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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대 대학원신문] 디지털 노마디즘의 모순적 지위

디지털 노마디즘의 모순적 지위 자유로움은 인간 신체의 해방적 느낌이다. 역사적으로 보면, 이러한 느낌에 급격한 변화가 이루어진 시기는 이제까지 크게 두 번이다. 우선 19세기초 자본주의는 봉건 권력의 토지에 예속되었던 인간 신체의 자유로움을 약속했다. 인간은 자유 계약을 통해 자신의 신체를 거 래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곧이어 형식적인 신체의 자유는 궁극적으로 통제와 구속의 거 울임이 드러났다. 자유 계약은 자본주의의 생산 관계에 들어가면서 신체 구속의 증명이 되 었다. 대표적으로 테일러 할아버지가 계시한 공장의 과학적 경영은 신체의 자유를 갈기갈기 찢어 시분할 관리하는 생산 미학의 절정이었다. 이제 20세기말 인간 신체의 자유는 디지털 혁명으로 새로운 단계를 맞이하게 되었다. 디 지털의 자유로움은 인간을 끊임없이 부유하게 만들고 있다. 디지털이 선사한 자유로움은 끊 임없는 유목과 이동의 전제가 되었다. 디지털은 공장과 사무실로부터 노동자들을 해방시키 고, 한 장소와 지역의 구심력에 구멍을 내고 있다. 이는 진정한 인간 해방의 징후인가? 아니 면, 디지털 기술이 마련한 노마디즘의 새로운 가능성이 고작해야 19세기에 자본주의가 제시 했던 자유 계약의 새로운 업데이트 버전일 뿐일까? 이 글은 신체 자유의 필요 조건인 노마디즘을 양가적 차원에서 본다. 권력의 노마디즘과 저항의 노마디즘. 전자는 후자를 필연적으로 규정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새로운 디지털을 이 용하여 노마디즘을 기획한다는 점에서 주목해야할 부분이다. 이에 반해 후자는 권력의 통제 에 대항한 힘의 생성을 포착한다. 디지털 노마디즘의 긍정적 가치는 물론 후자의 관찰을 통 해 얻을 수 있다. 권력의 노마디즘 새로운 권력의 특성은 디지털 네트워크 기술을 기반으로 한다. 디지털 노마디즘의 생성 조건은 애초에 권력의 아이디어에 가깝다. 과거에는 권력이 한 곳에 집중되기 마련이었다. 볼셰비키 들이 쨔르 체제를 뒤집기 위해 크렘린 궁전으로 진격했던 것처럼, 권력에 대항하 는 혁명 그룹들은 대상화된 권력의 실체에 대한 '장악'의 개념을 사용했다. 장악과 진격은 멈춰진 대상을 필요로 한다. 멈춰있는 상태의 권력, 이는 '정주 권력'(sedentary power)이다. 새로운 권력은 자유롭게 이동한다. 네트워크망을 타고 전세계를 누빈다. 권력이 분산되고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쉽게 옮겨 다닌다. 네트워크망을 통해 권력의 공간 확장과 이동이 이루어진다. {네트워크 사회의 도래}란 책에서 마누엘 카스텔은 새로운 공간의 변화를 '장소'(place)에 서 '흐름'(flow)의 전환으로 파악한다. 그는 한 곳에 머무르지 않고 끊임없이 모이고 흩어지 는 동태적인 권력의 '흐름'을 읽어야한다고 주장한다. 이를 가능하게 만드는 것은 디지털 네 트워크다. 그래서, 새로운 권력의 호칭은 '노마드 권력'이다. 이 새로운 권력이 요구하는 디 지털 노마디즘은 우선 효율성(efficiency)에 근거한다. 자본의 순환을 빛의 속도로 만들고, 적재적소에 자본을 분배하려는 욕구는 기본적으로 효율성의 원칙이다. 디지털 시대에는 어 떤 기업이든 원활한 정보 이동의 능력을 갖추지 못한다면, 자본간 경쟁에서 사멸할 수밖에 없다. 둘째는 연장(extension)이다. 다른 말로 연장은 통제력이다. 연장은 쉽게 생각하면 몸통에 달려있는 길게 연결된 보철물과 같다. [매트릭스] 영화에 나오는 신체의 구멍에 연결된 포 트 단자들을 상기하라. 연장은 관리와 통제를 행하는 중심을 갖는다. 그것이 연장인 이유다. 연장은 통제력의 확장/대 욕구에서 생긴다. 디지털 노마드 권력의 새로운 능력은 실시간 통 제력에 있다. 디지털 접속은 전세계를 단일로 묶고, 디지털 연장을 통해 권력을 확장한다. 마지막으로 공간의 소멸(disappearance of space)이다. 디지털 이데올로그들은 공간 압축 능력을 단지 디지털 기술의 가공할 능력을 설명하는데 이용한다. 하지만, 물리적 공간의 탈 출은 있을 수 없는 얘기다. 현실의 공간은 벗어날 수 없는 인간의 굴레다. 오히려 공간의 소 멸은 단일화된 권력의 장을 시사한다. 오늘날 공항에서 노트북을 챙기고, 셀룰러 폰을 목에 걸고, 개인 디지털 보조장치(PDA)를 손에 들고, 디지털 시계로 전자 메일을 확인하는 사람 들을 쉽게 목도할 수 있다. 현대의 이러한 일상 풍경이 주는 공통점은 접속된 인간의 모습 이다. 자유로운 신체 이동 능력에도 불구하고, 현대인들은 오히려 끝없이 권력에 접속되고 연결된다. 지구촌 사무실 혹은 공장에서 일하는 지구촌 노동자의 미래상은 사이버펑크들만 의 지나친 공상이 아니다. 공간의 소멸은 물리적 공간의 소멸의 문제가 아니라, 권력이 행사 되었던 가시적 거리감의 소멸이다. 공간의 소멸은 권력의 새로운 디지털 장을 전제하고 있 는 것이다. 사이비 노마디즘 이 세 가지 전제들은 권력이 디지털 노마디즘에 집착하는 직접적 이유다. 효율성은 권력 의 생산에, 연장은 권력의 확대에, 공간의 소멸은 권력의 관리에 기여한다. 디지털 노마디즘 이 눈에 보이는 현상으로 드러난다면, 이 세 가지는 현실 노마디즘의 본질과 목적을 드러낸 다. 권력의 노마디즘에는 정처없이 떠도는 정보의 흐름은 없다. 권력의 노마디즘은 일정한 방향을 갖고 움직인다. 겉으로 보기에는 무정형으로 보이지만 이것의 흐름에는 규칙성이 발 견된다. 그 규칙성은 권력의 위계적인 명령에 의해 부과된 것이다. 예컨대, 전세계 노드를 타고 흐르는 정보들 중 고급 정보들의 집적과 관리는 거대 기업본부(HQ)의 중앙 컴퓨터에 서 이루어진다. 평등하고 물활적으로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던 디지털 정보들이 권력의 파장 에 걸리면 위계적이고 불균등하게 갈린다. 노마디즘의 자유로움이 권력에 의해 다시 한번 산산히 조각난다. 역설적으로 권력의 생산, 확대, 관리의 목적된 노마디즘은 진짜 노마디즘이 아니다. 이는 '사이비 노마디즘'(pseudo-nomadism)이다. 디지털의 진정한 가치와 거기서 생성되는 노마디 즘을 철저히 악용하는 구자본주의 생산의 논리다. 권력으로 지칭되는 주원천이 무엇보다 자 본력에 있다고 본다면, 권력이 이용하는 노마디즘의 정체는 쉽게 폭로된다. 부유하는 유목 자체의 자유로운 신체적 가능성보다 유목에 의해 유지되는 체계적 약탈의 역사에 디지털 시 대의 권력은 열광한다. 새로운 권력에게 유목은 자유로운 자본의 이동이다. 물론 고대의 노 마디즘과 다른 점은 디지털이란 수사어다. 비가시적이고 기동력있는 약탈의 노마디즘이 현 대의 권력이 주력하는 바다. 결국 디지털 노마디즘의 수사는 권력의 것이다. 각자의 목 뒷덜미에 포트가 뚫려 망망한 네트의 바다로 사라지는 비운의 미래 인간들처럼, [동물의 왕국]에서 꼬리표나 추적 장치가 붙어 초원으로 사라지는 야생 동물들처럼, 권력이 의도하는 노마디즘은 끊임없이 탈주하려 고 하고 탈주했다고 느끼지만 종국에는 권력의 파장에서 한발자국도 못벗어나는 사이비 노 마딕 현실을 기획하는 일이다. 저항의 노마디즘 진정한 노마드는 모든 권력화된 디지털 영토를 저항의 기폭제로 삼는다. 최근에 이탈리아 자율주의자인 안토니오 네그리와 듀크대학의 영문학 교수인 마이클 하트가 같이 쓴 {제국 Empire}(2000)이란 저술에서 얘기되었던 것처럼, 권력의 외부 혹은 바깥으로 보이는 장소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모든 곳에서 저항해야 한다. 그들은 저항의 편재성을 일 컬어 복수자들의 '저항되기'(being-against)로 표현한다. '저항되기'는 일상화된 저항의 표현이다. 저항되기는 노마디즘을 실제적으로 보여주는 지표다. 권력이 노마디즘을 재생산의 수단으로 이용하는데 반해, 새로운 디지털 야만인의 무리들은 이를 저항의 방식으로 이해한다.이른바 저항의 노마디즘은 권력이 악용하는 디지털의 노마드적 가치를 재전유한다. 유목적 약탈보다는 자유로운 신체를 전제한 유목적 가치에서 저항은 힘을 얻는다. 디지털 노마디즘은 제도, 관습, 경계, 명령 등으로부터 철저히 멀어지려 한다. 권력의 사이비 노마디즘은 저항의 다층적 연결과 동시다발적인 진지전에 의해 발작을 일으킨다. '저항되기'가 일상적이고 미시적 실천과 저항의 의미를 담고 있듯이, 유목민적 삶을 살아가는 현대의 야만인들은 권력이 쳐놓은 그물 하나하나에서 그 저항과 반대의 고리들을 발견한다. '저항되기'는 체념과 희망의 변증법이다. 체념은 권력의 파장으로부터 더 이상 숨을 곳이 없다는 현실 인식에서 생긴다. 그러나 희망은 체념을 물구나무 세울 때 얻어지는 부정의 결 과다. 체념은 현실을 버리거나 외면하기 보다 희망의 씨앗을 가꾸기 위해 필요하다. 이런 점 에서 21세기 자본주의 사회를 지배하는 권력의 사이비 노마디즘을 외면해서는 안된다. 오히 려 철저히 권력이 지향하는 디지털 노마디즘의 가치를 주목하고, 현실 체념의 극한까지 밀 고갈 필요가 있다. 체념에서 멈추면 오직 나락만이 있을 뿐이다. 연이어 부정의 과정을 수행 해야 한다. '저항되기'는 체념을 극복하는 부정의 능동적 과정이다. 디지털 노마디즘을 가치 화하는 노력은 희망을 실은 '저항되기'에 있다. 현실의 '저항되기'는 희망을 가꾸는 방법이자 사이비 노마디즘을 무력화하는 힘이다. // (연세대 대학원신문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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