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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글]미야자끼 하야오의 77년작 미래소년 코난을 보고

일본의 현대사에 대해서는 내 개인적으로도 별도의 학습 및 이해가 필요할 듯

 

 

제목 미야자끼 하야오의 77년작 미래소년 코난을 보고
등록자 정유석() 등록일 2004/08/18 조회 26
설명

미야자끼 하야오의 77년작 미래소년 코난을 보고


 

주지하는 바대로 미래소년 코난의 원작자인 미야자끼 하야오는 60년대 적군파 전공투 운동때 도꾜대를 점거했던 인물이다. 기실 미야자끼 하야오만 그랬던 것이 아니다. '감각의 제국'으로 유명한 오시마 나기사 감독도 그랬고 세대는 다르나 거장 구로사와 아끼라 감독은 젊은 시절 프롤레타리아트 예술인 동맹 소속이었다.


 

60년대 말 군경과 야꾸자의 백색 테러에 의해 도쿄대 방화를 끝으로 일본 좌파가 싹쓸이된 후 당시 일본 운동권들이 대거 잠적한 거처는 에니메이션과 B급 뽀르노 회사이다. 일본의 모든 에니메이션, B급 뽀르노 회사에는 모두 운동권들이 최소 한두명씩 잠적해있다. 70년대 자유당과 민주당의 자민당 보수 대연합 이후 특히 더했다(90년 코리아의 민자당 3당합당의 벤치마킹 모델이다. 앞뒤로 글자만 바꿔서).


 

자민당 합당 이후 보수 일색의 죽은 잿빛 일본 사회에서 유일하게 에너지가, 엽기적인 에너지가 느껴지는 사회 영역은 에니메이션계와 B급 뽀르노 업계 뿐이다(예컨대 니어바나(nirvana)의 세계에 한층 몰입한 여배우?의 환희의 얼굴을 과도하게 클로즈업하는 일본 뽀르노를 연상해 보라). 실패한 혁명 이상으로 인해 일본 에니메이션의 한축인 그 철학은 미래 디스토피아로 가득하다(실상 물질만능주의 근대 일본에 있어서 철학이라는 것이 존재하는 영역은 에니메이션계가 유일하다).


 

그나마 미야자끼 하야오의 작품들은 비교적 밝으며 희망의 끈을 놓치지 않는다. 바로 이 70년대 작품인 미래소년 코난이 바로 그렇다.


 

어릴 적 코난의 가공할만한 발가락 파워에 낄낄거리며 볼 때는 몰랐었는데 이제 커서 보니 미래소년 코난의 장은 미야자끼 하야오 감독의 좌절된 혁명 이상향을 보상하는 놀이터였다. 말그대로 에니메이션을 통해(망까가 아님) 좌절된 현실과 다른 세계를 창조해낸 것이었다.

인더스트리아는 타도해야 할 내지 스스로 사멸할 기존 일본 시스템이었으며 반면에 하이바나섬, 홀로남은섬은 사회적 공동 생산, 사회적 공동 배분의 이상향이었다.


 

인더스트리아는 핵전쟁의 전후 폐허에서 재건된다. 그러나 그러한 역사의 교훈에도 불구하고 래프카 국장으로 대표되는 인더스트리아 즉 산업화 세력은 반성할 줄 모른다. 외부의 공격이 있기 전에 먼저 선제 공격할 수 없는 인더스트리아 방위 규정 즉 오늘날 일본 평화 헌법 9조는 한낱 종이쪼가리로 무시된다

(오또모 가쓰히로 감독의 '아끼라'도 그렇지만 일본의 핵전쟁에 대한 피해 의식은 마치 프로이트의 남근 거세 콤플렉스를 연상케한다. 사실 그렇게 볼 여지도 있다. 45년 소련 참전 이후 아시아에서, 유럽에서 파죽지세로 밀고 내려갈 때 일본의 패전은 기정사실이었다. 미국의 히로시마, 나가사끼 little boy 실험은 말 그대로 성능 실험이었다. 아주 불필요한......  비인간적인 일본에 대한 응징과는 별개로 미국의 오버액션의 비인간성 또한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이러한 래프카들의 대척점에 서는 코난은 일본 사회에서 출현해야할 신인류이다. 코난과 포비, 그리고 라나의 캐릭터는 모두 어린 아이들로 설정되었지만 어떤 면에서 그들의 액션은 성인의 그것이며 결국 미래소년 코난은 성인물이다. 그들은 때묻지 않은 성인들로서 신인류이다.


 

하이바나 섬은 미야자끼 하야오 감독이 꿈꾸던 사회주의-공산주의 이상향으로써

하야오는 어부 아저씨 말씀을 빌어 어부는 그 많은 고기들을 자기 혼자 먹기위해 잡는 것이 아니며 어부가 고기만 잡더라도 다른 사람이 만든 빵을 먹고 옷을 입을 수 있다라고 자신의 사회주의-공산주의 이상향을 축약하여 설명한다. 이것은 유적 존재로서 사회 구성체 구성원들의 사회적 생산과 사회적 분배, 능력만큼 일하고 일한만큼 가져가는 사회를 말한다. 실제로 하이바나 섬은 라나, 코난, 포비같은 어린애들까지 사회적 노동을 한다.


 

그러나 흑백이 칼같이 나뉘는 것은 아니다. 말그대로 인더스트리아를 통해 하야오 감독은 좌든 우든 산업화 근대화 그 자체를 거부하는 측면도 있다. 하야오 감독 외에도 이러한 전면적 부정적 디스토피아 그 자체는 일본 에니메이션 도처에서 나타난다. 에니메이션계와 뽀르노 산업계로 은둔한 그들 무리는 결국 좌절한 패배자에 불과하며 스스로 자기부정적인 단절의 측면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연속 선상의 멘트도 복합적으로 있다. 더 이상 물고기와 돼지를 사냥하는게 아니라 사육하는 코난과 포비를 보며 라나는 속으로 많이 발전했다라고 한다. 발전/개발 바로 근대화의 산물아니던가? 합리주의=도구적 이성주의=근대주의(주체와타자의분리)=오리엔탈리즘=개발주의=자연파괴=자본주의=제국주의=세계화=MBA=조지부시=마쵸이즘=...).


 

하야오의 아름다운 공동체 하이바나 섬도 자본주의 생산관계를 극복한 극도의 발전된 생산력 토대의 사회주의-공산주의 상이라기보다는 쁘띠 부르조아지 소생산자들 연합체같은 성격을 띤다(한폭의 파스텔톤 풍경화와도 같은 하이바나 섬 전경을 보라! 사실 과학적 사회주의를 말하는 자들에게도 전원 목가적 낭만주의 이상은 늘 병존한다. 하다못해 베를린 대학에서 법학 박사를 취득할 당시 보수주의적 지도 교수를 둔 칼 맑스 그 자신에게도!).


 

다만 자연과 환경에 대한 미야자끼 하야오 감독의 혜안 그 자체는 시대를 앞서 탁월하다 못해 예언자적이다. 60-70년대 아무리 일본 산업화가 가속화하였다고 하지만 자연과의 조화에 관한 본격적 이슈화는 1990년대 이후 얘기다. 그 이전까지 자연은 exploit 즉 개발/착취의 대상이었다(성경에도 그렇게 쓰여있다. 자연을 만들고 맨마지막으로 인간을 만들었으니 마음껏 exploit하라! 오늘날 기독교 신자들이 하느님이 자연을 후세를 위해 보존하라고 하셨다던데 성경 어느 구절에 근거한건지 모르겠다. 명문화된 성경 구절도 후세가 자의적으로 수정할 수 있을 정도면 왜 아담과하와 에덴동산 창조론 신화는 그토록 병적으로 고수하려고 집착하는지 모르겠다. 단군신화 비슷한 신화로 탄력적으로 해석하면 될 것을...). 물론 동양에서 인간과 자연의 공조는 역사적인 전제이기는 하나 하야오 감독은 이를 산업화 시대에서도 관철하고 있으며 이는 향후 '센과 치이로의 모험','월령공주' 등에서도 일관되게 관통되는 주제이다.


 

오히려 80년대 인간 소외의 거대 억압적인 동구권과 구소련의 몰락, 그리고 체르노빌 사고 등 사회주의 현실상을 보고 나중에 하야오가 어떤 얼굴을 했을지 궁금하다. 지금은 생각과 신념이 바뀌었을까? 그러나 현실 일본사회도 매한가지이다. 아무런 활력이나 희망도 없이 온통 보수 일색의 침체된 물질 만능사회에서 오직 자본주의적 극단적 소비를 위해 여학생 원조교제가 사회문제의 전면으로 등장하는 사회상 또한 하이바나 섬과 멀기는 마찬가지다(선진국으로 갈수록 성이 개방화되는 것은 필연적이다. 그런데 성이 개방화된다고 해서 학생들이 돈독에 올라 아자씨들을 상대로 성을 사고 파는 것은 별개 문제다. 그런 나라는 선진국?중에서 일본 밖에 없다. 요즘 코리아가 조금 흉내내는 듯 하다. 입시지옥 속에서 학벌 서열주의 차별과 탈락 및 배제를 어린 학생들에게 강요하는 공통점을 갖는 두나라다).


 

무슨 그나마 개혁적인 정권이라고 들어서서 매년 총리라는 작자가 신사 참배나 하고 곧 평화헌법 9조도 폐지하려는 이런 현실은 아직 채 멸망하지 않은 인더스트리아의 복사판이나 마찬가지다(이는 궁극적으로 독일의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과 비교시 맥아더 군정 하에서 도쿄재판등 역사 청산 날림으로 한데서 비롯된 것이다. justice가 없는 사회에 무슨 미래나 비젼이 있겠나?! 그때 전범들 제대로 청산 못했더니 지금까지도 기미가요 부르며 다시 전쟁 함 더 하자는 설래바리가 욱일승천하는 것이다.

한-일 양국 간에 축구 경기를 할 때를 제외하고는 역사 청산은커녕 아직도 우리 사회에 어떻게 일본 시스템을 카피할 수 있을까 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미 수도 도꾜의 인구가 3천만명이 넘어버려 국토의 균형적 이용은 물건너 가버렸고 부동산 거품 공화국 코리아보다 3-4배의 건설족 부동산 거품으로 인해 10년째 장기 불황의 거품을 탈출하지 못하는, 그 바람에 허울좋은 대기업 명함파고 우리나라 고시원같은 닭장 집에서, 더 심하면 교외에서 출퇴근 왕복 3시간이 넘는 곳에서 거주하며(우리나라 양평쯤?) 교통이라도 끊기면 회사 앞 캡슐방이라는 반평 이하의 또다른 닭장에서 잠을 청하는 바로 그 일본 말이다. 월드컵-탄핵 국면에서 우리 국민들이 보여준 역동성을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물질만능의 정신은 죽은 원조교제 황국신민을 그렇게 재생산하고 싶은가! 10년의 장기 복합 불황을 카피하고자 하는게 아니라면 일본은 우리의 추구 모델로써는 이미 파산했다).

 

사족이지만 마치 하야오 본인과 그 동지를 표현한 듯한 지하 레지스탕스를 비롯하여 26편의 장편을 통해 일본내 많은 계급-계층 상이 다양하게 묘사된다. 유독 야꾸자 상을 추출하기가 쉽지가 않다. 전세계 어디에 가더라도 협객을 자처하는 우익 정치 깡패들은 있으나 유독 60년대 좌익 척결을 통해 사회 주류 세력으로 부활, 인정받은 일본 우익 정치깡패, 백색 테러리스트 상이 간과되는 것이 의아스럽다. 바로 미야자끼 하야오 자신을 에니메이션계로 추방하여 오늘날 그를 있게한 원동인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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