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게시물에서 찾기분류 전체보기

<민주주의는 무언가를 의미하는가?>, 자크 랑시에르 (2)


  통치의 형식인가 사회 생활의 형식인가
 

 우리들이 이 패러독스의 이해에서 한 발 더 나아가야 한다면, 내가 앞서 언급했던 두 번째 논쟁을 일별하는 것이 유용할 것이다. 그것은 더 작은 불일치이지만, 우리들이 주요한 논쟁에 내기로 걸린 것과 민주주의의 패러독스의 핵심을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미국의 병사들이 이라크에서 민주주의를 추진하기 시작한 바로 그 때, '중동의 민주주의'라는 문제를 굉장히 색다른 견지에서 제시하며, 최종적으로 '좋은' 민주주의와 '나쁜' 민주주의의 동명성(同名性)을 해체하는 짧은 저작이 프랑스에서 출판되었다. 쟝 클로드 밀네르(Jean-Claude Milner)의 <<민주주의적 유럽의 범죄적 경향>>이 바로 그것이다(*주1). 저자는 많은 이유에서 알려져 있었지만, 주로, 이른바 '공화주의' 정치 이론의 가장 영향력 있는 사상가로서 알려져 있었다. 이 이론에 따르면, 시민성citizenship은 전적으로 법의 보편성, 교육, 지식의 권위를 근거로 하고 있다. 그것은 온갖 형식의 다문화주의 또는 적극적차별시정조치affirmative action에 반대하고, 사회적 또는 문화적 차이가 권위와 보편성을 침식하는 것에 반대하는 것이다. 
 밀네르가 말하는 민주주의적 유럽의 '범죄'란 무엇인가? 첫째, 그것은 중동에서 평화를 추진하는 것, 즉 이스라엘-팔레스티나 분쟁의 평화적 해결을 추진하는 것에 있다. 밀네르는 이 유럽적 평화는 단 한 가지, 이스라엘의 파괴만을 의미할 수 있을 뿐이라고 논한다. 유럽의 민주주의는 팔레스티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자기 방식의 평화를 제안했다. 유럽의 민주주의적 평화는 홀로코스트의 결과였다. 민주주의적이고 평화적인 유럽, 과거의 유럽의 청산은 1945년 이후에 가능했다. 유럽은 그 시점에서, 나치가 행한 대량학살에 의해, 자신들의 꿈의 방해물이었던 사람들, 즉 유대인으로부터 해방되었던 것이다. 밀네르가 논하 듯이 '민주주의적 유럽'이란 실제로는, 정치-그 원리는 한정된 전체성에 의한 지배이다-를, 사회-그 원리는 반대로 비한정성非限定性이다-속으로 해소하는 것을 의미한다. 근대 민주주의란 이 비한정성의 법적 성취를 말하는 것이며, 이 비한정성의 법은 기술에 의해 상징됨과 더불어 그것에 의해 달성되며, 오늘날, 성별과 혈통의 법으로부터 해방되는 프로젝트에서 정점에 달한다. 따라서 근대 유럽의 민주주의는 적절한 기술의 발명에 의해, 혈통과 전승을 원리로 하는 사람들을 절멸시키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이 논증은 편집광적으로 보일 것이다. 하지만 이 논증은, 민주주의의 치세는 점점 더 많은 요구를 행하고, 개별주의와 공동체주의를 강조함으로써 정치적 행위성agency의 제諸 형식과 공동체 감각 그 자체의 토대를 허물어뜨리는 나르시시스틱한 '대중 개인주의'의 치세라고, 이 20년간 주장해 온 사조 전체와 획을 같이 하고 있다. 어떤 의미에서 밀네르는, 좋은 정책의 토대를 허물어뜨리는, 사회 생활에서 생겨난 필요needs, 요망, 요구의 비한정성에 대해 똑같은 지적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의 새로움은, 이 대립을 근본화하고radicalize, 그것을 논리적인 대립으로써 제시한다는 것이다. 그가 기술하는 것과 같은 민주주의의 이론과 계산 방법은 온갖 형식의 좋은 통치와 대립한다. 따라서, 민주주의의 과잉을 통제할 수 있을 좋은 통치는, 밀네르에 의해 더 이상 민주주의라고 불리지 않는다. 그것은 신중하면서도 인상적인 방식으로, 사목司牧통치라고 불린다. 이 표현이 가리키고 있는 것은 모세이며, 또한 일찍이 좌파 지식인 사이에서 영향력이 있었던 또 다른 책, 예전의 모택동주의 지도자 베니 레뷔Bernard-Henry Levy에 의해 쓰여진 <<사목의 살해>>(*주2)라는 책이다. 레뷔는 서양의 철학과 정치학의 전통이 억압했던 성서의 인물로서, 사목을 무대에 올린다. 그러나, '사목통치'는 무엇보다도 우선, 플라톤으로부터 차용된 관념이다. 레뷔는 플라톤이 <<정치가>>에서 검토한 목인牧人에 관한 그 자신의 사고에 충실하지 않았다고 비난한다. 하지만 실제로 문제는 더 복잡하다. 한 편으로, 플라톤은 사목통치를 세계가 신의 목인의 손에 의해 직접 인도 되었던 신화적인 과거에 위치 짓는다. 하지만 다른 한 편으로, 사목의 패러다임은 플라톤이 <<국가>>에서 조탁彫琢했던 수호자 지배라는 견해 속에서 여전히 작동하고 있다.
 내가 보기에, 사목통치를 참조하는 것에 의해, 미국이 민주주의를 전파하기 위해 행하는 작전과 프랑스에 의한 민주주의의 범죄고발에 있어서, 민주주의에 대해 현재 행해지고 있는 논의의 이론적 중핵이 명시되고 있다. 실용적인pragmatic 정책과 대립하는 인민의 자기-통치의 유토피아로서든, 공통의 법의 규율과 대립하는 개인적 욕망의 무질서한 소란으로서든, 민주주의의 이중의 과잉에 대한 현대의 논의는, 플라톤의 민주주의의 초기설정을 다시 한 번 무대에 올린다. 한 편으로, 플라톤에게 민주주의는 변경될 수 없는 쓰여진 법의 강고한 체제이다. 이 형식의 민주주의는, 치료해야 할 병이 어떤 것이든 간에 의사라면 누구라도 딱 잘라 썼을 처방전(=명령, 지시)과 닮았다. 다른 한편으로, 문자의 엄격함은 인민의 완전한 자의성을 표현하고 있으며, 환언하면, 개인이 공통의 규율에 관심을 가지는 바 없이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행위하는 무제한의 '자유'를 표현하고 있다. 플라톤의 논의가 의미하는 것은 민주주의가 정책의 원리가 아니라 좋은 정책에 저항하는 생활 양식way of life이라는 것이다. 민주주의는 혼돈에 다다른다. 더욱 근본적으로 그것은 온갖 것들이 뒤집혀 버린 생활 양식이다. <<국가>> 제 8권은 온갖 자연적 관계가 전복된 국가를 묘사하고 있다. 민주제의 도시에서, 지배자는 지배하는 대신 피지배자에게 복종하고, 아버지는 아들에게 복종하고, 연장자는 젊은이를 모방한다. 여성과 노예는 남성과 주인과 똑같이 '자유'이다. 그리고, 길 위의 당나귀 조차, '최고의 자유와 존엄을 가지고 길을 양보하지 않고, 마주쳐도 옆으로 피하지 않는 온갖 사람들과 부딪혀 버린다(*주3)'는 것이다.
 사회적인 생활 양식으로서의 민주주의와, 그것과 연결되어 있는 민주주의적 개인주의의 위험에 대한 포스트 토크빌Tocqueville 적인 논의 전체는, 거만한 당나귀에 대한 오래된 플라톤의 농담을 반복하고 있다. 이 농담의 지속적인 성공에는 뭔가 흥미를 끄는 것이 있다. 우리들은 21세기에 살고 있으며, 대국민국가, 세계시장, 강력한 기술과 같은 것들로 구성된 문맥context 속에서 살고 있는 것이고, 그것은 여성, 노예, 외국인 배제를 자신의 자유의 기초로 하는 고대의 소규모 남성 도시와는 이미 아무런 관계도 없다는 이야기를 매일 듣고 있다. 그 결론은 우리들의 '민주주의'는 고대의 민주주의적 촌락의 통치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는 것이다. 이것이 받아 들여질 수 있다면, 고대의 반-민주주의자에 의한 민주주의적 촌락의 논쟁적인 묘사가, 주식거래, 슈퍼 마켓, 온라인 경제 등으로 이루어진 우리들의 세계의 민주주의적 개인의 진짜 초상으로서 여전히 타당하다고 하는 사실을, 우리들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이 패러독스가 시사하는 것은, 민주주의적 생활의 묘사가 민주주의의 개념화를 뒷받침하는 방식은 기만일 것이라는 것이다. 누구에게도 굴하지 않는 민주주의적인 당나귀가 일으키는 소란은 더 심각한 문제를 상징한다. 달리 말하면, 민주주의의 패러독스에 관한 표준적인 언명(민주주의는 민주주의적 통치가 억압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생활형식이다)는 훨씬 근본적인 패러독스, 즉 정치 그 자체의 패러독스의 지표이다.
 민주주의는 통치의 형식도 아니고, 사회생활의 형식도 아니다, 이 것이 문제의 핵심이다. 민주주의는 그와 같은 것으로서의 정치의 제도화이다. 민주주의는 패러독스로서의 정치의 제도화인 것이다. 그것이 패러독스인 것은, 정치적인 것을 제도화하는 것은, 일견, 공동체를 지배하는 권력을 무엇이 근거짓는가라는 물음에 답을 줄 것 같기 때문이다. 민주주의는 그 물음에 대답을 주지만, 그것은 놀랄만한 대답이다. 어떠한 근거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지배권력의 근거 그 자체다, 라는 대답인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플라톤이 <<법률>> 제3권 서두에서, 일순의 섬광 속에서 우리들에게 깨닫게 하는 것이다. 그 구절은 내가 아는 한 민주주의에 관해 논의하는 데리다의 주의를 끌지 않았다. 내가 보기에 그것은 민주주의의 '아포리아' 또는 '패러독스'의 핵심을 설명하는 것에 도움이 될 것이다. 이 구절에서 플라톤은 지배하는 데 필요한 자격을 열거한다. 그는 우선 지배자와 피지배자 사이의 자연적 차이에 기초하는 여섯 개의 자격을 열거한다. 아이에 대한 부모의 권력, 연소자에 대한 연장자의, 노예에 대한 주인의, 천한 자에 대한 고귀한 자의, 더 약한 자에 대한 더 강한 자의, 무지한 사람들에 대한 교양 있는 사람들의 권력이다. 이런 자격은 사회적 위치의 명백한 배분을 포함하고 있다. 플라톤이 하고 있는 것처럼, '더 강한' 것이 정말로 무엇을 의미하는가라고 묻는 것은 가능하지만, 약함이 강함의 반대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연장이라는 것이 권력행사를 위한 충분한 자격인지 아닌지를 논쟁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그것은 부정할 수 없는 자격이다. 그것은 객관적인 차이이며, 이미 사회 속에서 작동하고 있는 권력 형식이다. 이런 자격은 지배를 위한 아르케arche로서 기능할 수 있다. 아르케는 시간적인 시작임과 동시에 이론적인 원리이다. 원리로서의 아르케는 사회적 위치와 능력의 명백한 배분을 의미하고, 이 배분은 지배자와 피지배자 사이의 권력 배분의 근거가 된다. 시작으로서의 아르케는 지배의 사실이 지배를 위한 적성 속에서 예기預期되어 있으며, 역으로 이 적성의 명증성이 그 경험적인 작용 사실에 의해 부여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통치가 성공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왜 어떤 사람들이 지배자의 입장에 있으며, 다른 사람들이 피지배자의 입장에 있는가, 그 이유를 제공하는 것인 것처럼 보인다. 최초의 여섯 개의 지배 원리는 요건을 갖추고 있다. 그러나 일곱 번째 원리가 있으며, 플라톤은 그것을 '제비뽑기'라고 부른다(*주4). 이것이 민주주의이며, 두개의 요건을 만족시키지 않는 체제이다. 민주주의는 역할의 선先-취取된 배분도, 권력 행사를 지배를 위한 적성에 속하게 하는 것도 아니다. '제비뽑기'는, 온갖 아르케의 부재와 같은, '자격 없는 자격'과 같은 자격의 패러독스를 제시한다. 이 '자격 없는 자격'으로부터 두 개의 다른 귀결을 이끌어 낼 수 있다. 그것이 어떤 아르케도 아니라고 결론 짓고, 그것을 통치 원리의 리스트에서 제외할 수 있다. 플라톤은 그렇게 하지 않지만, 이것을 두고 그가 민주주의에 관대하다고 비난할 수는 없다. 이것은 민주주의가 실제로 존재하고, 그 '주체', 즉 인민이 자신의 존재를 입증하고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것 이상의 무언가가 있다. 아르케의 민주주의적 결여는, 적절한 아르케를 과시하는 '좋은' 자격과는 반대의 움직임을 한다. 확실히 위에 열거된 자격들은 좋은 자격들이다. 하지만 엄밀하게 말해서 그것은 무엇에게 좋은 것인가. 연장자가 연장이라는 것은, 확실히 통치를 근거지을 수가 있다. 그 정확한 이름은 장로제일 것이다. 교양있는 사람들의 지식은 통치를 근거지을 수 있으며, 그 이름은 에피스테모크라시epistemocracy 또는 테크노크라시technocracy가 될 것이다. 이런 식이다. 하지만 그 통치형식의 리스트에는 정치적인 통치가 결여되어 있을 것이다. 정치적인 통치가 무언가를 의미한다면, 그것은 무언가 그 이상의 것, 즉, 연장, 부성, 지식, 강함 등에 의한 통치에 추가되는 것이 아니면 안 된다. 그런 형식은, 가족, 부족, 학교, 일터에 이미 존재하고, 인간의 공동체의 더 광범위하고 더 복잡한 형식에 유형을 제공한다. 그리고 플라톤이 말한 것처럼, '천공'에서 도래하는 무언가 그 이상의 것이 없으면 안 된다. '천공'에서 도래하는 통치는 둘 뿐이다. 첫 번째 것은 사목통치, 즉 신의 목인이 인간의 무리를 직접 지배하고 있던 신화적 시대의 통치이다. 두 번째 것은 운에 의한 통치, 즉 제비뽑기, 즉 민주주의이다.
 얼마간 다른 방식으로 서술해 보자. 인간이 그것에 의해 지배되는 통치의 많은 유형이 있다. 출생, 부, 힘, 지식은 가장 공통적인common(=보통의) 것이다. 그러나 통치는 무언가 그 이상의 것, 지배자와 피지배자에게 공통의 대리보충적인 자격을 의미한다. 이미 신의 목인이 세계를 지배하고 있지 않다면, 자격은 이미 한 가지 밖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지배되는 자격도 지배하는 자격도 갖지 않는 사람들이 갖는 자격이다. 이것이 민주주의의 의미이다. '데모스demos의 권력'이란, 어떠한 아르케에 의해서도 권력을 행사하는 권한을 부여받지 않은 자의 권력을 말한다. 민주주의는 일련의 제도도 특정한 집단의 권력도 아니다. 그것은 온갖 종류의 제도, 그리고 어떠한 하나의 인민 집단의 권력을 정통화하기도 하고 그 정통성을 뺏기도 하는, 대리보충적인, 근거짓는 권력이다.


*주1 Jean-Claude Milner, Les Penchants criminels de l'Europe demomcratique (Paris: Editions verdier, 2003).

*주2 Bernard-Henry Levy, Le Meurtre du Parteur (Paris: Editions Verdier, 2004).

*주3 Plato, Republic, book VIII, 563c-d.

*주4 Plato, The Laws, Book III, 690c.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민주주의는 무언가를 의미하는가?>. 자크 랑시에르 (1)



일본은 서양 철학의 수입에서 한국보다 훨씬 앞서 있었다. 서점의 철학 코너를 놀라워 하면서 돌아 보다가 집어 든 책은 05년 런던대학에서 열린 연속 강연회 의 원고를 묶어 출판한 책, <<도래할 데리다>> 였다. 지젝, 바디우, 발리바르, 스피박 등 쟁쟁한 사람들의 원고로 가득한 이 책은 놀랍게도 영국보다 약 열흘 먼저 발매되었다. 세계에서 가장 빠르지 않았을까 싶은데, 번역의 질이야 내가 평가할 수 있는 것이 아니지만, 그 속도에는 정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비도 오고, 돌아다니는 일에도 질려서 호텔에 틀어 박혀 발리바르의 글을 한글로 옮겨 가며 읽었는데, 헤겔과 구조주의 언어학과 데리다의 관계를 다룬 흥미로운 글이었다(라고, 말하고 싶지만- 일본어에도 철학 개념에도 서툴기 때문에 그저 아리송할 뿐이었다). 일본에서 얼추 다 끝내서 조금 손본 다음 블로그에 올리려고 했으나, 같은 책의 자크 랑시에르의 글이 너무너무 재밌어서 랑시에르의 글을 먼저 옮기기로 마음을 고쳐 먹었다.

 

랑시에르의 글은 민주주의를 둘러싼 다양한, 그리고 상충되는 입장들이 민주주의의 개념 속에 이미 들어 있음을 논증하고 있다. 민주주의에 대한 물음을 통해서 그의 글은, 한국에 빗대어 말하자면, 박정희의 '한국식 민주주의'가 성립 가능성, 그리고 민주주의에 대한 혁명적 요구(주류 언론이 언제나 망각케 하려는 것이지만, 한국의 민주주의는 혁명에 대한 열망과 더불어, 그리고 그것을 통해서 실현되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요즘의 '과잉 민주주의'에 대한 '공허한' 걱정이나 법의 보편적 지배에 대한 긍정 속에서의 자유의 추구라는 역설 까지를 아우르고 있다(마지막 항목을 쓰면서 이글루스에 쓴 아프가니스탄 피랍 사건에 대한글에, '헌법이 설립하는 인권'을 얘기하며 날 선 리플을 달았던 사람을 떠올렸다. 의미심장하게도 그 사람의 아이디는 하루키의 소설에서 차용된 것이었고, 나는 하루키의 소설이 어떤 자유의 형식을 대표하고 있는 것은 아닐지 생각하고 있다).


내게 랑시에르의 글이 흥미로웠던 것은, 내가 저 위에 열거된 그 어느 것인가에 머물러 왔으며, 저 모두가 혼재된 상태에서 사고를 해 왔기 때문이다. 맑스주의에 대한 시덥잖은 농담 -20대에 맑스주의가 아닌 사람은 바보지만, 20대가 지나서도 맑스주의자인 사람은 더 바보다(이게 맞던가? 그보다 이게 농담이긴 한가??)-은 그 나름대로 핵심을 찔러서, 이 뒤엉킴을 겪는 것이 나 혼자만은 아님을 말해주는 것 같다. 농담이 말하고 있는 것은 맑스주의자가 되고, 안 되고가 결국 민주주의 속에서의 '사고思考'의 문제, 즉 사고가 곤궁에 부딪혔느냐 그렇지 않느냐의 문제에 있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20대가 지나서는 사고의 곤궁이 아니라 생활의 곤궁의 문제일 수도 있겠지만...

 

좋은 글에 들어 가기 전에 사언이 너무 많았다. 비록 질은 썩 좋지는 않겠지만 내 번역이 이래저래 마음이 심란하고, 나처럼 조금만 생각하려고 하면 머리가 아픈 사람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됐으면 좋겠다. 번역은 불가피한 경우가 아니라면 일본어 문형 그대로 옮길 것이며(일본어 번역은 꽤 직역에 가까운 듯), 내가 원 저자가 다루는 철학 용어들은 물론이고, 그것에 대한 일본쪽 수입의 맥락도 잘 모르는 탓에(흑흑) 어지간하면 손 안 대고 그대로 옮기기로 했다. 부득이한 경우에는 명기하여 설명을 달 생각이고, 일본어판에서 역자가 첨부한 번역은 필요하다고 판단되면 명기하여 옮길 것이다. 번역은 딱히 계획은 없으니 시간이 나는대로 슬금슬금- 기회가 닿는대로 영어판이나 독어판(있으면)을 구해 수정할 생각이지만, 이곳 생활이 맘 먹은 대로 되질 않아서 당분간 어려울 것 같다. 어쨌든 시작하자.


------------------------------------------------------------------------------------------------------------------------------


 

민주주의는 무언가를 의미하는가? Does democracy mean something?


                                                                                                                     자크 랑시에르 Jacques Ranciere



 나는 데리다에게 바쳐진 연속강연에의 나의 개입에 대한 예비적 언명에서부터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된다. 나는 데리다의 제자였거나 그의 사상의 전문가였던 적이 한 번도 없다. 그가 나의 교사였던 때-아주 옛날의 일이다-부터, 나에게는 그와 철학적인 문제를 논할 기회가 없었다. 따라서 내가 그에게 표현할 경의는 그의 저작에 대한 주석이 아니다. 그를 기리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90년대에 점점 그의 사고의 전경을 점하게 된 개념과 문제-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무엇이 의미되고 있는가-를 다루는 나 자신의 방법을 제시하는 것이다.


  '민주주의의 패러독스'란 무엇인가


 데리다는 <<우애의 정치학The politics of friendship>>에서, 페리클레스의 것으로 여겨지고, 플라톤의 <<메넥세노스>>에서 부연되어 있는 잘 알려진 명제-'아테나이 인의 통치는, 이름은 민주주의이지만, 현실에서는 귀족제, 즉 다수자의 찬성을 얻은 최고로 뛰어난 자의 통치이다'(*주1)-에 주석을 다는 것에 의해, 이 쟁점을 전개한다. 데리다는 이 언명의 기묘함을 지적한다.(*주2) '민주주의적' 통치라는 수사 그 자체가, 이 형태의 통치에 두 개의 대립하는 이름이 부여될 수 있음을 보여 주고 있다. 그것은 민주주의라고 불리지만, 그러나 사실상 귀족제이다. 이 '그러나'를, 이름과 사물 사이의 이 이접離接을, 우리들은 어떻게 생각할 수 있을까. 우리들은 그것을 수사修辭 상의, 또는 통치를 위한 허위라고 보거나, 이름과 '사물' 사이의 차이에 의해, 무언가 좀 더 근본적인 것이, 민주주의를 다른 어떤 형태의 통치와도 다른 무언가로 만드는 내적인 차이가 가리켜지고 있다고 상정하거나, 둘 중 하나이다. 이 물음은, 데리다에 의한 민주주의의 아포리아적 구조의 탐구와, 내가 오히려 민주주의의 패러독스라고 부르기를 선호하는 것에 대한 나 자신의 탐구에 공통의 근거를 명확하게 할 수 있는 것이다.
 내가 '민주주의의 패러독스'라는 것으로 무엇을 말하고 싶은가를 명료하게 하기 위해, 민주주의의 이름과 현실을 다루는 현대의 두 가지 논쟁에서부터 시작하기로 하자. 첫 번째 논쟁은 중동에 민주주의를 전파하기 위한 미국의 군사작전에 관한 중요한 불일치를 품고 있다. 이라크의 선거와 레바논에서 일어난 반 시리아 저항운동 직후, <<이코노미스트>> 지의 표지에 '중동에서 민주주의가 시작'이라는 말이 춤을 췄다. 민주주의의 시작에 대한 자기-만족은, 이름과 현실 사이의 차이에 대한 두 갈래의 논증구조- '.....지만, 그래도 민주주의는 시작된다' 또는  '민주주의는 시작되지만, 그러나 .....'-에 따라 정식화된 것이다.
 '.....지만, 그래도 민주주의는 시작된다'는 어떤 이상주의자들의 논의였다-그들에게 민주주의는 인민의 자기-통치이다. 이것은 민주주의를 힘에 의해 다른 민족에게 가져다 주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환언하면, 우리들은 다음과 같이 주장할 수 있다. 즉, 민주주의에 대한 실용주의적인pragmatic 견해를 취하여, 민주주의는 '인민의 권력'이라고 하는 유토피아적인 견해를 치워 버린다면, '민주주의는 시작된다'라고. 두 번째 논의는, 민주주의는 시작되지만, 그러나 민주주의를 가져다 주는 것은 법의 지배, 자유로운 선거 등을 가져다 주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라는 것이었다. 그것은 우선 혼란을, 민주주의적 생활의 혼돈을 가져다 주는 것을 의미한다. 도널드 럼스펠드가 사담이 실각한 후 일어난 약탈에 관해 말한 것처럼-우리들은 이라크 사람들에게 자유를 가져다 준 것이며, 자유라는 것은 그런 종류의 일을 행할 가능성 또한 의미하는 것이다. 
 그래도 론과 그러나 론은 요컨대 일관된 논리인 셈이다. 그 논리는 다음과 같은 것이다. 민주주의는 자기-통치의 목가 등이 아니기 때문에, 민주주의는 혼란에 다다를 수 있기 때문에, 민주주의는 초대국의 병기에 의해 외부에서 야기되는 것이 가능하며, 또 아마도 야기되지 않으면 안 된다. '초대국super power(=초권력)'은 절대적인 군사적 우위를 가진 나라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또한 민주주의에 의한 혼란을 통제할 수 있는 권력을 의미하는 것이다.
 여기서 민주주의를 넓히기 위한 군사작전을 지지하는 논의는, 우리들에게 민주주의를 전파하는 것에 대한, 지금만큼 열광적이지는 않았던 훨씬 오래된 논의를 떠올리게 한다. 실제로, 그런 논의는 30년 정도 전 삼극위원회(*일역주1)에서 행해진, 민주주의의 '위기'에 대한 두 개의 주요한 논의를 끊임 없이 바꿔 말하고 있는 것이다.
 삼극위원회에 따르면 민주주의의 몽상가들이 민주주의를 인민의 자기-통치와 동일시함에도 불구하고, 민주주의는 시작된다. 이런 몽상가들은 삼극위원회에서 비난된 '가치지향의 지식인'과 같은 종류의 등장인물이다. '가치지향의 지식인'은 '정책지향의 지식인'의 실용주의pragmatism에 대립하는 '적대적문화'를 조장하고 지도자와 권위에 도전하는 과잉의 민주주의적 활동을 촉진하고 있다고 비난받은 것이다.
 민주주의는 시작되지만, 그러나 그것과 함께 혼란도 시작된다. 바그다드에서 일어난 약탈에 대해 도날드 럼스펠드가 한 농담은 30년 전에 사무엘 헌팅턴이 행한 논의를 그대로 반복한 것처럼 들린다. 헌팅턴에 의하면 민주주의는 정부에 압력을 가해 권위의 토대를 무너뜨리고, 개인이나 집단을 자기-지배와 연결된 규율과 희생의 필요성에 저항하게 하는, 그런 요구의 증대에 다다르는 것이다. 
 민주주의를 새로운 영토로 넓히기 위한 군사작전이, 현재 '민주주의'의 이름 아래서 이해되고 있는 패러독스를 전경화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좋은 '민주주의적 통치'라고 하는 것은 좋은 정책을 위협하는 과잉을 통제할 수 있는 통치형식을 의미한다. 이 과잉은 이름 붙여질 수 있는 것으로써, 그 이름이 민주주의이다. <<민주주의의 통치능력>>(*주3) 에 기술되어 있듯이 민주주의적 통치를 위협하는 것은 민주주의적 생활 이외의 그 무엇도 아닌 것이다. 이 위협은 완전한 이중 구속double bind으로써 나타난다. 한편, 민주주의적 생활은 인민에 의한 '자기-통치'라는 이상주의적 관점의 실시를 의미한다. 그것은, 좋은 정책의 원리와 절차, 권위, 과학적 전문지식, 실용적인pragmatic 경험을 침식하는 정치활동의 과잉을 동반한다. 그 때문에, 좋은 민주주의는 정치적 과잉의 억제를 의미할 것이다. 하지만 이 정치활동의 억제는 요망과 요구를 증대시켜, 정치권위와 시민으로서의 행동의 토대를 무너뜨리는, '사적생활' 또는 '행복의 추구'에의 권력부여에 다다른다. 그 결과로서, '좋은 민주주의'란, 민주주의적 생활의 본질에 내재한 정치에의 참가와 이기적인 행동이라는 이중의 과잉을 순치할 수 있는 통치형식을 의미한다. 현대의 '민주주의의 패러독스'를 다음과 같이 기술하는 것이 가능할 것이다. 즉, 사회적 그리고 정치적인 생활형식으로서의 민주주의는 통치형식으로서의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것이며, 후자에 의해 억압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라고.


-------------------------------------------------------------------------------------------------------------------------------------------



주1) Plato, Menexenus, 238c-238d

주2) Jacques Derrida, Polittics of Friendship (London: Verso, 1997), p93-113


일역주1) 삼극위원회: 1973년 10월에 미국, 일본, 유럽 세 지역의 민간조직으로서 발족. 상호의존의 심화라는 국제정세를 배경으로, 이해관계의 조정에 기울기 쉬운 정부간 관계를 보완하고, 더 넓은 시야에서 국제사회의 안정과 발전에 기여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다. 75년에 도쿄와 교토에서 열린 연차총회에서는 중동평화 등과 함께 민주주의의 위기가 논의되었다. 본문에서 나오는 <<민주주의의 통치능력>>은 그 때 제출된 문서이며, 사무엘 헌팅턴, 미셸 크로졔, 죠지 와타누키 삼인이 각각 미국, 유럽, 일본의 민주주의 상황(정권담당자가 피치자의 요구에 얼마나 응하는 것이 가능하며, 또 피치자에게 얼만큼 정부의 권위와 정통성을 인정하게 하는 것이 가능한가)에 대해서 보고했다.


주3) Michel Crozier, Samuel P. Huntington, Joji Watanuki, The Crisis of Democracy - Trilateral Commission Task Force Report n. 8(New York: New York University Press, 1975).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윤리21>, 가라타니 고진



마르크스가 부르주아 사회의 토대에 자본주의 생산양식이 존재함을 분석한 이래 좌파적인 비판의 특징은 현상을 그 사회적-물적 관계 속에서 파악하는 데 있다. 파시즘의 광기는, 인간의 내면의 어두운 욕망에서 기인한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 전개의 한 양태이며, 여자화장실의 몰래카메라는 그저 한 남자의 정신이상의 문제가 아니라 남성지배사회의 결과물이라는 것이다. 구조에 대한 이러한 강조는 사회적 문제를 신비화하거나 개인화 하려는 경향에 맞서서 그것을 정치화하는 데 기여하지만 인간의 삶이 사회 환경에 의해서 결정된다거나 나아가 인간의 이성과 자유의지 역시 기표의 규칙에 따를 뿐이라는 인식은, 일어난 일들에 대해 책임을 묻는 것을 곤란하게 만든다. 어찌됐든 도덕적 책임이란 것은 자유에 의해서 일어난 일에만 지울 수 있다고 생각되고 있으니. '원인'이 무엇이었든지 간에 독일의 전범들은 심판을 받았고, 도촬을 한 사람도 책임을 져야만 한다. 결국, 윤리에 대한 요청이 존재하는 한 사라진 주체든. 변화된 주체든, 주체에 대한 물음은 제기될 수 밖에 없다. <윤리21>에서 고진은 칸트를 빌려와 이 문제를 풀어나간다.


칸트에게 있어서 자유란 이율배반적인 것이다. 한 편으로 세계의 모든 것들은 어떤 인과적인 질서 속에서 존재하고 있으며, 다른 한 편으로는 그 인과질서의 계열에서 벗어난 자유가 존재한다. 그리고 칸트에게 있어서 경험적 현실 속에서 일어난 모든 일들은 법칙을 따른 행위, 즉 자유로운 행위가 아니다. 지적인 욕구를 충족시키는 행위나 선행에 이르기까지, 단순히 물리적인 외적 현실 뿐만 아니라 내밀한 욕망의 층위에서까지 인과질서는 물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자유가 존재할 수 없는 이런 곤궁에 대한 칸트의 해답은 역설적인 것인데, 그것은 인간은 오직 의무를, 그것이 의무이기 때문에 따르는 한에서만 자유로울 수 있다는 것이다. 고진은 이 지점에서 칸트의 도덕법칙을 '자유로워지라'는 명령으로 해석하면서 개입한다. 그렇게 되면 그 의무의 준수에 대한 요구로 인해 얻어지는 자유가 역설적인 것이 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율배반적 세계 속에서 '자유로워지라'는 명령을 따를 수 있는 가능성을 고진은 칸트가 미적판단의 특징을 '무관심'에서 찾았다는 데서 끌어내고 있는데, 미적판단을 함에 있어서 진리나 도덕에 대한 판단이 배제되는 것처럼 도덕에 대한 판단에 있어서는 진리나 아름다움에 대한 판단을 '괄호'쳐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상태에서 마치 자유로웠던 것처럼 판단할 것이 요구된다. 이러한 입장에서 스스로 자유로운 주체이며 따라서 타자를 자유로운 주체로 대하는 행위란 무엇인가가 도출된다. 칸트는 일반적인 사고와는 다르게 공동체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것을 이성의 사적사용이라고 하였으며, 주체로서 개인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것을 이성의 공적사용이라고 하였는데, 왜냐하면 특정한 사회적 관계에 의해 영향받지 않고, 마치 무제약적 상태에서처럼 보편적인 행위를 하는 것이 칸트의 사고에서 주체의 자유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고진에게 있어 칸트의 윤리는 단순한 개인의 의무를 다루는 윤리를 벗어나 사회의 구조와 관계까지 사유하는 것으로 확대된다. 
마치 아무런 제약이 없었던 것처럼 스스로에 대해, 그리고 타자에 대해서 판단하라는 것은 지금 자신이 존재하는 세계의 모든 영역과 부문에 있어서 나의 책임이 인정된다는 것이고, 따라서 윤리적 행위란 그것에 대해 책임지고 그것을 바꿔나가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윤리21>에서 고진이 제기한 칸트론은 다음 두 가지를 축으로 하고 있다. 하나는 칸트의 정언명령에 대한 해석이며, 다른 하나는 '괄호론'이라고 부를만한 것으로 칸트에게 있어서 갈등적인 세 개의 비판 영역을 상황에 따라 각각 독립적인 것으로 바라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고진은 "'자유로워져라'는 명령에 따르는 것은 '자유다'는 것이니까 특별히 모순이 발생하지 않는다'고 쓰고 있다. 하지만 '자유로워지라'는 명령은 고진이 다른 맥락에서 거론한 이중구속의 대표적인 상황을 의미하는 것은 아닌가? 명령에 따른 자유란 진정한 자유가 아니며, 명령을 따르지 않는 것은 타율을 택하는 것이므로, 그 명령은 따를 수도 따르지 않을 수도 없는 것이다. 따라서 그러한 명령 이전에 해명되어야 하는 것은 자유란 무엇인가이다. 법칙과의 관계에서 자유란 법칙에 선행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법칙 이후에 존재하는 것이며, 한 편 자유는 초월적 이념으로써 실천이성의 요청의 대상이기도 하다. 한 편으로는 사실로써 존재하고, 한 편으로는 요청의 대상인 자유의 역설적 위상을 고진은 '괄호'를 통해 해소하려는 듯이 보인다. 그러나 이것이 과연 칸트에 대한 전통적 해석을 떠받치는 현상계와 예지계의 구분과 얼마나 다른 것인지 의문이 든다. 결국 예지계라는 것은 현상계를 괄호치고서 논의되는 것에 다름 아니지 않은가? 그렇다면 고진의 칸트는 공허한 형식주의자인 칸트나 인간의 선을 향한 의지를 요청했을 뿐인 허약한 칸트와 어떻게 다르다고 할 수 있을까? 고진은 특정한 판단을 할 때 괄호를 하거나 푸는 것은 특정한 사회적 문법에 의한 명령일 따름이라고 쓰면서, 괄호를 푸는 것의 중요성도 동시에 강조했다. 이 때 문제는 괄호의 힘을 빌려서만 존재할 수 있는 자유가 괄호 없는 세계, 즉 취미 판단과 진리 판단이 더불어 존재하는 세계에서 무엇일 수 있는가에 있다. 결국 지금 구조와 주체의 갈등이라는 곤궁 속에서 칸트가 다시 불려지고 있는 것은 구조 속에서 주체가 어떻게 존재하는지에 대해 탐구하기 위함이지, 구조 속에서 주체가 어떻게 존재하기를 원해야 하는지에 답을 하기 위해서는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고진이 자신의 정치적 실천항으로써 끌어낸 생산자 협동조합의 모델은 칸트가 아니라 마르크스 또는 사회주의 운동의 전통에서 유인할 수 밖에 없다. 고진의 논의가 매끄럽게 이어지지 않는다고 느낀 것은 특히 이 부분에서였다. 주체와 마찬가지로, 고진이 풀었다 쳤다 하는 괄호들 속에서 생산자 협동조합이라는 세계 모델의 실재적/정치적 위상은 극히 불분명하게 여겨지기 때문이다.  칸트에게 가해진 종래 마르크스주의의 비판은 칸트가 예지계에서의 자유만을 인정할 뿐이고, 그래서 현실에서의 변혁을 불가능한 것으로 만들었다는 데에 있다. 고진은 현실에서의 변혁을 칸트윤리학의 실천적 요청으로써 자리매김하고 있기는 하지만 칸트 철학 내에서 '실천적 요청'이라고 하는 것은 곧 현상계에서의 법칙적 불가능성에 다름아닌 이상, 그 역시 이에 대해서 대답을 해야 할 것이다.  


<윤리21>은 이론적인 것을 목표로 했다기 보다는 고진이 자신의 정치를 이해시키기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설명을 하고 있다는 것이 맞을 것이다. 그러니 고진이 칸트로 설명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이상만을 그려낸다고 하는 말은 어쩌면 그저 동어반복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트랜스크리틱>을 읽어갈 표지는 세워 둔 셈이니, 나같은 얼치기가 고진의 글에 이러쿵저러쿵 토를 단 무모함이 의미없는 일은 아니게 되기를.


덧. 이미지가 일본판인 이유는 그저 한국판 표지가 마음에 안 들었기 때문이다ㅎㅎ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내쫓긴 아이들>, 엘프리데 옐리넥


 

 

모두 내가 과문한 탓이겠지만, 현재 작품을 발표하고 있는 작가들 중에서 나에게 중요한 사람은 쿳시와 옐리넥 뿐이다. 스타일은 무척 다르지만, 이 둘은 비슷한 문제의 언저리를 맴돌고 있다. 그들이 문제삼는 것은 '인간'이라는 관념이다. 쿳시가 백인 화자와 침묵하는/할 수밖에 없는 식민지 인들을 대립시킬 때, 그리고 옐리네크가 인물에게서 개성을 박탈하고 그 자리에 삶의 그로테스크한 전형들을 위치시킬 때, 인간이라는 관념은 분열되고 해체되어 버린다. 그리고 이는 동시에 지극히 정치적인 문제이기도 하다. 결국 인간의 문제는 사회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쿳시의 언어가 차분하고 조용한 것과는 너무나 대조적으로 그의 소설에 등장하는 서양인들은 비대한 자의식을 가지고 수많은 언어들을 쏟아낸다. 하지만 그 언어들은 현실에 대한 초라한 묘사와 타자의 침묵 앞에서 언제나 실패하고-언어들은 왜곡되거나, 모순되거나, 받아들여지지 않고, 심지어 귀에 전달되었는지, 그저 시끄러운 소리의 울림일 뿐이었는지도 확인할 길이 없다-, 그렇게 해서 그 스스로의 한계를 폭로한다. 자의식이 비대해야만 하는 이유는 쿳시 자신이 예민한 지식인이기 때문이자 동시에 세상을 꿰뚫어 보는 그 데카르트적 이성이 비대하면 비대할 수록 그것이 무너져 내리는 순간 현실의 많은 것들이 같이 무너져 내리기 때문이다. 리얼리즘으로 아파르트헤이트를 비판하며 노벨상을 수상한 남아공의 작가 나딘 고디머는 쿳시의 소설이 관념적이라고 비판했지만, 쿳시 역시 진정한 저항작가라고 할 수 있다. 그의 글은 세계 그 자체의 붕괴를 겨냥할 만큼 급진적이기 때문이다. 또는 타자를 존재하게 하기 위해서 세계의 붕괴까지 감수하기 때문이다.  그는 결코 피해자의 입장을 다루지 않음으로써 독자에게 도망칠 구석을 주지 않는다. 대신에 독자를 분열하는 자의식을 가진 가해자의 위치에 서게 만들고, 그리하여 그 안정된 의식 세계 바깥에 억압받는, 즉 내가 억압하는 타자가 있음을 깨닫게 만든다. 물론 이 때의 타자는 리얼리즘이 '그려내는' 타자가 아니다. 쿳시의 타자는 서술 불가능한 타자, 오직 거기에 있음만을 말할 수 있는 타자이며, 서양인의-그리고 독자의- 자의식이 스스로 모순에 부딪친다는 사실만이 존재를 증명할 수 있는 타자, 즉 없기 때문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타자이다.  


 

반면에 옐리네크는 너무 많이 말한다. 심지어 소설의 주인공들에게는 단 한 마디도 할 기회를 주지 않은 채(그녀의 소설에는 따옴표를 쓴 대사나 심리의 인용이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작가가 지독하고 끔찍하리만치 냉소적인 언어를 쏟아 낸다. 하지만 그녀 역시 쿳시와 마찬가지로 세계를 성실하게 재현하는 일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다. 그녀의 문장은 과장되고 위악적인 표현들과 다른 곳에서 따온 패러디로 가득한데, 이 모든 것들은 그저 어떻게 하면 세계를 비웃을 수 있을까에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는 듯 하다. 아무런 맥락 없이 불쑥불쑥 솟아 나오는 그녀의 문장들은 일반적인 서사의 규범을 따르고 있지는 않지만, 일반적인 서사가 결코 표현하지 못하는 것을 표현해 낸다. 소설의 서사는 한 인물의 언행과 심리를 표현할 수 있지만 이와 동시에 그 인물의 사회경제적 배경과 자기도 눈치 채지 못하는 내밀한 욕망과 이를 포장하는 사회의 이데올로기를 표현하지는 못한다. 하지만 화자가 사건을 전달한다는 소설의 본령에 어쩌면 가장 가까운 방식으로 글을 쓰는 옐리네크는 사회학자 같은 시선으로 이 모든 것을 포착해 낸다. 어쩌면 진부하다고 할 수 있을 옐리네크의 주제들과 지루할 수 있는 이런 서술 방식을 이채롭게 만드는 것은 그녀의 주저하지 않는 냉혹함이다.
그녀는 실험을 하는 과학자처럼 환경과 인물들을 다룬다. 인물들에 대한 조금의 연민도 보이지 않고, 그들이 사회 속에서 어떻게 기능하고 있는지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 그리하여 인물들이 한없이 초라해져 자신의 삶을 조율하는 이데올로기에 관통당한 존재일 뿐이라는 사실이 드러나는 대신에 사회와 사회의 이데올로기는 더 분명하게 그 존재를 드러낸다. 이런 면에서 그녀의 작품에 등장하는 인간들은 모두 어떤 전형들라고 할 수 있는데, 이점에 있어서 역설적으로 그녀의 소설을 루카치의 요구에 부합하는 훌륭한 리얼리즘 소설이라 평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내쫓긴 아이들> 역시 이런 옐리네크의 특징을 잘 보여 준다. 이 이야기는 삶으로부터 반란을 꾀하는 4명의 청소년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 몰락한 전 나치 장교의 집안에서 태어나 실존주의와 예술에 심취한 쌍둥이 라이너와 안나, 풍요로운 가정에서 태어나 아무 것도 부족하지 않은 소피, 사회주의 투사였던 노동자의 아들이지만 상층 계급으로의 진입만을 바라는 한스, 이 넷은 함께 범죄를 저지르는 갱을 구성한다. 그리고 '너무 일찍 어른이 되어 버린 아이들'에 대한 모든 이야기가 그러하듯이 이야기는 파국으로 치닫는다. 하지만 옐리네크의 다른 글들 처럼 이 소설에서도 주목받아야 할 것은 자극적인 플롯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작가의 시선 아래서 등장인물들의 행동 하나하나, 생각 하나하나가 어떤 의미를 부여받는가이다. 아이들의 삶을 냉소적으로 바라보는 그녀의 시선 아래 아이들을 가르는 지적, 물적 현실의 차이와 이를 포장하는 이데올로기가 폭로된다. 따라서 독자가 인물들에게 연민을 느끼게 하지 않는 서술은 오히려 옐리네크의 윤리적 실천이라 할 수 있다. 대신에 그녀는 브레히트가 그러했듯이, 왜 현실이 그렇게 작동하는지를 똑똑히 보라고 요구하는 것이다. 브레히트처럼 현실의 변화에 대해서 낙관하기 힘들어진 오늘날, 그에 걸맞는 방식으로.


 

브레히트는 실현될 공산주의를 바라보면서, 이데올로기의 외부를 꿈꿀 수 있었다. 하지만 91년에 오스트리아 공산당을 탈당한 옐리네크에게 현실은 그렇게 밝지가 않았다. 그런 상황에서 그녀가 한 선택은 전통적인 이데올로기 비판의 문법을 극단에 이를 때까지 밀어부치는 것이었다. 비판의 규범조차 무시하고 모든 가치에 대해 조소와 위악적인 제스처로 일관하는 것은, 이데올로기에 순순히 붙들리지 않고, 어떻게든 그것을 파괴하려고 하는 철저한 투쟁이라 평할 만하다. 그리고 옐리네크의 이 용감한 선택은 정치적으로 충분히 그 성과를 거둬내고 있다. 많은 보수주의자들이 그녀의 소설에 충격을 받고, 악랄한 비난을 퍼부어대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에서도 그녀의 글이 더 많이 번역되어 삶의 안온함에 젖어 있는 한국의 보수주의자들에게 커다란 불쾌감을 주기를 바라 마지 않는다.

(노벨상 약발이 좀 먹혀주면 좋겠는데, 요즘에는 그것도 많이 떨어진 것 같다 -.-;)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맑스를 위하여>, 서문: 오늘 , 루이 알뛰쎄르

 

 역사. 역사는 이미 인민전선과 스페인내전 때부터 우리의 청년기를 지배하면서 전쟁 그 자체 속에서 사실들을 처절하게 교육시켰다. 역사는 우리가 태어난 바로 그 지점에서 우리를 놀라게 하였다. 역사는 부르주아 또는 쁘띠 부르주아 출신의 학생들이었던 우리들을 계급들의 존재와 계급들의 투쟁 그리고 그 관건에 의해 교육받은 사람들로 만들었아. 우리는 노동자계급의 정치조직인 공산당에 참여하면서, 역사가 우리에게 부과한 자명성들로부터 결론을 이끌어 내었다.

 

 때는 전쟁 직후였다. 우리는 당이 이끌던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대전투에 급작스럽게 집어던져졌다. 우리는 그때 우리의 선택을 따져봐야 했고 그 결과들을 책임져야 했다.

 

 우리의 정치적 기억 속에서 그때는 대파업들과 대중시위들의 시대, 스톡홀름 선언과 평화운동의 시대로 남아 있다. 레지스땅스로부터 솟아난 거대한 희망들이 무너졌고, 파국의 그림자를 수없이 많은 사람들의 힘을 통해 냉전의 지평 속으로 후퇴시켜야만 했던, 험난하고 긴 투쟁이 시작되었던 시대였다. 우리의 철학적 기억 속에서 그때는 오류를 그 모든 서식지로부터 쫓아내던 무장한 지식인들의 시대였고, 세계를 단 하나의 칼날로 갈랐던, 예술, 문학, 철학과 과학들을 계급들의 가차없는 절단으로 갈랐던 철학자들, 정치를 자신의 저술로 삼았던, 바로 우리들이었던 저서없는 철학자들의 시대였다.

 

                                                                                        <맑스를 위하여>, 루이 알뛰쎄르, 백의, 17p 

 

 

 

 이 글은 이 논문 모음집에서 알튀세르가 비판하고 있는 대상들 중 하나인 공산당 내에서의 지적 경향, 모순들을 단일한 경제적 모순으로 환원하고 그것을 변증법적으로 지양하겠다고 하는 헤겔주의를 겨냥하고 있다. 과학을 프롤레타리아의 과학과 부르주아의 과학으로 거칠게 구분함으로써 지적 통찰력을 마비시켰던 그 단순성이 그들이 세계를 가차없이 절단할 수 있게끔 하였던 것이다. 이 서문은 지적으로 무능했던 공산당에 가해진 알뛰쎄르의 비판의 포문을 여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문장에서는 비판적인 글이 갖는 냉혹함, 가차없음이 아니라 오히려 가슴을 뛰게 했던 거대한 옛 열정들과 흘러간 시간을 회고하는 따뜻함이 느껴진다. 알뛰쎄르는 전후 공산당 활동을 시작하면서 종교적 엄숙함과 어머니가 자신에게 투사한 이미지에 사로 잡혀 있던 유년기에서 벗어나 그의 늦은 청년기를 시작할 수 있었다. 그의 문장에서 전해오는 따뜻함은 강력하고 억압적인 권력에 맞서 좌절하면서 동시에 희망을 보았던 시절, 세상의 많은 것들이 자명해 보이고, 그들의 언어로부터 우리의 언어를 분리시켜내 그것을 실현할 수 있으리라고 믿었던 청년시절에 대한 헌사이다. 그리고 이성과 감성이, 절망과 낙관이, 단호함과 부드러움이 열정 속에서 뒤섞여 있던 시절은 알뛰쎄르만이 아니라 세계 곳곳에서 투쟁하고 있고, 투쟁하였던 모든 이들의 청년기이기도 하기에, 그의 문장은 이들 모두에 대한 헌사이기도 할 것이다.

 

 그래서 그의 문장에는 사람들이 저마다의 방식으로 자신의 과거를 돌아보게 하는 힘이 있는 듯 하다. 에티엔 발리바르는 알뛰쎄르의 장례식에서 위 문장의 일부를 인용하여 낭독하였다. 이를 통해 그는 알뛰쎄르의 죽음과 더불어 돌이킬 수 없는 것이 되어버린 자신의 젊은 시절을 애도하였던 것이 아닐까? 아직 젊음의 한 복판에 있는 나는 이 문장을 보면 맑스를 처음으로 알게 되었을 때 사로잡혔던, 세계의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세계 자체를 바꿔버릴 수 있을 강력한 힘을 얻은 것만 같았던 그 느낌이 떠오른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철의 시대>, 존 쿳시


 세상에는 많은 경계들이 작동하고 있다. 그리고 대개 그 작동은 대립과 갈등을 수반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간절히 경계없는 세상, 경계없는 화합의 세상을 꿈꾼다. 경계란 사실 우리 모두가 같은 인간이라는 점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생겨나는 것이며, 나와 다른 타자에 대한 공포가 경계들 사이에서 갈등을 유발한다는 것이다. 경계란 부차적인 것, 허구적인 것일 뿐이며 본질적인 것은 우리 모두가 인간이라는 사실에 있다. 이렇게 해서 경계는 무화되고, 그 자리에 하나의 인간이 자리를 잡지만, 빈번히 그 이름 아래 폭력과 갈등은 계속된다. 경계없음에 대한 이야기는 어쩌면 함정일 수도 있다. 

 <철의 시대>에서는 경계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두 개의 인간관계가 그려지고 있다. 하나는 아파르트헤이트의 모순이 극에 달한 80년대 말의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고전문학을 가르치다 은퇴한 후 암에 걸려 죽어가는 백인 여성 엘리자베스 커런이 흑인의 해방을 위해 투쟁하는 흑인 하녀의 아이들과 맺는 관계이며, 다른 하나는 그녀가 암 선고를 받고 돌아오는 길에 자신의 차고에서 자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 호의를 베풀게 된 흑인 부랑자와의 관계이다. 아파르트헤이트에 혐오감을 느끼는 휴머니스트 커런은 자신의 삶과 사고의 경계를 허무는 이 두 관계맺음 속에서 흔들리고, 괴로워한다. 

 커런은 투쟁하는 흑인 아이들, 철의 아이들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들은 그들보다 훨씬 나이가 많은 부랑자 퍼케일을 폭행하고, 학교에 불을 지르고, 어른처럼 행동하는 아이들로 커런에게 혐오감을 준다. 커런에게는 그들의 극기, 자기희생, 동지애와 같은 가치들보다 인간의 가치, 삶의 가치를 더 높게 평가한다. 이 관계가 보여주는 것은 보편적 휴머니즘과 특정한 대상과 적을 갖는 정치 투쟁 사이의 갈등이다. 투쟁은 항상 보편성의 이름으로, 그리고 인간의 이름을 동반한다는 면에서 휴머니즘이 낳은 것이지만, 그것에는 또 언제나 휴머니즘을 초과하는 부분들이 존재한다. 커런은 아이들을 죽음으로 내몬다며 흑인들의 투쟁 방식을 비판하지만, 결국 그들을 무참히 죽이는 것은 언제나 백인이며, 백인으로서 커런은 그들로부터 보호를 받으며, 흑인들의 삶의 공간에 뛰어들었다가도 상황이 위험해지자 자신의 삶으로 '돌아가겠다'고 한다. 그 살인들에는 사실 커런 자신의 이름도 들어가 있는 것이다. 커런이 깨닫는 것은 백인인 자신이 휴머니즘을 보편적인 가치로 이야기할 수 없다는 사실, 휴머니즘의 보편성은 백인이라는 자신의 위치 앞에서 너무나 무력하다는 것이다. 결국 휴머니즘이 설정하는 추상적 인간은 다양한 권력관계로 경계지워져 있는 세계 속에서는 무력할 따름이다. 백인들의 방화와 총격으로 흑인들이 죽어가는 이 상황을 설명해 보라며 분노해서 외치는 사람들에게 커런은 그것은 오직 '신의 언어'로만 가능할 것이라고 대답한다. 이는 자신이 공모자인 구조 속에서 객관적 서술이 불가능함에 대한 시인이면서, 휴머니즘의 한계에 대한 시인이다. 휴머니즘은 위계적인 권력관계로 구획되어 있는 삶의 경계를 가로지를 수 있을 만큼 보편적이지 않다. 

 첫 번째 관계가 서로 이질적이고, 서로가 서로의 한계를 물고 늘어질 수 있지만 한 편으로는 서로 비슷한 뿌리를 가지고 서로 소통할 수 있는 것들 사이의 관계를 다루고 있다면, 두 번째 관계는 전적인 타자성과의 조우를 형상화한다. 부랑자 퍼케일은 커런이 그에게 보인 선의를 다른 뭔가로 보답하지도 않고, 손님으로서 허용된 행동의 범위를 따르지도 않는, 교환이라는 경제원리와는 완전히 담을 쌓은 인물이다. 커런은 그에게 끊임없이 이야기를 하지만 그는 대체로 반응하지 않고, 반응하더라도 그 의미를 명확히 알 수 없다. 이런 미지의 인물은 쿳시의 소설에 자주 등장한다. <포>의 프라이데이가 그렇고, <마이클 K>가 그렇다. 커런처럼 이 미지의 인물들을 만나는 백인은 언제나 그들이 뭔가를 '이야기하게' 하기 위해서 필사적으로 노력하지만 실패한다. 그런데 <철의 시대>는 이 관계를 조금 다르게 그려내는 듯 하다. 커런은 퍼케일이 이야기하게 하는 데 보다도, 그가 그저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데 관심을 보이고, 자신이 그에게 다가가 자선을 베풀었다기 보다는, 그가 자신에게 다가왔다고 생각하며, 후에는 그가 자신의 생명을 거둬가도 좋다고 생각할 만큼 그에게 자신을 열어 보인다. 다른 소설의 화자들이 '피부만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이 타자의 내면을 헤집으려고 한 반면에, 커런은 그 존재를 순수히 감내하려고 한다는 점이 다르다. 소설은 퍼케일과 커런의 관계에 대한 애매한 장면으로 끝을 맺는다. 애매하긴 하지만 전적인 무반응이라고 생각할 수 없는 장면. 물론 커런의 편지 형식인 이 이야기에서 퍼케일에 대한 모든 이야기, 그와의 관계에 대한 모든 평가는 커런 자신의 이야기일 뿐이다. 하지만 그녀의 이야기는 타자, 나의 경계 밖에 있는 것과의 어떤 새로운 관계맺음의 형태, 근거 없고 계산 없는 신뢰를 보여준다.

 첫 번째 이야기가 어떤 면에서 꿈쩍도 하지 않는 경계의 확고함과 관계의 불가능성을 보여준다면, 두 번째 이야기는 경계 속에서의 관계맺음에 대한 나름의 상을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쿳시는 언제나 작동하고 있는 경계의 흔적을 지우지 않으려 대단히 조심스럽다. 경계란 내가 내가 아닌 순간에야 지워질 수 있을테고, 그 때에야 허물어졌다 할 수 있는 것일텐데, 이는 결코 낙관할 수 있는 것도, 쉽게 서술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역설은 경계란 성찰 없이 허물어지지 않으며, 성찰하고 있는 한 존재한다는 점이다. 끝없이 이어지는 자기 성찰, 그걸 가능케 하는 공모의 구조, 이게 쿳시가 고군분투하는 방법이다. 나는 그게 섣부른 호언보다는, 최소한 솔직하다는 면에서 마음에 든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어둠의 땅>, 존 쿳시


  글을 읽는 내내 마치 자화상을 보는 듯 하여 무척 괴로웠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두 명의 화자, 남아프리카를 '개척'하는 18C 의 제국주의자와 베트남전에서의 미국의 심리전 전략을 입안하는 20C 의 제국주의자가 사고하는 스타일이 꼭 나의 것인 양 느껴졌기 때문이다. 마치 쿳시가 '봐라! 이게 네 사고 방식이야! 네가 바로 제국주의를 가능하게 하고 있는 거야!'라고 얼굴에 책을 들이미는 것 같았다. 아마도 쿳시는 똑같은 말로 자신 또한 괴롭혀 가며 글을 써 내려갔을 것이다. 작품에서 18C 의 제국주의자의 이름은 야코부스 쿳시이다. 이 이름을 통해 그는 자신의 존재가 제국주의에 직접적으로 빚지고 있음을 시인하는 것이자 그 역사적 연관성을 넘어서서 그의 사유와 그가 존재하는 방식을 통해 스스로 제국주의와 공모하고 있음을 시인하고 있다. 과연, 쿳시의 글을 읽는 이 세상의 그 누가 그 공모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까? 우리의 이성이 실은 이미 광기라 하더라도 과연 누가 그 이성의 작동을 멈출 수 있겠는가?

  쿳시의 소설이 진정으로 윤리적인 이유는 자신이 그럴 수 없음을 솔직하게 시인한 채로, 이성의 내부에서 이성이 스스로의 광기를 드러내는 순간을 끈질기게 파헤치기 때문이다. 결국 해답을 제시하는 것이 또 다른 억압이 될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할 수 있는 한 최대로 고민하고 반성해 보는 것이다. 쿳시의 첫 작품인 이 소설의 화자가 백인 남성 제국주의자인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스스로가 이 세계에 존재하는 억압의 구조와 얼마만큼 공모하고 있는지를 철저하게 반성하지 않는 고민이란 결국 진실성을 결여하기 마련이다. 이후 쿳시의 소설들은 제국주의에 대한 저항의 가능성으로, 동물과의 관계에 대한 고민으로, 원주민과의 소통의 문제 등으로 넓어져 간다. 하지만 그의 태도는 <어둠의 땅> 과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그는 가능성을 얘기하기 보다는 차라리 불가능성을 끊임없이 제시한다. 그가 <어둠의 땅> 에서 자기 자신의 문제이자 모두의 문제로서 제시했던 이성은 그 모든 문제들 속에 언제나 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불가능을 형상화 해 내는 것은 그 이성의 야만을 다시 작동시키지 않으려는 최대한의 노력이라고 할 수 있다. 나에게는 섣부른 희망보다는 이런 끈질긴 반성이 더 소중하게 여겨진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최장집과 고세훈의 민주주의 복지국가론




 
 
 고세훈의 <복지한국, 미래는 있는가?> 와 최장집의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를 읽었다.

 한국의 민주주의에 대한 최장집의 문제의식은 한국 정치의 정치 체계가 냉전반공주의라고 하는 협소한 이념적 틀을 기반으로 구성되었고, 그 결과 사회 경제적 구조를 기반으로 한 균열-핵심적으로는 노동과 자본이라는 계급갈등-이 정당을 통해 정치과정에 반영되지 못 한 채, 정치가 보수 엘리트들의 권력획득의 장으로 전락해 버렸다는 것이다. 그는 한국사회는 민주화운동을 통해 일정 정도 권위주의로부터의 체제 전화에 성공했지만, 제대로 대표되지 못한 사회의 균열은 지역감정으로 전화되어 민주주의의 퇴행을 가져왔으며, 재벌의 경영은 여전히 권위적으로 이루어지고, 사회 전체적으로 이전 시대 기득권의 헤게모니가 오히려 강화되었다고 말한다. 이는 한국이 아직 절차적 민주주의의 요건 조차도 제대로 갖추지 못하고 있음을 의미하며, 따라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것은 '합리적' 사회경제적 균열에 기반을 둔 정당이 조직되어 사회의 갈등을 폭넓게 반영하는 것이다. 요컨대, 정당정치의 발전과 이를 기반으로 한 국가위상의 강화가 최장집의 주장이다. 

 고세훈의 복지국가론은 최장집의 논의를 기반으로 하여 나올 수 있는 구체적인 대안적 성격을 갖고 있다. 최장집과 마찬가지로 고세훈은 신자유주의 세계화라고 하는 기반 위에서도 국가는 독립적인 변수로 기능할 수 있다고 강조하면서, 세계화를 나름의 비전을 가지고 수용하고, 이 과정에서 발생하는 사회적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강력한 국가의 건설을 주장한다. 이에 반해 사회투자국가론은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는데, 김대중 정부의 "생산적 복지"나 "노사정 협의회" 구성에서 볼 수 있듯이 한국에서 복지는 기술교육에 기반한 노동 유연화만으로는 달성될 수 없고, 정부의 적극적 노동시장 정책이 동반되어야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논의와 더불어 고세훈은 이해관계자 복지라는 모델을 제시한다.  유럽 사민주의 모델이 시장의 구조에는 큰 압력을 가하지 않은 채 국가의 민주화를 기반으로 하여 복지제도를 구축했는데, 신자유주의의 복지 위기담론에 맞서기 위해서는 시장의 민주화를 공세적으로 추구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기업을 그 이해관계자인 종업원들도 경영에 참여하는 체제로 개편하고, 시장을 시장 외부에 있는 사회의 이해관계자와 매개시켜 파악하는 것이 이해관계자 복지이다(...같다-_-;). 이를 위한 실천적 방안은 최장집의 주장과 거의 유사하다. 신자유주의 세계화로 인해 실질적으로 가장 큰 피해를 보는 노동자의 이익이 정당을 통해 정치에 폭 넓게 반영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고세훈의 글 중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부분은, 복지국가 발전에 대한 우파와 좌파의 접근을 분석한 것이었다. 복지국가의 발전에 대한 우파적 관점은, 복지란 경제가 발전하면서 발생한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자본의 힘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것이라는 것이다. 결국 복지를 가능케 하는 힘은 경제발전이기 때문에 경제발전은 근본적으로 우선권을 갖는다. 좌파적 관점은, 복지가 자본이 축적의 위기를 겪게 되자 이를 극복하기 위해 국가를 통해 마련된 장치라는 것으로, 근본적으로 자본 축적의 안정적 재생산을 가능케 하는 산물로서, 궁극적으로 자본주의에 봉사하여 혁명적 전화를 늦추는 장애물이 된다. 고세훈은 좌파와 우파의 접근이 그 지향은 다르더라도, 둘 모두 복지를 기능주의적으로 바라보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똑같다고 비판한다. 그러면서 이론적으로는 좌파가 복지정책을 매우 무관심하게 바라보았음에도 불구하고, 실질적으로는 복지정책을 가장 강력히 지지해 온 아이러니를 지적한다. 

 뜨끔하다. 복지를 위한 투쟁은 맑스주의에서 '경제투쟁'이라는 이름으로 늘 폄하되었고, 오직 그것이 정치적 이행을 위한 맹아적 투쟁이라는 조건-간단하게는 그러한 투쟁을 통해서 노동자들이 정치적으로 훈련되고 하나의 계급으로 형성될 수 있다는 사실, 그리고 그 투쟁 속에 혁명적 전화를 위한 요소들이 뒤섞여 발전할 수 있을 때-하에서 긍정되었다. 따라서 초점은 언제나 투쟁 그 자체가 아니라 언젠가 도래할 혁명에 맞추어져 있었고, 당연히 당면한 문제에 있어서 투쟁 이외에 사회주의가 노동자들에게 제공할 것은 많지 않았다. 그리고 이것은 아마도 일찍이 맑스주의의 문헌들을 통해 사고가 정향되었던 많은 사람들에게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생각은 아닐까? 감정적으로는 한없이 잘 되길 바라면서도, 막상 맑스주의적 사고의 틀에서는 달리 보태줄 것이 없는. 

 최장집은 한국의 운동세력과 노동운동을,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이념으로 인해 유효한 현실적 대안을 만들어내고 있지 못하다고 비판한다. 나는 그 사고들을 감히, '관념적'이고, '추상적'이라고 말할 생각도 없고, 최장집처럼 강력하게 '현실'과 '관념'의 세계를 구분할 생각도 없다. 하지만 분명히 맑스주의 정치가 대의제 민주주의라는 현실 속에서 당면한 문제에 '유효한' 비전을 제시해 오지 못한 것은 맞는 듯 하다. 맑스주의가 학생운동의 수준에서 광범위하게 보급되었던 한국의 경우에는 더욱 그러했고, 인정할 수 밖에 없다. 대의제 민주주의 속에서 맑스주의의 정치는 무엇이 되어야 하는 것일까? 



 화제를 돌려서, 두 글에서 가장 불편했던 부분은 대의제에 대한 지나친 신뢰와 더불어 거리의 정치에 대한 불신이다. 두 저자는 '합리적'이고, '보편적'인 사회의 갈등을 반영하는 정당체제가 설립되면 사회의 갈등은 민주주의라는 과정을 통해 조화롭게 표출되고 합의를 이뤄낼 것이라고, "과격한" 운동의 표출은 줄어들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결국 그들에게 있어서 합리적이고 보편적인 요구란 기존 대의제 정당체제가 반영할 수 있는 테두리에 국한되는 것이며, 이를 넘어서는 추구란 배제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특히 고세훈에게는 노동과 자본 문제를 제외한 영역의 문제제기는 비본질적인 것으로 강하게 배척 당한다. 묻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면, 자본주의 자체에 대한 문제제기는, 환경에 대한, 여성에 대한 문제제기는 대체 어떻게 이야기될 수 있는 것인가? 그들이 얘기하는 민주주의란 결국, 체제에 대한 근본적 비판은 수용할 수 없는 닫힌 체계가 아닌가? 최장집은 민주주의에는 수용해야만 할 "게임의 규칙"이 있다고 말한다. 물론, 그렇겠지. 

 이와 병행하여 나타나는 문제는 사회적 갈등을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범주로 환원하고, 이를 정당에 의해 대표될 수 있는 것으로 단순화 해 버린다는 것이다. 고세훈의 글을 보면  계급존재와 계급형성이라는 말을 통해, 사회경제적으로 존재한다고 상정되는 계급이라는 질료와 의식과 결합돼 실질적인 그것의 주체로의 형성이 구분되고 있다. 이러한 사고는 최장집에게도 나타난다. 어찌됐든 이처럼 계급구조가 객관적으로 존재하니만큼, 사회의 본원적 갈등은 계급을 기반으로 나타나는 경제영역의 갈등이다. 따라서 이들의 논의에는 노동의 정치화라는 대안 외에 다른 담론들에 대한 검토가 결여되어 있다. 정말로 노동 하나면 충분한가? 민주주의라는 바탕 위에서 오히려 환경과 여성이라는 담론이 기존 담론의 틀에 균열을 일으켜 전혀 새로운 갈등 상황들을 창출해 내지 않을까?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자유, 평등, 박애의 맑스적 역설

                                                                                  에티엔 발리바르 씨 
                                          (http://myhome.naver.net/skreds/images/Balibar(100x98)89.gif)

 
 발리바르에게는 맑스주의적 사유의 전통을 철학의 언어를 경유해 정리해 내는 정말로 뛰어난 재능이 있는 듯 하다. 전통적인 맑스주의자들처럼 기존의 철학적 전통과 대별되는 맑스의 주장을 진리인 양 서술하거나, '포스트 모던'하게 반전과 아이러니의 지점을 포착해 내는 데 치중하지 않는다. 발리바르의 서술 스타일은, 맑스의 주장들이 어떻게 새로운 것인지를 보여주는 데 있고, 기존의 지평을 넘어서는 그 새로운 것들이 그 자체 속에서 어떻게 갈등하고 있는지를 그려내는 것이다. 맑스의 전복적인 주장들은 한 편으론 마치 진리를 잡은 듯한 생생한 경험을 제공하면서도, 그 서술의 맥락에서 벗어나 사고할 때는 이내 여러 가지 모순들로 가득 찬 것으로 경험되고는 한다. 발리바르의 글에는 논리적 궁지(aporie)라는 표현이 많이 등장하는데, 이 표현을 통해 그는 모순적 경험들을 통일해 내기 보다는 열어둔 채로 놓아두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그는 맑스주의에 관하여 최소한 현존하는 최고의 교사라는 평가는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아래에 정리해 놓은 글은 1989년에 쓰인 <맑스라는 이름의 자코뱅?>이라는 짧은 글로, 19C 혁명의 표어였으며, 근대 정치에 그 이념적 지평을 제공하는 것인 자유, 평등, 박애와 맑스의 사유의 관계는 무엇인지, 맑스가 무엇을 새롭게 도입했으며, 그것이 그 개념들 속에 어떤 긴장을 불러일으키는 것인지를 설명하는 글이다. 읽은 것을 정리해 볼 요량으로 본문을 거의 긁은 것이라 거칠고 재미도 없지만, 어느 정도는 최근에 이글루에서 벌어지고 있는 논쟁-페미니즘에서 시작하여 이제 인권과 윤리의 문제로 나아간-의 맥락과도 닿아 있지 않나 싶다. 



 <맑스라는 이름의 자코뱅?>, 에티엔 발리바르

 발리바르는 프랑스 혁명을 역사적 단절의 순간으로 이해한다. 혁명은 그것을 "낳았던" 원인들의 축적을 그 효과들 속에서 넘어서는, 역사라는 직물의 단절이다. 이 단절이 제공한 사유와 가능성들의 개방이 닫힌 것은 19C 후반, 제국주의, "사회적 문제"의 제도화의 시작, 일반화된 학교교육 등이 도입되고 나서이다. 이 때가 되어서야 자유, 평등, 박애라는 표현은 안정되고 일의적인 의미를 소급적으로 부여받았다고 할 수 있다. 맑스는 아직 혁명이 열어 놓은 개방성, "단절의 칼날"위에서 사유하고 있다. 그 가능성 속에서 맑스에게(물론 승리할 부르주아들이 아닌 다른 혁명의 세력들에게도), 자유, 평등, 박애는 전적으로 다른 의미를 갖는다. 

  박애

 박애라는 논쟁적 표어의 채택은, 노동에 대한 권리(droit au travail)가 인간의 권리들과 헌법상의 원칙들에 끼어드는 것(그렇게 되면 그 형식적 안정성은 완전히 흔들리게 될 것이다. 최소한 소유권이라는 쟁점에 있어서도)을 "박애주의적" 시각에서 차단하기 위해서였다. (노동에 대한 권리가 불러 일으킨 쟁점에 대해서는 조앤 W. 스콧의 <페미니즘 위대한 역설>을 참조해 볼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19세기 프랑스 혁명의 전개와 더불어 그 속에서 여성의 권리라고 하는 개념이 어떻게 얽히는 지를 잘 보여주는 좋은 글이다.  이 책은 여성의 권리라고 하는, 층위의 다양성은 있겠지만, 지금 많은 사람들이 사고하는 데 별 어려움을 느끼지 않는 주제가, 얼마나 논쟁적인지를 잘 보여준다)
 박애는 또한 그것의 수행자로서 국가나 한 사회를 상정하는데, "만국의 프롤레타리아여 단결하라!"는 맑스의 구호는, 박애의 실천적 지평인 국가를 뛰어넘는 것이며, 소유라는 개념이 갖는 균열을 통해 국민이라는 하나의 정체성을 둘로 분할하는 혁명적 주체성을 정초한다. 여기서 인간의 인류애라고 하는 관념이 그 정치적 기능의 폭로 속에서 해체됨과 더불어 여전히 다른 층위에서 작동하고 있는 역설이 출현하고 있다.

  자유
 
 자유는 한 편으론, 특권계급을 쳐부수어 주권을 집단적으로 쟁취하고 그리하여 "시민"이 되는 "주체"들의 운동(능동적)이며, 다른 한 편으로는, 공리주의, 자유경쟁, 그리고 그 결과 노동력으로서의, "상품"으로서의 개인(수동적)이다. 맑스는 <자본>에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노동력의 판매와 구매가 그 한계 안에서 이루어지는 상품 유통 또는 교환의 영역은 사실 천부인권의 진정한 낙원이었다. 
     여기에서 지배하고 있는 것은 오로지 자유, 평등, 소유, 그리고 벤담이다. 

 
이 문장을 통해 맑스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인권의 법적 형식들(자유와 "형식상의" 평등)을 밑받침하는 이데올로기는 상품의 일반적 유통의 형식들 그 자체, 특히 그 나름으로 인간의 "노동"을 합리적으로 착취할 수 있는 상품으로 만들 수 있게 하는 형식들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 문장은 단순히 자유라고 하는 것을 이데올로기로 환원시키는 것을 목표로 하는 게 아니다. 임노동 착취가 억압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은 봉건적 군주, 주인은 아니다. 부르주아는 자본의 축적을 방해하는 봉건적 착취의 족쇄를 끊어 버렸으며, 바로 그 자리에 새로운 착취 관계를 집어 넣었다. 자유란, 한 편으로는 능동적이며 임노동 관계가 강요하는 불평등으로부터의 탈출을 의미할 수 있고, 한 편으로는 봉건적 관계로부터 해방되어 자유로운 상품이 '될' 권리를 의미한다.   


  평등 

 따라서 맑스의 눈에 '평등한 권리'란 실제적 불평등을 하나의 공통의 척도로, 형식적 평등으로 환원시키는 속성일 따름이며, 평등은 자신을 의식하고 있는 법적 이데올로기 바로 그것으로서의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의 핵심적 시니피앙이다. 이 맥락에서 대의제 민주주의 국가란 부르주아들이 자신들의 착취를 위해 피착취자인 노동자를 동원하는 장치에 다름 아니다.
 그러나 한 편으로, 맑스는 공산주의 사회로의 계기적 단계들을 규정하며, "평등 노동, 평등 임금", "능력에 따른 노동과 필요에 따른 분배"라는 용어를 사용하였으며, 엥엘스는 평등을 프롤레타리아적인 것과 부르주아적인 것으로 분할하였다. "프롤레타리아들의 평등에 대한 요구는 계급의 진정한 폐지를 그 내용으로 갖는다. 모든 평등의 요구는 필연적으로 부조리 속에서 죽어가게 된다."
이러한 모순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우선, 이것은 정치 투쟁으로서의 계급 투쟁은 정치의 보편적 언어(시민성의 언어) 속에서만 정식화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언어란 단순히 환상으로 환원될 수 없다. 다음으로 근대의 정치 속에서 맑스주의적 운동이 갖는 긴장을 형상화 한다고 할 수 있다.
한 편으로 평등의 요구가 계급의 폐지를 위한 집단적 투쟁이 아닌 형태로 나타난다면, 이는 계급투쟁의 현실을 은폐하는 것으로써 비난받는다. 그러나 다른 한 편으로 평등의 요구가 작업장에서의 착취에 반대하는 투쟁으로 축소된다면, 그것은 자본주의가 강요하는 개인의 상품으로의 환원을 수긍한다는 비난이 가능할 것이다. 이런 갈등은 맑스주의 정치의 역사에서 형태를 달리해서 계속 되풀이 되어 왔으며, 미결의 문제로 남아 있다. 마지막으로, 엥엘스의 인용문은 평등개념의 역설을 잘 보여준다. 한 편으로는 개인들의 동일화의 극단들이 있으며, 다른 한 편에는 그들의 차이화의 극단들이 있다. 



  어떤 의미에서, 맑스주의의 모든 것은 근대 정치에서 대두되었던 이 개념들의 역설적인 해석의 지평 속에서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맑스주의 뿐만이 아니라, 민주주의의 기획을 어떤 식으로든 이어나가고 있는 지금의 정치 현실에도 마찬가지다. 브레히트가 <임시야간숙소>에서 자선 행위를 씁쓸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은 박애의 정신에 대한 맑스주의적 사유의 결과물이지만, 항공회사에서 스튜어디스를 채용할 때 외모의 조건을 묻는 것이 정당한 일인가에 대한 공방이 일어나는 것은 자유와 평등이라고 하는 것이 지금의 정치 현실에서도 상이한 개념 속에서 기능하고 있음을 잘 보여준다. 그러므로 모순은 사실 도처에 널려 있다. 맑스는 그것을 특정한 방식으로 개방했을 뿐이다. 지금 권리들이 너무나 '쉽게' 운위된다면, 그것은 자신의 개념에 내재한 모순을 은폐할 수 있을 만큼 강력한 권력을 갖는 해석의 결과물일 뿐이다.  


 ( 에티엔 발리바르, 윤소영 엮음, <맑스라는 이름의 자코뱅?>, [루이 알튀세르 1918-1990], 민맥 1991)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괜찮은 SF- 에덴과 창공의 상투스

 자취를 시작하고 나서 만화방에 다니게 되었다. 예전엔 느끼지 못했었는데 만화방의 매력은, 푹신한 소파에 파묻혀서 아무 거나 머리에 떠 오르는 데로 뽑아 볼 수 있다는 데 있는 것 같다. 라면 한 그릇도 덤으로 들어가면 금상첨화. 새로운 즐거움을 자축하는 의미로 어제 만화방에서 재/발견한 매력적인 만화들에 대해서 몇 자 적어 보자.



                                        마음에 드는 이미지 찾기가 참 힘들다. 출처는 (http://blog.naver.com/holyslayer

 에덴 1-15
 
 오랜 만에 다시 읽었다. 1권을 처음 손에 쥐었던 것이 99년 무렵이었던 것 같으니 근 8년 만에 다시 보는 셈이다. -물론 그 동안 나오던 신간은 꼬박꼬박 챙겨 보고 있었다- 8년 전에 그랬던 것처럼, 여전히 멋진 프롤로그에 가슴이 뛴다. 싸이버 펑크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근미래 세계에서, 바이러스로 인해 모든 인간이 죽어버린 섬에서 살아가는 소년과 소녀. 이 섬의 소년과 소녀는 인류가 살아남아 있는 세계로 나가고, 본 편은 이들의 아들을 주인공으로 하여 전개된다. 


 인류 최초의 낙원에서 소년과 소녀는 살인을 통해 세계로 나아가고, 이들의 아이들은 잔인한 세계에서 삶을 헤쳐 나간다. 낙원에서 쫓겨난 인간이라는 모티브를 가지고, 작가는 인간의 삶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물음을 던진다. 하지만 어떤 해답을 설정하고 그에 맞춘 이야기를 전개하기 보다는 잘 짜여진 세계를 만들어 놓고 그 세계를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을 보여주는 방식을 택한다. 이 점에서 엔도 히로키는 정말로 창의적인 크리에이터의 면모를 보여주는데, 그는 계급, 인종, 민족, 종교 간의 갈등과 이를 이용하는 강대국들의 이권다툼 등 현재 사회 속에 존재하고 있는 비극에 싸이버 펑크적인 의상을 탁월하게 입혀 낸다. SF 임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현실감이 있는 이 세계가 에덴이 갖는 최대의 강점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그려진 세계는 철저하게 비극적이지만, 동시에 바로 그 철저함이 이 세계를 설득력 있게 만든다. 이는 인간에 대한 온갖 만행이 '현실적으로' 그려지는 세계에서, 인물들이 하는 경험에 공감할 수 있게 해준다.  그래서 부잣집 도련님으로 처음에는 그저 착하기만 했던 주인공이 이 세계에 말 그대로 '적응'해 가면서 던지는 질문들은 참 진부하지만 깊은 무게로 다가 온다. - '왜 그저 행복해 질 수는 없는지' '세계 모든 사람들이 그냥 행복할 수는 없는 건지' 


 물론 엔도 히로키는 지금의 세계에 그저 사이버 펑크를 덧붙인 것 만은 아닌데, 작가는 초기에 세계를 위기에 처하게 했던 '클로저 바이러스'를 삶에 대한 질문을 풀기 위한 나름의 실마리로써 제시하고 있다. 아직 만화가 진행 중이라 어떻게 진행될 지는 잘 모르겠지만, 한 가지 불안한 것은 이 클로저 바이러스라는 게, 통합을 통한 갈등의 해소, 통합으로써의 진화라고 하는 굉장히 지겨운 모티브를 제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다행히 엔도 히로키는 재밌는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능력이 있고, 그래서 이렇게 커다란 주제를 들이대는 와중에도 결코 전개의 긴박감을 줄이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에반게리온 이래 너무나 진부한 모티브를 어떻게 풀어나갈지 앞으로도 불안한 마음으로 지켜보게 될 것 같다. 엔도 히로키는 1권 날개에 "에반게리온을 봤을 때 에반게리온이 내가 하고 싶은 얘기를 모두 해 버렸다고 생각했다"라고 적고 있는데 그는 혹시 아직도 그 뒤를 쫓고 있는 것일까?



 여담. 엔도 히로키가 에덴을 그리기 시작한 게 거의 데뷔 때 일이라고 하는데, 대체 어떻게 그렇게 일찍 이런 원숙한 스타일을 완성해 냈는지 정말 놀랍기 그지 없다. 1권과 15권 사이에 그림체의 차이가 거의 없다니.









 창공의 상투스 1-4

 역시 꽤 괜찮은 SF. 약간의 미래에 우주에서 온 뭔가의 영향으로 인해 변화해 버린 바다를 탐험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SF 라고 해봐야 무늬 뿐인 액션 만화가 많은 상황에서 꽤 괜찮은 정통파라고 생각한다. 에덴이나 문 라이트 마일과 같은 만화들이 현실 세계의 갈등을 SF 세계에 반영하는 데 비교적 충실하다면, 창공의 상투스는 이런 반영보다는 '모험심'이라는 것에 더 큰 비중을 두고 있다. 그렇다고 이 만화에서 현실적인 알력을 표현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알력들을 그리는 데 힘을 쏟기 보다는, 세계의 복잡한 이해 갈등과는 상관 없이 미지의 것에 매료되어 물불 안 가리고 뛰어드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루는 데 주력하는 것이다. 전통적인 '모험심'이라는 테마는 비록 현실의 두터운 벽 앞에 가려져 낭만적으로 보이지는 않지만, 진지하게 다뤄진다.

 그리고 창공의 상투스의 한 가지 큰 미덕은, 이렇게 그릴 것을 정해 놓고 그것에 전적으로 매진한다는 것이다. 창공의 상투스는 전개가 비교적 빠른 편인데, 이것은 배경 세계를 설명하거나 캐릭터의 디테일을 묘사하는 데 시간을 뺏기지 않기 때문이다. 특히 요즘 많은 만화들이 서사보다는 캐릭터 포장에 더 신경을 많이 쓰고 있는 상황에서 이렇게 뚝심 있는 전개는 무척 매력적이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