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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방되었을 때 우리는 권력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사법기능을 특권처럼 휘두르는 물샐틈없는 군사적 권력의 손아귀 안에 놓이게 됩니다. 이러한 추방된 자들의 상황은 자연상태에 놓인 벌거벗은 삶bare life이 아니라, 박탈의 조건과 상태를 생산하고 유지하도록 고안된 권력과 강제로 구성된 어떤 조건입니다.p.15
노예제가 인권의 근본적 침해인 까닭은 (다른 상황에서도 일어날 수 있는) 자유의 박탈 때문이 아니라, 특정한 사람들의 자유를 위한 투쟁의 가능성에서 배제했기 때문이다. p.28
그녀는(한나 아렌트_옮긴이 주) '삶의 터전을 가질 권리rights to a home'와 '권리를 가질 권리right to rights를 주장합니다. ... '권리를 가질 권리'에서 후자의 권리는 어떤 정부나 사회조직에 근거한 것이 아니기에 적극적인 권리라 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권리는 소속할 권리, 삶의 사회적 결에 대한 권리라 할 수 있겠지요. p.50
2006년 봄, 캘리포니아의주요 도시에서 '불법' 거주자의 권리 보장을요구하는 대규모 거리 시위가 있었습니다. 규모로는 로스앤젤레스 시위대가 가장 컸지요. 이때 사람들은 거리에서 미국 국가를 멕시코 국가와 함께 스페인어로 노래했습니다.(미국 내 이민자들 중 멕시코계 이민자의 비율은 무척 높으며, 합법적 서류 없이 국경을 넘는 미등록 이민자 역시 마찬가지이다_옮긴이) Nuestro hymno (우리의 국가)로 불리는 스페인어 미국 국가의 등장은 민족의 복수성에 대해, 그리고 '우리'와 '우리 것'의 의미에 대해 흥미로운 질문을 불러일으킵니다. 이 국가는 누구에게 속하는 걸까요? 우리가 비민족주의 또는 반민족주의적인 소속양식에 대해 질문한다면... 여기서 중요한 것은 단순히 미국 국가가 누구의 것이냐는 소유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에 누가 포함되는지, 그러니까 소속양식의 문제입니다. 노래를 하고 스페인어를 통해 '우리'임을 확인하는 이 '우리'는 민족과 평등에 대한 사유 방식을 변화시킵니다. 단순히 많은 사람들이 함께 노래했다는 것 자체가 아니라, 그 노래하는 행위가 복수의 공동 행동이고,바로 그 복수성을 표현한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만약 부시 대통령의 당시 주장처럼 미국 국가는 오직 영어로만 노래해야 한다면, 여기서 민족은 언어적 다수자로 제한됩니다. 이 경우 언어는 누가 민족에 속하고 누가 속하지 않는지를 결정짓는 기준이 되겠지요. p.59-60
노래를 부르는 행동은 자유의 표현이자 권리를 향한 호소입니다. 또한 거리라는 공간의 틀을 다시짜고, 법으로 금지된 바로 그 순간에 집회의 자유를 실천하는 행위입니다. 이것이 바로 수행적인 정치학이라 할 수 있습니다. 불법적인 존재가 되겠다는 주장을 하는 것 자체가 불법인 상황,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구하는 행동 자체가 인정을 요구하는 바로 그 법에 반하는 것이라는 모순점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입니다. p.64
...'권리를 가질 권리'란 법적으로 보장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연적인 것도 아닙니다. 인 경계 밖에 서있을 때조차,이 권리는 법적인 보호와 보장을 요구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권리란 이중으로 존재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거리에서의 권리의 요구와 사람들이 부르는 노래 사이에서, 권리를 가질 권리가 행사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후자는 어떤 법으로도 보장되지 않지만, 자연상태가 아니라 사회적 조건인 평등에 속하는 것입니다.이것은 담론뿐 아니라 노래를 포함한 다른 표현양식 속에서 형성되는 사회적 상태입니다. p.65
수행적 모순에 기대는 정치적 입장이 불가능하다는 생각에서 벗어나서, 수행성을 주장의 한 방식이자 시간이 흐르면서 효과가 나타나는 행동으로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수행적 모순이 없을 때 변혁적 급진정치도 불가능하다고 말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 새로운 어딘가로 나아가기 위해서 우리는 이 모순에 의지하고, 이를 드러내야 하며,이와 함께 작업해야 합니다. 다른 방식은 없습니다. p.66
-누가 민족국가를 노래하는가/ 쥬디스버틀러, 가야트리 스피박 대담(2007)
미누가 강제출국당한 후, 엊그제 화요일 아침에
cbs 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에 전화연결 인터뷰가 나왔다.
오랜만에 들어보는 미누 목소리가 반가웠다.
그러나 반가움은 곧 어떤 복잡한 감정으로 덧칠되었다.
특히 그가 고용허가제를 네팔어로 번역하는 일을 했다는 것을 말할 때..
한국이 원망스럽다기 보다는 걱정된다고 말할 때...
전파를 탄 그의 목소리는 내 신체의 일부분을
아쉬움/ 안타까움/ 억울함/ 분노/ 좌절/ 등이 뒤범벅된 상태로 만들어놓았다.
왜 원망스럽다고 말하지 않는 것일까.
마치 팔레트에 피처럼 붉은 색/멍처럼 푸른 색/덜익은 감귤색/짙은 회색 등이 마구 뒤섞였을 때 처럼
이런 감정들은 섞이고 뭉치고 개켜지면서 이름붙일 수 없는 뭔가가 되어,
그저 '통증'으로 밖에 표현이 안될 그런 것이다.
그런 것들이 뒤범벅된 그러나 내용상으로는 그저 그가
고용허가제를 네팔어로 번역하는 등 일을 했다는 것 뿐이다.
어떤 사람들은 그가 '고향'으로 '돌아갔'을 뿐이라고 말한다.
물론 그렇게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때의 '고향'은 어떤 지대인가.
그것은 마치 그가 정치적인 공간에서 벗어나 자연상태로 '돌아갔다'고 얘기된다면 그
것은 그 둘 사이에 있을 한 공간을 건너뛴 것이라 할 수 있다.
버틀러는 그 공간을 네이션-스테이트 그 둘 사이에 있는 하이픈의 공간으로 잡아낸다.
정치적 공간도,루소식의 자연상태도 아닌 어떤 지대를 우리는 상상할 수 있는가.
미누가 간 네팔은, 그에게 자연상태의 고향도 아니고, '돌아간' 것도 아니다.
우리가 그의 추방을 '강제추방'으로 이름붙이는 것은
그가 단순히 대한민국의 시민권(정치적 권리)을 박탈당해 자연상태(=고향)자연상태로 돌아간 것이
아니라고 말하기 위함이다.
그는 노래했고, 대한민국 언어로 노래했고, 그래서 결국
'박탈의 조건과 상태를 생산하고 유지하도록 고안된 권력과 강제로 구성된 어떤 조건'으로 밀어넣어졌다.
자꾸만, 너무 쉽게, 반복적으로
'거기 돌아갔으니, 잘 살면 되지...' 라고
당신이 먼저 섣불리 굳이 말할 필요는 없는 것 같다.
그건 버틀러의 표현을 빌면 '무례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화요일 아침, 라디오에선 인터뷰에 이어 '월급날'이 흘러나왔다.
"오 사장님, 안녕하세요. 오 사모님, 내 월급을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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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화성 외국인보호소에 잡혀간 날 밤에
이주노동자와 제대로 친구된 적이 없던 나는
어찌어찌하여 사람들과 함께 그 새벽에
'보호소'(참 이름 한 번 드럽다) 앞에 가 지키고 있게 되었다.
어설프게도 밤샐 준비를 하나도 안 하고 가서는
오랜 시간 차가운 세멘 바닥에 앉으려니 깔개가 필요해 가방을 뒤지는데,
그날 낮에 세미나를 하고 집어넣은 저 책을 다시 발견했다.
'누가 민족국가를 노래하는가'
그리고 또 한 권의 책, '호모 사케르'.
미누가 미누 한 사람의 목소리로 노래한 것이 아니듯
이 밤에도 수많은 미누의 유령들이 옆에 와 앉아 있는 것 같다.
그날도 추웠는데
오늘밤도 참 춥다.
추울 영혼들이 자꾸 자꾸 손에 손잡고 모여 앉고 있다.
누군가 조용히 노래를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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