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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8/07/10
    살려면 누군가를 죽여야 한다?
    따따탄 효진
  2. 2007/10/20
    인간중심주의에 갇힌 생명과 생태 개념
    따따탄 효진

살려면 누군가를 죽여야 한다?

닭장차? 그까짓 게 뭐라고! / 미니

http://www.newscham.net/news/view.php?board=news&id=43713 

라는 기사에 트랙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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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닭장차, 그까이것'..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그것은 폭력이라기보다 저항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앞으로 어떤 시위방식이 기조가 되어야 할지에 대해서는 더 많은 논의가 필요할 것 같고, 나름의 생각을 써보고 싶지만 짬이 나지 않네요.

다만 한 가지.. 전체 맥락에서 사소한 부분이지만, 의견 남깁니다.
미니님은 '살려면 누군가를 죽여야하니 폭력 없인 살수 없다'고 하셨지요.

그래서 '배추의 허리를 자르고 벼의 목을 베어야' 하는 점을 예로 드셨습니다.

식물을 먹는 것의 의미에 대해서는 뒤에 얘기하고요,

 

나 때문에 다른 사람은 먹지 못하고 죽는 것은 아닐까?

 

'살려면 누군가를 죽여야한다'라는 말을 읽으며,  생각해 보았습니다.
네. 내가 삶으로써 다른 사람은 양식과 자원이 모자라 죽어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생각할 것은 우선 세상의 어떤 구조가 수많은 사람들을 굶주리게 하는지 살피고 개선의 방향으로 가는 것입니다. 분배의 문제일 수 있고, 가축을 많이 키우고 고기를 많이 먹기 때문일 수도 있고, 대규모 공장식 축산으로 이윤을 추구하는 축산자본 때문일 수도 있고, 환경산업조차 이윤추구 수단으로 삼는 자본 때문일 수도 있고, 환경파괴로 대규모 재난을 불러일으키는 산업들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또 하나는 인구가 너무 많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그건 인구조절로 풀어가야지요. 우리나라 정부가 아이 많이 나으라는 것도 자본의 논리입니다. 아직은 한참 더 줄어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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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려면 동물을 먹어야 한다?


그렇다면 육식을 위해 동물을 죽여야 한다는 논리를 살펴봅시다. 저는 자칫 '살려면 누군가를 죽여야하니 폭력 없인 살수 없다'라는 말이 육식은 살기 위해서는 꼭 필요한 것이니 충분히 먹어야 한다, 나아가 먹고싶은만큼 먹어도 된다는 논리로 연결될까 우려됩니다.

신체구조로 따지면 여러 모로 보아 인간은 곡채식동물에 가깝습니다. 채식으로 건강하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잘 사는 유명인들도 너무 많고, 체육인들도 많습니다. 채식은 오히려 건강한 정신과 육체, 질병 치료에 도움이 됩니다.
http://blog.naver.com/mz_soom/20051418626


무엇보다 현재 대다수 축산방식은 반자연적으로 동물을 학대고문하고 지속가능하지 않으며, 그 결과 광우병, 조류독감도 발생되었고 기아와 심각한 환경파괴를 낳고 있으며, 앞으로 더 심한 결과로 이어질 것이라는 점에 대한 인식이 필요합니다.

 

현대인들처럼 고기를 많이 먹으려면 방목과 같은 자연친화적 축산은 가능하지 않습니다. 2006년 우리나라에서 200여만 마리의 소를 키웠는데, 그들을 모두 방목하려면 우리나라 땅의 1/3 이상을 방목장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육식을 점차 줄이며, 자연친화적 농장의 고기를 좀 비싸더라도 가끔씩 사 먹으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채식에 대해서도 관심갖고 공부해보고 시도해보는 것도 필요하고요.

 
 

▲ 종자용 암퇘지들은 몸을 돌릴 수도 없이 아주 작은 철장에서 따로따로 길러집니다.

분만을 한 뒤에도 스톨 밖으로 젖꼭지만 내놓고 아가들에게 젖을 물려야 합니다. 그나마 젖도 오래 먹일 수 없고, 또 다시 임신을 해야합니다.

수퇘지 역시 고통 속에 살기는 마찬가집니다.

http://blog.naver.com/mz_soom.do?Redirect=Log&logNo=20048005613

ⓒ factoryfarming.com
 
 
식물은 생명이 아닌가?

끝으로 ‘식물도 생명 아니냐?’라는 질문을 할 수도 있는데, 어떤 측면에서 이 질문은 넌센스일 수도 있습니다. 식물을 먹는다고 해서, 동물이 고통스러워 하는 것을 보고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을 수 있으신가요? 불 나면, 동물과 식물 어느 것부터 구출하시겠습니까?
‘채식도 생명을 죽이는 것 아닌가?’에 대한 자세한 의견은
http://www.withanimal.net/tt-cgi/tt/site/ttboard.cgi?act=read&db=faq&page=1&idx=45


사실 현대 문명사회 속에서는 사람 하나가 일평생 살면서 참 많은 것을 파괴합니다. 환경을 생각하면 아이를 낳지 않는 것이 낫습니다. 환경파괴는 생명파괴로 이어집니다. 인류가 멸종될 정도가 아니라면.. 그래서 저는 아이를 낳지 않고 입양하거나, 하나만 낳고 둘째는 입양하기를 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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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중심주의에 갇힌 생명과 생태 개념

 

인간중심주의에 갇힌 생명과 생태 개념

 

 

               

▲ 오늘날, 우리 주변에서 가장 쉽게 만날 수 있는 동물 개. 예쁘다고 키웠다가 조금 불편하면 내쳐버리는 마음과, 1m 철장에 가둬키워 잡아먹는 마음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인간이 동물에게 이런 고통을 주는 것이 사람에게 고통을 주는 것과는 무엇이 다를까.
ⓒ 옐로우독

 

녹색대학의 장회익 교수는 지구의 모든 생명체는 서로 어우러져야 온전히 살아갈 수 있는 하나의 '온생명체'라 하며, '나'는 그 온생명체의 일부이고 온생명체가 나와 한 몸이니 환경은 내 몸의 다른 일부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내 몸의 일부가 내 몸의 다른 일부인 환경을 쥐어짜며, 이를 일러 성장, 발전이라 말한다면 결국 우매하여 자멸의 길을 가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렇게 볼 때 환경보호는 곧 나를 위한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환경을 보호해야 하는 이유가 더욱 명확해집니다. 그럼에도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을 것입니다. '뭐 그렇게 신경 쓰며 살아. 우리 식구나 대충 살다 가지.' 그렇습니다. 사실 나와 내 식구만을 위한다면 환경에 대해 그다지 관심을 갖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 식구’만 좀 공기 좋은데 가서 조심해 살다 죽으면 될 수도 있으니까요.

 

그리 생각하면 환경을 보호하는 것은 나만이 아니라, 이웃을 생각하고 내가 볼 수 없는 먼 후손까지를 생각하는 이타성이 강한 행위가 되는 것이지요. 반대로 환경을 많이 파괴하며 사는 것은 남들에게 죄를 짓는 것입니다. 물론 내 이웃에게 죄를 짓는 것이 곧 나에게 죄를 짓는 것이기도 하고요.

 

당연히, 사람들, 동식물을 포함한 모든 자연, 세상만물과 모든 공간이 다 환경입니다. 지금부터 그 중에서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고통을 주고 죄를 지으면서도 잘 인식하지 못하며 사는 대상인 동물에 대해서 이야기해보려고 합니다. 달리 말하면, 온생명인 '나'의 몸의 일부가 아프고 썩어들어 가는데 그 부분에는 감각이 마비되어 나는 거의 아픔을 못 느끼고 산다는 것입니다. 지금은 아픔을 못 느끼지만, 언젠가 나는 그로 인해 큰 고통이나 죽음에 직면하겠지요.

 

동물도 환경의 중요한 일부이지만 외면당하고 있다

 

 

                                             
▲ 모피 때문에 좁은 공간에서 사육되고 있는 이 푸른여우는 이상행동으로 동료를 살해하였다. 오른쪽은 뇌에 실험장치가 박힌 실험실의 고양이.
ⓒ ? , PETA

 

지금 우리의 환경 개념 안에는 생명의 개념이 불완전하게 걸쳐 있고, 동물의 개념은 거의 쏙 빠져있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동물의 경우 야생동물 정도가 포함되기는 하지요. 물론 생태계와 야생동물 보호는 아주 중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실제 인간이 동물들과 관계 맺는 방식들을 볼 때 동물문제는 야생동물 이외에도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인간생활 깊숙이 함께 하고 있는 반려동물들, 끊임없이 번식을 강요받는 모견이나 종견들, 농장에서 가둬키워지는 동물들, 모피를 위해 사육되거나 포획되는 동물들, 보신문화로 고통 받는 동물들, 동물원에 전시되는 동물들, 공연에 이용되는 동물들, 싸움·경주 등 사행성 오락에 이용되는 동물들, 동물뽑기나 경품으로 이용되는 동물들, 홍보에 이용되거나 심한 노동을 해야 하는 동물들, 실험에 이용되는 동물들...

 

그래서 아직은 환경운동가나 생태주의자 중에서도 동물보호를 생태계 유지 차원으로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것은 진정한 공존이 아니며, 동물보호도 인간을 위한 이기적인 차원에 가두는 것입니다. 여전히 인간중심적인 근대적 시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전인류적인 well-being'과 혼돈하는 것이지요.

 

그것은 세상을 머리로만 사랑하는 것이지 가슴으로도 사랑하는 것이 아니며, 인간이 동물들에게 가하는 '심대하지만 피할 수 있는' 가학의 현실들에 대해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사실 동물착취는 심각한 환경파괴와 맞물려 있기에, 인류의 well-being이란 측면에서도 문제가 되지요.

 

아직은 동물의 문제가 환경론자나 생태주의자들에게도 외면을 당할 정도로 우리 사회의 동물에 대한 인식수준은 낮습니다. 어느 나라나 인간의 사회복지제도가 어느 정도 자리를 잡은 이후에야 동물보호에 대한 관심과 의식이 일반화, 보편화되고 그 보호가 정책화, 제도화됩니다. 이는 일단은 사회의 주된 구성원인 인간의 기본적인 권리와 복지가 어느 정도의 수준에 이른 다음에야 우리의 주위를 둘러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동물보호'에 대해 이야기하면, '불쌍한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배부른 소리를 하냐'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옛날, 백인들이 흑인을 노예로 부려먹던 시절에, 백인들에게 흑인들의 고통이나 권리에 대해 이야기하는 사람은 오히려 멸시를 당했습니다. 지구상에서 동물들도 생명체로서 존중받을 권리가 있지만, 많은 사람들은 종(種)이 다르다는 이유로 그들의 권리를 인정하려 하지 않는 것이지요.

 

'인권' 개념은 '생명권'의 개념으로 확장되어야 한다
 

   

                 

▲ 겨울 내내 밀폐된 실내에 갇혀 우울함에 빠진 고릴라, 갇힌 스트레스로 자기 가슴털을 다 뽑은 앵무새, 회전목마에 매달린 조랑말 등 오락을 위해 이용되는 동물들의 문제도 심각하다.
ⓒ 옐로우독, 환경운동연합 마용운, 전경옥

 

하지만, 인간의 이성이 점차 진보해가는 시대에 '인권' 개념은 '생명권'의 개념으로 확장되어야 합니다.

 

엄밀히 얘기하면, '인권' 개념은 '생명권', 나아가 '자연권'으로 확장될 수 있을 터인데, 요즘은 인권과 자연권에 대해서는 인식이 많이 되어가고 있지만, 인권에서 자연권으로 의식이 옮아가기 전에 거쳐야 할 생명권에 대한 관심은 쏙 빠져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동물을 사람의 이용대상으로만 여기고 그리 이용해왔기 때문에, 그에 대한 생각을 바꾸고 싶어 하지 않기 때문이지요. 

 

마크 롤랜즈는 《동물의 역습》에서 "전세계를 뒤흔든 구제역, 광우병, 조류독감 파동은 동물을 상품으로 취급한 결과 일어난 당연한 현상이다. (사람들은) 이윤만을 극대화할 목적으로 동물을 강압적으로 취급한다"며 학대받는 동물에게도 도덕적 권리가 있음을 주장했습니다.

 

우리 사회는 세상이 궁극적으로 약육강식의 논리로 움직이는 것처럼 가르쳐왔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실제 동물사회에도 '강한 자만이 살아남을 수 있다는 폭력이론을 뒤집는 이타적 성공전략'을 사용하는 무리들이 많이 있다고 합니다. (비투스 드뢰셔, 《휴머니즘의 동물학》, 이마고, 2003)

 

이제는 학교에서도 인권 교육과 생명권 교육이 '따로 또 같이' 시행되어야 합니다. 생명권은 인권의 확장된 개념이자 온전한 개념이므로, 생명권 교육과 인권 교육은 서로 상승효과를 일으킬 것입니다.

 

지금 우리 사회의 생태주의 운동은 보완되어야 한다

 

 


▲ 육식동물이라도 다른 동물을 좁은 공간에 평생 가둬키우다 잡아먹지는 않는다. 고기의 대량생산과 대량소비를 위해, 사람들은 동물들을 생명으로 취급하지 않는다.
ⓒ PETA


생태철학의 대두로 근대 이후 대량생산과 대량소비, 개발을 향하여 무작정 내달리는 것을 조금씩이나마 완화시키고 자연의 훼손이 가져올 더 큰 피해에 대해 주의를 환기시킬 수 있는 논리가 생겼습니다.

 

학교에서도 아이들이 자연을 배우며 좀더 여유롭고 따뜻한 정서와 꿈을 가꿀 수 있게 되었습니다. 즉, '생태적 상상력과 감수성을 지닌 인간형'을 새로운 인간상으로 요구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의 생태철학과 생태교육은 저의 고개를 갸우뚱하게 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언젠가부터 우리는 아이들에게 풀 한포기, 돌멩이 하나라도 소중히 여기라고 얘기하게 되었습니다. 풀을 쓰다듬어보고 풀은 쓰러지면서 무슨 소리를 내는지, 나무를 두 팔로 안아보고 뺨에 닿는 감촉을 느껴보고 냄새도 맡아보고 수액이 흐르는 소리를 들어보고 나무가 하는 이야기를 들어보라고 합니다.

 

그리하여 감수성을 섬세하게 발달시킬 뿐 아니라, 다른 존재를 귀하게 여겨 더불어 살아가는 마음을 키우기를 바랍니다. 그런 마음을 갖고 더불어 살아가는 사람이 되려면 '신령한 기품'인 '영성'을 키워야 한다고 합니다. 신령한 기품은 다른 존재를 자신의 이기적 이익을 위해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이타적으로 존귀하게 여기고 그 존재를 지키려는 행동을 함으로써 얻어진다고 합니다.

 

그런데 계통상 식물보다 사람과 훨씬 가까운 동물에 대해서는 별로 주의를 환기시키지 않습니다. 사람과 가깝다는 것은 그만큼 사람과 공통점도 많고 교감도 더 많이, 잘 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사람과 공통점이 많은 만큼, 기쁨과 슬픔, 두려움과 불안, 고통과 스트레스의 표현이 인간을 닮았고 우리가 이해하기가 쉽습니다.

 

우리가 분명히 고통스러울 거라고 거의 확신하는 동물들부터 고통을 제거해주려 노력하지 않으면서, 그보다 하등한 동물, 또는 식물의 고통 운운하는 것은 동물 이용에 대한 기득권을 버리고 싶지 않은 자의 변명이 아닌지요.

 

분명한 것은 인간이 살기 힘든 세상이라고 해서 동물에 대해 배려할 수 없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무엇이든 여력이 있어야만 할 수 있는 게 아니라 올바른 관점을 갖는 데서부터 시작되기 때문이지요. 정신문화의 건강성, 서로를 배려하고 사람들 간에, 또 생명체 사이에 어떻게 관계 맺는가 하는 이 모든 것들이 중요한 우리의 환경입니다.

 

끝으로, 함께 새겨보고 싶은 말씀들을 옮깁니다.

 

“피조물을 대하는 인간의 태도에서 항상 볼 수 있듯이 모든 인간은 나치에 다름 아니다. 인간이 인간 종이 아닌 다른 종들을 자기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만함이, '인종주의'와 '힘'이 곧 정의라고 생각하는 원칙들을 대변한다.” - 헤르만(Herm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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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중심에 국한시킨 인권은 결국 인간의 욕망을 극복할 수 없다. 인간의 욕망은 생명을 파괴하고, 생명을 파괴하는 대가로 성취된 인권은 진정한 의미에서 인권이 아니다. 누릴 수 없는 공허한 논리일 뿐이다. 결국, 인권의 범주는 생명이라는 범주와 환경이라는 범주를 포함하는 포괄적인 차원에서 정의되어야 할 것이다.” - 경기민주언론연합 사무처장 이주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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