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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e세상] 어울림의 문화와 소리바다

어울림의 문화와 소리바다 이광석·뉴미디어평론가 햇수로 벌써 십년이 다 되가는 미국의 유명한 사이버문화 잡지가 하나 있다. <와이어드 Wired>란 이름의 월간지인데, 비록 우파적 기술맹신론의 냄새가 그득하지만 그래도 한 세대를 넘도록 초지일관 정보기술 실험 사례들의 발굴과 그 속에서의 문화 형성을 관찰하는 노력에 절 로 존경이 들만한 잡지이기도 하다. 그런데, 십여년의 공력이 <와이어드>의 바깥세상 보는 시 야를 키웠던 모양인지 얼마전 이 잡지의 8월호 특집에 "세계의 게임수도, 서울"이란 제목으로 우리의 정보 현실이 크게 소개된 적이 있다. 속된 말로 요새 한창 '잘나가는' 우리의 대외적 이미지를 감안하면, 서울이 "지구상에서 가장 잘 연결된(wired) 곳"이란 극찬을 받고, <와이어드>발행 처음으로 한국의 정보 문화를 다룬 일 이 그리 새삼스러운 일이 아닐 수도 있겠다. 세계적인 경기침체에도 불구하고 줄곧 우상향의 쾌속 곡선을 그리는 국내 경제, 한국의 정보 인프라에 대한 국제 통계 지표들의 후한 점수, 월 드컵 축구에서 보여진 우리의 강렬했던 집단 응원문화 등 최근의 매력적인 인상들이 국제적인 시선 집중의 촉매제로 기능했던 까닭이 크다. 그럼에도 기술론자들의 경전처럼 떠받들여지는 한 유명 잡지가 우리의 온라인 문화를 처음 대서특필한 점은 어쨌거나 예외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와이어드>는 우리의 정보문화 성장의 동력을 인구 밀집의 장점에 의한 기간망 설치의 비용 절감 효과, 사회 정보 능력을 보강하는 게임방들의 대중화, 값싼 정보 이용료 등 지리·경제적 장점들에서도 찾지만, 다른 무엇보다 한국인의 독특한 국민성과 연관짓고 있다. 한마디로 한데 뭉치고 어울리고 사교적인 국민성이 '상호작용'(interaction)의 인터넷 문화와 궁합이 잘 맞았다 는 평가다. <와이어드>는 그 구체적인 국내 사례로 온라인 게임문화의 발전을 지적한다. 미국 과 일본 등 게임기 콘솔이 지배하는 문화와 달리 한국에서 유독 피씨(PC)가 게임의 직접적 플 랫폼이 된 이유에는, 개별적인 게임 즐기기보다는 온라인을 통해 한데 어울리고 상호 접속하고 픈 개방된 국민성이 깔려있다는 그럴듯한 설명을 덧붙인다. 상호 역할 분담을 통한 서열이 존 재하지만 그 속에서 스스로의 자율적 통제가 이뤄지는 온라인 역할 게임을 통해 상호 소통하면 서 만들어나가는 문화 형식들이 우리 네티즌들간의 새로운 집단 경험을 키운다고 본다. <와이어드>는 이렇듯 우리의 독특한 온라인 문화를 부러워한다. 이른바 '정보 강국'의 설익은 외관에 비해 우리의 '친사회적'(hypersocial) 문화의 본성에 주목한다. 이 잡지의 연륜과 경험상 끊임없이 개인간 상호 소통을 통해 정보를 교환하고 자율성을 키워 스스로의 규칙을 만드는 문 화적 본성이야말로 인터넷의 자유로움과 일치하는 덕목임을 익히 알고 있다. 하지만, 잡지의 특 집기사는 우리의 문화적 특수성을 쫓다보니 정보 현실의 전체적 조망과 평가에서는 실패했다. 우리가 지닌 정보화 수준이 오직 온라인게임을 통해서만 보여지기 때문이다. 한국의 온라인 게 임 인구 팽창, 게임의 전국민 스포츠화, 세계 초유의 온라인 게임 방송중계, 젊은이들의 자유분 방한 게임방 이용 모습 등 파편화된 이미지들로 수도 서울을 게임천국으로 만든다. 냉정하게 우리의 정보 현실을 찬찬히 살펴보기보단 이국의 특수성만을 강조하려 든다. 마치 상호성이나 자유로운 어울림의 온라인 문화가 우리 인터넷 정책과 현실 어디서든 투명하게 관찰될 수 있다 는 오해를 불러오는 것이다. 얼마전 불행하게도 음악파일공유 사이트인 '소리바다'가 법원의 음악복제금지 가처분 결정을 받았다. 기술적으로 소리바다와 같이 인터넷상에서 중앙의 상급 서버나 관리자 없이도 많은 정 보들을 서로 함께 어울려 공유하는 체계를 일대일(P2P) 교환 시스템 구조라 부른다. '소리바다' 도 우리의 온라인 게임문화마냥 친사회적이고 상호 접속을 바라는 문화적 특성아래 성장했다. <와이어드>가 높이 샀던 부분은 바로 소리바다처럼 자유로운 상호성을 강조하는 우리의 온라 인 문화에 맥락이 맞닿아 있다. 그런데, 자유로운 공유와 상호소통의 문화가 한국의 온라인 문 화의 기초라고 추켜세운 이 해외 잡지의 평가에서 그 숨통을 막는 사례들은 전혀 주의를 끌지 못했다. <와이어드>가 적어도 소리바다의 폐쇄와 같은 국내 정보 현실의 후진성을 볼 수 있는 눈을 가졌다면 우리의 온라인 문화에 그저 찬사만을 보내지 않았을 것이다. 가슴을 쓸어내릴 일이지만 잡지가 국내 네티즌들의 친사회적 문화를 막는 빈곤한 우리의 정보 현실 조건을 감잡 았다면, '게임천국'이란 말보단 검열/단속 천국이란 제목으로 바꿔 달 법도 했다는 얘기다. 바다건너 남들의 좋은 평가에 젯밥을 뿌리자는 의도는 절대 없다. 외부인들의 평가를 내 식 으로 고쳐보자는 의도도 아니다. 오히려 그들의 긍정적 평가가 뭔지 근거를 따져 이에 부응하 려는 노력이 중요하다는 뜻이다. 다른 이가 갖지 못한 문화적 장점을 우리가 가졌다면 이를 북 돋지는 못할망정 의도적으로 막는 일은 없어야겠다는 말이다. 한국 사회의 인터넷 발전이 친사 회적 어울림의 문화에서 왔다고 보는 한 외국 잡지의 평가에 한발 앞서 우리 현실이 조금이라 도 이런 견해에 관심을 기울였다면 소리바다의 폐점 휴업은 면했을 일이어서 그렇다. (2002.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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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e세상] 혁신과 창의력의 코드, 0+1

혁신과 창의력의 코드, 0+1 이광석(뉴미디어평론가) 구체적인 작동 원리는 몰라도 디지털이 0과 1의 이진 코드의 조합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 쯤은 이제 누구나 알고 산다. 따져보면 1이 받쳐주기 전에 홀로 선 0은 '무'(nothing)의 숫자 다. 무는 부정과 없음을 지칭하기보다는 '존재'(being)의 근원을 설명하는 열린 수치다. 그래 서 혹자는 "무가 존재를 배회한다"라는 의미심장한 말을 남기기도 했다. 즉 겉으로봐선 말 끔한 듯 보이지만 0에는 꿈틀거리는 생명의 배아들이 언제든 뻗쳐나올 준비를 하고 있다는 얘기다. 없는 듯 해도 항상 뭔가 생성을 위해 응축되어 있는 상태가 0이다. 그래서, 0은 인 간에 의해 비실재하는 것을 현실화할 수 있는 가능태에 해당한다. 디지털의 논리는 바로 0이란 무의 가능성에 1의 현실화 조건을 덧붙여 생명을 불어넣는 일과 같다. 그렇게 보면 0은 1을 만나 구체적 화학작용을 수행하고 가능성을 실제화한다. 1 이 없이는 드러날 수 없는 가능태로서의 0은 항상 상대인 1에 의해 조건화하는 위치에 놓인 다. 이것이 1이 0을 살리는 촉매제인 연유다. 그런데, 0과 1이 그저 만난다고 만사가 형통할까? 현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분명히 보 여줬다. 바람직한 상황은 이 둘이 어느 하나의 힘에 무게를 두지 않으면서도 힘의 형평을 고려하여 자연스럽고 조화롭게 결합할 때다. 그렇지않고 0만 감싸돌고 1을 홀대하면 디지털 현실은 현실과 동떨어진 공상에 불과해진다. 반대로 1의 현실 논리로 0의 상상력을 억압하 면 디지털의 가능성은 출구를 잃는다. 보통 전자는 디지털과 기술 지상론을 유포하는데 반 해, 후자는 현실의 권력을 극대화하는 논리에 기여한다. 1이 분명 0의 현실 조건임에도 불구하고, 0이 자신만의 잘난 논리로 1을 업신여긴다면 또 다른 문제가 발생한다. 0이 우위에 선 디지털 조합은 적어도 극단의 현실 무시론으로 빠진 다. '가상'에 집착하는 디지털 예찬론자들이나 중증의 기술결정론자들이 대체로 이런 조합을 즐긴다. 이들은 디지털 기술은 그만의 고유한 논리가 있기에 현실에 의한 개입과 간섭은 부 질없다거나 구질구질한 현실과 다른 가상의 디지털 낙원이 존재한다고 굳게 믿는 부류들이 다. 이러한 0과 1의 쌍에는 디지털이 초래할 정보 불평등, 소외, 감시 등 구체적 현실의 조 건들을 전혀 볼 수 없다. 이 경우엔 끊임없이 0을 뒤흔들어 1이 그 필수이자 전제 조건임을 상기시키는 노력이 필요하다. 반면에 지금까지 디지털 현실의 삐걱거리는 문제들은 대개 0의 가능성을 심하게 억압하는 1의 월권에서 비롯했다. 현실의 권력은 0을 항상 현실의 반영처럼 만들기를 원했다. 거대한 복제기계인 네트에서 성장하는 자율적인 정보공유의 흐름을 구태의연한 저작법을 가지고 통 제하려는 욕구는 대표적인 1의 권력적 속성을 보여준다. 이렇듯 애초부터 1의 짝인 0의 무 한한 가능성을 원천적으로 봉쇄하며 만들어진 디지털 인공물은 당연 김빠진 맥주처럼 생동 감을 잃는다. 여러 등급으로 나눠 '음란'으로 가두고 '외설'로 쪼아버리는 강제력도 1의 욕심 이 지나쳐서다. 1의 욕심이 지나치면 0이 가질 수 있는 디지털의 무한한 경우의 수들은 차 츰 소멸한다. 신경제의 핵심이라고 얘기하는 '혁신'의 과정은 0의 가능성을 북돋아주는 1에서만 나올 수 있다. 실리콘밸리는 1이 어떻게 0에 긍정적으로 개입하는가를 보여주는 중요한 지표였다. 닷 컴기업들이 기발한 아이디어와 기술로 혁신을 거듭할 수 있었던 것도 1의 탄력성이 바탕이 됐기 때문이다. 1이 구태의연하면 0의 가능성은 쪼그라드는 것이다. 0이 무한한 창의력을 구 체화하려면 1이 앞장서 길을 터줘야 한다. 한편, 0과 1의 조합은 힘의 우위에서 주기를 타기도 한다. 도입기에는 보통 0이 우세하지 만 정착기에는 1에 의한 현실 강제력이 0의 가능성을 좌우하는 경향이 크다. 지금처럼 디지 털 지형의 밑그림이 그려지는 시기에는 1에 의한 0의 억압이 강해지기 마련이고, 이는 0의 가능태를 일그러뜨리는 중요한 동기가 된다. 결국 0이건 1이건 둘 중 어느 하나라도 억눌리 면 문제가 생긴다. 0의 새로움과 1의 현실 조건이 제대로 적절하게 형평성있게 결합돼야 한 다는 얘기다. 어떤 한 유명한 수학자는 인류의 세 가지 혁혁한 '무'의 지표로, 수학에서 0의 사용, 경제 적 등가교환을 위해 고안된 지폐의 출현, 소멸점을 이용한 원근 재현을 꼽은 적이 있다. 인 간에 의해 구성된 상대적이고 인공적인 세계관의 출현을 예고했던 '없음'의 추상 지표들이 다. 지금과 같은 분위기라면 충분히 디지털 0과 1의 쌍이 네번째 추상적 무의 지표로 추가 될 수 있을 듯하다. 무한의 자유로운 디지털 조합에 의해 비실재하는 것을 현실화하는 힘이 바로 0과 1의 새로운 무의 지표를 통해 이뤄지기 때문이다. 문제는 추상의 세가지 지표들이 홀로 그 추상적 표현의 기준이 되는데 반해, 디지털 값은 꼭 쌍으로 존재를 증명하려 한다는 사실이다. 0과 함께 존재하는 1의 조합값에 따라 현실에 나타나는 모습이 달라지는 독특한 특성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물론 앞서 언급한대로 그 배 열이나 경중에 따라 현실에 나타나는 모습이 틀려지는 이치는 0이나 1 가운데 어느 하나의 과다주입에 의해 발생한다. 정확한 값은 딱 떨어지지 않더라도, 0의 자유로운 가능성을 크게 억압하지 않으면서 1의 현실 조건을 습득한 둘의 배합 비율이 적정 수준이라는 것이 핵심이 다. 이것이 디지털 혁신과 창의력의 코드를 제대로 구성하는 법이기도 하다. (아름다운 e세상, 2002.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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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e세상] 신뢰 상실의 인터넷

신뢰 상실의 인터넷 이광석(뉴미디어평론가) 언제부터인가 남 속이는 맛에 쾌재를 부르며 사는 세상이 돼버렸다. 날마다 연예인들이 텔레비전에 나와 벌이는 쇼 프로에서는 서로들 속고 속이며 마냥 즐거워한다. 개인의 사생 활을 엉망으로 만들어버리지만 감쪽같이 속이는 맛에 시청자도 덩달아 쾌락을 느끼는 몰래 카메라, 정말 진짜를 찾기 위해 꾸며진 수많은 가짜들의 배역과 연막들, 방청객과 함께 짜고 상대팀을 속이기위한 온갖 거짓말들. 어디 쇼프로뿐인가. 오늘 검찰에 출두하며 목에 핏대세 우며 모르쇠로 일관하던 수많은 비리 연루자들이 내일이면 들통날 사실을 손바닥으로 하늘 을 가리며 국민들을 속이는 세상이 아니던가. 가만보면 인터넷도 사람 드나드는 곳이라 자연히 남 속이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물론 필 자는 인터넷에서 사기 구걸 행각으로 돈을 모으는 등 남 등치는 신종 파렴치범들에는 별 관 심없다. 그보다는 현실처럼 속고 속이는 문화에 적응해가는 네티즌 문화의 전반적 경향에 대해 우려한다. 요즘 누구든 스팸메일로 골머리를 앓는다. 어떤 이는 스팸메일을 견디다 못해 자신의 메 일계정을 폭파시키는 극단적 방법을 쓴다. 어떻게 알고들 날아오는지 처음에는 수신거부를 일일이 하려고 시도하지만, 점점 늘어나는 광고성 편지들에 나중엔 포기하고 그저 지우는데 급급해져간다. 여기에도 종종 속임수가 등장한다. 마치 아는 사람의 글처럼 스팸메일의 제목 을 일반편지로 둔갑시키거나 수신거부도 형식적으로 만들어 이도 기능이 불가능하게 만들기 일쑤다. 그도 습관이 되면 수신자들 또한 능숙해져 제목만 봐도 대번에 거짓 광고편지임을 눈치채기 마련이다. 인터넷을 서핑하다 페이지 한번 잘못 들어가 끝없이 자동으로 열리는 새 윈도우 창들로 두들겨 맞는 일도 다반사다. 호기심에 접속 속도 불량의 컴퓨터로 포르노 사이트를 열람하 려다 이런 경우가 생기면 십중팔구 시스템이 다운되고 혹 누구라도 지켜본다면 본의아니게 큰 낭패를 맛본다. 겉보기에 멀쩡하다고 의심없이 네트를 거닐다가 뒤통수를 맞거나 누군가 의 보이지않는 촉수에 걸려들기 십상이다. 요즘엔 그저 지뢰밭을 거닐 듯 의심하며 슬금슬 금 다녀야 속지 않고 시간 절약하며 공간이동할 수 있다. 초심자들은 두 번 생각하고 클릭 하는 안전 요령을 인터넷에서 터득해야하는 시대가 왔다. 인터넷의 신뢰 상실의 주범은 주로 경제 영역에서 비롯한다. 교묘한 상술과 여기저기 숨 어서 속일 태세만 취하는 능란한 장사치들의 거짓 사탕발림에 순진한 네티즌들은 대번에 걸 려든다. 이들의 속이는 강도가 높아지고 수단이 교묘해질수록 네티즌들의 마우스는 수시로 멈칫거린다. 여긴 무슨 함정이 없을까, 이 광고 배너를 누르면 창이 몇 개나 연거푸 떠 시스 템을 괴롭힐까, 이 편지 제목은 과연 친구로부터 온 것일까 광고메일일까, 이 회사의 경품잔 치에 응모하는 대신 내 개인 정보만 홀랑 빼주는 것이 아닐까, 검색엔진의 결과에 나온 주 소 결과를 클릭했는데 왜 얄궂게 관계없는 상업 사이트로 자동 연결되는 조화는 뭘까 등등. 주춤거림이 늘고있다는 것은 의심이 많아지고 자신도 모르게 점점 네트에서 약아간다는 얘 기다. 이렇게 속는 횟수가 늘고 속지 않으려 애쓰다 보면 스스로의 판단에서도 진실과 거짓 의 경계가 흐려지고, 종국에는 진실의 가치마저 등급 보류된다. 나중엔 진실도 거짓처럼, 거 짓도 진실처럼 헷갈리는 것이다. 이렇듯 최근 네트에 불순한 속임의 문화가 번성하는 반면, 우리에게 선의의 속임수가 인 터넷 문화 발전의 촉매제 구실을 하기도 했다. 인터넷은 현실보다 속임이 자유롭다. 네트는 개개인에게 자신의 외모, 신분, 성, 나이 등을 덮어 감춘 채 자유롭게 상대와 커뮤니케이션 을 할 수 있는 자유를 부여한다. 이런 속임은 사회를 건강하게 만든다. 한 사회가 약자에게 주는 불평등의 관습과 제약을 네트의 특성을 이용해 타인에게 속일 수 있고 풀 수 있다면 이는 분명 그 사회에 긍정적인 배설 효과를 주기 때문이다. 또한 인터넷은 진실과 거짓의 경계를 흐리면서 동시에 진실의 자리를 대신했던 권위를 무너뜨린다. 이 둘의 경계짓기로 기득권을 누렸던 권위의 존재 가치가 점차 힘을 잃고, 하잘 것 없이 여기던 것들의 명예를 회복시킴으로써 정보간 평등의 관계를 회복시킨다. 결국 속임에 있어 선의와 불순의 경계는 현실이나 온라인 모두 타인을 속이려는 목적과 이유에서 갈라진다. 당연한 얘기지만, 어떤 목적과 근거를 갖고 속이려드냐에 따라 약이 되 거나 독이 된다. 쉴새없이 네티즌들을 놀려먹으려는 업자들의 얄팍한 상술에서 나온 온갖 속임수들은 네트에 독이 되는 경우다. 약이 되는 네트의 기술적 장점들을 독으로 용도 변경 하는 몹쓸 짓이 늘수록 네트에서 인간끼리의 신뢰지수 또한 현실만큼 자연 감소한다. 정감 어린 비격식의 전자우편이 이젠 정말 짜증스러운 통신수단으로 느껴진다면 네트의 미래가 그만큼 팍팍해질 가능성이 더 커진다. 현실적으로 스팸메일을 제거하고 네트에 활개치는 사기꾼을 단속하려는 강제력도 중요하 지만, 근원적으로 지금같은 네트의 신뢰 상실은 우리의 발디딘 현실에 기댄바 크다. 글머리 에 언급한 것처럼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모든 영역에서 창궐하는 거짓 즐기기와 속이기가 인기를 얻어 갈수록 불순한 현실이 인터넷의 초창기 순수했던 측면을 쉽게 감염시킬 확률이 높다. 이것이 정직한 인터넷의 미래란 현실의 변화없이는 막연하고 갑갑할 수밖에 없는 이 유이며, 세계 최장의 인터넷 이용시간과 초고속 인터넷 종주국이란 보기좋은 때깔에 드리운 불안한 그늘이다. (아름다운 e세상, 2002.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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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e세상] 주눅든 '무어의 법칙' 되살리기

주눅든 '무어의 법칙' 되살리기 이광석 (뉴미디어 평론가) 요즘 내게 새로운 병이 또 슬슬 도진다. 5, 60년대 클래식 엘피(LP) 수집에 김이 빠지자마자, 다큐멘터리 비디오를 구하는데 재미를 붙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일반 시중에서 살 수 있는 비디오 가격대와 얼추 비슷한 것들을 인터넷에서 하나둘 구입했지만, 주머니 사정이 한계에 봉 착했다. 먼지쓰고 발품 팔며 잘만 사면 거의 공짜인 엘피 가격에 비한다면 다큐 비디오는 내겐 가히 금값이나 다름없었다. 다큐라고 하면 개별 구입보다는 도서관 등 그 구매처가 제한되어있 고, 시장성과 무관하여 가격대 또한 제작물의 재투자를 따져 공부하는 학생 주머니 사정으로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높았던 터였다. 결국 실속있게 내가 찾아야했던 곳은 대학 도서관 영상 자료실이었다. 자료실의 다큐 비디오들의 복사본을 만들면서 일상 속에 스며든 저작권의 위세를 톡톡히 배 우게 됐다. 개인의 '정당한 사용'(fair use)이 자주 저작권이 쳐놓은 기술적 현실에 부딪혀 튕겨 나오는 느낌 말이다. 처음에 봉착한 경험은 도서관에서 대출 가능한 다큐를 들고 집에 가져와 녹화했을 때의 당황감이었다. 돈 들여 구입한 새 것과 집에 묵은 비디오 리코더를 서로 연결해 놓고 암만 녹화를 해도 화면이 영 엉망으로 일그러졌다. 가전업체의 기술자에게 까닭을 물었더 니, 불과 몇 해전에만 해도 없었던 복제 방지 장치들이 요즘 리코더들에는 죄다 설치되어 있다 고 설명한다. 비디오 리코더 기계 자체에도 리코딩 기능을 약화시키는 제품들이 요즘 추세이므 로, 기왕에 구입하려면 좀 오래된 중고를 찾아보라는 친절한 충고도 덧붙인다. 비디오 리코더만 이 아니었다. 최신의 다큐 가운데는 아예 복제방지를 해놓은 특수 테이프가 간혹 눈에 띄었다. 헐리웃에 반대하여 비디오 리코더의 녹화 기능이 인정된 지 이미 25년이 지난 지금, 눈에 보이 지않는 신종의 기술적 제약들이 다시 고개를 쳐들고 있는 것이다. 장차 비디오 리코더는 허울 뿐이고 그저 플레이어로만 기능하는 시대가 올 수도 있겠다 싶다. 아날로그 기술에 미치는 이같은 저작권의 공세만으로도, 디지털 매체나 기계에 미치는 그 힘 을 가히 짐작하고도 남을 만하다. 이제 저작권은 법조문과 함께, 이를 보장하는 기술적 수단 자 체의 코드 속으로 기어든다. 알려진대로 '기술적 코드'의 조작이 한결 법보다 효과적인 저작권 의 응원군이 되가고 있다. 그래서, 컴퓨터에서 전혀 재생 불가능한 반면 오디오 전용 씨디(CD) 플레이어에서만 들을 수 있는 음악들이 등장한다. 냅스터나 소리바다의 일대일(P2P) 기술을 이 용한 파일공유에 대적해 불구화된 엠피3도 나타난다. 이들은 일정 시간이 지나거나 이용 횟수 가 만료되면 불능이 되는 유사품들이다. 올들어 미국내 전체 4할에 육박하는 디브이디(DVD) 대여 시장이 가히 비디오 시장을 집어삼키려는 형국이지만, 이용자들이 비디오만큼이나 디브이 디를 가지고 할 수 있는 것은 아직까지 전혀 없다. 지난 60여년간 11배나 강력해졌다는 저작법 과 동행하는 기술적 코드가 정보 내용의 자유로운 흐름과 이용을 막는 방벽으로 등장한다. 하지만, 사태가 꼭 절망으로 치닫는 것만도 아니다. 이 말은 저작권에 대항한 인터넷 이용자 들의 자유로운 정보 공유 정신이 곧 희망임을 의도하는 역설이 아니다. 저작권 옹호론자와 능 동적 이용자의 전선으로 저작권 지형을 축소하기에는 현실이 그리 밋밋하지 않다. 새롭게 부각 되는 대칭점은 최근 동반에서 적대로 돌아서고 있는 헐리웃과 실리콘밸리의 관계에서 발견된 다. 저작권 옹호 진영 내부에 균열이 생기고 있는 것이다. 컨텐츠 보호를 극대화하려는 헐리웃 의 요구에 지친 컴퓨터, 전자업계는 이제부터라도 기술 혁신의 원칙을 충실히 따르려 한다. 과 도한 저작권의 요구에 밀리다간 기술 발전과 시장 확보의 폭넓은 기회가 막힐 수 있다는 실리 콘밸리 내부의 상황 판단이 작용했다. 이제까지 음성이든 영상이든 레코딩이 가능한 새로운 실리콘밸리 기술들은 헐리웃의 검열 대 상이었다. 헐리웃의 입장에서 보면 다음과 같은 한 엠피3 플레이어의 광고 문구, "내려받아 편 집해 구워봐"(Rip. Mix. Burn.)란 말은 저작물의 '해적질'을 부추기는 혁명적 수사와 같다. 18개 월마다 벌어지는 기술 혁신의 '무어의 법칙'은 속내를 들여다보면 헐리웃의 저작권에 사사건건 제약당했던 실리콘밸리의 기술발전의 한계 법칙이었던 것이다. 어쨌거나 실리콘밸리가 헐리웃 과 틀어지며 이용자편에 섰던 것은 시장 예측에 근거한 합리적 행동에 불과하다. 각종 기술에 과도한 저작권 장치들을 도입할수록 이용자들의 소비 심리가 크게 위축되며, 이들의 정당한 이 용이 저작권을 해치기보다 소비의 기폭제로 기능한다는 점을 실리콘밸리의 정서로 충분히 간파 했던 것이다. 물론 이들간의 갈등이 파경을 예고하지도 본질적이지도 않다. 서로들 그 의존적 관계가 확인 되면 저작권의 기술적 코드들이 헐리웃의 입맛에 맞게 슬며시 들어앉은 채 신상품 진열대에 놓 일 확률도 크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리콘밸리마저 헐리웃에 대해 쓴소리를 내뱉거 나 자주 충돌을 일으키는 것은 확실히 심각한 수위에 이른 저작권의 남용에 제동이 걸리고 있 음을 반증한다. 이는 저작권에 의해 규정된 왜곡된 기술 발전보다는 오히려 능동적 이용을 보 장하는 기술적 대안들이 상품 시장에 강한 동기부여를 하고 있다는 점을 인정하는 대목이다. 사실이 진정 그렇다면, 개인적으로는 다큐 복사본을 만들기 위해 부딪혔던 여러 기술적 제약들 은 단지 헐리웃의 입김이 너무 커 실리콘밸리가 잠시 주눅든 때 개발된 기술 발전의 부정적 효 과에 불과했었다고 믿고 싶다. (아름다운 e세상, 2002.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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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e세상] 지식정보사회의 기본값

지식정보사회의 기본값 이광석(뉴미디어 평론가) 지난해말 세간의 반향을 일으켰던 한 방송사의 '범국민 독서캠페인' 프로그램 내용이 아직 도 내 뇌리에 또렷이 남아있다. 일본이나 다른 나라에 비해 한국인의 독서량이 턱없이 부족 하다는 당시 진행자의 숫자 비교가 그리 큰 파격적 사실은 못됐다. 이미 여러차례 언론을 통해 국내 독서 수준과 관련 각종 문화지표들의 부끄러운 수치를 마주하면서 이미 단련된 터였기 때문이다. 문득 그 때 방송을 보면서 들었던 상념은 한국 사회의 문화 인프라가 얼 마나 부실했으면 방송사가 발벗고 나서 책을 읽자고 계몽 운동을 펼칠까하는 것이었다. 방 송 중 흥미로웠던 대목은 독서 장원을 뽑아 사은품으로 책꽂이에 진열된 책을 제한된 시간 에 가슴 한아름 들어 나르는 장면이었다. 한 대형 출판사가 기증한 광고용 책자들을 땀흘리 며 이고 가는 한 '책벌레' 중학생의 모습에서 우리의 미래가 밝다고 누군가 흐뭇해했다면 그건 완전한 착각이다. 왜냐면 그 장면은 학생과 시청자들 모두에게 한 개인이 죽을 때까지 다섯 수레의 책을 읽는 가치에 비해 그만한 양의 책을 여럿이 두루 공유할 수 있는 사회 조 건이 더 소중하다는 사실을 깨우쳐주지 않기 때문이다. 그날 방송에는 왜 우리의 독서량이 이웃나라 일본 등에 뒤쳐지는지에 대한 분석이 없었 다. 독서를 할 수 있는 기반을 못갖춘 현실에서 국민에게 한 권의 책을 사서 읽으라고 강요 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우리나라 서민들의 빠듯한 생활고에 책을 사다 보는 사람은 그나 마 여유가 있는 축이다. '독서 후진국'이란 멍에의 원인을 따지려면 당연 제일 먼저 국민을 위한 공공 교육 서비스 기관인 도서관 실태를 따져봐야 했다. 입사와 고시 준비로 메워진 대학 도서관과 지역 국공립 도서관들의 현실에서 독서의 장래란 없다. 책을 구입할 여건이 안되는 현실이 지배적이라면 이에 대한 보다 폭넓은 접근권이라도 보장을 해야 마땅하다. 하지만, 한국의 도서관들은 사설 독서실과 진배없다. 지역 주민들이 쉽게 이용할 수 있는 대 학 도서관은 어디도 없다. 그나마 구비된 책들을 이용하려해도 학생이 아니라면 각종 제한 에 걸린다. 이것이 21세기 인터넷 강국이 강조하는 지식 기반 사회의 그늘진 면모다. 한 나라의 도서관 실태를 보면 지식 활용 능력의 답이 나온다. 필자가 인구 칠십만명 정 도의 텍사스주 오스틴에서 몇 년 살면서 가장 부러웠던 사실은 지역 공공 도서관의 놀랄만 한 개방성이다. 지역 주민들이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대학 도서관과, 스물두어곳의 지역 공공 도서관들이 특히 빈곤 지역을 중심으로 곳곳에서 정보와 지식의 자유로운 접근을 보장 하고 있다. 외부에서 인터넷을 통한 공공 도서관 접속, 독서 프로그램, 도서관내 컴퓨터 이 용 등이 신분에 상관없이 누구에게나 자유롭다. 신분 증명서만 있으면 국제 여행객도 도서 나 각종 시청각 자료 대출이 가능하다. 설령 길거리 노숙자들이 도서관에 드나들며 책을 읽 고 웹 서핑을 해도 어느 누구도 이들을 제한하지 않는다. 그만큼 도서관은 이용자들의 출입 문턱을 낮춘다. 곳곳에 산재한 공공 도서관들은 지역민들이 정보에 접근할 수 있는 인터넷상의 서버 (server)처럼 기능한다. 지역민들간에는 어떠한 차별도 없다. 서버는 항시 열려 있다. 평등한 조건하에서 원하는 자료를 요청할 때 항시 서버는 응답한다. 물론 도서관들간 네트워킹은 이용자들이 찾으려는 자료를 구하는데 최적의 수단이다. 도서관 규모는 작지만 산재한 공공 도서관들이 인터넷을 통해 책, 오디오, 비디오 등의 대출과 기간 연장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는데는 바로 도서관내의 데이터베이스 구축과 외부와의 네트워크 연결에 따른 성과에 있 다. 누구나 최대한 '공개되고 열린 자원'(open resource)에 접근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하는 데 그 운영의 묘가 있는 것이다. 우리랑 생활 형편이 다른 선진국의 사례를 들이대며 그에 규격을 맞추자며 얼빠진 주장할 마음은 추호도 없다. 그저 신간서적 하나 여유있게 읽어볼 자리도 마련않는 대형서점들의 장삿속에 녹아나는 우리의 독서 현실이 서글퍼 그렇다. 게다가 있는 도서관도 제 기능을 못 하고 절뚝거리는데, 오히려 책 안읽는 시민들의 '무식함'을 질책하는 언론의 방자함에 실소 가 나와 그렇다. 학생들과 지역 주민들의 지식의 자원이자 정보화의 동맥으로 기능해야할 도서관들이 높은 담벼락을 둘러쳐 외부인을 막고 캠퍼스내 고시촌으로 전락하는 한심한 풍 경이 한국의 특색있는 명소처럼 보여선 곤란하다. 현실처럼 인터넷의 거대한 사고의 도관(conduit)이자 고급 자원의 핵심으로 의당 도서관 의 집적된 데이터베이스를 꼽을 수 있다. 현실과 네트 모두에서 도서관에 축적된 지식은 외 부에 공개될수록 한 국가의 사회 복지 수준은 증가한다. 반면 관리의 효율성과 이윤 논리를 내세워 경계를 세울수록 도서관은 다수의 발걸음을 막고 비경쟁적 공공 자원의 활용을 크게 떨어뜨린다. 일반 소비재와 달리 나눌수록 커져가는 것이 지식이고, 이를 제대로 분배해야 할 곳이 공공 도서관이다. 지식에 대한 불평등 해소와 사회적 공유의 첫걸음은 가난한 이들 도 편히 책을 대여하고, 인터넷을 통해 여러 정보에 접근할 수 있는 사회, 문화 기반을 조성 하는 것이다. 독서 진흥은 도서관의 이런 공개된 환경에서만 이뤄진다. 있는 것들의 링크와 확장이란 개방성이 인터넷의 거대한 힘이자 정보공유의 촉매가 된 것처럼 존재하는 도서관 자산들의 활용과 평등한 접근과 이용이 소위 지식정보사회를 일구는 기본 토양으로 자리해 야 마땅하다. (아름다운 e세상, 2002.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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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e세상] 퓨전의 가치

퓨전의 가치 이광석(뉴미디어 평론가) 요즘 집안 꼴이 말이 아니다. 한국의 모대학에서 디지털 관련 글들로 이름이 잘 알려진 한 선배의 짐 때문이다. 그 이는 이역만리 있는 내게 6,70년대 잡동사니 음악장치들의 보관 을 부탁했다. 첨단을 달리는 그 선배가 요즘은 음악에 심취한 까닭이다. 릴덱(Reel Deck)이 란 무식한 아날로그 녹음장치가 벌써 여러 대 내 서재방에 쌓여있다. 그만이 아니다. 다 썩 은 고전 음반이 수백장이요, 스피커들, 오디오장치 등이 집 구석구석에 자리잡고 있다. 그가 옥션 사이트인 이베이(ebay)에서 경매로 사들인 것들인데, 국제 우송이 불가능해 내가 중매 처가 됐다. 이 처치곤란한 유물들은 고이 보관하다 귀국 때 그 선배에게 싸짊어지고 갈 요 량이다. 한동안은 이것들을 쳐다보기만해도 짜증이 났다. 그런데, 이 고물들이 슬슬 나를 꼬득이기 시작했다. 언제부터인가 발 끊었던 이베이에 들어가 이 고물들을 운동시킬 것을 찾다 70년 대 독일에서 제작된 듀얼(Dual)사의 턴테이블을 경매로 구입하고, 바늘(stylus)을 사러 온 동네를 헤매고, 다 썩어가는 엘피들(LPs)을 먼지 뒤집어써가며 혹은 점잖게 경매를 통해 사 모으기 시작했다. 선배의 고물들이 알게모르게 자극제가 된 모양이다. 사실 나는 최신의 새 것이라면 사죽을 못쓰는 축에 낀다. 타지에서 공부하는 형편에도 불 구하고, 일찌감치 큰맘먹고 누구보다 먼저 음향 조절용 리시버가 장착되고 스피커가 다섯인 소위 홈띠어터(안방극장용) 디브이(DVD) 플레이어를 구입했던 경우도 그렇다. 새로운 기술 에 대한 부질없는 구매 욕망이 한몫했다. 그런 내가 시덥잖은 고물들을 껴안을 복고를 생각 이나 했겠는가. 하나둘 고물들을 이용하면서 재미난 일이 벌어졌다. 경매로 구입한 턴테이블이 디브이디 오디오를 거부했다. 아니다. 디브이디가 그 고물을 거부했다고 표현하는 것이 옳을 듯하다. 세월의 간극이 워낙 커 신기술이 고물을 알아보지 못하는 현상이 벌어졌다. 턴테이블의 잭 을 암만 꽂아놓고 엘피를 걸어도 소리가 불통이었다. 고민 끝에 80년대초쯤 만들어진 구식 오디오장치를 중간 매개장치로 놓고 턴테이블과 디브이디 리시버를 서로 연결해봤더니 이게 웬일인가. 깜쪽같이 원음을 재생했다. 신구간 갈등을 중간 세대의 기술이 막는다? 어찌되었 거나 결과는 좋았다. 이런 식으로 안방극장용 디브이 플레이어의 좌우 스피커는 음량좋은 70년대 소리통으로 대체되고, 오디오장치와 연결된 턴테이블과 함께 작동하고 있다. 내친 김 에 구닥다리의 턴테이블 바늘도 디제이 믹스용 최신 사양의 것으로 바꿨다. 인터넷에서 엠피3 음악을 교환해 내려받아 취향대로 듣는 첨단 현실에도 불구하고, 인터 넷 이베이를 통해 흘러간 엘피를 경매로 사들여 애써 디지털로 전환해 듣는 우리네 일상을 어떻게 봐야 하나. 과거와 미래의 혼재와 공존, 한마디로 '퓨전'의 삶을 살고 있는 것이 아닐 까. 개인적으로 퓨전의 재미는 여러 가지로 체험되었다. 전자결제로 엘피를 구입하면서, 옥 션 사이트에서는 거래자가 평해 놓은 내 신용 평가에 힘쓴다. 우편으로 배달된 중고 엘피의 튀기는 잡음은 아연 먼 옛날의 향수를 느끼게 만든다. 비용 지불에 대한 만족을 느낄만하다. 턴테이블에서 돌아가는 엘피와 바늘의 앙상블은 씨디의 픽셀을 읽는 헤드의 맛과 다른 체험 을 준다. 이제보니 이런 퓨전은 내 일상에서 아주 흔하게 발견된다. 맞춤형 '데일리미(daily-me)'로 매일 아침 전자우편으로 날아드는 몇몇 일간신문의 전자판에도 불구, 집에 배달되는 신문의 가짓수가 어느덧 셋으로 늘었다. 랩탑 컴퓨터에 모든 문서작성을 의존하면서도 여전히 하루 일기는 어렵사리 구한 '로얄'(Royal)제 타자기로 투닥거린다. 학술 논문들의 대부분은 학교 데이터베이스를 활용해 집에서 출력하기도 하지만, 아예 정기 구독이나 복사를 택하기도 한 다. 내 일상에서 과거의 매체들은 생명을 다함이 없이 현대의 기술과 조화를 이루면서 자신 의 값을 적절히 수행한다. 그러고보면 현대 인간의 신체도 벌써부터 '퓨전'인 셈이다. '사이보그 선언문'을 작성한 페 미니스트 도너 해러웨이(Donna Haraway)에 따르면, 우리 인간 모두는 '사이보그'다. 사이보 그는 구시대의 신체와 새로운 기계로 구성돼 있다. 신체의 연장물들, 의족, 의수, 의치, 안경, 보청기, 인공심장 등은 인간을 퓨전화하는 것들이다. 이미 기계가 인간의 몸에 들어오고, 그 것이 우리의 현실을 구성한다면, '퓨전'이란 하등 새로울 것 없는 얘깃거리다. 그럼에도 이제 까지 '새로움'이 오래된 것들을 너무 업신여기고 대체될 것을 강요했던 것이 아니었나 싶다. 각종 '새로움'과 '혁명'의 수사와 업데이트, 버전업의 논리가 지나치게 현실을 지배해왔다. 미 래의 열광에 과거의 가치는 주눅든 현실이었다. 과거의 것들이 새로움과 어떻게 공생하는지, 어떻게 이 둘이 또 다른 새로움의 유전학적 전이로 향하는지 등에 대해 너무 인색해온 것이 사실이다. 사이보그의 예에서도, 인간의 몸을 빌리지않은 새로움의 기계란 그저 한계로 가득 찬 로봇에 불과하다는 예상을 해본다면, 낡고 빛바랜 것들의 가치는 전혀 사라질 것들이 아 니다. 요즘 나는 수동식 타자기의 자판을 컴퓨터가 인식할 수 있는 모델에 대해 생각해 본다. 타자기의 활판이 부딪혀 생긴 아날로그의 파열음을 키보드마냥 컴퓨터의 메인보드가 인식하 는 인터페이스를 꿈꾼다. 이런 미래야말로 우리 모두에게 친근하게 다가올 'e세상'이 아닐 까. 요사이 타지 떨어진 손자 그리운 마음에 주름진 손으로 전자우편을 보내는 법을 배우신 다고 애쓰는 노친네 생각에 이르면, 퓨전의 가치가 더욱 아쉬운 오늘이다. (아름다운 e세상, 2002.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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