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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은 서양 철학의 수입에서 한국보다 훨씬 앞서 있었다. 서점의 철학 코너를 놀라워 하면서 돌아 보다가 집어 든 책은 05년 런던대학에서 열린 연속 강연회 의 원고를 묶어 출판한 책, <<도래할 데리다>> 였다. 지젝, 바디우, 발리바르, 스피박 등 쟁쟁한 사람들의 원고로 가득한 이 책은 놀랍게도 영국보다 약 열흘 먼저 발매되었다. 세계에서 가장 빠르지 않았을까 싶은데, 번역의 질이야 내가 평가할 수 있는 것이 아니지만, 그 속도에는 정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비도 오고, 돌아다니는 일에도 질려서 호텔에 틀어 박혀 발리바르의 글을 한글로 옮겨 가며 읽었는데, 헤겔과 구조주의 언어학과 데리다의 관계를 다룬 흥미로운 글이었다(라고, 말하고 싶지만- 일본어에도 철학 개념에도 서툴기 때문에 그저 아리송할 뿐이었다). 일본에서 얼추 다 끝내서 조금 손본 다음 블로그에 올리려고 했으나, 같은 책의 자크 랑시에르의 글이 너무너무 재밌어서 랑시에르의 글을 먼저 옮기기로 마음을 고쳐 먹었다.
랑시에르의 글은 민주주의를 둘러싼 다양한, 그리고 상충되는 입장들이 민주주의의 개념 속에 이미 들어 있음을 논증하고 있다. 민주주의에 대한 물음을 통해서 그의 글은, 한국에 빗대어 말하자면, 박정희의 '한국식 민주주의'가 성립 가능성, 그리고 민주주의에 대한 혁명적 요구(주류 언론이 언제나 망각케 하려는 것이지만, 한국의 민주주의는 혁명에 대한 열망과 더불어, 그리고 그것을 통해서 실현되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요즘의 '과잉 민주주의'에 대한 '공허한' 걱정이나 법의 보편적 지배에 대한 긍정 속에서의 자유의 추구라는 역설 까지를 아우르고 있다(마지막 항목을 쓰면서 이글루스에 쓴 아프가니스탄 피랍 사건에 대한글에, '헌법이 설립하는 인권'을 얘기하며 날 선 리플을 달았던 사람을 떠올렸다. 의미심장하게도 그 사람의 아이디는 하루키의 소설에서 차용된 것이었고, 나는 하루키의 소설이 어떤 자유의 형식을 대표하고 있는 것은 아닐지 생각하고 있다).
내게 랑시에르의 글이 흥미로웠던 것은, 내가 저 위에 열거된 그 어느 것인가에 머물러 왔으며, 저 모두가 혼재된 상태에서 사고를 해 왔기 때문이다. 맑스주의에 대한 시덥잖은 농담 -20대에 맑스주의가 아닌 사람은 바보지만, 20대가 지나서도 맑스주의자인 사람은 더 바보다(이게 맞던가? 그보다 이게 농담이긴 한가??)-은 그 나름대로 핵심을 찔러서, 이 뒤엉킴을 겪는 것이 나 혼자만은 아님을 말해주는 것 같다. 농담이 말하고 있는 것은 맑스주의자가 되고, 안 되고가 결국 민주주의 속에서의 '사고思考'의 문제, 즉 사고가 곤궁에 부딪혔느냐 그렇지 않느냐의 문제에 있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20대가 지나서는 사고의 곤궁이 아니라 생활의 곤궁의 문제일 수도 있겠지만...
좋은 글에 들어 가기 전에 사언이 너무 많았다. 비록 질은 썩 좋지는 않겠지만 내 번역이 이래저래 마음이 심란하고, 나처럼 조금만 생각하려고 하면 머리가 아픈 사람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됐으면 좋겠다. 번역은 불가피한 경우가 아니라면 일본어 문형 그대로 옮길 것이며(일본어 번역은 꽤 직역에 가까운 듯), 내가 원 저자가 다루는 철학 용어들은 물론이고, 그것에 대한 일본쪽 수입의 맥락도 잘 모르는 탓에(흑흑) 어지간하면 손 안 대고 그대로 옮기기로 했다. 부득이한 경우에는 명기하여 설명을 달 생각이고, 일본어판에서 역자가 첨부한 번역은 필요하다고 판단되면 명기하여 옮길 것이다. 번역은 딱히 계획은 없으니 시간이 나는대로 슬금슬금- 기회가 닿는대로 영어판이나 독어판(있으면)을 구해 수정할 생각이지만, 이곳 생활이 맘 먹은 대로 되질 않아서 당분간 어려울 것 같다. 어쨌든 시작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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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는 무언가를 의미하는가? Does democracy mean something?
자크 랑시에르 Jacques Ranciere
나는 데리다에게 바쳐진 연속강연에의 나의 개입에 대한 예비적 언명에서부터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된다. 나는 데리다의 제자였거나 그의 사상의 전문가였던 적이 한 번도 없다. 그가 나의 교사였던 때-아주 옛날의 일이다-부터, 나에게는 그와 철학적인 문제를 논할 기회가 없었다. 따라서 내가 그에게 표현할 경의는 그의 저작에 대한 주석이 아니다. 그를 기리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90년대에 점점 그의 사고의 전경을 점하게 된 개념과 문제-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무엇이 의미되고 있는가-를 다루는 나 자신의 방법을 제시하는 것이다.
'민주주의의 패러독스'란 무엇인가
데리다는 <<우애의 정치학The politics of friendship>>에서, 페리클레스의 것으로 여겨지고, 플라톤의 <<메넥세노스>>에서 부연되어 있는 잘 알려진 명제-'아테나이 인의 통치는, 이름은 민주주의이지만, 현실에서는 귀족제, 즉 다수자의 찬성을 얻은 최고로 뛰어난 자의 통치이다'(*주1)-에 주석을 다는 것에 의해, 이 쟁점을 전개한다. 데리다는 이 언명의 기묘함을 지적한다.(*주2) '민주주의적' 통치라는 수사 그 자체가, 이 형태의 통치에 두 개의 대립하는 이름이 부여될 수 있음을 보여 주고 있다. 그것은 민주주의라고 불리지만, 그러나 사실상 귀족제이다. 이 '그러나'를, 이름과 사물 사이의 이 이접離接을, 우리들은 어떻게 생각할 수 있을까. 우리들은 그것을 수사修辭 상의, 또는 통치를 위한 허위라고 보거나, 이름과 '사물' 사이의 차이에 의해, 무언가 좀 더 근본적인 것이, 민주주의를 다른 어떤 형태의 통치와도 다른 무언가로 만드는 내적인 차이가 가리켜지고 있다고 상정하거나, 둘 중 하나이다. 이 물음은, 데리다에 의한 민주주의의 아포리아적 구조의 탐구와, 내가 오히려 민주주의의 패러독스라고 부르기를 선호하는 것에 대한 나 자신의 탐구에 공통의 근거를 명확하게 할 수 있는 것이다.
내가 '민주주의의 패러독스'라는 것으로 무엇을 말하고 싶은가를 명료하게 하기 위해, 민주주의의 이름과 현실을 다루는 현대의 두 가지 논쟁에서부터 시작하기로 하자. 첫 번째 논쟁은 중동에 민주주의를 전파하기 위한 미국의 군사작전에 관한 중요한 불일치를 품고 있다. 이라크의 선거와 레바논에서 일어난 반 시리아 저항운동 직후, <<이코노미스트>> 지의 표지에 '중동에서 민주주의가 시작'이라는 말이 춤을 췄다. 민주주의의 시작에 대한 자기-만족은, 이름과 현실 사이의 차이에 대한 두 갈래의 논증구조- '.....지만, 그래도 민주주의는 시작된다' 또는 '민주주의는 시작되지만, 그러나 .....'-에 따라 정식화된 것이다.
'.....지만, 그래도 민주주의는 시작된다'는 어떤 이상주의자들의 논의였다-그들에게 민주주의는 인민의 자기-통치이다. 이것은 민주주의를 힘에 의해 다른 민족에게 가져다 주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환언하면, 우리들은 다음과 같이 주장할 수 있다. 즉, 민주주의에 대한 실용주의적인pragmatic 견해를 취하여, 민주주의는 '인민의 권력'이라고 하는 유토피아적인 견해를 치워 버린다면, '민주주의는 시작된다'라고. 두 번째 논의는, 민주주의는 시작되지만, 그러나 민주주의를 가져다 주는 것은 법의 지배, 자유로운 선거 등을 가져다 주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라는 것이었다. 그것은 우선 혼란을, 민주주의적 생활의 혼돈을 가져다 주는 것을 의미한다. 도널드 럼스펠드가 사담이 실각한 후 일어난 약탈에 관해 말한 것처럼-우리들은 이라크 사람들에게 자유를 가져다 준 것이며, 자유라는 것은 그런 종류의 일을 행할 가능성 또한 의미하는 것이다.
그래도 론과 그러나 론은 요컨대 일관된 논리인 셈이다. 그 논리는 다음과 같은 것이다. 민주주의는 자기-통치의 목가 등이 아니기 때문에, 민주주의는 혼란에 다다를 수 있기 때문에, 민주주의는 초대국의 병기에 의해 외부에서 야기되는 것이 가능하며, 또 아마도 야기되지 않으면 안 된다. '초대국super power(=초권력)'은 절대적인 군사적 우위를 가진 나라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또한 민주주의에 의한 혼란을 통제할 수 있는 권력을 의미하는 것이다.
여기서 민주주의를 넓히기 위한 군사작전을 지지하는 논의는, 우리들에게 민주주의를 전파하는 것에 대한, 지금만큼 열광적이지는 않았던 훨씬 오래된 논의를 떠올리게 한다. 실제로, 그런 논의는 30년 정도 전 삼극위원회(*일역주1)에서 행해진, 민주주의의 '위기'에 대한 두 개의 주요한 논의를 끊임 없이 바꿔 말하고 있는 것이다.
삼극위원회에 따르면 민주주의의 몽상가들이 민주주의를 인민의 자기-통치와 동일시함에도 불구하고, 민주주의는 시작된다. 이런 몽상가들은 삼극위원회에서 비난된 '가치지향의 지식인'과 같은 종류의 등장인물이다. '가치지향의 지식인'은 '정책지향의 지식인'의 실용주의pragmatism에 대립하는 '적대적문화'를 조장하고 지도자와 권위에 도전하는 과잉의 민주주의적 활동을 촉진하고 있다고 비난받은 것이다.
민주주의는 시작되지만, 그러나 그것과 함께 혼란도 시작된다. 바그다드에서 일어난 약탈에 대해 도날드 럼스펠드가 한 농담은 30년 전에 사무엘 헌팅턴이 행한 논의를 그대로 반복한 것처럼 들린다. 헌팅턴에 의하면 민주주의는 정부에 압력을 가해 권위의 토대를 무너뜨리고, 개인이나 집단을 자기-지배와 연결된 규율과 희생의 필요성에 저항하게 하는, 그런 요구의 증대에 다다르는 것이다.
민주주의를 새로운 영토로 넓히기 위한 군사작전이, 현재 '민주주의'의 이름 아래서 이해되고 있는 패러독스를 전경화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좋은 '민주주의적 통치'라고 하는 것은 좋은 정책을 위협하는 과잉을 통제할 수 있는 통치형식을 의미한다. 이 과잉은 이름 붙여질 수 있는 것으로써, 그 이름이 민주주의이다. <<민주주의의 통치능력>>(*주3) 에 기술되어 있듯이 민주주의적 통치를 위협하는 것은 민주주의적 생활 이외의 그 무엇도 아닌 것이다. 이 위협은 완전한 이중 구속double bind으로써 나타난다. 한편, 민주주의적 생활은 인민에 의한 '자기-통치'라는 이상주의적 관점의 실시를 의미한다. 그것은, 좋은 정책의 원리와 절차, 권위, 과학적 전문지식, 실용적인pragmatic 경험을 침식하는 정치활동의 과잉을 동반한다. 그 때문에, 좋은 민주주의는 정치적 과잉의 억제를 의미할 것이다. 하지만 이 정치활동의 억제는 요망과 요구를 증대시켜, 정치권위와 시민으로서의 행동의 토대를 무너뜨리는, '사적생활' 또는 '행복의 추구'에의 권력부여에 다다른다. 그 결과로서, '좋은 민주주의'란, 민주주의적 생활의 본질에 내재한 정치에의 참가와 이기적인 행동이라는 이중의 과잉을 순치할 수 있는 통치형식을 의미한다. 현대의 '민주주의의 패러독스'를 다음과 같이 기술하는 것이 가능할 것이다. 즉, 사회적 그리고 정치적인 생활형식으로서의 민주주의는 통치형식으로서의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것이며, 후자에 의해 억압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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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Plato, Menexenus, 238c-238d
주2) Jacques Derrida, Polittics of Friendship (London: Verso, 1997), p93-113
일역주1) 삼극위원회: 1973년 10월에 미국, 일본, 유럽 세 지역의 민간조직으로서 발족. 상호의존의 심화라는 국제정세를 배경으로, 이해관계의 조정에 기울기 쉬운 정부간 관계를 보완하고, 더 넓은 시야에서 국제사회의 안정과 발전에 기여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다. 75년에 도쿄와 교토에서 열린 연차총회에서는 중동평화 등과 함께 민주주의의 위기가 논의되었다. 본문에서 나오는 <<민주주의의 통치능력>>은 그 때 제출된 문서이며, 사무엘 헌팅턴, 미셸 크로졔, 죠지 와타누키 삼인이 각각 미국, 유럽, 일본의 민주주의 상황(정권담당자가 피치자의 요구에 얼마나 응하는 것이 가능하며, 또 피치자에게 얼만큼 정부의 권위와 정통성을 인정하게 하는 것이 가능한가)에 대해서 보고했다.
주3) Michel Crozier, Samuel P. Huntington, Joji Watanuki, The Crisis of Democracy - Trilateral Commission Task Force Report n. 8(New York: New York University Press, 1975).
마르크스가 부르주아 사회의 토대에 자본주의 생산양식이 존재함을 분석한 이래 좌파적인 비판의 특징은 현상을 그 사회적-물적 관계 속에서 파악하는 데 있다. 파시즘의 광기는, 인간의 내면의 어두운 욕망에서 기인한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 전개의 한 양태이며, 여자화장실의 몰래카메라는 그저 한 남자의 정신이상의 문제가 아니라 남성지배사회의 결과물이라는 것이다. 구조에 대한 이러한 강조는 사회적 문제를 신비화하거나 개인화 하려는 경향에 맞서서 그것을 정치화하는 데 기여하지만 인간의 삶이 사회 환경에 의해서 결정된다거나 나아가 인간의 이성과 자유의지 역시 기표의 규칙에 따를 뿐이라는 인식은, 일어난 일들에 대해 책임을 묻는 것을 곤란하게 만든다. 어찌됐든 도덕적 책임이란 것은 자유에 의해서 일어난 일에만 지울 수 있다고 생각되고 있으니. '원인'이 무엇이었든지 간에 독일의 전범들은 심판을 받았고, 도촬을 한 사람도 책임을 져야만 한다. 결국, 윤리에 대한 요청이 존재하는 한 사라진 주체든. 변화된 주체든, 주체에 대한 물음은 제기될 수 밖에 없다. <윤리21>에서 고진은 칸트를 빌려와 이 문제를 풀어나간다.
칸트에게 있어서 자유란 이율배반적인 것이다. 한 편으로 세계의 모든 것들은 어떤 인과적인 질서 속에서 존재하고 있으며, 다른 한 편으로는 그 인과질서의 계열에서 벗어난 자유가 존재한다. 그리고 칸트에게 있어서 경험적 현실 속에서 일어난 모든 일들은 법칙을 따른 행위, 즉 자유로운 행위가 아니다. 지적인 욕구를 충족시키는 행위나 선행에 이르기까지, 단순히 물리적인 외적 현실 뿐만 아니라 내밀한 욕망의 층위에서까지 인과질서는 물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자유가 존재할 수 없는 이런 곤궁에 대한 칸트의 해답은 역설적인 것인데, 그것은 인간은 오직 의무를, 그것이 의무이기 때문에 따르는 한에서만 자유로울 수 있다는 것이다. 고진은 이 지점에서 칸트의 도덕법칙을 '자유로워지라'는 명령으로 해석하면서 개입한다. 그렇게 되면 그 의무의 준수에 대한 요구로 인해 얻어지는 자유가 역설적인 것이 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율배반적 세계 속에서 '자유로워지라'는 명령을 따를 수 있는 가능성을 고진은 칸트가 미적판단의 특징을 '무관심'에서 찾았다는 데서 끌어내고 있는데, 미적판단을 함에 있어서 진리나 도덕에 대한 판단이 배제되는 것처럼 도덕에 대한 판단에 있어서는 진리나 아름다움에 대한 판단을 '괄호'쳐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상태에서 마치 자유로웠던 것처럼 판단할 것이 요구된다. 이러한 입장에서 스스로 자유로운 주체이며 따라서 타자를 자유로운 주체로 대하는 행위란 무엇인가가 도출된다. 칸트는 일반적인 사고와는 다르게 공동체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것을 이성의 사적사용이라고 하였으며, 주체로서 개인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것을 이성의 공적사용이라고 하였는데, 왜냐하면 특정한 사회적 관계에 의해 영향받지 않고, 마치 무제약적 상태에서처럼 보편적인 행위를 하는 것이 칸트의 사고에서 주체의 자유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고진에게 있어 칸트의 윤리는 단순한 개인의 의무를 다루는 윤리를 벗어나 사회의 구조와 관계까지 사유하는 것으로 확대된다.
마치 아무런 제약이 없었던 것처럼 스스로에 대해, 그리고 타자에 대해서 판단하라는 것은 지금 자신이 존재하는 세계의 모든 영역과 부문에 있어서 나의 책임이 인정된다는 것이고, 따라서 윤리적 행위란 그것에 대해 책임지고 그것을 바꿔나가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윤리21>에서 고진이 제기한 칸트론은 다음 두 가지를 축으로 하고 있다. 하나는 칸트의 정언명령에 대한 해석이며, 다른 하나는 '괄호론'이라고 부를만한 것으로 칸트에게 있어서 갈등적인 세 개의 비판 영역을 상황에 따라 각각 독립적인 것으로 바라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고진은 "'자유로워져라'는 명령에 따르는 것은 '자유다'는 것이니까 특별히 모순이 발생하지 않는다'고 쓰고 있다. 하지만 '자유로워지라'는 명령은 고진이 다른 맥락에서 거론한 이중구속의 대표적인 상황을 의미하는 것은 아닌가? 명령에 따른 자유란 진정한 자유가 아니며, 명령을 따르지 않는 것은 타율을 택하는 것이므로, 그 명령은 따를 수도 따르지 않을 수도 없는 것이다. 따라서 그러한 명령 이전에 해명되어야 하는 것은 자유란 무엇인가이다. 법칙과의 관계에서 자유란 법칙에 선행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법칙 이후에 존재하는 것이며, 한 편 자유는 초월적 이념으로써 실천이성의 요청의 대상이기도 하다. 한 편으로는 사실로써 존재하고, 한 편으로는 요청의 대상인 자유의 역설적 위상을 고진은 '괄호'를 통해 해소하려는 듯이 보인다. 그러나 이것이 과연 칸트에 대한 전통적 해석을 떠받치는 현상계와 예지계의 구분과 얼마나 다른 것인지 의문이 든다. 결국 예지계라는 것은 현상계를 괄호치고서 논의되는 것에 다름 아니지 않은가? 그렇다면 고진의 칸트는 공허한 형식주의자인 칸트나 인간의 선을 향한 의지를 요청했을 뿐인 허약한 칸트와 어떻게 다르다고 할 수 있을까? 고진은 특정한 판단을 할 때 괄호를 하거나 푸는 것은 특정한 사회적 문법에 의한 명령일 따름이라고 쓰면서, 괄호를 푸는 것의 중요성도 동시에 강조했다. 이 때 문제는 괄호의 힘을 빌려서만 존재할 수 있는 자유가 괄호 없는 세계, 즉 취미 판단과 진리 판단이 더불어 존재하는 세계에서 무엇일 수 있는가에 있다. 결국 지금 구조와 주체의 갈등이라는 곤궁 속에서 칸트가 다시 불려지고 있는 것은 구조 속에서 주체가 어떻게 존재하는지에 대해 탐구하기 위함이지, 구조 속에서 주체가 어떻게 존재하기를 원해야 하는지에 답을 하기 위해서는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고진이 자신의 정치적 실천항으로써 끌어낸 생산자 협동조합의 모델은 칸트가 아니라 마르크스 또는 사회주의 운동의 전통에서 유인할 수 밖에 없다. 고진의 논의가 매끄럽게 이어지지 않는다고 느낀 것은 특히 이 부분에서였다. 주체와 마찬가지로, 고진이 풀었다 쳤다 하는 괄호들 속에서 생산자 협동조합이라는 세계 모델의 실재적/정치적 위상은 극히 불분명하게 여겨지기 때문이다. 칸트에게 가해진 종래 마르크스주의의 비판은 칸트가 예지계에서의 자유만을 인정할 뿐이고, 그래서 현실에서의 변혁을 불가능한 것으로 만들었다는 데에 있다. 고진은 현실에서의 변혁을 칸트윤리학의 실천적 요청으로써 자리매김하고 있기는 하지만 칸트 철학 내에서 '실천적 요청'이라고 하는 것은 곧 현상계에서의 법칙적 불가능성에 다름아닌 이상, 그 역시 이에 대해서 대답을 해야 할 것이다.
<윤리21>은 이론적인 것을 목표로 했다기 보다는 고진이 자신의 정치를 이해시키기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설명을 하고 있다는 것이 맞을 것이다. 그러니 고진이 칸트로 설명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이상만을 그려낸다고 하는 말은 어쩌면 그저 동어반복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트랜스크리틱>을 읽어갈 표지는 세워 둔 셈이니, 나같은 얼치기가 고진의 글에 이러쿵저러쿵 토를 단 무모함이 의미없는 일은 아니게 되기를.
덧. 이미지가 일본판인 이유는 그저 한국판 표지가 마음에 안 들었기 때문이다ㅎㅎ
모두 내가 과문한 탓이겠지만, 현재 작품을 발표하고 있는 작가들 중에서 나에게 중요한 사람은 쿳시와 옐리넥 뿐이다. 스타일은 무척 다르지만, 이 둘은 비슷한 문제의 언저리를 맴돌고 있다. 그들이 문제삼는 것은 '인간'이라는 관념이다. 쿳시가 백인 화자와 침묵하는/할 수밖에 없는 식민지 인들을 대립시킬 때, 그리고 옐리네크가 인물에게서 개성을 박탈하고 그 자리에 삶의 그로테스크한 전형들을 위치시킬 때, 인간이라는 관념은 분열되고 해체되어 버린다. 그리고 이는 동시에 지극히 정치적인 문제이기도 하다. 결국 인간의 문제는 사회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쿳시의 언어가 차분하고 조용한 것과는 너무나 대조적으로 그의 소설에 등장하는 서양인들은 비대한 자의식을 가지고 수많은 언어들을 쏟아낸다. 하지만 그 언어들은 현실에 대한 초라한 묘사와 타자의 침묵 앞에서 언제나 실패하고-언어들은 왜곡되거나, 모순되거나, 받아들여지지 않고, 심지어 귀에 전달되었는지, 그저 시끄러운 소리의 울림일 뿐이었는지도 확인할 길이 없다-, 그렇게 해서 그 스스로의 한계를 폭로한다. 자의식이 비대해야만 하는 이유는 쿳시 자신이 예민한 지식인이기 때문이자 동시에 세상을 꿰뚫어 보는 그 데카르트적 이성이 비대하면 비대할 수록 그것이 무너져 내리는 순간 현실의 많은 것들이 같이 무너져 내리기 때문이다. 리얼리즘으로 아파르트헤이트를 비판하며 노벨상을 수상한 남아공의 작가 나딘 고디머는 쿳시의 소설이 관념적이라고 비판했지만, 쿳시 역시 진정한 저항작가라고 할 수 있다. 그의 글은 세계 그 자체의 붕괴를 겨냥할 만큼 급진적이기 때문이다. 또는 타자를 존재하게 하기 위해서 세계의 붕괴까지 감수하기 때문이다. 그는 결코 피해자의 입장을 다루지 않음으로써 독자에게 도망칠 구석을 주지 않는다. 대신에 독자를 분열하는 자의식을 가진 가해자의 위치에 서게 만들고, 그리하여 그 안정된 의식 세계 바깥에 억압받는, 즉 내가 억압하는 타자가 있음을 깨닫게 만든다. 물론 이 때의 타자는 리얼리즘이 '그려내는' 타자가 아니다. 쿳시의 타자는 서술 불가능한 타자, 오직 거기에 있음만을 말할 수 있는 타자이며, 서양인의-그리고 독자의- 자의식이 스스로 모순에 부딪친다는 사실만이 존재를 증명할 수 있는 타자, 즉 없기 때문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타자이다.
반면에 옐리네크는 너무 많이 말한다. 심지어 소설의 주인공들에게는 단 한 마디도 할 기회를 주지 않은 채(그녀의 소설에는 따옴표를 쓴 대사나 심리의 인용이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작가가 지독하고 끔찍하리만치 냉소적인 언어를 쏟아 낸다. 하지만 그녀 역시 쿳시와 마찬가지로 세계를 성실하게 재현하는 일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다. 그녀의 문장은 과장되고 위악적인 표현들과 다른 곳에서 따온 패러디로 가득한데, 이 모든 것들은 그저 어떻게 하면 세계를 비웃을 수 있을까에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는 듯 하다. 아무런 맥락 없이 불쑥불쑥 솟아 나오는 그녀의 문장들은 일반적인 서사의 규범을 따르고 있지는 않지만, 일반적인 서사가 결코 표현하지 못하는 것을 표현해 낸다. 소설의 서사는 한 인물의 언행과 심리를 표현할 수 있지만 이와 동시에 그 인물의 사회경제적 배경과 자기도 눈치 채지 못하는 내밀한 욕망과 이를 포장하는 사회의 이데올로기를 표현하지는 못한다. 하지만 화자가 사건을 전달한다는 소설의 본령에 어쩌면 가장 가까운 방식으로 글을 쓰는 옐리네크는 사회학자 같은 시선으로 이 모든 것을 포착해 낸다. 어쩌면 진부하다고 할 수 있을 옐리네크의 주제들과 지루할 수 있는 이런 서술 방식을 이채롭게 만드는 것은 그녀의 주저하지 않는 냉혹함이다.
그녀는 실험을 하는 과학자처럼 환경과 인물들을 다룬다. 인물들에 대한 조금의 연민도 보이지 않고, 그들이 사회 속에서 어떻게 기능하고 있는지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 그리하여 인물들이 한없이 초라해져 자신의 삶을 조율하는 이데올로기에 관통당한 존재일 뿐이라는 사실이 드러나는 대신에 사회와 사회의 이데올로기는 더 분명하게 그 존재를 드러낸다. 이런 면에서 그녀의 작품에 등장하는 인간들은 모두 어떤 전형들라고 할 수 있는데, 이점에 있어서 역설적으로 그녀의 소설을 루카치의 요구에 부합하는 훌륭한 리얼리즘 소설이라 평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내쫓긴 아이들> 역시 이런 옐리네크의 특징을 잘 보여 준다. 이 이야기는 삶으로부터 반란을 꾀하는 4명의 청소년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 몰락한 전 나치 장교의 집안에서 태어나 실존주의와 예술에 심취한 쌍둥이 라이너와 안나, 풍요로운 가정에서 태어나 아무 것도 부족하지 않은 소피, 사회주의 투사였던 노동자의 아들이지만 상층 계급으로의 진입만을 바라는 한스, 이 넷은 함께 범죄를 저지르는 갱을 구성한다. 그리고 '너무 일찍 어른이 되어 버린 아이들'에 대한 모든 이야기가 그러하듯이 이야기는 파국으로 치닫는다. 하지만 옐리네크의 다른 글들 처럼 이 소설에서도 주목받아야 할 것은 자극적인 플롯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작가의 시선 아래서 등장인물들의 행동 하나하나, 생각 하나하나가 어떤 의미를 부여받는가이다. 아이들의 삶을 냉소적으로 바라보는 그녀의 시선 아래 아이들을 가르는 지적, 물적 현실의 차이와 이를 포장하는 이데올로기가 폭로된다. 따라서 독자가 인물들에게 연민을 느끼게 하지 않는 서술은 오히려 옐리네크의 윤리적 실천이라 할 수 있다. 대신에 그녀는 브레히트가 그러했듯이, 왜 현실이 그렇게 작동하는지를 똑똑히 보라고 요구하는 것이다. 브레히트처럼 현실의 변화에 대해서 낙관하기 힘들어진 오늘날, 그에 걸맞는 방식으로.
브레히트는 실현될 공산주의를 바라보면서, 이데올로기의 외부를 꿈꿀 수 있었다. 하지만 91년에 오스트리아 공산당을 탈당한 옐리네크에게 현실은 그렇게 밝지가 않았다. 그런 상황에서 그녀가 한 선택은 전통적인 이데올로기 비판의 문법을 극단에 이를 때까지 밀어부치는 것이었다. 비판의 규범조차 무시하고 모든 가치에 대해 조소와 위악적인 제스처로 일관하는 것은, 이데올로기에 순순히 붙들리지 않고, 어떻게든 그것을 파괴하려고 하는 철저한 투쟁이라 평할 만하다. 그리고 옐리네크의 이 용감한 선택은 정치적으로 충분히 그 성과를 거둬내고 있다. 많은 보수주의자들이 그녀의 소설에 충격을 받고, 악랄한 비난을 퍼부어대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에서도 그녀의 글이 더 많이 번역되어 삶의 안온함에 젖어 있는 한국의 보수주의자들에게 커다란 불쾌감을 주기를 바라 마지 않는다.
(노벨상 약발이 좀 먹혀주면 좋겠는데, 요즘에는 그것도 많이 떨어진 것 같다 -.-;)
역사. 역사는 이미 인민전선과 스페인내전 때부터 우리의 청년기를 지배하면서 전쟁 그 자체 속에서 사실들을 처절하게 교육시켰다. 역사는 우리가 태어난 바로 그 지점에서 우리를 놀라게 하였다. 역사는 부르주아 또는 쁘띠 부르주아 출신의 학생들이었던 우리들을 계급들의 존재와 계급들의 투쟁 그리고 그 관건에 의해 교육받은 사람들로 만들었아. 우리는 노동자계급의 정치조직인 공산당에 참여하면서, 역사가 우리에게 부과한 자명성들로부터 결론을 이끌어 내었다.
때는 전쟁 직후였다. 우리는 당이 이끌던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대전투에 급작스럽게 집어던져졌다. 우리는 그때 우리의 선택을 따져봐야 했고 그 결과들을 책임져야 했다.
우리의 정치적 기억 속에서 그때는 대파업들과 대중시위들의 시대, 스톡홀름 선언과 평화운동의 시대로 남아 있다. 레지스땅스로부터 솟아난 거대한 희망들이 무너졌고, 파국의 그림자를 수없이 많은 사람들의 힘을 통해 냉전의 지평 속으로 후퇴시켜야만 했던, 험난하고 긴 투쟁이 시작되었던 시대였다. 우리의 철학적 기억 속에서 그때는 오류를 그 모든 서식지로부터 쫓아내던 무장한 지식인들의 시대였고, 세계를 단 하나의 칼날로 갈랐던, 예술, 문학, 철학과 과학들을 계급들의 가차없는 절단으로 갈랐던 철학자들, 정치를 자신의 저술로 삼았던, 바로 우리들이었던 저서없는 철학자들의 시대였다.
<맑스를 위하여>, 루이 알뛰쎄르, 백의, 17p
이 글은 이 논문 모음집에서 알튀세르가 비판하고 있는 대상들 중 하나인 공산당 내에서의 지적 경향, 모순들을 단일한 경제적 모순으로 환원하고 그것을 변증법적으로 지양하겠다고 하는 헤겔주의를 겨냥하고 있다. 과학을 프롤레타리아의 과학과 부르주아의 과학으로 거칠게 구분함으로써 지적 통찰력을 마비시켰던 그 단순성이 그들이 세계를 가차없이 절단할 수 있게끔 하였던 것이다. 이 서문은 지적으로 무능했던 공산당에 가해진 알뛰쎄르의 비판의 포문을 여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문장에서는 비판적인 글이 갖는 냉혹함, 가차없음이 아니라 오히려 가슴을 뛰게 했던 거대한 옛 열정들과 흘러간 시간을 회고하는 따뜻함이 느껴진다. 알뛰쎄르는 전후 공산당 활동을 시작하면서 종교적 엄숙함과 어머니가 자신에게 투사한 이미지에 사로 잡혀 있던 유년기에서 벗어나 그의 늦은 청년기를 시작할 수 있었다. 그의 문장에서 전해오는 따뜻함은 강력하고 억압적인 권력에 맞서 좌절하면서 동시에 희망을 보았던 시절, 세상의 많은 것들이 자명해 보이고, 그들의 언어로부터 우리의 언어를 분리시켜내 그것을 실현할 수 있으리라고 믿었던 청년시절에 대한 헌사이다. 그리고 이성과 감성이, 절망과 낙관이, 단호함과 부드러움이 열정 속에서 뒤섞여 있던 시절은 알뛰쎄르만이 아니라 세계 곳곳에서 투쟁하고 있고, 투쟁하였던 모든 이들의 청년기이기도 하기에, 그의 문장은 이들 모두에 대한 헌사이기도 할 것이다.
그래서 그의 문장에는 사람들이 저마다의 방식으로 자신의 과거를 돌아보게 하는 힘이 있는 듯 하다. 에티엔 발리바르는 알뛰쎄르의 장례식에서 위 문장의 일부를 인용하여 낭독하였다. 이를 통해 그는 알뛰쎄르의 죽음과 더불어 돌이킬 수 없는 것이 되어버린 자신의 젊은 시절을 애도하였던 것이 아닐까? 아직 젊음의 한 복판에 있는 나는 이 문장을 보면 맑스를 처음으로 알게 되었을 때 사로잡혔던, 세계의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세계 자체를 바꿔버릴 수 있을 강력한 힘을 얻은 것만 같았던 그 느낌이 떠오른다.
글을 읽는 내내 마치 자화상을 보는 듯 하여 무척 괴로웠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두 명의 화자, 남아프리카를 '개척'하는 18C 의 제국주의자와 베트남전에서의 미국의 심리전 전략을 입안하는 20C 의 제국주의자가 사고하는 스타일이 꼭 나의 것인 양 느껴졌기 때문이다. 마치 쿳시가 '봐라! 이게 네 사고 방식이야! 네가 바로 제국주의를 가능하게 하고 있는 거야!'라고 얼굴에 책을 들이미는 것 같았다. 아마도 쿳시는 똑같은 말로 자신 또한 괴롭혀 가며 글을 써 내려갔을 것이다. 작품에서 18C 의 제국주의자의 이름은 야코부스 쿳시이다. 이 이름을 통해 그는 자신의 존재가 제국주의에 직접적으로 빚지고 있음을 시인하는 것이자 그 역사적 연관성을 넘어서서 그의 사유와 그가 존재하는 방식을 통해 스스로 제국주의와 공모하고 있음을 시인하고 있다. 과연, 쿳시의 글을 읽는 이 세상의 그 누가 그 공모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까? 우리의 이성이 실은 이미 광기라 하더라도 과연 누가 그 이성의 작동을 멈출 수 있겠는가?
쿳시의 소설이 진정으로 윤리적인 이유는 자신이 그럴 수 없음을 솔직하게 시인한 채로, 이성의 내부에서 이성이 스스로의 광기를 드러내는 순간을 끈질기게 파헤치기 때문이다. 결국 해답을 제시하는 것이 또 다른 억압이 될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할 수 있는 한 최대로 고민하고 반성해 보는 것이다. 쿳시의 첫 작품인 이 소설의 화자가 백인 남성 제국주의자인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스스로가 이 세계에 존재하는 억압의 구조와 얼마만큼 공모하고 있는지를 철저하게 반성하지 않는 고민이란 결국 진실성을 결여하기 마련이다. 이후 쿳시의 소설들은 제국주의에 대한 저항의 가능성으로, 동물과의 관계에 대한 고민으로, 원주민과의 소통의 문제 등으로 넓어져 간다. 하지만 그의 태도는 <어둠의 땅> 과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그는 가능성을 얘기하기 보다는 차라리 불가능성을 끊임없이 제시한다. 그가 <어둠의 땅> 에서 자기 자신의 문제이자 모두의 문제로서 제시했던 이성은 그 모든 문제들 속에 언제나 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불가능을 형상화 해 내는 것은 그 이성의 야만을 다시 작동시키지 않으려는 최대한의 노력이라고 할 수 있다. 나에게는 섣부른 희망보다는 이런 끈질긴 반성이 더 소중하게 여겨진다.
에티엔 발리바르 씨
(http://myhome.naver.net/skreds/images/Balibar(100x98)89.gif)
발리바르에게는 맑스주의적 사유의 전통을 철학의 언어를 경유해 정리해 내는 정말로 뛰어난 재능이 있는 듯 하다. 전통적인 맑스주의자들처럼 기존의 철학적 전통과 대별되는 맑스의 주장을 진리인 양 서술하거나, '포스트 모던'하게 반전과 아이러니의 지점을 포착해 내는 데 치중하지 않는다. 발리바르의 서술 스타일은, 맑스의 주장들이 어떻게 새로운 것인지를 보여주는 데 있고, 기존의 지평을 넘어서는 그 새로운 것들이 그 자체 속에서 어떻게 갈등하고 있는지를 그려내는 것이다. 맑스의 전복적인 주장들은 한 편으론 마치 진리를 잡은 듯한 생생한 경험을 제공하면서도, 그 서술의 맥락에서 벗어나 사고할 때는 이내 여러 가지 모순들로 가득 찬 것으로 경험되고는 한다. 발리바르의 글에는 논리적 궁지(aporie)라는 표현이 많이 등장하는데, 이 표현을 통해 그는 모순적 경험들을 통일해 내기 보다는 열어둔 채로 놓아두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그는 맑스주의에 관하여 최소한 현존하는 최고의 교사라는 평가는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아래에 정리해 놓은 글은 1989년에 쓰인 <맑스라는 이름의 자코뱅?>이라는 짧은 글로, 19C 혁명의 표어였으며, 근대 정치에 그 이념적 지평을 제공하는 것인 자유, 평등, 박애와 맑스의 사유의 관계는 무엇인지, 맑스가 무엇을 새롭게 도입했으며, 그것이 그 개념들 속에 어떤 긴장을 불러일으키는 것인지를 설명하는 글이다. 읽은 것을 정리해 볼 요량으로 본문을 거의 긁은 것이라 거칠고 재미도 없지만, 어느 정도는 최근에 이글루에서 벌어지고 있는 논쟁-페미니즘에서 시작하여 이제 인권과 윤리의 문제로 나아간-의 맥락과도 닿아 있지 않나 싶다.
<맑스라는 이름의 자코뱅?>, 에티엔 발리바르
발리바르는 프랑스 혁명을 역사적 단절의 순간으로 이해한다. 혁명은 그것을 "낳았던" 원인들의 축적을 그 효과들 속에서 넘어서는, 역사라는 직물의 단절이다. 이 단절이 제공한 사유와 가능성들의 개방이 닫힌 것은 19C 후반, 제국주의, "사회적 문제"의 제도화의 시작, 일반화된 학교교육 등이 도입되고 나서이다. 이 때가 되어서야 자유, 평등, 박애라는 표현은 안정되고 일의적인 의미를 소급적으로 부여받았다고 할 수 있다. 맑스는 아직 혁명이 열어 놓은 개방성, "단절의 칼날"위에서 사유하고 있다. 그 가능성 속에서 맑스에게(물론 승리할 부르주아들이 아닌 다른 혁명의 세력들에게도), 자유, 평등, 박애는 전적으로 다른 의미를 갖는다.
박애
박애라는 논쟁적 표어의 채택은, 노동에 대한 권리(droit au travail)가 인간의 권리들과 헌법상의 원칙들에 끼어드는 것(그렇게 되면 그 형식적 안정성은 완전히 흔들리게 될 것이다. 최소한 소유권이라는 쟁점에 있어서도)을 "박애주의적" 시각에서 차단하기 위해서였다. (노동에 대한 권리가 불러 일으킨 쟁점에 대해서는 조앤 W. 스콧의 <페미니즘 위대한 역설>을 참조해 볼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19세기 프랑스 혁명의 전개와 더불어 그 속에서 여성의 권리라고 하는 개념이 어떻게 얽히는 지를 잘 보여주는 좋은 글이다. 이 책은 여성의 권리라고 하는, 층위의 다양성은 있겠지만, 지금 많은 사람들이 사고하는 데 별 어려움을 느끼지 않는 주제가, 얼마나 논쟁적인지를 잘 보여준다)
박애는 또한 그것의 수행자로서 국가나 한 사회를 상정하는데, "만국의 프롤레타리아여 단결하라!"는 맑스의 구호는, 박애의 실천적 지평인 국가를 뛰어넘는 것이며, 소유라는 개념이 갖는 균열을 통해 국민이라는 하나의 정체성을 둘로 분할하는 혁명적 주체성을 정초한다. 여기서 인간의 인류애라고 하는 관념이 그 정치적 기능의 폭로 속에서 해체됨과 더불어 여전히 다른 층위에서 작동하고 있는 역설이 출현하고 있다.
자유
자유는 한 편으론, 특권계급을 쳐부수어 주권을 집단적으로 쟁취하고 그리하여 "시민"이 되는 "주체"들의 운동(능동적)이며, 다른 한 편으로는, 공리주의, 자유경쟁, 그리고 그 결과 노동력으로서의, "상품"으로서의 개인(수동적)이다. 맑스는 <자본>에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노동력의 판매와 구매가 그 한계 안에서 이루어지는 상품 유통 또는 교환의 영역은 사실 천부인권의 진정한 낙원이었다.
여기에서 지배하고 있는 것은 오로지 자유, 평등, 소유, 그리고 벤담이다.
이 문장을 통해 맑스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인권의 법적 형식들(자유와 "형식상의" 평등)을 밑받침하는 이데올로기는 상품의 일반적 유통의 형식들 그 자체, 특히 그 나름으로 인간의 "노동"을 합리적으로 착취할 수 있는 상품으로 만들 수 있게 하는 형식들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 문장은 단순히 자유라고 하는 것을 이데올로기로 환원시키는 것을 목표로 하는 게 아니다. 임노동 착취가 억압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은 봉건적 군주, 주인은 아니다. 부르주아는 자본의 축적을 방해하는 봉건적 착취의 족쇄를 끊어 버렸으며, 바로 그 자리에 새로운 착취 관계를 집어 넣었다. 자유란, 한 편으로는 능동적이며 임노동 관계가 강요하는 불평등으로부터의 탈출을 의미할 수 있고, 한 편으로는 봉건적 관계로부터 해방되어 자유로운 상품이 '될' 권리를 의미한다.
평등
따라서 맑스의 눈에 '평등한 권리'란 실제적 불평등을 하나의 공통의 척도로, 형식적 평등으로 환원시키는 속성일 따름이며, 평등은 자신을 의식하고 있는 법적 이데올로기 바로 그것으로서의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의 핵심적 시니피앙이다. 이 맥락에서 대의제 민주주의 국가란 부르주아들이 자신들의 착취를 위해 피착취자인 노동자를 동원하는 장치에 다름 아니다.
그러나 한 편으로, 맑스는 공산주의 사회로의 계기적 단계들을 규정하며, "평등 노동, 평등 임금", "능력에 따른 노동과 필요에 따른 분배"라는 용어를 사용하였으며, 엥엘스는 평등을 프롤레타리아적인 것과 부르주아적인 것으로 분할하였다. "프롤레타리아들의 평등에 대한 요구는 계급의 진정한 폐지를 그 내용으로 갖는다. 모든 평등의 요구는 필연적으로 부조리 속에서 죽어가게 된다."
이러한 모순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우선, 이것은 정치 투쟁으로서의 계급 투쟁은 정치의 보편적 언어(시민성의 언어) 속에서만 정식화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언어란 단순히 환상으로 환원될 수 없다. 다음으로 근대의 정치 속에서 맑스주의적 운동이 갖는 긴장을 형상화 한다고 할 수 있다.
한 편으로 평등의 요구가 계급의 폐지를 위한 집단적 투쟁이 아닌 형태로 나타난다면, 이는 계급투쟁의 현실을 은폐하는 것으로써 비난받는다. 그러나 다른 한 편으로 평등의 요구가 작업장에서의 착취에 반대하는 투쟁으로 축소된다면, 그것은 자본주의가 강요하는 개인의 상품으로의 환원을 수긍한다는 비난이 가능할 것이다. 이런 갈등은 맑스주의 정치의 역사에서 형태를 달리해서 계속 되풀이 되어 왔으며, 미결의 문제로 남아 있다. 마지막으로, 엥엘스의 인용문은 평등개념의 역설을 잘 보여준다. 한 편으로는 개인들의 동일화의 극단들이 있으며, 다른 한 편에는 그들의 차이화의 극단들이 있다.
어떤 의미에서, 맑스주의의 모든 것은 근대 정치에서 대두되었던 이 개념들의 역설적인 해석의 지평 속에서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맑스주의 뿐만이 아니라, 민주주의의 기획을 어떤 식으로든 이어나가고 있는 지금의 정치 현실에도 마찬가지다. 브레히트가 <임시야간숙소>에서 자선 행위를 씁쓸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은 박애의 정신에 대한 맑스주의적 사유의 결과물이지만, 항공회사에서 스튜어디스를 채용할 때 외모의 조건을 묻는 것이 정당한 일인가에 대한 공방이 일어나는 것은 자유와 평등이라고 하는 것이 지금의 정치 현실에서도 상이한 개념 속에서 기능하고 있음을 잘 보여준다. 그러므로 모순은 사실 도처에 널려 있다. 맑스는 그것을 특정한 방식으로 개방했을 뿐이다. 지금 권리들이 너무나 '쉽게' 운위된다면, 그것은 자신의 개념에 내재한 모순을 은폐할 수 있을 만큼 강력한 권력을 갖는 해석의 결과물일 뿐이다.
( 에티엔 발리바르, 윤소영 엮음, <맑스라는 이름의 자코뱅?>, [루이 알튀세르 1918-1990], 민맥 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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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바이 레닌>>이나 <<나에게 유일한>> 같은 영화들에 좀 질렸었는데, 나중에 여유가 생기면 이 소설을 읽어 보아야겠습니다. 옐리네크의 소설은 <<피아노 치는 여자>>만 알고 있었는데, 라임님 덕분에 좋은 정보를 얻게 되었네요(^.^).부가 정보
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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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유일한>>은 보지 못 했는데, 둘 모두 아이들에 대한 이야기인 건가요? 요즘엔 훈훈한 이야기가 넘쳐나는 것 같아서 이런 가차없음이 더 매력적으로 다가오는 것 같아요. 전 옐리네크의 글 중 <<연인들>>이 가장 인상깊었는데요, 아무래도 '옐리네크식' 사랑얘기라서 그런가.. 이것도 기회되시면 한 번^^; 다른 분들도 그러시겠지만 제가 소설에 대해서 글을 쓸 때는 정말정말 다른 사람들한테 권하고 싶을 때라서ㅎ부가 정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