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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고좀 봐!-못 봐! 자본과 기술의 힘겨루기

광고좀 봐!-못 봐! 자본과 기술의 힘겨루기 [한겨레]2002-11-06 01판 20면 1346자 정보통신·과학 컬럼,논단 ‘지프재핑’이란 말이 있다. 요 별것 아닌 손동작이 몸을 움직이거나 혹은 누워 발가락을 뻗쳐 채널을 돌리던 기억을 우습게 만들었다. 소파에 가만히 누워 리모컨을 가지고 원격으로 요리조리 까닥거리며 채널이동(재핑)과 급속한 화면이동(지핑)을 하는 행위는 가히 혁명적 사건이었다. 보고 싶은 것과 싫은 것을 앉은 자리에서 바로 선택하자 나죽는다고 엄살부렸던 것은 광고였다.그러나 광고는 지프재핑보다 한수 위였다. 재핑은 한쪽의 광고를 벗어나려 하면 다른 채널의 광고를 접해야만 하는 ‘제로섬’의 손놀림에 불과했고, 지핑은 애써 프로그램 녹화를 해야 그나마 광고를 제치는 행위(스키핑)가 가능한 것으로 판명됐다. 결국 지프재핑은 날 때는 혁명으로 불렸다가 지금은 30초 광고문화의 순간성과 놀아나는 노예 기술로 타락했다. 상황은 또 한번 달라지고 있다. 미국에서는 광고를 건너뛰는 새로운 시청자 선택형 기술이 급속도로 늘어 공중파 방송사와 광고주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고 있다. 우선 ‘티보’ ‘리플레이티브이’ 등으로 불리는 디지털 비디오 녹화기가 바로 그것이다. 이 기계는 과거 지핑의 기술적 한계를 극복하려 한다. 최하 40시간 정도의 디지털 녹화 능력은 테이프 시대의 ‘빨리감기’를 능가하는 급속 화면이동의 가능성을 증폭시킨다. 게다가 언제든 시간을 이동해볼 수 있는 충분한 저장 능력 때문에 공중파 방송의 주시청 시간대라는 개념도 무너뜨리고 있다. 디지털 비디오 녹화기의 성능이 향상되고 가격이 같이 떨어지면서 사용인구가 늘고 있다고 하지만 기술 도입 단계라 아직 방송사와 광고주에 들이닥친 걱정거리는 아닌 듯하다. 정작 이들의 고민은 최근 유선방송과 위성방송이 설치하는 셋톱박스의 디지털 녹화 기능에 쏠려 있다. 케이블과 위성이 제공하는 간단한 광고 건너뛰기 기능이 광고로 먹고사는 공중파 방송의 수입원을 조금씩 조르기 때문이다. 미련하게도 미국 공중파 방송사들의 해법은 1984년 비디오테이프 녹화기를 막으려다 패소했을 때처럼 새로운 기기에 대한 법원의 판매금지 결정을 하염없이 기다리는 식이다. 기술은 기술일 뿐이다. 자본이 번성하는 한 광고는 불사한다. 매체의 변화는 당연히 광고 형식의 다양한 시도와 변화를 부른다. 시청자가 광고에서 달아나려 하면 아예 그 광고를 프로그램 안에 꼭꼭 잠가놓으면 그만이다. 지핑과 스키핑을 못하게 하는 신종 ‘찰거머리’ 화면 광고가 곧 즐비하게 실험될 것은 뻔한 이치다. 또 디지털의 쌍방향적 속성은 시청자의 성향을 파악한 표적 광고를 부추긴다. 그러니 지레 겁먹고 디지털 기기를 없애려는 공중파 사업자의 모습은 한치 앞도 못보는 철없는 무지에 근거하거나 알면서도 최대한 미련 쓰는 행위 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이광석/뉴미디어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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