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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딴지 고찰] KGB가 돌아온다!

멋진 마지막 멘트!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로 복원을 논하던 고르비는 뭐하고 살까

 

남의 나라와서 대통령 앞에서 자본주의가 공산주의 이겼다 역사 종말 연설하던, 무례하기 짝이 없고 싸가지라고는 눈꼽만큼도 찾아볼 수 없었던 애비 부쉬, 머리에 든거라고는 하나도 없는 옐찐, 한술 더뜬 푸틴...... 삽집은 계속된다.

 

 

 

 

[고찰] KGB가 돌아온다!

2004.04.25. 월요일
딴지 해외첩보 수집반

 

노통이 곧 러시아를 방문할 예정이다. 방문취지가 소련의 '2차 세계대전 승전 60주년 기념행사' 참석이란다. 60년 전 히틀러가 이끄는 독일과 맞짱 떠서 이겼으니 한국을 포함해 미, 영, 독, 일, 중 등 국가들이 손수 와서 축하해 달라는 거다. 뭐 불렀으니 축하는 해주겠다만 그 내막을 들여다보면 좀 씁쓸하다.

그 내막. 오늘은 그걸 디벼보도록 하겠다.


암살


모스크바 북쪽 클랴지민스키 거리 11번지.

64세의 한 건장한 체격의 남자가 그랜드 체로키 지프를 자신의 아파트 앞에 주차하려는 찰나, 총성이 울린다. 첫 번째 탄환과 두 번째 탄환은 각각 이 남자의 머리와 가슴을 정통으로 관통, 세 번째 탄환은 남자의 차에서 내려 현관으로 향하던 28세 여자의 머리에 박힌다. 남자는 그 자리에서 즉사, 여자는 피범벅인 채 병원으로 후송 조치되었으나 다음날 아침 숨진다. 현장에서 살아남은 유일한 사람은 4살난 여자아이 뿐.

영화의 한 장면이냐고? 아니다. 지난 4월 10일 일요일 저녁 7시 반경에 일어난 실제 사건되겠다. 숨진 남자는 전 FSB(러시아 연방보안국, KGB의 후신) 부국장. 숨진 여자는 그의 아내, 4살난 여자아이는 이들 부부의 딸로 밝혀졌다.

사건 발생 후 각 언론들은 대체로 두 가지 살해배경 보도를 내놓았다. 러시아 일간지 <코메르 산트>같은 경우는 "비지니스 상 불거진 개인적 원한관계에 의한 행위"로 살해배경을 설명했다. 살해된 전 FSB 부국장은 은퇴 후, 러시아에서 호황업 중 하나인 경호업계 대부로 자리잡았는데, 마피아와 전직 KGB요원들이 얽혀 서로 이권다툼을 하고 있던 중 일어난 사건으로 해석했다.

그리고 다른 하나. 죽은 그가 FSB 부국장 시절 체첸 전쟁에 반대하는 제스쳐를 취하고 당시 옐친 러시아대통령의 심복을 체포했으며, FSB의 수장으로 새로 내정된 사람에 대해 불만을 가졌기 때문에 일어난, 일종의 정치적 보복이라는 주장이다. 

그 때 FSB의 수장으로 내정된 사람은 현 러시아 대통령인 블라디미르 푸틴이다.
 

레닌그라드의 파이터

유도 7단의 무술 고수, 16년 동안 첩보활동을 한 KGB 요원, 슬라브족 특유의 좁고 각진 얼굴, 상대방을 꿰뚫고 있는 듯한 차가운 눈, 말 수가 적고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 냉혈적 이미지.

푸틴.

그가 자서전을 통해 털어놓은 레닌그라드에서의 어린 시절 얘기 한 토막.

"어릴적 싸움을 해 콧잔등이 성할 날이 없었다."
 "길거리에서 무자비하게 싸우는 법을 배웠고 학교 진학 후에는
성적이 좋지 못했다."

크렘린 궁에 입성한지 3년 만에 지구 땅 덩어리의 8분의 1에 해당하는 국가의 수반으로 고속 승진한 그는, 분명 어린 시절을 관조하듯 이 문구를 썼으리라. 그러나 그에게 있어 '무자비하게 싸우는 법'은 어른이 되어서도 현재진행형이다.

1999년 9월 30일. 이 날은 '96년 1차 체젠전쟁 종결 이후 러시아가 체첸 영토에 처음으로 지상군을 침투시켜 전면전으로 확대되던 날. 이 날 이후 전세는 러시아 쪽으로 일방적으로 흘러갔다. 러시아군은 1주일쯤 후에 체첸영토의 3분의 1을 장악했으며, 다시 1주일쯤 후엔 전쟁 최대 작전 목표인 고라고르스 마저 손아귀에 넣었다. 1차 체첸전 당시와는 대조적으로 지상군 투입 보름만에 주도권을 확보함으로써 러시아가 전략적 승리를 이미 달성한 것으로 평가받게 된다.

이러한 전쟁을 실질적으로 총지휘한 사람은, 당시 불과 1달째 총리직을 맡고 있던 푸틴이다. 그의 대통령 행을 도운 결정적인 사건인 이 2차 체첸전쟁은 사실 그 해 9월 모스크바 내에서 다섯차례 잇따른 아파트 폭발 테러에서 촉발된 거다.

'99년 9월 13일 모스크바 남부에 위치한 8층 아파트 테러. 이 사건으로 120여명이 사망했다.

그런데..

이 폭발물을 설치한 사람이 체첸 테러분자가 아니라 사실은 러시아 FSB의 소행이라는 설이 체첸군 사령관에 의해 제기되었다. 300여명을 사망시킨 연쇄 아파트 폭발 테러는 체첸에 대한 대대적 공격을 감행할 수 있는 하나의 빌미였고, FSB 국장 출신으로 체첸 진압의 대표적 매파였으며 공작정치에 능한 푸틴이 이를 지시했다는 거다. 물론 하나의 가정이다.

만약 이 가정이 맞다면 푸틴은 어쩌면 어린 시절 레닌그라드에서 '무자비하게 싸우는 법'을 익힌 후, 그 획득형질의 일정부분을 체첸 전쟁에 그대로 활용하고 있었던 게다. 언론에선 물론 이러한 면을 '전광석화같은 실천력과 추진력'으로 표현하지만.
 

  체카에서 KGB까지

1917년은 러시아 역사를 통틀어 가장 격동적인 한 해였다. 그 해 2월, 300년 간 지속된 로마노프 왕조가 니콜라이 2세를 마지막으로 완전히 몰락하고, 10월에는 왕조의 뒤를 이은 임시정부마저 무산계급의 노동혁명을 부르짖은 볼셰비키에 의해 무너졌다. 러시아에서 '세계최초 사회주의 국가의 태동'이라는 기운이 무르익을 무렵인 이 때, 볼셰비키 혁명의 반대파를 축출하기 위해 그 해 12월에 창설된 비밀경찰이 있었으니, 이게 체카(checha)다. 바로 KGB의 뿌리가 되는 셈.

체카는 레닌암살 미수사건 이후 볼셰비즘의 모든 적을 색출, 자료에 의하면 한달 동안 무려 500여명을 숙청시킨다. 이후 체카는 게페우(GPU, 국가정치보안부), 엔케베데(NKVE, 내무인민위원회), 엔카케베(NKGB, 국가보안인민위원부), 엔게베(NGB, 국가보안부)로 개칭된다. 마치 한국의 중앙정보부가 국가안전기획부로 바뀌고 다시 국가정보원으로 바뀌듯이.

스탈린 집권 시 게페우와 엔케베테는 소련인민들 중 소련정권에 조금이라도 위험을 가할 인물로 판단되면 가차없이 숙청, 당시 루비얀카 형무소 지하실에서는 하루도 빠짐없이 참혹한 인간도살이 이뤄졌다. 아, 갑자기 밥 딜런 형님의 "얼마나 많은 사람이 뒈져야 진짜 참 많이 죽었다는 걸 깨달을까" 어쩌구하는 노래가사가 생각날라구 한다.

KGB 본사

아무튼, 그러다가.. KGB(국가보안위원회)라는 이름을 갖게 된 것은 '54년이다. 서방에 알려지기로, 80년대에 한정시켜 KGB가 가동할 수 있는 요원은 50만에 이른다.이 중 기갑부대, 항공기, 함정을 소유한 국경경비대가 30만이다.

이 30만이라는 수치는 일본 자위대의 육·해·공군을 합친 것보다 많다. 물론 이 국경경비대는 소련 국방부의 지상군이나 공군과는 별도로 가동되는 군조직이다. 이 점은 'KGB = 소수정예의 비밀경찰' 이라는 편견을 간단하게 유린한다. KGB가 해체될 당시인 91년엔 정식요원이 70만명, 조직을 운영하는 연간예산이 22조 원에 이르렀다고 한다.

소련 내에 있는 모든 공공기관서부터 개인단위까지 정보 신경망을 촘촘하게 연결시키고 있는 KGB는, 미국 CIA까지 그 신경망을 뻗치고 있었다(물론 미국 CIA도 KGB에 첩자를 두고 있었다. 양측 모두 이 사실을 알고 있다). 보통 KGB에 잠입한 CIA요원이 발각되었을 때 당장 처형하지 않고 가만이 놔둔다. 왜? 의도적으로 잘못된 역정보를 미국으로 흘려보내는 루트로 최대한 활용하다가 이 활용가치가 없어지는 시점에서 제거하면 되기 때문이다. KGB에 잠입한 CIA요원이 전향하는 경우도 있는데 이 때 전향의지의 진정성은 어느 만큼 KGB가 몰랐던 중요한 정보를 털어놓느냐에 달려 있다. 그러나 이 진정성마저 집요하게 의문시되며 양측간 정보전의 도구로 이용되고 있다. 속고 속이고.. 이 바닥이 참 골치 아프다.

74년 동안이나 소련 숙청의 역사를 대변하고, 미국 CIA와 첩보전쟁을 벌이며 소련의 강성이미지를 튜닝해내던 집단 KGB. 그런 KGB도 종지부를 찍게 된다. 소련변혁의 구심점 고르바쵸프의 등장으로 KGB는 닑은 냉전 전유물 이상의 존재의미를 찾지 못한 거다. 막바지에 이르러 고르비를 크림반도에 연금시키면서까지 옛 소련공산당의 중흥을 꾀한 쿠데타가 실패하게 됨으로서, 공포정치의 상징 KGB는 옐친에 의해 91년 말 FSB(연방보안국)과 SVR(해외정보부)로 해체분리된다.
 

다시 푸틴, 그리고 KGB의 부활

91년 당시 KGB와 군바리가 일으킨 쿠테타의 현장.

몸소 탱크 위에 올라가 "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해 싸우자"고 기염을 토해낸 자 있었으니 옐친이다. 그의 이 행동 하나는 국내외 여론을 반쿠데타로 돌리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결국 쿠데타는 3일 천하로 끝났다. 

그런데 8년 후.

일흔에 가까운 나이, 툭하면 재발하는 심장병, 술주정뱅이에다 끊임없는 실언, 친척의 부패 스캔들, 그리고 결정적으로 경제 정책의 실패 등으로 옐친은 개혁주의자라는 이름의 껍데기만을 남긴다.

이 때 권력의 진공상태를 간파하고 러시아 국민들의 욕망을 스캔한 뒤 그 진공상태를 차곡차곡 자신의 힘으로 냉혹하게 채운 사람은, 푸틴이었다. 옐친의 불안한 퇴임 후를 보장하는 대신 후계자로 낙점 받았고, 러시아 민족주의를 자극해 체첸 전쟁을 국민통합에 교묘히 활용하였으며, 이 때 보여준 본인의 강성이미지를 러시아의 강성이미지로 버전업 시키는 능력..

대통령 행정실 부실장에서 FSB국장으로, 총리로, 그리고 대통령 권한 대행을 거쳐 마침내 대통령이 되기까지 걸린 시간은 불과 3년 남짓. 이 가파른 출세가도의 탄력인지 대통령이 되어서도 강성 드라이브는 계속 된다. 강력한 러시아를 만들기 위한 이런 노력은 냉전시대의 구소련으로 돌아가려는 듯한 인상을 풍긴다. 결국 국민들은 푸틴의 이런 부분에 기인해, 그를 제정러시아 시대 힘의 상징 표트르 대제의 현대적 출현이라고까지 평가하기도 하는데.

여기서 그치지 않고..

자신의 정치적 입문을 도운 친옐친계를 계획적으로 토사구팽시키고, KGB시절 충성관계에 있던, 자기 말마따나 "부패는 조또 모르는" KGB 출신으로 친정체제를 구축한다.

그 정도가 어느 만큼인가 하면, 한 때 러시아란 나라는 대통령, 국방장관, 내부장관이 KGB출신으로 포진되었던 나라였다. 뿐만 아니라 연방 이민국, 국가 지원국, 천연자원 감독국, 군사기술 협력국, 마약류 유통 감독국 등 힘께나 쓸만한 기관의 오야붕이 전부 KGB 출신이었다. 작년엔 아예 공식적으로 KGB의 부활을 요지로 한 대통령령에 서명했다.

나라 전체를 무슨 비밀첩보국 만들 일 있나?
 

스탈린의 추억

그런데 더 웃긴 건 러시아 국민들의 반응이다. 단순히 푸틴에 대한 지지율이 70%를 웃도는 - 대통령 지지율 70%. 그건 그럴 수 있다. 모라토리움을 선언할 만큼 파탄지경에 이른 경제를 단 시간 내 고성장으로 반전시키고, '초강대국 국민'이라는 이들의 자존감을 복원시켜 놨으니까 - 차원 이상의 '강했던 소련에 대한 향수'같은 것이 러시아 국민들의 정서에 서려있다.

서방언론의 부추김과 옐친의 권력욕이 합쳐지면서 '소련해체'가 이뤄졌다는 주장이 공공연히 제기되고, 푸슈킨 광장엔 아직도 낫과 망치가 그려진 소련국기를 들고 나온 사람들로 붐빈다. 거기 모인 사람들은 '91년 쿠테타 실패를 아쉬워하는 사람들이다. 반면 쿠테타 저지 기념 집회는 초라하기 짝이 없다. 크렘린궁에서는 더 이상 울리지 않았던 소련 국가가 푸틴의 지시로 다시 울리기 시작했고, 모스크바 붉은 광장의 군사 퍼레이드가 10년 만에 부활했으며..

KGB 부활의 분위기도 만만찮다. KGB의 가장 잔인한 우두머리였으며 소련공산당 서기장까지 지낸 안드로포프의 90회 생일을 축하하는 자리. 이걸 푸틴이 공식적으로 연 것이다.

'부다페스트의 도살자'라고 불려지기도 하는 이 양반은, 헝가리의 반소항쟁 때 헝가리인 5만 명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유혈진압의 총책임자다. 우리로선 잊을 수 없는 사건 하나. '83년 269명을 태운 KAL 007기가 소련에 의해 격추되었을 때 이 양반이 당시 소련공산당 서기장이었더랬다.

러시아 국민들 사이에서도 KGB 열풍이 일기 시작했는데, 영화에서부터 TV드라마, 베스트셀러 소설, 심지어 테마 레스토랑까지, KGB가 하나의 문화코드로 떠오를 정도다. 푸틴이 KGB가 되는데 영감을 줬던 소설 <방패와 칼>은 영화화되어 절찬리에 상영되었다.

지금 러시아 국민들은 한때 강대했던 제국과 그 통치자 스탈린에 대한 향수를 앓고 있다. 그를 추모하는 거리가 조성되고 그의 동상이 재건된다. 참전용사들은 그가 지휘한 과거의 전쟁들을 자랑스레 읊조리며, 히틀러를 상대로 항복을 받아낸 지도자로 그를 새롭게 칭송한다. 최근 한 여론조사에서 스탈린은 레닌에 이어 '20세기 가장 위대한 러시아인' 2위를 차지했다.

러시아 밖에선 보인다. 그들은 현재의 상실감을, 그렇게 과거에 대한 왜곡된 기억으로 보상받고자 하는 게.
 



"박정희 같은 사람이 한 번 더 나와서 정치판을 확 갈아엎어야 할텐데."
"그 분 때문에 우리가 이 만큼이라도 먹고 살게 된 거 아냐"

요즘도 하는 얘기들이다. 이런 식으로 박정희를 되살려낸다. IMF와 경제불황의 감성적 해법으로.

인터넷 경매에서 박통의 소장품들이 관심을 끌고, 생전에 어느 잔치에서 노래 부른 장면이 네티즌들 사이에 널리 퍼지고, 각종 여론 조사에서 늘 압도적으로 1등 먹으며, 신문사들은 또 그들대로 돌아가며 신드롬을 조장하고, 좃선은 아예 한 면을 할애해 전기를 내보내고..

부끄럽다.

바로 우리가 러시아인들이다...

딴지 해외첩보 수집반
술탄(sultan@ddanz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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