 소식을 듣는 그 순간 “야, 이제 고급 공무원이 되었으니 무지막지하게 뇌물을 받아 부귀영화를 누리고 그것을 상납도 하여 출세 좀 해야겠다.”라고 맹세한 사람이 있을까? 촌지를 받지 않는 선생이 없다고 한국 사회가 온통 난리를 칠 때 필자는 사범대 졸업반을 가르치고 있었다. 그들 가운데 단 한 명도 그럴 눈빛을 가진 학생은 없었다. 거의 대부분 선생을 천직으로 생각하는 이들이었고 그렇지 않은 학생들도 그 또래 대학생에 비하여 유달리 선한 눈을 가진 아이들이었다. 그런데 왜 청렴한 공무원이, 올곧은 선생님이 몇 년 지나지 않아 타락할까?
타락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다. 그들이 남보다 더 돈을 좋아하여 뇌물을 받는 것도, 남보다 더 악해서 촌지를 가져오지 않는다고 제자들을 괴롭히는 것은 아니다. 한 마디로 착한 사람을 병들게 하는 구조 때문이다. 언론계나 교육계로 진출한 내 제자들 가운데 몇몇이 그런 질문을 던졌다. “선생님, 촌지 받지 않고 버티는 방법 좀 알려 주세요.” 그 중 한 학생은 촌지를 받지 않고 버텨서 심한 왕따를 당하고 있고 정신병이 걸릴 지경이라고 하였다. 동료들과 술이라도 한 잔 걸칠라 치면 “김선생, 이거 더러운 돈으로 술 먹으러 가는데 깨끗한 양반이 왜 끼십니까?”하더란다. 그 선생이 동료들과의 유대를 위하여 촌지를 받는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 선생은 그 순간 자기로부터 소외당한다. 자기가 아는 자기는 청렴하고 학생들을 자식처럼 아끼는 선생인데 촌지를 받는 나는 그런 나와는 동떨어진 모습이다. 내가 여태까지 아무리 가난하여도, 여러 사람들이 손가락질을 하여도 나 자신은 청렴한 공무원이라는 자부심 하나로 버텨왔는데 그렇게 버티고 버티다 외부의 압력에 못 이겨 뇌물을 받은 자기 모습을 발견하였을 때 그는 얼마나 충격에 휩싸였을까? 얼마나 자기 자신으로부터 낯선 기분을 느꼈을까?
더 무서운 것은 이 소외감도 차츰 면역이 되어 버리고 기존 질서에 동화되어 버린다는 점이다. 처음엔 갈등도 하고 심한 소외감을 느끼겠지만 그는 곧 그를 느끼지도 못한다. 기자가 된 몇몇 제자들은 촌지를 받지 않으면 취재가 되지도 않고 동료들과 불화도 심하여 결국 촌지를 받기로, 대신 동기인 누구에게 곧바로 보내 가난하고 소외받는 이들을 돕는데 쓰기로 하였다고 한다. 참 아름다운 결정이기도 하고 고육지책이기도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은 절대 동화되지 않을 것이란 확신이 서면서도 과연 이들이 언제까지 그런 절충안으로 부조리한 세상에 맞설 수 있는지 적이 걱정되었다. 그들이 세상에 결국 져선 촌지를 받고, 졸업하면서 꿈꾸었던 올곧은 기자상과 거리를 확인하고는 곧 그 충격에서 벗어나 그도 또한 물화한 인간이 되어 모든 이들을 물적 관계로 대하며 기존질서에 편입되는 날이 언제일까, 그리 사람을 잡아먹는 거대한 공룡, 자본주의 체제의 미래에 대해서 곰곰 생각해 보았다. 그러기에 마르쿠제는 이 체제가 인간을 더 철저하게 억압하는 전체주의로 갈 것이라고 단언한다.

1차원적 인간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이에 대해 어떤 대안이 있을까?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철학자 중 한 사람인 마르쿠제는 ‘일차원적 인간’에 대해 언급한다. 그래도 20세기 초반에는 노동자들이 나서서 인간다운 사회를 펼쳐보자고 일어섰다. 지구의 한 편에서는 그들이 주인이 되는 세상을 열었다. 그러나 왜 사회주의에서조차 인간은 소외되어 있는가?
일요일 날 흔들의자에 앉아 캔 맥주를 마시며 메이저리그 야구를 시청하고 있는 미국의 노동자를 상상해보자. 그는 일상의 안락함에 젖어 행복감을 느낀다. 자신을 행복하다고 생각하니 불만과 갈등은 없다. 그러나 불만과 갈등이 없으니 노동자로서의 의식, 즉 계급의식 또한 없다. ‘사이비 행복의식’이 그의 계급의식과 반역을 향한 동경을 앗아갔다. 텔레비전이 만들어주는 환상에 마취되어 그에 따라 울고 웃는 愚衆만 있다. 엄청나게 먹어대고 그로 인한 비만을 줄이기 위하여 우리나라에서만 1년에 2조원의 천문학적 비용을 다이어트로 낭비하는 것에서 잘 드러나듯, 광고 이미지에 속아 변혁을 향한 욕망은 억압당하고 헛된 욕망만 부풀려 과잉소비를 행하고 있는 육체만 있다. 이것이 1차원적 인간의 참모습이다. 현재에 만족하기에, 계급의식을 잃어버리고 그 자리를 허위의식으로 채웠기에, 주체는 사라지고 맹목적인 자아만 남았기에, 이성 대신 국가와 자본과 대중문화가 조장하는 감성과 욕망에 따라 행동하기에 일차원적 인간은 사회를 비판적으로 바라보지도 못하며 사회의 변화를 바라지 않는다. 오늘의 행복과 향락만 유지되면 그 뿐, 사회의 변화나 도덕의 달성은 쓸데없는 일이다.
그럼 대안은 없을까? 마르쿠제는, 물화와 소외를 확대 재생산하고 있는 자본주의 체제를 뒤엎지 않는 한, 이미 계몽의 힘을 상실하고 이데올로기가 되어버린 과학기술에 덜 조작 당하고 산업사회와 대중문화의 도구적 합리화에 아직 덜 길들어져 1차원적 인간으로 전락하지 않은 국외자와 학생들이 혁명의 불길을 활활 타오르게 하지 않는 한 그 어떤 것도 미봉책이라고 생각하였다. 실제로 6, 70년대에 프랑스를 필두로 하여 세계 곳곳에서 마르쿠제 등의 비판에 고무된 학생들이 일어났다. 고도 산업사회의 모순이 첨예화한 서양 사회는 물론 일본과 멕시코에서도 소외를 강화하고 있는 자본주의 체제와 억압을 강화하고 있는 기존체제의 모든 구조를 뒤엎고자 하였다.
68혁명은 막을 내렸으나 사회 전반에 대해 혁신을 가져왔다. 노동자를 억압하고 소외시키던 포디즘에 메스가 가해지고 노동자의 참여와 자치가 속속 보장되었다. 학교와 언론 등 사회 모든 부문에서 억압적이고 관료적인 양식이 무너지고 수평적이고 평등적이며 민주적인 소통양식이 자리잡게 되었다. 억압된 성이 해방되고 여성의 지위가 상승되었다. 기존의 가치체계, 상상력을 뒤엎고 새로운 가치와 상상력을 펴나갔다. 이는 페미니즘, 녹색운동, 노동자의 자치운동으로 확산되었다. 그러나 문화운동만으로는 모든 것을 이룰 수 없다. 청년들의 낭만적인 운동은 자본가에 저항하는 노동운동으로 전화하지 못하였다. 청년 학생들의 급진적인 부정의 상상력은 계급에 뿌리를 내리지 못하였다. 결국 이에 대한 반혁명이라 할 신자유주의가 나타나 68혁명이 이루었던 성과들을 집어삼키며 전 세계에 걸쳐 억압과 소외를 더욱 심화하고 있다. 그럼 원효의 사상에 소외를 극복하는 대안이 있을까?

공해진 그 공도 또한 공이다

“三空이란 空相도 또한 空이요, 空空도 또한 공이요, 所空도 또한 공이라는 것이다. 이런 공은 3상에 머무르지 않는다. 그러나 진실이 없는 것이 아니니, 글과 말의 길이 끊어져 불가사의한 것이니라. ‘공상도 또한 공이다’고 한 것은 공상이 바로 俗諦를 버리고 眞諦의 평등한 상을 나타낸 것이요, ‘또한 공했다’란 곧 진제를 녹여 속제를 만든 것이다. ‘공공’이란 순금을 녹여 장엄구를 만드는 것과 같은 것이니, 열반경의 말과 같다. 즉 있다고 하고 없다고 하는 이것을 ‘공공’이라 하며 ‘이것은 옳고 그르다’고 하는 이것을 ‘공공’이라 한다 하였으니, 이것은 속제의 有無와 是非의 차별의 상을 밝힌 것이다. 이 ‘공공’의 뜻은 평등에서 공한 것이니, 이 공은 속제의 차별을 나타내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차별의 ‘공공’이라 하는 것이다. ‘공공도 또한 공이다’라고 한 ‘공공’은 곧 속제의 차별이며, ‘또한 공이다’한 것은 이 속제를 녹여 진제로 만든 것이니, 이것은 장엄구를 녹여 다시 금병으로 환원시키는 것과 같다. 셋째 ‘소공도 공하다’라고 것은, 처음 공 가운데의 공이 나타낸 속제와 둘째 공 가운데의 공이 나타낸 진제의 이 두 가지가 다름이 없기 때문에 ‘또한 공한 것이다’라고 한 것이다. 이것은 二諦를 융합하여 일법계를 드러낸 것이니 일법계라는 것은 이른바 일심이다.”(<<金剛三昧經論>>, <入實際品>)

하늘에 반달이 떴다. 스승은 그것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반달이라고 대답하자 스승은 일갈한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햇빛을 받지 않아 보이지만 않을 뿐 반달의 어두운 부분도 존재하는 것은 분명한데 햇빛에 반사되는 부분만 보고 반달이라 할 수 있느냐고.
그토록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것만 본다. 그러나 눈에 보이는 것은 허상이다. 반달의 밝은 부분은 어두운 부분과 관계를 통하여 드러난다. 어두운 부분 없이 밝은 부분 스스로는 공하다.[關係性] 어두운 부분을 의지하여 밝은 부분이 드러난 것을 보고 반달이라 한다. 어두운 부분을 의지하지 않고는 반달은 드러나지 못하니 공하다.[相依性] 지구를 따라 돈다는, 태양 빛에 반사된다는, 더 멀리로는 이 우주가 생긴 인연이 있었기에 달은 지금 반달로 있는 것이다.[因果性] 또 달은 스스로는 무엇이라 할 수 없다. 지구가 있기에 달은 존재한다. 지금이라도 지구가 사라진다면 달은 주위에 중력이 강한 어느 별엔가 이끌려 그리로 가게 된다. 달은 또 스스로 의미를 갖는 것이 아니다. 달을 달이라 말할 수 있는 것은 달 때문이 아니라 태양이나 지구와 대비해서 그렇게 말하는 것이다. 태양이 있기에 태양이 왕이라면 달은 왕비가 되고, 태양이 광명의 세계를 뜻하면 달은 어두움의 세계를 의미한다. 달 스스로 아무런 본질도 존재의 실재도 나타낼 수 없으니 공하다.[無自性] 달은 또 그대로 지속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차고 기울며 오늘 하루의 반달도 머무르지 못하고 끊임없이 변한다.[無常] 또 달은 달 스스로 달인 것이 아니다. 우리 마음 속에서 투사한 것이자 인간이 자기 마음대로 삼라만상을 갈라 그리 부른 것이다. 그러니 달은 카르마의 총합일 뿐이다. 그러니 모든 것이 공하다.[畢竟空]
인도우화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장님에게 어떻게 흰 색을 알려 줄 것인가? 그것을 알려 주기 위하여 눈과 종이와 흰 털을 가진 토끼를 가져갔다. 그러나 장님은 그것으로 흰 색을 알 수 없다. 장님은 눈의 차가움과 만진 후의 축축함, 종이의 평평함, 토끼 털의 복슬복슬함을 느꼈을 뿐이다. 우리 모두 장님과 같다. 공(흰색)은 알 지 못한다. 다만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존재의 경계(눈, 종이, 토끼)에 휩싸여 그것들의 현상(차가움, 평평함, 복슬복슬함)을 그것으로 아는 것이다.
다음 날 달이 다시 떴다. 스승은 다시 물었다. 저 달이 무엇이냐고? 어제 반달이라 하였다가 혼난 제자는 대답하였다. 온달이라고. 스승은 그런 제자에게 일갈을 한다. “예끼! 너는 왜 반달로 보이는 것을 온달이라 거짓말을 하는가?”라고. 반달은 반달이다. 반달은 스스로는 무엇이라 말할 수 없고 존재하지 않기에 공하나, 어두운 부분을 통하여 밝은 부분이 드러나고 밝은 부분이 있어 어두운 부분이 나타난다. 처음에 반달이라 말한 것이 속된 인식에서 반달이라 한 것이라면 나중에 반달이라 한 것은 평등공조차 공하다는 인식에서 비롯된 반달이다. 현상계의 차별적인 모습을 부정하여 반달을 부정하는 것이 空相이라면 차별이 없이 평등한 세계를 부정하여 반달이라 하는 것은 空空이다. 삼공의 눈으로 보면 다시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
우리는 무엇을 일러 반달이라 하는가? 정확히 50%만 햇빛에 반사되어 환한 달이 존재하는가? 반달은 0%인 달과 100%인 달 사이에서 움직이니 반달은 반달인 동시에 반달이 아니다. 처음의 반달이건 나중의 반달이건 우리의 인식 속에서 그리 생각한 것인데 우리의 인식 자체가 공이다. 달이 ‘지구의 위성’이란 것을 부정하면, 달이 높이 떠서 산과 들을 가리지 않고 비추니 귀족과 서민을 가리지 않고 자비의 빛을 뿌리는 관음보살임이 드러난다. 다시 이를 부정하면 달빛 아래 모든 차별이 사라지고 하나를 이루니 달은 만다라이며, 달의 빛은 서로를 헤살 놓지 않고 무수한 빛들이 서로를 비추고 있으니 화엄이다. 그리고 이 모두 마음 속에서 빚어진 것이며 말로 드러낸 바다. 그러니 一心으로 보면 空相도 空하고 空空도 空하다. 空相은 차별상을 떠난 것이므로 眞諦다. 공공은 평등상을 부정한 것이므로 俗諦다. 공상과 공공은 모두 반달이라 했지만 그 내용은 다르다. 이렇듯 所空에서 보면 공은 같지도 다르지도 않으며 眞도 아니고 俗도 아니다. 둘은 하나도 아니고 둘도 아니다.

박테리아 한 마리도 지구 대기의 균형에 관여한다

공은 부정의 사유가 아니다. 이중부정을 통하여 긍정하는 사유이며, 이것이 공이라 하면 저것이 드러나고 저것이 공이라 하여 이것을 드러내는 사유이다. 自性에서 벗어나 우리 앞의 세계를 서로 서로 연기가 된 것으로 파악하는 것이며, 나타나는 것과 감추는 것을 동시에 보려는 총체성의 철학이다.
1991년 미국은 애리조나주 오라클에 유리로 밀폐시킨 가상지구 바이오스피어2(Biosphere Ⅱ)를 14만 평방피트에 달하는 너른 땅에 지었다. 흙과 물, 공기, 들과 언덕을 갖추고 동, 식물 또한 살게 하였다. 빛만 빼놓고는, 산소도 바람도, 꽃가루받이도 모두 자체적으로 이루어지게 하였다. 8명의 사람들이 이 작은 지구에 들어가 외부와 완전히 고립된 채 농사를 지으며 생활하였다. 그러나 18개월만에 바이오스피어2는 치명적인 불균형 상태를 보이기 시작했다. 산소 농도가 처음 21%에서 14%로 떨어져 사람들이 정상적으로 활동할 수가 없었다. 대신 가상지구에 충만하게 된 이산화탄소와 질소로 인해 잡초만이 통제할 수 없을 정도로 자랐다. 바퀴벌레와 개미 같은 몇몇 곤충들만 번창하게 되었고, 25종의 작은 동물들 가운데 19종이 전멸하고 말았다. 식물의 꽃가루받이를 대신해 주던 곤충들이 죽자 식물들도 번식할 수 없게 되었다.
원인은 무엇이었을까? 여러 모로 조사가 이루어졌다. 건물의 콘크리트 벽이 산소를 흡수하고는 방출하지 않았고 농사용 토양에 함유된 박테리아가 산소를 많이 소비하는 통에 산소농도가 떨어졌기 때문이다. 현미경으로나 보이는 하찮은 박테리아가 대기의 균형에 영향을 미치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 앞에 떠다니는 미세한 먼지보다 작은 박테리아 한 마리도 다른 모든 생명의 균형에 관여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세계가 인연의 비늘로 철저히 겹쳐있는데 홀로 존재한다 할 수도 없거니와 홀로 무엇이라 내세울 수도 없으며, 홀로 삶을 영위할 수는 더 더욱 없는 것이다. 나는 없다. 그러나 네가 있어서 나는 있다. 우리는 홀로 남겨진 존재가 아니다. 인연의 사슬이 깊어 수천억년 가운데 같은 시대에 수조개의 별 가운데 같은 별에 살아가는 것이다. 그들이 있어서 내가 있고 내가 있어서 그들이 있는 것이다.
서양 속담에 “여섯 다리를 건너면 모두 아는 사이다.”라 한다. 나는 방송국의 한 드라마 PD와 친한 선후배 관계이니 두 다리만 건너면 그가 연출한 드라마의 탤런트들과 만나 식사할 수 있다. 한 사람이 대략 3,000명의 사람을 소개받고 300여명과 가깝게 지낸다고 한다. 그러니 한 다리를 건너면 나는 300명을 알고 있으며, 여기서 한 다리를 건너면 내가 아는 300명에 각자 300명씩을 곱하게 되니, 9만명의 사람을 알게 되고, 또 한 다리를 건너면 2,700만명의 사람을 알게 되고, 네 다리를 건너면 81억명을 알게 된다. 물론 여기에 지역과 문화의 제약을 상정하지 않은 것이지만, 산술적으로 볼 때 인류는 네 다리만 건너면 모두가 친구인 셈이다. 열 다리도 아니고 네 다리만 건너면 모두 아는 사이인데 종교나 이데올로기가 다르다고, 서로 피가 다르고 생활양식이 다르다고 으르렁거리고 서로 총을 겨누어야 할까?
신자유주의가 휩쓸고 지나가면서 중산층은 해체되고 세계의 가난한 나라, 가난한 백성은 더욱 가난해졌다. 한 켠에서는 산해진미를 가득 쌓아놓고 그 가운데 1/10도 채 먹지 않은 채 쓰레기로 버리는데 다른 켠에서는 밥 한 숟가락만 먹어도 살릴 수 있는 어린이들이 1년에도 4백만 이상씩 구원의 손길을 기다리다 죽어가고 있다. 97년 6월 현재 인류 가운데 13억이 하루에 1달러도 채 안 되는 돈으로 살아가고 있는데 세계 10대 갑부들이 소유하고 있는 재산은 1천3백30억 달러로 최빈국 총수입의 1.5배에 달한다. 그럼에도 이것은 개선되기는커녕 더욱 악화되고 있다. 미국을 비롯한 중심국가는 거의 모든 것을 누리고 있으면서도 신자유주의와 세계화의 공세를 취하며 더욱 착취를 강화하고 있다. 굶주려 죽어가는 어린이들을 나라고, 내 아이라고 생각하면 어떻게 이런 불평등과 부조리가 계속 야만을 범하고 있는 것을 방관하겠는가? 우리 모두가 이웃이고 우리 인류 모두가 서로 관련을 맺고 있는데 굶어죽어 가는 어린이의 고혈을 짜서 내 배를 불리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다는 말인가?
우리는 이제 동일성의 철학에서 연기의 철학으로 패러다임을 전환하여야 한다. 베이징에서 나비가 팔랑이면 뉴욕에서 폭풍이 분다는 것은 황당함을 말하는 비유이다. 그러나 베이징의 기온과 기압이 임계상태일 경우 한 사람의 기침으로도 그 균형은 깨져 대기를 혼란시키며 이것은 차례로 고공의 대기마저 불안정하게 하여 그 영향으로 뉴욕에서 폭풍이 불 수도 있다.
지난 세기에는 폐수를 몰래 버려 정화비를 아낀 사람이 유능한 경영자였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폐수를 먹은 물고기를 그 자신이 먹고 그 폐수로 더럽혀지고 더워진 바다가 이상기온을 만들고 이로 돌풍이 일어 그 사람의 공장을 무너트릴 수 있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날아다니는 새에서 한갓 돌이나 이끼에 이르기까지 지구상의 모든 사물이 나와 깊은 관련을 맺고 있는데 버릴 것은 무엇이고 파괴할 것은 또 무엇인가? 세상 삼라만상이 나와 깊은 연관을 맺고 있다는 믿음이 있는데 고독하고 소외될 일이 무엇이란 말인가?
태양계와 같은 것이 수억 개 모여 은하계를 이루고 이 은하계가 또 수억 개 모여 우주를 이룬다. 우리가 고개를 들으면 수조개의 별이 반짝인다. 그 별 가운데는 태양에서 명왕성에 이르는 태양계 전체를 포개도 전혀 미치지 못할 만큼 어마어마하게 큰 별도 있다. 그러나 그 모든 별을 모아도 보이는 것은 극히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우주를 이루고 있는 대부분은 별이 아니라 암흑물질이다. 이는 빛을 내지 않지만 질량을 가지므로 주변에 중력을 미쳐 자신의 존재를 알린다. 주변의 별의 운동을 관찰하여 그를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반짝이는 별만 보고 우주라 하면 드러나지 않으나 분명히 존재하는 암흑물질을 부정하게 된다. 별들과 은하계의 집합을 우주라 할 수 없다. 어두운 부분을 통하여 빛나는 별들이 드러나고 별을 통하여 어두운 암흑물질이 드러난다. 너와 나도 마찬가지이다. 본래 내가 없는데 나를 내세우면 나를 더욱 부정하는 꼴이 된다. 그러나 너를 통하여 내가 드러나고 의미를 가진다고 생각하면 모든 타인은 내가 되는 것이다.”
여기까지는 초기불교부터 있어온 공과 연기 사상을 응용한 것이다. 그러면 원효의 공 철학을 응용하면 어떤 대안을 모색할 수 있을까? 일심에서 보면 공은 같지도 다르지도 않으며 眞도 아니고 俗도 아님을 어떻게 우리 현실에 적용할까?
라깡은 욕망이란 타인을 지향하는 것이기에 욕망할수록 자아는 자기에게서 멀어지는 것이라고 말하였다. 나를 채우려는 것은 타인의 돈과 권력, 향락을 빼앗는 것을 뜻한다. 나에 집착하면서, 부자는 가난한 자를 더욱 고통에 몰아넣고 있고,(1960년대에 미국 대기업 지원과 최고경영자 사이의 연봉 차이는 1 대 41이었으나 99년에는 1대 457로 벌어졌다. 97년 6월 현재 인류 가운데 13억이 하루에 1달러도 채 안 되는 돈으로 살아가고 있는데 세계 10대 갑부들이 소유하고 있는 재산은 1천3백30억 달러로 최빈국 총수입의 1.5배에 달한다.)인간은 자연을 파괴하였고, 남성은 여성을 억압하였으며, 서양은 동양을 착취하였다. 대신 인간은 극심한 소외감에 몸부림을 치고 있다. 소외는 개인의 심리로 그치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은 소외감을 못 이겨 자신을 마약, 향락 등 자신을 끝없는 나락으로 떨어트려 해체하거나 타인에 대한 극도의 폭력으로 드러낸다. 때로는 히틀러의 파시즘 같은 전체주의적 폭력에 열광적으로 환호를 보낸다.
그러나 씨가 자신을 죽여 싹을 내고 열매를 맺는 것처럼 공이 생성변화의 조건이다. 나무는 스스로는 아무 의미를 갖지 못하나 풀과의 차이를 ‘목질의 줄기를 가진 다년생의 식물’이란 의미를 갖는 것처럼 공은 다른 것과의 관계를 통해 나를 드러내는 사유이다. 나를 부정할 때 우리는 소외감에서 벗어나 세계의 모든 인류, 더 나아가 전 우주상의 모든 생명체들과 굳건한 유대를 맺을 수 있다.
심우도의 여덟째 그림은 동그란 원 뿐이다. 왜 소라는 깨달음을 얻었는데 빈 원이 이어지는가? 이는 人牛俱忘, 곧 자기와 소를 다 잊는다는 것인데 본디 제 자리로 되돌아간다는 返本還源과 궁극의 광명 자리에 든다는 入廛垂手가 이어진다. 나를 비워야 모든 현상을 있는 그대로 보는 통찰이 가능하다. 산은 산이며 물은 물인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통찰이 가능한 후에야 나와 너의 구분을 허물고 세상의 중생들에게 자비를 베풀 수 있는 것이다. 그를 통해 대중을 소외에서 벗어나게 하고 나도 또한 소외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이다.
연기의 패러다임이 없는 68혁명은 신자유주의에게 먹히고 대중들은 더 혹독한 소외를 겪고 있다. 연기의 패러다임으로 자본주의 체제를 야금야금 내부로부터 파열시킬 수 있다. 영성의 힘은 물성의 힘을 이길 수 있다. 이런 면에서 시장의 원리에 종속되어 수행을 닦기보다 입장료 수입과 시주 액수를 올리는 데 더 혈안이 된 스님에게 먼저 자기부터 비우라고 말하고 싶다. 물론 암자에서 고고하게 무소유의 행을 실천하고 있는 스님을 개인적으로는 존경한다. 이 분들의 공력으로 인하여 많은 대중들이 소외를 극복하고 ‘眞我’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 성불은커녕 소외나마 극복하게 할 수 있는 대중의 수는 기껏 10%나 될까? 그러면 나머지 90%의 대중은? 차원 높은 공의 철학을 설파한다 해서 얼마나 많은 대중들이 해탈을 이룰 것인가? 그토록 자본주의 체제를 만만히 보았는가? 오히려 자본주의의 원리는 산사의 깊은 암자까지 파고들어 수행자까지 물화시키고 그들 스스로를 대중으로부터, 그가 알고 있는 스님의 참 형상으로부터, 진아로부터 소외시키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시주 액수에 연연하는 오늘의 나의 모습이 下化衆生을 위하여 나를 버리겠다고 서원한 젊은 날의 나의 모습에서 꽤나 멀리 낯설게 느껴진 적은 없는가? 스님조차 소외시키는 것이 자본주의의 힘이다.
사찰이 진제라면 시장은 속제이다. 이미 사찰에도 시장의 원리는 들어와 있다. 사찰의 공과 시장의 공은 하나도 아니고 둘도 아니다. 사찰의 공이 관념적이라면 시장의 공은 삶이다. 사찰의 공이 없음과 비워둠의 사유라면 시장의 공은 무소유의 행이다. 사찰의 공이 연기의 사유라면 시장의 공은 타인, 또는 다른 생명체와의 연대와 사랑이다. 근본적으로는 자본주의 구조 자체를 전면적으로 바꾸지 않는다면 산사 속의 절마저 시장원리에 종속당할 것이다. 더불어 스님 또한 시장의 원리를 알고 시장의 공과 사찰의 공을 하나로 아울러야 한다.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불사에 시주하였으나 자신을 비우지 못한 보살이 천박하다면 마음에서는 자기를 비웠으나 그 깨달음을 자비행으로 옮기지 않고 있는 스님은 현학적이다.

출처:춤 이론 연구소

독일 사회보장제도의 비교 고찰*


-영국 및 스웨덴과의 비교 중심으로-

민춘기**

 

I. 머리말

한국의 독어독문학은 대학개혁이라는 현실적인 요구에 부딪치면서 1990년대 후반부터 적지 않은 변화를 겪고 있다. 그 가운데 가장 눈에 띠는 특징으로 독일학, 지역학, 지역연구, 문화학 등으로 불리는, 이른바 독일어권 문화 전반에 대한 연구와 교육으로의 확대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이에 따라 한국의 독어독문학에서도 독일학이라는 영역이 하나의 부분영역으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실제로 전통적인 독어독문학과의 명칭이 다른 이름으로 바뀌거나 교과과정에서 독일학 관련 과목을 개설하고 있는 추세이며, 최근에는 독어독문학 관련 학술지에서도 독일학에 관련된 논문들이 종종 실리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러한 흐름에 따라 필자가 소속된 대학에서는 '독일문화와 사회'라는 과목을 개설하여 수강생들의 호응을 얻고 있다. 이 과목에서 필자는 독일의 사회보장제도에 관련된 부분을 맡게 되었으며, 강의와 교재를 준비하기 위해 이 분야에 대한 조사와 연구를 하게 되었다. 여기서는 이 분야에 대한 보다 깊이 있는 이해를 위해 독일의 사회보장제도를 살펴보고자 한다. 이 분야는 독일학이나 독일지역학에서 언급될 수 있는 하위 분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논문의 연구목적은 독일학의 한 하위분야로 볼 수 있는 독일의 사회보장제도를 다른 나라들의 경우와 비교하여 살펴봄으로써 보다 깊이 있는 독일 이해에 기여하는 것이다. 막연한 지역 이해보다는 특정분야의 깊은 이해를 통해 보다 생산적인 독일지역학 연구를 해야할 상황에서 그 기초를 마련하고자 하는 것이다. 독일학 관련 교과목의 수업 자료를 부분적으로 제공하는 것도 하나의 목적으로 볼 수 있겠다. 여기서는 독일의 사회보장제도를 영국 및 스웨덴의 경우와 비교하는 방식으로 논의를 전개하기로 한다. 연구대상은 사회보장제도의 핵심을 이루는 사회보험, 즉 연금보험, 의료보험, 재해보험, 실업보험 등이며, 사회보장제도의 발전과정, 주요특징, 개혁동향을 중심으로 논의하기로 하겠다.

II. 발전과정

사회보장제도의 발상지는 유럽이다. 19세기부터 대중 교육제도의 확산과 함께 발전된 서구 민주적 자본주의가 보여주고 있는 가장 큰 특성으로 일컬어지고 있는 사회보장제도는 국가별로 매우 상이한 역사적 조건과 정치적 과정을 통하여 발전하였다. 따라서 사회보장제도의 역사를 거시적인 단계로 구분하여 파악하는 것이 전체적인 이해에 도움이 된다. 대개 빈민법 단계, 사회보험 단계, 복지국가 단계 등으로 크게 나누어 설명하는 것이 일반적이며, 여기서는 이를 중심으로 전체적인 역사에 대해 살펴보고 개별 국가의 발전과정에 대해 알아보기로 하겠다.
빈민법은 유럽 절대왕정시대에 국가가 제정한 것이다. 이는 교구 단위의 자선행위로부터 행정기구 수립과 빈민세 활용에 의해 정부활동으로 전환된 것이다. 빈민법을 통한 구제는 그 대상자의 권리와는 전혀 무관했으며, 급여는 그 제공자인 국가와 교회의 완전한 재량에 좌우되었다. 빈민법은 절대왕정시대에 농촌 노동력에 대한 통제를 위해 절대주의 국가가 제정하였기 때문에 사회보장제도의 범주로 보기 어렵다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빈민법이 빈민을 대상으로 하는 근대적인 사회복지정책인 공적부조(公的扶助)로 이어졌다는 점을 인정하여 사회복지제도의 뿌리 혹은 전사(前史)로 간주하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사회보험은 자본주의적인 사회복지정책이다. 자본주의에서 시장이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보다 더 큰 비중을 갖게 되면서, 기본적 욕구의 충족 또는 사회적 재생산을 위한 새로운 제도의 출현이 불가피했던 것이다. 사회보험은 사회적 위험, 즉 산업재해나 노령으로 인한 정년퇴직, 각종 질병, 실업 등 봉건시대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위험에 대응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사회보험은 그 주된 대상자가 노동자인 점, 재정을 자본가, 노동자, 국가 등 삼자가 부담한다는 점, 강제성을 띤다는 점, 대상범주가 넓다는 점에서 현대적인 형태의 전형적인 자본주의적 사회보장제도라 할 수 있다. 일반적인 성격의 사회보험을 처음 도입한 것은 1880년대 독일이며, 스웨덴은 1901년에, 영국은 1911년에 도입하였다. 사회보험 시대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사회보장제도가 시작된 시기라 할 수 있다.
복지국가 단계는 두 번의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노동자계급과 함께 시민계급의 힘이 강해졌고, 이들의 다양한 요구를 국가가 수용하지 않을 수 없게 되면서 나타나게 된다. 2차 세계대전 직후 영국에서 처음 등장하여 점차 서유럽 전체로 확산된 복지국가는 사회민주주의 이념에 입각하여 시장의 불평등과 불안정성에 대항하여 사회적 연대와 소득과 부의 평등, 사회적 위험에 대한 공동체의 보장을 추구한다. 복지국가가 성립된 이후에도 사회보험이 복지국가의 핵심제도로 존재하고 있기 때문에 사회보험과 복지국가는 중첩된다고 볼 수도 있으나, 복지국가 시대에는 사회보험의 대상이 사무직 종사자와 자영인 계층으로 확대된다. 복지국가는 사회보장제도의 대상자를 전 국민으로 확대한 것이다. 또한 소득보장뿐만 아니라 보건의료, 주택, 교육에 이르기까지 프로그램이 다양화되었으며, 유례가 없을 정도로 많은 재정이 투입되었다. 복지를 시민의 권리로 인정하면서 욕구의 충족을 중시하게 된 것이다.
이상에서 사회보장제도의 전체적인 역사를 간단히 조망해 보았다. 사회보장제도의 뿌리라고 할 수 있는 빈민법 단계에서 출발하여 현대적인 사회보장제도의 핵심이라할 수 있는 사회보험 단계를 거쳐 보다 폭넓은 대상과 다양한 프로그램을 특징으로 하는 복지국가 단계에 이르러 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신자유주의의 강세에 따라 사회보장제도에 있어서도 '제3의 길'이라는 노선을 언급하는 경우도 있으나, 여기서는 논의에서 제외하였다. 여기서는 사회보장제도의 역사를 전문적으로 깊이 파고들기보다는 일반적인 이해를 목표로 하기 때문이다. 이어서 독일을 중심으로 국가별 발전과정에 대해 알아보기로 하겠다.
독일에서는 비스마르크 시대인 1883년에 첫 사회보장제도인 의료보험 관련 법률을 제정하여, 1920년대부터 1950년대에는 의료보험제도를 민간협력 체제로 추진한다. 1960년대와 1970년대에는 경제발전과 사회변화에 따라 의료보험제도를 확충하게 되며, 이로 인해 비용이 현저히 증대하면서 국민의 보험료와 세금의 부담이 더불어 증대하게 되어 재정상의 문제가 점차 두드러지게 되었다. 의료보험의 재정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1977년에 의료보험 비용 억제법이 제정되어 1978년부터 각종 의료비를 위한 제반 조치가 취해진다. 1990년 10월 3일 독일 통일을 계기로 1991년 1월 이후에는 의료보험 체제가 독일의 전 지역으로 확대 적용되기에 이른다. 1992년 6월에는 의료구조법(Gesundheitsstrukturgesetz)이 제안되고 몇 차례 수정을 거쳐 같은 해 12월 18일에 연방의회에서 가결되어 1993년 1월부터 시행되고 있다.
독일에서는 1884년에 세계에서 최초로 노동재해보상보험법을 제정한다. 그 당시에는 공장노동자만을 대상으로 하였으나, 이후에 운수업과 농림업 등의 분야로 확대된다. 1911년에는 질병보험법과 노령보험법이라는 보험법과 더불어 제국보험법으로 통일된다. 그 후 수 차례의 개정이 이루어졌지만 특히 1960년에 가장 큰 개정이 이루어진다. 현행법은 1963년에 제정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밖에 1889년에는 연금보험의 법률적인 토대가 이루어져서, 지출규모가 가장 큰 보험으로 발전한다. 1927년에는 실업보험이 도입되었으며, 완전고용의 보장, 직업훈련 및 재훈련을 통한 최적의 고용기회 보장, 실업 및 조업단축으로 인한 사회적 지위의 저하 및 경제적 악화를 방지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1995년에는 간병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위한 간병보험이 도입되어 독일 사회보장제도의 5대 축을 이루고 있다.
영국 사회보장제도의 발전과정은 자선시대, 집합주의 시대, 보편주의 시대, 선별주의 시대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자선시대로 불리는 1907년까지 영국에서는 자선(慈善)이 상류 및 중류계급의 사회적 필수품이었다. 집합주의 시대라 불리는 1908년부터 1947년 사이에 영국의 사회보장제도는 변화를 맞게 되면서 1908년에 노령연금법이 도입되고, 사회보험 원칙이 받아들여지면서 국민보험법(The National Insurance Act)이 1911년에 통과된다. 보편주의시대는 1948년부터 1958년 사이를 일컬으며, 이 시기에는 사회보장의 일체 급부를 모든 국민에게 동액 수준으로 제공하려는 이념을 가지고 있었다. 1959년부터 시작되는 선별주의 시대에는 노령연금에 관한 국민보험법이 1959년에 통과됨으로써 '고소득자-고부담 : 저소득자-저부담'의 새로운 체계를 병행하여 실시하기에 이른다. 1973년에는 이러한 부분적인 변화의 시도에 의거한 사회보장법(The Social Security Act)이 통과된다. 1974년에는 연금개혁(Better Pensions) 백서가 발표되고, 이에 기초한 사회보험연금법(The Social Security Pensions Act)이 1975년에 통과되어 1978년부터 실시되기 시작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스웨덴이 활발한 사회복지를 실시하며 이른바 생계의 곤란이나 질병에 대한 보호를 법률로서 규정하게 된 것은 중세에 있어서 노령이나 질병에 걸린 양친에 대한 보호를 자식의 의무로 규정한 법률이 지방에 만들어지면서부터이다. 1891년에는 자발적 의료기금에 대한 국가보조금제도의 채택을 시작으로 1913년에는 보편적 강제노령보험과 폐질보험이 도입되었다. 국가적 차원의 강제적 보험제도가 처음 도입된 것은 1916년의 산재보험의 경우가 유일한 것이었지만 그것의 사회경제적 비중은 미미하였다. 1930년대에 사회보장제도가 성립되었으나, 본격적 출범은 2차대전 이후의 일이다. 1950년대 초에 도입된 임금연계의료보험제 등과 1960년에 제정된 국민보충연금계획안(ATP), 그밖에 고용, 교육, 주택 정책에서의 주요 개혁들이 스웨덴 복지체계의 중심 내용을 형성한다. 1962년에는 종래의 건강보험과 연금보험을 하나의 법률로 통합하는 개정이 이루어져, 이 두 보험을 통합한 법률을 공적보험법이라 부르게 되었다. 보편적인 고수준의 급부와 고품질의 서비스를 지침으로 한 스웨덴 복지체계의 골격은 지금까지 큰 변화 없이 유지되고 있다. 스웨덴은 광범위한 사회복지 활동을 전개하고 있어 오늘날 복지국가의 대표적인 국가로 간주되고 있다.
이상에서 사회보장제도의 국가별 발전과정을 비교 고찰해 보았다. 독일의 경우 비교적 이른 시기에 사회보장제도와 관련된 법률을 제정하였으며, 계속적인 발전단계를 거쳐 오늘날에는 5대 사회보험을 구축하고 있다. 영국과 스웨덴의 경우에는 본격적인 사회보장제도의 실시가 독일에 비해 늦은 편이라 할 수 있으며, 계속적으로 발전하고 있다. 어느 나라에서나 사회보장제도는 이를 둘러싼 제반 여건의 변화를 수용하고 적응하려는 노력에 따라 끊임없는 발전을 거듭하고 있다. 결국 사회보장제도는 사회의 상황과 밀접한 관련을 맺으며 발전해 나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III. 각국 사회보장제도의 특징

III.1. 독일

현대적인 의미에서 사회보장제도의 역사적 근원은 독일이라 할 수 있다. 독일의 사회보장제도는 사회보장제도의 규범에 따른 유형으로 분류에 따라 서구대륙형 모델을 대표한다. 사회보장제도의 이념에 따른 유형으로 분류하자면 독일은 사회적 성과에 대한 다양한 요구를 고용 및 사회적 지위와 연결시키는 이른바 보수주의 유형을 대표한다. 독일의 사회보장은 사회정책(Sozialpolitik)의 일환으로 간주되며 여러 제도로서 성립되어 있다. 오늘날 독일의 사회보장제도는 어떤 포괄적이며 체계적인 구상에 따라 계획적으로 만들어진 것은 아니며, 각 제도를 일관하는 통일적인 사상을 찾기는 어렵다. 독일의 사회보장제도를 그 보장의 방식에서 볼 때 사회보험, 특수제도, 공적보호 및 공적서비스 등으로 분류할 수 있으나 그 중점은 사회보험에 있다.
독일의 연금보험은 이미 1889년에 법률적인 토대가 이루어졌으며, 지출규모가 가장 큰 보험으로서 전체 사회보장제도 비용 중 약 30%를 차지한다. 이 보험은 직장에서 퇴직하고 나서 노후에 어려움을 겪지 않고 적절한 생활수준을 유지할 수 있도록 보장해 주는 기능을 한다. 연금의 재정은 기본적으로 보험료에 의존하며, 고용주와 근로자는 정해진 보험료율(保險料率)에 따라 보험료를 절반씩 부담한다. 보험료율은 1999년 4월 1일 기준으로 총수입의 19.5%이다.
독일 의료보험 재원의 대부분은 피보험자 및 고용주와 자영자의 보험료와 연방노동부의 편입 보험료 및 연방보조금이며, 국고보조금은 약 3% 정도이다. 독일은 역사상 최초로 1884년에 노동재해보상보험법을 제정하였다. 노동재해보험의 재원은 대부분 보험료에 의해 부담되며, 전액을 고용주가 부담한다. 독일의 실업보험은 1927년 직업소개와 실업에 관한 법(Gesetz  ber Arbeitsvermittlung und Arbeitslosenversicherung)에 의하여 도입되었으며, 현재는 1969년의 고용촉진법(Arbeitsf rderungsgesetz)에 의해 운용되고 있다. 재원조달은 임금지불액의 6.5%를 근로자와 고용주가 절반씩 부담한다. 1995년에는 간병보험이 도입되어 사회보장제도의 기반을 더욱 굳히게 되었다. 재정은 근로자와 고용주가 절반씩 부담하며, 보험료율은 1.7%이다.

III.2. 영국

영국에서는 광의의 사회보장을 의미하는 개념으로 '사회서비스(Social Service)'라는 용어가 일반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여기에는 소득보장으로서의 협의의 사회보장이 포함되어 있다. 영국에서 공적연금제도의 중심은 전 국민에게 적용되는 퇴직연금이며, 이는 국민보험의 성격을 띤다. 사회보험제도로서의 국민보험의 재원은 피보험자 본인과 피보험자를 고용하는 고용주로부터 갹출되는 보험료와 국고부담으로 충당된다. 보험료는 피보험자의 자격, 즉 취업의 형태와 소득의 수준에 따라 4종으로 구분된다.
영국의 사회서비스에는 국민보건서비스(National Health Service)도 포함된다. 보험료를 조건으로 급여를 받는 국민보험과는 달리, 국민보건서비스는 서비스가 필요한 경우에는 언제라도 서비스가 제공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 국민보건서비스 제도는 전체 영국 국민을 대상으로 질병의 예방과 치료 및 재활을 비롯하여 정신적·육체적 건강의 증진을 도모하기 위한 포괄적인 제도이다. 이 제도의 실천목표는 주로 공공자금에 의한 재원조달, 서비스의 배치에 관한 합리적 통제 그리고 경제적·기술적 조직화와 계획성에 입각한 구조의 조직화란 의미로서의 합리화의 지향에 있다.
영국에서 노동재해에 대한 고용주의 책임이 확립되어 그 결과 노동자에게 보상청구권이 인정된 것은 1880년의 고용주 책임법이었으나, 이 법에는 과실책임주의가 남아있었다. 노동재해에 무과실책임이 도입된 것은 1897년의 노동자보상법이 그 최초였으며, 국민보험법에 편입되어 고용주의 개별적인 책임에 따른 노동재해 보상제도로부터 강제적인 사회보장제도로 전환하였다. 그 후 1965년, 1975년, 1986년에 법률이 개정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적용범위는 전체 피고용자이며 자영업자는 제외된다. 재원에 있어 피고용자는 소득의 5-9%를 부담하고 고용주는 피고용자 임금의 5-10.45%를 부담하며, 정부는 비용의 14%정도를 부담한다.
실업보험을 세계에서 처음으로 만든 것은 영국이며, 1911년의 국민보험으로 이것을 강제화하였다. 영국의 실험보험제도의 유형은 강제보험제도이다. 영국의 실업보험의 특징으로서는 국민보험에 가입한 피고용자가 실업을 당한 경우 최고 1년간에 걸쳐 국민보험으로부터 실업급여를 지불한다. 재원조달을 위하여 노사가 함께 주급에 따라 임금의 5%, 7%, 9%를 부담하며, 정부는 총합보험료수입의 14.5%를 부담한다.

III.3. 스웨덴

스웨덴의 사회보험은 20세기초에 시작되었다. 그 이후로 계속적인 발전을 거듭하였으며, 특히 제2차 세계대전 후에 폭넓게 발전하였다. 모든 스웨덴 국민은 하나의 통합시스템 안에서 직업에 관계없이 개별적으로 보장받는다. 많은 경우에는 개인의 소득능력의 유무와도 무관하다. 그래서 스웨덴의 사회보장제도를 보편주의적 사회보장제도라 부르기도 한다. 스웨덴의 사회복지 활동은 공적보험법에 입각한 사회보험과 공적서비스를 그 중심으로 한다. 스웨덴에서 사회보험의 집행자는 보험금고이다. 스웨덴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은 16세 때부터 보험금고에 신고된다.
스웨덴의 연금보험을 무갹출연금, 혹은 보편주의적 조세방식연금이라고도 한다. 이 연금은 1913년에 실시되었으며, 1946년에는 자산조사를 폐지하고 부유층으로까지 그 대상을 확대함으로써 보편주의로 자리잡았다. 그러나 도시 노동자들의 수가 증가하면서 그들의 입장이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피고용자만을 대상으로 하여 급여를 소득에 연계시킨 소득비례연금이 1958년에 실시되었다. 스웨덴의 기초연금은 65세 이상 전 국민을 대상으로 하며, 재정을 정부와 고용주만이 부담한다. 피고용자를 대상으로 하는 소득비례연금에서도 피고용자의 부담은 없다. 직업연금의 보험료도 고용주만이 부담한다.
스웨덴의 의료보장의 근간은 국민건강보험제도로서 1955년부터 전 국민을 일률적으로 가입시키고 있다. 재원은 고용주의 갹출 및 정부의 보조금으로 조달되며, 피고용자에게서는 갹출되지 않는다. 대부분의 보건의료 자원인 병·의원과 의사가 사회화되어 있다. 스웨덴의 노동 재해보험법은 1976년에 제정되었으며, 노동재해보험의 적용대상은 스웨덴 거주의 모든 피고용자와 자영업자이다. 재원은 고용주가 전액을 부담하므로 피고용자와 정부의 부담은 없다. 스웨덴의 실업보험은 갹출제이며, 이를 보조하는 것으로서 1974년부터 '노동시장현금원조(KAS)'가 도입되어 있다.
스웨덴의 사회보장제도는 자본과 노동자 사이의 역사적 대 타협에 의한 협정에 기원을 두고 있다. 이 협정의 주요내용은 생산관련 결정은 자본가계급에게 일임하되 정책결정 환경은 국가와 노조가 강력하게 통제하는 체제를 만든다는 것이다. 생산환경에 대한 통제로서 단체협상을 통한 실질임금의 보장과 완전고용 및 소득재분배를 지향하는 사회보장제도가 수용된 것이다. 또 다른 특징은 수요와 공급을 보다 포괄적으로 관리하는 것이다. 이는 성장·고용·복지를 동시에 달성할 수 있는 모델로서 스웨덴을 영국식 '요람에서 무덤까지'를 넘어선, '태내에서 천국까지'의 수준 높고 관대한 복지국가로 만들었다.
이상에서 독일을 중심으로 영국과 스웨덴의 사회보장제도에 대해 사회보험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이는 세 나라의 각 사회보험의 특징을 이해하기 위한 것이다. 사회보험의 재원조달 방식면에서 독일은 주로 근로자 자신과 고용주의 보험료에 외존하는 반면에, 영국은 부분적으로 보험료에 의해 재원이 마련되고 스웨덴은 대체로 국가에 의해 지원되는 것으로 보인다. 이제 여기서는 위에서 언급한 세 나라의 사회보장제도의 특징을 건강보험과 실업보험을 중심으로 비교하여 고찰하기로 한다.

III.4. 비교

독일은 세계에서 최초로 사회보험방식으로 국민의 의료보장을 실시한 국가이다. 독일의 사회보험제도는 지난 세기 사회경제체제의 변화에 따른 사회적 불안과 긴장을 완화할 목적으로 근로자의 생활보장과 생계보장을 위하여 실시되었다. 독일 의료보험은 연대와 자치를 기본이념으로 하고 있다. 국민의 약 90%는 공적의료보험의 적용을 받고 있고, 나머지 약 10%는 민간의료보험 가입자와 특별제도에 가입된 공무원으로 전국민이 어떤 종류이든 의료보험에 가입하여 의료보장의 혜택을 받고 있다. 의료보험제도는 법령에 의해 지역별, 직역(職域)별로 조직된 자치법인체인 768개 의료금고에 의하여 운영되고 있다.
 영국 국민보건서비스의 특징은 사회보험에 의한 의료보장과는 달리 의료기관이나 의료종사자 등 의료를 제공하는 측의 사회화를 전제로 하여 의료를 모든 국민에게 공적서비스로 보장하고 있다는 점이다. 국민보건서비스가 1948년에 발족했을 당시에는 모든 서비스가 무료로 공급되었던 것이 그 후 수차에 걸쳐 약제를 비롯한 비교적 소액의 의료비의 일부 부담제가 채택되고 있다. 국민보건서비스의 비용은 약 81%가 국고에서 조달되고 있다. 14%는 국민보험기금으로부터의 갹출금에서 조달되며, 환자의 일부부담은 4% 정도이다.
오늘날 스웨덴에서 의료보건에 대한 책임은 지역별로 분담되어 있어서 지방행정단위인 카운티(County)가 의료보건정책을 그 지역사정에 맞추어 결정한다. 스웨덴에는 25개의 카운티가 있는데, 지역별로 병원과 의과대학 및 의료기관을 관리하고 지역적 의료보건정책을 결정할 뿐만 아니라, 국가의 전반적인 의료보험 정책에 협조하고 정책회의에 참여하고 있다. 재정적으로는 국세 및 지방세와 국가보험청으로부터의 보조금에 의하여 조달되고 있다. 재정적으로는 국고보조는 크지만 실제로 운영을 하고 있는 것은 주로 지방자치체로서 스웨덴에 있어서의 의료제도의 특색의 하나로 지적할 수 있다.
의료보건 정책을 위한 비용이 국민총생산에서 차지하는 비율을 보면, 영국은 3.8%, 독일이 5% 정도이다. 스웨덴은 지방 행정구역에서 자치적으로 의료시설을 운영·관리하므로 중앙정부의 공공지출은 통계상 적어 보이나 전국적으로 중앙정부와 지방정부의 의료보건 정책을 위한 지출 총액이 국민 총생산의 6% 정도이다. 천 명당 환자 수는 스웨덴이 156명, 영국은 104명 정도이다. 독일에서는 진료횟수에 따라 의사들의 보수가 결정되고 스웨덴과 영국의 경우는 봉급제로서 진료회수에는 개의치 않고 병원에 입원한 환자의 수와 각 의사가 진료하는 환자 수에 따라 보수가 결정된다.
강제보험방식의 유형에 속하는 독일의 고용촉진 실업보험제도의 특징으로는 다른 나라에 비해 실업의 사실에 대해 관대한 것으로 보인다는 점이다. 그것은 실업급여의 주급을 위한 대기일수가 없으며, 급여 수급자에게 20일의 시간제 근무를 허용하고, 연장급여의 일종인 실업부조의 급여기간을 무제한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실업이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 문제라고 볼 때, 사회가 실업자의 생계를 보장해야 한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고용촉진제도의 비용이 전체 사회예산에서 점유하는 비율이 통일 후 급격히 상승하고 있다는 점도 하나의 특징이다.
영국 실업보험의 의의는 소득원 상실로 인한 빈곤의 구제와 근로의욕의 유지에 있다. 영국 실업보험제도의 특징으로는 균일 갹출과 균일 급여라는 소득비례 급여가 영국경제의 장기적인 정체에 따른 사회보장부담의 가중으로 인하여 정액급여로 전환되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잉여노동력의 정리로 노사관계의 악화방지와 산업재편성의 촉진을 위하여 잉여노동력급여가 지급된다는 점도 특징의 하나이다. 그리고 국민보험의 일부로서 실업보험이 운영되기 때문에 보험재정에 있어 자금을 공동 관리하는 데서 제도 운영의 묘를 찾을 수 있다.
스웨덴의 실업보험제도(Eak)는 무릇 노동조합의 공제조직을 모체로 하여 발전한 것이며, 노동조합과 긴밀한 관계를 갖고 기금의 운영에는 조합원의 대표가 직접 참여한다. 스웨덴 실업급여제도는 실업보험의 유형에 있어 독일이나 영국과 같은 강제보험방식이 아니라, 노동조합을 모체로 하여 발전된 임의의 실업보험조합으로서 국가로부터 보조를 받는 임의보험과 이를 보조하는 노동시장부조(扶助)제도의 이원적 제도로 되어 있다. 또한 스웨덴에서는 노동시장정책을 통하여 실업을 예방하는 정책에 무게를 두며, 현금 급여를 통해 실업자를 사후 구제하는 정책은 최종적인 수단으로 여긴다는 점이 특징적이다.
이상에서 독일, 영국, 스웨덴의 사회보장제도가 지니는 특징을 각각 살펴보고 상호 비교해 보았다. 이를 위해 사회보장제도의 핵심을 이루는 사회보험 가운데서 비교적 차이를 많이 보이는 의료보험제도와 실업보험제도를 중심으로 독일의 사회보장제도를 영국 및 스웨덴의 사회보장제도와 비교하여 고찰하여 보았다. 이어서 독일에서 사회보장제도를 어떤 방향으로 개혁하고 있는지를 알아보기 위해 연금보험과 의료보험을 중심으로 살펴보고 연금보험을 중심으로 두 국가와의 비교를 시도하기로 한다.

IV. 개혁 동향

독일 정부는 '연금개혁 2000'을 통해 연금수혜자에게 매력적이고 믿을만한 연금정책을 꾀하고 있다. 그래서 2020년까지 연금보험료율을 20%까지 올리고 2030년까지는 가능한 한 22%로 올릴 계획을 세우고 있다. 동시에 연금수준이 64% 이하로 내려가서는 안 된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연방정부의 연금구상에서 새로운 것은 사적인 노인부양을 추가로 구축한다는 것이다. 연방정부는 사적인 노인부양과 공적연금을 통해 전체연금수준을 70%로 보장하려고 한다.
연방정부는 노후보장을 광범위한 사회적 연대 속에서 이루려는 목표를 세우고 있다. 그래서 1999년 12월에 이미 '노후보장의 미래'에 대해 초당적으로 협의 중에 있다. 연방노동사회부는 연금개혁법 초안을 2000년 9월 26일에 내놓았다. 주요 골자는 보험료 수입이 감소하고 있기 때문에 연금을 개혁해야한다는 것이며, 공적연금보험의 개혁과 노후부양을 위한 재정능력 구축의 요구도 여기에 포함되는 주요 내용이다.
독일은 70년대 전반까지 의료보험의 적용범위와 급여를 적극적으로 확대해 왔다. 그 때문에 의료비는 년 20%를 넘는 폭발적인 증대를 가져왔다. 70년대 후반에는 정책을 전환하여 80년대 중반까지 일정한 효과를 거두었지만, 의료비가 다시 증가하여 1989년 제1차 구조개혁이 실시되었다. 이 개혁은 독일 의료보험이 시작된 이후의 대 개혁이라고 받아들여졌지만, 효과는 단기적인 것에 그쳤다. 이어서 등장한 것이 제2차 구조개혁이었다.
1993년부터 실시되고 있는 제2차 구조개혁법의 기본적인 이념은 보험자간의 재정조정을 통해 공평하게 부담하게 하는 것이며, 점차로 의료보험에 시장원리를 도입하여 제도를 효율적으로 운영하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1993년부터 1995년까지의 3년간은 의료비를 임금증가 범위 내로 억제하여 그 3년 동안 의료비의 총 예산제를 도입하며 의료보험의 장기적인 구조개혁을 준비시키는 것이다. 이러한 중장기적인 구조개혁의 핵심은 리스크 구조조정이라고 불리는 재정조정의 실시, 보험자 선택의 자유화와 진료보수계약에 있어서의 규제완화이다.
독일에서는 1989년 의료보장개혁법(GRG)과 1993년 의료보장구조법(GSG)에 이어서 1997년부터 '제3차 개혁'이 예정되어 그 동향이 주목되어 왔다. 1995년부터 1996년에 걸쳐서 연립여당과 야당에서 각각 개혁법안이 제출되었는데, 이와 함께 병원 부문의 개혁을 중심으로 한 그 밖의 개혁과 함께 의료의 질을 높이고 보험료율의 인상을 가능한 한 억제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그 때문에 이 법안에서는 보험료율을 0.1% 인상하는 것에 따라 약제·입원·교통비에 있어서의 본인부담을 1마르크 인상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이 법안에서는 보험료 부담의 인상에 따르는 일부부담의 인상이 과중하게 되지 않도록 부담한도액의 변경이 행하여지고 있다. 종래는 연수입이 보험의 강제 가입한도액 미만의 사람은 연수입의 2%, 한도액 이상의 사람은 4%로 되어 있었는데, 후자의 경우도 2%를 부담한도액으로 변경하였다. 만성병 때문에 1년 이상 걸쳐서 연수입의 2%까지 일부부담을 한 경우는 2년째부터 부담한도액이 1%로 인하되었다. 사회부조(社會扶助) 수급자(收給者) 및 저소득자는 부담을 면제하려는 조치가 강구되고 있다.
1996년 11월 12일에 연방의회에 제출된 제2차 의료보험 급여청구를 촉구함과 동시에 보험재정에 이바지하기 위해서 환자부담을 인상하는 것을 내용으로 하고 있다. 이에 의하면, 1997년 7월 1일부터 정액(定額)부담에 관해서는 5마르크, 정율(定率)부담의 경우는 5%의 인상이 예정되어 있다. 예컨대 약제는 현행의 4∼8마르크의 본인부담이 9∼13마르크로 인상되고, 입원 때의 본인부담은 1일 12마르크에서 17마르크로 인상되게 되었다. 피보험자 부담의 증가는 의료보험 개혁 때마다 되풀이 되어온 대책이고, 그 효과와 한계에 관해서는 이미 많은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다.
영국에서 근대적 복지개념의 제도화는 1908년의 '노령연금법(Old Age Pension Act)과 1911년의 '국민보험법'(National Insurance Act)에 의해 이루어지며, 이 당시의 이념인 최소한의 보편적 급부라는 정신은 향후 영국 복지체계의 기본정신으로 작용한다. 이후 1942년 비버리지가 제출한 보고서에서 빈곤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제시한 두 방식은 기여식 강제사회보험과 공공부조 프로그램이다. 비버리지의 최소평등주의 원칙이 한계에 이르자 1959년에는 국민보험법을 개정, 소득연계 기여와 그에 따른 급부제를 도입하였다.
이어서 1974년에 새로운 사회보장법을 제정하여 국가소득 연계 연금제를 도입하면서부터 정률 원칙에 의한 기본연금은 완전히 폐지되었고 모든 보험은 소득연계의 원칙을 채택하였다. 1986년에 도입한 사회보장법은 사적 개인연금의 비중을 급격히 강화시켰으며, 1989년에 이르면 국가연금은 연금생활자 총소득의 반 정도만 책임지고 나머지 반은 개인저축과 개인연금으로 충당되었다. 1970년대 이후 영국 복지체계가 보인 가장 특기할만한 변화는 복지정책의 기반이 과거의 보편적 공여 원칙에서부터 점차 시장에서의 개별적 공여로 이전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영국에서 1986년이래 시작된 사회보장개혁에서는 소득보장 프로그램의 축소 내지는 선별적 재조명을 통하여 사회보장비용을 억제하기 위한 다양한 노력이 진행되었다. 개혁이 필요하게 된 근본원인은 1970년대 이후 지속적 경기후퇴와 높은 실업률로 인하여 사회보장기여금은 감소한 반면 실업급여 등의 지출은 증가하였을 뿐 아니라, 인구의 노령화로 인하여 사회보장 기여자 대비 수혜자 비율이 늘어나는데 기인한다. 정부는 연금개혁을 통하여, 연금수급연령을 상향조정하고, 급여는 축소하며, 일반조세로 충당되는 자산조사급여의 의존도를 줄이는 등의 조치를 취하고 있다.
이상에서 살펴본 것처럼, 공적연금제도를 중심으로 한 영국의 사회보장제도에서는 사회서비스 비용의 증가가 경제성장을 크게 앞지르게 됨으로써 정부와 고용주에게 큰 부담을 안겨주고 있다. 이에 따라 정부는 국가의 역할을 가능한 한 축소하면서 개인에게 보다 큰 책임과 자립을 떠맡김으로써 이와 같은 부담이 경감될 수 있도록 그 정책 방향을 추구하고 있다.
스웨덴에서 사회보장의 확충을 통한 제도개선에 수반되는 재원의 부담은 앞으로도 증가될 것으로 보아 사회보장의 확충과 재원조달의 문제는 스웨덴에 있어서 장차 중요한 사회보장제도의 과제가 될 것이다. 그리하여 현재 스웨덴의 사회보험은 심도 있는 개혁을 꾀하고 있다. 의회에서는 새로운 연금시스템에 대한 기본법을 체결하였다. 동시에 이른바 연금위원회에서는 연금시스템의 대대적인 변화를 계획하고 있다. 스웨덴의 새로운 공적연금 시스템은 현재의 기초연금과 보조연금을 대체하게 될 것이다. 개혁된 연금은 모두에게 기본적인 재정적 보장을 제공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스웨덴은 장기간 유지될 수 있는 연금시스템을 갖게 될 것이다.
스웨덴의 현재 연금시스템은 한 세대 전에 기본연금이 설치되었고 부가연금은 1960년에 도입되었다. 80년대 중반에는 이 시스템을 개정하기 위해 연금위원회가 설립되었다. 1990년에 이 위원회는 결과와 제안을 내놓았으며, 그것을 보완하기 위해 위원들이 1991년에 회람(回覽)하였다. 대부분 개정이 제안된 것 보다 더 광범위하게 이루어져야 한다는 견해를 제시했다. 그래서 연금 연구진이 출범하였으며, 일곱 개의 정당 대표들로 구성되었다. 1994년 스웨덴 의회에 개혁노후연금시스템을 위한 법률안이 상정되었고, 의회는 이를 미래 개혁의 기초로 삼기로 결정했다.
의회의 결정에 이어서 연금개혁 추진 연구진이 만들어졌는데, 이는 개혁을 지지하는 다섯 정당의 대표들로 구성되었다. 연금개혁추진 연구진의 주요임무는 세부법률조항을 만들어서 완전한 법률제정을 준비하는 것이다. 이는 포괄적인 임무이며, 1994년부터 법률조항의 초안이 개혁의 다섯 영역에서 추진되어 1998년 7월 8일에 의회에서 의결되었다. 스웨덴의 연금개혁에서는 연금시스템이 전체 국민들에게 노후에 안정적인 수입수준을 보장해야 한다는 점에서 출발하고 있다. 이 개혁에서는 장기간의 질병과 직업불능의 상태에 있는 경우에도 보장이 똑같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점을 명시하고 있다. 현재의 연금시스템에서처럼 이 개혁된 연금시스템에도 모두 의무적으로 참여해야 한다.
개혁이 필요성한 이유는 몇 가지 원인으로 상대적인 연금지출이 늘고 있기 때문이다. 연금자의 수는 경제활동인구에 비해 급속도로 많아지고 있다. 2000년에 경제활동인구 100명에 연금자는 30명이다. 25년 후에는 41명으로 늘어나게 된다. 높은 실업상태에서 연금시스템을 위한 기여금은 줄어든다. 지난해에 연금액수는 총수입에 비해 24.5%에서 30%로 월등하게 상승했다.
낮은 경제성장 속에서 증가하는 연금지출비용도 연금개혁의 중요한 요인이다. 현재의 연금시스템은 높은 수준의 경제성장을 요구하고 있다. 지난 20년 동안에 연금자수는 증가한 것에 비해 성장률은 매우 낮았기 때문에 시스템이 약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40년대에 만들어진 시스템을 2010년에 적용하는 데는 어려움이 뒤따른다. 따라서 개혁을 통해 미래의 연금정책을 준비하고 있는 것이다.
이상에서 살펴본 것처럼, 독일을 비롯한 유럽의 국가들이 과도한 복지지출로 인하여 위기를 맞아 개혁을 서두르고 있다. 사회보장제도의 운영에 기본 틀을 제공하는 상황적 변수는 무엇보다도 국가 경제의 상황이라 할 수 있다. 그도 그럴 것이, 국가 책임의 수단이 되는 재정 확보 가능성의 상당 부분이 경제상태에 따라 좌우되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경제 상태는 사회보장 혜택의 수준에 대한 국민 기대의 상승 정도를 결정해 주는 중요한 요소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러한 계속적인 개혁에도 불구하고, 독일을 비롯한 유럽의 사회보장제도를 실패한 경우라고 보아서는 안될 것이다. 유럽에서는 정책입안자나 국민들의 복지 마인드가 공고하다. 또한 복지국가를 탄생시킨 국민적 연대감은 지금도 굳게 남아 있는데, 영국 성인의 3분의 1이 자원봉사활동에 참여하고 있는 것이 그 보기이다. 유럽에서는 가진 계층이 높은 세금 부담을 감수해서라도 어려운 이웃을 돌보는 복지제도를 운영해야 한다는 국민적 합의가 반세기 동안 이어져 왔으며, 유럽인들은 이미 사회보장급여가 주는 비교적 안전한 사회 속에서 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아직 사회안전망으로서의 사회보장제도가 완전히 뿌리내리지 못한 한국의 상황에 적지 않은 시사점을 줄 수 있을 것이다.

V. 맺음말

이 논문에서는, 독일어권의 문화 전반에 대한 연구와 교육으로의 확대라는 한국 독어독문학계의 추세를 반영하여, 독일학 관련 교과목의 개설을 통한 경험을 토대로 한 독일 사회보장제도의 고찰을 시도하였다. 독일 사회보장제도의 발전과정, 주요특징, 개혁동향을 살펴보았으며, 이 분야에서 자주 언급되는 영국 및 스웨덴의 경우와 비교하여 논의하였다. 이를 요약하여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겠다.
 사회보장제도의 발전과정은 빈민법 단계, 사회보험 단계, 복지국가 단계 등 크게 세 단계로 나누어 설명하기도 한다. 현대적인 의미의 사회보장제도는 사회보험 단계에서 출발한 것으로 볼 수 있으며, 이 점에서 독일의 사회보장제도가 시기적으로 다른 국가에 앞선다고 볼 수 있다. 독일에서는 1883년의 의료보험 관련 법률을 제정한 것을 시작으로 1884년에는 재해보상보험법이 제정되었다. 1889년에는 연금보험의 법률적인 토대가 이루어졌으며, 1927년에는 실업보험이 도입되다. 1995년에는 간병보험(독일어는 Pflegeversicherung이며, 우리말로는 이외에 노령보험, 수발보험, 간호보험 등으로 불리기도 함)까지 추가되어 사회보장제도의 5대 축을 이루고 있다. 영국의 경우에는 자선시대로부터 출발하여 1908년에는 노령연금법이, 1911년에는 국민보험법이 제정된다. 1973년에는 사회보장법이 통과되고, 1974년의 연금개혁 백서를 기초로 사회보험연금법이 1978년부터 실시되어 오늘에 이른다. 스웨덴에서는 1913년의 노령보험과 1916년의 산재보험이 국가 차원에서 도입되고 1930년대에 사회보장제도가 성립되었으나, 본격적으로 시작한 것은 2차 대전 이후의 일이다.
독일의 사회보장제도는 사회적 성과에 대한 다양한 요구를 고용 및 사회적 지위와 연결시키는 보수주의 유형을 취하며, 그 중심은 사회보험에 있다. 사회보험 가운데 재해보험을 제외하고는 주요 재원이 근로자와 고용주가 절반씩 부담하는 보험료에 의해 충당된다. 이에 비해 영국의 경우에는 이른바 사회서비스라는 개념에서 출발하며, 사회보험에서 피보험자는 부분적으로만 재정을 부담한다. 스웨덴의 경우에는 보편주의적 사회보장제도라 불리며, 재정을 정부와 고용자만이 부담하고 피보험자는 직업에 관계없이 보장받는다. 의료보험에 있어서 독일은 연대와 자치를 기본이념으로 하는 점, 영국은 사회화를 전제로 한다는 점, 스웨덴은 지역별로 분담한다는 점 등이 특징적이다. 실업보험과 관련하여 독일이 실업의 사실에 대해 관대하다는 점, 영국이 빈곤의 구제와 근로의욕의 유지에 의의를 둔다는 점, 스웨덴이 실업을 예방하는 정책에 무게를 둔다는 점 등을 그 특징으로 들 수 있다.
독일에서는 감소하는 보험료 수입능력 때문에 연금을 개혁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2000년 9월 26일에 '연금개혁 2000'이라는 연금개혁법 초안을 제시하여 초당적 협의를 진행한 바 있다. 연방정부의 연금개혁 구상에서 새로운 것은 사적인 노인부양을 추가로 구축하는 것이며, 노후보장을 광범위한 사회적 연대 속에서 이루려는 의지가 담겨있다. 독일의 의료보험에서도 계속적인 개혁이 이루어지고 있으며, 보험재정을 견고하게 하기 위해서 환자부담을 인상하는 것을 주요 내용으로 하고 있다. 영국에서도 인구의 노령화 및 연금수혜자의 비율 증가 때문에 1986년 이래로 사회보장개혁이 이루어지고 있으며, 정부는 국가의 역할을 가능한 한 축소하면서 개인에게 책임과 자립을 부여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스웨덴의 경우에도 사회보험의 심도 있는 개혁을 꾀하고 있으며, 1994년에는 의회에서 개혁노후연금시스템을 위한 법률안이 상정되기에 이른다. 개혁의 필요성으로 경제활동 인구 대비 연금자 수의 증가, 낮은 경제성장 속에서 증가하는 연금지출 비용을 들고 있으며, 전체 국민들에게 노후에 안정적인 수입수준을 보장하기 위해 개혁을 통한 미래의 연금정책을 준비하고 있다.
이상에서 살펴보았듯이, 독일의 사회보장제도는 영국 및 스웨덴의 경우와 달리 비교적 이른 시기에 토대를 마련했다고 볼 수 있다. 독일 사회보장제도의 중심은 사회보험에 있으며, 다른 두 나라에서와는 달리 사회보험의 재정을 근로자와 고용주가 대부분 부담하게 되어 있다. 의료보험과 실업보험을 예로 살펴본 것처럼, 독일의 사회보장제도는 영국이나 스웨덴의 이념이나 운영방식 면에서 약간의 차이를 보인다. 공통점으로는 인구의 노령화와 연금수혜자의 비율 증가에 따른 개혁의 불가피성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이 논문에서 독일학의 한 하위분야로 볼 수 있는 독일의 사회보장제도를 비교 고찰한 내용은 독일을 보다 깊이 있게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보다 생산적인 지역학 연구를 해야할 상황에서 막연한 지역 이해보다는 특정 분야의 깊은 이해를 통해 그 기반을 마련하는 것이 필요한 것이다. 또한 여기에서 논의된 내용은 한국 독어독문학에서 독일학 관련 교과목을 다루는 데 있어서 수업자료의 일부로 활용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이를 계기로 다양한 분야의 깊이 있는 연구를 통해 보다 실질적인 독일학 교육에 기여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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Zusammenfassung

Eine vergleichende Studie  ber die deutsche Soziale Sicherung
-Im Vergleich zu England und Schweden-

Min, Chun-Gi(Chonnam Nat. Uni.)

Gegenstand dieser Arbeit ist die deutsche Soziale Sicherung und ihre Darstellung im Unterricht. Im Mittelpunkt stehen Entwicklung, Merkmale und aktuelle Reformen der deutschen Sozialen Sicherung. Um die Besonderheiten der deutschen L sungen zu unterstreichen, wird auch ein Vergleich mit dem britischen und dem schwedischen System der Sozialen Sicherung durchgef hrt.
Soziale Sicherung im modernen Sinne ist  blicherweise auf das System der Sozialversicherung gegr ndet. Dies ist zuerst in Deutschland zu beobachten, denn in Deutschland wurde schon im Jahre 1883 das Gesetz  ber die Krankenversicherung eingef hrt. In der Folge erschienen 1884 das Gesetz  ber die Unfallversicherung, 1889 das Renten-, 1927 das Arbeitslosen- und 1995 das Pflegeversicherungsgesetz. Im Gegensatz dazu wurden in Gro britannien und Schweden verh ltnism ssig sp t gesetzliche Grundlagen der Sozialversicherung geschaffen.
Die Finanzierung der Sozialversicherung geschieht in Deutschland durch parit tische Beitr ge von Arbeitnehmern und Arbeitgebern, mit Ausnahme der Unfallversicherung. In Gro britannien leisten die Arbeitnehmer nur teilweise Beitr ge zur Sozialversicherung, und in Schweden werden die Versicherungsbeitr ge von Regierung und Arbeitnehmern aufgebracht. Die Krankenversicherung in Deutschland ist institutionell nach den Prinzipien von Solidarit t und Autonomie aufgebaut. In Gro britannien gilt Sozialisierung, w hrend Schweden die Versicherung regional organisiert.
Am 26. 9. 2000 wurde in Deutschland wegen der Gefahr weiter ansteigender Pflichtbeitr ge die 'Rentenreform 2000' durchgef hrt. Kennzeichnend f r das neue Rentenkonzept ist der Aufbau einer zus tzlichen privaten Altersrente. Auch in der Krankenversicherung wird Reformbedarf angenommen, wobei die Kranken zus tzliche Leistungen erbringen sollen, um die Finanzierung der Krankenversicherung zu sichern. Gro britannien reagiert seit 1986 mit Reformen auf steigendes Durchschnittsalter und steigende Rentnerzahlen. Dabei will die Regierung die Rolle des Staats verkleinern und den B rgern die Verantwortung f r ihre eigene Vorsorge  berlassen. Auch Schweden bereitet Reformen am System der Altersrenten vor, um allen B rgern stabile Rentenertr ge anbieten k nnen.
Diese Arbeit soll zum besseren Verst ndnis der deutschen Kultur und Gesellschaft beitragen. Auch bei produktiven area studies kann diese Arbeit hilfreich sein sowie als Unterrichtsmaterial im Landeskundunterricht. Deutsche Landeskunde ist stets erforderlich, um einen aktuellen Unterricht bieten zu k nn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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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심어 : 독일학 Deutsche Landeskunde, 사회보장 Soziale Sicherung, 사회보험Soziale Versicherung
필자 E-Mail : chgmin@chonnam.ac.kr
투고일 : 2002.3.30. / 심사일 : 2002.4.23. / 심사완료일 : 2002.5.22.

 

우리나라 사회보장제도의 문제점 | 게시판 2004/12/12 15:43
http://blog.naver.com/dkddyd/80008466461
출처 블로그 > 푸른나무
원본 http://blog.naver.com/celly2002/100006234821

      III. 사회보장의 특징과 문제점

     1. 사회보장과의 관련문제들
    (1) 임금과 사회보장
 임금과 사회보장은 서로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으며, 특히 최저임금과
사회보장의 급여수준과의 관계는 매우 중요한 것이다. 베버리지는
사회보장정착의 전제로 아동수당, 공영의료보장 그리고 대량 실업의 방지를
주장했으나(주 67: Beveridge, op. cit., p. 8.) 그 후 영국은 최저임금제의
실시도 사회보장의 중요한 전제로 추가한 것이다. 사회보험의 실시에서 고용의
일정 수준의 유지 못지않게 임금수준이 중요한 것은 갹출료의 부담이 어렵지
않아야 하며, 또한 최종임금을 기준으로 지급되는 급여의 적절한 수준을
보장하기 위해서도 임금은 사회보장실현에 중요한 기반이 되는 것이다.
 우리 나라의 국민복지 연금제도가 지금까지 실시 안되고 있는 큰 원인도 바로
보험료 지출이 부담스러울 정도의 저임금 근로자의 수가 많기 때문이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최저임금제가 실시되어야 하고 최저임금제 실시를 위해서는
최저생활비계획이 선행되어야 한다. 우리 나라는 1973년과 1978년의 두번에 걸쳐
반물량방식에 의한 최저생활비 계측작업을 한 바 있다. (주 68: 안창수,
국민생활실태조사보고서(보사부, 1974). 최저생활비(Minimum Cost of Living)는
그 계측목적에 따라 최저생활비, 노동력재생산비, 그리고 생활수준지표를 위한
최저생활비의 세 가지가 있는데, Engel 계수를 원용한 생활수준지표 목적의
최저생활비계측이 적절하다.
 계측대상자로 영국은 미숙련노동자, 독일은 저임금노동자, 일본은 6대 도시의
일용노무자, 그리고 1973년 한국은 일용노무자, 영세상인 및 5단보 미만의
농가를 정했다.
 계측방법으로 이론생활비방식과 실태생활비방식(근로자의 실제 생활비를 조사
계측하는 것으로 그다지 유용하지 않다)이 있고, 전자는 다시 전물량방식(Market
Basket방식; 생필품을 품목별로 수량화하고 이를 다시 금액으로 환산하여
최저생계비를 추계하는 계측)과 반물량방식(음식물량방식 또는 Engel방식)의 두
가지가 있는데 우리 나라는 Engel방식을 채택하고 있다. 이는 최저음식비는
전물량방식으로 추정하고 그 이외의 기본수요(피복, 주거, 광열 및 잡비)는
Engel 계수를 사용하여 간접적으로 추계하는 방식이다.) @p503
 근로자에 있어서 노동의 재생산은 재직중의 생활유지뿐만 아니라 퇴직 후
노동불능시의 생활유지도 가능케 해야 한다. 그러나 퇴직 후의 생활보장문제를
재직중의 임금에 포함시킬 수가 없으므로 여러 가지 사회적 임금의 형태가
성립된다.
   1) 노동조합의 상호보험
 근로자가 공동부담으로 기금을 설립하여 우연의 사고를 당한 자들의 생활을
보장하는 것으로 질병급여금, 재해수당, 양로부조금, 장제비 및 실업수당 등이
있고 19세기 중반 영국에서 발달했다.
   2) fringe benefit(부가급여, 보완임금)
 노동조합이 발달한 구미에서 1930년대부터 노사간의 단체교섭에 의해 결정되는
후생복리시책으로 그 주요 내용은 생명보험, 의료급여, 재해보험, 퇴직,
실업연금, 통근, 교육 등 각종 수당 등이다. 특히 미국의 경우는 유럽과는 달리
사회보장제도보다는 프린지 베네핏제도가 발달했는데 그 이유는 임금수준이
비교적 높고 노사관계가 원만하기 때문이다.
   3) 사회보험급여
 국가의 강제보험제도에 의한 재해, 질병, 폐질 및 노령 등 각종 보험급여는
강력한 노동운동의 결과로 얻어진 것으로 오늘날 가장 대표적 사회임금의 한
형태이다.
    (2) 기업(노동)복지
 사용자가 부담하는 자혜적이고 자의적인 종업원 복지증진책은 전술한 사회적
임금의 최초의 형태라고 말할 수 있다. 넓은 의미의 기업복지는 근로자의 경제,
사회생활의 전반을 포함하는 개념으로 사용할 수 있으나 일반적으로 임금이나
노동시간 등 근로조건을 제외한 근로자의 일상생활의 @p504 향상 유지를
목적으로 하는 제도나 시설을 의미하는 협의의 개념으로 이해하고 있다.
 기업복지의 실시 주체는 정부, 지방행정기관(관계공사 포함), 기업 및
노동단체인데 대체로 기업이 행하는 사업이 중심이 된다. 정부가 행하는 것으로
산재보험과 재산형성의 운영이 있고, 노동복지공사가 운영하는 산재종합병원과
산업재활원이 있으며 이 밖에 근로복지회관의 운영 등이 있다.
 기업이 행하는 후생복지는 법정과 법정 외의 두 가지가 있는데 법정사업은
사용자가 전액 부담하는 산재보험과 퇴직금제가 있고 의료보험은 사용자
부담분만 지급한다. 법정외 사업으로는 식사비용, 체육, 오락비, 의료보건비,
근로자자녀 학비보조비, 출퇴근 교통비, 각종 경조비, 그리고 주택보조비 지급
등이 있다.
 여러 가지 생활사고에 대비하기 위해서는 어느 한 가지 제도에만 의존하는 것은
불안하다는 것이 사회보장 연구자들의 공통된 이론이다. 그래서 흔히들 삼층
또는 삼단보장론(전술)을 들고 나온다. 이는 개인저축이나 사보험제를 이용하는
자기보장, 퇴직금이나 기업연금 및 기업의 후생복지를 받는 직장보장 그리고
공적연금보험이나 공적부조의 혜택을 받는 사회보장을 가리켜서 하는 말이다.
 우리 나라는 공적연금의 조속한 실시는 물론이려니와 우리의 문화, 사회적인
전통배경과 노동현실의 특수성(노동운동의 역사가 짧고, 노동의식이 약하며,
노사간의 세력균형이 성립되지 않음)을 감안할 때 기업복지정책을 강화하는
방안을 연구해야 할 것이다.
    (3) 사회보장과 재분배
 소득재분배정책은 누진세제를 통한 조세정책과 사회보장을 통한 재분배의 두
가지가 있다. 사회보장을 통한 재분배는 다시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한
가지는 계급적 생산요소간의 재분배로 고소득층에서 저소득층에로 소득이전이
이루어지는(예, 공적부조) 수직적 재분배(vertical redistribution)이다. @p505
 다른 한 가지는 수평적 재분배(horizontal redistribution)인데, 이는 동일
계층 안에서 재직시의 소득(생산활동자)과 퇴직시의 소득(노령자)간, 건강한
근로자와 재해입은 근로자간, 그리고 부양아동이 없는 가족과 있는 가족간의
소득이전을 의미하는데 연금보험이나 의료보험은 이런 재분배의 효과가 있고
보험의 원리와 연대구축의 원리(principle of solidarity)의 효과가 잘 나타나는
제도이다. (주 69: International Labour Organization, !!Introduction to
Social !Security (Geneva: ILO, 1984), p. 128)
 이 두 가지 재분배는 양립하여 적용될 수 있고, 특히 사회발전 과정에서 분배의
평등화에 대한 국민의 요구가 높아짐에 따라 수직적 재분배에 대한 관심이
높은데 조세의 누진도를 높일수록 수직적 공평을 더 실현할 수 있다.
 평등화의 해석과 더불어 보편원칙(universality) 대 선별원칙(selectivity)의
문제가 있다. 사회보장은 전국민에게 무차별 평등하게 적용되어야 한다는 입장이
보편원칙이고, 니즈(needs)는 개인적, 사회적 처지에 따라 급여 또는 서비스가
행해져야 한다는 것이 선별원칙이다. 그런데 형식적인 평등은 니즈의 차를
경시한 나머지 필요하지 않는 사람에게도 지급되거나 반대로 니즈 충족에서
차별적으로 취급되는 오평등적인 보편원칙이 적용되어서는 안된다.
 이 때문에 오늘날 평등화의 의의는 신중히 이해되어야 한다. '자유평등'할 때는
생산확대에 따라 분배도 평등해지는 듯 했으나 곧 독점화로 불평등화하게 되어
개인적 니즈 충족이 어렵고 자기책임 아닌 사회적 생활사고가 증가되어
국가개입에 의한 이해조정과 복지증진책이 불가피하게 되었다. 이래서 많은
나라들은 자유와 영리의 혼합정책을 쓰는데 역시 서구제국은 기회균등의 조건을
최대한 실현하는 분위기에서 민주화의 이름으로 자유주의 요소가 강하다.
 그런데 롤즈(John Rawls)는 사회적, 경제적 불평등이 정당화될 수 있는 경우는
최소수혜자에게 최대의 혜택을 주고, 모든 직장이 기회균등의 이름으로 개방되는
상태라고 주장했다. (주 70: John Rawls, !!A Theory of !Justice (Cambridge:
Havard University Press, 1971), pp. 302~303.) @p506
 평등, 공정 및 적절성 등은 중요한 사회가치이나 이들 사회가치는 항상
일치하는 것이 아니다. 복지정책의 수립 및 시행이 어려운 점은 바로 이
때문이다. (주 71: Neil Gilbert and Harry Specht, !!Dimensions of Social
Welfare !Policy(Englewood Cliffs, N.J.: Prentice-Hall, 1974), p. 40.)
 한편 니즈 원칙(according to needs: 필요에 상응한 분배)은 자원의 희소성
원칙 때문에 완전히 실현될 수 없으나 사회보장에 해당되는 연금, 의료, 교육,
주택 등 공동적 소비영역만은 어느 정도로 실현되는 것이 바람직하다.

     2. 사회보장제도의 특징과 문제점
    (1) 특징
 #1 사회보장에 대한 전문지식의 부족으로 제도의 내용이 미흡하다. 대체로
일본의 제도를 모방했는데, 그것도 일본 자체가 기본계획 없이 필요에 따라
제도를 수립함으로써 계층별, 직종별로 분립되어 있던 것을 우리는 한 수 높여
같은 분야의 여러 제도를 한 개의 법제에 담았기 때문에 제도의 내용이 복잡하게
된 것이다.
 의료보험의 경우 급여수준이 너무 높게 급여를 제한한다. 자기부담을 올린다는
등 개선이 아닌 개악의 수정이 급하게 된 것이다. 정상적인 제도발전의 모습은
제도의 운영과정에서 차츰 급여수준이 나아지고 자기부담이 줄어드는 것이
순리일 것이다.
 #2 제도수립이 개별적, 분립적 그리고 미봉식으로 이루어져 관리운영이
다원화돼 있다. 이 때문에 한 가지 제도를 위한 관리 주체가 여러 기관이고
갹출료와 급여의 내용도 서로 다르게 되어 있다. 적용대상수 1백만도 안되는
공직연금제도를 운영하기 위한 관리기관이 세 개(총무처, 국방부, 문교부)나
되고 급여내용도 각각이다. 의료보험의 경우 적용대상의 종류에 따라 네
가지(직장, 임의지역, 당연지역, 공, 교 및 직종)나 되고 역시 갹출료와 @p507
급여내용도 서로 다르게 되어 있다.
 #3 정책결정이 관주도적이어서 국민의 정책수요나 지지에 대한 투입기능이
약하다. 따라서 정책결정을 관이 완전 주도함으로써 전문가의 참여, 이익단체의
이익표면 부재 그리고 일반 국민의 참여 등이 잘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것이다.
 정책결정과정에서의 관의 독주는 사회보장제도의 당위성이나 국민의 간절한
소망의 표출을 어렵게 만들고 정책공약이 늘 정치의 기류에 따라 그리고 행정의
편의주의에 따라 좌우되는 수가 많다. 국민복지연금의 실시에 대한 약속이 그
몇번이었던가를 생각해 보면 정책에 대한 비전이나 숭엄한 자세가 얼마나
부족한가를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2) 문제점
 #1 복지국가를 지탱하는 문화적 조건 즉 복지문화의 수준이 낮다. 로브슨은
복지국가는 거기에 상응하는 복지사회가 있어야 한다고 말하고 복지사회가 되는
조건으로 다음 몇 가지를 들고 있다. (주 72: W.A.Robson, !!Welfare State and
Welfare !Society(London: George Allen & Unwin Ltd., 1976), p. 178, p. 44
and p. 175
 정치에 정치문화가 있고, 행정에 행정문화가 있듯이 복지사회, 복지정책에도
'복지문화'가 있다고 본다.
 가령 복지를 종전의 온정이나 시혜로 볼 것이 아니라 사회권, 복지권으로
인정하는 문제, 급여수준만 주장할 것이 아니라 보험료갹출의 의무나
보험재정보호의 의무도 중시하는 태도, 그리고 '도와 줄 가치가 있는
자'(deserving poor)만 돕듯이 자조, 보족의 노력을 하는 자세 등은
경제성장이나 국민소득의 높고 낮음 못지 않게 한 나라의 복지정책의 성공
여부를 결정하는 중요한 기반이 된다고 생각한다.
 또한 의료보험의 경우 의료비의 수익자부담 내지 환자부담 강화는 '모럴
해저드'(moral hazard)의 견지에서 찬성하는 주장도 높다. 영국인들은
공짜보다는 보험료 갹출을 더 떳떳하게 여긴다고 베버리지가 주장한 것은 바로
복지문화의 수준을 잘 설명하는 것으로 복지에 대한 국민의 의식, 태도 및
행동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사회보장의 수혜자에게
'치욕의 낙인'(stigma of pauperism)을 찍지 않도록 해야 한다.
 다른 한편 서구의 복지국가 달성의 배경문화로 박애주의(philanthropism),
우애조직(friendly society), 그리고 노동조합의 발전과정 등을 들 수 있는데,
이런 여러 태도와 역사적 경험들이 바로 복지문화라고 본다.)
 첫째는 누구나 복지국가에서 향유할 수 있는 권리를 마땅히 보완할 만한 의무의
수행, 둘째는 성실한 근로태도(a more serious attitude to work), 세째는 사회
전체에 공동의식(a sense of fellowship)과 공공심(public spirit)의 @p508
존재, 네째는 복지정책의 수익자가 동시에 사회발전의 담당자가 되는 일 등이다.
이를 요약하면 복지국가의 시민은 개인의 만족을 성취함과 동시에 집단적 또는
공동사회의 복지에 공헌할 수 있는 사회의 건설을 목표로 해야 한다는 것이다.
(주 73: 복지문화에 대해서는, 손규, '복지사회의 조건', '사회보장론집'
(동국대 한국사회보장연구소, 1985), 제5집 참조.)
 그런데 이 복지문화는 복지정책의 모형에 따라 그 내용이 달라질 것이다. 주요
복지정책의 모형을 소개하면 먼저 티트머스(R.M. Titmuss)는, a 보완적 복지
모형(residual welfare model of social policy: 자조원칙 유지), b
업적주의복지 모형(industrial achievement-performance model of social
policy: 생산성응보형), c 재분배형복지 모형(institutional redistributive
model of social policy: 제도적 재분배형)의 세 가지를 소개한 바 있다. (주
74: R.M.Titmuss, !Social !Policy(London: George Allen & Unwin, 1979), p. 30
and p. 31)
 또한 핀커(R. Pinker)는, a 자본주의(capitalism: 자유경쟁경제시장의 존중이
개인과 집단의 복지를 증진한다는 입장), b 사회주의(socialism: 자본주의
체제의 폐지에 의해서만 집단의 복지가 향상된다는 입장), c
집합주의(collectivism: 의회제 민주주의에 의해서만 복지가 증진된다는 입장)의
세 입장을 내세운 바 있다. (주 75: Robert Pinker, !!The Idea of
!Welfare(London: Heinemann, 1979), Ch.12.)
 티트머스는 치욕(shame)이나 낙인(stigma)을 찍는 일이 없이 가장 니즈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충분한 사회 서비스(급여)를 제공하는 과정에서
복지문화의 문제가 발생한다고 보았다. 한편 핀커의 세 입장의 정책원리는 각각
자조적 복지, 타조적 복지 그리고 상호부조적 복지로 해석할 수 있는데, 이 때
어느 모형에 정책의 우선 순위를 두느냐에 따라 복지문화의 내용이 달라질
것이다. 사회가 빈궁을 구제하는 의무와 개인이 가능한 한 빈궁에 빠지지 않도록
노력하는 의무와의 조정문제, 그리고 절약, 자조라는 도덕률의 선행문제 등은
복지문화의 큰 쟁점이 되는 것이다.
 #2 사회보장정책의 확충이 중요한 문제이다. 사회보장의 필요성과 가능성에
대해서는 이미 언급했다. 국민소득수준별 실시국수를 보아도 이미 우리는 10년
전부터 전면 실시를 착수할 수도 있었고, 또한 여러 분야의 @p509 격차현상에서
오는 분열과 갈등을 해소하고 급진주의를 극복하기 위한 당위성면에서 보아도
진작 제도의 확충이 있었어야 했다.
 먼저 소득보장면에서 전국민에 대한 연금제도를 기업연금제와 병행하여
실시해야 하고 현재의 생활보호수준을 실질적 최저생활이 가능하도록 인상해야
한다. 그리고 고용보험제를 일정규모 이상의 사업체부터 실시하도록 법제화해야
한다.
 다음으로 의료보장책을 전국민에게 확대 적용해야 하는데 지역대상자들(주로
농어민, 영세상인 및 자영자 등) 중 일정 기준의 소득층을 제외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공공의료기관을 중심으로 한 공영제의료를 받도록 해야 한다. (주 76:
현재의 다원화된 의료보험제도를 통합하여 #1 의료보험제도와 #2
공영의료사업(현재의 의료보호의 적용범위를 확대하고 의료시설과 의료의 질을
높이는데, 이는 영국의 NHS의 수정모형이라고 말할 수 있다)으로 이원화하여
실시한다. 이렇게 되면 막대한 정부제정의 지출 없이도 전국민에게 의료보장의
혜택이 가도록 할 수 있다.)
 끝으로 사회복지 서비스는 종래의 사후적 시설중심 방법에서 탈피하여 가정과
지역공동체가 책임지고 예방하는 이른바 community care 이론을 도입할 필요가
있는데, 이의 추진, 실천은 민간 중심으로 행해지되 정부나 지방자치기관은
지원, 보완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 특히 가정에 잠재해 있는 경제적 여유와 높은
교육수준의 인적자원들을 어떻게 동원(mobilizing)하는가가 중요한 과제가 되고
있다.
 #3 분립된 제도와 다원화된 운영을 단일, 통합(unification)하여 같은 목적을
위한 상이한 제도 때문에 오는 격차의식과 관리, 운영의 비능률을 막아야 한다.
@p510

      IV. 사회보장의 전망
 체제안정과 사회갈등의 해소, 그리고 격차해소를 위한 재분배 정책을 위해서는
사회보장제도의 점진적 실시가 필요한데 다만 복지와 효율이 양립될 수 있는
방안이 강구되어야 한다. 특히 남북간의 체제 대항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민주화와 균등한 생활수준 향상이 중요하며, 그 중에서도 사회적 필요와 요구를
충족시키는 사회복지는 사회질서와 체제존립의 필요조건이 되는 것이다. 만약
경제성장을 이유로 사회정책을 소홀히 하면 이는 무책임사회가 될 것이다.
 선진국에서는 복지정책의 일부 부작용을 해소하면서 이미 고차원화단계에
들어서고 있다. 물질적 복지의 최저한 보장을 목적으로 하는 National
Minimum형의 기초적 소득 보장정책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생활의
쾌적성(amenity)보장형, 문화환경과 노동환경보장 그리고 정책결정에서의 불평등
시정 등의 고차원 복지사회로 지향하고 있는 것이다.
 이상과 같은 정책실현을 위해서 최근 OECD 가맹제국은 이른바
통합복지정책(integrated social policy)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이는
팽창하는 사회보장을 조정하고 그 효율을 높이기 위해 복지정책을 개혁,
재편성하는 것을 뜻한다. 사회정책은 통합을 창조하고 소외(alienation)를
저지하는 제도이기 때문이다.
 우리 나라는 현재 사회보장에 관한 한 에치오니(Amitai Etzioni)가 말한대로
수단의 부족(the dearth of instruments)이 문제가 아니고 지침의 결 (the
paucity of guidance)이 문제인 것 같다. (주 77: Amitai Etzioni, !The !Active
!Society (New York: The Free Press, 1968).) 현재 국민복지연금의 경우
위정자는 담당관료의 소신있는 정책안을 기다리는 데 반해 담당관리들은
위정자의 양단간의 결단을 고대하고 있는데 그 틈바구니에서 이 소중한 @p511
제도는 1개 국책연구기관의 만년연구과제가 되고 있다.
 제6차 경제사회발전 5개년계획 (1987~1991)안에 의료보험제도의 전국민 확대와
노령, 사망, 재해 등의 사회적 위험에 대비한 연금제도의 실시계획이 들어 있을
뿐 사회보장 전반에 대한 기본계획이나 구상은 없다.
 오늘날 국민소득의 대소가 생활수준과 비례한다고 볼 수 없으므로 소득과 같은
경제적 지표 외에 생활관계지표(복지지표, 사회지표, social indicators)의
수준이 높아야 하고 따라서 경제적 후생은 경제외적 후생과 병행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빈곤정책사에서 2차대전까지를 빈곤에 대한 투쟁의 역사라고 한다면, 그 후엔
불평등에 대한 투쟁이라고 할 수 있고 그 대응책이 바로 사회보장정책이라고 할
수 있다. 빈곤은 사회안정의 저해요인인데 경제가 성장할수록 새로운 빈곤계층이
발생하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끝으로 사회의 발전을 위해서는 경제적 발전 못지 않게 정신적 발전도
중요하므로 19세기 중반 영국에서 일어났던 사회개혁운동이나 20세기 초반
일본에 나타났던 사회개량운동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정신적, 도덕적 발전이
앞서지 않은 어떤 제도나 물질(부)도 오래 지탱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사치, 낭비
그리고 허영심은 바로 다른 계층의 빈곤을 초래하기 때문이다.

68혁명, 그 긍정성과 한계 | 동네 우물 2006/03/23 02:55
http://blog.naver.com/silkliver/22838385

68혁명, 그 긍정성과 한계



 

1. 들어가며

 

  1968년 혁명의 가장 인상적인 특징은, 그것이 국민국가의 경계를 뛰어넘는 '세계적' 성격을 보여주고 있다는 사실이다. 1960년대 초부터 시작된 미국에서의 학생운동 및 반전운동과 1960년대 중반 폭발한 이탈리아에서의 학생운동 및 북부노동자들의 공장점거운동에서 점화되어, 1968년 5∼6월 프랑스에서의 학생봉기와 1천만 농자 총파업에 이르러 절정에 달했던 이 시기 저항운동의 사례들은 이루 다 열거할 수 없을만큼 포괄적이고 세계적인 수준의 것이었다. 프랑스에서의 학생봉기와 노동자투쟁, 미국에서의 시민권운동·학생운동·흑인인권운동·여성해방운동, 멕시코 대학생들의 올림픽 개최 반대 운동과 정부군에 의한 학살, 일본에서의 전공투와 반전, 반제운동, 등등이 이 시기의 역사적 흐름을 보여주는 풍경일 것이다.

 

  그러나 68년 운동의 의의는 위와 같은 '세계적' 운동으로서의 의의를 넘어 저항운동사적으로 중요한 '역사적' 의의를 가진다. 월러스틴에 의하면 넓은 의미의 구좌파를 제도화한 것은 1848년이었으며, 새로운 사회운동을 제도화한 것은 1968년이었다. 1848년은 1871년의 빠리꼬뮨과 이후의 바쿠대회, 반둥의 거대한 예행 연습이었다. 1848년이 이루어 놓은 근본적인 정치전략은 사회적 변혁으로 가는 길에서 반드시 거쳐야 하는 중간영역으로서 '국가권력의 장악'이라는 목적지를 설정하였다는 점이었다.(주1) 역사적인 구좌파 반체제 운동의 세 가지 주요형태는 ①제 3인터내셔널의 공산주의운동과 ②제 2인터내셔널의 사회민주주의운동, 그리고 ③유럽 외부에서의 민족해방운동이었다. 이들은 한가지 점에서 공통점을 가지는데, 이들은 공히 근대세계의 기본적인 정치구조를 '국가'라고 여겼으며 자신들이 무엇인가를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국가기구를 장악하고 국가권력을 획득하는 것이 제일의 과제라고 인식하고 있었다.

 

<표 1> 세계반체제운동의 역사

상승하는 계급 혹은

계급들

조직형태

전망

전술

1789 : 부르조아지

대의제적 의회

형식적 민주주의

자유·평등·박애

혁명전쟁

1848 : 도시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적 의회와 정치정당

경제적 민주주의

노동조합

민주적 헌법

인민봉기

1905 : 농촌 프롤레타리아트

소비에트/평의회

보통선거권

노동조합

제국으로부터의 해방

총파업

1917 : 도시와 농촌의 프롤레타리아트

전위정당

"프롤레타리아트독재"로서의 사회주의

토지·빵·평화

권력의 조직적 획득

1968 : 새로운 노동자 계급

행동위원회/집단들

자주관리

민중에게 권력을

상상력

공공영역의 쟁탈

일상생활

자료) G. 카치아피카스, 『The Imagination of the New Left: A Global Analysis of 1968』, pp.87

  1960년대와 1970년대 초기의 운동들은 이러한 19세기 이래의 반체제운동 방식들과 대립되고 또한 그것을 공격하는 특질들을 지니고 있었는데, 중국의 문화혁명과 서유럽·일본·멕시코의 학생운동들, 유럽의 자치주의 노동운동 등은 공히 운동 스스로가 관료제적 구조를 세우고 공고히 하는 것이 갖는 위험을 하나의 주제로 삼은 운동들이었다. 이러한 새로운 운동경향의 출현은 다음과 같은 세가지의 요인들에 힘입은 것인 바, ①19세기적 반체제운동의 여파로 관료제적 조직의 권력이 엄청나게 확대되고 심화되었다는 점, ②그러한 조직들의 출현과 팽창에 밑거름이 되어준 기대들을 충족시킬 능력이 그 조직들에게 점점 줄어들었다는 점, ③직접적인 형태의 행동들, 즉 관료제적 조직에 의해 매개되지 않는 행동들의 효력이 커졌다는 점 등이 그것이다.(주2) ( <표 1> 참조)

  한국에서도 학생운동과 시민운동 진영을 중심으로 68년의 정신을 나름대로 수용하고자 하는 시도들이 있어왔다. 특히나 현재와 같은 정세는 68년 당시의 상황과 일정부분 유사한 양상을 보이고 있으며 이러한 관점에서 68과 신좌파에 착목하고자 하는 시도들이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한국에서의 1968년의 수용은 이 역사적 사건을 지나치게 미학화, 혹은 철학화하고 있으며, 이것의 필연적인 귀결로서 정치적 낭만주의, 혹은 자유주의적 반(反)노동자주의의 폐해를 낳고 있다. 이 글의 기본적인 문제의식은 68년 시기 생성되었던 실천적·사상적인 흐름들 가운데 기존하는 계급운동과의 논쟁적인 함의에 관련하는 특정한 경향을 집중적으로 조명하고자 하는 것이다. 여기서는 68년 운동의 형성과 전개에 대한 역사적 기술은 생략하고, 68년의 반란을 상징하고 있는 사상적 흐름들을 검토하며 68의 유산을 그 긍정성과 한계에 대한 일정한 입장을 서술하고자 한다.

 

2. 1968년의 유산Ⅰ- 자치(autonomy): 아래로부터의 혁명

 

  남한 변혁운동에서도 역시 그러하였던 것처럼, 자본주의로부터 사회주의로의 이행에 관한 공식 마르크스주의 입장에서는 이행의 가장 핵심적인 의제로서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의 문제를 상정해왔다. 이러한 입장에서 두드러지게 보여지는 모습은 反자본주의적 운동의 핵심과제를 부르주아 국가의 파괴와 프롤레타리아 국가의 수립이라는 두 가지 지점에 고정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레닌의 국가론에서 탁월하고 명료하게 정돈된 이 관점은, 자본주의 하에서 부르주아 국가권력의 행사가 초래하는 총체적인 효과에 대한 가장 예민한 문제의식을 담고 있으며, 따라서 그것은 지난 백여년 동안의 사회주의 운동의 역사속에서 개량주의에 대항하는 가장 강력한 이론적 기초를 제공해 왔다.(주3)

 

  그러나 이와 같은 관점은 혁명의 근본문제를 국가권력의 문제로 설정함으로써(주4), 反자본주의운동의 근본적 문제설정을 전략적 요청에 의해 대체하는 오류를 내포하고 있다. 부르주아 국가의 파괴라는 전략적 요청이 있기 이전에 존재한 것은 분명 자본주의의 부정이며, 자본주의의 부정이 바탕하고 있는 철학적인 기초와 정치적인 요청은 '인민의 자기통치와 자기관리'인 것이다. 마르크스에게서 부르주아 사회의 근본문제는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삶의 조건과 삶의 양식, 그리고 생산 조건, 생산활동, 생산물에 대한 통제권을 갖지 못한다는 점이었다. 이상과 같은 부르주아 사회에 대한 부정을 표현하는 역사적 전거로서 1871년의 빠리 꼬뮌, 1905년과 1017년의 러시아 소비에트, 1920년 독일 노동자·농민·병사 소비에트, 1919-1920년의 이탈리아 평의회 운동, 1937년 스페인에서의 투쟁, 1956년 헝가리 소비에트 등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사회민주주의와 코민테른 공산주의, 그리고 이후의 유로코뮤니즘이 공유하고 있는 점은, '국가'를 둘러싼 투쟁을 이행에 있어서의 유일한 전략적 과제로 삼고 있었다는 점이다.

 

  1968년은 급진적인 자본주의 비판과 더불어 스탈린주의 및 사회민주주의와의 투쟁이라는 형태로 현대적 자주통치·자주관리의 정신과 그 운동의 조직적, 정치적, 문화적 형태를 보여주었다. 이러한 반란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의 역사적 의의를 갖는 것이었다 : ①집단주의의 폭력에 대항하여 개인주의의 혁명적 잠재성을 입증하였고, ②저항운동의 과정에서부터 개인적 해방과 사회적 해방의 결합이 추구되어야 함을 보여주었으며, ③중앙계획에 의존하는 공학적 사회주의론에 대항하여 자주관리 사회주의론을 주장하는 것이 그것이다.

 

  마르크스주의에 내재해 있으며, 스탈린주의에 의해 그 역사적 형태를 드러내었던 집단주의의 테러에 대한 철학적 비판으로 가장 대표적인 것은, 당시 프랑스의 실천적 지식인들의 대표였던 사르트르의 철학적 작업들이다. 그에 의하면 현상태에 대한 비판은 개개인들에 의하여 이루어져야 하는데, 이러한 비판적 탐구는 특정한 역사적 조건에 의하여 생성되고 또 가능하게 되었던 것이었다. 그 역사적 조건이란 스탈린주의로 인하여 맹목적이고 원칙없는 실행과 굳어진 사고 사이의 분리가 이루어지고 이에 따라 실천과 지식 사이의 괴리가 생산되는 상황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와 같은 조건 위에서 생성된 비판적 탐구는 생산 및 생산관계에 대한 이해로 나아가는 마르크스주의 변증법의 운동에 반대한다. 그것은 개개인들의 비판적 탐구를 통해 타자들 및 다양한 실천들과의 유대의 총체성을 발견하기 위하여 직접적이고 개인적인 것으로부터 시작하여 자신의 실천을 완성하는 활동을 추구한다. 지적인 활동은 수동적이고 대상화된 개이들을 동원하기 위한 사회공학의 수단이기를 멈추고 저항의 주체가 되어야 할 개개인들이 자신들의 실천과 결속을 이루어내기 위한 방법이 되어야하는 것이다.

 

  한편, 1945년부터 66년까지 존재하였던 저널인 『사회주의냐 야만이냐』의 지도적 사상가였던 카스토리아디스는 1968년에 분출된 자치사상의 철학적 기초를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그에 의하면 개인적인 수준에서의 타율성이란 스스로 선택되지 않은 법칙에 의한 지배를 의미하며, 그것은 현실과 욕망을 정의하는 기능을 갖는 자율화된 상상계에 의한 지배를 의미하는 것이다. 따라서 개인적 수준에서의 자치란 의식적인 자기 통제와 자기 입법을 의미한다. 즉 그것은 상황에 대한 인식에 기초한 결정권력인 것이다.(주5)

 

  여기에서 그는 두가지의 문제를 지적한다. 첫째로, 관념론적인 절대적 자아, 혹은 절대적 타자를 상정하는 오류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 자아란 타자의 외부에 존재하는 독립적 실체가 아니며 또한 그것은 다른 자아들과의 연관속에서만 존재하는 상호주관성의 영역이기도 하다는 점이 지적되어야 한다. 타자를 제거하는 것이 순수한 자아로 되돌아가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타자에 위한 지배로부터 자율적인 삶으로의 전이는 그 자신을 초월하지만 동시에 그 자신에게서 유래하며 그 자신을 역사와 사회 속으로 뿌리내리게 하는 진실에 참여하는 것을 통하여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 이와 연관된 두 번째의 문제는 타자의 지배가 단지 '담론'의 문제가 아니라 '제도'라고 아는 익명적 물질성 속에서 작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것은 시장의 경제적 메커니즘, 계획의 합리성, 그리고 무기와 급료, 상품, 법정의 결정, 감옥 등을 포괄한다. 지배는 단지 무의식의 문제가 아니라 이 모든 물질적인 제도들에 의해서 개개인들에게 육화되어 있는 것이다. 소외는 제도화 되어 있으며, 따라서 자치를 향한 투쟁은 근본적으로 사회적인 것이다.

 

  카스토리아디스와 더불어 1968년 자치사상을 이론적으로 규명하고 있는 이가 앙드레 고르이다. 고르는 자신의 자주관리사회주의론을 통해 노동조합주의적 관점을 비판하고, 대안적인 노동계급 전략으로 임금수준에 대한 요구, 자주통제에 대한 요구, 노동자들의 자주적 결정권에의 요구를 서로 분할할 수 없는 목표 및 전략속에서 통일시킬 것을 주장한다. 분할되어 있는 노동자계급을 통일할 수 있는 유일한 전략은 고용자들과 국가를 공격하는 것이며, 그를 위한 유일한 길은 그들로부터 결정과 통제의 권력을 박탈하는 것이라고 본다. 따라서 그의 전략은 그와 같은 일체의 사안들에 대한 결정권력을 획득하기 위한 것이다.

 

  그의 자주관리 사회주의론은 이제까지 사회주의가 경제 전반에 대한 관리적 효율성과 우월성에 기반하는 축적수단으로서 인식되어 왔다는 점을 비판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한다. 그에게 있어서 사회주의란 '결합된 노동자들'에 의한 자기 결정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현존했던 사회주의 국가들에서 가장 문제시되어야 할 부분은 개인적인 필요를 총체적인 생산계획이 요청하는 바에 종속시켰다는 점에 있다. 이에 따라 구체적인 개인들과 사회적인 개인들 사이의 거리, 개인적 이익들과 일반이익 사이의 거리는 더욱 멀어지고 그들간의 괴리는 구조화되어 간다. 이러한 과정에서 강력한 이데올로기로서 성장한 생산의 윤리는 자기부정·검소·자기단련·청결함·성적 억압 등과 같은 부르주아의 청교도적 윤리에 가까운 것이었다. 그것은 인간은 생을 즐기고 자기 자신을 한껏 배양하기 위해서 이 세상에 던져진 것이 아니라 노동·사회·도덕·사회주의 등과 같은 타자를 위해 희생하고 헌신하기 위하여 이 곳에 태어났다는 식이었다.

 

  고르의 탁월함이 드러나는 곳은 바로 이 부분인데, 그는 사회주의 사회에서의 전체주의적 지배의 기원을 이념의 문제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저발전 사회주의를 극복하기 위한 생산력적인 요청을 사회주의적인 방식으로 해결해가는 과정에서 작용한 정치적, 경제적, 이데올로기적인 변수들의 앙상블로 이해했기 때문이다. 부르주아 사회로의 복귀, 사회주의의 진전이냐의 갈림길이 되는 곳은 '생산력적인 발전을 이루기 위한 총체적이고 장기적인 경제적 계획의 필요성'이 '결합된 생산자들의 조직적인 자기결정 행위'와 어떻게 공존할 수 있는가라는 문제가 제기되는 것도 이러한 지점에서이다. 고르에 의하면, 이 지점에서 결정적으로 요구되는 것은 당면한 행정적·관리적 과제들 및 정치적지지의 필요성으로부터 어느 정도 자유로운 독립적 정당과 노동조합이다. 사회주의적인 경제운영을 위해서는 자유로운 노동조합들의 조직적인 토론과 의사결정으로부터 경제계획을 위한 사전적 정보를 끌어낼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제 자주관리는 사회주의에 대한 철학적·정치적인 규정에 있어서도 핵심적인 위상을 부여받게 되는 것이다.(주6)

 

  한편 프랑스에서의 자치사상이 주로 철학적이고 정치적인 측면에서 발전해 왔다면, 미국 신좌파에 뿌리를 준 SSA학파의 경우 경제이론 및 노동과정론을 중심으로 노동자계급의 자주관리에 대해 실용적으로 접근했다.(주7) 이들이 내세우는 '작업장 민주주의'론은 임노동의 철폐나 사적소유의 폐지 등의 근본적인 문제보다는 현실적 조건들을 중심으로 해서 노동자계급의 세력관계를 강화하는 데 주로 관심을 두는 것이다. 이들은 자신들의 대안이 혁명에 의하여 사회주의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사회주의적 변혁이 가능한 여건이 되는 '민주적인 사회적 축적구조'를 구축하는 데 적합한 것이라 주장한다.

 

  이들은 경제적 권리장전이라는 대안을 통해 이러한 주장을 구체화하고 있는데, 이의 가장 중요한 골자는 노동자의 참여를 통해 생산의 위계구조를 완화하고, 투자에 대한 민주적 통제를 강화하는 것이다. 모두 4기의 큰 조항으로 이루어진 경제적 권리장전의 두 번째 항은 민주적 작업현장에 대한 권리로, 이는 '민주적 노동조합에 대한 공공의 노력', '노동자들의 의사결정권', '민주적 생산유인', '공동체 기업의 발주'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들의 이론속에서 '노동의 정치'는 유토피아적이라는 이유로 부정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가장 현실적임에도 불구하고 자본가적인 통제체제라는 정치적인 과정으로 인해 도입되지 않는 것'으로 설명된다. 또한 노동자의 자주관리 능력에 대해서도 이들은 역시 형이상학적인 원칙이 아니라 구체적인 이론과 분석으로 응수하고 있다. 물론 이들의 이론이 앞서 언급된 카스토리아디스, 고르 등의 자치사상적 관점과 통합되지 않는 한, 최근 유행하는 리스트럭쳐링류의 경영학적 노동과정론 및 우경적 포스트포드주의론과 크게 차별점을 이룰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쉽사리 노동의 정치를 포기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그리고 신보수주의라는 반동에 대한 처절한 반항이라는 의미에서 이들의 충고는 한 번쯤 귀기울일만한 가치를 갖는다 할 것이다.

 

 

3. 1968년의 유산Ⅱ - 프롤레타리아트 개념과 저항주체의 문제

 

  68년 운동은 저항의 주체와 그 장소에 있어서 고전적인 마르크스주의 혁명론의 근본전제들을 정면으로 부인하는 사건이었다는 점에서 그 역사적 중요성을 발견할 수 있다. 프랑스·독일·미국(그리고 어느 정도는 이탈리아까지)등과 같은 중심부의 발전된 나라들에서 발발되었던 이 운동들은, 기술자들과 고용된 전문가들, 오프라인 사무노동자들 서비스 부문 노동자들, 그리고 학생들과 같이 산업 프롤레타리아트의 '주변적'집단으로 이해되어 왔던 집단들에 의해 주도되었다. 이러한 성격으로 말미암아 68년 운동이 마르크스주의적 혁명론의 근본전제가 지니고 있었던 권위를 결정적으로 실추시키는 심각한 도전이었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루카치로부터 가장 관념적이고 철학적인 형태를 찾아볼 수 있는 마르크스주의 혁명론은 다음의 두 가지 기본전제로부터 출발하고 있다. 첫째, 동질적인 집단적 주체로서의 (산업)프롤레타리아트야 말로 사회주의 혁명의 유일한 과학적 담지자라는 것이며(주8), 둘째, 자본주의의 혁명적 전복이 수행되고 대안적 권력이 수립될 유일한 장소는 공장이라는 것이 그것이다.(주9) 사회주의 운동과 이론에서 프롤레타리아트 계급이라는 개념을 둘러싼 혼돈은 이미 19세기 후반부터 시작되었다. 그것은 임금생활자 가운데 직접적으로 상품생산과정에서 노동하는 노동자들로 포괄할 수 없는 집단이, 축적을 위한 중요한 구성요소로서 등장하면서부터였다. 68년은 프롤레타리아트 개념 규정을 논쟁적인 것으로 만드는 또 한번의 역사적 사건이 되었으며, 그것은 투쟁의 주체와 장소 모두에 대한 뜻밖의 질문을 던졌던 것이다.

 

  우선, 68년이 제기한 본격적인 문제들을 살펴보기 전에 구좌파의 완고한 프롤레타리아트론이 지녔던 내용과 함의에 대해 간단히 살펴보기로 하자. 프롤레타리아트에 대한 공식 마르크스주의의 규정에 따른다면, 프롤레타리아트는 맑스의 문헌적인 정의에 따라 '생산적 노동을 수행하는 계급'으로 정의될 수 있다. 이 때, 생산적 노동이란 지출된 노동과 노동력 재생산비용 사이의 차이에서 비롯되는 잉여노동을 의미하고, 이러한 잉여노동은 오직 상품생산-어떤 상품의 최종 소비지까지 운송하는 것을 포함하여-에서만 추출될 수 있는 것이다. 상당부분 맑스 자신으로부터 유도될 수 있는 이러한 관점에 따를 때, 상품의 유통에 소요된 시간(판매, 구매, 정보의 교환)은 어떠한 잉여가치도 산출하지 못하는 순수비용에 불과하다. 만약 우리가 생산적 노동을 노동자계급을 정의하기 위한 기준으로 받아들인다면, 채취업이나 제조업, 그리고 운송업에 종사하는 임금노동자만이 프롤레타리아트를 구성할 것이다. 따라서 노동자계급은 19세기에나 전형적이었던 남성 육체노동자라는 의미로 협애화될 것이다.(주10)

 

  이러한 방법은 그 형식상의 차이만을 떼어놓고 본다면, 상당부분 부르주아 사회학자들의 방법과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 즉, 맑스주의자들이 생산적 노동만을 완고하게 고집하듯 부르주아 사회학자들은 신분, 직업, 수입 등의 여러 가지 분류표를 통해 '계급'을 구분해내고자 하기 때문이다. 부르주아 사회학자들의 결론 또한 완고한 맑스주의자들의 그것과 너무도 유사하다. 이러한 분류방법을 통해, 이들 역시 노동자계급을 육체적 노동에 종사하는 사람으로 축소시키고 이러한 계층의 비율이 자본주의의 발달에 따라 점점 더 줄어들고 있음을 논증하는 것이다.

 

  문자 그대로의 맑스를 따르고자 했던 위의 논리와는 달리, 맑스의 '방법', 혹은 그 정신을 이어받는 길은 없었을까? 68년이 제기했던 난제들은 바로 이러한 창조적인 접근을 통해서만 제대로 해결될 수 있을 것이다. 이미 맑스 자신이 이러한 접근을 부분적으로 시사하고 있었다. 그에 따르면, 자본주의의 근대공업은 "기계, 화학공정 및 다른 방식들을 통해 생산의 기술적인 기초에서뿐만 아니라 노동자의 기능과 노동과정의 사회적 결합까지도 계속적인 변화를 일으키고 있는"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노동과정의 사회적 결합에서 발생하는 변화를 포착할 수 있을까? 아마도 68년의 변화, 특히 전통적인 노동자계급과는 다른 새로운 그 누구를 포착하기에 가장 적절한 방법은 맑스의 다음과 같은 문구들로부터 추적될 수 있을 것이다.

 

  날이 갈수록 전반적 생산과정의 진정한 지렛대는 개별 노동자가 아니게 된다. 그 대신, 사회적으로 결합된 노동력과 전체 생산기구를 함께 구성하는 여러 경쟁하는 노동력들이 상품을 만드는 직접적 생산과정에 매우 다른 방식으로 참여한다. …… 어떤 사람은 손으로 더 잘 일하고 또 어떤 사람은 머리로 더 잘 일한다. 어떤 사람은 경영자, 엔지니어, 기술자로서 어떤 사람은 감독으로서, 또 어떤 사람은 육체노동자나 근면한 일꾼으로서 더 잘 일한다. 꾸준히 늘어나는 노동유형들의 수는 생산적 노동이라는 직접적 개념 속에 포함되어 있다. 그리고 생산적 노동을 수행하는 사람들은 생산적 노동자, 즉 자본의 직접적 착취를 받으면서 생산과정과 그 확장과정에 종속된 노동자로 분류된다. 그들은 자본에 의해 직접 착취당한다. …… 그리고 이 집단적 노동자의 구성원에 불과한 개별적 노동자의 기능이 직접적 육체노동에서 더 먼 것인지 가까운 것인지는 대수롭지 않은 문제이다.(주11)

 

  이러한 맑스의 직관적인 영감은 프롤레타리아트에 대한 두가지 방향의 수정을 통해 구체화될 수 있을 것이다. ①우선, 프롤레타리아트의 정의만을 바꾸는 것으로서, 이때 프롤레타리아트는 '생산적 노동'을 수행하는 계급이 아니라 "자신의 노동력을 팔도록 만드는 사회경제적 강제에 종속되는 사람들"(만델)이다. 이러한 입장에 설 때 생산적 노동/비생산적 노동의 범주는 여전히 유효한 것으로 남게 되고, 이제 착취를 당하면서(즉, 프롤레타리아트이지만) 비생산적 노동을 수행하는 (은행원, 국가공무원, 등) 사람들을 프롤레타리아트로 규정하는 것이 개념적으로 가능하게 된다. 이러한 방식은 캘리니코스, 라이트, 스미스 등이 취한 입장인데, 이는 두로 2차대전 이후 복지국가에서 크게 확장된 국가, 공공부문을 어떻게 볼 것인가라는 문제와 관련하여 취해진 입장이다. 하지만 이러한 몇몇 설명적인 장점에도 불구하고 이 문제설정으로는 자본주의적 적대의 역동적인 성격이 충분히 파악될 수 없다. 노동력의 판매라는 규정으로 프롤레타리아트가 감수해야 하는 착취의 현실을 지적할 수 있을지는 모르나, 새롭게 구성된 적대가 갖는 독특한 질을 포착할 수는 없는 것이다. 68년이 제기한 계급의 문제는 단순한 착취의 실존을 설명하는 것 이상을 요구한다. 즉 그것은 '새로운'노동자계급의 착취를 기술하는 것에 머무르기보다 그들의 계급위치가 해방을 향한 투쟁에서 어떠한 역할을 담당할 수 있을 것인가가 오히려 중요한 관심사인 것이다.

 

  ②또한 앞서와 같은 문제의식에 입각해 첫 번째와는 다른 방향을 생각해 볼 수 있는데, 이는 생산적 노동의 범주를 수정하는 것이다. 이는 네그리, 말레, 고르등이 나아갔던 방향인데, 이들의 문제의식은 자본주의적 생산의 변화된 패턴 및 이에 따른 계급적대의 변화된 위치와 성격을 파악하는 것이다.(주12) 네그리가 생산의 변화된 패턴에 따른 계급적대에 초점을 맞추는 반면, 말레와 고르는 이러한 변화로부터 유래하는 새로운 계급의 내용과 특징에 중점을 두고 있다. 이들에게서 '생산적 노동'은 앞서의 협소한 정의처럼 가치증식의 상품생산적이고 물리적인 과정으로서가 아니라, 특정한 노동이 수행되는 총체적 관계망 속에서 파악된다. 즉 프롤레타리아트 계급 전체가 생산적 노동의 행위자로 간주되어야 하며, 다양한 형태의 프롤레타리아적 노동의 상호의존은 이런 노동이 생산적 부분과 비생산적 부분으로 구분된다는 사실보다 중요하다는 것이다.

 

  네그리는 60년 말과 70년대 전체에 걸쳐서 이탈리아에서 적지않은 영향력을 행사했던 아우토노미아 운동의 이론가로 유명한데, 아우토노미아는 번역어 그대로 노동자계급의 자립적 힘을 강조하는 입장을 말한다.(주13) 그의 초기 입장에서 가장 눈에 띠는 것은 계급적대의 논리를 확대하는 속에서 이를 재구성하려는 시도이다. 자본의 확장은 스스로를 표현하는 강력한 힘이지만 대신 확장할 때마다 해결해야 하는 적대적인 관계를 수반한다. 그는 이러한 적대적인 관계를 개념화하면서 '계급구성'이라는 개념을 제시하는데, 이는 노동자계급의 사회화과정 및 투쟁속에서 자본에 대항하여 아래로부터 구성되는 노동자계급의 적대적 경향의 확산과 통일을 지칭하는 개념이다.

 

  이러한 기준에 따라 계급구성의 변화는 다음과 같은 세가지 단계-대공업 시기의 첫국면에 나타나는 '전문 노동자', 대공업의 두 번째 국면인 1차 세계대전에서 1968년 혁명까지의 시기에 나타나는 '대중 노동자', 68년 이후의 '사회적 노동자'-를 통해 파악될 수 있을 것이다. 먼저, 높은 숙련수준을 안에서 기계의 부속품으로 취급되지만, 노동 사이클에 대한 명확한 지식을 갖추고 있었기에 이들의 기술적 자질이 대량화되고 복잡해진 초기적인 기계생산의 보완물이 될 수 있었다.(주14) 한편, 이러한 노동자계급의 도전에 직면하여 자본은 노동과정의 재구성을 끊임없이 추구했는데, 그 결과가 대중 노동자의 형성이었다. 대중 노동자를 주요 구성원으로 하는 포드주의적인 축적체제는 구상과 실행의 분리를 통한 노동과정의 조직으로써 유래없는 생산성을 확보할 수 있었고, 이 유래없는 생산성은 케인즈주의적인 복지국가의 분배 메커니즘을 매개로 자본가와 노동자 사이의 타협이 가능한 조건을 형성하였던 것이다. 그러나-아글리에따가 지적하듯-이러한 재구성은 직접적으로 노동의 집단화를 초래하게 된다. 이러한 집단화는 노동자들을 분할하는 것을 더욱 어렵게 만들고, 개별적 산출 보너스를 통해 노동조건의 악화에 노동자 스스로 협조하도록 유도하는 것을 어렵게 만든다. 포드주의적 작업규준은 노동조건 개선을 위한 전반적 투쟁에서 노동자들을 단결시키는 경향을 드러낸다.(주15)

 

  이러한 노동자계급의 전투성에 직면하여 자본은 다시 한 번 '목숨을 건 도약'을 시도하게 된다. 자본은 노동자계급이 보여준 저항의 완강함을 피하기 위해 지리적 이동성과 시간적 유동성의 극대화를 꾀하게 되며, 이 과정에서 정보과학이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하이 테크놀로지는 '노동자 없는 공장'이라는 계획을 수행함으로써 대중 노동자의 요새를 잠식한다. 이러한 생산의 재조직화는 부르주아 정보화사회론에서 묘사되는 탈산업사회와는 거리가 멀다. 네그리가 보기에 이러한 상황은 오히려 맑스를 따라 '자본에 의한 실질적 포섭'으로 묘사될 수 있다. 과학기술적인 하부구조에서의 간접노동은 작업장에서의 직접노동만큼 중요하게 된다. 유통-마케팅, 소매, 금융업 및 은행업-은 곧 바로 생산과 맞물리게 되었고, 스스로가 이윤추출을 위한 주요한 영역이 된다. 노동력의 재생산은 대규모로 상품화된다. 정보기술의 통합적이고 계산적인 힘을 통해 이러한 발전은 강력하고 상호연관적인 새로운 정점에 도달한다. 이제 직접적인 물리적 생산의 장소인 공장만을 잉여가치가 추출되는 특권적인 장소라고 말하기는 힘들게 되었다. 그 대신, 생산의 공간은 자본의 거대한 대사가 증식하고 있는 접속부들로 확대된다.

 

  사실, 대중 노동자론과 사회화된 노동자론 사이에는 일정한 시각의 단절이 존재한다. 포드주의적 대량생산 체계가 가져온 노동자계급의 집단적인 힘의 표출과 노동현장의 적대에 대한 설명에 주목하고 있는 것이 대중 노동자론이라면, 사회화된 노동자론은 사회적 적대의 확산과 이에 따른 계급투쟁 및 노동의 변화양상을 추적하기 위한 것이다. 이러한 시각에서 본다면, 68년의 대폭발은 대중 노동자에서 사회화된 노동자로의 이행기에 터져나온 자본과 노동 사이의 중층적인 적대의 표출이었다. 2차대전 이후, 케인즈주의적 복지국가의 당근에 묶여 있던 대중 노동자들은 더 이상 케인즈주의적인 타협에 만족하지 않게 되었다. 이러한 위기로 인해 자본은 대중 노동자들을 사회적 노동자들로 대체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이러한 자본의 목숨을 건 가치증식에 제동을 걸고 나타난 것이 바로 68년의 불꽃, 즉 사회적 노동자들의 투쟁이었던 것이다.

 

  비록 68년의 학생봉기를 사회화된 노동자들의 투쟁으로 단순규정할 수는 없지만, 이 투쟁은 "이전에 생산에 대해 부차적인 것으로 보였던 일련의 전체 기능들이 자본의 순환 속에 완전히 통합되어"있음을 보여준 것이었다. 1950년대의 블루칼라 노동자들의 잠재적 잉여에 의존했던 지배계급은 수백만명의 노동자를 화이트칼라 부문으로 전환시켰다. 대학생 인구의 양적인 증가는 대학생의 사회적 역할의 질적 변화를 반영한다. 대학생 수의 엄청난 증가는 "기술적 사회조작의 테크닉에 대한 자본의 엄청나고 갈수록 커지는 욕구에 따른 것이었다."(주16)따라서, 프롤레타리아트 개념은 직접생산에 집중된 노동자계급으로부터 사회적 노동력으로 확장된다. 사회적 노동력은 새로운 노동자계급의 잠재력을 표현한다.

 

 

4. 1968년의 유산Ⅲ - 대학혁명에서 사회혁명으로

 

  앞서 네그리와 말레, 그리고 고르의 이론적 모색에서 보듯, 대학혁명은 분명히 적대의 새로운 경향을 드러내고 있었다. 대학은 더 이상 전통적인 지배자들의 인문교육을 담당하는 기관이 아니었다. 대학은 오히려 자본이 요구하는 새로운 노동의 유형, 즉 사회적 노동으로의 편입이 발생하는 출발점이었던 것이다. 사회혁명의 이행자로서의 청년층 및 대학생의 중요성은 이러한 맥락에서 제대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1968년의 반란은 그동안 불안정하게 지탱되어 오던 자유주의적인 교육학의 전제들을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사건이었다. 자유주의 교육학적 전제들이 갖고 있었던 모순은 그것이 규범적으로 상정하고 있었던 자유롭고 전인적인 인간상이 자본주의의 총체적인 관계망과 공존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모순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점에서 비판받아야 한다.①우선 자유주의적 관점은 교육제도가 교육 및 학습이 이루어지는 유일한 장소라는 전제를 갖고 있다. 반면에 필자는 노동의 성격이 인간발달의 기본적인 결정인자라는 보울즈와 진티스의 입장에 전적으로 동의한다.(주17) 이러한 주장에 동의할 수 있다고 전제한다면, 교육과 인간형성에 있어서 문제되어야 하는 것은 교육제도 내에서의 기술적인 문제나 혹은 교육이념의 문제가 아니라 노동과 일상적 삶이 이루어지는 사회적 관계망의 형성일 것이다. 만약 인간적인 인간의 형성에 대한 공유된 바램이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을 성취하기 위한 투쟁은 현존하는 사회적 관계망의 정당성 그 자체에 대한 도전으로부터 출발해야 할 것이다. ②다음으로 지적되어야 하는 것은 앞의 문제와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다. 교육장치는 SSA학파의 연구성과를 통해 발견할 수 있는 자본주의적 생산의 관료적이고 감시적인 재생산원리 속에서 포위되어 있으며, 더욱 중요하게는 학교제도 자체가 이러한 정치적 지배관계를 구성하는 하나의 적극적 구성요소라는 점이다. 교육제도의 역할은 소외되고 계층화된 노동력의 생산으로 귀결되므로 교육제도 자체도 당연히 억압적이고 불평등한 구조를 발달시킬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주18)

 

  여기에서 단순화 하여 이해하기 쉬운 점은 교육제도의 자율성에 부과되는 이와같은 한계를, 기술적이고 경제적인 의미로만 이해하기 쉽다는 것이다. 마르크스주의자들든 흔히들, 교육제도의 형식과 교육내용의 역사적인 변화가 자본주의의 특정한 발전단계에서 요구하는 노동의 질을 생산하기 위한 요청에 따라서 이루어져 온 것이라는 입장에 서 왔다. 이들이 주장하고 있는 것과 같이, 교육제도의 형식적 변화와 교육내용의 변화들은 분명 자본주의의 특정한 역사적 발전단계와의 관련 속에서 진행되어 온 것이지만, 우선 교육제도는 그 자체의 존재기반과 재생산의 논리들을 갖고 있을뿐더러, 더욱 중요한 점은 교육장치가 자본주의적인 사회관계 속에서 수행하는 기능은 그 나름의 특수한 양식을 따르고 있다는 점이다. 자본주의적 사회관계와 교육제도와의 연관관계 속에서 교육적 재생산이 하는 역할은, 교육내용이나 정보의 전달과정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재생산의 형식에 있다. 특정한 교육-피교육 관계의 형식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것은 자본주의적 인간화를 위한 검열과 자기검열의 육화이다. 즉, 교육과정에서 구조화되어 있는 사회관계는 학생들에게 작업장과 회사의 규율을 훈련시키며, 인간의 태도유형 자기표현방식 자기이미지 사회계급에 대한 정체감 등을 형성시킨다. 다시 말해서, 교육에서의 사회관계는 교사와 학생, 학생과 학업 사이의 관계에 있어서 위계적인 노동분업의 형식을 재생산하고 있다는 것이다.(주19)

 

  교육적 장속에서의 권력관계와 재생산 기능에 대한 가장 정치한 분석을 해 낸 것은 부르디외와 파세롱을 들 수 있다. 이들은 1967년 『상속자들』에서 프랑스 대학생들의 출신계급을 통계적으로 분석하고 대학 내에서의 학생문화를 상세히 검토하여 1968년 운동에 일정한 영향을 행사하였다. 이들의 교육사회학적 연구를 훌륭하게 담고 있는 『재생산』은 교육행위와 교육적 권위, 교육체계 등의 상대적 자율성과 상관관계를 서술하고 있다. 이에 따르면, 객관적으로 교육적 행위란 상징적 폭력인데, 이것은 사회구성을 형성하는 집단간 혹은 계급간의 권력관계야말로 교육적 소통관계 수립의 기본전제가 되는 자의적 권력의 기초이기 때문이다. 또한, 선별과 배제의 기제를 통한 특정한 의미의 주입행위에 수반되는 한정효과는, 집단 및 계급이 문화적 자의성속에서 형성하는 자의적 선별행위를 재생산한다. 이러한 교육적 행위는 특정한 교육적 권위를 전제로 해서만 수행되고 유지될 수 있다. 이 교육적 권위란 바로 교육자와 피교육자 사이의 관계에 내포되어 있는 권력적 관계를 의미하는 것이다. 교육적 권위에 의해 물질적 권력을 보장받는 교육적 행위를 통해 이루어지는 재생산의 효과란 바로 오인에 기초한 허위적 동일시이다.(주20)

 

  교육으로부터 자기훈육으로, 검열로부터 자기검열로 나아가는 기제에 의해 강화되는 허위적 동일시는, 학교교육과 사회관계에 내재하는 불평등한 지배화의 권력관계를 자연적인 것으로(즉 정당하며 수정될 수 없는 것으로)인식하게끔 하는 역할을 한다. 이로써 총체적인 사회관계에서의 권력관계는 교육적 행위의 매개를 통해 재생산되며, 역으로 그렇게 재생산된 권력관계는 교육적 권위의 사회적 기초로 작용한다. 총체적 권력관계와 교육적 상징폭력 사이의 순환관계는 이러한 방식으로 이루어지고 있는데, 그러한 순환관계가 도전받지 않고 재생산될 수 있게 하는 물질적인 장치가 바로 교육체계이다. 교육체계는, 권력관계의 사회적 재생산, 교육체계, 교육적 권위, 교육행위 사이의 상호기능적 상호관계의 거대한 원환이 제도적으로 구성되는 것이다.

 

  위에서 서술된 주장들을 받아들인다면, 자본주의 하에서 학교교육의 기능은 축적양식과 생산방식 생산구조의 변화가 요청하는 노동의 질을 공급하는 것으로 축소될 수 없다. '예비노동자'라는 표현으로 상징되는 현시기 학생운동의 대학비판은 완전히 정당한 것인 동시에 그만큼이나 결핍된 주장이다. 자본의 축적양식과 생산조직상의 변화는 대학교육의 내용과 형식을 변화시키지만, 그것은 경제적 요청을 대학교육의 변화에 직접적으로 반영하는 방식을 취하지는 않는다는 점이야말로 '예비노동자'론의 실천적 한계를 낳는 근본원인이다. 예비노동자라는 사실만으로 학생들이 자신들의 존재조건에 내포되어 있는 지배의 그림자들을 자동적으로 발견하게 되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커다란 착각인 것이다.

 

  투쟁의 중심점은, 학생들과 연구자들을 자본 국가의 요구에 종속시키는 물질적 조건들(경제적 혹은 정치적)과 자본주의적 인간형을 형성시키는 권력관계의 작동 메커니즘에 대한 공격이다. 경제적인 차원에서의 계급지배는 그것을 집행하고 영속화시키기 위한 매개를 통하지 않고는 완전하게 관철될 수 없다. 익명의 권력으로 작용하는 사회적 지배는 시장의 압력과 같은 경제적인 변수로서 직접적으로 개개인들에게 압력을 가할 수도 있지만, 그것이 일종의 헤게모니가 되는 것은 피지배자들의 반란을 잠재우는 더욱 교활한 기제들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대학생들이 점차로 예비노동자로서 수련되어 가고 있다는 것이 사실임에도 불구하고 모든 대학생들이 결속된 저항의 길로 들어서지 않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의식적인 실천의 고리는 바로 이 부분, 즉 사람들의 자기검열과 자기훈육이 생산 재생산 변형되는 매개항들에서이다.

 

 

5. 소결

 

  이상으로 간략히 1968년의 유산들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우리가 1968년 학생봉기로부터 어떠한 영감을 끌어내고자 하는 데 있어서 이들의 특정 부분, 혹은 긍정적 부분만을 사고하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일일 것이다. 이는 반문화 운동의 영감을 수용한 이들의 경우와 같이 1960년대를 온갖 종류의 저항적, 해방적인 상상력의 융합으로 이해하는 낭만적 해석이라든지, 좌익주의적 흐름에서와 같이 68년을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마지막 통첩이자 세계적 수준에서의 전민항쟁의 서곡 정도로 해석하는 극단의 오류를 낳을 여지가 다분하다. 68년의 모은 운동들을 꿰뚫고 있는 역사적 의의를 사장하고, 그것을 인상주의적으로 수용하는 것에 머무는 것은 결코 구체적인 변혁 전략을 짜내고자 한다면 결코 정당한 태도가 아닐 것이다.

 

  이러한 손쉬운 해결책들은1968년을 직접적인 선동의 질료로 가공함으로써 지적 비판성을 잠시 상쇄할 수는 있겠지만, 이념·강령·전략·전술로 구체화되지 못한 레토릭들은 결코 대중적이고 지속적인 권력을 얻어내지 못하고 스스로를 배신하게 될 것이다. 감동은 자폐적인 열정의 소모로 끝나버리고, 현실적 세력관계의 냉혹한 목소리는 우리의 미래에게 또다시 침묵할 것을 강요할 것이다. 불행히도 한국에서는 1960년대의 저항운동의 복합성 속에서 문화혁명적 요소만을 고립시켜 그것을 적대화하는 경향이 점차 지배적인 것으로 되어왔다. 그러나 1960년대의 투쟁, 특히 미국과 프랑스에서의 저항운동의 결정적 한계는 문화적 혁명을 그 자체로 지탱될 수 있는 자기완결적 과정으로 이해하고 있는 순진성에 있었으며, 반면 이탈리아에서의 10여년간의 투쟁은 그것이 학생운동과 녹색운동, 그리고 페미니즘 운동과 산업노동자들의 노동자 자치 운동 및 공장점령투쟁과의 내용적인 결합을 이루어내었기에 산업 프롤레타리아트 지역에서의 조직적, 법적, 제도적 성과를 남겨내었음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렇다면, 정당한 질문은 바로 다음과 같은 것이 되지 않을까? "기존 문화와 세대에 대한 청년층의 반발처럼 보이는 낭만적인 운동을 어떻게 자본가에 대항하는 노동자들의 운동으로 전화시킬 것인가?" 다시 말하자면, 기존의 가치체계에 쉽게 흡수되지 않는 청년학생의 특질 및 그 급진적인 상상력을 어떻게 계급에 뿌리내릴 수 있게 할 것인가의 문제인 것이다. 문제해결의 단초는 선진자본주의의 발달에 필수적인 생산의 기술적 조직 내에서 일어난 기본적인 변화가 이제는 계급관계 뿐 아니라 그 관계에 대한 인간의 인식도 변화시키게 된 방식을 이해하는 데 놓여 있다. 이 변화를 검토하면서, 우리는 현재의 청년운동이 '19세기 노동계급으로부터 새로운 노동계급으로의 전화'를 반영하는 보다 광범위한 운동의 맹아적 부분이라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검토는, 사회주의자들이 현재의 청년운동을 넘어서면서 동시에 그것을 흡수하기 위해서는 선진자본주의 체제 내에서 일어난 노동계급의 전화에 대한 자기의식적인 이해를 가지고 매일의 투쟁에 임해야 한다는 결론을 낳는다.

 

<미주>

 

 1. I. 월러스틴, 『반체제운동』, 창작과 비평사, pp. 116-120

 2. ibid, pp. 45-68. 월러스틴은 이로부터 다음과 같은 전략적 제안을 제시하고 있다. 즉 국가기구들 내에서의 권력의 획득을 하나의 전술 차원으로 격하시키고 운동의 건설적 힘을 동원의 과정 속에 투입하라는 것이 그것이다. 이러한 비판으로부터 추출되는 대안적인 전략은 국가권력 획득을 넘나들면서 "잉여의 생산지점에서 그 잉여의 흐름을 공격하는" 전략이다. 『사회과학으로부터의 탈피』, 창작과 비평사, pp. 51, pp.159-160.

 3. 국가의 총체적인 권력효과에 대한 현대적 이론에 대해서는 폴란차스의 『정치권력과 사회주의』, 풀빛, 1장과 『국가, 권력, 사회주의』, 백의 참조. 그는 르포르, 카스토리아디스 등의 반(反)관료제논자들과 푸코, 들뢰즈 등의 프랑스 철학자들의 순진함을 비판하고 있다.

 4. V.I.레닌, 「혁명의 근본문제」, 『제 1차 대전과 10월혁명시기의 레닌의 저작』, 태백

 5. 여기서 '상상계'란 어머니와 유아의 관계, '사랑'에 빠진 남녀 사이의 관계, 아버지상을 가진 지도자·선배와의 관계등에서 생겨날 수 있는 허위적 동일시를 설명하는 라깡의 정신분석학적 범주이다.

 6. 이 시기 고르의 기본전제가 되는 것은 노동자계급이 체제로서의 사회주의를 운용할 수 있는 관리능력을 보유할 수 있다는 믿음이다. 그러나, 그는 이후의 사상적인 변화과정에서 이 시기의 사회주의론 및 계급이론을 거의 전면적으로 수정하였다.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노동의 특수성과 제한성을 넘어 사회체계를 총체적으로 인식할 수 있는 가능성은 부정되었으며, 노동계급의 자주관리과 프롤레타리아트의 해방은 비현실적 유토피아로 간주되었다.

 7. SSA학파란 '사회적 축적구조론'을 지칭하는 학파이다. 이 학파에 속하는 사람들은 보울즈, 진티스, 웨이스코프, 고든, 라이히, 에드워즈 등이다. 미국 학계에서 68혁명의 세례를 가장 끈질기게 이어가고 있는 이들은, 대개 하버드 경제학과의 유일한 좌파 교수인 마글린의 제자들이다. 이들은 자본축적과정과 관련한 제도들의 발전에 대한 역사적 분석과 이를 위한 이론적 분석을 통합할 것을 주요한 목표로 삼는다.

 8. 게오르그 루카치, 『역사와 계급의식』(거름)은, 프롤레타리아트에게 사회적 총체성을 인식할 수 있는 유일한 집단적 주체로서의 특권을 철학적으로 부여하였다. 문제는 의식의 사물화를 극복하는 것 뿐이었다. 서구 마르크스주의의 주의주의적(voluntaristic)전환을 표현하고 있는 이러한 견해에 대한 비판으로는 페리 앤더슨, 『서구 마르크스주의 연구』(이론과 실천)를 보라.

 9. 마르크스주의 혁명론은 다음의 두가지 점에서 이러한 장소의 정치학을 정당화해왔다. 첫째로는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은 자본의 독점화 과정에서 생산수단을 공간적으로 집중시키는 경향을 갖고 있으며 이러한 과정 속에서 공간적으로 밀집된 프롤레타리아트가 형성된다는 점에서, 둘째로는 노동의 탈숙련화과정을 통하여 프롤레타리아트가 하나의 계급으로서 동질화되어 간다는 점에서이다. 마르크스의 이러한 통찰에 주목한다면, '새로운 노동계급'을 투쟁의 주체로 포괄하고자 할 때, 이들의 노동조건의 질적 특성에 근거한 고유한 조직론을 발굴해야 한다는 점을 발견할 수 있다.

10. 이러한 입장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풀란차스를 들 수 있을 것이다. 그의 신쁘띠부르주아론에 따르면, 화이트칼라 노동자들의 프롤레타리아트화를 주장하는 것은 '최후까지 혁명적일 수 있는' 노동자계급의 헤게모니를 허무는 것이다. 그에게 노동자계급과 쁘띠부르주아지를 구분해주는 경계선은 다름아닌 '생산적 노동/비생산적 노동'이다. 우드에 다르면 풀란차스의 이러한 명확화는 당시에 매우 모호한 형태로 존재했던 프랑스 공산당의 '국가독점자본주의론'의 건강한 기초를 세우기 위한 것이었다(E.M.우드,『계급으로부터의 후퇴』, 창작과 비평사, 60쪽).

11. 마르크스, 「직접적 생산의 제결과」, 캘리니코스, 『오늘날의 노동자계급』, p. 57 재인용

12. 여기서 말레와 고르의 이론은 생략하기로 다. 말레의 '신노동자계급'론은 기본적으로 네그리의 입장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이에 대한 간단한 소개는 Dick Howerd, "New Situation, New Strategy", Unknown Dimensions of Marxism"이 있다.

13. 그에 따르면 "생산범주는 차이의 범주로서, 주체·차이·적대의 총체성으로 구성될 수 있을 뿐이다."(네그리, 『맑스를 넘어선 맑스』, 샛길, p. 124) 즉 자본은 노동자계급을 "모순"이라는 상호배타적인 동시에 상호필수적인 범주로 포섭해 자신의 가치를 증식하고자 하지만, 생산은 이러한 변증법적인 모순상태에 속박되지 않는다. 생산의 일반적인 개념은 생산의 요소들 및 그것들의 적대적 관계가 지닌 주체성을 고양하기 위해 자신이 유물론적이고 변증법적인 규정성의 한계를 돌파하는 것이다.

14. 윤수종, 『아우토노미아』,『이론』12호, 81쪽.

15. 미셸 아글리에따, 『자본주의 조절이론』, 한길사,152쪽

16. 스미스, 앞의 책, 193쪽.

17. 보울즈·진티스, 『자본주의와 학교교육』, 사계절, p. 83

18. 이반 일리치의 자유학교 사상이나 다양한 종류의 자유교육운동의 오류는 여기에 있다. 그들은 총체적인 사회적 관계망, 특히 노동현장에서의 권력관계는 부차적인 것으로 남겨둔 채, 교육제도의 혁신을 통하여 인간형성의 근본문제들이 해결될 수 있다고 오해하고 있다.

 

19. 보울즈 진티스, 『자본주의와 학교교육』, 사계절, p.160-161, 171, 232, 306. 이 점에서 보울즈와 진티스는 자본주의 학교교육을 기술적 재생산의 측면에서만 독해하는 경제주의적인 순진함을 성공적으로 극복하고 있다. 이는 『미국의 대학과 노동계급』(창비사)에 실린 데이비드 스미스의 단순논리 앞에서 느끼게 되는 의아함과는 다른 차원의 설명이다.

 

20. 여기에서 '오인'이라는 범주는, 앞의 카스토리아디스에게서 '상상계'와 '허위적 동일시'와 유사한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는 정신분석학적인 개념이다. 부르디외에 의하면, 문화적 자의성의 주입과 재생산에 의해 이루어지는 오인 효과는 기존하는 문화시장의 특정한 권력관계를-막스 베버의 의미에서-정당한 것으로 인식하게 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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