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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e세상] 주눅든 '무어의 법칙' 되살리기

주눅든 '무어의 법칙' 되살리기 이광석 (뉴미디어 평론가) 요즘 내게 새로운 병이 또 슬슬 도진다. 5, 60년대 클래식 엘피(LP) 수집에 김이 빠지자마자, 다큐멘터리 비디오를 구하는데 재미를 붙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일반 시중에서 살 수 있는 비디오 가격대와 얼추 비슷한 것들을 인터넷에서 하나둘 구입했지만, 주머니 사정이 한계에 봉 착했다. 먼지쓰고 발품 팔며 잘만 사면 거의 공짜인 엘피 가격에 비한다면 다큐 비디오는 내겐 가히 금값이나 다름없었다. 다큐라고 하면 개별 구입보다는 도서관 등 그 구매처가 제한되어있 고, 시장성과 무관하여 가격대 또한 제작물의 재투자를 따져 공부하는 학생 주머니 사정으로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높았던 터였다. 결국 실속있게 내가 찾아야했던 곳은 대학 도서관 영상 자료실이었다. 자료실의 다큐 비디오들의 복사본을 만들면서 일상 속에 스며든 저작권의 위세를 톡톡히 배 우게 됐다. 개인의 '정당한 사용'(fair use)이 자주 저작권이 쳐놓은 기술적 현실에 부딪혀 튕겨 나오는 느낌 말이다. 처음에 봉착한 경험은 도서관에서 대출 가능한 다큐를 들고 집에 가져와 녹화했을 때의 당황감이었다. 돈 들여 구입한 새 것과 집에 묵은 비디오 리코더를 서로 연결해 놓고 암만 녹화를 해도 화면이 영 엉망으로 일그러졌다. 가전업체의 기술자에게 까닭을 물었더 니, 불과 몇 해전에만 해도 없었던 복제 방지 장치들이 요즘 리코더들에는 죄다 설치되어 있다 고 설명한다. 비디오 리코더 기계 자체에도 리코딩 기능을 약화시키는 제품들이 요즘 추세이므 로, 기왕에 구입하려면 좀 오래된 중고를 찾아보라는 친절한 충고도 덧붙인다. 비디오 리코더만 이 아니었다. 최신의 다큐 가운데는 아예 복제방지를 해놓은 특수 테이프가 간혹 눈에 띄었다. 헐리웃에 반대하여 비디오 리코더의 녹화 기능이 인정된 지 이미 25년이 지난 지금, 눈에 보이 지않는 신종의 기술적 제약들이 다시 고개를 쳐들고 있는 것이다. 장차 비디오 리코더는 허울 뿐이고 그저 플레이어로만 기능하는 시대가 올 수도 있겠다 싶다. 아날로그 기술에 미치는 이같은 저작권의 공세만으로도, 디지털 매체나 기계에 미치는 그 힘 을 가히 짐작하고도 남을 만하다. 이제 저작권은 법조문과 함께, 이를 보장하는 기술적 수단 자 체의 코드 속으로 기어든다. 알려진대로 '기술적 코드'의 조작이 한결 법보다 효과적인 저작권 의 응원군이 되가고 있다. 그래서, 컴퓨터에서 전혀 재생 불가능한 반면 오디오 전용 씨디(CD) 플레이어에서만 들을 수 있는 음악들이 등장한다. 냅스터나 소리바다의 일대일(P2P) 기술을 이 용한 파일공유에 대적해 불구화된 엠피3도 나타난다. 이들은 일정 시간이 지나거나 이용 횟수 가 만료되면 불능이 되는 유사품들이다. 올들어 미국내 전체 4할에 육박하는 디브이디(DVD) 대여 시장이 가히 비디오 시장을 집어삼키려는 형국이지만, 이용자들이 비디오만큼이나 디브이 디를 가지고 할 수 있는 것은 아직까지 전혀 없다. 지난 60여년간 11배나 강력해졌다는 저작법 과 동행하는 기술적 코드가 정보 내용의 자유로운 흐름과 이용을 막는 방벽으로 등장한다. 하지만, 사태가 꼭 절망으로 치닫는 것만도 아니다. 이 말은 저작권에 대항한 인터넷 이용자 들의 자유로운 정보 공유 정신이 곧 희망임을 의도하는 역설이 아니다. 저작권 옹호론자와 능 동적 이용자의 전선으로 저작권 지형을 축소하기에는 현실이 그리 밋밋하지 않다. 새롭게 부각 되는 대칭점은 최근 동반에서 적대로 돌아서고 있는 헐리웃과 실리콘밸리의 관계에서 발견된 다. 저작권 옹호 진영 내부에 균열이 생기고 있는 것이다. 컨텐츠 보호를 극대화하려는 헐리웃 의 요구에 지친 컴퓨터, 전자업계는 이제부터라도 기술 혁신의 원칙을 충실히 따르려 한다. 과 도한 저작권의 요구에 밀리다간 기술 발전과 시장 확보의 폭넓은 기회가 막힐 수 있다는 실리 콘밸리 내부의 상황 판단이 작용했다. 이제까지 음성이든 영상이든 레코딩이 가능한 새로운 실리콘밸리 기술들은 헐리웃의 검열 대 상이었다. 헐리웃의 입장에서 보면 다음과 같은 한 엠피3 플레이어의 광고 문구, "내려받아 편 집해 구워봐"(Rip. Mix. Burn.)란 말은 저작물의 '해적질'을 부추기는 혁명적 수사와 같다. 18개 월마다 벌어지는 기술 혁신의 '무어의 법칙'은 속내를 들여다보면 헐리웃의 저작권에 사사건건 제약당했던 실리콘밸리의 기술발전의 한계 법칙이었던 것이다. 어쨌거나 실리콘밸리가 헐리웃 과 틀어지며 이용자편에 섰던 것은 시장 예측에 근거한 합리적 행동에 불과하다. 각종 기술에 과도한 저작권 장치들을 도입할수록 이용자들의 소비 심리가 크게 위축되며, 이들의 정당한 이 용이 저작권을 해치기보다 소비의 기폭제로 기능한다는 점을 실리콘밸리의 정서로 충분히 간파 했던 것이다. 물론 이들간의 갈등이 파경을 예고하지도 본질적이지도 않다. 서로들 그 의존적 관계가 확인 되면 저작권의 기술적 코드들이 헐리웃의 입맛에 맞게 슬며시 들어앉은 채 신상품 진열대에 놓 일 확률도 크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리콘밸리마저 헐리웃에 대해 쓴소리를 내뱉거 나 자주 충돌을 일으키는 것은 확실히 심각한 수위에 이른 저작권의 남용에 제동이 걸리고 있 음을 반증한다. 이는 저작권에 의해 규정된 왜곡된 기술 발전보다는 오히려 능동적 이용을 보 장하는 기술적 대안들이 상품 시장에 강한 동기부여를 하고 있다는 점을 인정하는 대목이다. 사실이 진정 그렇다면, 개인적으로는 다큐 복사본을 만들기 위해 부딪혔던 여러 기술적 제약들 은 단지 헐리웃의 입김이 너무 커 실리콘밸리가 잠시 주눅든 때 개발된 기술 발전의 부정적 효 과에 불과했었다고 믿고 싶다. (아름다운 e세상, 2002.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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