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09. 12. 정치적 성숙이 영국의 디지털 정책을 일구는 힘이다

정치적 성숙이 영국의 디지털 정책을 일구는 힘이다

 

2009. 12. 월간 통

 

이광석

한국이 브로드밴드 인터넷 정책에서 성공했다며 정책결정자들이 우쭐해할 때 놓치는 것들이 많다. 미국과 영국 등이 먼저 90년대 중반이후 내놓은 초고속 인터넷 사업을 당시 우리가 벤치마킹하던 시절에서 이젠 그들이 우리의 성공신화를 배우는 시절이니 우쭐할만도 하다. 그런데, 지난 10월호에서도 봤지만 버락 오바마 정부 이래로 미국내 브로드밴드 구축 정책의 움직임과, 올해 영국의 <디지털 브리튼(Digital Britain)> 정책 보고서가 주는 공통된 함의를 우리 정책결정자들이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것 같다. 사실상 이 두 나라에서 디지털 정책의 핵심으로 소외된 계층의 참여와 통합(inclusion)을 그 기본 정책 명제로 삼고 있다는 점을 쉽게 지나친다.


<디지털 브리튼Digital Britain>은 이미 1월에 영국 문화미디어체육부(Department for Culture, Media and Sport, DCMS)의 핵심 전략 보고서 형태로 중간 발표 후 6월에 나온 최종보고서이다. 대략 5개월 정도 중간 보고서 내용을 각계 시민 구성원들로부터 조언을 듣고 검증을 받아 최종본을 만들어낸 것이다. 한 나라의 디지털 미래 청사진에 시민 참여와 통합의 화두를 제 1과제로 삼는 일은 여간해서 쉽지 않다. 일자리 창출과 산업연관 효과에 정책 목표가 압도당하는 대개의 현실에 비춰보면 놀랄만한 정책 입안의 과정이다.

 

전통적으로 영국의 방송 체제는 ‘공공서비스’(public service) 개념에 입각해 있다. 우리식 방송 소유구조에 맞춘 공/민영 이원구조에 비춰보면 훨씬 더 포괄적인 수준의 공공 개념이다. 영국에서 방송을 하는 주체는 공영이건 민영이건 ‘공공서비스’ 의무를 지닌다. BBC와 같은 공영방송은 물론이거니와 광고 시장으로 먹고 사는 민영방송도 정도 차이는 있지만 공공서비스의 의무와 책무를 진다. 영국에서는 일반 민영방송에도 강한 공적 책무를 정부와 의회가 부여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그 공영성 구현의 핵심에는 BBC가 존재한다. BBC의 대부분 재원은 수신료에 근거하고 정부와 의회로부터의 간섭을 배제하기 위해 영국 왕실에서 발급하는 칙허장과 협정서에 의해 자체 규제기관인 BBC트러스트(Trust)의 감독을 받고 있다. 오프콤이란 우리식 방송통신위원회와 같은 규제기구가 존재하지만, BBC에 대한 일반적 규제 권한은 없고 생산된 프로그램 내용물에 대한 일부 규제 정도만 허용하는 정도다.

 

BBC는 이렇듯 의회와 정치권으로부터의 독립, 시청료를 통한 자체 재원의 확보, 양질의 공익적 프로그램과 콘텐츠 개발로 크게 성공한 방송 모델이다. BBC의 이와 같은 역할은 <디지털브리튼> 구성에서도 대단히 중요하다. 디지털 소외 계층의 참여와 통합의 방식에 전통적 공익 매체의 철학을 그대로 반영한다. 현재 영국은 인터넷 초고속망에 대한 일반 기업 공급업자들이 망건설을 유보하면서 산간벽지나 시골 등 전국가구의 3분의 1이 네트워크망의 혜택을 전혀 입지 못하고 있다. 이를 본 BBC는 시청료의 약 2억 파운드(4천억원 정도)를 초고속인터넷망 사업에 투자하겠다 밝혔다. 또한 BBC의 가장 성공적인 인터넷 콘텐츠서비스 사업인 아이플레이어(iPlayer)에서는 방송후 7일 이내의 거의 모든 프로그램을 VOD로 무료 시청할 수 있는 시스템을 확보하고 있다. 서비스 개시후 1년간 (2007년 12월~2008년 12월) 2억 7천여건의 프로그램 전송할 정도로 급성장하고 있다. 결국 전통적 공영방송으로서 BBC 모델이 새로운 디지털 영역에서도 그대로 이어져 공익성을 살리는 방식으로 사업 다각화가 이뤄지고 있는 것이다. 소외없이 보다 많은 이들의 방송 접근권과 시간과 장소에 구애받지않는 방송 액세스를 보장하려는 노력이 인터넷 방송 사업으로 이어지고 있다.

 

이미 국내에서도 <디지털 브리튼> 보고서 내용에 대한 소개가 크게 이뤄졌다. 하지만, 이를 소개한 언론과 정부 기관들은 영국 디지털 정책의 핵심을 보지 못한다. 디지털화를 통한 이익과 장점들을 국민 골고루 공평하게 누리고, 이들 모두에게 디지털 참여와 통합을 통한 접근성 향상에 기대를 걸고 있음을 강조해야 한다. 예를 들어, 사실상 기업들의 디지털 영역에서의 독주를 막기 위해 보고서에서 ‘산업적 행동주의’(industrial activism)란 용어를 쓰는데서도 잘 알 수 있다. 산업 발전이나 일자리 창출에도 국가가 시장 개입을 통해 공익 서비스를 확대하기 위해 개입해야한다는 주장이다.

 

디지털 전환과 관련해서도, 2012년 영국의 디지털 텔레비전 보급률이 95%까지 이뤄질 것이란 전망치가 나온다. 이미 2001년부터 영국 정부는 디지털 전환을 주도하면서 대국민 홍보와 관련 사업자들(방송사, 가전사 등)과 시민단체 등이 참여하는 디지털 전환 기구 ‘디지털 UK'를 운용해왔다. 이 또한 디지털 전환의 논리를 시민 후생과 보편적 서비스 측면에서 접근하고 있다.

 

땅 면적이나 유구한 역사를 따져보면 비슷해 보이는데, 참 서로 많이 다르다. 우리는 물리적 망 사업에서 크게 성공했지만, 서투른 디지털 전환 추진에다 시민들의 디지털 참여와 통합은 사실상 시장과 산업논리 챙기고 난 뒤에 여유되면 뒤돌아보는 목표치가 아니던가. 그래서 더욱더 의회 민주주의의 오랜 전통으로부터 방송의 공익성이 흔들림없이 보장받고, 디지털 신규 정책과 사업에서조차 그 민주적 전통과 재정적 기부로 전이되고 힘이 되는 영국 사회가 한없이 부럽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