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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통] 미국 초고속 인터넷망에서 늦깎이, 하지만 아래로부터의 보편적 서비스 노력

미국 초고속 인터넷망에서 늦깎이, 하지만 아래로부터의 보편적 서비스 노력

 

 

2009. 10. [월간 통, 정보화진흥원]

 

이광석

   93년 미국에서는 클린턴-고어 행정부에 의해, 너무나도 잘 알려진 '국가정보기간망'(National Information Infrastructure), 일명 '정보초고속도로'(Information Superhighway) 사업이 제안된다. 미 대선 당선 전부터 이 젊은 두 콤비가 주장했던 것은, 한마디로 물리적 공간에서 마냥 전자공간을 시장화하는 방안이었다. 광통신으로 초고속망도 깔고 그 곳에다 돈되는 사업를 기획하고 저작권 체계도 정비해 미국 주도의 새로운 경제 도약을 삼자는 야심이 깔렸었다. 적어도 WTO를 통한 전세계 통신분야 개방 압력에는 미국의 이런 입지가 반영됐다.

 

미국 등 선진국들의 이런 변화에 당시 한국의 관료들은 민감하게 반응했다. 이것이 94년 정보관련 법안을 정비해 1995년부터 2005년까지 만 10년 꼬박 진행했던 '초고속국가망'(KII) 사업으로 이어졌다. 그 와중에 통신업자들 자율에 의해 함께 이뤄졌던 '정보초고속망' 사업은 이와 같은 국가망에 힘입어 민간 인터넷망으로 꾸준히 성장한다. 전자는 전국에 산재한 국가 기관들과 학교들을 연결하는 역할을 맡았고, 후자는 소위 민간 인터넷 접속 환경을 개선하는데 기여했다. 2001년에 이미 1천만 가구가 초고속 인터넷을 쓰고, 이제는 인구의 95%가 접속하면서 인터넷은 한국민에게 삶의 필수 요소가 됐다. 더불어, 해외 언론들과 정책 입안자들의 극찬을 받는, 우리의 '브로드밴드 천국'의 건설은 사실상 초고속망의 성공 시나리오에 다름 아니다.

 

이렇게 장황하게 우리의 초고속망 사업을 공치사한 이유는, 한국이 벤치마킹했던 미국의 초고속인터넷 사업이 우리와 달리 크게 실패했기 때문이다. 90년대초 두 정·부통령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AT&T 등 미국내 거대 통신기업들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국내에선 국가 지원을 통해 통신기업들이 광통신을 전역에 까는데 성공했으나, 2천년대 중반까지도 미국은 사정이 달랐다. 연방 정부의 정책 제안이 각 주정부에 미치는데 힘이 한참 모자랐고, 기업이 우리처럼 정부의 한마디에 쉽게 움직이지도 않았다. 결국 통신회사들은 통신망 개선 사업을 게을리했고 기존의 노후한 구리선을 이용해 서비스를 계속하면서 초고속 인터넷망 설비를 그대로 방치했다. 그러나, 최근 몇 년 사이 몇몇 주 정부들이 거세게 미국의 초고속 인터넷 상황을 비판하면서,  미국의 기반 사업 움직임이 남다르다. 2007년 자료 기준으로 보면, 가구당 초고속 인터넷 보급률이 50%를 넘어섰고 최근 케이블이나 ADSL가입자 수도 급증하는 추세다.

 

누구보다 버락 오바마 행정부의 정보망 기반사업에 대한 의지는 굳건하다. 오바마 대통령의 인수위원회의 핵심 3대 영역 중 하나가 기술 부문이었다. 오바마는 또한 올해 2월 '미국 회생과 재투자법'(ARPA)에 서명을 했고, 현재 상무성의 연방정보통신국(NTIA)과 농무성의 지역 유틸리티 서비스(RUS)에 미화 280억 달러의 예산을 배정한 상태다. 현재 2천 2백여건에 이를 정도의 초고속 인터넷 사업 신청서가 접수되었는데, 이미 이 숫자는 배당된 예산의 7배 정도라 하니 이도 심사를 통해 우선 집행 대상을 추려야한다. 지원 대상은 주 정부, 지역 자치 단체와 정부, 비영리 단체, 도서관·대학·지역 병원 등을 주재하는 기관들, 그리고 공공 안전 조직들이다. 미국도 한국처럼 아직까지 인터넷은 공중파 방송과 전화처럼 보편적 서비스에 포괄할 것인지에 대한 포괄적 합의가 이뤄지지 않았기 때문에, ARPA와 같은 특별 정부 예산을 통한 간접 지원이 주종이다.

 

이번 망사업의 50개 주 지원 사업들은 원격교육, 원격진료 및 초고속인터넷 프로그램 지원이다. 효과는 보다 많은 이들이 경제적 수입에 상관없이 지역적 격차 없이 초고속 인터넷에 접근할 수 있고 양질의 서비스를 누릴 수 있는 기반 조성이다. 미 상무성과 농무성 중심의 초고속 인터넷 사업 구상에 발맞춰 미연방통신위원회(FCC)는 8월 내내 관련 워크숍과 10월말까지 관련 초고속 인터넷망 기반 사업과 관련된 공공 의견 청취를 받고 있다. 지원 대상에 따라 내용이 달라지겠지만 정부 지원의 원칙으로 주로 논의되는 기조는, ‘커뮤니티가 지닌 유무형의 자산에 기반한 지속가능한 발전’ (Asset-Based Community Development, A-BCD) 모델이 크게 설득력을 얻고 있다.


90년대초 연방 수준에서 제안된 미 ‘정보초고속도로’의 의도가 순수 시장의 논리로 기획됐다면, 이번 오바마 정부의 초고속 인터넷 서비스망은 맥락이 다르다. 인터넷을 보다 아래로부터 사고하는 정책 판단이 개입되어 있다. 명시적으로 ‘보편적 서비스’에 대한 언급이 없으나, 이제 인터넷을 사회의 소외되고 약소한 계층을 위한 보편적 접근의 시각에서 바라보고 있다. 사업 평가와 지원 대상과 방식을 결정하기 위한 미 연방 정부의 수많은 회의와 워크숍, 공청회를 보면서 우리에게 많이 부족한 것을 그들이 지녔다는 부러움이 든다. 정보화 정책의 민주적 의견 수렴 과정이란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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