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테러리스: 테리 이글턴 학국 강연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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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에 혹시나 관심이 있으신 분들이 있을 것 같아서, 포스팅을 한다는 것이 깜빡했는데, 저도 깜빡할 뻔 했습니다. 테리 이글턴이 비중있는 학자이지만 한국에서는 주류 학계 이외에는 스쳐지나 가는 것 같아서, 후기를 올립니다. 강연 2시간 후라서, 정련되지 않은 생각이니 감안하시고, 이클튼의 발표 내용을 제가 나름대로 다시 쓴 것이므로, 원문과는 많이 다를 수 있습니다.

 

한국연구재단이 주최하고 교육과학기술부가 후원하며, 고려대학교 영미문화연구소와 영어영문학과가 주관하는, 2010 석학과 함께하는 인문강좌 3기 해외석학강좌로 -- 엄청 길군요 -- 테리 이글턴Terry Eagleton 초청 강좌가 있었다. 이날 행해졌던 이글턴의 발표문은 제목이 신념과 근본주의Faith and Foundationalism로, 고려대학교 인촌기념관 대강당에서 2010년 9월 6일(월) 오후 4시에 진행되었다. 따로 원문은 구할 수 있는지 모르겠다. 사실 이글턴이 온다고 해서 듣긴 들었는데, 오늘인 줄 몰랐다가 네오폴님의 메시지 -- 감사! -- 로 알게되었다.  다행히 주위를 배회 중이라 조금 늦게 갔는데 운좋게 처음부터 강연은 들을 수 있었다. 들었다기 보다는 13페이지 분량의 발표문을 한글 번역본으로 대략 읽고 나왔다. 질문은 뭐하게도 영어로 질문하고 답하는 바람에, 게다가 귀담을 내용은 없는 듯 해서 살포시 나와버렸다.

일단 분위기를 간략히 언급하면, 발표장소가 전에 월러스타인이 강연했던 곳인데, 그때보다는 사람이 약간 적었으나 대형 강의실이 거의 찼다고 보면 되고, 홍보를 그러고 보면 별로 하지 않은 것 같은데도 사람들이 많은 편이었다. 여담이지만 이글턴의 외모는 한 170cm에 배가 둥실나오고 머리가 허언 안경잽이 -- KFC 할배같다고나 할까. 내가 들어갔을 때, 진행자가 말하길, 이클튼 자신이 좀 더 급진화됐다고 소개했다고 했는데, 청중들은 좀 급진적 질문을 던지지는 않았던 것 같고, 내가 사람들의 속내를 알 수 없기에 이런 관심법은 넘어가자.

발표 내용은 최근에 서양에서 부상하는 신과 신학 논쟁, 특히나 무신론자인 좌파들 -- 바디우, 지젝, 아감벤, 하버마스 등 -- 이 종교적 논의를 일으키는 것과 이슬람 근본주의의 부상을 언급하면서 시작했다. 본인이 좌파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들 논자들의 주장과 이글턴의 논의가 크게 다르지는 않았는데, 한마디로 내식대로 정리하면 보편적인 기독교적 주체가 오늘날 근본주적 테러리스트의 발호와 자본주의에서 은행잔고와 가족에 매몰된 소비주의적 주체에 던져주는 함의란 무엇인가이다. 그러니까, 발표가 종교적인 주제로 포장되어 있지만, 사실은 정치적 주체, 특히 앎/지식의 주체를 넘어선 종교적-보편적인 신념의 주체에 관한 통찰력있는 시론이다.

이글턴에 따르면 기독교적 "신의 완전한 표상이란 파편화 된 몸 -- 즉, 사랑과 정의를 주창하다 국가에 의해 사형당한, 고문당하고 더렵혀진 정치범의 몸이며, 또한 고문과 조롱을 당하며 자신의 한계에 도달한 정치범의 모습으로, 어둠과 당혹 속에 표류하면서 왜 이런 끔직한 일이 일어나는지 아마도 모르지만, 그럼에도 스스로 '아버지'라 부르는 현세를 뛰어넘는 힘의 약속에 대해 자신도 이해하지 못하는 이유로 충실한 사람이다. 기독교 복음서가 주는 메시지는 사랑이 없다면 인간은 죽은 목숨이고 사람을 베푼다면 죽임을 당할 것이다." 이것이 기독교적 사랑이자, 신념이며, 그것을 체화한 주체 -- 예수 -- 인 것이다. 이런 주체의 형상, 주체성이란 진정한 동일성-"정체성은 자신을 버림으로써만 이루어지며, 또한 [그런다고 해서] 바람직한 결과가 얻어진다는 보장이 전혀 없다는 점이다." "신은 안락한 생활이나 익숙한 공동체로부터 인간을 불러내 사막의 길없는 황야로 인도한다. 또한 무자비한 테러리스트 같은 그의 사랑은 인간의 자기 확신적 교조와 확실성을 모두 불태워버리려 위협한다. 그려먼서 그는 가난한 자를 하늘로 끌어 올려 지복을 주고 부유한 자를 빈손으로 돌려보낼 것을 요구하는, 사랑의 테러리스트이다." 이게 바로 신념이다.

이글턴은 아마도 근본주의자를 회의주의자의 위치로 전환하려는 의도가 있는 것 같은데, 근본주의 혹은 토대주의란 원래 확실한 토대 따위란 없는데도 불구하고 그런 존재적 불안에 대한 반향으로 출한 것이라는 언급에서, 일단 신념을 근본주의와 분리한다. 또한 앞서 기독교적 주체성, 즉 사랑의 테러리스트를 강조할 때, 지식/앎 -- 직접 이글턴이 언급하지 않았으나 여기서 맑스주의의 이데올로기, 혹은 알튀세르 식의 오인/인식의 변증법을 읽을 수 있다 -- 을 넘어서는 보다 심층적인 주체-행위로서 신념을 구분한다. 이는 전통적인 회의주의자, 즉 이성-지식에 바탕한 회의론을 넘어서는 일종의 종교적-이성적 회의자의 형상일 것이다. 그러니까 명철하게 안다고 해서 주체가 행위하는 것은 아니며, 앎-이성의 행위와 변별되면서도 반토대주의, 혹은 반근본주의에 기반한 주체, 다시 말해 '근본적으로' 불확실성에 처할 수 밖에 없는 인간의 조건을 떠안는 주체를 강조한다. 이때 주체는 자신이 왜그런지는 명확히 모르지만 그래야만 한다고 믿는자이다. 이는 자기self가 이미 주어진 데서 선택하는 게 아니라, 자기 자체를 전투적으로 구성하는 주체를 말한다.

그런데 오늘날 두 가지 표준적인 정체성인 테러리스트와 소비주체 모두는 이런 형태는 아니다. 이글턴은 어떤 이들 -- 근본주의자들 -- 은 과도하게 정체성에 몰입하는 반면 다른 이들 -- 제1세계 자본주의 -- 은 정체성에 관심을 너무 적게 가진다는 것인데, "정복자나 식민주의가 되었을 때 좋은 점은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것인 반면, 피정복자나 박탈당한 이들은 정체성의 문제를 일상의 짐처럼 등에 지고 살아가야 한다." 이글턴은 "박탈된 상태는 치명적 약점인 동시에 일종의 힘이기 때문에" 현상태에 매여있는 사람들보다 세상을 변화시킬 힘이 더 크다고 한다. 근본주의자에 의한 테러가 아니라, 일종의 사랑의 테러리스트로서 이들에게서 어떤 변화가 시작될 것이라는 게고, 좀 더 솔직히 말하면 뭔가 주변부에서 터져 나오는 것에 내기를 걸 수 있다는 것인다.

그런데, 과연 그런가? 혁명가 -- 아마도 보편주의자 -- 와 근본주의자 -- 특수주의자 -- 를 구분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이런 방식의 논의에서는 오직 사후적으로만 밝혀질 뿐이고, 게다가 이글턴이 복잡한 이슈들에 개입한다기 보다는, 단지 기존 논의들 -- 특히나 비디우 -- 을 정리하는 데서 그치고 있는 점은 많이 아쉽다. 물론 바디우 보다 훨씬더 전투적인 표현을 구사하면서, 즉 사랑에다가 테러리스트를 덧붙인 전투적인 정치적 주체를 명확히 한 점은 평가할 만하다. 또한 성마르게 소멸하는 열정을 생산하는 소비자본주의가 생산하는 인간형에서 모종의 신념이 약화된다는 건 인정하더라도, 그 메커니즘을 자본주의에 대한 동화로 간략히 처리하기에는 무리가 있는데다가, 근본주의자들을 너무나 획일적으로 토대주의자로 보기에도 무리가 있지 않을까? 게다가, 믿음, 신념, 지식의 복잡한 문제를 너무나 함축적으로 설명한 나머지 문제를 더욱 모호하게 한 면도 있다. 특히 믿음과 신념의 차이를 별로 언급하지 않는데, 믿는자(신학적 주체)를 신념을 가진자(정치적 주체)로 옮기는 작업, 그리고 기존에 정치적 주체의 전형이었던 아는자(혹은 안다고 믿는자)에서 항상 회의하면서도 신념을 가진자로 전환하는 작업을 기대해본다. 이른바 열정적 애착도 이런 노선에 있지 않은가? 덧붙이면, 최근에 지젝의 논의가 어찌되는 바는 모르겠으나, 이글턴이 믿는자와 신념에 찬자를 구분하는 것은, 타당성 여부를 떠나 눈여겨 볼 만하다.

 

특히 오늘날 반주변부 한국에서, 한편으로는 선진국-시장사회의 아바타인 중산층 이상의 신념없는 정치와, 다른 한편으로는 제3세계의 현신인 대다수 민중이 무력화된 상태 사이에서, 어디론가 사라진 -- 그렇다고 멸절되지는 않은 -- 정치적 주체 또한 신념과 지식 사이에 있지 않을까 싶다. 

 

참고로 이글턴 강의는 이번주 내내 다른 주제로 계속 되니까, 관심있신 분들은 찾아서 들어보시길 바란다. 일정과 장소는 아래 첨부한 포스트를 참조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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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9/06 19:56 2010/09/06 1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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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Subject: 테리 이글턴이 한국에 와서 한 일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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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뽀삼님의 [사랑의 테러리스: 테리 이글턴 학국 강연 후기] 에 관련된 글. 테리 이글턴 한국 강연 후기와 관련해서, 프레시안 기사 마르크스주의자가 한국에 와서 한 일은...을 옮겨둔다. 기사는 다소 어처구니 없는 사정 탓 -- 이글턴이 인터넷 매체를 싫어한다는 이유 -- 에 강영 후기와 기자 인터뷰를 에피소드 형식을 취했지만, 내가 대략적으로 내용에는 동의할 수 밖에 없다. 주최측이 '급진적' 맑스주의자, 그리고 신좌파 운동의 중요 인물을 데려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