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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e세상] '길거리 인터넷' 시대

'길거리 인터넷' 시대 이광석·뉴미디어평론가 불어나는 살을 감당못해 요즘 운동을 시작했다. 서른 중반의 내 나이에 다른 점잖은 종목들 을 제껴놓고 '과격한' 농구를 무리해 붙잡았다. 농구에 치명적인 '짧은' 키까지 겸비하고서 말이 다. 그러면 어떠랴. 공던지며 살을 털어내는데 내 목적이 있으니 뭐 이런 신체적 난관쯤이야 대 수가 못됐다. 무더운 더위에 석달 남짓 용쓰며 이곳저곳 농구장을 전전해 다행히 조금 살빼는 성과를 거둔 것 외에도 공놀이하면서 하나 건진 깨달음이 있었다. 동네 농구가 대안적 인터넷 환경과 쫙 겹 쳐지는 착시가 왔던 것이다. 갖다 붙이자면 '길거리 인터넷'(Street Internet)이라 말할 수 있는 인터넷의 민주적 밑그림을 길거리 농구를 하며 감잡았다. 보통 '길거리'는 집을 벗어나 차들과 사람들이 오가며 서로 마주치는 공적 장소를 지칭하지 만, 형식과 틀에 구애받지 않는다는 이차적 의미의 쓰임새도 있다. 홀로 동네 농구장에 나가 공 을 던지다보면 난생 처음보는 사람들과 격없이 만나 같이 경기를 하다가 헤어진다. 길거리에선 프로농구처럼 골득점이나 반칙, 도움주기 등의 선수 전적이 죽 흘러 한눈에 타인의 정보를 파 악할 길이 없다. 그저 같이 서로 모여 몸풀다 직감적으로 수준맞는 사람끼리 조를 갈라 짜고 놀이를 한다. 편을 먹는데 공넣는 실력도 짧은 키도 성별도 인종적 차이도 문제가 못된다. 평등 하게 놀이에 임하고 진행하면서 스스로 알아서 제 역할을 찾아간다. 반면 프로농구는 꼭 짜여진 대진표, 프로 선수들의 이적에 오가는 거액의 몸값, 초대형 돔의 실내 구장과 넘쳐나는 관객, 상업 광고와 돈의 흔적들 등을 주요 특징으로 한다. 바깥 대기의 열기나 흙 냄새와는 무관하게 인공적으로 조절된 실내에서 치러지는 프로 경기는 공놀이를 박 제화한다. 간혹가다 키작은 선수의 멋진 기량도 맛볼 수 있지만 역시나 경기의 주도는 전체 평 균키 이상의 선수에 의존한다. 남녀 성별에 따라 가르고, 고액의 연봉을 받는 대접받는 선수들 만 추려 경기를 하는 것도 그 자유로운 평등성에 위배된다. 그 때 그 때 동네마다 수백수천의 길거리 농구단들이 짜여지면서 수많은 선수들이 서로의 기량을 펼치는 것과 달리, 프로농구는 매년 반복되는 경기에 스타의 이미지만을 재생산한다. '단지 재미로'(Just for fun) 오픈 운영체 제 리눅스(Linux)를 개발했다는 리누스 토발즈(Linus Torvalds)처럼, 길거리 농구는 전업 선수 가 주종을 이루는 프로와 달리 그저 재미삼아 즐기는 놀이가 중심이다. 또한 프로가 중앙화된 거대 경기장들을 중심으로 펼쳐진다면, 길거리 농구는 동네를 중심으로 지역화되고 분산된 형 태의 자유로운 놀이를 택한다. 물론 구경을 위한 접근에 있어서도 프로는 화폐 지불 능력에 따 라 강제로 간섭권을 발동하나, 길거리는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 길거리 농구는 또한 그들만의 영웅을 자생적으로 키워낸다. 상업화된 미 프로농구의 대안으 로 매년 뉴욕 할렘 동네에서 개최되는 길거리 농구대회의 아마추어 선수들처럼, 입소문으로 전 해져 유명해진 길거리 영웅들이 존재한다. 상업적으로 만들어진 프로 선수들과 달리 이들은 매 사에 대기업의 냉혈한 상업성에 비판적이다. 기업들의 장단에 길들여지는 것을 거부하고 길거 리를 주무대로 활동하는 출중한 기량의 선수들이다. 이들은 이웃의 수많은 친구들과 경기를 치 르면서 열린 무대를 통해 실력을 갈고닦으며 성장한 길거리의 우상이다. 그 전에도 인터넷에는 영웅들이 있었다. 새로운 시대의 가치를 만들어가는 디지털 엘리트, '디제라티'(Digerati)라는 과분한 명성까지 얻었던 스타들이 존재했다. 마치 프로농구의 전업 선 수들처럼 그들은 고액의 몸값을 받으며 잘 준비한 미래 청사진을 들고 주식 시장을 현혹시켰 다. 이들이 이른바 '신경제'라 지칭했던 구단의 선수들이었다. 한 때 이들은 여론의 우상이었다. 이제까지 이들의 시장 행동과 말한마디는 미래 사회의 생존을 위해 배워야할 덕목과 가치로 받 들여졌다. 마침내 시장에 거품이 빠지자 급조된 상업적 영웅들도 시들해졌다. 정부가 밀고 주식 을 띄우고 여론을 움직여 급조해 만들어낸 이들의 그럴듯한 이미지는 이제 더 이상 모범도 우 상도 아닌 것으로 입증됐다. 디제라티는 신경제마냥 주조된 헛된 상업적 영웅상이었던 것이다. 어디든 수시로 벌어지는 길거리 농구처럼 인터넷에도 자유 소통의 장소들이 눈에 점점 많이 띈다. 이제 그런 길거리 인터넷에 상업적 스타 선수들을 밀치고 자유롭고 감성 풍부한 신진 선 수들이 실세로 자리잡고 있다. 얼마전 꽃다운 나이에 스스로 목숨을 끊어 주위를 안타깝게 했 던 파일공유 프로그램 그누텔라(Gnutella)의 공동 개발자 지니 칸(Gene Kan), 아이디어의 자유 를 외쳐온 리처드 스톨만(Richard Stallman), 열린소스 운동의 에릭 레이몬드(Eric Raymond), 리누스 토발즈, 엠피3 파일의 대안으로 오그 보비스(Ogg Vorbis)를 개발한 크리스토퍼 몽고메 리(Christopher Montgomery), 다양한 사회적 공유 프로그램의 국내외 개발자들이 바로 길거리 인터넷의 아마추어 영웅들이다. 이들의 공통점은 대기업들과 비친화적인데다 언론의 큰 주목을 끌진 못해도 길거리에서 다져 진 실력의 검증으로 성장한 인물들이다. 이들은 여러 사람들과 부딪히며 갈고닦은 실력과 정보 교류로 얻은 능력을 발휘하며 인터넷을 좀더 살맛나고 정이 느껴지는 동네로 바꾸려 한다. 길 거리 농구에서처럼 이 신진의 2세대 영웅들은 인터넷 저잣거리에서 자유로운 룰과 평등한 '열 린' 관계들을 실천하는 법을 배우고 가르쳐왔다. 이들은 돈으로 주조된 프로 신경제의 주식시장 보다는 땀과 열기로 가득한 길거리에서 민주적인 법칙을 만드는 일에 골몰한다. 프로 신경제의 텃세에도 불구 길거리 인터넷이 점점 번성하는 까닭은 이런 능력있는 아마추어 영웅들의 증가 때문이다. 이런 추세대로라면 장차 길거리 인터넷의 논리가 역으로 프로를 접수하는 사태가 터 무니없는 공상만은 아니리라. 이것이 내가 농구로 뱃살을 털어내면서 인터넷 권력 교체의 미래 까지 꿈꾸었던 정황이다. (아름다운 e세상, 2002.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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