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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정서’ 뒤에 숨어 장난치는 동아일보

 

 

국민정서’ 뒤에 숨어 장난치는 동아일보
국민정서법의 서글픈 유전보다 더 슬픈 건 궁색한 언론의 초상
입력 :2005-10-13 11:57   문한별 편집위원 (mhb1251@dailyseop.com)
참 신기하다. 그놈의 '국민정서법'.

글자도 아닌 것이, 모양도 없는 것이, 오직 소리없는 공감으로만 존재하며, 법률보다 헌법보다 높은 자리에 위치해 사사건건 모든 일을 간섭한다 하여 일명 '도깨비법'이란 이름을 얻기도 했는데, 바로 그런 까닭에 갖다 쓰는 사람에 따라 중국 전래의 변검 묘기처럼 수시로 얼굴을 바꾸는 변덕쟁이 노릇을 할 수 밖에 없는 슬픈 운명을 타고 났으니....

12일자 동아일보 지면을 들춰 보자. 1면톱을 장식한 기사가 <청와대, "강정구 교수 구속 신중해야"... 검찰에 의견 전달>이다. 요지인 즉슨, 청와대가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고발된 강정구 교수에 대한 사법처리 문제와 관련해 검찰에 '신중한 수사'를 요구한 것은 '검찰의 독립'을 훼손하는 지극히 우려스러운 행태라는 것.

▲ 2005년 10월 12일자 동아일보 4면에 실린 관련기사 

기사는 강 교수 구속에 반대의견을 피력한 몇몇 여권 인사들의 발언을 선별적으로 인용한 뒤, 그에 반발하는 일선 검사들의 항변을 비중있게 소개하는 형식을 취했다. 여기서 눈에 띄는 대목은 일선 검사들과의 회의에서 익명의 대검 간부가 내뱉었다는 다음과 같은 말. “검찰은 국민의 보편적 법 감정을 해치는 일을 해서는 절대 안 된다” 운운.

풀어 말하면, 강정구 교수와 같은 빨갱이를 당장 구속 수사해야 한다는 게 작금의 국민정서인데 검찰은 이를 어기는 일 따위는 절대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국민정서법의 위대한 찬가라 할 이러한 내용은 이날자 4면 <검찰, 구속방침 정하고도 5일째 장고>라는 관련기사에서 거듭 되풀이된다. 육법전서 외에 국민의 정서까지 헤아려 주시는 고마운 검사들의 말을 들어 보시라.

"검사들의 수사 의견서에는 “이번 사건은 검찰 공안부의 존립 문제, 그리고 국민의 보편적 법 감정에 관한 문제란 점을 고려해 구속 수사가 불가피하다”는 표현까지 포함된 것으로 알려졌다. 한 검사는 “구속 수사가 마땅한 것은 검찰뿐만 아니라 국민 대다수의 감정이 아니냐”며 “정치권은 정치권이고 검찰은 검찰”이라고 말했다...."

국민을 생각하는 검찰의 마음씀씀이가 보통이 아니다. 검찰 자신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국민의 보편적 법 감정을 고려해 강정구 교수를 구속 수사해야 한다지 않는가. 그뿐 아니다. 어느 틈엔가 정체도 불분명한 국민 대다수의 감정이 하나님과 동급이라는 검찰에 맞먹는 지위에까지 수직 상승했다. "검찰 뿐만 아니라 국민 대다수의 감정"이라는 표현을 보라. 놀라운 댓구 아닌가.

여기서 잠시 영화 <백 투더 퓨처>를 흉내내 가까운 과거를 여행해 보자. '과거'라는 단어를 쓰기조차 민망한 불과 두달 전의 일이다.

▲ 2005년 8월 10일자 '광화문에서' 코너에 실린 문제의 칼럼 
지난 8월 10일자 동아일보 '광화문에서' 코너에 <판도라가 X파일 앞에 선다면>이라는 인디아나 존스 풍의 제목을 단 컬럼이 하나 실렸다. 컬럼을 쓴 이는 한기흥 동아일보 정치부 차장. 삼성총수 이건희가 돈을 미끼로 대한민국의 정치·경제·언론·검찰을 멋대로 주물렀다는 내용을 담은 희대의 범죄극 'X파일'을 "까발릴 것인가 말 것인가, 그것이 문제로다"라고 노래한 글이다.

그 글에서 한 차장은 X파일 공개가 불가피하다는 쪽으로 논의를 좁혀가고 있는 정치권의 움직임을 "여론에 더 큰 압박을 느끼는 것 같다"고 비판하면서 "하긴 ‘국민정서법’이 어떤 법보다 상위에 있는 게 한국의 현실 아닌가"고 신랄하게 비꼬았다. 그러면서 한다는 말, "냉정을 되찾아야 한다." 흥분한 국민정서를 거스려 냉정을 촉구하는 지엄한 그의 목소리를 들어 보시라.

"X파일 공개와 관련해 거론되는 국민의 알권리 이면엔 남의 행동을 엿보고, 엿듣고 싶어 하는 이상 심리가 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국민의 알권리는 소중하지만 위법을 저지르면서까지 무엇을 알아야 한다는 것은 아닐 것이다.... X파일의 내용이 아무리 궁금하더라도 호기심을 우리 사회를 지탱하는 법적 안정성과 바꿀 수는 없다...."

앞글에서 법 전문가인 검사들조차도 서슴없이 승인 추앙하는 '국민정서'가 여기서는 졸지에 천박한 '관음증'으로, 혹은 '법적 안정성마저도 허물 수 있는 위법하고 불온한 호기심'으로 매도된다. 돌연한 변신이다. 눈길 따라가기도 바쁜 초특급 변덕이다. X파일의 '냉탕'과 강정구 교수의 '열탕'을 바삐 오가는 신문지에 걸맞는 신기한 묘기랄까.

신문사의 편의에 따라 "민심은 천심"이라는 '하늘의 목소리'가 되기도 하고, '유혹자의 음성'에 홀린 "저열한 말초적 호기심"이 되기도 하는 국민정서법의 서글픈 유전이 새삼 눈물겹다. 내세울 게 없어 '국민정서법'에 기대 강정구 교수를 손가락질하는 궁색한 언론의 초상 또한.

국민정서는 말이 없고, 오직 신문지만 바람에 펄럭이고 있다.

ⓒ 데일리서프라이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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