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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 디지털 예술의 미래

AD 칼럼 (2001. 7.) 디지털 예술의 미래 이광석(AD편집인·뉴미디어평론가) 정확히 10년이 지난 두 번째 뉴욕 나들이다. 맨하튼에 들어섰을 때, 발길이 제일 먼저 닿 았던 곳은 휘트니미술관(Whitney Museum of American Art)이다. 휘트니 미술관은 맨하튼 의 센트럴 파크를 왼쪽으로 끼고, 매디슨 거리와 75가가 만나는 지점에서 찾을 수 있었다. 인근의 수많은 미술관들을 제쳐놓고 휘트니를 향한 건 나름의 이유가 있다. 3월말부터 시작 해 이제 막바지에 이른 디지털 아트 전시를 보기 위함이었다. 디지털 시대의 예술을 주제로 <비트스트림스 Bitstreams>와 <데이터 다이나믹스 Data Dynamics>란 기획전이 열리고 있었다. 이미 언론에도 이번 기획전이 소개된 바도 있었고, 앞서 열렸던 샌프란시스코 현대 미술관의 <010101>전이 워낙 크게 소개된터라, 상대적으로 이번 휘트니 전시는 김빠진 감 이 없지 않다. 실제 샌프란시스코의 기획전만큼 치밀한 준비도 느껴지지 못했고, 전반적 수 준에서도 크게 색다른 맛을 보기는 어려웠다. 소통하는 디지털 전시는 <비트>보다 <데이터>가 보다 친숙하다. <비트>가 기존 예술 장르에 디지털 현상 을 덧붙인 느낌이 든다면, <데이터>는 디지털 안에서 디지털 예술을 논한다. <비트>가 기 존의 디지털에 흡수되는 모양새라면, <데이터>는 디지털을 가지고 관객과 상호 소통한다. <데이터>는 디지털이 갖고있는 상호작용의 묘미를 살림으로써, 관객을 수동적 역할자로 가 두지 않는다. 반면 <비트>는 대상화된 작품전이란 면에서 전혀 과거의 전시 기획을 벗어나 지 못했다. 전시장과 벽에 걸린 작품이 관객에게 내모는 소외감은 <데이터>에도 여전하다. 관객은 항상 대기하는 위치로 떨어지고, '관람'의 수준에 그친다. 적극적인 개입의 여지란 없다. 그저 응시를 바라는 조작된 사물들만 줄지어 기다린다. <데이터>는 디지털 예술 가운데 특히 지속적으로 변화하는 데이터의 흐름을 보여주기 위 한 인터넷 영상예술을 의도했다. 관객은 데이터의 흐름을 관찰하고 경험하고 거닐 수 있도 록 설계되었다. 물리적 지형을 따르지 않으면서도, 네트워크에 연결된 채 매순간 지속적으로 재변형/생산되는 디지털 영상의 새로운 형식미를 담고 있다. 물론 관객은 그 '역동성'을 조 작하는 주체로 나선다. 특히 관심을 끌었던 위즈니유스키(Maciej Wisniewski)의 작품 '네토 맷(NETOMAT)'은 인터넷의 잠재의식 속으로 이용자가 참여하는 방식으로 설계되었다. 이 용자가 모니터에 입력하는 단어나 문장에 따라 인터넷은 예기치않은 방식으로 영상, 문자, 음성, 음악, 동화상의 콜라쥬로 응답한다. 이용자는 끊임없이 인터넷과 색다른 대화를 지속 적으로 건네고 받는 것이다. <데이터>에 참여한 작가들은 거의 모두 95년대 이후에 웹 아 트에 두각을 보인 신세대군이다. 그만큼 작가들은 디지털과 함께 호흡했을 가능성이 높다. 이들은 미학적 완성도를 떠나 새로운 디지털 미학의 인터페이스를 구성하는데 상당히 자유 롭게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는 여지를 보여줬다. 아날로그 디지털 <비트>에서 관객은 어울림이 불가능한 타자(the other)로만 남는다. 아날로그 시대의 수동 적 관찰은 그대로 유지된다. 새로운 예술의 매체 수단으로서 뉴미디어 기법의 응용이 특징 적이긴 하지만 작가와 관객과의 상호소통은 제한되어 있다. 오히려 작품의 추상성이 관객을 멀리 이격시킬 뿐이다. 물론 브레이트식의 '낯설게하기'(estrangement)와는 전혀 무관하다. 애초부터 관객은 작품으로부터 낯선 이방인으로 멀리 서있기 때문이다. 그나마 흥미있는 작품으로는, 먼저 짐 캠벨(Jim Campbell)의 '모호한 도상 5 번'(ambiguous icon #5, 1990)을 들 수 있다. LED의 붉은 스크린에 불명확한 화소로 만들어 진 인간 형상의 아이콘은 빔 벤더스(Wim Wenders)의 '이 세상 끝날 때까지'(Until the End of the World, 1991)에 나오는 꿈의 디지털 영상과 같은 효과를 자아낸다. 라짜리니(Robert Lazzarini)의 작품 '해골들'(Skulls, 2000)은 사방의 흰 벽에 걸린 백색의 해골들을 일그러뜨려 관객에게 디지털 공간에서 느낄 수 있는 착시 현상을 유발한다. 실제 해골을 레이저 스 캐닝하여 만들어진 이 왜곡된 상은 사이버공간의 시각적 본질이 무엇인가를 되묻게 한다. 해독(Jon Haddock)은 실제의 보도 사진을 포토샵으로 재구성하여 마치 '심스'(Sims) 시뮬레 이션 프로그램에 등장하는 게임의 케릭터 이미지들의 공간처럼 뒤바꾼다. 그의 작품들은 역 사의 있는 현실을 가상의 오락과 뒤섞어놓음으로써 현실과 가상간의 경계를 뒤흔든다. <비트>만의 다른 특이한 점은 주되게 청각적 매체를 이용했다는데 있다. 건축회사 로텍 (LOT/EK)이 설치한 '사운드채널'(Sound-Channel, 2001)은 디지털 시대의 음악을 관객들이 직접 체험할 수 있는 장으로 활용하고 있다. 이 작업에는 '사이버네틱 작곡'으로 디지털 아 방가르드 음악을 선보인 디제이 스푸키(DJ Spooky, 본명: Paul D. Miller)가 참여하고 있었 다. 디지털의 예술값 부리나케 동전 주차한 곳으로 발길을 옮기면서 들었던 생각은, 이번 전시회에서 디지털의 형식적 차용이 아닌 디지털 감각이 제대로 체화된 미적 생산물들이 언제쯤 보편화될 수 있 을까하는 아쉬움이었다. 그러고는, <데이터>와 <비트>를 사이보그의 유형으로 본다면 안드 로이드(Android)와 인공지능(AI)에 빗댈 수 있다는 엉뚱한 생각이 돌연 들었다. 둘 다 기계 와 유기체간의 결합물이지만 합일의 배율이 틀리다. 단순히 보면 안드로이드는 기계에, 인공 지능은 유기체에 가깝다. 안드로이드가 인공지능에 비해 저급한 것은 기계의 유기적 구성도 에서 떨어지기 때문이다. 그렇게 보면 <데이터>는 인공지능과, <비트>는 안드로이드와 닮 아있다. 그만큼 디지털을 새로운 시대의 미적 표현으로 활용하는데 차이가 있다는 얘기다. 디지털로 완전히 새로 쓴 예술의 문법은 작품과 관객의 관계 설정을 분명 달리해야 한다. 이 점에서 <비트>는 디지털을 덧칠한 정도다. 디지털이 지닌 무한히 자유로운 소통성을 고 려한다면 디지털이 단지 형식적 재료가 되어서는 곤란하다. 뉴미디어를 예술 창작의 수단으 로 활용한다고 해서 디지털 예술이란 새 명패를 쉽게 달진 못한다. 그나마 위안이라면 <데 이터>에서 디지털 예술의 긍정적 미래를 조금이나마 감지한데 있다. <비트스트림스> 참고사이트: http://www.whitney.org/bitstream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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