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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중권 칼럼] <조선>기자 사건은 단순한 추태가 아니다

음 이렇게 깊은 뜻이... 대략 지름신의 강림

 

 

코리아나호텔 앞 엽기 퍼포먼스
[진중권 칼럼] <조선>기자 사건은 단순한 추태가 아니다
텍스트만보기   진중권(news) 기자   
조선일보에서 하는 일이라면 모두 사시로 바라보는 이 사회의 편견이 존재한다. 종종 조선일보 기자도 때로는 이 사회에 기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인색함이 이 사회에는 존재한다. 바로 그것이 우리의 시야를 좁혀, 조선일보와 그 기자들에 대한 정치적 비난 속에서 그들이 수행하는 작업의 문화적 의의마저 내다버리는 우를 범하게 만들곤 한다.

나는 그런 편견을 바로잡고 싶다. 코리아나 호텔 앞에서 엄청난 퍼포먼스가 벌어졌다. 이를 그저 조선일보 기자의 '주책' 정도로 폄하해도 될까? 그렇지 않다. 이 사건은 근대의 종언과 탈근대의 도래를 증언하고 있다. 그리하여 나는 이 사건을 하나의 문화적 '사건'으로 자리매김하면서, 그것의 의의를 우리의 문화적 자산으로 만드는 데에 미학적으로 기여하고 싶다.

하지만 이 위대한 작품에 대해 내가 아는 것이라곤 달랑 신미희 기자가 쓴 기사 하나, 그리고 현장의 목격자가 카메라 폰으로 찍은 사진뿐. 이것만 가지고 감히 시대정신을 증언한 위대한 작품에 덤벼들려 하니 설렘보다 두려움이 앞선다. 들어 가자.

근대적 시간의 붕괴

시간의 절대성을 믿는 우리는 ‘시간이란 과거에서 현재로 흘러와 미래로 흘러간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우리의 일상적 의식이다. 하지만 아인슈타인은 시간이란 절대적인 것이 아니며 속도의 함수일 뿐이라는 사실을 밝혀냈다. 즉 세상에는 단 하나의 시간대만 있는 게 아니라, 여러 개의 시간대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코리아나 퍼포먼스로 홍 기자가 던지고자 한 메시지는 이와 관련이 있다.

가령 홍 기자와 택시 운전사가 처음 만나는 순간의 대사를 보자. 기사에 따르면 홍 기자의 나이는 43세, 택시 운전사의 나이는 46세라고 한다. 그러나 홍 기자는 말한다.

“너 몇 살이냐. 내 아들 뻘 되는 놈이 세상 이렇게 살지 말라”면서 손으로 안씨 머리와 가슴 등을 구타했고 발로 허벅지, 낭심 등을 계속 찼다고 한다.

46세가 43세의 “아들 뻘”이 된다. 여기서 우리에게 익숙한 근대적 시간관념은 사정없이 무너져 내린다. 시간은 과거에서 미래로 흐르기만 하는 것이 아니다. 때로는 미래에서 거꾸로 거슬러 흐를 수도 있다. 그리고 “세상 이렇게 살지 말라.”

이 발언은 네가 사는 이 세상이 가능한 모든 세상이 아니라는 것을 강하게 시사한다. 나보다 세 살 많은 네가 내 “아들 뻘”이 될 수 있는 또 다른 시간대, 시간이 거꾸로 흐르는 또 다른 가능세계가 존재한다. 이 아인슈타인적 진리를, 홍 기자는 아직 일상적 의식을 벗지 못한 택시 운전사의 머리에, 가슴에, 허벅지에, 나아가 낭심에 육체적으로 각인시킨다. 이 육체성의 긍정이 진리를 말하는 탈근대적 방식이다.

분열분석

탈근대의 징후는 정신분석학에서도 나타난다. 2차대전 전의 정신분석은 주로 히스테리와 같은 신경증 분석이었다. 하지만 대전 이후의 정신분석은 주로 분열분석의 성격을 띤다. 사건이 나기 얼마 전 홍 기자는 한나라당 곽성문 의원의 추태를 비난하는 글을 썼다.

“한나라당 지도부는 곽 의원이 술에 취해 맥주병을 날리며 난투극을 벌인 사태에 그다지 심각하게 고민하지 않는 분위기다.”

그런 홍 기자 자신이 술에 취해 난투극을 벌였다. 의식의 일관성이 있다면 술에 취해 난투극을 벌이는 사람을 비난하면서, 동시에 자신이 술에 취해 난투극을 벌일 수는 없는 일이다. 여기서 근대의 의식철학은 해체된다. 홍 기자의 자아는 분열된다.

데카르트는 말한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하지만 라캉은 말한다. “내가 생각하는 곳에 나는 없다.” 홍 기자의 인격은 데카르트적 정신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그는 정신이 없는 곳에 몸으로 존재한다. 정신은 일관적이나 몸은 분열적이이다. 아르토와 같은 분열자가 술을 몸에 영접하면 디오니소스와 접신(接神)하여 충격적인 잔혹극을 연출하기 마련이다.

ⓒ2005 안만옥 제공
하얀 와이셔츠 바람의 사내가 주먹을 날린다(사진 참조). 얼굴을 얻어맞은 호텔 직원의 몸이 충격으로 뒤로 밀려나고 있다. 실제로 홍기자의 동작을 따라 해 보라. 정상적인 신체로는 저 자세에서 펀치가 나올 수가 없다. 사지가 따로 노는 듯 하나 가격은 정확하다. 저 몸은 예사로운 몸이 아니다. 저 몸은 정신의 근대적 통제를 벗어나 탈근대의 자유를 가지고 유희한다. ‘기관 없는 신체’가 있다면 저 몸에 가깝지 않을까?

순간이여 멈추어라

태권도 좀 배웠다고 하는 으스대는 사람들은 흔히 발차기의 높이를 자랑한다. 하지만 그것은 초짜들의 얘기다. 태권도 1, 2단 짜리들이 실전에서 별 볼 일 없다. 무협은 무용이 아니기 때문이다. 발차기는 높을 필요가 없다. 동작이 크면 클수록 허점 역시 커지고, 상대의 역공을 받을 확률은 더 커지는 법이다. 문대성의 환상적인 발차기는 사실 우연에 가깝다.

ⓒ2005 안만옥 제공
실전에서 중요한 것은 발의 높이가 아니라 발질의 속도와 정확도. 사진에 나타난 조선일보 홍 기자의 발을 보라(사진 참조) 결코 높지 않다. 하지만 그 어떤 공격이 저보다 더 파괴적일 수 있겠는가. 그의 발은 정확히 상대의 급소에 꽂혀있고, 사정없이 무너져 내리는 호텔직원의 무방비한 자세는 그 발질이 순간적으로 얼마나 민첩했는지 증언한다.

정신이 해체된 상태에서 저런 동작을 한다는 것은 디오니소스 신의 도움이 없이는 불가능할 것이리라. 여기서 근대의 주체성은 해체된다. 저것은 예술가의 업적이 아니다. 그는 그저 영매에 불과하다. 그는 쏟아지는 우주의 에너지를 영접하여 그것의 율동에 몸을 맡길 뿐이다.

호텔 직원의 곤두선 머리카락을 보라. 급소에 가해진 충격은 온 몸을 순간적인 전율 속으로 몰아넣고 곧바로 신체 주변의 공간으로 발산되어 흩어져 버린다. 낭심에서 전달된 충격이 몸을 빠져나와 허공으로 흩어지는 순간을 주의해서 보라. 형체와 배경의 경계선이 순간적으로 요동한다. 저 충격이, 저 전율이 저 사내의 몸의 형체를 사정없이 흔들어 공기 속으로 녹여버릴 듯하다.

다른 곳은 몰라도 급소에 가해진 운동에너지는 전기 에너지로 전화하곤 한다. 마치 감전된 것처럼 쭈뼛 선 사내의 몸과 머리카락. 사진의 미학은 유의미한 순간을 포착하여 영원으로 응고시키는 데에 있다. 작가는 전광석화처럼 지나가는 이 짧은 순간을 카메라로 포착했다. 이 기적적인 사진의 예술적 의의는 로버트 카파의 작품을 능가한다. 수작이다.

▲ 로버트 카파의 사진 <어느 인민전선 병사의 죽음>.
ⓒ1936 Robert Capa
2005-07-15 09:33
ⓒ 2005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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