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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e세상] 교육 현장에 디지털같은 자유의 바람을

교육 현장에 디지털같은 자유의 바람을 이광석(뉴미디어 평론가) 자유, 상상, 실험. 인터넷의 덕목들이다. 이는 종교적 삼위일체마냥 뗄래야 뗄 수 없는 상 호 긴밀한 가치들이다. 이 셋 중 어느 하나가 절뚝거려도 그 사회의 정보 성숙도 수준은 한 참 밑돌 수 있다. 손발과 머리가 자유롭지 못하면 상상은 고사하고 연명하기 바쁘다. 상상력 이 억눌리면 당연 실험도 기능적이고 조잡하다. 자유가 억압받아 상상이 늘 가뭄인데 무슨 기발한 실험과 아이디어가 나오겠는가. 가만 우리 현실을 보자. 한창 텔레비전에서 수험생들의 '아침밥 먹이기'와 폭주족 학생들 을 선도하는 안전 '헬멧 씌우기'가 유행했던 적이 있다. 이는 교육 시장의 억압과 피말리는 경쟁 상황을 복구할 어떤 제도적 장치에 대한 눈꼽만큼의 기대치도 사라졌기에 나오는 슬픈 고백담이다. 자유를 갈구하는 아이들의 채워진 족쇄를 내칠 힘이 부족해 소시민들이 그저 멍든 상처만 어루만지는 꼴이었다. 그래서, 자유의 바람은 교실에 입성한 밥차의 향긋한 밥 냄새나 헬멧을 쓰고 퇴장하는 아이들의 뒷모습에서 기대해선 곤란하다. 한창 바람의 공부하는 학생들에 신선한 자유를 주는 것은 전적으로 사회의 책임이다. 날 아다니는 구둣발에 채이면서 자란 세대는 정신적으로 공황에다 불구가 된다. 불구가 된 상 상력으로 어디 피부 속에 실리콘칩을 심어 인터넷으로 감정 상황을 확인하는 장치를 만들 고, 의식의 확장 실험을 하기 위해 인조 로봇 팔을 만들고, 몸에 차는 컴퓨터를 개발해 늘상 입고 다니는 등의 기발한 상상과 실험이 나오겠는가. 제도권 교육은 학생들의 자유를 위해, 그리고 자유를 체험한 그들이 성장해 다시 토해내 는 가치가 바로 그 사회의 부가 된다는 점을 깊이 깨달아야 한다. 자유의 흡수력은 나이에 따라 틀리다. 자유, 상상, 실험, 뭐든 빠를수록 좋다. 인터넷의 덕목은 아이들의 교육 현장에 서 발휘돼야 한다. 의무 교육기관에서 당장 어려우면 보다 환경 조정이 유리한 대학 강의실 에서 먼저 자유의 덕목을 실천할 필요가 있다. 아직도 대학생들은 학원 특강에 길들여져 그저 교수의 어록들을 줄줄이 받아적기에 사투 한다. 교수들도 여전히 불사초를 먹었는지 가는 세월을 막고 강의가 한결같다. 미술교사의 예술이 '빤스' 벗었다는 이유로 외설이 되고, 대학 강사의 특이한 예술 강의가 찬반 격론의 화두가 되는 우리의 현실에선 자유의 바람은 아직 낯설다. 줄쳐진 길에 따라 안가고 금밟고 넘어가 권위에 도전하면 온갖 시련을 감수해야 한다. 움치고 뛰는 것도 사방 제재니 상상력 이 제대로 발동될 리가 없다. 가뭄에 콩나듯, 제대로 된 상상력의 소유자가 나타나도 어느새 억압과 권위의 칼날에 싹둑 잘려나가기 일쑤다. 다 지난 친일을 들췄다 해서, 재단의 권위를 업신여겨서, 교수의 품위를 지키지 못했다 해서, 미국을 알게 했다 해서 쫓겨나는 자유의 정 신을 가진 학생들과 학자들이 부지기수다. 판을 깨기에 현실이 가하는 힘이 너무 담대해 보 인다. 정장을 갖춰 입지 않았다 해서, 야외 학습 한번 했다해서 선생과 대학 강사가 경고먹는 비정상적 분위기라면 말해 무엇하겠는가. 그것이 오늘 우리 교육의 현실이라면 미래는 없다. 학교에서 구둣발과 매로 숱하게 얻어맞고 짓눌려 자라온 나같은 불쌍한 이들은 평생 창의력 과 무관하게 산다. 외국 교수들을 처음 보고 순간적으로 머리부터 숙이고 움츠러드는 반사 능력을 보고 있자면, 이것이 우리 교육이 내게 남긴 유일한 자랑거리같아 씁쓸했던 적이 한 두번이 아니다. 이는 동방 예의지국 어쩌구하는 것과 다른, 억압적 현실이 남긴 원초적 본능 의 허접 쓰레기에 불과하다. 외국 명문 교육 기관, 산업 현장 시찰입네 하고 나이 지긋한 행정관료나 교육자들을 내 보내 겉만 핥고 오는 관행도 그만둬야 한다. 시찰을 하더라도 교육 철학, 커리큘럼, 교수법 등이 미시적으로 관찰돼야 뭔가 소득이 있다. 그 곳에서 학생들이 누리는 자유의 정서, 상상 력의 만개, 그리고 늘 새로운 실험 정신이 대접받는다는 사실을 파악하지 못하면 말짱 시간 낭비에 혈세 축내는 여행길이다. 더불어 우리 교육 현장의 근본을 못보고 남의 성과에 입만 벌려봐야 상처받는 것은 또 다시 우리 아이들이다. 아직 희망의 거처는 존재한다. 딱 두 곳이다. 학생과 선생님, 특히 대학에서는 대학 강사. 학생은 뭐가 됐든 자유의 바람을 만끽하려는 주체이기에 항상 열려 있다. 이들의 자유는 기 성의 억압에 버튕기는 선생님들과 강사들의 자유와 상상력에 좌우된다. 서로 전자우편과 인 터넷 피드백도 주고받고, 웹 페이지도 만들고, 온라인 게임도 함께 할 수 있는 일차적 정서 공감대가 시작이다. 교실 안과 밖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작업도 중요하다. 이를 위해선 외부 인적 자원의 네트워크가 활용될 수 있다. 입시에 맞춰진 중·고등 교과과정에서는 불가능하겠지만, 다방면의 이색 전문가들, 디지 털 예술가, 벤처 사업가, 지역 활동가, 환경 운동가 등을 수업 내용에 맞춰 참여시키는 것이 필요하다. 수업 내용의 파격도 필요하다. 학생들의 상상력이 잘 발동하고 다양한 실험 정신 을 부추기는 방법이라면 모험적으로 시도될 필요가 있다. 지난 10월호 칼럼(하이퍼링크 사 회 만들기)에서 얘기됐던 교수 선발의 다층화, 학제간 프로그램 공유와 협동 과정도 함께 적극 모색돼야 한다. 공교육을 더 이상 신뢰못해 기러기 아빠가 수없이 생기고, 형편 불구하고 해외로 자식을 내보내는 우리 현실은 보기에도 참담할 지경이다. 공교육의 장에 그리고 대학에 디지털같이 자유롭고 탈권위의 자유로운 교육 철학의 새 바람이 불어, 우리 교육의 미래가 한결 밝았으 면 하는 바램뿐이다. (아름다운 e세상, 2003.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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