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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rberto Bobbio 가 생각한 자유주의와 민주주의

 

 

 

Norberto Bobbio 가 생각한 자유주의와 민주주의
             :                                                                                                                                        맑은샘.

1.   (민주주의에 대한 기본정의)

모든 형태의 독재체제와 구별되는 정치형태로써의 민주주의에 관한 의미 있는 논의는 오로지 민주주의를 다음과 같이 파악하는것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즉, 민주주의를 누가(who) 종합적인 정책결정권을 행사하는가의 문제와 그것은 어떤 절차(procedures)에 의거해서 이루어지는가의 문제를 규정하고 있는(주요한 혹은 기본적인)일련의 규칙들로서의 특성을 갖는 것으로 이해하는 일이다.
어떠한 사회집단이든 대내외적인 존립을 보장받기 위하여 모든 구성원을 구속시킬수 있는 결정을 내릴 필요가 있다.
모든 결정은 설사 그것이 집단적 결정의 형태를 띠고 있다 하더라도 사실상 개인들에 의해 내려지게 마련이다. 즉, 집단 그 자체는 어떠한 것도 결정하지 못하는 것이다.
따라서 개인들에 의해 그것이 한사람이든, 몇몇 사람이든 아니면 모든 사람이든 간에 내려진 한 결정이 집단적 결정(collective decision)으로 받아들여지기 위해서는 그 결정이 누가 결정권자이며 어떤 절차를 거쳐야 하는지를 명시한(성문으로든 관습으로든)규칙에 근거를 둔 것이어야 한다.
전체적 결정권을 내리는 주체(persons)를 기준으로 하자면 민주주의란 대다수 성원들에게
이러한 결정권-(결정할수 있는힘(power)은 기본적인 헌법의 보장에 의해 결정권(right)이 된다)--이 부여되어 있는 정치형태를 말한다.
사실 여기서의 '대다수(a large number)'란 개념은 모호한 개념이긴 하다.
정치적 결정들은 '거의" "대부분"의 영역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라는 사실을 접어두더라도 선뜻 "모두"란 말을 쓰는 것은 잘못이다.
왜냐하면 아무리 완전한 민주체제를 가진 나라라 하더라도 일정한 연령에 도달해야만 투표할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만인의 지배(omnicracy)는 최상의 이상일 뿐이다. 민주주의라고 불려질 만하기 위해서 얼마만큼의 사람들이 투표권을 가져야 하는가 하는 문제는 어떤 추상적인 원칙에 의해 미리 결정될수 없다. 역사적인 상황들과 어떤 판단을 하기 위한 기준의 필요성 따위를 고려하지 않을수 없다.
기껏 말할수 있는것은 성인남자들만 투표권을 가지고 있는 사회는 유산자들만 투표권을 가지고 있는 사회보다 더 민주적이지만, 여성들에게 까지 투표권이 주어진 사회보다는 덜 민주적이라는 정도이다. 지난 19세기에 몇몇 국가에서 지속적인 민주화의 진전이 있었다는 진술은 투표권을 누릴수 있는 사람들 수가 꾸준히 증가했음을 의미한다.
결정이 이루어지는 양식(mode)을 기준으로 말하자면 민주주의란 그 기본규칙을 다수의 지배에 둔 양식이라고 할수 있다. 다시 말한다면, 결정권을 가지는 사람들 대다수에 의해 승인될때 그 결정은 전체의 결정으로 간주될수 있고, 그럼으로써 모든 성원을 구속할수 있는 결정이 될수 있음을 의미한다. 만일 다수의 결정이 유용한 것이라면 만장일치는 훨씬더 유용한 것이다. 그러나 만장일치는 구성원의 수가 제한되어 있거나 또는 동질적인 집단 내에서만 가능한 것으로써 극단적인 두가지 상충되는 경우에만 그 요건이 충족될수 있다.
모든 구성원이 거부권을 가지고 참여해야할 만큼 매우 심각한 결정사안이 생겼을 경우나 아니면 결정사안이 별로 중요치 않아 명백히 반대의사를 표하지 않는한 이를 찬성으로 간주해도 무방한 경우, 이른바 묵시적 동의의 경우이다. 당연히 만장일치는 결정권자가 오직 두사람일 경우에만 필요한 방식이다.
이점이 완전한 합의에 토대를 둔 결정과 법(통상 다수의 승인을 요구하는)에 따라 이루어지는 결정과의 명백한 차이이다.
내가 여기서 내리고 잇는 민주주의의 기본정의는 이상에서 말한 두가지 요건, 즉 상당수 시민들에게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전체의 결정에 참여할수 있는 권한이 부여되어야 한다는것, 그리고 다수결의 원리(극단적인 경우에는 만장일치제)같은 절차적 규칙이 마련되어 있어야 한다는것 이상의 또다른 요건이 필요하다.
민주주의의 기본조건에 들어갈 세번째 요건으로는 결정권자나 혹은 결정권자를 선출하는 사람들앞에 실질적인 선택대안들이 주어져야 하며, 이 대안들 가운데에서 어느 것을 선택할수 있는 여건이 보장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결정권을 가진 사람들에게 이러한 요건이 의미있는 것이 되기 위해서는 여론형성의 자유, 표현의 자유, 언론의 자유, 집회 결사의 자유등 이른바 기본권(basic right)이 보장되어 있어야 한다.
이러한 권리들은 자유주의국가 초기부터 그 토대가 되었던 권리들로써 법치국가(Rechtsstaat)의 기본 교의를 구성하는 것들이다.
여기서 말하는 법치국가는, 본래적 의미를 따를때, 법에 의거하여(sub lege)권력을 구성하는
국가를 의미할뿐만 아니라 이른바 인간의 불가침의(inviolable)권리들에 대한 헌법적 승인으로부터 적법하게 내려진 제한 속에서 권력을 행사하는 국가라는 의미도 포함한다.
이러한 권리의 철학적 바탕이 무엇이든간에 이것들은, 민주주의체제의 특징을 이루는 주요한 주요 절차적 기제가 적절히 작동되기 위해서는 필수적인 전제조건이다. 이러한 기본 권리들을 부여하는 입헌적 규범들은 그 자체로써 게임의 규칙이 아니라 그 게임을 가능하게 해주는 전제들로써의 규칙들인 것이다.
이렇게 볼때, 자유주의 국가(Liberal state)는 민주주의 국가(democratic state)의 역사적인 전제일뿐 아니라 법적인 전제이기도 하다.
자유주의국가와 민주주의국가는 완전히 상호의존적이다.
자유주의가 민주적인 권력의 적절한 행사에 필수적인 자유를 마련해 주는것이라면 ,민주주의는 이러한 기본적인 자유의 존재와 지속을 보장해준다. 바꿔 말하면, 비자유주의국가에서는 민주주의가 적절히 작동될수 있을것 같지 않으며, 역으로 비민주주의 국가에서는 기본적 자유들이 효과적으로 보장되기 어렵다는 말이다. 자유와 민주의 이러한 상호의존은 자유주의 국가와 민주주의 국가가 흥망성쇠의 궤적을 같이했다는 역사적 사실을 통해서도 입증될수 있다.



(대의제 민주주의와 직접민주주의)

민주화의 과정이 점점 확산되고 있는것을 우리가 직접 보고 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먼저 완전히 새로운 의사결정능력에 참여하고자 하는 요구에 의해 성취된 성공을 지적하는것이 필요하다. 너무 단순화시키는 것이기는 하지만 권력은 오직 두방향으로만 흐른다.
그것은 하향적, 즉 위에서 아래로 흐르거나 상향적, 즉 아래에서 위로 흐르는 것이다. 현대국가에서 전자의 전형적인 예는 관료적 권력이고, 후자의 전형적인 예는 정치적 권력인데, 이때 정치적 권력이란 시민으로서의 개인보다는 시민전체를 위하여 시민의 이름으로 국가, 지역, 지방의 모든 차원에서 실행되는 권력을 의미하는 경우이다.
근래의 민주화과정, 즉 상향적 권력의 확장은 개개인들이 그들의 역활 내에서 시민으로서 고려되고 있는 정치적 관계의 영역에서부터, 개인들이 특정한 상황에서 각기 다르게 가질수 있는 다양한 기능과 다양한 역활이라는 면에서 고려되는 사회적 관계의 영역으로 퍼져나가고 있는 중이다. 부모, 어린이, 배우자, 감독, 노동자,교사, 학생의 관계들과 의사와 환자간의, 장교와 사병간의, 공무원과 탄원자간의, 생산자와 소비자간의, 공공시설과 관리자와 고객간의 관계들이 이에 포함될수 있다.
이상의 논의를 다음과 같이 정리할수 있을것 같다.
즉, 만약 현재의 민주화과정에 대해 이야기할수 있다면, 그것은 많은 사람들이 종종 잘못이해하고 있는, 대의제 민주주의에서 직접민주주의로 옮아가는 데 관한것이 아니라, 엄밀히 말해 정치적 민주주의에서 사회적 민주주의로 옮아가는데 관한 것이다.
지금까지는 거의 대부분 국가적 차원의 정치영역에(작고 하찮고 정치적으로는 무관한 자발적 결사에) 한정되었던 상향적인 권력은 학교에서 공장에 이르는 시민사회의 다양한 영역에까지 확산되고 있다. 여기서 학교와 공장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이곳이 현대사회의 대부분을 보내는 곳이기 때문이다. 또한 나는 의도적으로 교회를 무시했는데, 왜냐하면 종교적 사회는 설사 민주화에 대한 절박한 논란으로 인해 혼란에 휩쓸린다 하더라도 근본적으로 정치적이지도 시민적이지도 못하기 때문이다.
간단히 말해 우리는 현대사회가 발전하는 노정을 새로운 민주주의 유형이 이제껏 계급제도나 관료조직에 의해 장악되었던 공간들에 침투해가는 과정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단순한 공식, 즉 국가 민주화에서 사회민주화로의 발전으로 요약할수 있는 민주적 제도의 발전에서 진정한 전환점이 무엇인가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정당하다.
만일 전체로서의 공동체에 영향을 끼치는 결정이 이루어지는 영역을 '정치"로 본다면, 역사적으로 정치적 민주주의가 사회적 민주주의보다 앞서 도래했다는 사실을 쉽게 이해할수 있다.
사람들은 대개 의회제도의 확립을 통해 실현될수있는 국가의 민주화와 사회의 민주화는 별개의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는 가족에서의 학교, 기업에서의 공공사업의 경영에 이르기까지 대부분의 제도들이 그 역활을 민주적으로 수행하지 못하는 사회에서도 당연히 민주국가는 존재할수 있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이는 정치적으로 이미 민주적이라고 불리는 나라에서의 민주발전의 현 단계를 뚜렷이 특징짓는 물음을 제기한다. 즉 민주국가가 비민주적사회에서 생존할수 있는가?
이를 또한 다른 방법으로 묻는다면, 정치적 민주주의는 국가가 독재정권의 희생물이 되는것을 방지하는데 필요했고 계속해서 필요할것이다. 그러나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말인가?
오늘날 민주발전의 지표가 필요하다면 그것은 투표권을 가지는 사람의 수에 의해서는 충족될수 없고 정치의 범위를 넘어서서 투표권이 행사될수 있는 영역의 수에 의해야만 한다.
이를 설명하는 간결하지만 효과적인 방법은 기존 국가의 민주화의 상태를 판단하기 위한 기준이 더 이상 “누가(who)" 투표하는가가 되어서는 안되고 ”어디에(where)"투표 할수 있는가가 돠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그리고 투표한다는 것이 가장 전형적이고 보편적인 참여방식을 의미하기는 하지만, 참여를 투표권 행사에 국한하려는 의도는 없다는 것이 여기서 지적되어야만 한다). 그러므로 이제부터는 지난몇년간 민주주의가 얼마나 발전되었는지에 대한 물음이 던져졌을때 우리는 유권자가 얼마나 더 많아졌느지를 살펴서는 안되고 시민들이 투표권을 행사할수 있는 범위가 얼마나 늘어났는지를 살펴야만 한다.
보통선거권이 획득된 마당에서 민주화과정의 확대문제가 거론된다면 그것은 흔히 주장되고 있는 대의제 민주주의로부터 직접민주주의에로의 이행보다는 정치적 민주주의로부터 사회적 민주주의에로의 이행이 될 것이다.
“누가 투표하는가?” 하는 것보다 “어디에 투표하는가?” 하는 것이 보다 문제이다.
환언하자면, 어느 나라에서보다 큰 민주화에로의 진전이 있는지를 알고자 한다면 우선 관련있는 정책결정과정에 참여할 권한이 있는 참여권자의 수가 얼마나 증대되었느냐 하는 것 보다는 이러한 권리를 행사할수 있는 상황이나 영역의 폭이 얼마나 증대되었는지를 알아보아야 한다.
선진사회에 존재하는 상층부의 두개의 커다란 권력블럭 즉 대기업과 관료기구에 대한 민주화의 길이 열리지 않는다면 이것이 가능한 것이라 하더라도 과연 바람직한 것인가 하는점은 일단 젖혀두고 민주화과정은 종결되었다고 말해질수 없다.


(현대민주주의의 패러독스)
내가 일부러 직접민주주의의 한 형태인 국민투표를 예로 든 것은 대의제 민주주의에 만족하지 않고 직접민주주의를 “체제”의 결함에 대한 즉효요법으로 간주하는 사람들이, 직접민주주의의 장점을 극구 칭찬하기(물론 이는 정당한 측면을 가지고 있다) 때문이다.
그러나 누차 지적했듯이 민주주의가 어렵다면 직접민주주의는 더욱 어렵다.  
나아가 나는 그것이 이전보다도 점점 더어려워지고 있음을 지적하고 싶다.
이주장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현대의 모든 정치체제가 당면하고 있는 현대 민주주의의 진정한 패러독스(Paradox)“라 불러야 할 몇가지 문제를 들고 싶다.
민주주의는 인민의 통치를 의미하고 인민의 이름을 붙인 통치가 아니라고 한다면 완전한 민주주의, 이상적 사회주의가 직접민주주의임에는 틀림없다.
그것이 루소가 영국인민은 투표함에 표를 넣는 순간에만 자유롭다고 말한 이유이다. 하지만 루소의 언급에 대해 제기할 수 있는(그리고 수천번이나 제기되었던)반론은, 다른 나라의 인민들은 투표하는 순간조차 자유롭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나 루소는 직접 민주주의, 즉 아우라(Aura)의 민주주의에 대치되는 아고라(Agora)의 민주주의가 소국가, 곧 모든 시민이 광장에 집합할수 있을 정도의 크기를 가진 국가에 적합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며, 몽퇴스키외도 마찬가지였다. 이제 그러한 소국가는 어디에 있는가?
국가는 거대화 되고 있으며 이제 광장은 참가하는 시민이 아니라 동원된 군중조차 수용할 수 없다. 몽퇴스키외도 민주주의의 원리는 국가애(國家愛)로 이해되는 덕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작은 국가만이 자발적인 사랑을 받을수 있다.
그러므로 로베스피에르는 거대한 프랑스국가에서 바로 국가를 구하기 위해 덕(德)과 테러를 결합시켜야만 했다.
고대인의 민주주의에 대비되는 현대인의 민주주의의 첫 번째 패러독스는(유명한 구별을 모방한다면) 다음과 같은 점에서 발생한다.
즉, 우리는 객관적 조건이 점점 더 어려워지는 상황속에서 끊임없이 점점 더 많은 민주주의를 요구하고 있다. 어제오늘 시작된 일은 아니지만 커다란 조직 내에서 민주주의의 게임의 규칙을 존중하도록 하는 것만큼 어려운 일은 없다.
국가조직을 비롯한 여러조직은 점점 커진다. 이러한 불길한 흐름-(그것은 과두제의 철칙:iron law of oligarchy)이라 불린다.) 에 맞닥뜨린 사람은 누구나 끊임없이 대의제 민주주의에 관해서 문제를 제기한다.
직접민주주의의 경우를 생각해보자. 1960년대와 70년대 학생운동이 부활시킨 직접민주주의 혹은 “아테네식” 민주주의에 의해 서술한 규칙의 정확한 작동이라는 견지에서 보면 언제나 기만적이었다. 그것은 한편에서는 동의로써 표현되는 집행부의 결정을 비준할(자주 박수에 의해)뿐이며, 다른 한편에서는 카리스마적인 (기술적인 의미에서, 곧“민주주의적”에 반대되는 의미에서 “카리스마적” 이라는 뜻이다) 권력기초를 지닌 집행부가 있고, 그 권력은 대의단체의 어떤 집행부보다 훨씬 경고하며 항거할수 없는(위임권의 소환 따위는 아무데도 없다) 최악의 의회보다도 더욱 나쁜 집회로 구성되었다. 이것을 말하는 목적은 민주주의가 미봉책과 안이한 일반화 및 간교한 혁신을 거부하는 극히 복잡한 “실천”이고, 조그만 충격에도 무너질수 있는 대단히 섬세한 기구(mechanism)임을 다시 한번 지적하기 위해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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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라(Aura):회의장소, 강당을 의미하는 언어.
*아고라(Agora):고대 그리스 도시국가의 중심지에 있는 광장.
*아우라의 민주주의: 강당과 같은 곳에서 대표자들이 모여서 논의하는 대의제(간접)민주주의
*아고라의 민주주의:열린광장에서 시민들이 직접 참여하는 직접민주주의
*과두제의 철칙: 과두제란 1인이나 다수 또는 전체가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소수가 지배하는 정치체제. 독일의 사회학자 R.미헬스가 그의 저서(정당사회학)1921에서 독일과 이탈리아

의 사회민주당을 분석하고 국가뿐만 아니라 정당, 회사, 노조, 대학, 종교단체등의 사회집단에서도 소수의 지배가 현저하게 나타나는 것을 보고 “과두제의 철칙”이라는 표현을 사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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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료제와 테크노크라시)
더욱 성가신 두 번째 패러독스는 현대국가가 규모만이 아니라 기능의 범위에서도 증대하며, 어떤 국가기능의 증대도 관료적 장치, 즉 민주주의적이지 않은 위계적 구조를 가진, 아래로부터 위로가 아니라 위로부터 아래로 향하는 권력장치의 증대로 귀결된다는 사실로부터 발생하고 있다. 카부르 시대의 장관은 7,8명 이었는데, 지금은 거의 네배가 되었다.
각 장관이 자기 자신의 관료군을 필요로 한다.--준 국가기관(para state)은 계산에 넣지 않지만, 이것도 끊임없이 증가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한다면 현대국가가 관료주의적이며 그 법률이 본질적으로 반민주주의적인 권력조직으로 나아가는 경향이 얼마나 강하고 또 자연스러운가를 알 수 있다. 같은 시대에 이들 국가 내에서 대체로 이것과 동시에 민주주의화 과정도 진행되고 있는것도 사실이지만, 민주주의화 과정과 관료주의화 과정이 같은 보조로 진행되고 있을뿐만 아니라 후자가 전자의 직접적 귀결임도 역시 사실이다.
선거권의 확대에 따라 점점 더많은 새로운 대중이 자기의 요구를 권력을 가진 자들에게 제기하는데, 이러한 요구는 거의 언제나 국가에게 새로운 과제와 부담을 떠안도록 하기 때문에 국가는 그 활동영역과 장치를 부득이하게 증대시키지 않을수 없다.
관료주의국가와 민주주의국가가 동시적으로 성장한다는 것은 현대국가의 성장을 목도하고 있는 모든 사람들(어떤 사람은 만족스럽게도 또 어떤사람은 걱정하면서)의 오랜 생각이며, 지금은 습관적으로 쓰는 문구가 될정도이다. 곧 민주주의(사회주의는 더욱 더하다)가 확대될수록 관료주의도 확대된다.
적어도 이제까지는 그러했다. 그것을 알아야만 우리는 민주주의 논쟁의 배경을 이루는 거대한 난점을 과소평가하지 않을수 있으며 또한 그 마술적인 해결에 속지 않을수 있다.
세 번째의 패러독스, 이것은 매우 중요한 함의를 갖는 장기적 과정의 산물이다. 자본주의경제에 근거하든 혹은 사회주의경제에 근거하든 상관없는, 공업사회에 특유한 기술적 발전의 결과이다. 즉, 이사회 내에서는 유자격자가 아니면 맡길수 없는 기술적 해결을 요하는 문제들이 점점 증대하고 있다는 사실의 결과인 것이다.
따라서 전적으로 전문가에 의해서 통치하려는 유혹, 혹은 테크노크라시(technocracy)를 창출하려는 유혹이 계속 생겨난다.
테크노크라시와 민주주의가 충돌한다는 것을 깨닫는 데에는 큰 통찰력이 필요치 않다.
테크노크라시는 유자격자, 즉 어떤 사물에 관해서 잘알든지, 또는 알도록 되어 있는 사람들의 지배이다. 민주주의는 모든사람, 즉 그 전문지식에 의해서가 아니라 경험에 기초하여 결정해야 하는 사람들의 지배이다.
공업사회의 주역은 과학자, 전문가, 숙련자이다. 민주주의사회의 주역은 평범한 시민, 보통사람, 모든 민중이다. 고대사회의 사람이 당면해야 했던 문제의 어려움과 우리가 일상적으로 당면하고 있는 어려움 사이의 비교는 불가능하다.
일례를 든다면, 거대국가의 경제문제에 정통하고, 일정한 목적이 세워진 경우에 정확한 해결을 제시할수 있는 사람들의 숫자가 과연 얼마나 되겠는가? 더욱 나쁜 경우에는, 주어진 수단아래에서 도달 가능한 목적을 지적할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 것인가?
그러나 민주주의는 모든 사람이 모든 일을 결정할수 있다는, 명백히 한계를 갖는 이상에 토대를 두고 있다. 즉, 민주주의적 이상에 따르면 정치문제에서 유일한 권능자는 시민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시민은 주권자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결정이 점점 기술적으로 되고 점점 비정치적으로 됨에 따라 시민적 권능의 영역, 따라서 그 주권은 좁혀지지 않을까? 점점 기술화되어가는 사회속에서 더 많은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것은 모순이 아닌가?
나는 테크노크라시 사회를 변호하는 것이 아니다. 그 이유는 더욱 정교한 기술적 해결을 요구하는 문제가 확실히 증대하더라도 전통적 정치문제의 전 공간을 점할 만큼 증대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기술적 진보는 끊임없이 정치문제를 만들어 내고 있다. 하지만 바보가 아닌 이상 누구나 할 수 있는 하나의 사실을 확인해두고 싶다.
더 많은 민주주의를 요구한다는 것은 현대사회의 객관적 발전조건에 의해 점점 권능을 잃고 있는 사람들의 권능에 속하는 결정의 확대를 요구하는 것이다. 그것은 특히 자본주의경제는 물론 사회주의경제에서도 이제까지 사실상 어떤 형태의 인민통제도 제거되었던 영역이자 민주주의적인 도전이 승리했거나 패배했던 영역인 생산의 영역에서 그러하다.
편견이나 과도한 환상없이 사실을 확인하는것이야말로 즉흥적이지 않고 실행가능한 방책을 생각해낼수 있는 단 하나의 방법이다.

(문화산업과 정치산업)
마지막으로 민주주의의 과정과 대중사회의 대립으로부터 발생하는 패러독스를 생각해보자.
민주주의는 인간능력의 자유롭고 충분한 발전을 전제로 한다.
모든 거대사회가 겪고있는 대중문화의 결과는 순응주의의 일반화이다.
대중사회의 특징인 피교화성(indoctrination)은 민주주의사회를 떠받치는 토대가 되는 개인의 책임감을 억누르고 압박하는 과정을 가지고 있다.
잘 조직된 선전은 개인적이고 합리적인 선택이 여지를 점점 줄이고, 순간적인 감성적 반응이나 타인의 행동에 대한 수동적인 모방에 기초하지 않는 확신의 여지를 점점 줄여가는 경향이 있다.
대중의 최소한의 동의 없이는 통치할 수 없는 그것은 곧 이들 나라에서 민주화의 과정이 진행되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모든 나라에는 많은 비판을 불러 일으키는 문화산업과 함께 정치산업이 존재한다.
더많은 개인이 문화의 산물을 이용하는 데 필요한 도구를 쉽게 소유함에 따라 문화산업이 발생하는것처럼 정치산업은 권력기반의 확대와 함께 등장하며 인민주권의 추상적 원리를 신화로부터 현실로 옮기는 제도들(보통선거권으로부터 조직정당의 형성에 이르기까지) 이 실현됨에 따라 번영하고 성장한다.
우리는 어떤 민주주의도 여러 가지 형태의 정치산업없이는 성립하지 않는다고 이해하고 있다. 모든 성년시민이 정치적 결정의 형성에 직접, 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원리를 가진, 그리고 그들이 권력의 소유자들에 의해 많든 적든 고려대상이 되는 사회가 존재할수 있다고
가정하는 것은 적어도 현재의 사회적, 지적 발전단계에서는 비현실적이고 터무니 없다.
모든 사회는 동의를 조직하기 위한 기술들--(그 강도와 강제성의 정도에는 차이가 있지만)--을 사용하는 것을 요구받는다.
누차 지적했듯이 이러한 기술의 사용은 불가피한 것이다.


교도민주주의(directed democracy)와 구별하기 위해 참여민주주의(Participatory democracy)로 정의되는 민주주의의 이상에 어떤 귀결을 수반하는가를 분명히 하는 것이 중요하다.
분명히 참여민주주의의 특징중 하나는 광장의 집회나 행진등과 같이 이른바 대중의 의지표시운동이며, 이는 역사적인 사건이나 또는 커다란 여론의 방향을 불러일으키길만한 사건에 즈음하여 행해진다. 이러한 운동에 참가--(나는 개인적으로 이것을 어떤 상황에서는 시민적 의무로 간주한다)---하는 습관을 가진 사람은 누구나 이것이 집단의 단결과 연대를 촉진하고 유지하기위한 자극으로 기능하는 가치를 가진다고 인정하지 않을수 없다.
그러나 또한 그것들의 효과가 지속되지 않는다는 것도 솔직히 인정해야 한다.
왜냐하면 의지표시운동이 산회(散會)하면 그것이 불러일으킨 흥분은 급격히 가라앉고 행동의지도 소멸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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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도민주주의(directed or guided democracy) :
인도네시아의 정치가 A.수카르노가 제창한 민주주의.
인도네시아의 정당난립과 민족분열상을 극복하고자 1957년 서구정치제도의 모방이 아닌
인도네시아에 적합한 민주주의로 일반대중에 대한 엘리트의 교도적 역할을 강조한
민주주의. 지도자의 교도에 의한 질서있는 토론과 만장일치를 원칙으로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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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치 있는 것들에의 마지막 호소)
이제 결론으로, 환상과 절망에 쉽게 빠져드는 사람들, 특히 젊은이들에 의해 자주 제기되는 근본적인 물음에 대한 해답을 마련하지 않으면 안된다.
만약 민주주의가 주로 일련의 절차적 규칙들이라면 민주주의가 어떻게 “적극적인 시민들”에게 달려 있다고 주장할수 있겠는가?
적극적 시민이 있어야 한다는 것은 아마 어쩌면 굳이 필요한 이상이 아닐는지도 모른다.
물론 이상이라는 것은 필요하다.
그렇다고 어떻게 위에 들어온 일련의 규칙들을 획득하기 위해 바쳐온 투쟁들, 이상에 도달하기 위한 그 위대한 투쟁들을 무시해버릴 수 있다는 말인가? 우리는 그것들을 낱낱이 상기해보려 한다.
우선 첫째가 관용의 이상인데 이 이상은 수세기에 걸친 참혹한 종교전쟁들을 치른이후에야 획득되었다.
만일 오늘날 세계평화에 대한 위협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또다른 광신주의, 다시 말하면 자기네만이 진리를 독점하고 있다는, 그리고 이를 타인에게 강요하는데 필요한 힘을 가지고 있다는 맹목적 믿음 탓이다.
굳이 예를 들 필요도 없이 이는 여러분의 눈앞에서 매일 벌어지고 있는 일들이다.
둘째는 비폭력의 이상이다.
민주주의체제와 독재체제의 본질적 구분은 오직 민주주의 체제에서만이 시민들이 피를 흘리지 않고 정부를 갈아치울수 있다는 사실이라고 했던 칼 포퍼의 언명을 나는 결코 잊지 않고 있다. 아주 빈번히 조롱거리가 되기도 했던 민주주의의 형식적 규칙들은 사회적 갈등을

폭력에 호소하지 않고 해결하기 위해 고안된 공존의 테크닉을 역사위로 최초로 선보여 주었다. 이러한 규칙들이 존중되는 곳에서만 적대자가 전멸되어야 하는 원수로서가 아니라 내일 우리를 대신 해줄지도 모르는 반대자로서 존재할수 있게 된다.
셋째는 사고의 자유로운 토의를 통한, 그리고 삶의 태도와 양식의 수정을 통한 사회의 점진적 개선의 이상이다. 오로지 민주주의만이 아마도 우리시대의 최고의 혁명이라 할 수 있는 성의혁명과 같은 조용한 혁명들이 발화하고 확산될수 있도록 허용한다.
마지막으로 형제애(프랑스혁명에서의 박애)의 이상이다.
인간의 역사는 골육상쟁의 역사로 메워져 있다.(역사철학)에서 헤겔은 역사를“거대한 살육의 집”이라고 정의했다. 부정할수 있겠는가?
세상 어느 나라에서고 민주주의적 방법이 하나의 습관이 되었을때 비로소 그것은 영속해갈 수 있다. 그러나 모든 인류를 하나의 공동 운명체로 연대하는 형제적 띠에 대한 인정없이
민주적 방법이 하나의 습관으로 정착할수 있을 것인가?
이 운명공동체라는 인식이 나날이 실감을 더해가고 있는 지금이야말로 이러한 형제적 띠에 대한 승인이 더욱 절실하다.
우리는 아직 어렴풋이나마 우리의 길을 비추고 있는 이성의 희미한 등불을 따라서 의미 있는 걸음을 내디뎌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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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베르토 보비오 저 (자유주의와 민주주의: 시민이 참여하는 대의민주주의가 답이다) 에서 ..............

2. 노베르토 보비오(Norberto Bobbio 1909--) :
교조적 맑스주의에 반대하여 자유와 민주주의의 중요성을 역설한 정치학자.
1909년 이탈리아의 공업도시 투린에서 태어난 노베르토 보비오는 이탈리아가 배출한 유럽최고의 정치사상가, 이론가중의 한사람이다.
튜린대학에서 법철학을 전공한 그는 변호사이며 대학교수로서뿐만 아니라 이탈리아 사회당(psi)소속의 종신상원의원으로서 이론적 실천적으로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는 유로코뮤니즘을 이루고 있는 수많은 좌파적인  이론적, 실천적 조류와의 논쟁속에서 자신의 정치이론을 형성했다.
이렇게해서 정초된 그의 실천적 당 이론은 psi로 하여금 독특한 방법으로 현실적인 사회주의 노선을 추구하도록 주도하였다.
또한 그는 이탈리아 정치의 고질적인 병폐의 하나인 이권정치, 즉 혼탁한 부패사슬에 동참하기를 거부하는 지행합일(知行合一)의 의연한 본보기이기도하다.
어찌보면 한국의 정치현실도 보비오가 실천속에서 자신의 이론을 전개한 이탈리아와 유사한 점이 많다 . 한보사태, IMF외환위기, 기아, 선경, 대우사태와 정경유착의 부패는 오늘 우리에게 과연 무엇을 보여주는가?
이러한 점에서도 그의 지적 성과물들은 우리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하다.
지난한 민주화과정을 거쳐 이제 그 공고화단계에 들어선 한국의 정치현실 역시 이탈리아와 비슷하게 지역주의와 고위공직자들의 부정부패문제에 얽매여 진퇴양난을 거듭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저작들은 단순한 정치이론이 아니라 실천현장에서의 논쟁의 산물이기 때문에 더더욱 가치가 있다.

그의 대표적인 저서(민주주의의 미래)(자유주의와 민주주의)(민주주의와 독재)그리고(어떤 사회주의인가? Which Socialism?)등은 모두 한결같이 민주주의와 자유주의를 이상적인 사회를 추구하는데 있어 가장 중요한 전제로서 강조고 있다. 즉, 그의 저술들은 진보적인 사회체제를 추구하는 사람들이 민주주의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그리고 민주주의의해 보장되는“자유”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가치를 지니는지를 날카로운 분석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또한 그의 이론적 통찰은, 이탈리아라는 특정사회의 정치노선 문제를 넘어 21세기를
살고있는 인류가 현대적 조건에서 정치제도로써의 “민주주의”를 어떻게 이해하고 발전하는지, 즉 민주주의의 미래를 전망하는데 있어서도 상당한 시사점을 던져주고 있다.
주요저서: 정치와 문화, 민주주의의 미래, 어떤사회주의인가?, 자유주의와 민주주의,
          제3의길은 가능한가?(좌파냐 우파냐)등이 있다.

3. 작품소개:
생산수단의 공적소유를 통해 물질적 분배의 평등을 추구하고 나아가 노동해방을 기치로 내걸었던 거대한 세계사적 실험, 사회주의는 20세기가 그막을 내림과 동시에 실패로 끝났다.
여전히 사회주의체제를 고수하고 있는 국가들도 공산당 주도의 집산주의(collectivist)계획경제체제에 수정을 가하고 자본주의적 자유시장경제체제에 대한 수용의 폭을 확대하고 잇는 것이 20세기 후반부터의 세계사적 흐름이다.
그러나 인류가 자신의 공동체를 정치, 경제적으로 어떻게 조직할것인가의 문제를 고민하는
사람들이라면 인간해방이라는 것을 목표로 사회체제의 변화를 모색하던 공산주의 또는 사회주의 사상 및 그와 관련된 무수한 논의들을 부단히 되돌아보면서 현재의 사회체제를 관찰할 필요가 있다.
맑스주의자들로 하여금 “시민사회”라는 개념에 주목하게함으로써 유로코뮤니즘의 사상적 토대를 제공한 20세기초반의 맑스주의 사상가 안토니오 그람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보비오의 논의 역시 현대민주국가의 시민사회를 이해하는데 잇어 건너뛸수 없는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현대사회에 이르러서도 민주주의는 인류에게 여전히 중요한 화두의 하나이다.
그러나 사회주의체제가가 몰락하면서 그것과 대비되던 “민주주의”에 대한 관심이 오히려 퇴조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민주주의를 통하지 않고서는 어떠한 사회변혁적 이상이나 시도도 환영받을수 없는 민주주의시대에 민주주의에 대하여 다시금 관심을 가지고 새롭게 접근할 필요가 있다.
노베르토보비오 역시 바로 그정점에 서있는 정치 사상가이다. 그렇다면 그람시처럼 이탈리아에 뿌리를 둔 정치사상가 보비오는 민주주의와 사회주의, 민주주의와 자유에 대하여 어떠한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는가?
맑스주의를 옹호하는 수많은 서유럽의 공산주의, 사회주의자들이 맑스는 옳앗지만 맑스주의가 틀렸다고, 맑스주의는 옳았지만 맑스주의자들이 틀렸다고, 그리고 맑스주의자들은 옳았지만 맑스주의적 실천이 틀렸다고 하면서 맑스와 맑스주의에 면죄부를 부여하려할 때, 보비오는 “도데체 어떻게 오류로써 자유로울수 있는 인간이 존재할수있단 말이냐”면서 “맑스의 비판은 옳았지만 그의 이상은 잘못되었다”고 과감한 비판을 제기한다.
맑스의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정신은 유효하지만 그의 공산주의사회에 대한 설계이상은 무효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그가 자유민주주의적 “자유”만을 강조하면서 마냥 자본주의체제를 옹호했던 이론가는 아님은 물론이다.
그는 인류가 어우러져 살만한 이상적인 정치체계를 이룩하기 위한 여정은 “민주주의”를 탄탄히 구축하는 작업에서 시작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그의 사상은 “자유사회주의(Liberal socialism)또는 “다원사회주의” 라는 개념으로 집약된다.
자유주의적 민주주의체제가 역사적인 시행착오를 거쳐 보존해온 개인주의적 신조와 노선을 바탕으로 사회주의적인 가치와 물질적 재화의 평등한 분배와 균등한 기회등 분배적 정의를 수용하는 법의지배, 활발한 대의주의 그리고 경쟁적 복수정당정치의 실질적 제도화가 그내용이다. 요컨대 그는 “자유”와“평등”을 역관계가 아닌 정관계로 구현하는 이른바“사회주의적 자유(Socialist liberty)를 강조한다.
이와같은 기본적인 발상위에서 그는 민주주의와 자유주의, 민주주의와 사회주의 그리고 자유주의와 사회주의의 관계들을 역사적으로 그리고 철학적으로 해부하고 있다.
수많은 사회주의자들은 “부르죠아 민주주의가 자본주의를 지지하는 반면에, 진정한 민주주의는 생산수단의 공유를 통한 경제적 권력의 광범위한 차이를 좁혔을때만 가능하다”고 보았다. 그러나 보비오는 이러한 생각을 민주주의를 단순한 의사결정수단으로만 보는 것이라 비판한다.
이렇게 단순한 사고는 맑스주의자들이 자유주의적 권리의 중요성을 간과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일뿐이다.
자유주의적 수단과 양립할수 있는 방법으로 사회주의를 추구해야 한다.
“정치적 해방은 근대민주주의를 낳았던 모든 제도를 발전, 확대, 강화”를 요구하며, 단한순간이라도 그러한 제도가 정지한다면, 다시 말해서 시민적 자유와 정치적 자유의 문제를 과소평가한다면 전혀 이로울것이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논의의 결론격으로 보비오는 “생산자의 자치정부”를 자유사회주의의 대안으로 제시하고 있다.

 

 

황주홍 옮김, Norberto Bobbio, 문학과지성사 1992년, 7,000원

Bobbio는 매력적인 사람이다. 소신이 있지만, 경박하지 않다. 묵직한 사려를 품은 학자이자 정치사상가로 보인다. 일전에 <좌파냐 우파냐>라는 책을 단순요약한 적이 있었는데, 이번에도 그래야 할 듯 싶다. 천천히 두루살피고 싶은 마음 없지 않지만, 중간고사생에게는 발등의 불이 있는지라 '효용'을 무시할 수가 없다. -_-;

한국에 살면서 정치체의 이름 중, 가장 많이 들을 수 있는 말이 '자유-민주주의'라는 말이다. 워낙에 익숙하기에 자유는 으레히 민주주의 앞에 붙는 말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자유를 핵심으로 삼는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의 관계는 반드시 친화적인 것만은 아니다. 외려 상충하는 면이 없지 않다. 그래서 Bobbio는 그 양자간의 관계맺음을 살펴보기 위해 타임머신을 탄다. 일반적인 정의를 언급하고 시작한다. "자유주의(liberalism)는 국가에 대한 어떤 독특한 태도를 일컫는 개념으로서, 국가의 권력과 기능은 제한적이라고 보는 신조이다.(≠절대국가,사회국가) 민주주의(democracy)는 통치형식의 하나로서, 통치의 힘, 즉 통치권이 한 개인이나 몇몇 소수의 수중에 장악되어서는 안된다고 믿는 신조이다.(≠군주주의,과두주의)"(p.11) 때문에 자유주의 국가가 반드시 민주주의 국가인 것은 아니며, 민주주의 정부가 자유주의 국가내에서만 성장하는 것도 아니라고 이야기한다.

자유의 고전적 개념과 현대적 개념의 차이를 최초로 언급한 사람이 Benjamin Constant이다. 자유주의와 민주주의를 대립적으로 설정한 시도라고도 할 수 있겠는데, 그대로 재인용한다. "고대인들은 한 국가내의 모든 시민들에게 권력이 분배되는 것을 목적으로 했으며 이것을 그들은 자유라고 생각했다. 현대인들의 목표는 각자의 사적인 소유에 대한 보장이다. 현대인들이 생각하는 자유는 제도에 의해서 획득된 이 소유의 보장을 일컫는다."(p.12) 그리고 Constant은 이들은 양립불가능하며, 후자의 손을 들어준다.

자유주의의 '철학적' 전제는 자연권(이론)에서 비롯된다. '철학적'이라는 수식은, 그것이 실재했던 것이 아니라 가설의 형태를 취하기 때문이다. 자연법 사상의 매력이라면 매력인 것은, 그 논리전개가 실제의 진행방향을 뒤집어놓는 다는 것에서 찾을 수도 있다. 절대군주의 억압하에 있던 개인이, 이 사상체계에서는 자유로운 자연상태에 있었던 것으로 가정되기 때문이다.

자유주의와 관련해 언급되는 것들은 거진 다 교과서를 통해 한 번쯤은 들어보았다는 점에서 한국이 '자유-민주주의 국가'임을 절감케하는 부분이다. 어쨌거나. 모든 개인은 천부인권을 갖는다. 국가나 지배자는 이 기본권을 침해해서는 안되며, 타인에 의한 권리의 침해로부터 개인을 보호해야 한다. 이것이 자유주의의 기본 논리이자, 자유주의 국가가 제한국가(the limited state)이게 하는 근거다. John Locke가 대표적인 자연법 이론가인데, 미국의 <독립선언서>, 프랑스 혁명기의 <인권 선언문>은 이를 반영한다.(p.17)

사회계약이론의 핵심단어는 '계약'에 있다. 그리고 계약을 위해서는 독립된 개인이 전제되어야 한다. 결정권이 개인에게 존재해야만 논리전개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는 자연권사상을 통해 뒷받침된다. 개인이 등장하므로. 인간의 권리, 그리고 사회계약이론은 개인주의(individuality)를 매개로 연결된다.(p.19) 개인주의 없이 자유주의는 불가능하다는 명제가 도출된다.

자유주의 이론에서 국가는 권력과 기능의 측면에서 한계를 갖는다. 전자는 권리존중주의 국가(right-based state), 후자는 최소국가(minimal state)로 이어진다. 권리중심주의 국가는 공권력이 기본법이나 헌법 등과 같은 일반적 규범들에 의해서 규제되고 있는 국가로 이해된다.(p.22) 이는 소극적인 의미로 '사람이 아니라 법에 의해서 통치되는' 비독재(non-despotic) 국가정도로 정의될 수 있지만, 외연이 매우 광범위하기에 개념으로서의 의의가 퇴색된다. 자유주의 이론에서는 권리중심주의 국가를 적극적으로 살핀다. 자의적이고 정통성이 결여된 권력행사를 방지하고 예방하는, 그리고 권력의 남용과 탈법적인 권력행사를 제동걸고 분쇄하는 모든 '헌법적인 장치'를 포용하면서 정의된다. 이는 ⓐ입법권우위(-행정권) ⓑ사법부에 의한 입법부 감시 ⓒ지방정부의 자율성(-중앙정부) ⓓ행정관료의 자율성이 핵심적 장치가 된다.(p.24)

상기한 장치는 최종적으로 자유를 보장하기 위해 존재한다. 이 때의 자유는 소극적 자유(negative liberty)이다. 자유주의에서 '자유'와 '권력'은 대립항이다. 양립불가능한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다른 사람의 자유가 확대된다는 말은 한 사람의 권력이 그만큼 축소된다는 것을 말한다."(p.25) 그래서 국가는 권리존중주의적일 필요가 있을 뿐 아니라, 그 연장선상에서 국가역할이 제한될 필요가 있음이 정당화된다. 개인의 입장에서 국가는 필요악이다. "가부장적 국가(imperium paternale)는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의 독재체제"라고 한 Kant와, "외부의 적이나 타인으로부터의 손상으로부터 개인을 지켜주고, 사적영역에서는 실현될 수 없는 공공사업의 필요성"으로 국가역할을 한정한 Smith는 이에 부합한다. Humboldt는 개인이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다양성(variety)의 가치를 중시한다.(갈등을 긍정하는 근거이기도 하다.) 국가가 어떤 목적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은 '안전(security)'일 뿐이라는 것이다. 헤겔이 상상한 국가는 더이상 자유주의에서 존재할 수 없다.

이처럼 자유주의는 근대적인 것이다. 반면 정부형태로서의 민주주의는 고대적이다.(p.36) 어원상 민주주의는 다수인민(the people)에 의한 통치이다. 자유주의자들은 민주주의를 불신한다. 그리스에서 볼 수 있었던 직접민주주의 형태를 말한다. 이는 인민에 대한 불신과 동일하다. Madison의 말을 인용한다. "인민들에 의한 통치는 이러한 위험스러운 악성의 경향성을 띠게 된다는 것을 고려하면서도 이 통치 형태의 지지자들은 결코 그 통치의 성격과 운명에 대한 경각심을 지니지 못하고 있다." 미국헌법에도 드러나듯이, 자유주의자들이 두려워한 것은 민주주의가 결국 다수에 의한 지배가 전제정(tyranny)이 되고 말 것이라는 점에 있었다. 이들은 논리상 대표가 통치하는 대의제 민주주의를 지지할 수밖에 없었고, 사회의 규모는 이를 뒷받침했다.(Bobbio는 이들의 생각에 반감을 표명한다.)

하지만 루소가 "진정한 민주주의는 결코 존재해보지 못했으며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고, 그 이유는 ⓐ작은규모의 사회 ⓑ간단한 사안 ⓒ부의 평등 ⓓ검소한 생활이라는 전제가 실현될 수 없기 때문"이라고 했듯이 이미 직접민주주의는 비실현태이고, 현실적으로 대의제민주주의만을 경험할 수밖에 없는 것은 사실이다. 그럼에도, 양자는 모두 인민주권의 어떤 원리에 입각하고 있음 또한 사실이라고 Bobbio는 지적한다.(p.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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