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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e세상] '품행제로' 쾌륜주행(快輪走行)의 두발 바퀴 찬가

'품행제로' 쾌륜주행(快輪走行)의 두발 바퀴 찬가 : 스잔의 롤러에서 아마존 세그웨이까지 이광석(뉴미디어 평론가 CyberMarx.Org) 난 요즘 킥보드를 탄다. 소유자는 물론 내 아들이다. 하지만, 타는 시간이나 횟수로 따지 면 내꺼나 매한가지다. 쉽게 높이 조절이 되고 어지간한 무게는 견디게 만들어져 가능한 일 이다. 한발로 세게 차고 다른 발로 균형잡는 그 맛이 남다르고, 경사진 내리막을 달리는 속 도감이 좋아서 탄다. 어느새 이 두발 쾌륜이 없으면 생활이 무료할 정도가 됐다. 자전거를 처음 접했던 때처럼 처음엔 넘어질까 겁나고 균형잡는 것도 힘들지만 누구나 곧 이 물건에 쉽게 적응한다. 킥보드에 익숙해지면 다음엔 길의 생리를 배운다. 이제까지 보지 못했던 길이 가진 다양한 결을 느끼게 된다. 길의 굴곡, 턱, 웅덩이, 장애물, 경사, 재질 등 순조로운 주행을 위해 이 모든 것에 대한 주의력은 필수다. 당연히 자주 달릴수록 사사로운 길의 질감까지 눈에 들어오고 그 각각이 주행코스에 포함된 특징으로 자리잡는다. 이 두발 쾌륜은 길에 대한 감각 변화는 물론이고 개인 습성도 변화시킨다. 매일 수백여 미터 앞에 놓인 우편함을 뒤지러 가거나 동전 세탁을 하러 언덕진 곳을 내려가거나 이웃집 에 놀러 가거나 할 때마다 이미 내 손은 킥보드의 핸들을 잡는다. 기분이 꿀꿀해질 때도 이걸 끌고 동네 한바퀴면 그 순간 자유롭다. 무공해 두발의 운송장치와는 인연이 많다. 몇 백원에 빌린 자전거로 온종일 발 굴리던 여 의도 앞 광장, 그리고 영화 <품행제로>에서 80년대 중반 가수 김승진의 '스잔'이 울려퍼지 던 탈선의 주무대 '롤러장'은 순진했던 중딩과 날날이 고딩 시절에 또래들과 줄곧 찾던 마음 의 고향이기도 했다. 이제와 보면 당시 제도 이탈과 탈선에 희희낙락했던 시절이라 두발 물 건의 묘미를 제대로 느껴보진 못했던 것 같다. 30대 중반을 넘기며 이제사 아들의 킥보드에 서 쾌륜의 맛을 찾은 것이다. 국내에선 '바퀴신발'같은 기발한 물건도 나왔지만, 내겐 남다른 충격 경험이 직접적으로 두발 장난감에 크게 매료된 동기다. 인터넷 서점 아마존의 첫화면에 가보면 큰 두발 바퀴를 가진 이상한 장난감이 판매된다. 6백여만원을 호가하는 이 비싼 장난감의 이름은 '세그웨이 인간 운송기'(Segway Human Transporter)다. 이전까지 무심하다 한번은 우연히 대학 캠퍼 스에서 두 젊은 남녀가 이 이상스런 기계를 몰고가는 것을 실제 목격하곤 그 경이로움에 입 이 얼어붙던 적이 있었다. 자가충전식 배터리를 가진 이 장난감은 꼭 미래 어느 도시에서나 상상할 수 있는 은색의 차가운 디자인에 잔잔한 기계음을 토해내며 내 옆을 스르르 지나쳤 다. 세그웨이에 비하면 킥보드는 턱없이 원시적이었지만 이 일로 어느새 두발 가진 장난감 들에 마음이 쏙 빠질 수밖에 없게 됐다. 타다보니 킥보드는 영락없이 초창기 인터넷 접속의 짜릿한 기분을 상기시킨다. 스케이팅 보드를 잘 타 미국 아이들의 우상이 된 토니 호크(Tony Hawk)나 '스타' 게임을 잘 해 영웅 이 된 프로 게이머에게서 드는 정서상의 차이란 크게 없어 보인다. 내 스스로도 요샌 킥보 드 타고 우편함을 들려 편지를 확인하고 오면 마치 회선을 이용해 전자우편을 받는 기분이 든다. 익숙해지며 느끼는 재미나 구불구불 돌아가는 길을 지나며 느끼는 아기자기한 속도감 이나 그 까닭에 드는 자유스러운 기분 등이 서로 엇비슷하게 일치한다. 이런 기분이 부자간 30년 세월의 간극을 쉽게 타넘듯, 인터넷을 사용하며 세대간 차이와 장벽을 쉽게 무너뜨렸 던 요인인 듯 하다. 근데 하나 문제가 생겼다. 아들과의 30년 세월 간극은 우습게 무너졌는데 오히려 주위 어 른들의 시선이 곱지 않다. 내가 사는 동네의 미국인들이야 내 노는 꼴이 전혀 문제될 것 없 지만, 역시 걸리는 것은 동류 한인들이었다. 아는 사람들의 반응은 "그거 어른도 탈 수 있는 거요?"나 "살 빼러 운동하시나 보죠?"나 "그래서 살이 빠지나"다. 내 나이에 놀고 있는 것으 로 봐주질 않는다. 이 정도면 과분한 평가다. 모르는 이들의 시선은 더욱 혹독하다. 뭐 씹은 듯 쳐다보거나 정신나간 사람 취급하듯 혀까지 찬다. 상식의 권위로 보면 내 행위는 'X팔린' 짓이다. 구태의 불편한 응시를 대하면 자연히 내 자유는 움츠러든다. 거침없이 다니던 대로와 대 낮을 피해 밤에 타거나 집 주위만 돌거나 하는 일이 빈번해진다. 세대간 장벽은 극복해도 동류 세대의 편견을 극복 못한 현실의 아이러니다. 새롭게 부상하는 기술과 문화 도입기에 이런 일은 흔하다. 분명 사고와 행동에서 더 큰 자유로움이 수용되야 함에도 불구하고 처음 부터 구태의 잣대로 새로운 것에 모멸감을 안겨주려는 태도가 존재한다. 낯선 것들에 대한 지나친 경계와 선입견은 정작 이로운 것들을 주눅들게 한다. 예컨대, 인 터넷상의 음악 파일공유나 게시판 문화 등은 새로운 자유의 문화와 기술이다. 이에 대한 적 대의 시선은 열심히 킥보드를 끄는 내 모습에 처음부터 혀를 차는 태도랑 하등 다를 것 없 다. 있는 그대로 봐주려 않는다. 소수, 주변, 개인, 자유, 공유 등의 낱말은 아직도 사회 체제 의 부작용이다. 뭐든 옛 틀에 사지를 꼭꼭 집어넣으려 든다. 현실의 권위에 눌려 킥보드를 타기 위해 박쥐가 된 내 꼴처럼 언제 어디서 나랑 비슷한 처지의 주눅든 인터넷 기술과 문화가 현실 무대 뒤로 쓸쓸히 퇴장 당할 지 모르는 일이다. 덜컥 그런 생각에 이르니 낮이고 밤이고 대로변에서 'X팔림'을 무릅쓰고 자빠져도 꿋꿋이 킥보드를 발로 밀고 다닐 배짱이 절로 난다. <아름다운 e세상 2003.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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