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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조정환 - 월간 『노동해방문학』의 탄생:진보적 사회를 향한 금지된 열정

-월간 『노동해방문학』의 탄생:진보적 사회를 향한 금지된 열정 | 과거를읽고

진보적 사회를 향한 금지된 열정

- 월간 『노동해방문학』의 탄생

조 정 환

월간 『노동해방문학』은 지금부터 13년 전인 1989년 3월, 지금은 호프집, 분식집, 숯불갈비집으로 빼곡히 들어찬 연세대 앞 먹자골목, 옛 <오늘의 책> 서점 바로 뒷골목에 있는 한 상가건물 5층에서 태어났다. 나는 창간호가 나오도록 되어 있는 3월 하순으로부터 약 보름 전인 3월 8일에 아이를 가진 아내를 혼자 두고 집에서 나와 홍대앞의 한 하숙집에 짐을 풀었다. '노동해방'이라는 대중투쟁의 언어를 그대로 사용했지만 그것에 우리는 '사회주의'라는 이념적 지향성을 부여했고 그것이 국가보안법과 갈등하리라는 것을 예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주간으로 선임된 나의 자진(自進) 지하생활은 도피가 아니라 정보경찰에 의한 검거를 피하면서 월간 『노동해방문학』을 계속 발간하기 위한 '투쟁의 방식'으로 선택된 것이었다. 하숙집 주인에게는 곧 고시에 응시할 사람인데 집에서 공부가 방해되어 몇 개월만 조용히 공부하기 위해 집을 나왔다고 말해 두었다.

'가라 자본가 세상, 쟁취하자 노동해방!'이라는 구호가 박힌 창간 예고 광고가 <한겨레신문>에 5단 통광고로 실리고 나서 마침내 창간호가 나왔을 때 독자들의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현대중공업 노동자들의 상승하는 투쟁과 맞물린 창간호는 약 2만부를 찍어 거의 전 권이 유무가로 소화되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것은 '우리'의 기대와 상상을 훨씬 넘어서는 반응이었다. 격려의 전화가 빗발쳤고 어떤 노동자들은 집회에 참석한 자신의 사진이 책에 나왔다고 좋아했다. 창간호가 나올 무렵 신촌 노동문학사 사무실에는 30∼40여명의 시인, 소설가, 평론가, 대학생문예활동가, 노동운동가 등에 영업사원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득실대고 있었다. 나 자신도 이 잡지가 어디로 나아갈지 예측하기 어려울 정도로 복잡하고 역동적이며 예측불가능한 구성이었다. 대체 이 복잡한 구성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색깔이 선명한 하나의 월간지가 탄생할 수 있었던 것일까?



김사인 형이 나에게 박노해 시인을 만나볼 의향이 없느냐고 물었던 것은 계간 『실천문학』 편집위원회가 끝난 뒤인 1988년 8월초 어느 월요일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1987년 노동자투쟁의 영향을 받아 1988년 1월 실천문학사에서 창간한 부정기간행물 『노동문학』은 당시 서노련 사건으로 수배 중이던 박노해 시인을 제 1회 노동문학상 수상자로 선정했다. 하지만 1988년 중반에 『노동문학』의 월간지로의 재창간이 논의되어 갈 때 실천문학사는 그것을 평범한 노동자를 위한 생활문예지로 만들어 나갈 계획을 세워 가고 있었다. 당시 운동권의 용어를 빌면 NL의 대중노선이 이 재창간 작업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던 셈이다. 그것은 나의 기대와 배치되는 것이었다. 당시 나는 노동자계급의 '당파성'의 확보가 위대한 문학 창조의 전제조건이라는 민주주의민족문학론을 제창한 직후였기 때문이었다. 나는 박노해의 시를 민주주의민족문학론의 한 전형으로 제시하고 있던 터였기 때문에 박노해 시인과의 만남은 극히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1988년 8월 18일로 기억되는 날 밤에 명동의 어느 다방에서 만난 박노해 시인은 투박한 노동자적 전투성을 가졌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예상과는 달리 매우 세련되고 지적이었다. 그는 자신을 혁명적 사회주의자라고 소개하면서 사회주의 정파운동의 현황과 정파들의 차이에 대해 상세하게 이야기했다. 노동자해방투쟁동맹의 기관지 『선봉』을 지지해 왔던 내가 『선봉』 편집부의 일원으로서 그 기관지의 많은 기사를 써왔다고 자신을 소개한 박노해와 견해를 같이 하게 되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이렇게 하여 『실천문학』이 준비하고 있는 노동자 대중 생활문예지와는 다른 노동문학지가 필요하다는 점에 대해 동의가 이루어진 김사인, 박노해 그리고 나, 세 사람은 당파적 노동문학지 발간을 위한 준비모임을 만들었고 매주 한번씩 화곡동에 있는 나의 전세방에서 아내가 없는 시간에 모임을 가졌다. 이 일에 집중하기 위해 나는 『실천문학』 편집위원직을 사퇴했고 출소한 이태복씨의 제안으로 이진경, 문승현과 함께 시작했던 노동문학 무크지 편집준비모임을 사퇴했다. 나는 레닌의 당문학 이념을 남한 문예운동의 현재적 맥락 속에서 재해석하면서 노동계급 해방운동의 일환으로서 문예운동이 취해야 할 이념, 창작방법론, 문예조직론 등에 관한 초안을 작성하기 시작했다. 이 이론의 수립에는 박노해와 혁명적 사회주의자 조직의 실천적 전망이 큰 도움이 되었다. 당 건설 운동의 일환으로서의 문예운동이라는 생각이 노동문학지 창간의 지향으로 좀더 선명해지기 시작한 10월 말 무렵부터 김사인 형이 모임에 불참하는 횟수가 늘어갔다. 지금 생각해 보면 이것은 문학을 정치에 종속시키는 당문학론의 경향성에 대한 '암묵적 거부'였던 것 같다.

창간이 다가오면서 우리는 잡지의 성격을 보다 분명히 하기 위해 '노동문학' 대신 '노동해방문학'을 제호로 삼기로 하고 노동해방문학운동의 조직화를 맡아줄 인물로 문학예술연구회의 김형철을, 그리고 노동해방예술의 관점에서 잡지 제작의 미술적 필요를 담당해줄 인물로 민중문화운동연합의 신은주를 영입했다. 1988년 11월 경 노동해방문예운동의 취지문인 「노동해방문학론을 제창한다」(이것은 월간 『노동해방문학』 창간호에 「민주주의민족문학론에 대한 자기비판과 <노동해방문학론>의 제창」이라는 제목으로 수정되어 수록되었다)가 완성된 후 각자는 자신이 소속된 단체와 주변 관계에서 이 취지에 동의하고 참여할 사람들을 물색하러 나섰다.

이 활동에 결합하려는 의사를 가진 사람들의 수가 늘어나면서 애초에 무크지를 내려던 우리의 소극적 계획은 계간지로 수정되고 최종적으로는 월간지로 변경되었다. 이 무렵 월간 『노동해방문학』 창간을 위한 준비모임은 이원화되었다. 박노해와 나는 월간 『노동해방문학』의 창간기획을 위한 정기모임을 가졌고 나는 여기에서의 결정을 바탕으로 월간 『노동해방문학』 창간준비위원회(약칭 <창준위>)를 만들었다. 주 1회 모이는 <창준위>는 추가 인원 확보 외에 수천만원에서 1억원에 달할 필요경비를 조달하기 위한 활동을 벌였다.

1988년 12월 신촌 사무실에서 약 20여명이 모인 가운데 노동문학사 창립대회가 열렸다. 시인 오철수는 출판사 입구에서 곰곰이 생각하다가 좀더 지켜 본 후 참여를 결정하겠다며 돌아갔다. 이 대회에서 김사인을 발행인으로 선출하고 백무산, 정인화, 정남영, 임규찬, 임홍배, 조정환 등을 포함한 편집위원회가 꾸려졌으며 편집국, 미술부, 사무국, 출판국, 영업국으로 된 부서체계가 짜여졌다. 창립대회 이후 사원들의 노력으로 더 많은 사람들이 결합했다. 민족문학작가회의에서 진보적 시인들(백무산, 정인화, 강형철, 김명환, 이재무, 조태진, 이원규, 표광소, 이강혁 등)과 작가들(김하경, 이남희, 김한수, 최인석, 정지아 등)이, 문학예술연구회에서 마르크스주의 미학자, 평론가, 연구자들(정남영, 임홍배, 이강은, 임규찬, 서경석, 손지태, 정나원, 임수근 등)이, 대학의 진보적 문예활동가들(장민성, 오은주, 김민수, 윤동수 등)이, 민문련과 민미협 혹은 지역예술조직에서 진보적 예술활동가들(김신명, 조미아, 정진영, 이성욱, 이태직, 양동혁 등)이 결합되었다. 창간예고 홍보물과 신문에 실린 창간예고 광고를 보고 결합하러 온 활동가들 혹은 <혁명적 사회주의 그룹>, <노동계급> 그룹 혹은 다른 정파그룹에서 파견된 사람들도 있었다.

영문학을 공부해 온 정나원은 현대중공업 투쟁을 취재하기 위해 울산으로 내려갔고 문학평론가 손지태는 가석방된 김남주 시인을 만나러 나섰으며 꽹과리를 치던 이재륜은 배일도 노조위원장의 공판을 취재하러 법정으로 갔고 백무산, 정인화, 김명환, 조태진, 이재무는 열정 넘치는 시들을 썼다. 당국의 추적을 받고 있던 박노해의 시와 선동문은 유입경로를 숨기기 위해 사원들조차 알 수 없는 인편으로 투고를 했다.

우리는 내용에서 뿐만 아니라 디자인까지 노동해방사상을 관철시켜야 한다는 생각에 따라 선진 노동자의 '전형'을 표지에 담으려 노력했다. 김신명이 현장 사진을 참조하여 그린 표지그림을 놓고 이것이 선진 노동자의 전형에 얼마나 가까운가를 둘러싼 토론이 벌어졌다. 조미아가 여러개의 안으로 제출하여 벽에 걸어 놓은 로고들을 대상으로 더 역동적이고 더 가독성 있는 로고를 선택하기 위한 회의와 투표가 진행되었다. '문학'이라는 글자는 '노동해방'이라는 글자보다 작게 그려졌는데 이것이 당시 우리의 강한 이념 지향성을 말해준다. 시인 정우영은 시쓰기를 일시 중단한 채 원고 수정과 본문 레이아웃, 그리고 대지작업에 여러 밤을 새웠다. 고등학교 3학년을 마치자마자 경리사원으로 입사한 최미정도 선배들이 어떤 보상도 받지 않고 밤낮 없이 일하는데 자신만 월급을 받을 수는 없다며 월급 수령을 거부했다.

사원들이 창간을 어떤 느낌으로 맞이했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이미 나는 노동문학사 주변을 가서는 안되는 처지에 놓였기 때문이었다. 내가 기억하는 것은, 누군가로부터 전달받은 창간호를 전달하기 위해 대학로에서 박노해 시인을 만났을 때 그가 몇 번이나 책에 입을 맞추는 모습이었다. 이것이 김사인 발행인의 구속을 시작으로 거의 모든 사원의 구속 혹은 수배, 정간과 복간 등으로 통권 10권을 발행하면서 세상의 이목을 집중시킨 월간 『노동해방문학』 2년의 시작이었다. 나는 이 사건으로 인해 박노해 시인이 7년이 훨씬 넘는 수감생활에서 가석방으로 풀려난 다음해인 1999년 12월 말, 정확히 11년 8개월 만에 비로소 수배에서 풀린 걸음으로 거리를 거닐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월간 『노동해방문학』에는 우리의 열정과 기쁨, 고통과 상처가 어려 있다. 그것은 어떤 의미를 지녔던 것일까? 그것은 이제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냉정하게 묻고 답해야할 역사적 문제로 던져져 있다.

* 조정환 : 문학평론가, 도서출판 갈무리 상임편집인. 1956년생. 저서 『21세기 스파르타쿠스』 『지구 제국』 『노동해방문학의 논리』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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