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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e세상] 속도와 지체의 미학

속도와 지체의 미학 이광석·뉴미디어평론가 속도의 쾌감을 제대로 느끼려면 단연 롤러코스터가 압권이다. 바람을 가르며 미친 듯이 돌고 질주하는 롤러코스터에 몸을 한번 맡겨본 사람이라면 속도의 오르가즘이 뭔지 한번쯤은 짜릿하 게 느꼈을 것이다. 인간사에는 꽤 오래전부터 이런 속도-기계들이 상상에서 혹은 현실로 고안 됐다. 속도에 대한 집착은 시간과 공간과 살덩어리를 훌훌 털어버리고 지긋지긋한 현실을 벗어 나고 싶은 욕구에 기인한바 크다. 현실의 제약에 대한 초월의 욕망과 상상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탐관오리들의 관 할권을 넘어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는 홍길동의 축지법, 산을 타넘는 신령님의 공간 이동 지팡 이, 마녀의 빗자루, 산타 할아버지의 썰매, 빛의 속도로 시간의 벽을 타넘는 타임머신, 부처님 손바닥에서 끊임없이 벗어나려했던 손오공의 구름, 중력장의 공포를 쾌감으로 반전시키는 번지 점프, 제한 속도를 벗어나 죽을둥 살둥 모르고 달리도록 만든 경주용 자동차들, 영화 '론머맨'이 나 '공각기동대'에서 신체를 버리고 네트에 거하는 데이터 정령들과 목 뒤꼭지나 척추를 인터넷 포트로 연결한 미래형 인간 모습 등등. 이를 가만 보면 속도-기계의 상상력에 큰 변화가 있었음을 느낄 수 있다. 우선 지팡이, 융단, 빗자루 등 도구를 이용해 가속을 얻던 시절에서 이제는 아예 살덩이를 벗어나 광통신망에 연결 되는 신체 이탈이 크게 늘고 있다. 실제 기계의 유형에서도 인간의 몸과 함께 움직이는 공간 이동의 수송 장치들에서 가만히 앉은 자리에서 고속의 신체 이동을 느끼는 가상현실 게임이나 초고속 인터넷 이용으로 바뀌고 있다. 속도의 체감 능력을 점점 극대화하는 쪽으로 가고 있다. 한편 장비를 이용하건 신체의 이탈을 유도하건 인간의 속도 욕망을 가로막거나 느림을 유발 하는 현실의 조건 혹은 제약이 늘 있어 왔다. 앞서 본 것처럼 중력, 시간, 공간, 살덩이, 산, 속 도 제한, 부처님 손바닥, 기류 등은 인간의 가속 기계에 끊임없이 저항하는 현실과 상상의 속도 제약의 조건으로 기능한다. 모뎀에 전화선을 연결하던 시대가 엊그제요 모바일과 초고속 인터 넷 유선통신은 기본이고 이제 무선 랜(근거리통신망) 기술 '와이파이'(Wi-Fi)가 얘기되는 오늘 에도 이들과 비슷한 속도의 지연 혹은 간섭이 존재한다. 신체 이탈까지는 아니더라도 비슷한 공간 이동의 착시를 느끼며 사는 때에 디지털 지연/간섭 현상은 주로 물리적 장벽에 의한 속도 지체에 의해 유발된다. 요즘에야 그렇지 않지만, 애꿎은 텔레비전을 손으로 내려치며 화면을 조정하던 공중파 아날로그 시대에는 전파를 가로막는 각종 악천후가 속도의 적이었다. 디지털 영상 시대에는, 메아리치거나 반복되는 음향들, 마치 영화 '터미네이터 3편'에서의 질 나쁜 유체형 사이보그가 흐물흐물 벽을 뚫고나오듯 바로 전화면이 이후 화면에 양각으로 포개지는 현상들, 화면 픽셀 일부의 모자이크식 흐트러짐과 교정, 음성과 따로 놀거나 하릴없이 멈춰진 영상 등이 속도의 질주에 구멍을 내는 새로운 지체 현상들로 등 장한다. 분명 속도 지체는 완벽한 재현감을 위해서는 해롭다. 하지만, 그것이 정말 나쁜 것일까? 속 도 지체는 일종의 느림 현상이다. 느림이 없으면 속도의 무한 스릴은 다음의 극한적 상황을 낳 는다. 축지를 잘못 써 홍길동이 그만 형장 입구로 발을 헛딛거나, 산신령이 지팡이를 자주 두드 려 이를 부러뜨리거나, 더 많은 스릴감을 위해 번지점프용 줄을 너무 늘이거나, 과열로 통신이 두절되거나, 경주용 차의 브레이크가 풀리거나 한다면 상황은 치명적이고 위험하다. 이는 우리 식 속도를 표현하는 "빨리빨리"에 반대한 '느림의 미학'이 몇년전부터 등장하는 까닭이기도 하 다. 반대로 "천천히"는 무섭게 질주하는 자본주의 속도-기계들의 비인간성을 제어하는 힘이 된 다. 우리는 느림과 지체를 무시해 속도의 과열 욕망이 빚어낸 깊은 상처들을 수없이 보아왔다. 선진국의 형식 논리에 희생당하는 개발국의 국민들, 생산제일주의와 성장 논리에 묵과된 장시 간 노동의 혹사, 마구잡이 개발 논리에 파괴되는 생태계, 벤처 육성이란 단기 명목에 급조된 뻥 튀기 주식과 거품, 앞서 나가는 시장 논리에 홀대당하는 문화 자산 등은 형식, 성장, 개발, 육성, 시장 확대의 수많은 속도전 때문에 생긴 생채기들이었다. 자본주의 속도-기계들에 딴지를 거는 느림은 그래서 인간적이다. 앞만 보지말고 옆과 뒤도 보면서 질주하라는 안전과 다양성에 대한 인간적 주문이 들어 있다. 언제나 당시에는 불완전해 보이고 현실의 한계로만 보이는 것이 쾌속 질주의 쉬어가는 굽이라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 다. 간섭과 지체로 접속한 영상이 일그러지는 현상은 한 굽이만 지나면 질주의 뒤안길이 될 것 들이다. 미리부터 조바심 치면서 온전하고 완전한 것만을 원한다면 쉬 체하기 마련이다. 속도의 미래 가능성을 따라 움직이면서도 그 가운데 현실이 제한하는 느림의 미학을 즐길 줄 알아야 제어불가능한 속도의 극한을 예방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정보화 정책도 조금은 혹 더 디 가더라도 뒤쳐지거나 뒤따라오지 못해 소외되는 사람들이 없나 찬찬히 두루 살펴보며 속도 를 내야 충돌없이 잘 진행되는 법이다. 축지쓰다 돌부리에 몇 번 채여 봐야 형장으로 발을 헛 딛는 어처구니없는 사태를 막지 않겠는가. (아름다운 e세상, 2002.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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