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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사제지간 ‘트러스트’의 종말?

<교수칼럼 -- 사제지간 ‘트러스트’의 종말? >

이광석

사용자 삽입 이미지사상가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트러스트>라는 책에서, 사회 구성원의 트러스트, 즉 신뢰 문화가 크게 쌓인 고신뢰 사회일수록 사회경제적 번영을 가져 오고, 그렇지 못한 상호 불신의 저신뢰 사회는 발전이 어렵다고 주장했다. 그는 상호 신뢰가 사회적 자본에 연결되며, 그 자체 사회·경제적 부의 중요한 원천 중 하나라고 본다.

후쿠야마의 트러스트 개념이 새로워 보이지만 사실상 한국사회에서 산업화 이래 이는 익숙했던 개념이기도 하다. 즉 트러스트란 한국사회의 여러 계급·층간 관계적 충돌을 잠재우려는 중요한 형식 논리였다. 우리에게 트러스트의 논리란 대개 그 상호 불평등과 불합리한 관계를 개선하기 보다는 갈등을 봉합하는 경제 메타포였던 셈이다. 예컨대, (슈퍼)갑과 을의 부당계약 관계, 재벌과 제휴사 수직 관계, 기업주와 (해고)노동자의 불평등 관계, 기획사와 소속 연예인간 노예계약 관계 등은 우리 사회 트러스트가 굴절돼 나타난 우울한 모습들이었다.

대학에도 여러 트러스트의 관계망이 존재한다. 그 중 학생과 교수간 신뢰망을 보자. 안타깝게도 많은 부분 사제간 트러스트의 진화 방식 또한 우리 사회의 부정적 트러스트 문화와 닮아가고 있다. 하지만, 사회적 트러스트의 굴절된 모습과 달리 사제 관계에는 뭔가 고유하고 투명한 영역이 있어 보인다.

상호 불신과 억압의 속곳을 입은 트러스트의 위장된 모습들에도 불구하고 근근이 살아남은 사제간 상호 신뢰의 고유성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난 강의와 수강이 이뤄지는 대학 ‘강단’의 특수한 장소적 의미를 중요하게 꼽고자 한다. 대학이 시장경제의 형식주의적 관계를 트러스트의 속성으로 삼은 지 이미 오래됐지만, 나름 강단이란 관계의 장소는 지식의 소통장이자 상호 교호적 트러스트를 쌓는 역할을 해온 것도 사실이다. 앎에 대한 의지와 가르침을 상호 교통하고 이로부터 지적 세계관을 형성하는 과정에서, 강단은 여전히 사제간 투명한 신뢰 관계의 형성을 돕는 장소로 남아 있다. 물론 강단에서 이들 양자간에 맺는 계약의 장치들, 예를 들어, 강의 시간, 출석, 시험, 평가 등은 일방적 통제와 강제력이기 보다는 상호 존중과 약속의 기제로 보는 편이 옳다.

대학 강단이 지닌 이렇듯 긍정적 신뢰망으로서의 역할에도 불구하고, 매 학기 강의를 시작하는 내 자신으로 돌아오면 또 다시 자괴감에 빠진다. 내가 학생들에게 과연 얼마만큼 투명한 트러스트의 덕목을 요구하고 있는지 혹은 할 수 있을지 항상 의문스러웠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학생들이 얼마나 내 강의와 뭇 강의들을 트러스트의 상대로 진지하게 고려하는 지도 여전히 오리무중이기에 더욱 그러하다.

 2013.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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