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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6/01/06
    [아름다운 e세상] 아제이젤 대 와이파이
    두더지-1
  2. 2006/01/06
    두더지-1
  3. 2006/01/06
    [아름다운 e세상] 약장수 이동서점 절찬리에 네트 순회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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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2006/01/06
    [아름다운 e세상] 열린 정보정책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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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2006/01/06
    [아름다운 e세상] 속도와 지체의 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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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2006/01/06
    [아름다운 e세상] '길거리 인터넷'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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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e세상] 아제이젤 대 와이파이

아제이젤 대 와이파이 이광석(뉴미디어평론가) 얼마전 날도 춥고 몸도 으실해 의례 만성중독으로 복용하는 타이레놀 두 알 꿀꺽 털어 입에 넣고 이불 뒤집어쓴 채 시간을 죽일 양으로 철지난 비디오를 들춰봤다. 감기를 놀래켜 내쫓는 데야 스산한 공포 영화가 제일이라 싶어 녹화해둔 비디오 테이프들 중 하나를 무심코 집어들었 다. 그레고리 호블릿 감독, 덴젤 워싱턴 주연의 <다크엔젤 (원제: Fallen)>이라. 어지간해서는 영화를 절대 '리바이블' 하지않는 나쁜 습관에다가 돌아서면 쉽게 까먹는 짧은 기억력 수준을 고려할 때 한 서너해 흐른 지금의 내 머리 속에는 이 영화가 그 흔한 제목에서 풍기는 뉘앙스 로 짐작컨대 그저 조잡스런 줄거리의 헐리웃 흥행 실패작으로 가물거렸다. 아,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두 번째 대하는 영화의 느낌이 전혀 달랐다. <다크 엔젤>은 처음 에 기억했던 것처럼 주인공이 사악한 악마와 사투하는 공포 특급 영화가 절대 아니었다. 이제 보니 '인터넷', 특히 무선 인터넷에 바치는 처절한 헌사용 영화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정신이 혼 미한 상태에 진통제 약기운이 돌아 사물이 빗겨 보였던 까닭만은 아니었다. 이 영화의 악역은 눈에 보이지않고 사람의 몸을 숙주로 삼아 기생하는 '아제이젤'(Azazel)이 란 무서운 악마다. 영화의 뼈만 추리자면 존 홉스(워싱턴 역) 형사가 변사체 사건들을 조사하면 서 구약에 등장하는 아제이젤이란 악마의 존재를 확인하고 그를 없애려 나서지만 오히려 자신 의 목숨을 잃을 뻔하고 계획이 수포로 돌아간다는 내용이다. 인간대 악마의 종교극이란 상황 설정만으로 보면 다소 고리타분해 보이지만, 아제이젤의 모습과 그 특성을 바라보면 영화 내용 은 180도 달라진다. 유대 사전을 훑어보니 원래 아제이젤은 천상에서 ㅤㅉㅗㅈ겨난 타락 천사라 한다. 예수를 유혹했던 광야의 사탄이 아제이젤이란 얘기도 있다. 이 악마는 인간세에 내려와 남자들에겐 무기를 만드 는 법과 기술과 과학을, 여자들에게는 타인을 유혹하는 화장술을 가르쳤다고 한다. 인류에게 천 상의 비밀을 가르쳐 인간들의 죄를 유도했던 골치덩이 타락천사였던 셈이다. 물론 영화에선 아 제이젤의 이런 특성이 표현되지 못하고 흉악한 사탄의 이미지로 줄곧 등장한다. 그렇지만 감독 호블릿은 재치가 있었다. 그는 인간들간의 '접촉'(wired)에 따라 한 신체에서 다른 신체로 옮겨 타고 다니는 '사악한 정령'(disinformation)으로 아제이젤을 그린다. 대개 영화 평론가들은 이런 아제이젤의 모습을 보고 감독이 신체적 접촉에 의한 에이즈 감염의 위험을 표현하려 했다는 뜬 금없는 해석을 내린다. 호블릿 감독은 홉스 형사의 추적을 조롱하며 하나의 신체가 쓰려져도 계속해서 옮겨 다니는 아제이젤의 공간 초월과 이동 능력을 보여주고자 했다. 그래서, 영화의 절정은 홉스 형사가 아 제이젤을 죽일 수 있는 법을 깨닫고 이를 실행에 옮기려했을 때다. 홉스 형사는 신체 접촉에 의해서만 이리저리 옮겨 다니는 아제이젤을 없애는 방법으로 깊은 산중에서 악마의 숙주를 없 애고 그 후 자신의 숨을 끊는다면 숙주를 잃은 아제이젤이 자연 소멸할 수밖에 없을 것이란 나 름의 결론을 얻는다. 그러나, 홉스의 목숨을 내건 도박에도 불구하고 아제이젤은 근처를 거닐던 들고양이의 몸에 깃들어 유유히 사라진다. 어떻게? '접촉없이'(wireless). 홉스는 접촉없이도 아 제이젤이 대기를 타고 비행하는 능력을 지녔으리란 사실을 꿈에도 몰랐다. 감독 호블릿은 아제 이젤의 와이어드적 속성을 와이어리스로 완성시켰던 것이다. 이것이 내 눈에 영화 <다크 엔젤>이 억압의 권력으로부터 끊임없이 벗어나는 거대한 힘, 무 선 인터넷의 형상화로 비춰지는 이유다. 아제이젤의 초월 능력은 마치 권력의 파장(홉스 형사의 공권력)을 벗어나 인터넷을 흐르며 생성 소멸하는 역정보나 반정보의 속성과 닮아있다. 본래 아 제이젤이 인간을 꾀어 천상 기술을 전도했던 사악한 악마였던 내력도 이를 정확히 거든다. 사 악한 악의 속성을 자유로운 정보의 원천으로 보는 것이 부담스런 비유이긴 하지만, 어쨌든 아 제이젤의 종국적 힘은 홉스 형사가 다 잡았다고 생각했지만 무너뜨릴 수 없었던 '와이어리스' 이동 기법에서 나온다. 그래서일까, 와이어리스에 집착한 호블릿 감독이 다음 작품으로 라디오 주파수 대역으로 과거와 현재의 시간성을 연결하는 <프리퀀시(Frequency)>란 영화를 만든 것 이 당연할 수도 있겠다는 맹랑한 발상이 든다. 지난 30여년을 거치면서 멀티미디어를 가능케한 디지털, 항시 접속을 도운 패킷 스위칭, 그리 고 이제 공간이동의 기동성을 가져올 와이어리스가 텔레컴 혁명을 주도할 것이란 미래학자 네 그로폰테의 전망이 전혀 낯설지 않다. 아제이젤이 천상에서 훔쳐 인간세에 퍼뜨린 비술이 다름 아닌 '와이파이'(Wi-Fi)란 무선 랜(근거리통신망) 기술로 밝혀진 것이 근 3여년전의 일이다. 와 이파이는 하이파이 오디오처럼 편하고 쉽게 쓸 수 있는 무선 기술의 대중성을 겨냥하여 개발됐 다. 그 말뜻만큼이나 와이파이는 대역폭이 미치는 지역에 컴퓨터와 랜카드만 있으면 어디서든 빠르게 인터넷에 접속하고 개인들간의 일대일 상호 연결을 가능하게 해준다. 기동성의 장점말 고도 와이파이는 인터넷 접속을 일정한 공간내에서 서로 공유할 수 있는 탁월한 능력을 지닌 다. 기술의 민주적 성격이 성장의 촉진제가 되고 있는 것이다. 아제이젤이 사멸하는 듯 싶었지만 죽은 인간의 신체로부터 고양이의 몸까지 날아 이동하며 보여줬던 무선 능력은, 무선 라우터와 랜카드 하나로 주위에 큰 장애물만 없다면 일정 거리내 컴퓨터 장치들의 정보 접속을 보장하는 와이파이의 민주적 기술로 등장한다. 라우터 송출장치 로 근처의 이웃들이 함께 인터넷 정보에 접속할 수 있는 이 게릴라식 공유 시스템은 오히려 아 제이젤의 힘을 기술적으로 능가하는 지도 모른다. 이 무선 와이파이 네트워크는 주거지가 밀집 한 도시 지역을 중심으로 들불처럼 번지고 있다. 자발적으로 상업서비스가 제공하는 서비스 대 역을 확장해 이웃과 함께 공유하거나, 보다 의식적으로는 이를 마을이나 지역 사회로 확대하는 경향도 늘고 있다. 경제적 차이로 발생하는 정보 접근의 불평등을 해소하려는 한 방식으로 와 이파이 네트워크의 공유가 적극 모색되기도 한다. 결국 홑이불 속에서 감기몸살로 발발 떨던 내게 호블릿이 그린 아제이젤의 승리는 마치 와이 파이에 불어오는 희망의 메시지처럼 머리를 개운하게 만든다. 주파수 권력의 공백 지대인 2.4/5 기가 헤르쯔의 새로운 대역에 자리 튼 와이파이가 아제이젤의 사악한 천성은 전적으로 접고 가 공할 정보 이동 능력만 섭렵해 장차 인터넷의 개방성을 한층 넓히는 기술로 자리잡길 새해 소 망으로 빌어 본다. (아름다운 e세상, 2003.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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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e세상] 약장수 이동서점 절찬리에 네트 순회 중

약장수 이동서점 절찬리에 네트 순회 중 이광석·뉴미디어평론가 벌써 올 한해를 접는 때다. 모두들 다가올 내일에 마음이 바쁘지만 아련한 과거의 '추억'에 절로 취하는 계절이다. 내 어린시절 시골 동네에 불현듯 찾아들었던 가장 반가운 손님은 서커 스단과 약장수였다. "날이면 날마다 오는 것이 아니"던 귀한 그들이라 여장을 푼 천막 근처를 호기심반 두려움반 배회하던 코흘리개 아이들 틈에 영락없이 나도 가세했었다. 이들이 여장을 풀기도 전에 마을의 남녀노소 모두 할 것 없이 일상과 다른 이방인들의 신기한 축제에 대한 기 대감으로 작은 흥분에 휩싸이곤 했다. 서커스단과 약장수는 "OOO 공연을 절찬리에 마치고 지금 막 전국 순회에 돌입"해 피곤도 할 터인데 지칠줄 모르고 '타이탄' 트럭이나 '봉고' 승합차에 단원들 모두를 싣고 벽지와 오지 구석 구석을 누볐다. 이제나 그제나 이들의 공연 중 내 흥미를 끄는 대목은 '차력'이었다. 차력은 서 커스나 약장수의 공통 분모이기도 했다. 목으로 쇠막대 구부리기, 묶인 쇠사슬 끊기, 불 삼키기 와 뿜기, 칼 삼키기, '이빨'로 끌기, 바늘방석 위에 눕기, 유리나 불 위 걷기, 칼 꽂힌 불타는 링 통과하기, 망치로 배 내려치기 등등 살벌하기 그지없는 차력 시연이 내겐 두려움보다는 힘센 이방인들의 종교 의식처럼 보였었다. 물론 식품의약청의 안전기준과 거리가 멀었던 그들의 회 충약, 정력제, 강장제 등 정체불명의 물약들이 연금술사의 신비스런 조제술의 기적처럼 보였음 은 말할 나위없다. 얼마전 낯선 미국땅에서 이 잠자던 추억이 다시 되살아났다. 나의 설레임은 대규모 서커스단 의 행차 때문이 아니었다. 그저 용달차만한 조그만 박스트럭 뒷칸에 구하기도 힘든 요상한 책 들을 한가득 싣고 미국의 여러 동네들을 전전하는 사람들 때문이었다. 물론 책을 팔기 위해 이 들은 길거리나 동네의 작은 바에서 눈요기 차력쇼를 펼친다. 우리말로 굳이 옮기자면 '자율유목 의 차행상'(autonomadic bookmobile)이란 요상한 이름을 가진 이들은, '빈들러스티프' (Bindlestiff) 가족 서커스단과 아우토노미디아 (Autonomedia)란 뉴욕의 작은 독립 출판업자의 합작품이다. 사업 내용으로 따지면, 차력과 함께 약 대신 책을 파는 '약장수 이동서점'이라 부르 는 편이 낫겠다. 거대 서점 체인이 지역마다 복제돼 영세한 소규모 서점을 문닫게 하고, 텔레비전 화면과 헐 리웃 스크린이 서커스를 감상의 추억거리로 내몬 비극적 현실에 이들은 서로 뜻이 맞아 대안의 길을 찾은 셈이다. 95년에 시작한 이들의 이동서점 계획은 서커스장에 펼쳐놓은 길거리 가판 도서로 시작하여, 2인 전담 전국 순회팀이 모는 바퀴달린 이동서점으로 독립하는 눈물겨운 역 정을 거쳤다. 이들의 생명력은 서커스를 통해 '살아있는 것'의 접촉과 감정적 체험을 돕고, 판매 망이 없는 소수 출판사들의 목소리를 모아 직접 전하는 역할을 하겠다는 갸륵한 발상에서 나온 다. 내가 만나본 이동서점의 주인공 2인, 딩글(Okra P. Dingle)씨와 닥터 플러목스(Dr. Henceforth Flummox)양은 겉보기엔 지극히 평범하다. 그러나, 이들이 등장하면 지역 경찰이 긴 장한다. 파는 책들이 선정성과 과격성이란 죄목으로 가끔은 몰수되기도 하고, 둘이 보여주는 차 력쇼가 위험천만해 보이기도 해서다. 두 사람의 가장 힘든 일은 쇼보다 책을 보러 오는 이들과 나누는 대화라고 한다. 배경이 다른 생면부지의 사람들과 서로의 생각을 나누기 위해서는 어지 간한 내공으로 감당하기 힘들다는 얘기다. 이들의 약장수 이동서점은 이제 전국적으로 돌면서 여러 동네의 지역 서점들, 정보 집산지, 모임, 시위 등을 연결하고 정보를 공유하게끔 돕는 촉매자가 됐다. 그들이 싣고 다니는 영세 출 판업자들의 책과 잡지뿐만 아니라 길에서 만난 지역 활동가, 대학가의 운동가, 매매춘 여성, 음 모론 이론가 등이 쓴 아마츄어식 글들도 이들의 차 뒷칸 도서목록에 추가된다. 동네 공터에서 펼쳐지는 생생한 차력쇼는 전자 미디어에 치여 희미해진 인간의 직접적 체험의 감각을 되살리 는 방법이다. 물론 팔리는 책들은 주변과 변두리의 소외된 소수의 목소리들을 찾아 발굴하고 전달하고 공유하는 주요 통로다. 순회 이동서점을 통해 약장수와 책행상의 각각 뜻한 바 목적 이 서로 조화롭게 발휘되고 있는 것이다. 정말 약장수 이동서점이 내 마음을 끈 것은 이들이 꼭 인터넷의 민주주의적 속성과 닮아있 기 때문이었다. '자유롭게 유목하는'(auto/-nomadic) '발달린 책'(book/-mobile)은 대중매체의 고 압적이고 일방적인 주입의 공중파가 아닌 인터넷에 떠다니는 소수 전자파들에 다름아니다. 똑 같은 거대한 공간에 잘 꾸며진 거대 서점에서 배제된 소수의 책들을 모아서 이에 갈증을 느끼 는 독자들에게 직접 찾아다니며 전달하는 행위는 인터넷 기술이 지향하는 수평적이고 소수 지 향의 대화 소통 방식과 유사하다. 인터넷에선 어느 누구나 자신의 목소리를 담아, 그리고 서로 비슷한 목소리를 모아 방송국을 만들고 잡지를 꾸미고 모임을 갖는 일이 가능하다. 찬바람 쌩쌩도는 전자 공간에 훈훈한 인간 애를 느끼도록 돕는데 소수의 목소리들이 핵심으로 나선다. 4평 남짓한 이동식 공간에 각종 작 은 목소리를 담고 중간에 모자라는 것은 다시 싣고 원하는 사람이 나타나면 내려주고 하면서 정처없이 부유하는 책들의 이동보따리가 네트를 유목하는 정보와 닮아가는 것이다. 인터넷의 민주적 풍경과 유사하게 약장수 이동서점은 현실 속에서 다양성과 소수적 목소리를 전하는 미 시적 정보로로 기능한다. 우리의 차디찬 현실 속에 약장수 이동서점이 그저 추억거리에 불과하 다면 네트에서만이라도 그와 유사한 목소리가 넘쳐나기를 기대해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평생을 씻지않고 살 것 같은 60년대 폭주족 분위기의 범상치않은 외모와 달리 딩글씨와 잠 시나마 나누었던 대화와 악수의 느낌이 유난히 따뜻했던 기억을 정말 잊을 수 없다.) <아름다운 e세상, 2002.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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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e세상] 열린 정보정책을 위하여

열린 정보정책을 위하여 이광석·뉴미디어평론가 한때 우리 사회 현실을 논하면서 사회과학계에 '종속이론'이란 말이 풍미한 적이 있다. 미국 등 선진국의 거대 자본이 자금 원조, 기술 전수, 자본 시장 개입 등 경제적 유인을 통해 제 3세 계 국가들을 종속형 저발전 경제의 나락에 영원히 가둔다는 중심-주변부의 이중 논리였다. 반 대로 선진국들은 제 3세계가 자신의 떡고물을 먹다보면 개혁이 일고 그것이 확산되면 발전이 온다는 '개혁-확산론'이나 '발전이론'에 대한 신화를 퍼뜨렸다. 하지만, 이 둘 다 우리 사회 현실 을 보는 눈에서 일면만을 과장해 우리에겐 잘 맞지 않은 이론으로 넘어간 적이 있다. 산업 경제에서 바야흐로 정보 입국에 접어들었다고 아우성치는 오늘 전설 속에 내려오는 '종 속'의 화두를 다시 따져봐야할 사정이 생겼다. 딱딱한(hard) 기술에서 연성의 말랑말랑한(soft) 기술의 시대로 넘어가면서 선진국에 의한 정보 독식과 북-남간 정보 불균형이 큰 문제로 떠오 르고 있다. 특히 '심리적 독점'(psychological monopolies)으로 먹고 사는 정보 독점은 상대국의 종속을 영구화하는 경향 때문에 그 문제가 더욱 심각하다. 한번 인이 배기면 중독이 번져 빠져 나올 수 없는 지경에 이르는 것이 현대의 기술 종속이다. 마땅히 다른 기술적 선택의 대안이 없는 경우엔 그 정도가 더 심할 수밖에 없다. 현대 독점이 치명적인 연유는 이른바 상대의 중 독증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마이크로소프트 원도우, 워드, 익스플로러 등 하나의 소프트 '제국'에 거의 모든 정부, 공공기 관, 학교 등의 소프트웨어들이 구속되는 현실은 이전에는 볼 수 없던 새로운 종속 현상이다. 신 경제 침체에도 불구하고 정보 중독의 니코틴을 제공하는 기업들은 여전히 호황을 누린다. 중독 에 의한 독점 효과는 좀처럼 기우는 법이 없다. 소프트웨어 비용 지불을 임의로 전기료 징수처 럼 정기적 가입 모델로 바꾸고나서 엠에스 제국은 앉아서 수십억 달러를 정기적으로 챙기는 잇 속을 얻었다. 반면 정보 종속의 굴레에 개발국들 대부분이 더욱 참담한 정보빈국의 지위로 낙 하하고 있다. 산업 시대보다 더 무서운 지적 재산권의 방벽은 선진국에서 떨어지는 '떡고물'이나마 받아먹 으며 나름대로 성장의 기회를 찾는 시도마저 사그리 말려버린다. 그래도 서유럽의 일부 국가들 에서는 정보 후발국에 숨쉴 공간을 틔여주려면 좀 더 느슨한 예외적인 국제 저작권 적용이 필 요하다는 양심의 목소리도 흘러나온다. 국가 정보정책의 백년대계란 면에서 더 이상 소수 독점 기업에 의한 일국의 정보 독점을 방치해서는 곤란하다는 위기론도 등장한다. 이제 정부가 나서 소프트웨어 시장 경쟁의 기초를 회복해야한다는 각국 정부의 우려섞인 목소리가 드세다. 경쟁 시장의 회복을 위해서는 지금의 '닫힌' 소프트웨어 독점에 가장 큰 대항력인 리눅스(Linux) 운 영체제 등 '열린소스'(open-source) 스프트웨어의 정책적 도입이 시급하다고 본다. 이제까지 정보정책 설계에 열린소스 소프트웨어를 적극 도입하려는 국가로 중국, 영국, 프랑 스, 독일, 브라질, 아르헨티나 등 25개국이 나서고 있다. 보안 능력, 안전성, 경제적 비용 등에서 우수성을 인정받은 열린소스 계열의 프로그램들이 이들 국가의 강력한 지원을 받아 개발, 지원 되고 있다. 영국 정부는 정보 독점에 반대하여 중앙 부처뿐만 아니라 하급 단위의 공공 기관들 까지 열린소스 프로그램 사용을 독려하고 있다고 한다. 한편 페루에서는 한 국회의원이 열린 소스의 정책적 입안을 주도해 영웅으로 떠올랐다. '에드가 빌라누에바'(Edgar Villanueva)라는 이 정치인은 자신의 지역구내 컴퓨터 소프트웨어 구입의 재정난으로 고민하다 열린소스 프로그 램을 대안으로 보고 정책 입안에까지 이른 경우다. 그는 페루 보수 정치권의 반대와 마이크로 소프트의 페루 지국의 압력을 물리치고 공정한 시장 경쟁을 위해 정책적 차원에서 열린소스의 도입이 불가피하다는 자유시장론을 폈다. 오직 한마리의 사자(lion)가 모든 것을 독식하며 나머 지를 쥐처럼 부리는 불공정 경쟁의 독점체, 즉 '레오폴리'(Leo-polies)가 페루의 건전한 시장에 독약이라는 그의 평가가 먼나라 얘기같지 않다. 프로그램의 소스 코드의 개방은 누구나 쉽게 접근하여 자유롭게 이용하고 수정이 가능한 경 쟁과 비배제성의 논리를 전제로 한다. 이에 반해 상업적 소프트웨어는 일반인의 코드 접근의 기회를 박탈한다. 프로그램 갱신은 업자의 몫이고 이를 쓰는 사람은 구입과 갱신 비용을 지불 하며 그저 쓰기만 하면 된다. 경쟁이 없으니 가격 인상이나 불공정 행위나 요구에 이용자는 수 동적 지위로 남는다. 열린소스를 수용한 국가들은 이같은 레오폴리의 독식을 미리 내다봤다. 그 저 수수 방관하다간 소프트웨어 종속에 이를 수 있다는 감이 섰던 것이다. 열린 소스를 위한 70여개에 달하는 입법안, 정부 보고서, 정책 연구는 정보 종속을 막으려는 이들 정부들이 시도 한 대안찾기의 증거다. 또한 리눅스로 대표되는 열린소스 운동이 소수 마니아들의 전리품처럼 여겨지던 컬트의 시대도 이제 갔다는 증거다. 달리 보면 열린소스 외에 레오폴리에 필적할 대 안이 없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정보 독점을 냉혹한 거대 기업들의 신자유주의 모델로 본다면, 열린소스는 이를 제어하는 최 소한의 사회복지 모델과 같다. 경제적으로 가난한 국민과 지역 주민들을 위해 마련된 최소한의 사회복지 정책처럼 열린소스는 정부가 당연히 고려해야할 정보정책의 필수 사안이다. 자유로운 시장 경쟁의 룰을 회복하고 한 국가내 정보기술의 자립적 발전을 위해서도 정부가 나서서 열린 소스 운동을 안착시키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자면 이를 정책적으로 수용한 서유럽이나 남미 국 가들의 앞선 경험을 활용할 필요가 있다. 몇 년전부터 우리에게도 열린소스 운동의 정책적 도입을 위해 공청회나 입법화 등의 움직임 이 존재했다. 하지만 그 흐름이 꾸물거리거나 그저 형식적 의제로 그치지 않으려면 적극적으로 정부가 나서 열린소스에 대한 민간의 흐름을 국가 정보 정책의 필수 의제로 껴안을 필요가 있 다. 정부 부처와 각급 기관들부터 독점 정보기업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리눅스 운영체제 등 소 프트웨어를 자유롭게 선택하여 쓸 수 있는 경쟁적 시장 환경을 마련하고, 최대한 소프트웨어 코드간 소통이 가능하도록 호환성있는 시스템을 장려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개방성을 지향 하는 대안적 소프트웨어의 개발도 적극 지원해야 할 것이다. 다가올 우리 사회에서 '종속'과 같 은 빗바랜 용어를 또 한번 유행시킬 이유가 없지 않은가. (아름다운 e세상, 2002.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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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e세상] 속도와 지체의 미학

속도와 지체의 미학 이광석·뉴미디어평론가 속도의 쾌감을 제대로 느끼려면 단연 롤러코스터가 압권이다. 바람을 가르며 미친 듯이 돌고 질주하는 롤러코스터에 몸을 한번 맡겨본 사람이라면 속도의 오르가즘이 뭔지 한번쯤은 짜릿하 게 느꼈을 것이다. 인간사에는 꽤 오래전부터 이런 속도-기계들이 상상에서 혹은 현실로 고안 됐다. 속도에 대한 집착은 시간과 공간과 살덩어리를 훌훌 털어버리고 지긋지긋한 현실을 벗어 나고 싶은 욕구에 기인한바 크다. 현실의 제약에 대한 초월의 욕망과 상상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탐관오리들의 관 할권을 넘어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는 홍길동의 축지법, 산을 타넘는 신령님의 공간 이동 지팡 이, 마녀의 빗자루, 산타 할아버지의 썰매, 빛의 속도로 시간의 벽을 타넘는 타임머신, 부처님 손바닥에서 끊임없이 벗어나려했던 손오공의 구름, 중력장의 공포를 쾌감으로 반전시키는 번지 점프, 제한 속도를 벗어나 죽을둥 살둥 모르고 달리도록 만든 경주용 자동차들, 영화 '론머맨'이 나 '공각기동대'에서 신체를 버리고 네트에 거하는 데이터 정령들과 목 뒤꼭지나 척추를 인터넷 포트로 연결한 미래형 인간 모습 등등. 이를 가만 보면 속도-기계의 상상력에 큰 변화가 있었음을 느낄 수 있다. 우선 지팡이, 융단, 빗자루 등 도구를 이용해 가속을 얻던 시절에서 이제는 아예 살덩이를 벗어나 광통신망에 연결 되는 신체 이탈이 크게 늘고 있다. 실제 기계의 유형에서도 인간의 몸과 함께 움직이는 공간 이동의 수송 장치들에서 가만히 앉은 자리에서 고속의 신체 이동을 느끼는 가상현실 게임이나 초고속 인터넷 이용으로 바뀌고 있다. 속도의 체감 능력을 점점 극대화하는 쪽으로 가고 있다. 한편 장비를 이용하건 신체의 이탈을 유도하건 인간의 속도 욕망을 가로막거나 느림을 유발 하는 현실의 조건 혹은 제약이 늘 있어 왔다. 앞서 본 것처럼 중력, 시간, 공간, 살덩이, 산, 속 도 제한, 부처님 손바닥, 기류 등은 인간의 가속 기계에 끊임없이 저항하는 현실과 상상의 속도 제약의 조건으로 기능한다. 모뎀에 전화선을 연결하던 시대가 엊그제요 모바일과 초고속 인터 넷 유선통신은 기본이고 이제 무선 랜(근거리통신망) 기술 '와이파이'(Wi-Fi)가 얘기되는 오늘 에도 이들과 비슷한 속도의 지연 혹은 간섭이 존재한다. 신체 이탈까지는 아니더라도 비슷한 공간 이동의 착시를 느끼며 사는 때에 디지털 지연/간섭 현상은 주로 물리적 장벽에 의한 속도 지체에 의해 유발된다. 요즘에야 그렇지 않지만, 애꿎은 텔레비전을 손으로 내려치며 화면을 조정하던 공중파 아날로그 시대에는 전파를 가로막는 각종 악천후가 속도의 적이었다. 디지털 영상 시대에는, 메아리치거나 반복되는 음향들, 마치 영화 '터미네이터 3편'에서의 질 나쁜 유체형 사이보그가 흐물흐물 벽을 뚫고나오듯 바로 전화면이 이후 화면에 양각으로 포개지는 현상들, 화면 픽셀 일부의 모자이크식 흐트러짐과 교정, 음성과 따로 놀거나 하릴없이 멈춰진 영상 등이 속도의 질주에 구멍을 내는 새로운 지체 현상들로 등 장한다. 분명 속도 지체는 완벽한 재현감을 위해서는 해롭다. 하지만, 그것이 정말 나쁜 것일까? 속 도 지체는 일종의 느림 현상이다. 느림이 없으면 속도의 무한 스릴은 다음의 극한적 상황을 낳 는다. 축지를 잘못 써 홍길동이 그만 형장 입구로 발을 헛딛거나, 산신령이 지팡이를 자주 두드 려 이를 부러뜨리거나, 더 많은 스릴감을 위해 번지점프용 줄을 너무 늘이거나, 과열로 통신이 두절되거나, 경주용 차의 브레이크가 풀리거나 한다면 상황은 치명적이고 위험하다. 이는 우리 식 속도를 표현하는 "빨리빨리"에 반대한 '느림의 미학'이 몇년전부터 등장하는 까닭이기도 하 다. 반대로 "천천히"는 무섭게 질주하는 자본주의 속도-기계들의 비인간성을 제어하는 힘이 된 다. 우리는 느림과 지체를 무시해 속도의 과열 욕망이 빚어낸 깊은 상처들을 수없이 보아왔다. 선진국의 형식 논리에 희생당하는 개발국의 국민들, 생산제일주의와 성장 논리에 묵과된 장시 간 노동의 혹사, 마구잡이 개발 논리에 파괴되는 생태계, 벤처 육성이란 단기 명목에 급조된 뻥 튀기 주식과 거품, 앞서 나가는 시장 논리에 홀대당하는 문화 자산 등은 형식, 성장, 개발, 육성, 시장 확대의 수많은 속도전 때문에 생긴 생채기들이었다. 자본주의 속도-기계들에 딴지를 거는 느림은 그래서 인간적이다. 앞만 보지말고 옆과 뒤도 보면서 질주하라는 안전과 다양성에 대한 인간적 주문이 들어 있다. 언제나 당시에는 불완전해 보이고 현실의 한계로만 보이는 것이 쾌속 질주의 쉬어가는 굽이라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 다. 간섭과 지체로 접속한 영상이 일그러지는 현상은 한 굽이만 지나면 질주의 뒤안길이 될 것 들이다. 미리부터 조바심 치면서 온전하고 완전한 것만을 원한다면 쉬 체하기 마련이다. 속도의 미래 가능성을 따라 움직이면서도 그 가운데 현실이 제한하는 느림의 미학을 즐길 줄 알아야 제어불가능한 속도의 극한을 예방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정보화 정책도 조금은 혹 더 디 가더라도 뒤쳐지거나 뒤따라오지 못해 소외되는 사람들이 없나 찬찬히 두루 살펴보며 속도 를 내야 충돌없이 잘 진행되는 법이다. 축지쓰다 돌부리에 몇 번 채여 봐야 형장으로 발을 헛 딛는 어처구니없는 사태를 막지 않겠는가. (아름다운 e세상, 2002.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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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e세상] '길거리 인터넷' 시대

'길거리 인터넷' 시대 이광석·뉴미디어평론가 불어나는 살을 감당못해 요즘 운동을 시작했다. 서른 중반의 내 나이에 다른 점잖은 종목들 을 제껴놓고 '과격한' 농구를 무리해 붙잡았다. 농구에 치명적인 '짧은' 키까지 겸비하고서 말이 다. 그러면 어떠랴. 공던지며 살을 털어내는데 내 목적이 있으니 뭐 이런 신체적 난관쯤이야 대 수가 못됐다. 무더운 더위에 석달 남짓 용쓰며 이곳저곳 농구장을 전전해 다행히 조금 살빼는 성과를 거둔 것 외에도 공놀이하면서 하나 건진 깨달음이 있었다. 동네 농구가 대안적 인터넷 환경과 쫙 겹 쳐지는 착시가 왔던 것이다. 갖다 붙이자면 '길거리 인터넷'(Street Internet)이라 말할 수 있는 인터넷의 민주적 밑그림을 길거리 농구를 하며 감잡았다. 보통 '길거리'는 집을 벗어나 차들과 사람들이 오가며 서로 마주치는 공적 장소를 지칭하지 만, 형식과 틀에 구애받지 않는다는 이차적 의미의 쓰임새도 있다. 홀로 동네 농구장에 나가 공 을 던지다보면 난생 처음보는 사람들과 격없이 만나 같이 경기를 하다가 헤어진다. 길거리에선 프로농구처럼 골득점이나 반칙, 도움주기 등의 선수 전적이 죽 흘러 한눈에 타인의 정보를 파 악할 길이 없다. 그저 같이 서로 모여 몸풀다 직감적으로 수준맞는 사람끼리 조를 갈라 짜고 놀이를 한다. 편을 먹는데 공넣는 실력도 짧은 키도 성별도 인종적 차이도 문제가 못된다. 평등 하게 놀이에 임하고 진행하면서 스스로 알아서 제 역할을 찾아간다. 반면 프로농구는 꼭 짜여진 대진표, 프로 선수들의 이적에 오가는 거액의 몸값, 초대형 돔의 실내 구장과 넘쳐나는 관객, 상업 광고와 돈의 흔적들 등을 주요 특징으로 한다. 바깥 대기의 열기나 흙 냄새와는 무관하게 인공적으로 조절된 실내에서 치러지는 프로 경기는 공놀이를 박 제화한다. 간혹가다 키작은 선수의 멋진 기량도 맛볼 수 있지만 역시나 경기의 주도는 전체 평 균키 이상의 선수에 의존한다. 남녀 성별에 따라 가르고, 고액의 연봉을 받는 대접받는 선수들 만 추려 경기를 하는 것도 그 자유로운 평등성에 위배된다. 그 때 그 때 동네마다 수백수천의 길거리 농구단들이 짜여지면서 수많은 선수들이 서로의 기량을 펼치는 것과 달리, 프로농구는 매년 반복되는 경기에 스타의 이미지만을 재생산한다. '단지 재미로'(Just for fun) 오픈 운영체 제 리눅스(Linux)를 개발했다는 리누스 토발즈(Linus Torvalds)처럼, 길거리 농구는 전업 선수 가 주종을 이루는 프로와 달리 그저 재미삼아 즐기는 놀이가 중심이다. 또한 프로가 중앙화된 거대 경기장들을 중심으로 펼쳐진다면, 길거리 농구는 동네를 중심으로 지역화되고 분산된 형 태의 자유로운 놀이를 택한다. 물론 구경을 위한 접근에 있어서도 프로는 화폐 지불 능력에 따 라 강제로 간섭권을 발동하나, 길거리는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 길거리 농구는 또한 그들만의 영웅을 자생적으로 키워낸다. 상업화된 미 프로농구의 대안으 로 매년 뉴욕 할렘 동네에서 개최되는 길거리 농구대회의 아마추어 선수들처럼, 입소문으로 전 해져 유명해진 길거리 영웅들이 존재한다. 상업적으로 만들어진 프로 선수들과 달리 이들은 매 사에 대기업의 냉혈한 상업성에 비판적이다. 기업들의 장단에 길들여지는 것을 거부하고 길거 리를 주무대로 활동하는 출중한 기량의 선수들이다. 이들은 이웃의 수많은 친구들과 경기를 치 르면서 열린 무대를 통해 실력을 갈고닦으며 성장한 길거리의 우상이다. 그 전에도 인터넷에는 영웅들이 있었다. 새로운 시대의 가치를 만들어가는 디지털 엘리트, '디제라티'(Digerati)라는 과분한 명성까지 얻었던 스타들이 존재했다. 마치 프로농구의 전업 선 수들처럼 그들은 고액의 몸값을 받으며 잘 준비한 미래 청사진을 들고 주식 시장을 현혹시켰 다. 이들이 이른바 '신경제'라 지칭했던 구단의 선수들이었다. 한 때 이들은 여론의 우상이었다. 이제까지 이들의 시장 행동과 말한마디는 미래 사회의 생존을 위해 배워야할 덕목과 가치로 받 들여졌다. 마침내 시장에 거품이 빠지자 급조된 상업적 영웅들도 시들해졌다. 정부가 밀고 주식 을 띄우고 여론을 움직여 급조해 만들어낸 이들의 그럴듯한 이미지는 이제 더 이상 모범도 우 상도 아닌 것으로 입증됐다. 디제라티는 신경제마냥 주조된 헛된 상업적 영웅상이었던 것이다. 어디든 수시로 벌어지는 길거리 농구처럼 인터넷에도 자유 소통의 장소들이 눈에 점점 많이 띈다. 이제 그런 길거리 인터넷에 상업적 스타 선수들을 밀치고 자유롭고 감성 풍부한 신진 선 수들이 실세로 자리잡고 있다. 얼마전 꽃다운 나이에 스스로 목숨을 끊어 주위를 안타깝게 했 던 파일공유 프로그램 그누텔라(Gnutella)의 공동 개발자 지니 칸(Gene Kan), 아이디어의 자유 를 외쳐온 리처드 스톨만(Richard Stallman), 열린소스 운동의 에릭 레이몬드(Eric Raymond), 리누스 토발즈, 엠피3 파일의 대안으로 오그 보비스(Ogg Vorbis)를 개발한 크리스토퍼 몽고메 리(Christopher Montgomery), 다양한 사회적 공유 프로그램의 국내외 개발자들이 바로 길거리 인터넷의 아마추어 영웅들이다. 이들의 공통점은 대기업들과 비친화적인데다 언론의 큰 주목을 끌진 못해도 길거리에서 다져 진 실력의 검증으로 성장한 인물들이다. 이들은 여러 사람들과 부딪히며 갈고닦은 실력과 정보 교류로 얻은 능력을 발휘하며 인터넷을 좀더 살맛나고 정이 느껴지는 동네로 바꾸려 한다. 길 거리 농구에서처럼 이 신진의 2세대 영웅들은 인터넷 저잣거리에서 자유로운 룰과 평등한 '열 린' 관계들을 실천하는 법을 배우고 가르쳐왔다. 이들은 돈으로 주조된 프로 신경제의 주식시장 보다는 땀과 열기로 가득한 길거리에서 민주적인 법칙을 만드는 일에 골몰한다. 프로 신경제의 텃세에도 불구 길거리 인터넷이 점점 번성하는 까닭은 이런 능력있는 아마추어 영웅들의 증가 때문이다. 이런 추세대로라면 장차 길거리 인터넷의 논리가 역으로 프로를 접수하는 사태가 터 무니없는 공상만은 아니리라. 이것이 내가 농구로 뱃살을 털어내면서 인터넷 권력 교체의 미래 까지 꿈꾸었던 정황이다. (아름다운 e세상, 2002.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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