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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쉰문과 청와대는 들으라

패러디 왕국의 적절한 지적! 사실 지난 번 딴나라 전재희 우원 누드 패러디는 엄청난 모독과 명예훼손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딴나라에 대한 모욕이 아니었다. '낙원 상실'이라는 르네상스 명화 원판 그 자체에 대한 모독이었다. 진주 목거리를 돼지 목에 거는 것도 죄이다. 그 패러디를 보고 꼴린다면 정말 대단한 짐승들이다.

 

 

 

[성명] 독립쉰문과 청와대는 들으라

2005.4.25. 월요일
딴지 편집국

 

패러디가 뭔지 그 개념조차 생소하던 암울한 20세기말.. 혜성처럼 출현해 국내 패러디계의 배아줄기세포가 되어 버린 본지.. 청와대의 독립쉰문 수사의뢰에 즈음하여 원로로서 한마디 하고자 한다.

먼저 독립쉰문에게.

독립쉰문, 얘야, 그게 뭐니. 자고로 머리가 나쁘면 몸이 고생하는 법. 니가 딱 그짝이다. 얘야, 패러디가 뭐라 생각하니. 패러디라는 게 성립되려면 말이다, 몇 가지 기본 전제가 충족돼야 해요. 우선 오리지널이 존재해야 한단다. 모사할 원본 말이다. 그것도 해당 패러디를 접할 구경꾼들 대다수가 그 주요한 속성을 사전 인지하고 있을만큼 알려진 원전이 존재해야 하거든. 패러디라는 게 이미 알려진 원전의 주요한 속성 몇 가지를 빌어와 - 이미 사람들이 그 속성을 알고 있으니까 길게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거지 - 그 속성을 살짝 비틈으로써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우회적, 풍자적으로 표현하는 간접화법이거든.

게다가 패러디는 본질적으로 방백이야. 상대에게 말하는 거 같지만 사실은 구경꾼들에게 말하는 거라구. 왜 직접 말하지 않고 구경꾼들에게, 그것도 돌려 말하느냐. 그게 훨씬 세련되고 재밌거든. 더구나 직접 공격하면 반발할 상대도, 그렇게 구경꾼들이 웃어 버리면, 거기다 대고 화냈다간 속 좁고 좀스런 놈 되어버리니까 뭐라 할 수 없게 되는 거지. 바로 거기에 패러디 미학의 정수가 있는 거야. 하고 싶은 말 다 하면서도 구경꾼들의 웃음으로 열 받은 상대를 주저앉혀 버린단말이지.

그래서 패러디는 애초부터 불균형한 권력역학 구조 속에서만 탄생하는 표현양식이야. 생각해 봐. 힘쎈 놈이 약한 놈 패는 데 구경꾼들 응원이 왜 필요하겠어. 그냥 줘 패면 되지. 그러니까 패러디는, 권력 없는 이들이 권력 가진 자를 야유하고 조롱하는 데 더할 나위없이 효과적인 문화적 표현양식인 게야. 패러디라는 양식은 존재 그 자체에 그렇게 정치성을 이미 내재하고 있는 거라고.

자 그럼 한 번 살펴보자, 니가 뭘 잘못했는지.

우선 넌 한 가지 기본은 만족시켰어. 힘 없는 놈이 힘 쎈 놈에게 덤빈 거. 너도 비장하게 씨불였잖아. <패러디는 권력과 힘을 가진 자에 대해 과감하게 할수록 정당하다>고. 맞는 말이야. 말 잘했어. 쫌 멋지기까지 해. 그런데 얘야, 그 만든 사진의 오리지널이 도대체 뭐니. 이미지의 원전을 도저히 모르겠단 말은 그 원전으로부터 빌어와 우회적으로 활용한 속성이 없다는 말이거든. 그러니까 그 원전에 애초 담겨 있는 속성을 살짝 비튼 우화적 간접화법이 아니라, 그냥 니가 하고 싶은 말 직접 씨불여 버린 직설화법이 되어버린 거란 말야. 말하자면 패러디를 하고 싶긴 했는데 그게 니 뜻과는 다르게, 되다가 만 거지.

멋들어진 소설 한 편 쓰고 싶었는데, 제대로 기본 내러티브도 못 갖춘 3류 통속 소설이 돼 버린 거라구. 그러니까, 니가 수사를 받는 건 니가 패러디를 해서가 아니라, 그게 전혀 패러디가 아니란 오해를 줘서인 게야. 당한 사람들은 대놓고 욕했다고 본 거지. 적어도 이 사태 원인의 1/3은 거기 있어.

두 번째, 패러디의 가장 큰 응원군은 박장대소하는 구경꾼이란 말야. 근데 그걸 보고 아무도 웃질 않았던 게야. 노무현을 지지하든 않든 말야. 니가 사람들을 못 웃긴 거지. 누굴 탓하겠어. 니가 안 웃긴 걸. 그게 1/3. 그래서 합이 2/3.

그러니까 지금 넌 정권에 정면으로 도전한 반체제 인물이나 정치적 인사가 아니라, 원하는 걸 제대로 된 양식으로 표현하는 데 실패한 후진 예술가라구. 스스로 어떻게 이해하고 있든 말야. 그러니까 2/3는 남탓을 할 게 아니라 니 머리를 탓해. 하지만 말야, 아무리 그래도 머리 나쁜게 죄는 아니거든. 죄는 아니라구.

바로 이 대목서부터 본지, 청와대에 할 말이 있어.

자, 여기 기본 골격도 제대로 못 갖추고 맞춤법도 틀린 데다 비문 투성이인 3류 통속 소설이 시장에 나왔어. 이 소설가 잡아갈까, 죽일까. 소설이 수준 미달이라고 말야. 당연히 아니지. 그 소설은 독자에게 외면 당하는 것으로 처벌받는 거잖아. 그게 문화의 논리 아냐. 예술적 재능이 대중으로부터 외면 당하는 건 창작자에게 사형과도 같은 거니까. 창작 그만 하라는 거니까. 예술가로선 죽으라는 거니까.

그런데 말야, 왜 자꾸 패러디만 문제가 되는 거야. 왜냐. 패러디 당한 사람이 기분 나쁘거든. 그리고 그 대상들은 거의 언제나 상대를 벌할 충분한 크기의 권력을 가지고 있거든. 패러디의 양식적 특성상 애초 그렇게 권력 있는 자들만 주인공이 되니까. 물론 구체적 인물이 아니라 주류적 감성이나 지배적 질서 같은 관념적 권력이 주인공이 되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구체적인 인물, 권력 있는 자들이지.

이번엔 그 주인공이 대통령이야. 대통령더러 대가리 총맞고 싶냐고. 이 씨발. 기분 나쁘지. 그치? 그래 기분 나빠. 지지자는 뒤집어질 노릇이고 지지자가 아니어도 불편하지. 근데 말야, 패러디의 속성 자체가 원래 그래. 권력을 가진 상대가 기분 나쁘라고 하는 거야. 그러니까 상대가 기분 나쁘면 나쁠 수록 1차 목적은 달성한 거라고. 그래도 정도가 심했다고 말하고 싶지? 맞아.

왜냐. 양식을 제대로 못 갖춰서 세련미도 없고 우회적 조롱이나 골계미도 없어서. 그래서 그저 듣는 사람 기분 나쁘고 구경하는 사람 불편한 직접적 시비가 되고 만거야. 수준미달의 패러디지. 그러니까 실패한 패러디야. 원전의 속성을 빌어오는 데도 실패했고 구경꾼들을 박장대소하게 하는 데도 실패했으니까.

하지만 말야, 패러디라는 문화적 표현 양식은 왜 유독 법이 그 실패를 심판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거니. 실패한 소설이 독자의 외면으로 심판 받는 것처럼, 실패한 패러디도 구경꾼의 외면으로 심판받아야 하는 거라구. 성공한 패러디가 구경꾼들의 환호를 받으며 엄청난 파급력과 메시지 전달력을 가지는 반면, 실패한 패러디는 이게 뭐야.. 하는 반응으로 오히려 스스로 조롱거리가 되는 걸로 대가를 치르는 거라구. 그게 패러디라는 양식에 걸맞는 처벌이라구.

법원으로 들고 가서 어떤 표현까지는 괜챦고 어떤 표현부턴 봐줄 수 없다고 선을 그으려거든, 아예 패러디라는 장르 자체를 인정하지 마. 그게 솔직한 거야. 너무 심한 거 아니냐고 화 나는 거, 니들이 참아. 문화라는 게 원래 그렇게 자의적인 기준밖에 없는 거야. 좋은 작품, 나쁜 작품. 다 자의적이야.

이 장르 자체를 문화적이면서 동시에 정치적 표현 양식의 하나로 제대로 인정하려거든, 그럼 심판은 구경꾼들에게 맡겨. 소설하고 다르다고 생각하지마. 문화적 의미, 똑같아. 실패한 패러디도 법이 처벌할 일은 아니라구. 절대.

해서 패러디의 단군, 본지는 이번 수사를 강력하게 반대하는 바야. 독립쉰문의 되다 만 패러디의 내용을 지지해서가 아니라, 그것과는 전혀 상관없이, 정치적 의사표현의 하나로서 풍성한 문화적 표현 양식의 하나로서, 패러디 자체를 위해 수사를 반대해. 패러디라는 형식 그 자체와 그걸 즐기고 만들 권리는, 대통령 혹은 그 측근들의 기분보다 훨씬 더 중요한 가치라구. 본지는 그렇게 생각해.

마지막으로 독립쉰문, 넌 앞으로 패러디 하려거든 엉아들한테 물어보고 해. 이렇게 하면 패러디 맞냐고. 머리가 나쁘면 지가 머리가 나쁘다는 것 정도는 인정하고 살아야 남들한테 큰 피해는 안 준다구. 엉아들이 너땜에 동종 업계에 있는 게 제발 쪽팔리진 않게 해줘. 이상이야.

 

딴지편집국(chongsu@ddanz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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