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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노자 “이순신·장보고 열풍의 배후는 박정희?”

진정 한국인을 사랑하는 박교수님 반갑습니다.

일제 해군 제독 도죠 히데오아끼의 발언이 없었으면 그 추종자가 과연 이순신 장군을 찾아내 발굴했을까?

 

 

 

박노자 “이순신·장보고 열풍의 배후는 박정희?”
월간 인물과 사상 6월호에서 ‘박정희의 역사복원’ 비판
2005-05-23 19:51 김재중 (jjkim@dailyseop.com)기자
“최근 드라마를 통해 급속히 확산되고 있는 장보고, 이순신 열풍을 보면, 아직도 권력자 위주의 역사관이 우리 머리를 다스리고 있다는 사실을 잘 보여주지 않는가?”

한국인 보다 한국을 더욱 깊게 통찰하고 있다고 평가받고 있는 오슬로 대학의 박노자 교수가 <인물과 사상> 6월호를 통해 ‘민속촌과 박물관’으로 대표되는 한국의 역사복원에 대해 일침을 가했다.

그는 ‘독재자가 한민족 전통을 날조한다’는 제목의 기고문을 통해, 친일 독재자 박정희가 체제 유지와 정당성 확보를 위해 과거를 현재에 복무시켰다고 주장했다.

▲ 박정희는 이순신에 매료돼 있었다 ⓒ KBS 
그에게 민속촌이란, “자녀들에게 효도를, 여성들에게 정절을 일방적으로 강요하여 그들을 개체로서의 권리가 결여된 가족이라는 절대적인 전체의 일원으로 만드는 조선시대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를 보여주는 또 다른 ‘전시 이데올로기’”에 불과했다.

아니나 다를까 그가 품고 있는 비수는 박정희에게 향하고 있었다. 국책사업으로 민속촌을 건설하고, 경주와 공주에 박물관을 세운 장본인은 다름 아닌 박정희였기 때문이다.

언뜻 생각해 보면 ‘박정희의 치적’이랄 수 있는 역사 복원사업에 대해 박 교수가 거칠게 이의를 제기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독재를 미화하는 전체주의 선전 주술의 비밀

그는 “(박정희가 복원해 놓은 민속촌과 박물관이) ‘아름다운 전통’의 담론과 전혀 부합되지 않는 전근대적인 계급사회의 현실에 대해 약간이라도 가르치고 있느냐”고 반문한다. ‘의문’이라기보다는 질책에 가까운 이야기였다.

또한 박 교수는 “전체주의적 선전의 주술”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며 사고의 폭을 넓혀 나갔다. 한국 뿐만 아니라 중국, 일본, 북한 등에서도 예외 없이 그런 주술적 기제가 작동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박정희와 마찬가지로 북한 역시) 사회적 변혁에 대한 기억과 외세침략에 대한 아픈 외상에 ‘민족, 전통, 사명, 한겨레’등 고상하게 포장된 집단주의적 수사를 가미시켜 좌파적 기원의 권위주의를 유지해 나갔다”고 설명했다.

박 교수는 역사를 조금 거슬러 올라가 일본의 한반도 침략과 지배과정에서도 ‘지배자의 주술’을 발견해 냈다. 일본은 1915년 경복궁을 짓밟고 난 뒤, 국립중앙박물관의 전신에 해당하는 근대적 박물관을 설립하고 고적 및 유물보존에 나선 바 있다.

▲ 장보고는 백제문화보다 신라문화에 대한 선택이었다 ⓒ KBS 
이에 대해 박 교수는 “고고학적 발굴 조사를 통해 (우리 민족의) ‘타율성’이나 ‘후진성’을 입증하거나 ‘일본과 조선은 하나였다’는 근거를 찾고 싶은 욕망도 있었겠지만, 무엇보다 애타적 시혜를 베풀어 군사 침략을 미화하려는 의도가 컸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때문에 박정희와 일제의 역사복원 사업은 ‘지배자의 통치 주술’이라는 점에서 다를 게 없다는 것이다.

박정희에게 선택받은 이순신, 그리고 신라

박노자 교수는 박정희가 매긴 우선순위 때문에, 우리 역사는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를 설파하면서도 유독 과거의 장군들에 포커스를 맞추고 있다고 바라봤다. 곳곳에 이순신, 강감찬의 동상이 세워지고, 역사 속으로 사라진 삼별초가 복원된 것 역시 박정희의 작품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1960~1970년대 정부 문화재관리국의 주된 업무는 이순신, 강감찬, 김유신, 삼별초, 을지문덕 등이 만든 ‘국난극복의 역사’를 선양하는 데 모아져 있었다.

또한 박 교수는 “박정희가 이순신을 최고 순위로 꼽았다”고 주장했다. “박정희가 어린 시절 이광수의 소설 <이순신>을 열독한 까닭에, 이순신이 가진 성리학적 사회의 모범적 무장으로서의 원래 모습은 사라지고, 위로는 국가를 받들고 아래로는 나약한 민중을 구제하는 ‘파시스트 국가의 모범적 표상’이 됐다”는 것이다.

박정희에게 선택된 역사는 이순신 뿐만은 아니었다. 박정희는 공주나 부여의 백제박물관보다 경주의 국립박물관을 더욱 화려하게 건설하면서, 경주종합개발에 한국의 문화재관리사상 최대의 액수인 125억 원을 투입시켰다. 이를 두고 박 교수는 “경상도의 ‘찬란한 고대’에 대해 박정희의 편애가 얼마나 심했는지 능히 알 수 있다”고 서술했다.

물론 박노자 교수는 박정희 시절의 유적 정비 역사를 완전히 부정하지는 않았다. “역사에 대한 관심과 자긍심을 유발시키는 순기능도 분명히 있었다”는 게 박 교수의 시각이다.

그러나 그는 기고문의 말미에 “(박정희가 복원한) 역사 속에는 중세의 여성이나 노비들이 고생하고 투쟁해온 흔적이 없다”며 “우리는 아직도 박정희가 ‘문화재관리’를 통해 만들어 놓은 ‘국난극복 사관’의 올가미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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