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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지대 교지] 네트의 '파워 엘리트'

네트의 '파워 엘리트' 명지대 교지 수록(99년 6월) 1. 21세기 '파워 엘리트' 분석을 위하여 자본주의 사회의 변화와 관련된 논의의 연장선상에서, 보다 주목해야할 부분은 과연 글로벌 시대의 '파워 엘리트'의 속성과 계급적 본질이 무엇인가이다. 과거 80년대 한국사회의 성격과 관련하여 소장학자들을 중심으로 붐을 이루었던 연구 내용 중 하나를 꼽으라면, 우리는 계급 분석을 들 수 있다. 그 당시 한국 사회의 계급분석은 대체로 한 사회구성체의 주/부 모순 관계를 밝혀, 적대 관계와 전선 형성 등을 통해 체제 이행의 가능성을 마련하는데 있었다. 주로 경제학이나 사회학계에서 이같은 작업을 수행하였는데, 변혁과 이행의 활로가 막혀버린 90년대에는 실지 계급 분석과 관련된 연구 영역은 비인기 종목이 되어 버렸다. 그렇다고 내가 그 비인기 영역을 반복하여 탐구하려고 이런 말들을 내어뱉는 것도 아니며, 본인이 그렇게 정치한 분석을 수행할 능력 또한 없다고 자인한다. 하지만 도대체가 현대 자본주의의 지배적 권력 유형과 특성이라도 알아야 이에 저항할 수 있는 고리들이 생길텐데, 그 현실적 역학구도에 대한 감이 전혀 잡히지 않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과연 현대 권력의 정점은 무엇일까? 추상적으로나마 우리는 초국적 자본가들을 떠올린다. 그리고 이들간에는 격한 지각변동이 벌어지고 있다. 예컨대, 미래학자인 토플러((A. Toffler)의 '권력이동'이란 사실 글로벌 자본내/간 지각 변동에 대한 자본 내부적 고찰에 해당한다. 글로벌 자본가들의 지속적인 판세 유지와 그들의 새로운 영역 진출, 그리고 새로운 분야에 진출한 디지털자본가들의 전자 프런티어 자리잡기가 한창 진행 중에 있는 것이다. 그 와중에서 일반 대중을 호도하는 토플러식의 하이테크 이데올로그들도 소리 높여 새로운 시대를 맞을 예언자적 역할을 자처하기 마련이다. 자유주의에 사로잡힌 정책 관료들은 탈규제 법안과 각종 혜택 조항으로 돈많은 신진 엘리트 회원들의 충실한 조정, 관리자로서의 역할을 자임한다. 이 파워 계급/계층들은 거대한 물결을 만들어내면서, 새로운 밀레니엄을 위한 권능을 확장하고 있는 것이다. 2. '권력이동'의 내용 과거 물질 생산에 기반했던 다양한 핵심 인자들은 국제적 네트워크의 등장으로 인해 다종다양한 격변을 치른다. 역사적 조건하에서 진행된 생산과정에서 발생하는 모순이 잠재해있건 아니건간에, 라이히(R. Reich)의 '상징분석가', 토플러의 '코그니테리아'(cogniteria), 그리고 벨(D. Bell) 식의 '지식노동자' 개념 등은 테크노 기술에 의한 계급지형의 본질적 변화를 표현하고 있다. 물론 이들의 개념화는 특히 노동자 위상과 관련하여 노동 버전의 새로운 업그레이드를 상정한 용어이다. 즉 이 개념들은 한마디로 자본주의적 생산과정 중 노동자들의 노동 통제권과 관련하여 구상/실행이 통합됨으로써, 그들에게 생산 과정에서의 통제적 자율권이 신장된다는 '마찰없는 자본주의'(friction-free capitalism)의 신버전이다. 어쨌거나 현재 테크노 기술의 위상은 경제적·사회적인 유토피아적 가능성, 자유주의적 전망 등을 포함하며, 더 나아가 물질 세계의 해체까지도 주장하는 다양한 계급과 계층을 생산해내고 있다. 그 중 우리의 관심사는 새로운 지배계급의 정체성에 대한 것이다. 아마도 90년대 현실의 정치적·경제적 지배계급을 가장 잘 묘사한 용어 중 하나는, 하이테크 이론가인 아서 크로커(A. Kroker)의 글로벌 '가상계급'(virtual class) 개념일 것이다. "인간의 일반 이익을 테크노토피아라는 특수 이익으로 제시하는", 이들 계급의 전선에는 미 행정관료와 디지털 신생자본가들이 포진한다. 크로커가 보는 가상계급의 주체들은, 우선 미래적 비전을 주도하는 실리콘 밸리의 하이테크 자본가들과, 위계상 한 단계 아래의 하이테크 벤처 자본가들, 인공지능 과학자, 엔지니어, 비디오게임 개발자, 컴퓨터 과학자들과 여타 커뮤니케이션 전문가들 등등으로 구성된다. 이들 가상계급은 20세기의 변종인 약탈적 자본가들과 신종 테크노 엘리트들이 결합된 형태를 띠고 있다. 곧 20세기 말의 하드웨어 지배자가 21세기 소프트웨어 문화를 통제할 것이란 전망이 가능하다. 이들 주체간 계급 전선의 형성은 주로 정책적 '테크노프로젝트'를 통해 이루어지며, 관심사의 조율까지도 이뤄낸다. 물론 가상계급의 전체 조정·관리권은 정부의 손에 달려 있다. 국가는 객관적인 대상이 아니라 편견을 가진 개입자로 등장한다. 즉 시장지상주의는 정부의 행위를 줄이지 않으며, 실제적인 면에서 증가시킨다. 정부 행위의 본질적 측면에서, 의도된 산출물을 명령하는 것으로부터 새로운 시장을 창출하고 독점적 시장을 유지하는 것으로 그 임무를 이동시킨다. 이런 정황에 미루어 짐작해보면, 디지털이란 외피에 가려진 가상계급과 국가 권력장치간의 동침 관계가 새로운 지배계급의 내용인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크로커는 90년대를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의 '하드 이데올로기'가 급격히 쇠퇴하고, 가상계급의 '소프트 이데올로기'가 주도한다고 바라본다. 포스트자본주의 사회의 통치 엘리트들이 사용하는 보편 언어가 그 중심에 선다는 입장이다. 그가 말하는 소프트 이데올로기는 디제라티와 미국 행정부관료, 디지털 자본계급의 테크노신화와 밀접히 관련되어 있다. 웨스트민스터대학의 하이퍼미디어 연구소 소장인 바브룩(R. Barbrook) 식으로 얘기하자면, 미국 서안의 실리콘밸리를 중심으로한 '캘리포니아 이데올로기'(Californian Ideology)가 그 소프트 이데올로기에 해당한다. 3. 테크노 '파워 엘리트'의 속성: 정주권력에서 유목권력으로 도시사회학자인 까스텔(M. Castells)의 표현을 빌리자면, 현대의 공간은 '장소공간'(the space of space) 보다 '흐름공간'(the space of flow)이 우위에 선다. 이 말은 자본의 국제적 이동 능력과 추상화가 그 어느 때보다 급진전되었다는 얘기이도 하며, 권력 소재지가 변화하고 있다는 증거로도 볼 수 있다. 최근 주목받는 네트의 저항적 실천집단인 '크리티칼 아트 앙상블'(Critical Art Ensemble)에 따르면, 현대적 권력은 이미 각각의 정주화된 지역, 장소에 머물기보다는 네트워크를 흘러다닌다. 그래서 이들은 현대적 권력 재현의 방식이 정주적(定住的, sedentary) 형태에서 유목적(遊牧的, nomadic) 형태로 이동한다고 본다. 우선 그들이 저항 지점으로 보는 권력은 실체가 없다. 오직 권력은 그 표상으로 드러난다. 기껏해야 '통치계급', '파워 엘리트' 등과 같은 추상화된 명명뿐이다. 우리는 거대 권력을 소재가 상실된 '효과'에 의해서만 체험할 수 있다. 현재 국내를 포함한 아시아 금융 위기라는 사태가 글로벌 핵심자본의 취산(聚散) 과정 속에서 배태된다고 본다면, 그들의 논리는 설득력이 높다. 다른 한편 권력의 유목성은 '속도'를 필요로 한다. 한 곳에 정주하지 않고 흘러 다닐 때, 권력간 우위는 '시/공간 압축' 능력과 '중력장 극복의 속도전'(escape velocity)에 있기 때문이다. 프랑스의 도시연구가인 비릴리오(P. Virilio)는 이러한 속도성의 원천을 '행동적이나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behavioral inertia)에서 찾으며, 이를 과거 '동적인'(dynamic) 물리적 운송 장치들(기차, 오토바이, 자동차, 비행기 등)과 구분하고 있다. 그의 개념에 입각해 보면, 이같은 '속도기계'를 자신의 힘으로 체득한 특권 집단이 새로운 테크노 '파워 엘리트'인 것이다. 4. '역사의 종말'은 어디에도 없다 이제까지의 지배계급의 권력이동을 통해 보자면, 우파 이데올로그인 후쿠야마(F. Hukuyama)가 지리하게 언급한 '역사의 종말'과 같은 새로운 자본주의 역사의 시작은 어디에도 없다. 오직 있다면 자본주의의 계급적 모순과 불평등의 재생산 지형의 연장과 그 변형만 있을 뿐이다. 물론 네트가 마련한 풍부한 기술적 가능성이 우리 앞에 놓여 있긴 하다. 혹자는 네트가 미래의 새로운 천년왕국을 다시 세울 수 있다고까지 주장한다. 그러나 실지 "대중에게 모든 권력을!"이란 슬로건의 밑바닥에는 상품화 논리가 각인되어 있다. 최저 균등 이용 요금에서 이용당 요금지불 체계로, 정보의 생산에서 소비로, 정보 추구보다는 오락과 쇼핑으로의 전환은 한마디로 인터넷의 상업화를 지칭한다. 인터넷이 더 나은 것, 즉 정보초고속도로로 바뀔 수 있다는 가상계급들의 비전은 구계획 경제의 국가 프로젝트에 비견할만한 바다. 아니 규모면에서 보면 그 이상이다. 세계경제의 종주국인 미국 행정부에서부터 밀어붙이는 사업 내용이기에 더욱 그렇다. 이들의 비전은 물활적으로 움직여나가는 네트의 본성을 글로벌 기업의 이윤 동기하에 구획화하려는 음모에 가깝다. 네트의 자생을 가로막는 가상계급의 음습한 기도는 인터넷 모델을 역회전하여 새로운 자본 모델로 바꾸려는데서 이미 시작되고 있는 것이다. 먼저 정치적 근원에서 새로운 계급은 사회적 원칙이 결여된 자유지상주의의 가치관, 정부와 하이테크 기업의 신우익적 행동 방식이 뒤섞여 있다. 새로운 엘리트들이 간간히 드러내는 자유주의적 속성조차 대체로 우파적 경제 논리에 의하여 압도당하는 현실을 감안한다면, 기존 보수 우익체제의 정치적 사고에 그 끈을 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들은 민주적 담화에 역행하여 한층 새로워진 권위주의를 구상하고, 테크노토피아에 반하는 모든 반대를 억압하며, 의회정치를 지적 재산권의 전쟁터로 이끈다. 경제적 정의에 역행하여 약탈적 자본주의의 재부활과, 고용조정에 의한 만성적 실업상태, 사회복지예산 축소 등 신자유주의적이고 기술 합리적인 결합을 시도한다. 이들은 경제적 지형에서 보자면, 철저하게 글로벌 사업의 지배적 세력이자 독점적 세력이다. 이는 자본의 내적 (재)구조화 과정에 따른 구조개편의 경향성과, 신계급 중심으로의 형식적 계급이동에 다름 아니다. 즉 "20세기 하드웨어를 통제하는 자가 21세기 문화의 소프트웨어를 지배"한다는 점에서, 이들은 고전경제학의 역사와 정치를 초월하고 '종말'시키는 자들이 아니라 온존하게 계승하는 부르주아 형님들의 후계자들이다. 5. 신계급의 '위상학적 지형 그리기'를 제안하며 이제 권력에 대한 저항의 조건이 현실의 지배적 지형도를 확보하는 것이라 볼 때, 새로운 권력의 출처와 구성, 성격, 방향 등을 분석하는 일이 시급하다. 다시 말해 새로운 파워 엘리트들의 성격 변화와 그 변화의 진원지, 파워 엘리트를 구성하는 실세들과 그들간, 그들과 구계급간의 관계를 계보적으로 추적하는 작업이 이루어져야만 한다. 하이테크 정보기술이 주는 무한한 가치만큼이나 이들 계급 내부의 지형도 정확히 결정내리기 어렵긴 하다. 하지만 자본주의적 권력의 확장과 지배에 직면하여 새로운 저항의 방식을 고민하기 위해서는, 실질적으로 권력지형에 대한 밑그림이라도 그려야하는 것이 상책이다. 분명히 새로운 지배계급이 등장하는데는 그만한 역사적 배경이 있었을 것이고, 또한 그들의 연합세력 내지 이데올로그들과 잡다한 지적 돌팔이들이 기생 혹은 연합할 것이란 사실이다. 이 모든 전선을 구체적 일상에다 끌어오는 작업은, 현실 권력지형을 추상적으로 그려봄으로써 저항의 지점들을 확보하기에 중요하다. 일종의 가상계급의 '위상학적 지형 그리기'(topological mapping)가 필요한 것이다. 이 작업의 전략/전술적 의의는, 우선 우파적 정보 담론을 상시적으로 구체적 현실의 맥락에서 파악할 수 있게 한다. 이는 네트를 추상성의 나락으로 빠뜨리지 않으면서, 물리적 현실 속에서 좌표점을 찾을 수 있는 작업이다. 둘째, 새로운 지배계급의 계보 그 자체를 추척함으로써 계급간 모순의 지점들을 쉽게 파악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이를 통해 새로운 저항과 연대의 전선 형성과 새로운 저항 방식을 개발할 수 있을 것이다. 즉 각각의 저항 단위들이 "이젠 그만!"의 즉자적 울림들을 합일된 전자적 파장으로 전환함으로써, 여기저기 권력의 '속도기계'에 속도 지체의 힘을 가할 수 있는 상황이 마련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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