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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e세상] 자유로운 풍경이 우리 인터넷을 살린다

자유로운 풍경이 우리 인터넷을 살린다 이광석(뉴미디어 평론가) 얼마전 새 정부 출범에 맞춰 정통부의 대국민 캐치프레이즈 공모가 난 적이 있다. 공모 내용은 언제 어디서나 초고속 접속이 가능한 우리 인터넷의 강점을 잘 살릴 것을 주문했다. 이게 정말 딱이다 싶었던 적격이 없었던 모양인지 심사 결과 대상은 없었다. 당시 필자도 몇 자 끄적이다 보내길 포기한 것들이 있다. '자유로운 풍경이 우리 인터넷을 살린다'와 '생 긴대로 냅둬라, 우리 인터넷' 이 둘을 놓고 고심했다. 심사에 올랐다면 대상감은 고사하고 그대로 구겨질 처지였지만. 생긴대로의 자유로움이 뭘까 고민하면 최근 텍사스주 오스틴시에서 열린 한 정보문화 관 련 행사가 퍼뜩 생각난다. 무엇보다 '자유소프트웨어재단'의 리처드 스톨먼(Richard Stallman)의 강연이 머리에 스친다. 내겐 정보 자유의 철학을 외치는 그의 거친 입보다는 자유스런 발에서 그 멋대로의 자유로움이 느껴진다. 3년전 국내에 초청되어 강연한 후 두번 째 보는 그의 모습은 한마디로 무격식이다. 덥수룩한 수염, 멋대로 튀어나온 배, 벗어제낀 신발, 망가진 히피가 따로 없다. 공석에서 서양인들이 여간해선 내놓지않는 발을 시원스레 내놓고 강연 내내 서서 이를 꼼지락거리며 거친 입담을 늘어놓는 것은 그 때나 지금이나 여 전했다. 스톨먼의 발치 밑에 있던 나를 포함해 어느 청중도 그의 발냄새가 구리다고 박차고 나가는 이가 없다. 그의 말에 주목하려들지 누구 하나 발을 문제삼지 않는다. 오히려 청중은 예정 시간보다 2시간을 더 머무르는 진지함을 보여줬다. 그의 강의에 유난히도 동성애자들이 많았던 것도 새롭다. 누군가 자기 옆에 게이가 앉았 다고 수군거리는 이는 전혀 없다. 갑자기 홍석천이 떠오른다. 인터넷 방송으로 최근 방황과 재기를 꿈꾼다는 그의 모습에서 안스러움이 느껴진다. 한 사람의 '커밍아웃'을 왕따시키는 우리 사회의 위선과 폭력에 섬뜩하다. 그저 생긴대로 봐주지 않고 기득권에서 나오는 독선 과 아집으로 모든 것을 재려는 광기가 느껴진다. 이어 다른 방에서는 문신의 수준으로 보건 대 조폭의 우두머리쯤으로 보이는 이와 젖비린내 날 정도의 어린 사람이 강연을 한다. 그들 의 외모와 지위는 여전히 문제될 게 없었다. 오히려 자유분망한 외모가 그들의 정보업계 종 사 경력에 빛을 더한다. 과거 몇 년전부터 시작해 요즘 부쩍 늘어나기 시작한 미 젊은이들의 하위문화의 한 형태 로 '혀찢기'(tongue splitting)란 것이 있다. 문신이나 피어싱(piercing)이야 이미 보편화됐다. 하지만 혀를 가르는 행위는 좀처럼 따라잡기 어려운 문화 현상이다. 잘못하면 언어 능력을 상실하거나 미각을 잃을 정도라니 섬뜩하기조차 하다. 그럼에도 젊은이들은 열광한다. 혀찢 기의 근원 파악이 어렵지만 뱀을 모방해 그 혀를 형상화한 것만은 분명하다. 어쨌거나 이 극단의 문화 현상으로 충격받은 윤리주의자들이 곧바로 법석을 피웠지만 표현의 자유를 존 중하자는 의견이 우세하다. 합법적인 시술에 의해 혀를 가른다면 인정못할 이유가 없다는 지적이다. 스톨먼의 발만큼이나 문화 현실의 자유로움이 지켜진다. 혀찢기와 같은 신체 변형 행위를 변두리의 극단적 문화 양식으로 치부할 수 있지만, 이의 인정이 현실의 풍요에 기여한 측면도 이미 존재한다. 소위 디지털 아방가르드 행위 예술에 신체 변형은 중요한 표현 방식이기 때문이다. 프랑스의 올랑(Olan)은 70년대부터 수십번의 성형수술을 재현하며 자본주의판 아름다움의 물신성을 조롱했다. 호주의 스텔락(Stelarc)은 신체 확장의 실험을 끊임없이 시도하며 자신의 피부를 바늘로 뚫어 실에 의존한 공중 부양 을 시도했다. 이러한 자유로운 문화의 토양은 90년대 스텔락 자신의 팔과 다리의 신경과 근 육에 반응하는 제3의 사이보그 팔과 다리 시연으로 발전한다. 또한 사이버네틱스 연구자 영 국의 케빈 워익(Kevin Warwick)같은 이는 자신의 아내와 함께 신체 반응의 신호를 컴퓨터 에 전송하는 칩을 팔의 신경망 안으로 이식하는 실험을 해 주목을 끌기도 했다. 초창기 극 단의 신체 변형 문화가 디지털 아방가르드 예술의 지평을 넓히는 단서가 된 셈이다. 스톨먼을 보러온 게이 청중들, 그의 구린 발, 혀찢기 등의 신체변형 문화가 가진 공통 분 모는 지칠줄 모르는 자유로움에 있다. 이들은 천편일률의 잣대로 억누름이 없이 그저 생긴 대로 놔두면 기대 이상으로 잘 자라는 습성이 있다. 새로운 디지털 문화의 발전을 개척하는 힘은 이런 막생겨먹은 개성을 잘 북돋아주는 노력에 달려있다. 반면 홍석천에 드리운 사회 의 그늘, 인터넷 누드게재 교사 징계, 동성애자 사이트 폐쇄, 인터넷 실명제 거론 등은 권위 와 통제의 살벌한 칼날들이다. 자유로움은 고사하고 인터넷의 자유로운 토양조차 가차없이 목을 친다. 네티즌들의 자유로운 토론과 개입이 대선의 당락에 큰 영향을 준 것처럼, 진정한 자유의 역동성이 가득해야 인터넷이 무럭무럭 자란다. 그저 초고속 통신망 깔아놓고 시민들 앉을자 리 마련했다고 뚝딱 만사 해결될 것도 아니요, 국제행사 한다고 길거리 노점상들 때려잡듯 인터넷에 윤리를 세우고 질서확립 한다고 외친다해서 더더욱 될 일도 아니다. 윤리와 통제 의 규격에 설사 맞지않아 다소 삐져나오더라도 그대로 놔두는 여유가 필요하다. 그런 자유 로운 환경이 결국은 인터넷 발전에 큰 밑천이 된다는 점을 깨달아야 한다. 올해 공석이 된 정통부 캐치프레이즈 공모 대상을 그래서 내맘대로 '자유로운 풍경이 우 리 인터넷을 살린다'로 정한다. 많은 돈들여 정보 복지 구현하는 것도 중요하고 밖에서 비치 는 우리의 정보 경쟁력의 규모도 중요하지만 네티즌들에게 활동과 행동의 자유로움을 온전 히 부여하는 일만큼 근본이 되는 일이 어디 있겠는가. 언제 어디서나 누구나 혼쾌히 스톨먼 식 구린 발에 취할 그 때가 오길 기대해 본다. (아름다운 e세상, 2003.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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